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다 - 우리 시대 전태일을 응원한다
하종강 외 지음, 레디앙, 후마니타스, 삶이보이는창, 철수와영희 기획 / 철수와영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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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이나 경제 이론을 보면, 덜 똑똑한 사람은 자기 몸을 써서 일을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일을 분담 내지는 위임하므로 자신은 관리만 한다는 그런 얘기가 있다. 또, 20%는 관리를 하고, 80%는 노동을 한다는 그런 얘기를 하기도 한다. 어찌보면 그럴 듯하고, 합리적여 보이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경영이나 경제 이론은 거의 대부분 승자독식의, 피지배층에 대한 지배층의 논리로 무장된 것들이 더 많지 않은가? 즉, 우파적 지식들.  세상엔 저렇게 많은 전태일이 살기위해 버둥거리고 있는데 그런거 보면 참 신선놀음 같다. 과연 전태일의 후예를 위한 이론은 없는 것인가?  

이 책은 특이하게도 네 개의 출판사(레디앙, 후마니타스, 삶이 보이는 창, 철수와 영희)와 손아람외 5명의 저자가 공동으로 오늘 날의 노동 현실에 대해서 쓴 책이다. 먼저, 손아람은 오늘을 살고 있는 전태일의 후예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선다(물론 책에선 공식적으로 후예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디의 전태일. 하며 마치 40년 전 죽은 전태일이 살아돌아 온 양 친근감(?) 있게 부르고 있다. 하지만 전태일의 후예가 더 맞는 것 같다. 전태일이라면 왠지 복제된 것 같고, 왠지 그들도 어느 노동판에서 분신해야 하는 불길한 운명을 답습하게 될 것만 같아서 말이지.). 그가 만난 전태일의 후예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 흔하다(?)는 sky대 출신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류는 아니어도 2류나 3류 기업체를 다니는 회사원도 아니다. 다 아르바이트 아니면 비고용 근로자이다. 그 중 소규모 기업체의 사장님 한 분이 끼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오늘 날의 노동 현실에 대해 이론이 아닌 피 같은 증언(?)을 하고 있다. 특히,  손아람이 만난 4사람은 피고용인으로서 고용인과 고용 현실에 대해서 말했다면, 유일하게 그 사장님은 고용인으로서 본, 피고용인의 근로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는 점이 유독 눈에 띈다.  말하자면 같은 가족 문제를 봐도 시어머니가 보는 입장이 다르고, 며느리가 보는 입장이 다르다. 그런데 제3자가 볼 때 그 둘의 입장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공감한다. 하지만 이 문제가 어떻게 해결이 되어야 할지, 동시에 난감하다.  손아람이 만났던 유일한 고용주였던 인천의 전태일의 말을 인용해 보면 20대 사람이 다르고, 30대, 40대의 사람이 일하는 자세가 다르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노동'이란 건 인간의 생애와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지, 하루 아침에 개혁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 본다.  

그래도 노동은 사회와 밀접히 관련이 있다. 노동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옛날 40년 전 전태일 열사가 살았던 시대만 같겠는가? 과연 인간답게 살 권리 때문에 분신할 사람이 또 나오겠는가? 그래도 노동의 문제는 더 첨예해진 것도 같다. 예전엔 절대적 빈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해야 했지만, 오늘 날은 노동이 얼마나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는가에 대한 이해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도 해마다 11월이 되면 전태일 열사를 추모하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노동은 단순히 먹고 살기위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위해 싸웠으니까. 하지만 노동의 문제는 인권의 문제. 또는 노사의 이해 관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화 제도와도 맞물려 있는 것이다. 알겠지만, 사회란 힘있는 자가 지배하게끔 되어있다. 그들에 의해 지배되고 관리되는 비합리적 모순 때문에 노동의 문제는 항상 비등점을 향해 끊고 있는 99도다. 언제 중산층에서 하류 계급이 될지 모르며, 고용인에서 피고용이 될지 모른다. 특히 이런 것에 대한 사회 안전망이 충분히 조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고유의 정서가 부합이 되면서 이 '노동'이란 말이 얼마나 사람의 의식을 후벼놓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이 책의 말미에 가면 '노동'의 정의에 대해 콕콕 집어주고 있는데, 그건 확실히 그것을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해 줘서 좋다. '노동'이란 말은 다른 말로 '근로'란 말로도 쓰이고 있는데, 이를 위해 김영삼 전 대통령이 얼마나 핏대를 세웠는지 알게되면 놀랍다(뭐 그 정도 가지고 정색을!) 노동이나 근로나 도찐개찐 아닌가? 우리나라 사람이 원래 노동이란 게 없는 사람을 대변하는 것처럼 인식되어있어, 양반은 배를 곯아 죽을지언정 일은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천시해 온 것도 사실이다.  예수님은, 일하지 않는자는 먹지도 말라고 했다. 가나안 농군학교의 고 김용기 장로는 게으름은 죄라고 생각해 누워있는 돌 조차도 바로 세워 놓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니 어디 가서 양반이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정신병원에 들어간다. 하다못해, 고용인, 관리인들도 노동을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이 글을 처음 시작한 저 말은 엄밀한 의미에서 옳은 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는 노동이 노동으로 정당하게 취급 받지 못하고 그것이 사람을 보고, 점수 매기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스펙'의 문제로.  

이 책이 좀 아쉬운 건, 너무 젊은 사람의 목소리로 편향되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글쎄, 우리나라에서 '근로'가  필요한 세대가 꼭 젊은 사람만인가?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은? 늙었다는 것 외엔 아직도 충분히 일할 수 있는데 할 일이 없는 노년은? 잉여 취급 받는 여성이나 장애자는? 그들도 일하고 싶어한다. 그런 다양한 계층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고, 젊은 사람에게만 고정해서 오늘 날의 노동 현실을 말하게 한건 좀 아쉽다. 오히려 나이 먹은 사람이 들으면 그냥 젊은 사람의 볼멘 소리 같다.  오늘 날의 젊은이들은 옛날에 비해 얼마나 선택의 폭이 다양해졌는가? 그래도 말 하나는 야물딱지게 한다. '너 아니면 일할 사람은 많다'라는 말대신 '여기가 아니어도 일 할 곳은 많다'라는 말이 나올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135p)  맞는 말이다. 그래야 한다. 그런데 이 말에 허는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자기에게 맞는 곳에서 일하지 않고, 무조건 남이 보기에 좋은데로만 자꾸 가려고 하면 어쩔건데? 오늘의 일하고자 하는 사람이 저 말이 진실이란 걸 증명해 보이려면 스스로가 '스펙'의 거미줄에 자신을 옭아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우리의 노동이 보다 대우 받으려면 1등에서 꼴등까지 사람을 줄 세우는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세상에 영어 잘하는 사람이 글로벌 인재라고 누가 속단하랴? 사람 마다 자기 잘하는 게 따로 있는데 그 하나 하나에 대해 인정 받을 수 없다면 그러고도 선진국이라 말할 수 있는가? 알겠지만, 유럽의 선진국들은 어린 나이에 사람의 적성을 고려해서 기술자로, 학자로, 운동선수로 일찌감치 길을 열어준다는데, 신성한 학문을 스펙과 신변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부족해 졸업장 도용하고, 학벌 변조하고 난리 브루스가 아닌가? 이런 나라에서 노동이 신성해지는 건 아직 좀 먼 것 같다. 무엇보다 주부의 가사 노동과 장애인의 복지는 정말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도 전태일인가? 일하는 전태일.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전태일. 우리가 인간으로 한국땅에 살고 있는한 이 질문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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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16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전 전태일 기일을 맞아,전태일 여동생 분이 나와 인터뷰 하는 걸 들었어요.
어디 외국에 나가 아주 공부도 많이 하고 들어왔는데,다시 동대문 시장으로 돌아왔대요.
수다공방이었나?뭐,그런 걸 운영하고 계신다죠~
그렇게 전태일을 이어가고 있는 동생분을 보면서,
혹...태생이나 유전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별로 안 웃기는 조크였어요~^^)

stella.K 2010-11-17 10:58   좋아요 0 | URL
대단하군요. 아마도 오빠를 잊지 못하는 마음인지도 모르겠네요.
짠하네요.

2010-11-16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7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11-16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가장 아쉬운 것은,
왜 우리나라에서의 일이란 모 아니면 도 냐는 거예요.
all or nothing. 몸바쳐 하든지 아예 하지 말든지.
주부들에게는 힘든 말이죠. 그리고, 요즘 또 깜짝 놀란게..
엄청난 시급의 차이랄까요. 상위 계층의 월급과, 중하위 계층(예로, 보육 교사)의
월급 차이가 그리 큰 줄 몰랐습니다.

stella.K 2010-11-17 13:2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우린 좀 세상을 넓게 볼 필요가 있는데 그게 왜
안되는 걸까요?
어떤 식으로든 노동의 문제에 대해서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보고 개선해 나가는 노력을 했으면 좋겠어요.
우린 빈부의 격차를 극복할 수 있을지 걱정되요.ㅠ

도란도란 2010-11-19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스텔라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스텔라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덧글남기고가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cyrus 2010-11-22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정규직, 노동과 관련된 주제의 책이 관심이 가는데 이 책 한 번
읽어봐야겠네요. 사실, 읽고 싶은 이유가 출판사를 평소에 눈여겨 보고 있었던 것도
있었고요. 스텔라님도 아실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지인으로부터 알게된 사실인데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지원해주는 책 카페가 서울 어딘가에(?)문열었다는구요.
사실 제가 대구 출신이라 서울 어느 동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색창에 '후마니타스 책다방' 이라 검색하시면 책 다방 온라인 카페가 나올겁니다.
그 곳에서 책 읽으면서 커피를 마시는 것은 물론이고, 독서 토론 모임 장소로도
제격이고요. 저도 언젠가 서울에 상경하면 한 번 들리고 싶은 1순위 장소랍니다.^^

stella.K 2010-11-22 13:08   좋아요 0 | URL
아, 그럼 시루스님 대구에 사시는군요.
위치가 합정동이네요. 그쪽이 원래 출판사가 밀집해있는 곳이거든요.
저도 기회되면 한 번 들려봐야겠네요. 고맙습니다.^^

감은빛 2010-11-25 01:52   좋아요 0 | URL
합정역에서 무척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몇 번 출구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북카페입니다.
출판사 건물 1층에 있습니다.

출판사가 직접 운영하는 북카페가 하나둘 생기기 시작하네요.
이것도 유행인가봐요.

stella.K 2010-11-25 12:10   좋아요 0 | URL
제가 그런델 잘 안 가서 그렇지 모르긴해도 반길만한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감은빛 2010-11-25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몇 번 읽다보니 스텔라님 서평은 늘 어떤 패턴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역시 스텔라님! 하고 감탄해봅니다. ^^

stella.K 2010-11-25 12:09   좋아요 0 | URL
헉, 어떤 패턴이요?
전 그저 생각나는대로 써서 제 패턴이 뭔지 모르겠어요.ㅠ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그리스도인의 자존심 -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4 신 옥한흠 다락방 4
옥한흠 지음 / 국제제자훈련원(DMI.디엠출판유통)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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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자를 알게된 것은 20년쯤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은 10년쯤 후에 샀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당시 이 책을 사 놓고도 결국 완독을 하지 못했다. 사실 이 책은 설교집으로서 그때나 지금이나 난 설교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알겠지만 '설교'라는 게 너무 옳은 말을 해서 듣기에 거북한 것이 아니던가? 아니, 들을 수는 있다. 하지만 실천이 없기에 차라리 안 듣기를 바라는 것이 설교다.  이렇게 설교는 이래저래 듣기가 편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물며 그것을 읽기까지 하는 건 얼마나 고역이랴? 더구나 그 무렵 나는 한창 혈기가 왕성한 때라 이런 옳은 말을 마냥 간절하게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기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너무 많았고, 동시에 나는 교회를 다녔지만 교회를 비판했다.  이를테면 설교는 저렇게 좋은데 왜 기독교는 이 모양인가? 하며. 그러면서 이 책을  사 볼 생각을 했던 건 왜였을까? 그것은 단연 책의 제목이 끌려서였을 것이다. 교인이 교인답지 못한 건 결국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의 자존심내지는 자긍심이 없어서일테니 과연 저자는 이것에 대해 뭐라고 하는지 알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저자는 우리나라에 내로라는 명설교가다. 그래도 결국 못 읽었다.        

그런데 지난 9월, 이 명설교가가 타계했다. 내가 그를 안지 20년만의 일이고, 지금은 그때만큼 혈기가 왕성한 것도 아니며,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지도 않다. 그 시절엔 칼끝처럼 교회를 비판하며 다녔는데, 지금은 그 칼끝이 많이 무뎌졌다. 비판이 없어졌다는 것이 좋은 일인지, 아니면 나쁜 일인지 모르겠다. 비판이 없어졌다고 그만큼 내 신앙이 깊어졌기 때문이라고 속단하고 싶지는 않다.  그냥 포기할 거 포기하고, 눈감을 거 있으면 눈감고, 귀 막을 거 있으면 귀 막고 그렇게 무뎌진 것 같다. 결국 교회의 기존 질서에 편입된 느낌이랄까? 더구나 모순이긴 한데, 지금 난 교회 봉사를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교회 봉사를 하지 않으니 그렇게 무뎌지는 것이다. 처음엔 이것이 좋았다.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를 비판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를 떠나지도 못하는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인인 것만 같았다. 하지만 돌이켜 보건데 비판 의식이 없어진다는 건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것은 그만큼 더 좋아질 수 있는 기회를 차단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남는 상태. 

옥한흠 목사가 타계를 하고 나니 많은 점에서 아쉬웠다. 이 꼬장꼬장한 어르신께서 마냥 좋아서 교회를 세우고, 강단을 지키셨을까? 물론 사랑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했기에 오늘 날 기독교회를 비판하는 세력으로부터 최선봉에서 칼과 화살을 맞았으리라. 내가 조금만 더 생각이 깊었더라면 그분이 맞은 화살을 막아내지는 못해도 같이 동참하는 마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는 그다지 부드럽지가 못했다. 난 늘, 저 분이 뭔가 심오하고 깊이 있는 설교를 하고 있는 것마는 사실인데 그것이 가슴까지 내려가 꽂히지 못했다. 알면 동참할 수가 있는데 모르면 여전히 비판만 할 뿐이다. 당신은 왜 그리 어렵냐며.  

모름지기 설교든, 강의든 쉽게 흡수되어 빠져나가고 잊혀지기 보다, 거칠지만 오래도록 남아서 갈고, 음미하게 만드는 것이 좋다. 옥한흠 목사는 마치 서당의 훈장 선생님 같다. 얼마나 단아하고 올곧은지. 알겠지만 서당에서 배우는 것들은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운 것들마는 아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끊임없이 반복해서 들으면 어느 순간 깨닫게 시작하는 것처럼, 그분의 설교는 그런 것이었다. 한마디로 훈장 선생님 같은 설교를 그는 매번 핏발을 세우고 탑을 쌓는 마음으로 쌓아 올렸던 것이다. 

그분은 교인이 교인답지 못한 것을 늘 못 견뎌하셨다. 그는 교회에선 왕자 같이 행동하면서, 세상에서는 걸인처럼 행세하는 그리스도인을 부끄러워하셨다. 그래서 이 책은 바로 어떻게 하면 교인들이 교회안에서나 밖에서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 수 있을까에 대한 핏발선 외침을 담고 있다.  

그분은 쉽게 다가가기엔 어딘지 모르게 어렵다. 그야말로 옛날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데 그분이야말로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할 것만 같은 권위가 느껴진다.  우린 흔히 윗사람이라면 다가가기 편하고 부드럽고 친근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미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항상 입안에 옥구슬 같이 청산유수로 격려와 위로만 해 주길 바란다. 하지만 옥한흠 목사님은 항상 그러지마는 않으셨다. 설혹 그렇게 푸근하고 좋은 인상만 주는 사람이고 싶어도 그분의 인상이 그것을 받혀주지 못했다. 그러리만치 그분은 근본적인 실체와 진실에 벗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것을 똑바로 응시하고 말씀하시기를 좋아하셨다. 

그분의 설교는 왜 그리 딱딱하냐고, 거칠고, 아프냐고 속으로 투정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분의 진실이 담긴 설교가 진심으로 좋아졌던 때가 있었다. 그것은 아쉽게도 그분이 조기 은퇴를 하시고 말년에 특별한 설교를 하셨을 때다. 난 그때야 그분의 설교가 뇌리에 박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때야 비로소 그분 설교의 진가를 알았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젊은 날 그분의 설교가 어려웠던 것이 정말 이해가 갔다. 입에 달고, 듣기 좋은 말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 법이다. 하지만 입에 쓰고 귀에 거슬리는 말은 오래 가는 법이다. 그렇게 입에 쓴 말을 해 줄 사람이 주위에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설혹 있다고 해도 애석하게도 그분들은 살아생전엔 인정을 받지 못하며 죽어서야 비로소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다(가까이는 우리네 부모가 그럴 것이다.). 적어도 내겐 옥한흠 목사님은 그런 분이셨다. 그분의 핏발선 목소리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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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0-11-08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사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날선 말씀이 그립네요..

stella.K 2010-11-08 18:27   좋아요 0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도 그분이 안 계시다는 게
잘 믿어지지가 않아요.ㅜ

2010-11-08 1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8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8 19: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9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L.SHIN 2010-11-08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스테님 ^^ 오랜만이라 인사하려고 들렀어요.
이 글의 제목, 좋은데요. 문학적이에요.
하지만 나는 저 문구를 진심으로 읊을 대상이 없군요.^^;

stella.K 2010-11-09 12:16   좋아요 0 | URL
앗, 정말요? 고마워요.^^
그럼 저 분을 진심으로 읊어보면 어떨까요?ㅋ

saint236 2010-11-08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옥한흠 목사라. 확실히 거목이죠.

stella.K 2010-11-09 12:19   좋아요 0 | URL
사람이 든 자리는 표가 안 나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고,
목사님 살아계실 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표가 나더군요.
그분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어요. 세인트님.^^

2010-11-09 13: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9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1-09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뭐 좀 여쭤볼여고 하는데요.

저희 어머니 가 눈이 침침해서 귀로 듣는 성경 테이프 나 시디 혹은 엠피쓰리 같은거

구입할 수 있는데 혹시 아세요?

stella.K 2010-11-09 16:52   좋아요 0 | URL
글쎄요...그거 생명말씀사 같은 기독교 백화점 같은데서 팔지 않을까요?
알라딘도 뒤져보면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2010-11-10 20: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1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1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1 13: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이조부 2010-11-11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랜덤 인데 블로그 외양이 주인장이랑 똑같네요

우연이지만 신기

stella.K 2010-11-11 13:33   좋아요 0 | URL
헉, 무슨 말씀이시온지...?

참, 보내주신 책 너무 재밌게 잘 읽고 있어요.^^

다이조부 2010-11-11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블로그 스킨 매일매일 바뀌는걸로 바꾸었거든요.

가끔 가다 배경 탓에 글자가 하얀색 글씨인 날은 눈이 아파요~

책 재미있다니까 좋네요 ㅋ

알라딘에서 최근에 알게된 남자분이 찾는 책이 있어서 마침 그 책을

소장하고 있어서 보내준다고 했는데 도통 주소를 가르쳐주지 않네요.

내가 찾아가서 나쁜 짓 할거라고 생각하는건 아닐텐데 말이죠~

어제 대뜸 핸폰으로 무슨 리조트해서 무료이용권을 준다고 하면서

그러는데 잘도 모르면서 알겠다고 했는데 사기는 아닌지 모르겠네요 쩝

cyrus 2010-11-12 12:54   좋아요 0 | URL
꾸랑님. 방금 주소 보냈어요, 죄송합니다. 요즘 하도 바빠서..^^;;
그리고 그런 문자,, 사기일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stella.K 2010-11-12 13:05   좋아요 0 | URL
그분이 시루스님셨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히히

cyrus 2010-11-12 13:19   좋아요 0 | URL
... 꾸랑님 댓글 보는 순간.. 민망했습니다. ^^;;
아... 이거 내 얘기구나ㅎㅎ

2010-11-14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5 18: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셀로와 데스데모나,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 심리학, 삶의 거울 희곡에서 자기치유의 길을 찾다
전현태 지음 / 좋은책만들기 / 2010년 7월
평점 :
절판


내가 이 책을 선택했던 건 옛 추억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조금 과장해서) 한때 미치도록 심리학을  좋아했었고, 한때 희곡을 끄적여 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때의 추억을 되살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현재는 그것과 아무런 관련없이 살아도 옛 추억은 또 무엇을 선택함에 있어서 전혀 주저함이 없게 만든다. 게다가 이런 책은 얼마나 유용한가? 꿩 먹고 알 먹고가 아닌가? 심리학도 읽고, 희곡도 보고.  

그도 그럴 것이 저자는 의대를 다닐 때부터 연극 동아리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저자가 연극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자기 전공에 연극을 접목시켜 이런 책을 낼 생각을 했을까? 물론 심리학의 이런 비슷한 시도는 있어왔다. 가장 쉬운 접목은 영화일 것이다. 그래서 누구는 영화와 심리학을 접목시켜 심리학의 대중화를 꾀하기도 했다. 그런데 희곡과 심리학의 만남은 근래에 보기드문 일인 것 같아 반가웠다. 그렇다면 저자는 왜 이런 작업을 했을까? 저자는, 의사가 되어 정신과를 전공하게 된 것도 연극이 미친 영향이 컸다. 몇 번이고 희곡을 읽으면서도 미처 풀리지 않던 사람들의 마음을 계속 탐구하고 싶었다. <햄릿>의 우유부단과 이중적인 행동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클로디어스에게 복수할 절호의 기회 앞에서는 그를 살려줬으면서 왕비와의 대화를 엿듣던 폴로니어스를 클로디어스로 착각하고 찔러죽일 때는 왜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을까? 복잡하게 얽힌 그의 내면을 정신의학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7p) 라고 말했다. 이렇게 이책의 미덕은 기존의 알려진 희곡을 심리학적 견지에서 의심하고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즉 과연 이럴 수 밖에 없는 건가? 다르게 볼 수는 없는 것일까?에 대한 희곡에 대한 의문이 이 책을 있게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인간의 삶에 있어서 중요하게 대별될 수 있는 '자아', '소통', '사랑', '인생'이란 큰 주제를 다루면서, 그에 맞는 희곡을 설명하고 그것을 심리학이란 프리즘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저자는 1장 '자아'에서는 막심고리끼의 <밤주막>과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입센의 <인형의 집>과 오영진의 <맹진사댁 경사>를.  2장 '소통'에서는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이근삼의 <원고지>와 마샤 노먼의 <잘 자요, 엄마>를 살펴보고 있다. 3장은 '사랑'을 다루면서 <오셀로>와 <클로저>, <세 자매>, <한 여름 밤의 꿈>을.  4장 '인생'에서는 <구름>과 <수전노>, <일케스티스>,<세일즈맨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정말 듣기만해도 명작들이다. 

이 책이 특이할만한 점은, 각장에서 다루는 희곡의 전체적인 줄거리와 등장인물이 갖는 성격과 상황들 속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심리학적인 문제들을 고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등장인물과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을 희곡 대사처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저자는 3장에서 사랑에 관해 말하면서,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세익스피어의 <오셀로>를 소개하면서, 정말'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사랑했을까?를 묻고 있다. 즉 '질투'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알겠지만 <오셀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그의 아내 데스데모나를 오해하면서 이를 투사하고 결국 비극적인 파멸을 보여주고 있다. 처녀가 애를 베도 할 말은 있다는데 오셀로는 오셀로대로, 데스데모나는 데스데모나대로 그런 비극을 맞기까지 할 말이 없겠는가? 저자는 바로 죽은 오셀로와 데스데모나를 상상속에서 살려내 저자의 상담실로 불러내 대화케하므로 부부문제의 해결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정신과 의사: 그러면 이제 두 분 사이에 무엇이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시는지 각자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데스데모나: 남편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줘요. 그 사람 하나 믿고 낯설고 위험한 이곳까지 나왔는데...요즘은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아요. 나에 대한 사랑이 변해버린 것 같아요. 

오셀로: 그건 오히려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달라진 건 아내이니까요. 그토록 정숙하고 단정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 

정신과 의사: ......이런저런 내용이 있겠지만 결국은 서로에 대한 사랑이 의심스러운 것 같습니다. 자기 입장을 이야기할 수 있는 개호조차 단절되어 어떻게 된 상황인지 찬찬히 따져볼 기회도 없으셨구요. 맞습니까?   (229~230p)           

그러면서 저자는 이후 이에 맞는 오늘 날 알려진 부부문제 상담 기법을 소개하고, 이것을 만일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에게 적용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를 예측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을 읽다보면 연극에 대한 관심이 새록새록 생겨나고 아울러 현대 심리학의 경향도 볼 수 있어 나름 흥미로운 독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무엇보다도 읽어가면서 저자의 연극 사랑이 얼마만함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런데 저렇게 크게 4장으로 나눠 인간을 보여주고 있지만 묘하게도 읽다보면 인간의 복잡하고도 연약한 모습과 마주하게되 약간의 쓸쓸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심리학은 오늘 날과 같이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현대인의 삶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예전엔 무지해서일까? 그땐 이런 거 없이도 잘 살았던 것 같다. 그런데 심리학에 관한 책은 예외없이 혀를 끌끌차며 보게되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의 약간의 아쉬움은, 이 책은 심리학 일반. 즉 희곡을 빌어 오늘 날의 심리학의 경향을 개론서격으로 보여주고 있어 크게 기대를 하고 볼 것은 아닌 듯 싶다. 그렇더라도 이 책이 희곡을 이해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희곡만큼 삶의 어느 순간을 기승전결로 강렬하게 풀어내는 장르는 없을 것이고, 희곡 역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없이는 결코 읽히지도 쓸 수 없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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쉐프 1 - 쉐프의 탄생
앤서니 보뎅 지음, 권은정 옮김 / 문예당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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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떤 직업을 갖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서 , 어떤 사람은 가업을 잇기 위해서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으며, 어떤 사람은 취미로 시작한 일이 밥벌이가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끔,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일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게 되는 그런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 보면 되게 부럽다. 아직도 자신이 뭘해야할지 몰라 방황하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 내가 읽은 이 책의 저자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 먹은 차가운 스프 한 그릇이 그의 영혼을 깨우고, 청년 시절 첫 사랑에 실패하고 뛰어들게 된 쉐프의 길. 이 책은, 그 길에서 경험하고 깨달은 바들을 글로 쓴 것이다.  

사실 나란 사람은, 드러난 것 그 자체를 보기보다 그 이면을 보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어 이 책을 선택했다. 무엇보다 이 보뎅 아저씨는 쉐프란 직업을 그다지 점잖게만 쓰지 않았다. 어느 서평에 히스테리컬하고, 곤조 저널리즘의 헌터 톰슨을 떠 올르게 만든다고 했는데, 헌터 톰슨이 뭐하는 사람인지는 난 잘 모르겠고, 그 '곤조'라는 말은 이 책에 딱 어울리는 단어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까발리듯이 썼다는 말이고, 난 그런 그의 정신이 마음에 든다. 

오죽했으면, 우리의 보뎅 아저씨 이 책이 나오고 나서 같은 동종업계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협박전화도 받을 줄(아니 받게 되길 은근히 바란듯) 알았단다. 그런데 오히려 너무 조용해서 재미가 없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정말 그럴 때 있긴 있다. 어떤 글을 야심차게 써서 블로그에 올렸는데 의외로 반응이 썰렁할 때가 있다. 그리고, 이건 좀 아냐. 하는 글에 댓글이 몇 십 개가 붙는 경우도 있고. 도무지 모르겠는 게 사람의 마음이긴 하다. 이 까발리듯한 글을 같은 동종업계의 사람이 조용하다는 건 둘 중 하나 일 것이다. 관심이 없거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런데 반대로 대중들로부터는 굉장한 반응과 찬사를 얻었다. 그도 둘 중 하나 일 것이다. 그동안 가리워졌던 쉐프의 세계를 현미경으로 보듯 보게 해 줬다는 점을 높이 샀거나, 그동안은 점잖빼듯 요리법만을 알려주거나, 진로지도하듯 요리사가 되는 길을 안내해 주는 그런 책만을 봤다가 '지금까지 이런 책은 없었다'고 열광하거나.  

'지금까지 이런 책은 없었다'는 말은 내가 생각해도 조금 과장된 듯하긴 하다.  이런 류의 책이 있긴 하다. 단지 변주되어 있을 뿐. 어쨌든 솔직하고, 다소는 심술스럽기도한 이 책이 나름 매력적이다.  

사실 쉐프라는 직업도 불 앞에서 또는 그것을 간접적으로나마 다룬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중노동이라는 인상을 받는다. 더구나 나 같은 사람은 먹는 것은 즐겁지만 먹기 위해 만드는 과정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그 직업이 마냥 좋게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어쩌다 TV에서 어느 요리사가 자신의 요리를 가르쳐주기 위해 보여주는 깨끗히 다듬어 논 식재료며 기구들을 보면, 저렇게 준비하기까지 뒤에서 얼마나 전쟁을 치뤘을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사람 저마다의 성격들이 다 다르겠지만, 쉐프라고 해서 늘 신사적이고 온유하고 부드러울거라는 생각은 이 책을 보면 전혀 들지 않는다. 까칠하고 때론 과격하기도 하다. 그들만이 쓰는 고유 언어 내지는 은어가 존재한다는데, 우리나라 쉐프들은 어떤 언어를 쓸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런 경우가 있다. 반드시 깔끔한 주방에서 최고의 요리가 나오는 것마는 아니라는 것. 주방은 깔끔해서 요리 또한 깔끔한데 그 맛은 별로인 것과, 주방은 다소 허름하고 만드는 과정도 별로 깨끗할 것 같지는 않은데 맛있는 음식과. 사람들은 어떤 음식에 손을 들까? 참고로 사람의 오감 중 가장 예리하고 욕망을 자극하는 건 후각이라고 한다.  내가 앞에도 밝혔지만 난 이면을 보여주는 책을 좋아한다고 했다. 왜 그럴까를 생각해 보면 아이러니가 있기 때문이고 그것을 발견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인 것 같다. 거기서 필요악이란 말도 숨어있고, 통찰도 가능하며, 인간의 내면을 좀 더 관찰해 볼 수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 같다. 

이 책이 나쁘지는 않는데, 딱히 권하기에는 왠지 조심스러워진다. 내가 요리하는 과정을 그리 즐기지 못하는 성격적 결함 때문인지 읽으면서 조금은 지루했다. 게다가 우리나라 쉐프가 우리 한식을 가지고 이런 류의 책을 썼다면 충분히 킥킥대고 읽었을지도 모른다. 이름은 들어봤으나 먹어보지 못한 그리고 쉽게 구해질 것 같지 않은 식재료 가지고 뭐라고 중얼거리니 감 떨어졌다. 난 역시 요리 하나 잘해서 여러 사람을 즐겁게 할 팔자는 못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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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홍수 - 에릭 드루커의 다른만화 시리즈 4
에릭 드루커 지음, 김한청 옮김 / 다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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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항상 아름다움만을 말하지 않는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 진실을 말하기도 하고, 시대를 깨우려 하기도 하며, 나아가 예언이나 묵시까지 담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예술로 넘어오면 좀 더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하게 표현되어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바로 나에겐 이 책이 그랬다. 

너무 강렬하고 그로테스크해서 처음엔 다소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확실히 본 작품은 내가 익숙히 봐온 것들이 아니다. 거칠고 음산하기까지 하다. 또한 흑백톤을 주로 사용해 어찌보면 판화 같은 느낌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가는 목판화도 공부를 했으며, 더 정확히는 스크래치보드 작업이란다. 그것은, 판에 잉크를 바른 뒤에 그것을 면도칼로 긁어내는 방식이라고 한다.

그는, 이 책에 소개된 3개의 독립된 만화(딱히 만화라고 하기에도 좀 뭐하다)를 통해 인간 소외와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직시하려 하는 것 같다.제일 첫번째 소개된 <집>은, 서서히 고통스럽게 부랑자가 되고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 남자를 통해, 세상에소 쫓겨난 사람들 개인의 문제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적 구조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또한, 두번째로 소개된 <L>은, 지하철 승강장이 원시의 춤판으로 변하고, 한동안 키스 헤링과 그라피티 기법을 보는 것 같은 표현이 이어지다, 현실로 돌아오면 경찰견과 경찰이 나오고 뭉둥이를 휘두르며 과잉진압의 형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아무런 방어 수단도 없는 군중들을 덮친 경찰관의 지배와 무능함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심심찮게 경찰의 무능함과 태만함이 도마에 오르곤 하는데, 그것은 어찌보면 미국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코스모폴리탄의 나라로 대표되는 미국이 이 정도라면 여타의 다른 나라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또 어찌보면 이 작품은 어찌보면 인간을 획일적으로 지배하려고 하는 전체주의와 그 모순을 비판하려고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마디로 개인이 존중받지 못하고 사회를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표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대홍수>는 얼핏 성경의 노아시대를 작품속에 투영하려 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성경의 대홍수의 작가 나름의 재해석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전쟁과 폭력, 정서적 고립과 소통의 부재 등을 다루려 했던 것 같다. 사실 원래 성경에 나온 대홍수는 하나님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으며, 인간의 좋을대로 사는 것에 대한 심판이다. 그 시대라고 왜 착하게 사는 사람이 없었을까?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물로서 심판하셨다고 하면 그건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가 방주를 지어 대홍수로부터 보호받은 건 그가 착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홍수로 부터 보호를 받은 것이다. 여기서 노아가 하나님을 알았다는 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언에 늘 귀를 기울였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즉 미래를 내다보는 눈과 마음에 관심이 많았다는 말이다. 그런 그를 오늘 날에 대입을 시켜보면, 오늘 날의 세대는 예언이 없는 그저 물질적이고 찰라적인 것에 만족하는 것을 개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상업주의가 결국 인간 소외와 문제를 낳았다고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려진 노아와 성경의 노아는 조금 다르게 보여지기도 한다. 그냥 그 대상이 무엇됐든 이제 물질적이고 탐욕적인 것에서 마음을 돌이켜 영적인 것에 눈을 뜨라는 것만이 암시되어 있는 것 같다. 성경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라는 의미에서 이 이야기가 펼쳐지고 있는데 말이다. 

물론 난 이런 작가의 관점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건 그저 작가가 보여주고 생각하는 전부를 보여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해석도 그의 몫이고, 창작도 그의 몫일뿐이다.그러므로 이 작품은 정말 예언적이냐라는 것에 난 좀 의문스럽다. 그냥 인간의 탐욕과 그에 대한 사회의 문제점을 깨우치게 하기 위한 작품은 아니었을까 싶다.  그것만으로도 인간을 충분히 깨닫게 하는 계기가 됐다면 이 작품은 나름 성공한 작품일 것이다. 하긴, 그렇지 않아도 이 작품은 이미 미국내 권위있는 여러 상을 석권한 바있다. 그림이 좀 난해한 느낌도 들지만 뒤에 나오는 해설을 꼼꼼히 읽는다면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다. 작가 인터뷰도 읽어 볼만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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