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저항하는가 -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국가의 정치를 거부하라
세스 토보크먼 지음, 김한청 옮김 / 다른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우선, 그림이 투박하면서도 강렬하다.  몇몇은 컬러로 그린 그림도 있는데 그건 꼭 이중섭의 그림을  보는 것도 같고, 토속적인 아프리카 어느 화가의 그림을 보는 것도 같다. 그처럼 이미지는 강하며 선동적인 느낌도 준다. 또한 판화로 찍은 듯 흑백대비의 그림은 여러색을 사용하기 보다 흑과 백이란 대비적 색깔이 이토록이나 강렬한 것이구나 새삼 느끼게도 된다.  

저자 세스 토보크먼은 급진적인 정치 예술가라고 한다. 그는 만화로 세상의 은폐된 진실, 정치적 야합을 고발하는 작가라고 한다.  

이 책을 보면, 가진 자의 횡포와 힘없는 자의 억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내가 예전에 읽었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생각 나게도 했다.  이 책 역시 있는 자들의 횡포에 대해 꽤나 논리적이면서도 고발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두 책 모두 보고 있으면 나는 정말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 날 일어나고 있는 수 많은 전쟁과 인종폭동, 노동력 착취, 심지어 자연재해의 문제 이면에는 있는 자들의 횡포와 교묘한 술수가 작용을 한다.  이것은 확실히 상업주의와 물질만능주의의 폐혜다. 이 문제는 나라의 지도자와 기업인들이 조금만 생각을 달리해도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며 해결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설혹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나설수도 있고, 나서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들이 마음을 고쳐 먹어주길 기대하겠는가? 우리에게 힘이 없을까? 우린 지레 똑똑한 자, 있는 자를 이겨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줄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까지 전쟁의 문제를, 인권의 문제를, 노동의 문제를 저들의 손에 맡겨둘 수가 있단 말인가? 그리고 그것의 피해 지역은 아프리카나 남미 같은 제3 세계 지역이다. 그 나라의 사람들, 특히 어린 아이나 힘없는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지는 보지 않는 이상 상상을 불허한다.   

내가 이 책에서 다소 충격적으로 본 것은 '나체의 힘'이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가장 무시무시한 저주는, 여자들이 자신들을 괴롭히는 남자에게 성기를 내보는 것이라고 한다. 여자의 나체를 본 남자는 성불구가 되거나 미치거나 죽게 된다고 한다. 나이지리아에 석유붐이 일어났을 때 농촌에 송유관이 들어오고 기름 유출 사고로 물고기가 죽고, 식수가 말랐으며,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의 수가 세 배 이상 급증하자, 니제르 삼각주의 여인들은 저주의 상징인 나체 시위를 했다고 한다. 저항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예다. 물론 이후 그쪽 지역의 삶이 나아졌는지에 대해선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그것을 개기로 더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라크 전쟁이 임박했을 때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아메리카 대륙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옷을 벗고 평화 심벌을 만들어 저항했다고 한다. (76~79p) 물론 그렇다고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저항이 무의미했다고도 볼 수 있을까? 훗날 역사적으로 볼 때 그들의 저항 운동이 필요없었다고 말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이라크 전쟁의 폐해를 세계가 고스란히 뒤집어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시간을 돌이켜 볼 때 댐에 둑이 무너진다고 외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것은 제2의 이라크 전쟁을 막는 일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작고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건 어느 누구도 아닌 우리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더 눈을 크게 뜨고 내 이웃의 아픔과 외침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당장은 내게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고 지레 속단하지 마라. 그것은 결국 우리의 후세가 짊어지지 않아도 되는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며, 함께 나누는 공동체의 의미를 확대 재생산하는 일이 될 것이다. 

나 개인적으론, 이 책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글쎄, 만화로 의미를 전달하려고 하다 보니 약간은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우리가 어떻게 저항할 수 있을까를 보여주기 보단, 저자의 캐릭터에 맞게 은폐된 진실이나 정재계 인물들의 정치적 야합을 알라는데만 촛점을 맞추지 않았나 싶다.  그런 아쉬움만 걷어낸다면 이 책은 편하고 안락한 것에만 길들여지길 원하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기에 나름 좋은 책이라고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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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07-26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스텔라님.. 정말 다양한 책들을 읽으시네요.
새삼 감탄감탄 중~ 좋은 리뷰입니다.

stella.K 2010-07-26 16:13   좋아요 0 | URL
아유, 뭘요. 그나마 만화여서 보기가 좋았답니다.
마고님도 기회되시면 한번 읽어보세요.^^
 
산다는 것은 -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곱 가지 방법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작가 이기호는 이 책의 저자인 박범신 선생을 두고 모더니스트라고 했단다. 그러자 선생은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자신은 리얼리스트라고 했단다.(191p) 글쎄, 선생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리얼리스트라고 한 것은 이해가 가는데, 이기호 씨는 어떤 의미에서 모더니스트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말하건데 그는 휴머니스트, 즉 인본주의자다.  

사실 나는 선생께서 내신 <은교>라는 소설을 읽고 감동을 했고, 어디서건, 누구를 만나건 <은교>얘기를 했었다. 하도 많이 떠들고 다녀서 사람들은 아마도 내가 박범신 선생을 잘 알아서 그런가 보다, 오해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난 선생의 작품은 그것이 처음이고, 왜 이제사 선생을 알아 본 건지 새삼 송구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내가 왜 그토록 작가에 대해서 열광하는 정도가 되었는가 하면, 선생처럼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작가가 흔치 않아서다. 특히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서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이만큼이나 명징하게 그릴 수 있는 작가가 얼마나 되겠는가?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정말 전기에 감전된듯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다가왔냐면, 사실 이것들은 쉽게 까서 보여줄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욕구와 일곱 가지 정(喜怒哀樂愛惡慾)은 여러가지 사회적 관습에 갇혀 그것이 뭔지도 모른 체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설혹 안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도 모른 체 그것의 노예가 돼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씩 교차하는 이 감정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다스릴 수만 있다면 우린 그것들에 매이지 않고 보다 자유롭게 살아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진정한 인간해방이 이루어지는 것이겠지.     

사실 내가 <은교>에 대해서 열광했던 또 다른 이유가 하나가 더 있는데, 나는 그 작품을 통해 문학이 나가야할 바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문학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미 이것을 이루어 놓은 이론가,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내가 본 건, 이 오욕칠정을 그림으로써 진정한 인간 해방의 길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선생의 작품 속에 투영하고자 했던 건, 산업화 또는 경쟁 사회속에 인간의 가치가 함몰되어져 가고 있는 것을 설파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 산문집에 그것에 대한 사유가 고스란히 들어나고 있다. 

이 산문집은 그렇게 오욕칠정을 따서 7장의 구성으로 되어있는데 그의 부제는 '존재의 안부를 묻는 법'에 관해서다. 그러므로 어찌보면 딱히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을 굳이 설명하려 했던 건 아닌듯 하다. 그보단 에세이가 그렇듯, 저자가 사유한 것들을 자유롭게 풀어 가고자 오욕칠정의 구성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사실 오욕칠정이란 본질에 대한 연구는 심리학자나 철학자가 해도 충분한 것이 아니겠는가? 작가는 그것들을 통찰하고 눈으로 보듯이 증명해 보여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책은 주로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 삶에 대한 생각들을 미사여구 없이 직설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어 매력적이란 느낌까지 들게 만든다. 하지만, 선생은 책에서 때로 삶의 신산함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글쓰기에 대한 애증을 노래하기도 한다. 하긴, 삶은 살면 살수록 느긋하고, 여유롭고, 통찰 가능한 것 같아도 또 한편으론, 매우 피곤하고, 권태로우며, 허탈한 느낌을 갖게도 한다. 삶은 그런 것이다. 또 글쓰기는 어떤가? 글쎄, 선생만큼 치열하게 글을 써 보지 않아 뭐라 말하기 어렵지만 왜 선생이 이 책에서 그렇게 쓰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을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동시에 절망이고, 희망이었을 것이다. 선생이 얼마나 글쓰기를 사모하냐면, "내 안에 늙지 않는 괴물이 산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글을 안 쓰고 있으면 그것이 자신을 삼켜 버릴 것 같아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했을까? 그 글을 읽었을 때 나는, 선생은 글쓰기를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셨구나했다. 모르긴 해도 이 괴물에 진다면 그땐 이미 선생은 늙은 것이며,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될지도 모르겠단 강한 암시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청년 작가'란 수식어가 붙는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선생은 책에서 공히 말했거니와, 당신은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세 가지는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첫째, '아버지'가 되지 않을 것이고, 둘째, '작가'가 되지 않을 것이며, 셋째, 남편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142~146p) 난 그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 남자로 태어나 한 가정의 가장이 되고, 아버지로써 살아 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나는 여자지만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절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니 선생도 얼마나 힘드셨을까? 독자인 나는 어느새 딸의 심정이 되어서 선생의 마음을 헤아라게 되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또 그것이 인간의 길인 것을. 그러므로 필시 선생은 인간으로 태어난다면 성(性)만 바꿔서 어머니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작가로 살기는(특히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선생은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은지 밝혀놓지 않으셨다. 나라면,(주제 넘게도 내가 정말 작가로 살다가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음악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것도 클래식 연주가. 물론 그렇게 되기도 쉽지는 않지만 작가만 할까? 작가의 창작은 정말 고통스럽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나 다를바 없는, 맨땅에 헤딩하는 직업이다. 물론 경력은 쌓이겠지만 작가의 작업은 매번 새로운 것이어야 한다. 얼마나 피곤한가? 오죽했으면 가장 일찍 죽는 직업군 속에 작가가 들어가 있으려고? 하지만 클래식은 새로운 해석이다. 그 해석도 물론 쉽지 않지만 일정한 틀과 질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 견딜만한 직업이 아닐까? 그것이 무엇이건 너무 좋아서 다음 생에도 똑 같은 직업을 갖겟다고 한다면 그건 벌써 거짓말을 하는 것일게다. 

아무튼 선생의 글은 소박하다. 그리고 그 속에 가감없는 진실과 속 깊은 사유가 들어있어 좋다! 마치 소주는 내 입엔 여전히 쓴 술이긴 한데 소주가 맛있어지면 인생을 아는 것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그때 캬~!란 소리가 절로 나오는 것처럼, 선생의 글은 쓴데 캬~!란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읽고나면 허기진 배를 든든한 무엇으로 채운 느낌이고 위로 받는 느낌이다. 가까이 두고 힘들 때나 무료할 때 아무대나 펴서 읽으면 위로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이미 말했지만, 존재의 안부를 묻는다잖나? 작가 박범신의 안부의 인사를 한 번 받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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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0-06-26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기님 서재타고 왔어요.^^
마기님 말씀대로군요.^^
반갑습니다.

stella.K 2010-06-27 11:39   좋아요 0 | URL
아, 저도 반가워요. 꿈섬님!^^

비로그인 2010-06-26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후와님'의 서재에서 이 비슷한 포스팅을 접했었죠.
4가지 희노애락의 삶의 방식으로 대부분 살아가고 있다고 했었던가?
그 중에 '애'의 모습이 그분의 존재방식에 젤 가깝다고 하셨던게 기억나요.
난 희노애락 보다는...'욕'에 가깝다고 느껴요.
이상하게 들릴라나?ㅋㅋ
세상을 향한 어떤 하고자하는 의지, 욕구, 욕심...이런 것들이 절 살아가게 만든다는 생각에서 였죠.
한 번쯤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고 대처하는 방식이 어떤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stella.K 2010-06-27 11:40   좋아요 0 | URL
ㅎㅎ 마기님다워요.
솔직하고 거침없고...!^^

순오기 2010-06-29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캬~~~~~~~~~~란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리뷰예요!
나는 이렇게 자기화된 리뷰에 감동해요.

stella.K 2010-06-27 13:51   좋아요 0 | URL
ㅎㅎ고맙습니다.
정말 은혜받은 책은 리뷰도 삘 받아쓰게 되죠.
그나저나 다음 주 이주의 리뷰 될 수 있을까요?
괜히 추천이 많으면 자연 그 쪽으로 마음이 가요. 흐흐

루체오페르 2010-06-27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마음에 드는 책 이네요. 감사합니다.^^
저는 박범신 작가의 '촐라체' 가 참 감명 깊었습니다. 보면서 많이 울었네요.

stella.K 2010-06-27 13:48   좋아요 0 | URL
아, 촐라체 저도 읽어야 하는데 일케 못 읽고 있습니다.
읽어야 할 책은 그때 그때 읽는 것이 좋은 것 같아요.
쌓아놓기만 하고, 새책은 사고 싶은데 못 사겠고.
어쩌다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ㅜ
근데 괜찮으시면 추천 한 방 날려주시죠. 루체오페르님!^^

루체오페르 2010-06-2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추천 생각을 못했네요. 이런 센스가 ^^;
물론입니다~다음 뷰도 꾹!
책은 원래 쌓아놓고 살아야 제 맛 입니다.ㅎㅎ
법정 스님도 가장 버리기 어려운것이 책과 차(茶)욕심이었다고 마지막에야 버렸다고 하시더군요.

stella.K 2010-06-27 13:53   좋아요 0 | URL
오, 바로바로 쿡 서비스! 아주 바람직합니다.ㅋㅋ
법정 스님이 그리 말씀하셨다 이거죠. 좋습니다. 그까이꺼~~~!

라로 2010-06-27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일찍부터 찜해논 책인데,,,좋군요,,,
왜 책 제목이나 겉만 보고도 느낌이 오는 책들이 있잖아요,,,박범신의 <은교>도 그랬었고,,,,요즘 박범신 작가가 글빨이 오른것 같아서 좋네요~.

stella.K 2010-06-27 16:25   좋아요 0 | URL
박범신 선생의 글을 읽으면 이상하게 술이 땡겨요.
<은교> 땐 포도주가, 이 책은 소주가. 술도 잘 못하면서.ㅋ

혹시 사시게 되거든 땡스투 저한테 해 주실 거죠? 흐흐

도넛공주 2010-06-2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보다 리뷰가 더 좋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맛깔스런 리뷰입니다.

stella.K 2010-06-27 19:00   좋아요 0 | URL
오, 오랜만이세요, 도넛공주님. 잘 지내시죠?
고맙습니다. 그런데 가급적 추천도 해 주시면...흐흐

readersu 2010-06-2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와,멋진 서평이에욧^^
그래서 추천 누르고 가요 흐흐

앗, 로그인을 안 했더니;;;

stella.K 2010-06-28 10:55   좋아요 0 | URL
오, 리더수님!흐흑~

루체오페르 2010-07-02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이 글이 이주의 마이리뷰 였군요!
글도 좋지만...제가...
추천한 덕분...만은! 아니겠죠.ㅎㅎ
축하합니다^^

stella.K 2010-07-03 13:19   좋아요 0 | URL
ㅎㅎ 루체님! 고마워요.^^
 
오리진이 되라 - 운명을 바꾸는 창조의 기술
강신장 지음 / 쌤앤파커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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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창조성에 대해 이만큼 명쾌하고 똑떨어지는 책이 있을까? 게다가 설명하느라 질질거리지도 않는다. 매 쳅터마다 너무나 일목요연하게 맥을 잘 짚고 있어 일부러 머리 싸가면서 읽을 필요도 없다. 사례도 적절하게 써서 와, 이런 걸 언제 모아서 이렇게 재배치를 하는 걸까?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어디 그뿐인가? 저자는 이렇게 막힘없이 너무나 간단명료하게 자신이 보는 세상 또는 자신이 말하고 있는 창조력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 묘한 질투까지 나려고 했다. 이를테면 저자는 모든 것을 똑떨어지게 이해하고 파악하고 있는데, 나는 이게 버릇인 것인지 일종의 인생관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심각하다.' 즉 심각이 나의 컨셉이란 말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상대(저자 같은)가 아무리 간단 명료하게 논리에도 어긋남이 없이 얘기해줘도 잘 믿지 않는다. 그냥 후려치는 말 같아 스스로가 어떠한 사안에 대해 분석하고, 통찰하고 해답에 이를 때까지 그냥 내비둬야 한다. 설혹 그것이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솔직히 나에겐 이 책이 그런 책이다. 분명 질투날 정도로 명확한데, 왜 세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까? 저자의 말대로라면 세상은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하고, 풍성해져야 하는데 세상은 정말 좋아지고 있는가? 오히려 묘하게도 나에겐 그런 질문만 더 다가오게 만들었다.  

결국 이 책은 나에겐 번짓수를 잘못 찾은 책인지도 모르고, 아니면 내가 너무 나 중심적인 사고방식에만 빠져있어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며, 또 아니면 이 책 자체가 너무 한쪽에만 경도 되어서 그쪽만을 집중해서 보여주려고만 하는 한계를 지닌 것인지도 모른다. 즉 인간의 창조성에 대해 개괄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기는 한데 나열만 있다뿐이지 실제적으로 인간의 창조성 그 자체에 대해선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책이라는 것이다.  

하긴, 이 책을 어떤 범주에 넣을 것이냐에 따라 이 책은 읽을 가치가 달라질 수도 있다고 본다. 이를테면 이건 연구서는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탐구적이고 보고 중심이라면 아마도 인문쪽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인간의 창조성이 인간의 삶을 얼마나 새롭게 하며 세상을 얼마나 풍요롭게 할 것이냐를 풍부한 사례를 곁들여 즐겁게 보여주는 엔터테인먼트한 요소들이 더 많다.(그건 정말 그렇다) 그렇게 즐겨가며 읽을 거리를 찾는다면 이 책을 읽어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계발서들이 다 그렇듯이, 이 책도 읽다보면 인간의 무한한 잠재성을 어떻게 하면 산업화와 현대화에 이바지 하도록 만들 것이냐에 그 결론을 두고 있어 약간은 씁쓸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즉 그 범주 안에서 조금 포괄적으로 새로운 것을 시도할 뿐 새로운 가치를 보여주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책을 몇 십년간 읽다보니 무조건 책은 좋다는 식은 나에겐 잘 통하지 않게 되었다.뭐라도 트집을 잡아야 될 것 같은 못된 버릇이 생겼다. 그걸 좋게 말하면 감식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자랑할 정도는 아니니 그냥 필요악쯤으로 해 둔다. 특히 이 책에서 보면 저자는 CEO들을 위해 인문학과 접목시킨 여러 프로그램들을 개발했다고 자랑처럼 늘어 놓았다. 물론 좋은 일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고. 하지만 그렇게 잘나고 똑똑한 CEO만 상대로 하지 마시고, 일반인들과 소외계층을 위해 그런 프로그램을 개발시킬 의향이 없느냐고 묻고 싶어졌다. 그렇지 않으면 뭐란 말인가? 능력있는 사람은 더 좋은 것만을 누리게 되고, 소외계층을 포함에 일반 사람들은 누릴 수 없게된다. 그런 갭만을 벌여놓고 인문학이 CEO들에 얼마나 중요하냐고 말한다면 도대체 이 책은 누구를 위한 책이냐고 묻고 싶어진다. 그리고 몇년 전부터 미국에서 불고 있다던 빈민층을 위한 희망의 인문학을 떠올렸다. 인문학이 경영을 살린다면 그것은 2차적인 문제다. 인문학이 사람을 살 수 있는 희망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것처럼 인간의 창조성이 그리도 중요하다면 사람을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경영이라는 틀에서만 보여준다는 건 그것을 너무 좁게만 보는 것 같아 아쉽다.  

아무튼 난 이 책에 대하여, 읽을테면 읽으시라. 나쁠 것은 없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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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6-2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능력있는 인간들을 위한 개발서군요.
개나 줘버려!...뭐 이런 느낌이 풍겨요~~ㅋㅋ

stella.K 2010-06-20 17:39   좋아요 0 | URL
헉, 제가 그랬습니까?
그래도 많이 완곡해서 썼다고 생각하는데 이거 클났습니다.ㅋㅋ

마녀고양이 2010-06-21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자기 개발서들은 별로 신뢰하지 않게 되더라구요.
읽다보면, 대부분... 휘리릭하고 끝내게 되잖아요.
인간이란 감정에 의해 움직히는 동물이지, 역시 머리로 움직이는 동물은 아닌듯 해요.

stella.K 2010-06-21 19:49   좋아요 0 | URL
어떤 자기 개발서는 그래도 읽을만 하기도 해요.
좀 묵직하고 생각해 볼만한 게 더러는 있긴하죠.
그런데 대부분은 말씀하신 것처럼 가벼운 것들이 많죠.
이 책도 일목요연해서 좋긴한데 그 범주안에 들어가지 않나 싶어요.
 
원래는 이 책을 먼저 읽을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운명이다 (반양장) - 노무현 자서전
노무현 지음, 유시민 정리, 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엮음 / 돌베개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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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보다 일찍 우리 곁에 온 자서전 

이 책은 자서전이라고는 하지만 좀 특별한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책에서도 밝혔거니와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했다고는 하지만 자서전을 그리 빨리 쓸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것은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현역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자신의 자서전으로 인해 그 모든 이들에게 누가 될까 봐 극히 꺼려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분은 자서전을 언젠가는 낼 생각을 하고 계셨고, 그것을 위해 틈틈히 그 윤곽을 구상하고 조금조금씩 메모하듯이 글을 써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유시민 씨가 그것을 모아 대신 썼기 대문에 사후 자서전이면서 동시에 대필 자서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생각보다 훨씬 일찍 우리 곁에 온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분이 이 책에서도 밝혔다시피, 자서전이라고 하면 성공한 사람의 화려한 성공기가 되어야겠지만, 당신 스스로도 이것은 실패한 사람의 자서전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상처와 굴욕의 수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전자의 자서전이 얼마나 허울 좋은 겉치장에만 치중하고 있는지. 인간의 진실은 그런 것에 있지 않고 아픔과 상처 속에 있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 책은 고 노무현 대통령의 낮은 목소리를 담은 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글로서도 풀어내지 못했다면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우리 글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란 생각을 했었다. 사람 누구든 말 못할 진실은 다 가지고 있다. 그분은 일국의 대통령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슴에 묻어었야 했을까? 그것을 글로서도 풀어낼 수 없다면 그분의 한은 죽어서도 풀 수 없었을 것이고, 그분이 부엉이 바위에 자신을 던지기 바로 직전에 썼다는 유서 조차도 남기지 못했을 것이며, 그분의 애끊는 가슴을 우리가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그분은 이 글을 쓰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더 슬프고 참담한 마음이었을까? 아니면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랬다고, 잠시 잠깐이나마 위로를 받아을까?  

너무나 부침이 많았던 대통령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곳곳에 그분은 낮은 목소리로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국민에게 미안해 하셨고, 노동자들에게 미안해 하셨으며, 자신과 함께한 가족들과 참모들에게 미안해 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줬던 사람들, 이를테면 형 건평 씨를 비롯해 친분이 있었던 기업인들에겐 미안함을 떠나서 일종의 죄책감까지 느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랬다. 보수에서 진보의 첫 대통령, 평화적 정권이양이란 상징적 인물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은 그의 재임 시절 사람들에게 늘 그렇게 나약한 대통령으로 비춰졌다. 나는 이런 대통령이 솔직히 싫었다. 더구나 대통령 못해 먹겠다는 말까지 그의 입에서 나왔다지 않은가?(그것은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이 책에도 언급되어지기도 했다) 물론 그 말이 반드시 무책임한 말은 아닐 것이다. 너무 힘들어서 했던 말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우리 국민 누구도 대통령에게서 이 말을 들어야 할 책임이나 권리는 없다. 그분을 직접적으로 응원하진 않았지만 힘들어도 맡은 바 대통령의 임무를 다해주길 바랐다. 보라. 세상에 어느 대통령도 스스로 하야한 대통령은 있었어도 지레 못해 먹겠다고 팽개쳐버리듯 하는 대통령이 있었는가?   

하지만 그분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그분의 지나온 발자취를 보면 너무나 부침이 많았었다. 세상은 그를 가만 놔 두지 않았다. 특히 그분은 임기 시작 때부터 언론이란 철창에 갇혀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어떻게 이 나라의 모든 언론이 그분을 일제히 비난할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는 가짜다. 노무현이 가짜거나 언론이 가짜거나.  

더구나 '탄핵'이라고 하는 이 치욕스럽고도 유치한 정치쇼는 정말 피해 갔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분을 탄핵 소추하는데 앞장 섰던 몇몇의 정치인들. 그들은 아예 그분의 하야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명분이 마땅치 않았고, 그분을 탄핵 소추하면서 그것이 마치 국민 전체의 뜻을 대변하는 양 거들먹거렸다. 지금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분의 장례식 때 오기나 했을까? 

우리나라의 정치적인 악과 언론의 악에 대하여          

물론 그분은 정의의 사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분의 올곧은 성품으로 볼 때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그분은 이 나라가 정권이양은 했을지 모르나 정치인의 의식이 보수든 진보든 하나도 나을 것이 없는 것에 대해 개탄했고, 이 나라 언론에 대해선 단호했으며 그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특히 조선일보 신문을 나르던 소년에게서 촉발된 조선일보와의 끝나지 않은 싸움은 읽는 나 조차도 분개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분의 언론에 대한 메스는 가차없어 보인다. 지난 시절 언론은 군부 독재에 꼭두각시 노릇만 하더니 독재 시대가 끝나고 민주화가 되면서 자생할 줄 모르고 힘있는 권력에 붙어 기생하더니 그 사이 힘을 키워 절대권력으로 군림하려 한다고 몰아 부쳤다. 그러면서 그분은 언론이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명박 대통령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것은 여지없이 맞아 떨어져 이명박 대통령을 지금도 갈구고, 위협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론은 어느 항생제로도 듣지 않고 변신이 가능하며 한번 변신할 때마다 곱절로 그 크기를 늘려나가는 수퍼 바이러스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언론의 그런 고질적인 병폐를 알아서일까? 그분은 국정원에 대해선 중립적인 거리감을 유지 하셨다. 그것은 확실히 잘한 일이라고 보아진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살아생전 그분의 정적들은 또 어떠했는가? 누구에게든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정적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정적들 개인으로는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사람인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권력에 철저하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운명이었기에 그분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은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럴 수 있어도 눈을 가렸어야 했을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악인 동시에 필요악처럼도 보인다. 그만큼 정치는 비정한 것이다.

노무현과 전태일 

이 글은 정말 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읽어낼 수 없었던 책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은 신파는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가급적 감정을 절제하고, 자신이 보고 느끼고 체험한 것에 충실히 썼다고 봐진다. 그래서 오히려 더 슬펐다. 읽으면서 내내 내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정치를 몰라요." 내지는 "정치에 관심없어요."라고 말하는 건 결코 자랑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러고 있는 사이 우린 나라의 대통령을 비명에 보내야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더 정확히는, 정치는 몰라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사람의 외침과 그 사람의 영혼에 대해서 무관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왠지 모르게 전태일을 생각했다. 노동자와 노동현실의 개선을 위해 기꺼이 그의 몸과 영혼을 불살랐다던 전태일과 부엉이 바위에 몸을 날렸던 노무현.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그토록 애쓰셨던 분이 그렇게 비명에 가셨다는 것에서 뭔가 모르게 전태일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어 보였다. 그분 역시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고 진정한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지 않았던가? 

그런 점에서 그분은 죽지 말았어야 했고, 동시에 죽어야만 했었다고 생각한다. 죽지 않고서야 그분의 결백과 자신으로 인해 고초를 당했던 많은 사람은 어찌 구할 수 있겠으며,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는 민주화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한 일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검찰과 언론이 그분을 압박해 올 때 오죽했으면 그분은 인터넷을 통해 국민들에게 자신을 버려달라고 호소했을까?   

전 대통령에 대한 예우에 관하여 

그분이 탄핵에서 풀려났을 때 노사모 많은 회원들은 그를 환영했다고 했다. 그것에 대해 영부인 권양숙 여사는 흥분했지만 그분은 두려워 했다고 했다. 자신을 보고 환호하는 저 무리들. 저들이 또 무엇을 달라고 할지 몰라서. 원했다면 무엇을 원했을까?  

책 말미에 보면 이명박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예방을 받던 날, 그는 전 대통령의 예우 문화를 확실히 세우겠노라고 약속했다고 했다. 그것은 그분을 당황스럽게 만들긴 했지만 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니 그것을 지켜주길 속으로 바랬다고 한다.  

그분은 당황했을지 몰라도 나는 그 부분에선 당시 대통령 당선자로서의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생각이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을 보라. 그들의 화려한 재임과 굴욕적인 퇴임 이후는 극명하게 갈린다. 왜 나라를 위해 일해놓고 후에 가서 그처럼 굴욕을 당해야 하는지? 물론 그들 중엔 반드시 심판 받아 마땅한 독재의 주역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바라는 대통령에 대한 예우란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퇴임 후에도 국민들로 부터 인정 받고 사랑 받는 대통령.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동안 그것에 근접해 가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분이 재임 시절 단 한 시도 편한 적이 있었는가? 이제 퇴임을 했으니 그분는 이후에 평화로운 노후를 꿈 꿨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대통령도 인간일진데 잘한 것이 있으면 못한 것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그 잘못한 것이 나라를 말아먹는 잘못이 아닌 다음에야 차기 대통령이 잘해 주길 바라면서 덥어 갔어야 했다. 전 대통령의 예우를 약속했던 이명박 대통령과 그분의 여전한 적인 언론과 검찰이 결탁을 해서 하지만 검찰과 언론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밖았다.   

모르긴 해도 그 예우를 스스로 깬 건 이명박 대통령이었으니 그의 퇴임 후도 그다지 안정적여 보이지 않느다. 그리고 우린 또 한 번 대통령의 불명예를 지켜봐야 할 것도 같다. 

별이 된 대통령       

알고보면 노무현 대통령만큼 똑똑한 대통령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박식하기로야 노무현 대통령도 인정했던 고 김대중 대통령을 꼽지 않을 수야 없겠지만, 노무현 대통령만큼 저술을 많이 남긴 대통령이 또 있을까? 물론 거기엔 타의에 의해 씌어진 책들도 있긴 하지만 그만큼 그는 미디어를 이용할 줄 알았고(TV를 통한 검찰과의 대화도 시도를 했다. 비록 이렇다할 성과는 없었지만) 그만큼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분은 재임 시절이나 퇴임 후에도 할 일이 정말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모든 것을 뒤로한채 운명을 달리했다. 그리고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전설이 되었다면 너무 과한 표현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분의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고 해도 나 개인적으론 자살만큼은 용납하기 어려우니까. 그렇다면 그냥 저 어두운 밤하늘의 한 점 별이 되었다고 하자. 사실 이 책은 개인 자서전인이고 또 여러 가지 특수한 배경 때문에 온전히 감정을 배제하고 읽어 내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만큼 이제 앞으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좀 더 객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든 자리는 표가 안 나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더니 그 분의 빈 자리에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 

그래도 모르긴 해도 앞으로 한 20년 안에 노무현 같은 사람이 대통령으로 나오지 않겠는가? 바라건데 그때가 되면 정치적 상황이 지금 보다는 훨씬 나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또 한 번 한 한 대통령을 비운에 보내는 그런 불행한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이 지면을 빌어 대한민국의 한 사람으로서 고 노무현 대통령께 사죄를 드리고 싶다.  

"노무현 대통령님, 당신을 몰라 뵈서 정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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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 산티아고로 가는 아홉 갈래 길
장 이브 그레그와르 지음, 이재형 옮김 / 소동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부엔 까미노. 이말은 에스파냐어로 "좋은 여행 하세요"란 인삿말이라고 한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하는데, 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혼자하는 것이며, 그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서로 도우며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그 여행에서 자신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여행은 순례의 길이라고 표현되기도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오늘 날의 여행은 그것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또 다른 배설로 전락한지 오래다. 어딜가도 편안한 휴식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서로가 어깨를 맞부딪히며 놀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편안한 여행을 위해 쓸 물건들은 넘쳐난다. 게다가 그 여행을 위한 '바가지 요금'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어버린지도 오래다.그것을 감수하고라도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에서 자기 정화가 된다면 뭐 그 여행을 나쁘다고 비난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 보인다. 

그런데 여행은 역시 걷는 것에 있지 않을까? 걸으면서 자신을 반성하고, 깨닫고, 정화하는 것 바로 그것이 여행의 참된 의미가 아니겠는가? 참된 자아에 이른 사람은 하나 같이 이 걷기의 과정을 통과한 것 같다. 붓다가 그랬고,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가 그랬고, 허다한 많은 순례자들이 그랬다.  

왜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에 열광하고 매료 당하는 것일까? 보통 그 장도에 오르는 사람을 순례자라고 표현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즐기고, 쉬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기꺼이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우린 그 말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도대체 산티아고를 떠났던 사람들은 무엇을 찾았을까? 사실 이책의 장점은 강렬하고도 선명한 사진을 볼 수 있다는 것인데, 너무도 좋아 정신없이 빠져들어서일까? 내가 정말로 알고 싶은 것에 답을 찾기엔 미흡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여행 작가가 어느 특정 지역을 여행하고 글을 쓸 때 보는 각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그 글을 씀씀이가 달라질 수 있는 것 같다.  

나의 경우, 몇년 전 젊은 작가가 실제로 산티아고를 여행하고 쓴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그 책은 이책 보다 훨씬 얇은데 젊은이답게 주로 여행에서 본 것들 체험한 것들을 위주로 썼으며, 어찌나 겸손한지 스스로를 순례자로 칭하는 것 조차도 꺼려했던 것을 기억한다. 그냥 여행자이길 바랬던 것이다. 나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이를테면 수박에 줄긋는다고 다 수박인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무튼 그책은 읽는 나에게도 어느 정도 재미를 선사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말미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이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면 좀 더 강하게 어떤 일이라도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것 또한 여행의 의미인 것도 사실이다. 그의 말마따나 그 여행을 계기로 열심히 살고 있지 않을까? 여행은 이렇게 자신을 이기는데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이책은 그 책과 좀 다르다. 저자 특유의 관록이 있어서일까? 문체에서 훨씬 여유가 느껴지고, 카톨릭 유적지이기도 하니 건물 하나, 자연 풍광 하나에도 간결하지만 강렬한 의미를 담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저자의 전직이 기자였던 만큼 자신의 체험이나 해석을 최대한 절제하고 전달에 촛점을 맞춘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역시 내가 앞서 읽었던 책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내 개인적으론 체험과 깨달음에 촛점을 맞춘 전자의 책이 더 매력적이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없다. 하지만 산티아고를 좀 더 객관적으로 알기를 원한다면 이책이 더 좋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이책 차체로도 약간의 시각차가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장점이 단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저어되기도 한다. 그것은 사진이 그야말로 하나의 예술 작품같다. 그것은 일부러 그렇게 기획된 것으로도 보여진다. 하지만 실제로 그곳을 가보면 책에서 봤던만큼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실제로 걷는 게 너무 힘이 들어서 사진처럼 그 아름다운 풍광을 다 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땐 이책이 그 빈곳을 매꿔 줄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도 사진만큼 아름다울지 의문이라고 트집 잡아 보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가 보기도 전에 편견부터 생긴 나의 소치인지도 모르겠다. 모름지기 여행을 위한 여행이 아니라 순례를 위한 여행인데 좀 조악하고, 투박하고, 자연그대로인 것에 나를 맞겨 보는 것이 산타아고 여행의 의미는 아닐까 했다. 그런데 너무 멋있고, 너무나도 목가적이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과연 이 길을 야고보가 걷고 순교를 했을까? 오히려 의문스럽다. 

이책에서 특이한 점은, 사진을 보다보면 간혹 설경이 나오기도 한다. 태양이 강렬해 걷기가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고 들었는데 그렇게만 들으면 꼭 거기는 사철 더울 것만 같다. 그런데 사계절이 존재한다는 게 오히려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앞선 책을 쓴 저자는 여름이던가? 그 계절에 여행을 하고 그책을 썼던 것으로 안다. 이래서 여행은 직접 해 보지 않고서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난 유감스럽게도 걷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하지만 또 모를 일이다. 이런 사람이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 또 다른 힘을 발휘하게 될지.) 그래서 제주 올레 길도 못 가본 사람이 산티아고를 갈 수 있을까? 언감생심이긴 하다. 하지만 눈이 보배라고 인간 누구에게나 있을지도 모를 여행본능이 조금은 꿈틀거리는 걸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기회가 된다면 여행을 해 보고 싶다. 그리고 그곳을 실제로 걷는다면 정말 야고보의 행적을 느껴보고 싶다. 

더불어, 이책은 여러모로 유감스러운 책인데 그다지 많은 건 아니지만, 오탈자가 간혹 발견이 되기도 했고 주석 번호처럼 간혹 조그만 번호가 군데군데 매겨져 있는데 그 번호에 대한 어떠한 의미도 나는 발견해 내지 못했다. 그 번호는 뭘 의미하는 걸까? 그래도 사진은 너무 아름다워 두고 두고 보고 싶게 만드는 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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