퀴즈쇼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요즘도 가끔 퀴즈 프로그램을 볼 때가 있다. 막상 나 같은 사람이 이 소설에 나오는 이민수만큼이나 퀴즈쇼에 나가면 버벅거리고 아는 문제도 틀리고 그럴텐데도 한 두 문제 맞춘 것 가지고 나도 한번 퀴즈 프로그램에 나가보면 어떨까를 상상해 보곤한다. 나가면 우승은 못할지라도 못해도 본선진출에 재수 좋으면 등위 안엔 들지 않을까? 요즘엔 상금도 짭짤하다 못해, 저걸 정말 다 준단 말야? 하고 의심할 정도로 많이 주던데. 물론 그것을 다  맞춰야 한다는 전제있긴 하지만. 못 마쳐도 반타작을 할 수 있으니 그또한 나쁘지 않다. 그래도 난 낭패를 볼 확률이 좀 많아 보인다. 왜냐하면 퀴즈하면 순발력인데, 난 아는 문제도 부저를 누르는 속도가 느려서 떨어질 것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김영하의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소설로는 이 책이 처음이지 않은가 싶다. 그만큼 김영하와 나는 인연이 없었던 것일까? 그래도 읽으면서, 아, 김영하가 소설을 이렇게 쓰는구나. 꽤 감탄하며 읽었다. 그 느낌은 뭐랄까? 상당히 도회적이면서도, 지적이고, 회색톤이며, 한땀 한땀 뜨게질 하듯 촘촘하게 쓴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가 이야기 중간중간에 소개해 놓은 소설들만 해도 몇십 권은 돼 보이는데, 그것을 나름 정교하게 배치해 놓고 있다. 게다가 이민수가 갔다던 일명 '퀴즈 회사'라는 곳도 꽤나 사실적으로 묘사해 놓고 있어서 정말 그런 곳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소설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그런 지엽적인 것은 아닐터. 그가 얼마나 20대의 방황하는 청춘을 오늘 날에 맞게 그려놓고 있느냐일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작가는 상당히 충실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하는 바, 독자인 나는 대체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책에 나오는 20대 후반의 자조섞인 목소리를 들어 보자.

   
  우리는 단군 이래 가장 많이 공부하고, 제일 똑똑하고, 외국어에도 능통하고, 첨단 전자제품도 레고블록 만지듯 다루는 세대야. 안 그래? 거의 모두 대학을 나왔고 토익 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자막 없이도 헐리우드 액션영화 정도는 볼 수 있고 타이핑도 분당 삼백 타는 우습고 편균 신장도 크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고,......독서량도 우리 윗세대에 비하면 엄청나게 많아. 우리 부모 세대는 그중에 단 하나만 잘해도, 아니 비슷하게 하기만 해도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었어.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다 놀고 있는 거야? 왜 모두 실업자인 거야?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한 거지?    
   

 작가 김영하는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이십대에 대해서 생각했다고 했다. 사실 나는 이미 오래 전에 20대를 건너왔고, 나의 20대랑 요즘의 20대는 전혀 다르며, 20대를 건너왔기 때문에 요즘의 20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도 세대의 변화라는 갭은 역시 뛰어넘지를 못하고 있었을까? 아니면 지금의 내 나이도 더 버겁다고 비중을 실어서일까? 그닥 와 닿지 않는 면도 없지 않다. 그냥, 그래, 너희들도 힘들지? 앞으로 더 살아 봐라. 삶의 무게가 더 무거우면 무겁지 새털같이 가벼울 줄 아니? 하며 측은지심이 들어가기도 한다.

사실 이 소설이 세태를 표방하는 만큼 각 개인은 시대의 불운아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상처받고, 소외되고, 뭔가 병든 것 같은 사람들. 그것을 자위하고 자조하는 것이 우리들의 본분은 아닐까 의심이 갈 정도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영웅을 기다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버릴 수 없는 그 지긋지긋한 희망 때문에라도 말이다. 그래도 우린 이민수를 시대의 희생양으로 봐야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변인으로 봐야하는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하지만 픽션이든 논픽션이든 누군가는 이 세태를 말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무엇을 빗대어서라도 말이다. 그러고 보면 김영하는 오늘의 세태를 자신의 글에 충실히 반영했던 충실한 기록자는 아닐까?

우리는 언제부턴가 희망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해야될 싯점에서도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없고, 어두운 전망과 서로의 엇갈린 진술속에 진창을 딩군다. 희망을 말하지 않게 된 것이 정말 희망이 없어서 그런 건지,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그렇게 되어버린 건지 그것은 알 길이없다. 이 전망없는 세대가 이 소설속에서도 그대로 묻어나와 조금은 마음이 씁쓸해 진다.

조금 다른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공교롭게도 이번에 나의 조카가 대입수학능력고사를 봤다. 나의 조카는 저주받은 트라이앵글 세대라는 89년 생이다. 트라이앵글은 내신, 논술, 수능을 지칭한다고 한다. 얘네들이 취직을 해야하는 6,7년 후에는 누가 또 어떤 20대를 주인공으로 한 세태소설을 쓸까? 갑자기 그것이 궁금해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노아 2007-11-25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영하 소설은 이 책이 처음인데 이 사람은 이렇게 소설을 쓰는구나...하며 감탄했어요. 대단히 재밌게 보았는데도 이상하게도 별점은 저도 넷을 주었답니다. 왜 그랬을까요^^;;

stella.K 2007-11-26 10:1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요. 다섯 주면 독자로써 너무 싸 보인다는, 뭐 그런 심리도 있었을 것 같아요. 네개 주면서 다시한번 이 별점 자체에 대한 묘한 불만이 생기더라구요. 없으면 허전하고, 주자니 껄끄럽고. 이젠 필요악쯤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박완서 선생의 글을 접한 때가 10대 말에서 20대 초중반이었을 것이다. 그가 내놓은 책마다 족족이 다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작가의 작품을 꽤 꾸준히 읽어냈던 몇 안되는 작가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박완서 선생이다.

그때 그는 40대에서 50대의 나이었을 것이고, 그의 소설에 나온 주인공들도 꼭 선생만한 나이의 여성들이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나는 그의 소설을, 산문집을 잊고 살았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한 작가에 대해서 어느만치 알겠다 싶으면 다른 작가 또는 다른 책으로 관심을 돌리는 나의 콩 뛰고 팥 뛰는 종잡을 수 없는 마음 때문이었을 게다. 그리고 이렇게 한 20년쯤의 세월이 흘러 그의 소설을 다시 접하고 보니, 그는 여전히 당신만한 나이의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사람들에 대해, 삶에 얘기하고 있다. 20년 전에는 중년의 여성이었겠지만, 지금은 노년이다. 그렇게 꼭 자기만한 나이의 주인공들을 등장시켜 소설을 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물론 젊을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노년이 될 때까지 글을 쓰는 작가들은 꽤 있다. 그런 작가들은 더 노련해지고, 더 풍성한 글을 쓴다. 하지만 주인공을 딱 자기만하게 하고, 그 나이의 주인공의 싯점에서 쓰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내가 보기엔 그리 많이 않아 보인다. 이 책의 해설을 맡은 김병익 씨도 우리나라엔 아동문학도 있고, 청소년문학도 있지만, 유독 노년문학의 부재를 지적했다. 그것의 이유로는, 전쟁과 가난으로 작가들이 장수하지 못했거나 조로하기 때문이라고 했다.(285p) 그렇다면 노년문학은 어떤 것일까? 수록작 <대범한 밥상>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너 딴 반찬도 먹지 그 군둥내 나는 짠지 국물은 다 마셔버리냐? 나중에 물키려고."

"글쎄 나도 모르게 그 군둥내가 비위가 땡기네. 이거 어떻게 만든거니?"

"만들고 말고가 어딨어? 무를 통째로 왕소금에 푹 절인거지."

"그건 아는데 짠맛 말고 군둥내가 꼭 요만큼만 나게 하는 레시피 말야."

"레시피 좋아하네. 그거 작년 것도 아니고 아마 재작년 걸 거야. 김장때가 쉬 돌아올 것 같아서 뒷마당에 묻어둔 항아리를 살피다가 밑바닥에 골마지를 푹 뒤집어쓰고 있는 무가 서너 개 남았기에 버리기도 뭐해서 씻어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가 손님 맞을 준비한답시고 나박나박 예쁘게 썰다가 맛을 보니까 어찌나 소탠지 몇 번 물에 울궈내고 나서 다시 물 부어놨던 거야. 가미한 건 초 몇 방울하고 실파 썬 것하고 고춧가루 솔솔 뿌린 것밖에 없어." (220-221p)

참 평범하지만 노년문학 아니 박완서 문학을 이토록 잘 표현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짠지엔 양념과 재료의 맛을 좌우하는 황금 비율의 레시피가 없다. 오로지 왕소금과 원래 무가 가지고 있는 맛의 성질이 오랜 시간을 두고 하얀 골마지를 뒤집어 써야 나온다. 하지만 쉽게 먹을 수도 없다. 쓰도록 짜서 몇 번을 물에 울궈내야 겨우 먹을 수가 있다. 나도 몇번 먹어 본 적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만큼 그렇게 맛 있는 음식이 아니다. 그런데 이 노년의 여인은 그 군둥내 나는 국물을 맛있다고 들이킨다. 과연 그것은 그 나이만이 느낄 수 있는 인생이 주는 맛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표제작 <친절한 복희씨>를 비롯한 9편 모두는 겉으로 드러난 생의 이면을 저자 특유의 문체로 재치있고 웅숭깊게 드러내고 있다. 특별한 멋도, 기교도 없다. 그냥 예전에 나의 외할머니가 어디선가 듣던 누군가의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옮겨 들려주는데 그것이 마냥 재미있어 또 듣고 싶어했던 것처럼, 선생의 문학은 나에겐 꼭 그런 느낌이다. 그야말로 한 작품, 한 작품 읽을 때마다 가슴속 깊이 뭔가가 켜켜히 내려앉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이 책은 내가 한동안 어떠한 일로 기분이 꿀꿀해 했을 때, 위로 받으라고 어느 착한 알라디너 분이 선물해 주신 것이다. 그 분의 마음이 하도 따뜻하게 느껴져 나는 잠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리고 그분 때문에 다시 펼쳐 든 박완서 선생의 이 책은 참으로 나의 마음을 보듬어 안아 주기에 충분했다.

어떠한 꾸밈도  에누리도 없는 선생 특유의 문체는, 마치 어떠한 기교도 없이 애조띤 정서만을 목소리에 담아 노래 부르기로 유명한 가수 이미자 씨의 음성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살잔 소리, 낭탁, 우세스럽다 같은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선생만의 독특한 어휘는 김병익의 말대로, 눈치로 받아 들이게끔 넉넉한 마음을 만들어 준다. 게다가 문장부호 또는 줄바꿔 쓰기 등도 여간해서 잘 쓰지 않는 선생의 문장에선, 오히려 이것을 너무 심하다 싶으리만큼 쓰고 있는 겉멋든 젊은 세대의 글쓰기 방식에 잔잔한 하고도 도도한 도전을 주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이제 나는 선생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던 젊은 날을 관통하여, 선생이 처음 글을 쓰고 문필을 날렸던 그 나이 언저리에 도달해 있다. 나이 먹어서 좋은 건 그다지 없어 보이는데, 한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젊을 때 보다 덜 방황하고 덜 실수한다는 거다. 젊을 땐 그게 그렇게 하고 싶고, 좋아 보이는 것들이 때를 지나놓고 보면 그것도 그다지 좋은 것마는 아니라는 것을 아는 시기가 바로 지금의 내 나이인 것 같다. 그래서 웬만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모르겠는게 인생이고, 꿀꿀한 게 인생이다.

박완서 선생은 서문에서,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고 쓰셨다. 나는 언제쯤이면 이 꿀꿀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게 될까? 선생의 소설 속에 나오는 주인공의 나이쯤이 되면 진짜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게 될까? 그렇다면 시시때때로 섣불리 이게 다일거라는 생각은 하지 말고, 조금 더 살아봐야 할 것 같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달래 2007-11-13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그렇군요. ^^
지난번 산문집에서 좀 노인스런 고집이 느껴져서 당장은 조금 망설이고 있는데,
결국엔 읽을 것 같아요. ^^;;
좋은 리뷰, 잘 읽었어요. ^^

stella.K 2007-11-13 18:09   좋아요 0 | URL
그럼 추천도 좀 해 주시지 안쿠...>.<;;

프레이야 2007-11-13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 이리 후하게도 다섯개를 주신 거 보면 분명 읽어야되는 책
맞죠? ㅎㅎ

stella.K 2007-11-14 10:38   좋아요 0 | URL
그럼요. 박완서 선생 글을 읽으면 정말 쓰고 싶어져요. 근데 나름 심혈을 기울여 리뷰 썼는데, 댓글도 추천도 그리 많지 않군요. 저는 왜 이럴까요? 흐흑!

프레이야 2007-11-15 08:5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ㅎㅎ 토닥토닥~ 심혈을 기울여 쓰는데 말이에요^^
클릭 한 번 더 하면 되는뎅..
님의 명언 "추천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세요^^

stella.K 2007-11-15 10:58   좋아요 0 | URL
ㅎㅎ 님도 좋은 하루!^^
 
달의 바다 - 제12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동네 작가상은 젊다. 세상에 익히 이름을 알린, 또는 알리기 시작한 사람도 아닌,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사람에게 수상작의 영예를 준다. 문학동네야 우리나라 굴지의 출판사이고, 그 동네를 통해 문학상이라는 것을 받고,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면, 그 출발이 꽤 좋은 편 아닌가? 그런데 정한아라는 소설가는 전에 대산문학상도 받았다는데 나는 알리가 없었고,  이번 작품을 통해 알게 되었다. 나이는 아직 삼십도 안된 그야말로 젊은피다. 그런 그녀가 이민한 소설을 썼다면, 나는, 꽤 가능성있는 젊은 작가라고 감히 칭찬해 주고 싶다.

아직 문체의 깊이는 가늠할 수는 없지만(문체의 깊이는 삶의 깊이와 비례하는 것이 아닌가), 그 또래 쳐놓곤, 비교적 성실하고, 사유적이란 느낌도 든다. 무엇보다도 그 나이 또래라면 뭔가의 각을 세우고, 치기어린 똥폼도 잡을만할텐데, 그녀의 글을 대체로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깜찍하기 까지 하다.

사실 이 사회가 한창 직장을 구할 20대 그 나이에 밝고, 희망차게만 보이게끔 해 주지는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에도 보면 작중화자인 '나' 은미는 백수다. 그뿐인가? 등장하는 인물들 저마다 하나 같이 상처있가 있지만 힘들게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따뜻하고, 긍정적일 수 있는 건, 자신을 비관적으로만 보지않는 것과 서로가 서로를 말할 때 다소는 과장과 거짓이 섞여있을지라도, 그것을 비판적으로만 말하지 않으려는 긍정적 자세가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고모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중략)

"생각처럼 나쁘지는 않은데 늘 우리의 밑그림을 넘어서니까 당황하고 불신하게 되는 거야. 이렇게 네가 나를 나를 보러 와준 것처럼 기대 밖의 좋은 일도 있는 거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거고. 고모는 그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 빚진 것이 없어."라고. 

 
   

 세상을 논리적이고, 똑똑해지고 싶다는 일념 하나에 매사에 사실적이고, 비판적으로만 본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삭막하고, 재미없는 세상이 될 것인가? 그래서 어찌보면 여성적 감성이 이 세대에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모의 삶이 그다지 자랑스럽지 않더라도, 할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고모는 현재 미국에서 아주 잘 살고 있으며 우주비행사로서의 공무를 잘 수행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20대가 보는 세상이(작중화자인 '나'가 됐든, 저자인 정한아가 됐든, 아니면 오늘을 살고 있는 이땅의 20대가 되었든) 그렇게 비관적이지마는 않은 것은, 그들은 비록 세상의 척박한 세상에 내몰려졌지만, 그들이 나고 자란 배경은 물질적으로, 정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는 안정된 가정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한눈에 봐도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들은 세상을 결코 비관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이 소설은 뭔가에 치우침이 없이 안정감이 느껴졌다. 게다가 우주비행사가 나오는 등장인물의 설정(실제로는 안 나오지만)은 낭만적이고, 깜찍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작품을 읽으면서 얼핏얼핏 느끼는 것은 이 책 역시 정체성을 찾는 탐구의 과정을 그린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남자이면서 여자적 성향 때문에 고민하고, 마침내는 성전환수술을 결심하는 민이에게서. 또 기자 시험에 매번 낙방하자, 친구인 민이에게서 작가가 되기를 권유 받지만, 작가, 특히 소설가를 가장 나쁜 인간 부류로 본다는 은미를 보에게서 그리고 미국을 여행하고, 사람들과 만나고, 고모의 실체를 알게되기 까지의 모든 과정이, 마치 정체성을 찾기 위한 가상한 노력으로 보여졌다. 특히 민이가 소설가를 안 좋은 인간 부류로 말하고 있을 땐, 지나치게 작위적이어서 오히려 실소가 나왔다. 사실 이건, 작품속에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등장시키는 것을 어느 면에선 부자연스럽게 느끼는 나의 편견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품에 작가가 나온다는 것은(직간접적으로라도) 결국 작가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겠는가.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세상에 모든 글쓰기 행위는 정체성을 찾는 또는 확인 받는 과정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자기 정체성에 그토록 목말라 하는 것일까? 자신은 실제적인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첫 문장인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이 있느냐?"란 질문에 맨 먼저 봉착하게 되는 것 같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07-11-10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와 되고 싶은 나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 타고 있는 사람,
여기 하나 더 있네요, 스텔라님.^^ 꾸욱!

stella.K 2007-11-11 18:46   좋아요 0 | URL
우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사춘기 지난지 한참 오랜대도 말이어요. 또 사춘기 소녀마냥 아직도 줄타기를 하고 있다니...ㅋㅋ
추천은 고래 같은 저도 춤추게 만들죠.^^
 
바람의 화원 2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있는 동안 실로 오랫만에 호사를 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느 때 한번 우리나라 고전미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었던가? 고백하건데 그것은 지루하다 못해 이질적이란 느낌마져 들었다. 하지만 이 책은 워낙에 잘짜여진 소설에 김홍도의 그림과 신윤복의 그림을 교차에서 보고 있으려니 그야말로 호사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책에 실린 두 사람의 그림을 보고 있으려니, 새삼 아름답고 정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 책을 펼쳐읽기 시작하면서, 저자가 파놓은 함정에 나 자신 스스로 빠져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신윤복에 대한 성정체 때문이었다. 내가 아무리 우리나라 고미술에 대해  아는 바가 없기로서니, 신윤복이 여자인지 남자인지에 관해 이리도 자신이 없었더란 말인가? 과연 저자가 잘못 쓴건지, 내가 잘못 안 건지 한참을 헷갈리다가 결국 나는, 나의 무지함에 백기를 들기로 했다.'음, 이제보니 신윤복이 남자였었구나.'

그런데 웬걸, 얼마를 읽으려니 다시 여자로 밝혀졌다. 신윤복이 살았던 당시는 남존여비사상이 강했던 때였으므로 당당하게 여자라는 것을 밝히고 화원 노릇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알았을 때, 나는  혼자 '이 뭐야?'하며, 저자에게 깜빡 속은 것을 알고 얼마나 웃었던지. 이쯤되면 저자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독자를 우롱하다니...! 나는 그 알량한 지식에 허를 찔린 것이다. 덕분에 2권 초두에 나오는 김조년과 기생 정향, 윤복의 삼각관계에 대한 묘사가 생생하게 와 닿을 수 있었겠지.

이렇게 이 책은 나름 복선도 좋고, 문체도 좋다는 느낌도 든다. 게다가 영화적 기법까지 차용해서 이야기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그런데 이런 좋은 특장을 잘 갖춘 뛰어난 작품이긴 하지만 워낙 장르가 '펙션'이어서 일까? 정말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이야기인지 가늠하기가 쉽지가 않다. 하기야 그러니 '펙션'이겠지 하지만 정말 신윤복이 정말 남장을 하고 화원 노릇을 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만큼 신윤복이란 화가는 그 생애가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에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필 수도 있지만, 동시에 평전이란 부문에 있어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엔 없다. 어디 그뿐인가? 김홍도는 또 어떤가? 그의 생애에 있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책에선 그가 색맹으로 나오는데 정말 그럴까? 또한 동시대를 살았다고는 하나 김홍도와 신윤복이 서로 사제의 인연을 맺었는지도 모르겠다. 펙션을 읽다 역사적 사실을 알고 싶은 건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래도 이 책은 펙션인만큼 그 자체로 읽어줘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야기로 즐기긴엔 결코 모자람이 없다. 물론 추리적 기법을 차용했던만큼 추리적 묘사보단 오히려 심리묘사에 더 많은 것을 할애한 듯도 보인다. 하지만 아름다움에 갖는 인간의 욕망, 당시의 사회상, 색을 내기 위해 어떤 재료들이 씌였는가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있어 그것들을 읽는 묘미가 만만치 않았다. 또한 말미에 김홍도와 신윤복이 김조년을 응징하고, 서징의 딸도, 서한평의 아들도 아닌, 한 여성으로 거듭 나는 장면은 신윤복의 저 유명한 <미인도>와 함께 아름답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거기다 애잔한 에필로그 까지...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동시에 우리나라 미술을 보는 눈이 업그레이드 되지 않았을까? 뿌듯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 한 작품을 내기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저자에게 새삼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그리고 저자의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이 될까 궁금해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달래 2007-10-23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주 즐겁게 읽은 책이에요. ^^;;
이 책 보면서, 새롭게 저도 저희 고미술에 대해 좀 생각해보게 되더라구요.
<미인도>, 실제 그림으로 보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

(잘 지내시죠? ^^;;)

stella.K 2007-10-23 10:46   좋아요 0 | URL
앗, 진달래님, 글치 않아도 님 생각하고 있었는데...요즘 바쁜가 봐요. 리더스 가이드에도 잘 안 나타나시고...잘 지냅니다. 진달래님도 잘 계시죠?^^

이환 2007-10-26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읽었던 책입니다.
그림을 적절히 이야기에 접목시키는 저자의 교묘한 글솜씨에 놀랐었던 기억이 납니다.

stella.K 2007-10-26 13:57   좋아요 0 | URL
그렇죠? 정말 오랫만에 느껴보는 감동이었습니다.^^
 
시누헤 1
미카 왈타리 지음, 이순희 옮김 / 동녘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성경을 읽다보면(그것이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건 아니면 연구를 위해서건), 꼭 반드시 역사와 마주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스라엘 역사와 이집트의 역사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던 것만큼, 이스라엘 고대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성경을 읽다보면 이스라엘 보단 이집트의 역사가 더 많이 부각되는 느낌이다.

내가 성서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창세기 후반 무렵에 나오는 야곱의 아들 요셉에 관한 이야기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그가 애굽 즉 다시말해 이집트에 팔려가고부터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는데, 이것을 토마스 만은 <요셉과 그 형제들>이란 장대한 역사소설에 담아내고 있다. 이 소설은 요셉이 애굽에서의 활약상을 묘사해 내고 있는데, 읽다보면 정말 이집트에 대해 알고 싶은 생각이 절로나게 만든다.

이렇듯 내가 이 책을 붙든 것도 시누헤라는 인물이 궁금해서라기 보단, 조금이라도 이집트를 알고 싶은 마음이 더 컷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집트하면  그 이름만으로도 신비스럽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의외로 책을 읽기 시작한 첫부분에서 의외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것은 어린 시누헤가 갈대배에 누인채 강물에 떠내려 온 것을 어느 의사 부부가 발견해서 그들의 양자로 키워졌다는 부분에서 인데, 솔직히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성경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갈대배는 어린 모세만 탄 줄 알았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면 그런 어린 아이가 한둘이 아니었고, 띄우게 되는 사연은 여러가지다. 이를테면 가난 때문에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라든지, 또는 치정으로 인한 불의한 열매였기 때문에 버릴 목적으로 버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나의 편협한 사고를 바로잡게 될 때 책을 읽는 기쁨은 커지기도 한다. 그뿐인가?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의외로 역사소설이 갖는 정치적 배경이나 인간 개인의 욕망도 그렇긴 하지만, 오히려 그 시대의 문화적 배경이 더 많은 흥미가 느껴졌다.

시누헤는 의사이면서 홀로있는 자였던 만큼 어디에도 구애됨이 없이 자유로웠고, 동시에 고독했으며, 지식에 목마른 자였다. 어떠한 야망도 꿈도 없었던 자였기 때문에 그는 자기 이외의 것들에 대해 더 많은 것들을 소설속에서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렇듯 이 책은 한 나라의 정치와 문화 그리고 종교가 어떻게 연결이되고 영향을 미치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희곡 작가로도 알려졌기 때문일까? 파라오를 비롯한 역사적 인물뿐만 아니라 조연처럼 등장하는 시누헤의 사람들(즉 이를테면 그의 충복 카프타 그리고 시누헤의 여인들)의 인물 묘사나 우아한 대사들에서 확실히 이 소설은 충분히 매력적이긴 하다. 하지만 왠지 역사소설이 갖는 덕목중의 하나인 '빠르게 읽한다.'는 측면에선 이 소설은 아타깝게도 조금은 비껴난 느낌이다. 솔직히 나는 역자의 무난해 보이는 번역에도 불구하고 읽는데 애좀 먹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야클 2007-09-2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왜 자꾸 시누이란 단어가 떠오르는건지...-_-+

메리 추석,스텔라님! ^^

stella.K 2007-09-25 10:52   좋아요 0 | URL
어머낫! 야클님, 반가워요. 제목이 좀 거시기 하긴하죠?
야클님도 메리 추석이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