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의 입학식 - 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키워드 한국문화 4
김문식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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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아홉 살 밖에 되지 않은 순조의 맏아들 효명세자가 그의 스승인 대제학 남공철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한다. 

   
 

왕세자: 어떻게 하면 성인이 될 수 있을까요? 

남공철: 저하, 이 물음은 참으로 종묘사직과 신민들의 복입니다. 세자께서 어린 나이에 입학하여 성인이 될 것을 스스로 기약하는 뜻이 있으니......요임금도 될 수 있고, 순임금도 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왕세자: ......효도를 하려면 무엇을 먼저 해야 합니까? 

남공철: ......다만 덕을 닦고 착한 행동을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부모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어디있겠습니까? 또한, 수신은 제가, 치국, 평천하,의 근본이 되는 것이므로, 효도하는 큰 근본으로는 이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13p) 

 
   

 아무리 왕의 아들이라고는 하나 아홉살바기 어린 아이가 그 꼬물대는 입으로 저런 말을 했다니 그것을 상상하는 나로선 대견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다. 나인들 스승에게 저렇게  질문할 수 있겠으며, 스승이 저리 대답하시는 바를 다 알아 들을 수 있었을까? 책을 다 읽고나니 새삼 조선시대 입학례는 성대하기도 했거니와 엄숙하기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사람들 일생에 있어 평균 3~4번의 입학을 한다고 치면 과연 저런 입학식을 단 한번이라도 치뤄 보겠는가? 싶다. 

사실 우리나라처럼 학문을 숭상하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이책의 저자가 중국의 입학례와도 비교하는 글을 썼는데, 확실히 우리나라가 중국 보다 조금 더 앞서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우리 조상들은 배움을 중하게 여겼다. 그중 특이한 건, 왕실과 관련된 모든 행사는 다 궁안에서 치르되 이 왕세자의 입학례만큼은 궁이 아닌 성균관에서 치뤘다고 한다. 그런 것만 봐도 왕세자의 귀한 몸이라고 해도 배움에 관해서는 엄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저자는 이책을 통해 조선 왕실의 역사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해줬다. 왕세자의 입학례는 주로 10세를 전후에서 거행했다고 한다. 물론 조선 왕실을 거쳐간 모든 왕세자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특수한 사례도 있어 20세를 훌쩍 넘겨 입학례를 거행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광해군은 23세 때, 효종은 27세, 영조는 29세가 되어서야 입학식을 거행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광해군은 전쟁을 치르느라, 효종은 형의 사망으로 후에 왕위 계승자가 되느라 늦어졌다고 하니, 이 왕세자의 입학례도 역사의 부침을 타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특히 임진왜란 직후 핍궁한 궁안의 살림에 왕세자의 입학례를 두고 의복 조차도 갖출 수 없어 이를 두고 중국에 도움을 받을까를 의논했어야 했다는 건 마음을 숙연하게 만드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나라 안팎의 사정을 고려하여 그 사안은 없던 것으로 했다고 한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거창한 형식 보다는 입학례의 정신을 더 뜻깊게 생각했음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고 왕세자의 입학례가 거창하고 화려했을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의식이 거행되는 중 왕세자가 스승에게 올리는 예물이 있었는데 그것이 퍽이나 소박해 보인다. 제자가 스승에게 올리는 예물은 술과 육포 정도였다고 하니 소박하지 않는가? 그래도 입학례가 끝나면 그 배움의 길이 가히 고행이다 싶다. 무엇보다 아무리 왕세자란 고귀한 신분이라도 그 신분이 스승 보다 높지가 않았다. 그러므로 왕세자는 스승의 말에 절대복종 해야 했다.  

사실 왕세자의 스승이란 신분은 왕 조차도 어찌할 수 없는 어찌보면 절대성역이란 생각도 든다. 오죽했으면 그 시대는 제자의 책이 스승의 그것과 같은 높이에서 볼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즉 스승은 책상에 책을 놓고 볼 수 있어도, 제자는 책을 바닥에 놓고 볼 수가 있었다. 이에 몇 세대에 걸쳐 몇몇의 왕이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생각하여 이 부분을 개선해 줄 것을 건의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말하자면, 그것이 관례며 스승과 제자 사이에 지켜야할 예법이라며 왕의 건의도 묵살했다는 것이다.(키워드 속 키워드6)  

이것은 확실히 명암이 있어 보인다. 사실 처음에 나는 뭐 이런 걸 가지고 왕과 왕세자를 가르치는 선생 사이에 마찰이 있는 것인가? 좀 더 큰 대의를 가지고 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더랬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 국회의 당파들의 싸움이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던가? 서로 양보하고 타협하면 해결할 수 있는 작은 문제도 크게 보고 부풀리고, 이슈화 하는 것 알고 보면, 이런 것은 그런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역사에서부터 나온 것은 아닌가? 그래서 발전이 없는 것은 아닌가, 혼자 씁쓸해 했다. 하지만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지금이야 책상 없는 공부를 감히 생각해 볼 수나 있는가? 그러나 그 시절엔 그렇지가 못했을 것이다. 역사란 오늘의 시각해서 새롭게 해석은 할 수 있지만, 또 가급적 그 시대를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태도도 견지해야 할 것이다. 즉 왕세자의 스승들이 반대했던 건 그것이 예법에 어긋난다고 생각했다지 않는가? 조선시대는 특별히 유학의 시대로, 군신간의 예의, 사제지간의 예의를 귀중히 여겼다. 이런 것은 오늘 날의 후대 사람들이 배울만한 덕목이 아니던가? 

스승의 권위가 얼마만 했는지는 <예기>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한다. 거기에 보면,  

   
  모든 사람이 국왕이지만 국왕이 신하로 대접할 수 없는 경우가 두 번 있다. 하나는 제사를 지낼 때의 시동인데, 제사에서 시동은 조상의 신주를 대신해 앉아 있기 때문에 조상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다른 하나가 바로 국왕의 스승인데, 스승은 국왕의 신하이기는 하지만 함부로 대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를케면,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할 때에는 국왕에 필적하는 지위가 있으므로, 모든 신하들이 절을 올려도 왕세자는 답례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스승에 대해서는 반드시 답례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 대리청장을 할 때에도 스승에 대한 예우는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04p)        
   

 그러니 왕은 차마 왕명으로도 아들에게 책상 하나 놓아줄 수 없고, 스승 또한 왕의 말이라 해도 일언지하에 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 시절 제자된 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 말이 그냥 있는 말이 아닐 성 싶다. 

또한 조선 시대는 장유유서의 윤리가 강했던 시대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래서 배우는 자리 역시 나이순으로 서로가 자리를 양보해서 나이 많은 사람이 좀 더 좋은 자리에 앉았다고 한다. 여기엔 왕세자나 왕세손이라고 해서 예외를 두지 않았다고 하니 과연 역시 배움에 있어서 특권 의식은 찾아 볼 수가 없는 것 같다.  

사실 어느 시대, 어느 곳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청개구리는 있게 마련이다. 선조 때 이해수란 한 유생이 이에 반기를 들었다고 한다. 장유유서가 아닌 성적순으로 앉자고. 이에 그 이름도 유명한 이이 선생께선 "장원을 높이는 것은 동시에 합격한 사람들의 모임에서나 시행하는 하는 것입니다. 성균관은 인륜을 밝히는 곳인데 어떻게 장유유서를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또 장원이 어떻게 왕세자 보다 높겠습니까? 옛날에 왕세자가 입학하면 나이 순으로 앉았으니 장원은 따질만한 것이 못 됩니다."(105p) 라며 그 의견을 묵살하였다고 한다. 모르긴 해도 이 이해수란 사람 장원을 했던 사람이었나 보다. 그래서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 이런 교묘한 의견을 냈던 건 아닐까? 그가 만일 오늘 날, 우리나라 중학교와 고등학교 실정을 본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그런데 이렇게 왕세자의 입학례도 순종의 입학례를 끝으로 그 전통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것은 한일합방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아무튼 이책의 전체적인 맥락을 보면 앞서도 말했지만 전통적인 우리나라 교육은 전인교육에 바탕을 둔 교육이라고 말할 수 있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시대라고 입신양명을 위해 학문에 정진했던 사람이 왜 없었겠는가? 그러나 이렇게 왕세자 입학식만 봐도 옛 조선시대 학문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땠는지 가히 짐작이 간다. 그것은 오늘 날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린 과연 입학을 진심으로 축하할만한 세상에 살고 있는가? 왕세자 입학식은 읽기만 해도 진지함이 묻어난다. 그러나 오늘 날 우리나라 교육은 열의는 있어도 진지함은 없지 않은가? 우리나라 교육에 장유유서의 윤리가 어디 있으며 예의와 법도가 어디 있는가? 

오늘 우리는 이렇게 얉은 책으로 나마 옛날의 입학식의 의미를 되새겨 봤다. 하지만 앞으로 100년, 200년 후, 우리는 후손들에게 지금의 입학식과 교육을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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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3-04 2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인 성'이라는 한자에 귀이가 들어가는 것은...
귀를 기울이라는 뜻이랍니다.
아래 삐침이 몸을 기울이는 모양이라고 해요.
남에게 귀기울일 줄 알고, 말을 조금만 하는 사람...

stella.K 2010-03-05 11:16   좋아요 0 | URL
오, 그런 깊은 뜻이 있었군요. 고맙습니다.^^
 
정조의 비밀편지 - 국왕의 고뇌와 통치의 기술 키워드 한국문화 2
안대회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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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놀랍다. 무엇보다 역사 드라마는 우리가 몰랐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해 주니 그건 가히 보물 같은 것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역사 드라마를 믿는 사람은 없다. 역사 드라마란 그저 있었던 사건에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니 그저 그것이 하나의 가교 역활을 해서 덕분에 그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는, 일종의 흥미유발 정도가 전부가 아니겠는가.  

몇년 전, 한 TV 드라마에서는 정조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가 인기를 모은 바있다. 그 바람에 유독 그때를 전후해서 정조 관한 책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었다. 나 또한 그 드라마가 아니었으면 이 '정조'라는 인물에 대해 어떻게 관심을 가졌을까? 하지만 난 그 드라마 덕분에 정조에 대해 관심은 가졌지만 (부끄럽게도) 지금까지 그에 관한 어떠한 책도 재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야 이책을 접하면서 정조 읽기의 숙원(?)을 풀었다.고 한다면 너무 속보이는 언사려나? 

사실 글은 말 보다 강한 임펙트가 있다. 말은 한번 뱉어 버리면 흔적이 남지 않지만, 글은 그렇지가 않다. 특히 그 글이 여러 사람을 두루 아우르지 않고 어느 한 사람만을 위한 글일 때 그것이 받는 사람에게 어떤 것일까? 특히 우리는 편지라고 하면 사랑하는 연인끼리 주고 받는 '연서'를 생각할 때가 많다. 그도 그렇지만 만일 임금에게 받는 편지라면 어떨까? 임금도 인간인지라 생면부지의 일개 백성에게 편지를 쓸리는 없고, 그에 상응하는 신하들과 편지를 주고 받는다는 건 가히 상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에게 정조가 놀랍게 다가 왔던 건, 그 어찰(임금의 편지를 높여 부르는 말)이 믿을만한 신하들과 나눴던 것이 아니라 임금과 대립했던, 다시 말하면 정적에게(도) 보냈다는 것이다.  

알겠지만 그 사람이 유능한 정치가냐 아니냐를 보여주는 건, 뛰어난 언변이나 정책이 말해주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정적을 얼마나 요리(?)를 하느냐가 관건인지도 모른다. 심환지(1730~1802). 그는 유감스럽게도 정조의 믿음직한 신하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조의 반대편에 서서 조금의 틈만 있으면 그의 왕권을 무력화 시킬려고 했던 사람이다. 정조는 왜 그토록 자기를 미워했던 신하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던 것일까? 앞에서도 썼듯이 정조는 정적조차 자기편으로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됐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도 밀고 당기기가 필요한데 하물며 정적이랴? 어르고 달래지 않으면 살얼음판 같은 조정을 이끌고 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 중심에 심환지가 있었다.  

원래 임금에게서 어찰을 받으면 그 수신인은 그것을 태워버리는 것을 원칙으로 한단다. 왜냐하면, 임금의 어찰은 극비를 요구하지는 않지만, 정조의 경우 극비에 속하는 내용이 많았고, 그것의 철저한 비밀유지를 위해 폐기를 요구한 밀찰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13p) 하지만 심환지는 그러지 않았다. 할 수만 있으면 정조가 보낸 편지는 최선을 다해 보관하려고 애를 썼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책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추측컨대, 그에게도 정조는 정적이었다. 나이도 그가 정조 보다 훨씬 많았다고 한다. 거의 아버지뻘 이거나 못해도 작은 아버지뻘은 되었을 것이다. 사람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점점 달라진다. 미워도 미움이 다가 아니고, 사랑해도 그 사랑이 전부가 아니다. 모르긴 해도 심환지는 정조를 볼 때 애증과 연민을 교차하고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정조의 편지는 당시 돌아가는 정치의 판세를 어느 땐가는 자기에게 유리하게 써 먹는데 사용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그도 선비일진대 나라에 대한 충절을 앞세우면서 누대에 걸친 종묘사직을 바로하기 위함이란 대의 명분도 포함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임금의 편지다. 이것을 어찌 함부로 다룰 수 있으랴? 아무리 법이 그러해도 그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실 정조는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낼 때 나라에 대한 극비 사항만을 논하기 위해 편지를 사용했던 것이 아니다. 그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낙서같은 쪽지 편지도 보냈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 정조의 인간적인 면모도 볼 수가 있는데, 인자한면도 있지만 아버지 같고, 작은 아버지 같은 사람을 심하게 꾸짖는 내용도 있어 우리가 정조에게 보는 어진 이미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기도 한다. 역사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될 것인데 당시 심환지는 정조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기 위해 그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을런지 모르지만, 우리 후대의 사람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사료가 되었겠는가? 

사실 이렇게 심환지가 가지고 있는 어찰을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정조 이미지를 깨우긴 하지만, 나는 그래야만 했던 정조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마이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동서양 어느 임금, 어느 군주에게나 통하는 뭔가의 아우라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정조가 임금이 되지 않았다면 심환지를 어떻게 대했을까? 상상해 보면 알 수도 있는 면모라고 생각한다.   

이책은 사실 그다지 두꺼운 책은 아니다. 그러나 읽기는 녹녹치 않다. 저자가 정조 어찰이 갖는 면모를 충실히 전달하기 위해 도판도 세심히 사용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거기에 나온 정조의 필체는 거의 악필에 가깝다(적어도 내가 볼 땐). 하지만 정조는 너무도 바빴던 임금이었다. 일일이 퇴고할 여력이 없었고,  편지를 주고 받았던 사람이 심환지 한 사람만도 아니었을 것이다. 또 그럼에도 불불구하고 당시 씌였을 의성어를 과감하게 사용함으로 그의 유머와 여유로움을 잃지 않는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 과연 멋진 임금이란 생각이 든다. 

이렇게 정조는 역대 어느 임금 보다 어찰을 많이 썼던 임금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린 편지가 갖는 위력이 어느 만큼일지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할 때. 내 속내를 들어내 보여야 할 때, 편지만큼 강력한 도구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우린 이 '편지쓰는 마음'을 점점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다. 그것이 아니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도구는 많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또 그렇지 않으면 내 안에 갇혀서 나만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그 마음을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하긴, 정조 시대 때 달리 마음을 표현하고 전할 수 있는 도구가 얼마나 되었겠는가? 

흔히들 편지를 아날로그의 산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사람들은 예견하기를 좋아하는 동물이어서, TV가 나왔을 때 영화가 살아 남을까를 걱정했고, 책의 종말을 예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디지털 시대라고 하는 이 최첨단 시대에도 버젓이 살아있다. 하물며 편지의 종언을 얘기할 자 그 누구랴?  

아마 모르긴 해도 심환지만큼 정조에 대해 가장 잘 말할 사람도 없지 않을까 싶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조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런 정조의 마음을 뒤엎고 그는 정조의 또 하나의 정적인 정순왕후의 치세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는 정조의 죽음을 목도해야만 했다(지금까지의 정설로는 심환지가 정조를 죽게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책의 저자는 정조가 독살 당하지 않고 자연사했을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제시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겠구나 싶기도 하다). 그런 심환지의 마음은 또 어떠 했을까? 정치도 정적도 세월 지나면 무의미한 것을. 정조의 죽음 앞에 가장 많이 슬퍼했을 사람은 바로 심환지는 아니었을까? 그런 심환지도 결국 가고, 그가 남긴 정조 어찰은 이렇게 남아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심환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을까? 편지는 이러한 위력을 가지고 있다.        

이책을 읽으면서 정조의 면모를 새롭게 알 수 있게되서 좋았다. 한번쯤 읽어 보기를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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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의 비밀 - 아리스토텔레스와 영화
마이클 티어노 지음, 김윤철 옮김 / 아우라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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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다.   

작년 초였나, 재작년 말이었나? 아는 이에게 선물로 받고 작년 말경부터 조금 조금씩 읽었던 책이다. 이야기란 게 (남의 글을)읽을 때는 문제가 안되는데 막상 쓰려고 하면 자신이 없어진다. 언제나 그렇듯 글이란 서론, 본론, 결론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누가 모르나? 하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스토리에도 법칙은 있는데 그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저자가 말했듯이, 이야기의 법칙을 알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으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시학'을 읽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이책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시나리오 쓰는데 도움을 주고자 접목시켜 쉽게 풀어 쓴 책이다.  

총 33장으로 되어있고, 간결하게 '시학'의 핵심만을 요약했다. 읽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간결하게 쓸 수 있을까? 감탄했다. 물론 의심이 많은 나로선 '이거 저자가 '시학'을 진짜 잘 알고 쓴거 맞아?' 웬만해선 읽을 수 없다던 책을 저자는 어떻게 이해하고 이렇게 간결하게 쓸 수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이 없지 않았지만, 아무튼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게 놀랍다. 거기다 거의 매 장이 끝날 때마다 철촌살인의 위트있는 마무리가 인상적이다. 예를들면, 

   
 

서브플롯 개념을 버리고 시나리오 구조를 <아메리칸 뷰티>처럼짜라. 그러면 당신의 시나리오는 그 구조 속에서 영화의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고, 어쩌면 당신은 오스카상을 타게될지도 모른다.             

                                               -<4. 최고의 플롯은 한 가지 길로만 간다. 63p>-  

    

 
   

 또는, 

   
 

시나리오를 쓸 때 하나의 완결된 행동을 만들고 우연. 필연. 개연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운명을 불러내야만 관객들의 호기심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이렇게 시나리오를 쓴다면 당신은 오스카상을 받으로 고개를 꼿꼿이 들고 수상식장의 통로를 걸어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일이 당신에게 일어나지 말라는 법도 없지 않은가?   

                                             -<10. 운명이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사건일 뿐 98p>

 
   

 우습지 않은가? 어찌보면 그 말하는 것이, "밑줄 쫙~"의 요점만 간단히를 외치는  학원 선생님 같다.  

뭐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저자는 미국 사람이고 그러니 미국 영화 실정에 맞게 쓴 흔적이 역력하다. 우리나라에선 감독이 각본까지 써서 찍는 마당에, 스토리 애널리스트는 무엇이고, 피치(시나리오 작가가 감독 및 제작자들에게 자기 작품을 설명하며 팔아 먹을 때를 이름하여)가 웬말이냐? 더구나 저자는 20세기 허리우드의 잘난 영화들만을 엄선해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으~ 그놈의 허리우드! 잘 났어 정말!! 마치 허리우드가 영화의 모든 것인 양 잘난 척하는 게 마땅치 않지만 뭐 어쩌랴? 억울하면 출세하랬다고, 우리도 그런 시스템에 이런 책 하나 못낸 것을 아쉬워 할밖에.  

2년 전, 시나리오를 배웠을 때 나의 선생님은 허리우드 정석대로만 시나리오 작법을 가르치셨다. "세계 영화의 흐름은 이거야." 하면서 거기서 단 한발짝도 비껴나가지 않으셨다. 모르는 사람은 그 선생님이 허리우드표 빠다를 좋아하시게 되었나 보다며 그야말로 듣는 우리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그러고 보니 나의 허리우드 불만이 여기서부터 촉발된지도 모르겠다. 그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난 점점 중증이 되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그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치는 이유가 있었다고 간파했다. 무엇을 뛰어 넘으려면 그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렇게 정석에 목 매달았다고 보아진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것을 뛰어넘어 줄 사람이 나는 아닌 성 싶다. 그래도 누군가는 이 허리우드의 벽을 넘어주지 않을까? 나는 바로 그를 위해 응원의 의미에서 허리우드표를 씹어 주는 것이다. 이러는 날 두고, 누구는 잘난 척 한다.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관객은 그 영화를 두고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다. 제작자의 입장이면 절대로 못한다. 그야말로 불만은 나의 힘인 것이다. 

이책은 보기에 나쁘지 않다. 하지만 참고서라고 하기엔 좋지만 교과서는 아닌 성 싶다. 만일 누군가 시나리오에 대해 전문적으로 잘 쓴 책을 원한다면 감히 다른 책을 알아 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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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모욕에 대처하는 법
언니네 방 - 내가 혼자가 아닌 그 곳
언니네 사람들 지음 / 갤리온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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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이 책을 읽고 거기 나온 '성적 모욕에 대처하는 법' 이란 글을 올렸더니 지금까지 추천을 무려 17개나 받았다. 글이 워낙 재미있어서 함께 나누자고 올렸을 뿐인데 추천을 그렇게나 많이 받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추천을 많이 받은 이유는 뭘까? 나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재미있어서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 여성들은 여전히 성적 모욕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이 책에서 정말 말하고 싶은 것 

뭐 이렇게 성을 건강하게 드러내놓고 나름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이 책은 그렇게 웃을만한 부분도 있지만 정말 가슴 아픈 이야기도 많다. 내가 이 책에서 정말 말하고 싶은 부분은 따로 있다. 그것은 <이런 게 성폭력이 아니라고?>(70p~76p)를 쓴 '안티 오아시스'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의 내용이다. 간단하게 얘기를 하자면, 그녀는 먼저 자신은 '오아시스'란 영화를 지독히 싫어한다고 했다. 왜 그럴까?  

그녀는 한마디로 자신의 집에 무단침입한 강간범에게 당했다. 강간 당하지 않으려고 소리치고 반항해 봤자 자신의 목숨만 위태로워질테니 그 목숨 지켜내보겠다고 생면부지의 놈이 시키는대로 해 주는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말하면 그녀가 상당히 침착해서 비교적 상처도 안 받았을 것 같지? 사실 책의 내용을 읽어보면 그녀는 비교적 담담하고 상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읽다보면 이 위기의 순간을 대처하느라 그녀가 받았을 고통과 상처가 어땠을지 가히 잠작이 간다.(아니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조차 그녀에게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녀는 그 처절한 상황에서도 범인을 따돌리고 간신히 경찰서로가 범인의 만행을 고발하고 잡아줄 것을 말해 봤지만 도무지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가 경찰서로 가기까지는 그전에 눈을 다쳐 범인을 졸라 안과를 갔는데 진술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어떻게 범인과 안과까지 갈 수 있었냐며 의아해 하더란다. 거기엔 경찰의 무슨 생각이 덧발라져 있을까? 어쨌든 둘이 좋아서 섹스한 거 아니냐라는 것도 포함이 되었겠지. 그녀는 그 일이 있기 전, 강간범을 만났을 때 대처하는 법에 관한 글을 읽어둔 터라 그렇게 해서 자신의 생명을 지켜낼 수 있었지만, 외국 사람이 쓴 외국의 경우라 우리나라엔 아직 통하지 않는 방법이었을까? 그녀에겐 덧이었을 뿐이다. 정작 그 간강범에게서 여자를 지켜줘야 할 경찰이 미온적으로 나왔고 범인에게 내려진 죄명은 '무단침입강간미수'가 다였다. 이것은 정말 내가 봐도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녀가 '오아시스'란 영화를 혐오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 영화도 비슷한 상황에서 전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소통부재를 다루고 있는데 그녀는 진짜 강간이란 걸 당해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못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어처구니 없게도 나중에 그 강간범에게서 주인공이 애정을갈구하는 대상으로 그리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감독은 "사랑, 해보셨나요?"라며 간강범의 간강을 미화시키고 나아가선 관객을 가르칠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이 영화를 지독히도 미워한다고 했다.(나도 그 영화를 보긴 했지만 정말 그 영화는 문제가 많은 영화인 것은 사실이다.) 나는 그녀의 말에 백 번 아니 천만 번 공감한다.  

원래 남자의 언어와 여자의 언어가 다르긴 하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저술가들이 이것을 좁혀 보고자 많은 책을 써왔다.(이를테면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류의) 그런데 그런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언어가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게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그 경찰서에 여자 경찰만 있었어도 상황은 그나마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정말 여자는 남자 보다 언어 능력이 발달 됐다고는 하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남자의 논리와 힘이 지배를 하고 있음이다. 

또 하나의 이야기              

또 하나의 이야기는 <섹스할 때, 끝까지 넌 이기적이었지>를 쓴 글이다. 나도 들어보기는 한 것 같다. 섹스는 가급적 이기적으로 하라고. 그것도 여자에게 이르는 말이다. 얼핏들으면 여자를 위한 말 같기도 하다. 그런데 알고보면, 여자는 남자에 비해 섹스에 대해 소극적일 수 밖에 없음으로 여자를 자극하여 남자를 유리하게 만드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이 글의 내용은 사랑해서 동거를 했지만 남자의 배려없음에 결국 헤어질 수 밖에 없는 한 여자의 씁쓸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런데 헤어졌으면 끝까지 쿨하면 얼마나 좋은가? 이 남자 녀석 헤어지고 두 달쯤 지나서 우연히 지나는 길에 만났는데, 대뜸 지금은 안 피곤하냐고 묻더란다. "너 그때 '피곤해서' 섹스하기 싫다고 했잖아. 요즘에는 안 그렇냐는 거지." 모르긴 해도 그 녀석도 여자와 헤어진 것이 꽤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그런 식으로 긁고 있으니.  사실은 남자의 지독한 이기심 때문에 헤어진 건데. 그녀가 섹스할 때마다 당한 고통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뿐인가? 다른 부분의 이야기지만, 깐엔 배려한답시고 끊임없이 "좋으냐?" 물으며 자신의 능력을 확인 받고 싶어하는 그 남자의 심리는 또 뭐냐? 빨리 일을 끝마쳐주길 바라면서 일부러 연기해야 하는 여자의 마음을 남자들이 알기는 알까?  

이책은 좋으면서도 위험하다.      

이 책이 어떻게 해서 내 손에 들어 왔는지 모르겠다. 사지는 않았고, 몇년 전에 받아만 놓고 읽지 못하고 있는 걸 최근에야 읽었다. 여러가지 사정상 못 읽은 것도 있었지만 한편 꺼려졌던 것도 사실이다. 난 그다지 성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런데 관심이 없다는 게 자랑은 아닐 터. 읽어보니 내가 이 책에 선입견이 많았구나 싶다. 이렇게 솔직하고 대범할 수가! 하지만 너무 공감이 가고, 오히려 나의 무지와 게으름을 책망하고 싶어졌다. 어떤 부분은 단편 소설을 읽는 것 보다 더 진한 감동이 있기도 했다. 

이책은 아는 사람을 알겠지만 '언니네 방'이란 싸이트에 올라 온 글들을 발췌한 글들이다. 이 싸이트가 생겼을 때 적지 않은 여성 네티즌들이 환영을 했다고 한다. 혼자만 음습하게 가지고 있었던 아픔들 상처들을 용기있게 양지로 끌고 나왔다는 점에서 많은 위로와 치유가 되었을 것이다. 언제 한번 이런 일이 있었는가? 당한 건 여잔데 범한 남자는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한다. 말이나 되는가? 섹스가 인생에 전부는 아닌데 상업주의와 맞물려 모든 사고를 그런 식으로 해결하고 귀결시키는 이놈의 세상. 그리고 그 후유증은 또 얼마냐? "...좇까라. 씨발..."은 이럴 때 써 먹는 말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 '언니네 방'이 잘 운영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싸이트 찾아 봤지만 잘 못 찾겠던데. 이렇게 자유롭게 서로의 얘기를 나눌 수 있어 좋지만 자칫 우려되는 건 이런 식으로 해서 결국 '남성 기피' 내지는 '남성 혐오'를 부추길까 봐 그게 걱정이다. 그래서 이 책을 더 이상 찍어내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고. 진정한 페미니즘은 여성우위를 목적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지난 수 세기 동안 여자는 억압받고 하위의 개념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만회해 보고자 하는 움직임뿐일 거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며 공존하는 것일 것이다.  

결코 만들어지지 못할 방           

'언니네 방'이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런 시도가 있다는 건 상당히 획기적이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렇게 '언니네 방'은 있으면서 남성을 위한 '형님네 방'이나 '오빠네 방'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어봤다. 서로를 이해하려면 이런 방쯤 만들어질 필요도 있을 텐데 내가 아는 바로는 없는 것 같다. 있어도 섹스를 어떻게하면 만족스럽게 할 것이냐? 뭐 그런 게 되어버릴 가능성이 많다. 남성도 말 못할 고민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그런 방은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다. 가부장의 사회에서 같은 종족 욕 먹일 필요 있냐? 절대 만들지 못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성에 대해서 잘 말하지 않기론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진데 그속은 좀 다를 것이다.  

 '여성학'이란 학문은 진정한 의미에서 '학'이 될 수 없다     

나의 20대 어느 가을 날 나는 어느 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었고 그때 처음 여성학이란 학문을 접했다. 지금은 잊었지만 그때 가르쳤던 강사가 '여성학'이란 학문은 진정한 의미에서 '학'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언젠가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이 되면 없어질 학문이기 때문에. 나는 이 말을 진정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안다. 여성학이란 학문은 지구에 종말이 오지 않는 한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걸. 그래서 여성학은 점점 더 중요한 학문이 되리라는 걸. 

하지만 여성학은 어느 특정인을 위한 전위물처럼 취급 받아 온 것도 사실이다. 우리가 이런 저작물이 아니면 어디가서 여성의 실태를 쉽게 접할 수 있을까? 여성학은 없어지지 않을 것인데 이 책은 절판이 됐다는 것이 다만 아쉬울 뿐이다.(품절로 나오지만 아마도 절판됐지 싶다) 그런데 왜 짧은 시간 절판(품절)이 됐는지(이책의 초판은 2006년이다.) 알 것도 같다. 나름 부작용도 없진 않겠지.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 담궈서야 말이 되는가? 어느 날 화려한 복간을 기대해 본다. 그래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이야기를 나눠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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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삶이 내게 왔다
정성일 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처음 이 책이 나왔을 때, 나는 책에 대한 궁금증 보다는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본인들은 극구부인을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얼굴이 명함인 사람들 아니던가? 그런 잘난 사람의 이야기가 예전엔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그렇게 잘난 사람들의 글일테니 나에겐 거부감이 들밖에.(나는 어느 새, 메이저를 꿈꾸는 삶에서 마이너의 삶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삶으로 전락(?)했다.ㅜ) 그래도 이 책을 쉽게 내칠 수 없었던 건 이 책이 <인물과 사상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출판사를 좋아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워낙에 인지도가 있어 기회가 주는 호사를 거부한다는 건 여러모로 예의가 아닐 것이다.(책에게나, 출판사에게나, 이 책을 건내 준 모처에게나,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나 두루두루) 

읽고나니 과연 지면의 제약이 아쉽긴 했지만, 여기에 초대(?)된 사람들은 과연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세상에 누군들 돈 많이 벌고, 입신양명하여 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을까? 우리는 태어 나면서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기를 교육 받고 살지 않는가? 우린 그런 삶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어느 새 그 길을 가고 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런 것 같아도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더라. 입신양명과 상관없이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갔던 사람들이다.  

공선옥. 소설을 좋아 하지만 늘 나의 선택에서 제외되는 작가다(하긴 그런 작가가 한 둘인가? 그래도 작년 초, 나는 겨우 그녀의 책을 한 권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행복한 만찬>이다). 그녀의 삶을 읽고나니 그녀의 글이 얼마나 소박하고 진솔하길 바라왔는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대 작가들은 참 고급이다. 평균학력은 모르긴 몰라도 대졸이요, 재미있다기 보다는 똑똑한 사람도 많다. ......나는 충무로, 종로, 명동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는 쓰지 못한다. ... 그곳은 내게 사랑도 상처도 주지 않는다. 나는 다만 내가 살았고 내가 경험했고 내게 사랑을, 상처를 주었던 곳,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 이야기만 쓸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나라 시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삶의 시골, 삶의 변방, 삶의 오지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 한데에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나는 마흔 일곱해가 되도록 생의 한데에서 떨고 있다. 내가 안온해 지는 길은, 기술을 배우는 것 뿐이다. 이런 '펜대 잡는 기술'이 아닌 다른 기술 말이다.(19~20)      
   

하긴, 작가가 없는 말을 어떻게 지어낼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럴 작가도 없진 않지만 또 그것을 상상력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녀의 자기 글을 대하는 방식에 무척 신뢰가 느껴졌다.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또 어떤가? 이 사람의 글을 읽으면 약간 섬짓해 지기도 한다. 자신의 삶에 대해서 말하랬더니 글을 4분의 3(또는 3분의 2)을 영화 감독 임권택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 그리고 무척 냉소적이다. 자신의 세계가 확고하게 서 있어 그 삶을 흔들어 놓을만한 어떤 사람도 사건도 없을 것 같다. 그런 사람이 임권택에게 깜빡 넘어 가다니! 그러면서 은근슬쩍 자신의 삶은 보여주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임권택을 빗대어서 아주 살짝 '나는 이런 사람이오.' 퉁치고 있다. 굉장한 반항아 같다. 나름 매력있다. 

또한 매일 기생충에게 고마워 하며 머리를 조아리는(연구하느라) 우리의 마태우스 서민 교수. 늘 사람들에게 재미와 유익을 전달하고자 설레발(!)계의 절대강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나 역시 오래 전부터 '왜 하필 기생충을...?'하는 의문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물어보는 것도 예의는 아닌 성 싶어 참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서야 비로소 그 의문이 풀렸다.  

지금은 기생충을 연구하겠다는 후학들이 늘어나서 좋긴 하지만, 그 젊은이들이 너무 일찍부터 자신의 길을 정해 버리는 것 같아 흔쾌히 기뻐해 줄 수만은 없다는 그의 심정이 꼭 부모 같다. 어느 한 분야에 일가를 이룬 사람들 중 자신의 일이 너무 힘들어 내 자식은 나와 같은 길을 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도 있다잖는가? 그처럼 서민 교수도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10년 후에도 그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때 결정하라고 조언한다니 그의 솔직함에 마음 한켠이 찡해 온다. 만약 의학계에서 예산 삭감들 당한다면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을 외로운 분야 중 하나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매일 화장실 가는 한 사람으로써 바랄 뿐이다. 그의 말에 의하면 기생충 한 마리가 국가도 구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이 말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도 갈팡질팡이긴 하지만) 그렇다면 기생충 포에버!다. 

개인적으로 가장 부럽기는 김창남 교수가 아닐까 싶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일로 확대시켜서 사는 사람이다. 일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보통은 일 따로 취미 따로가 대부분이 아니겠는가? 물론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 김창남 교수 같은 사람이 한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 같은 사람은 취미가 일이라고 생각하면 머리에서 쥐부터 나고, 취미가 취미면 잠시 좋아하다가 마는 그래서 시작해 볼 엄두도 못내는 맹추로선 그저 부러울 뿐이다. 또 그렇기로서는 대중문화 평론가 이영미씨도 비슷한 류에 포함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얼리어댑터인 아버지 덕분에 텔레비전을 일찍 접했고(그녀는 60년대 초에 태어났고, 우리나라 방송 개국도 비슷하게 때를 같이 한다), 그 덕분에 그녀는 '텔레비전 키드'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드라마뿐 아니라 요즘 소위 '미드'라고 불리우는 <도망자>나 <전투>같은 외회시리즈에 심취할 수 있었고, 거기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더빙을 누가 맡았는지도 정확히 기억해 낸다. 이름만 들어도 그리운 프라이 보이 곽규석의 <쇼쇼쇼>나, 라디오 드라마인 <아차부인, 재치부인>은 나도 기억하는 프로다(특히 이 두 프로가 종영을 맞을 줄은 난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 그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못지 않은 얼리어댑터인데 난 왜 이영미씨 같이 못 됐을까 후회가 든다. 하긴, 그녀는 학업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어 자신의 관심을 학업으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했지만, 난 학교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덕에 결국 요모양 요꼴이 됐다. 정말 공부해서 남 주는 거 아닌데. 일찌감치 길을 찾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지금 그녀는 우리나라 드라마의 역사를 정리 연구하고 있는 중이란다.  

이밖에도, 미술치료사인 박승숙 편을 읽으면 난 그림에는 젬병이긴 하지만 다시 한번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도전해 보고 싶은 분야란 생각이 들고, 요즘 우연찮게 <언니네 방>(갤리온)을 조금씩 읽고 있는데 그래서 그럴까? 페미니스트인 김신명숙 편이 마음을 사로 잡았다. 확실히 여성의 문제는 남성의 문제고, 남성의 문제는 여성의 문제다.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것이 결국 온전한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목표가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이 사람이 하는 일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가져 본다.(솔직히 내가 페미니즘에 이토록 가슴 뛰게 될 줄은 몰랐다.) 또한 항상 대학교육을 모색하는 양희규 씨도 마음 속으로 응원을 보낸다. 지금의 교육으론 정말 우리 아이들은 올바로 키워낼 수 없다.  

책이 워낙에 많은 사람(17인이면 너무 많다. 7인만 해도 많은 것을)을 다루고 있어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애초에 내가 가진 선입견과 달리 하나같이 박수쳐 주고 싶고, 응원해 주고 싶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렇게 글을 쓰고 있지만 알고보면 외로운 문화전사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이 하는 일에 다 관여는 할 수 없지만 응원하는데 돈 드는 거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부러웠다. 자신의 삶을 무엇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재간이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정말 그 삶이 그들에게로 왔는지, 아니면 그들이 그 삶에로 투신을 한 것인지 알 수는 없다. 그저 드는 생각은 나는 내 삶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부끄럽기도 하고, 자책도 하게 된다. 꼭 이렇게 어떤 한 분야에 족적을 남기는 삶을 살지는 못할지라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 지금이라도 그 일을 말 없이 부지런히 가야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적어도 누가 알아주던 못 알아주던, 읽어 주던 안 읽어주던 자기만의 자서전을 써야하지 않겠는가? 그 자서전의 이름을 꼭 '그 삶이 내게 왔다'고 하진 않더라도 그 비스무레하게라도 이름 지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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