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주식회사 - 질병과 비만 빈곤 뒤에 숨은 식품산업의 비밀
에릭 슐로서 외 지음, 박은영 옮김, 허남혁 해설 / 따비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먹을거리에 대한 낭만적 상상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의 고기를 파는 코너에 가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선홍색의 탱탱한 육질을 자랑하는 고기들. 더구나 보기 좋게 포장까지 되어있다. 그런데 그게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키워져, 어떤 과정으로 도축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또한, 유전자 변형식품에 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것이 앞으로 인간의 인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에 대해 막연한 불안은 있지만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은 없다.  

이런 건 또 어떤가? 나는 이렇게 하루 세끼. 아니 더 정확히는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을 수가 있는데, 지구 반대편 아니 그 먼곳까지 갈 것도 없겠다. 당장 북한의 주민들은 기아에 허덕인 세월이 벌써 몇십년째인지 모른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들의 상황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것에 대한 일말의 동정 더 나아가 책임의식을 가져 본적은 있는가?

그와 더불어 그렇게 기아선상에 있는 지구상의 최빈국의 국민들은 굶주린 배를 채워보고자 말도 안되는 최저임금을 받으며 힘들게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다. 그런 사이 부자들은 배를 두들겨가며 살 지언정 그들의 인권는 고사하고 먹을 권리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것은 또한 인류 역사상 수 없이 되풀이 되어 온 인간의 고질적인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것도 부족해서 이번엔 신에너지로 각광 받고 있는 에탄올을 추출하기 위해 옥수수 재배에 혈안이 되고 있다. 지구 인구의 3분의 1에 가까운 숫자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는데, 그들을 먹여살릴 수 있는 대체 작물인 옥수수가 에너지에 사용된다면 기아문제 해결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솔직히 이건 오래 전부터 궁금했었다.   

앞서 고기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인간의 인권이 이토록이나 말살된 세상에서 동물에게 베풀어줄 자비는 남아 있다고 보는가?  이책 '공장형 농장의 식품 안전'(43~53)이란 부분을 보게되면을 절로 입이 벌어지고, 인상이 안 찡그려질수가 없다. 도무지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한낱 짐승이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몰상식하고, 몰인정할 수 있을까, 분노가 치밀어 누군지 안다면 그가 동물에게 행했던 똑같은 방식으로 보복하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 

하지만 그럴수도 없는 게, 수요가 있으니 공급도 있는 거라고 거기에 맞추었을 뿐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그러기 전에 그것을 원했던 그들부터 그 책임을 물어봐야 한다. 더구나 요즘엔 가난한 나라도 점점 육식을하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육식 산업은 망할래야 망할 수 없는 철옹성의 산업이다. 물론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동물에 대한 가혹행위는 오래 전에 법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이 문제가 아직도 심심찮게 나오는 걸 보면 그건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 많은 것  같다.   

이렇게 우리의 먹거리를 위협하는 갖가지 사건과 사고를 접하게 되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세상에 먹을만한 건 없어." 그러면서 역시 산 입에 거미줄 칠 수 없으니 먹을 수 밖에 없다. 옛말에 모르는 게 약이랬다고 눈 딱 감고 오늘도 먹는다.  오늘 내가 먹은 음식은 안전한 걸까?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다   

마침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우리나라는 또 한번 구제역의 홍역을 치르게 됐고, 이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조류독감까지 번지고 있다. 구제역은 보통 70도씨 이상의 온도에서 가열을 하면 없어진다고 안심하고 육류를 먹으라고 소비를 촉진중인데 과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런지 모르겠다. 그러다면 살처분은 왜 하는 걸까? 그냥 구제역 걸린 소고기, 돼지고기 싸게 팔 일이지. 그 돼지와 소들은 자신들이 왜 죽어가야 하는지 알고나 있을까? 이유없는 원인이 없다고 뭔가의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직접적인 원인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책에 보면 사람은 먹는 대로 된다, 동물도 먹는 대로 된다는 말이 나온다. 어차피 동물에게 무엇을 먹이던지간에 그것을 또한 사람이 먹으니 당연한 말이지만 동시에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던지 그대로 거둔다고 했는데 이건 정말 진리다. 동물을 가혹하게 다루고, 비위생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이건 재앙인 동시에 벌을 받는다는 느낌이다.       

사실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먼저 정부와 기업을 신뢰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 정부외 기업은 국민의 건강을 위하고 국가의 백년지대계를 위해 기여할 마음이 있는 것인가? 물론 이 책이 직접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를 다루진 않고 주로 미국의 상황을 얘기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도 그다지 예외는 아니란 생각이 든다. 구제역에 살처분되는 아타까운 소만 보더라도 한우가 그리 좋다고 떠들어대는 그 의기양양함이 무색하다. 얼마 전만해도 마치 우리나라 소는 저 푸른 초원위에 방목해서 키운 소인 양하고 있지 않은가?  자연의 섭리대로 키우기만 했더라도 그 역병을 방역하겠다고 이 추운 날씨에 그 고생을 할까?  

알고보면 인간의 편위주의와 이기주의 때문에 인류가 겪는 재앙은 상상을 초월한다. 무엇보다 유전자 조작에 의한 감자에 관한 위험성은 끊임없이 재기되어 왔는데도 미국 정부와 기업은 그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에 관한 위험성을 밝히는데  노력했던 푸스타이 박사는 어느 날 정부의 연구지원이 끊기고 연구 결과를 언론에 공개했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하지만 푸이타이 박사는 유전공학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빌헬름 텔의 활쏘기를 생각해 보라. 지금 유전공학에서 벌이는 유전자삽입의 현실은 눈가리개를 한 사람이 화살을 쏘는 것과 마찬가지다."(151p)라고 했다. 우리는 유전공학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유전자조작에 의한 식품은 우리의 식탁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박사가 말하는 건 확실히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앞서 말한 옥수수에탄올을 연료로 사용하는 문제에 대한 나는 이 책을 읽기 전만해도 그것의 의문에 다소의 타협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것이 기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적격은 되지 못해도 연료와 공해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지 않는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그것은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연료문제와 공해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해법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도록 하고 여전히 옥수수 재배에 박차를 가해 우선 죽어가는 사람부터 살리는 쪽으로 관심을 돌려야하지 않을까?  또한 소의 이산화탄소 배출에 관한 문제는 알았지만, 우리의 몸에 좋다하여 즐겨 먹는 요구르트를 마시기 위하여 소의 이산화탄소 배출에 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렇게 진실은 불편하지만 확실히 아는 것은 힘이 된다.         

소비자는 약하지 않다.  

솔직히 이런 책을 읽으면 마음이 불편한 것도 사실이다. 비난 받아 마땅한  건 정부와 기업인건 사실이지만 결국 편한 것만을 좋아하는 우리의 안일함도 간과할 수 없다. 이런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도대체 뭘까? 나는 그렇게 힘이 없는데. 나 하나 노력한다고 되는 건가? 나 하나쯤이야. 등의 온갖 회의와 구실을 대며 슬쩍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사람은 역시 이기적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이제 공해나 기후의 문제는 어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와 국가의 문제다. 이기주의로 우리만 손해보지 않겠다는 생각 가지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사실 우린 해 보지 않은 일을 겁내하거나 귀찮아한다. 그러나 우린 어느 틈엔가 지구와 인류를 살리는 일에 직간접으로 동참하고 있기도 하다. 그것은 그런 노력을 오래 전부터 해왔던 어느 단체나 개인의 노력 때문에 가능하다.  예를들면 가급적 유기농 먹을거리를 선택하는 것. 이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가 싶지만 자꾸 여기 저기서 유기농을 찾으면 육류의 소비는 줄이면서 그것에 대한 소비는 늘 것이다. 그렇다면 수효는 자연 그쪽으로 옮겨갈 것이다.   

여담이지만, 나는 솔직히 몇년 전 미국과 우리나라간의 FTA의 체결될 때 당장 나라가 망할 것처럼 흥분했던 우리의 저자세(?)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다 나라의 장래를 걱정해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 건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약한 존재였던가? 왜 무작정 미국이라면 경기부터 일으키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대세를 거스를 수 없다면 대세에 맞서는 수 밖에 없다. 시작도 하기 전에 징징거린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 아니다. 자유무역해서 미국 제품 문제있으면 안 사면 그만이다.  우리나라에서 미국제품 안 좋아 안 쓰겠다는데  FTA아니야 그 할아버지가 와도 자기네들이 어쩔 것인가? 우린 더 좋은 제품으로 대응하면 되는 것이다. 왜 그것이 망국의 지름길인 양 겁부터 내는 것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나라든지 희망은 소비자에게 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 것처럼  어떤 게 좋은 제품인지, 그것이 몸에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이것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길인지 아닌지는 소비자가 더 잘 안다.   먼 거리에서 난 식재료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인식, 가급적 가까운 거리에서 난 것이 좋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미제를 무작정 좋아만 하겠는가? 그것을 안다면 아예 안 사거나 한 번이라도 줄여서 사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나는 이 책이 일견 이런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밖에도, 우리가 소비자로서  공정무역에 관한 얘기는 몇년 전부터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매스컴의 관심을 받고 있다. 그것으로 인해 가난한 나라의 국민을 어느 정도 빈곤에서 살리는 길이 된다면 그것 또한 점점 확장될 것이다. 그뿐이겠는가? 우리가 부엌을 회복하는 것도 그 방법중의 하나라고 책은 소개한다. 사람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또는 귀찮다는 이유로 부엌에 있는 시간이 옛날에 비하면 반도 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유기농 재로로 부엌에서 요리를 한다면 그만큼 지구는 보호되는 것이며 가족간의 관계도 돈독해지는 것이다.  또 하나가 더 있다.  학교 자판기에서 청량음료와 스넥류를 없애고, 내 아이의 건강은 내가 지킨다는 의지만 있다면 그 또한 지구를 지키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난 이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청량음료 자판기는 다른 공공 기관에서도 없애버리거나 다른 천연과일주스로 대체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금연구역의 확대를 위한 노력은 하면서 언제까지 몸에 좋지도 않은 청량음료의 판매는 그냥 지켜만 보는 것인가? 아무튼 이렇게 소비자가 할 일은 많다.  결국 소비자는 결코 약하지 않다.  

어떻게 먹을 것인가?    

이렇게 이 책은 이런 생존과 지구의 문제에 대해 문제제기만 하고 마는 그런 책은 아니다. 물론 문제제기도 하면서 그에 대한 노력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도 보여주고, 나아가 평범한 우리들도 무엇을 하면 좋겠는가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그것에 동참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일은 의외로 많고, 그런 웹사이트나 단체도 많다.  관심있는 사람들은 일독을 권하면서, 웹사이트를 방문해 보기를 바란다.   

우리나라도 이제 그린 마일리지 제도를 시행한다고 한다. 언듯 보면 상당히 바람직하고 좋은 제도인 것 같다. 이것이 앞으로 잘 정착이되서  OECD 국가라는 명예에 걸맞게 인류가 당면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동참하는 그런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 뿐만 아니라 위험성을 경고한 일에는 나서지 말고 먹을거리 가지고 벌어먹는 기업들 바른 길로 인도하는 정부의 역할을 기대했으면 좋겠다.  깔끔한 이미지로 선전하는 각종 식품주식회사들 그들이 기업의 이득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소비자들은 모른다. 단지 그 깔끔한 이미지 때문에 깨끗하겠지, 안전하겠지 믿거라 한다. 기업의 투명성이 그 어느 때보다 요구되어지는 때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어떻게 먹을 것인가가 중요한 때다. 이전 세기까지는 무엇을 먹을까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먹을 것인가가 중요한 세대가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어디가면 뭐가 맛있더라. 또는 뭐는 어디에 좋다더라 정도가 아니다.  오늘 먹는 나의 양식이 내 몸은 물론이고, 나라의 경제뿐만이 아니라 인류와 지구환경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할 때라는 것이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비록 내가 밥에 물을 말아서 김치 한 가지와 먹을지라도 그 한끼 식사는 모자람이나 소홀함이 없다. 왜냐구? 그는 의식있는 소비자니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1-01-16 0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도서관에서 마이클 폴란의 <푸드 룰>을 빌려서 읽게 되었는데
이 책도 꼭 읽어봐야겠네요. 저도 아직 <푸드 룰>을 읽어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먹게 되는 음식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으니
이 두 책을 같이 읽으면 무언가 연관성이나 서로 다른 관점이 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

stella.K 2011-01-16 11:38   좋아요 0 | URL
지금은 워낙에 이 방면의 책들이 심심찮게 나고고 있어서
이 책 보시면 매 쳅터 뒤에 참고할만한 책들을 함께 소개해 놓고 있어요.
아마 유용하게 보실 수 있으실 거예요.^^
지금 언듯 기억나는 건...음, 페스트푸드의 제국? 육식의 종말?
요즘은 제 머리가 새여요. 뒤 돌아서면 내가 기억하는 게 과연 맞나?
의심이 난다니까요.ㅠㅠ



프레이야 2011-01-1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먹을 거리 풍요의 시대에 정말 고민하고 실천해야할 문제에요.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
먹는 게 사람을 말해준다고 하죠.
늘 촘촘하고 올바른 리뷰 추천입니당!!

stella.K 2011-01-16 11:49   좋아요 0 | URL
ㅎㅎ 마지막 말씀 왠지 흐뭇하면서도 찔리는데요.
늘 묵묵히 지켜봐주시는 프레이야님께 고마울다름이죠.^^
 
홍콩에 두 번째 가게 된다면 - 홍콩, 영화처럼 여행하기
주성철 지음 / 달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미안한 일이다. 딱히 누구에게라고는 할 수 없지만. 미안하다면 홍콩에게고, 원망을 하라면 나에게 해야 한다.  

사실 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홍콩에 대해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그러다 보니 아는 것도 정말 없다는 걸 알았다. 말에 의하면 그 나라는 덥고 습하다던데, 이런 날씨를 좋아하지 않느 나로선 홍콩이 매력적일리는 없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난 더운 것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은데(어느 면으로는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다), 습한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나라 여름에 갖는 나의 양가 감정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니 홍콩이 좋게 느껴질리가 없었던 것이다. 

나를 원망하기로는 무지 때문이다. 내가 아무리 홍콩을 모르기로서니 이 정도일까 싶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자성어처럼 된 이를테면, <아비정전>이나, <타락천사>니, <천장지구>니 하는 영화가 그저 막연히 중국 그것도 대만 영화일 거라는 믿음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런 여타의 모든 영화들이 알고보면 홍콩 영화였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비로소 알았다. 즉 말하자면, (지금은 좀 그런 게 없어졌지만) 서양 사람들이 동양 사람이나 하면 일본 사람을 떠올리듯이, 나는 중국과 대만과 홍콩을 싸잡아서 대표로 중국만을 기억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하긴, 영화란 게 재미가 우선이지 어느 나라에서 만들어졌다는 게 무에 그리 중요한가? 그런데 이것도 좀 무식한 발상이긴 하다. 영화에 조금만 관심있으면, 감독이 누구냐(어떤 땐 각본을 누가 썼느냐까지), 누가 나왔느냐, 풍은 어떠냐, 앵글이 어떠냐까지 깐깐하게 다 따지면서 메이드 인 어느 나란지를 모른 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런데 또 그런 게 눈에 잘 안 들어 오는 건, 나라 보단 감독이 더 중요하게 다가오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나라의 풍이 있다고 해도, 허리우드 풍이 느껴지는 게 있고, 허리우드 영화에 프랑스 풍이 들어오기도 하고 등등. 이렇게 섞여있는 경우도 많다. 어떤 경우엔 2개국 이상 합작 영화도 많아 무국적인 경우도 많다. 그러니 나라가 눈에 들어올리는 만무해 보인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생각했던 건, 홍콩도 알고보면 영화를 정말 많이 만들었구나.하는 것이었다. 이게 또 새삼스러운 게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지가 얼마인가? 그러니 홍콩이란 나라를 특별히 따로 생각하지 않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중국이 홍콩이고, 홍콩이 중국 아니겠어?' 이 자조 섞인 말을 홍콩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난 홍콩 영화를 그다지 많이 보지 못했다. 그 유명한 <아비정전>도 이 책을 보면서 봤다(아, 그 영화의 지극한 허무주의란...!). 80년 대 한때 홍콩 르와르가 인기를 끌었을 때도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왜 그렇게 관심이 없었을까를 생각해 봤더니, 난 총 쏘고, 피가 난장이 돼 죽어 나가는 것도 싫지만, 마치 사자성어 같은 제목들이 너무 낮설었던 게다. 우리나라 영화나 허리우드 영화, 하다못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영화들의 제목들을 보라. 한 쾌에 뭔지 알 것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사자성어 같은 제목들이 뭘 의미하는지 딱히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좀처럼 가까이 할 수 없었던 것도 같다. 하긴 코카콜라란 고유명사도 자기화해서 부르는 중국인데 같은 동복형제나 다름없는 홍콩이 그런 고고함 흩을 리가 없다. 그러니 나 같은 한반도의 관객이 모르는 거야 어찌보면 당연한 것 아닌가? 더구나 성룡이니, 주윤발이니, 장국영이 유명한 배우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허리우드의 한 이름 값하는 배우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고, 어떤 경우엔 자국의 영화배우 보다 인지도가 떨어진다. 그러니 어쩌랴? 

이 책을 보니 지금 홍콩엔 장국영이 없다는 게 새삼 실감있게 다가왔다. 그전까지 내가 <아비정전>을 못 봤다 뿐이지 아주 드물게는 그래도 그가 출연한 영화를 몇 편 보긴 했다. 장국영은 뭐랄까? 고독하면서도 미소년 같은 이미지가 있다. 홍콩을 여행할 때 어떤 관점을 가지고 볼 것이냐에 따라 그 느낌이나 생각이 달라지겠지만, 저자가 영화적 관점에서 홍콩을 소개하고 있어서일까? 홍콩은 장국영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오래도록 영국에 속해 있어서일까? 뭔가 안개의 베일에 쌓여있는 듯하고, 그 습한 기후조건 때문에 촉촉하기도 하다. 중국에 반환이 됐지만, 중국의 배려가 있어서일까? 완전히 중국화 되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하게 남이 알아주든, 못 알아주든 홍콩은 홍콩으로 살아가고 있다.  

책은 비교적 성실하게 홍콩에서 이제까지 영화화된 장소들을 친절하게 짚어주고 있었다(글 보단 사진이 많아 보기도 좋다). 미국의 몇몇 영화(이를테면 <다크 시티> 같은)가 홍콩에서 배경을 따왔다는 건 새롭게 안 사실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런 예가 있었나? 괜히 질투가 난다. 홍콩이 그토록이나 자국의 영화를 많이 알려왔다는 점에서, 홍콩은 어찌보면 영화 도시인지도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홍콩 영화를 지극히 좋아해서 이런 책을 썼을 것이다.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나라를 이렇게 소개한 책이 있을까? 의문스러워졌다. 저자가 아무리 홍콩을 좋아한다고 해도, 난 역시 국수주의자일 수 밖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날, 약간은 우울하고 차분한 영화를 보고 싶다면 홍콩 영화를 보고 있을 테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잘라 2010-12-07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깜놀. 지은이 이름.. 분명 주성철이라고 적혔는데, 주성치!라고 읽었음. ㅜㅜ
그러고보니 헷갈려요. 저는 주성치 팬이고, 소림축구랑 쿵푸허슬을 적어도 열 번 씩은 봤는데 그게 홍콩 영환지 중국 영환지?.. 그런 생각은 안해봤거든요. 아무튼 제가 기다리는 건 주성치 다음 영화구요^^

stella.K 2010-12-07 17:52   좋아요 0 | URL
ㅎㅎ 그렇지요? 저도 특별히 홍콩인지 중국인지 생각없이 봤는데
우리가 알만한 중국영화들이 알고 보면 홍콩에서 만들어졌다는군요.
이름은 정말 헷갈릴만해요.^^

cyrus 2010-12-08 1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저자의 이름을 보는 순간, 주성치인줄 알았다는, , , (-_-)a
혹시나 홍콩에 있는 영화 촬영지에 가게 되면 나름 유용한 정보가 될 거 같습니다.

stella.K 2010-12-08 16:01   좋아요 0 | URL
네. 그럴 것 같아요.
무턱대고 나서는 것보다 나름 테마적으로 정보를 알고 떠나는 것이 좋갰죠?^^
 
악의 종말
롤프 데겐 지음, 박규호 옮김 / 현문미디어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책의 제목이 나름 의미심장하다. 악의 종말이라니(소설책 제목을 연상케도 한다). 읽다보니 왜 제목을 그렇게 붙였는지 알 것도 같다.  

저자는 진화심리학자면서 무신론자다. 읽다보면, 인간의 이타성이나, 양심, 도덕성을 꽤나 강조하고 있다. 또한 그러느니만큼 인간의 선이나 악도 진화론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긴, 오늘 날은 절대성의 시대가 아니다. 합리적이며, 상대적인 것이 지배하는 시대다. 과거 절대성이 지배하던 세대는 선과 악을 말하며, 인간의 구원과 타락에 관해 또는 현세와 내세에 관해 명확하게 얘기하고자 하는 사조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날에 와서는 절대성이 약화가 되면서 상대주의가 팽배하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선과 악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으며, 구원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냥 오로지 현세의 안주와 현상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뿐이다. 그런 관점에서라면 이 책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또 나름 읽는 재미도 있다. 얼마만이던가? 내가 심리학 책을 이렇게 재밌게 읽어 본 게. 나도 한때는 '인간'을 학문적으로 규명한 책들에 대해 호기심이 많았다. 그래서 세상에 나온 심리학이란 심리학책은 모조리 읽겠다는 당찬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결국 몇 권 못 읽고 다른 쪽으로 옮겨갔지만. 그런데 오랜만에 이쪽 분야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재밌다는 생각을 했으니, 나름 의미없는 독서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미있다고 해서 그 책이 다 옳은 말만하고,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여지는 있어 보인다. 하긴, 저자가 상대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주장과 논리를 펴고 있는데, 그것을 절대적으로 맞다고 받아 들이는 건 어패가 있어 보인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해도 그것은 그냥 저자의 관점일뿐 인간의 존재를 완벽히 증명해내지는 못한다(그것을 저자 자신도 알고 있을까?). 무신론도 신이 없다고 하기이전에 그것도 하나의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가? 인간인 우리가 우주의 삼라만상을 무엇으로 다 증명해 낼 수 있으며, 신에 관해서 그리고 선과 악에 관해 무엇으로 다 규명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단지 선과 악도 인간의 진화의 산물이라고 결론짓는 저자의 태도가 섣불러 보인다. 선과 악이 인간 내부에 있는지 외부에 있는지 그것을 어찌 단정지어서 말할 수 있겠는가? 기독교적 입장이라면 선이나 악은 인간 내부에만 존재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것은 보다 거시적 관점에서 논의 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또한 인간이 인간을 규정하는 것과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그것은 성경이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도 저자는 인간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고 단정 짓는 태도가 석연치 않다. 책의 구성도 자신의 전공인 진화심리론에 관해서는 그토록이나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도, 악을 종교적 관점에서 다룬 부분은 슬쩍 지나가는 느낌이다. 이는 그가 무신론자라서 그렇다고 이해는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런 공정성을 잃은 주장은 좀 마뜩치 않다.  

본래 선이나 악은 상대적 가치를 가지고 규명되어질 수는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은 원래 절대성을 담보로 하고 있다. 그럴 때 인간의 이성이 가치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것을 그저 인간의 정신작용 내지는 진화의 산물이라고 축소하는 건, 신을 인정하지 않는 고도의 전략일뿐이다. 하지만 신이 없다고 어떻게 확언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게 믿기로 작정할 뿐, 신이 있고 없고를 규명하는 것은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태도를 취할 뿐이다. 그러니 자기 모순에 빠질까봐 슬쩍 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특히 책의 말미에 해당하는 '선은 신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부분을 보라.) 원래 과학을 말하고자 할 때 진화론 못지않게 창조론도 다루어야 한다. 학교에서도 진화론은 가르치지만 창조론은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은 종교의 유무를 떠나서 학문과 교육의 균형을 잃고 있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다.  

인간이 과연 이타성을 기르고, 양심에 거리끼지 않으며, 도덕적으로 올바르면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되는 걸까? 우리가 악을 종식 시킨다고 구원이 이루어지는가? 하지만 우리가 알듯이 악은 소멸되지 않으며, 따라서 유토피아는 이상향일뿐 현세에선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악의 종말을 우논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어찌보면 이번 나의 독서는 무익한 독서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아예 안 읽어서 모르는 것 보단 읽고 무익하다, 유익하다 판단하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인 것 같다. 무익을 아는 것도 한편 유익 아니겠는가? 

저자는, 책의 마지막에 인터넷을 서핑하다 어떤 사람이 무신론자를 위한 10계명이라며 인용을 했다. 그게 좀 가관이란 생각이 든다. 과연 이렇게 해서라도 신을 부정하며 인간의 도덕성을 강조하고 싶은 것일까? 의문이 남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하(紫霞) 2010-12-05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신론자를 위한 10계명 궁금하네요.

stella.K 2010-12-06 11:53   좋아요 0 | URL
그렇지 않아도 10계명을 옮겨볼까 하다가
지워버렸어요.
이를테면 이런 거죠. 나에게도 괴로운 걸 남한테 행하지 말라든지,
항상 배우는 자세를 갖고, 의심하라, 또 뭐라더라...잘못된 것이
있더면 믿었던 거라도 과감히 버려라. 등등.
그래서 그럴까? 읽을 땐 재밌었는데 끝으로 갈수록 저자가 전 좀
신뢰가 가지 않더라구요.

cyrus 2010-12-05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전에 도서관에 들리다가 신간도서 코너에 이 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소설이 아니었군요. ^^;; 진화심리학을 바탕을 둔 무신론에 대한 저자의 관점이
독특하네요.

stella.K 2010-12-06 12:10   좋아요 0 | URL
저 글을 쓰고 빼먹은 게 좀 있구나, 후회하고 있는 중이어요.
저자가 대단한 걸 말하는 것 같아도 신학의 관점에서 보자면
별로예요. 신학에서도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거든요.
악을 제거하거나, 종말을 맞는 차원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고 보고 있죠.
신학에선 인간의 죄성을 말하고 있거든요. 그로인한 타락을 말하고 있구요.
인간은 죄성을 없이할 수 없으며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보고 있지요. 그런데 저자는 인간의 도덕이나 윤리를 회복해야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악이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는 걸 저자도 알고 있으면서
왜 그토록 무신론적 관점을 유지하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이렇다할 결론도 없이 ing라고나 할까요?
진화론이 원래 그렇잖아요. 현재진행형.
그런데 요즘엔 사화심리학을 진화심리학이라고 하는 것 같더라구요.
이 책은 악의 종말 어쩌구하기전에 사회심리학 책 같거든요.
제목을 다르게 정했더라면 저에게 욕을 덜 먹었을텐데 싶어요.ㅋ
 
강우근의 들꽃이야기
강우근 글.그림 / 메이데이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참 좋은 책이다. 들꽃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느껴진다. 내가 이 책을 다 읽고 났을 때 드는 생각은 들꽃은 결코 약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긴, 길가의 보도 블럭이나 시멘트 담벼락을 뚫고 나오는 것이 들꽃이다.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 어떤 차력사도 자기 사지육신을 보도블럭에 묻고 그것을 박차고 부활했다고 하지 않는다. 그만큼 들꽃은 강하다. 또한 그것은 들에만 피지 않고, 사람들의 발밑에서도 그 생명력을 유지한다. 대단하지 않는가?  

그런데, 세상의 어떤 꽃과 식물도(아니 동물까지도), 인간의 손만 닿았다하면 사라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인간의 오랜 짓밟힘 속에서도 끄덕없이 한 해를 살았던 세상의 어떤 꽃도, 식물도, 그 자리에 인간의 개발의 손만 닿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이 땅에서 사라진 꽃들이 얼마런가? 

처음, 이 책의 목차를 보고 좀 놀랐다. '아니, 이렇게 들꽃들이 많았단 말야!' 새삼 나의 무관심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읽다보니, 어찌보면 이건 결코 많은 것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하천에 정화되지 않는 썩은 물을 쏟아 버리고, 산업화로 인한 공해 때문에 사라져간 꽃이 더 많지 않을까? 다행히도 저자는 현존하는 들꽃들에 대해 소개해 놓고 있긴 하지만, 이 꽃들도 앞으로 한 세대만 지나면 과거형으로 설명되어져야 할 것들이 있지 않을까? 그나마 이 책에 소개된 꽃들은 한 세대전만하더라도 들에, 길가에 지천으로 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허리를 구부리고, 돋보기를 들이대듯 해야 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책은 독특하게도, 약간의 진보적인 시각에서 씌여지기도 했다. 말하자면, 저자는 그 꽃들을 소개하면서 오늘 날 개발에만 혈안이 된, 개발 공화국 대한민국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통찰한 저자의 따가운 일침의 소리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 나라, 또는 그 고장에 어떤 식물이 살아 있는가를 보면, 그곳이 과연 사람이 살만한 곳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기도 너무 이기적이다. 왜 이 지구상엔 사람만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자연과 더불어 공존해야 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던가? 자연을 파괴하고 인간이 온전히 살성 싶은가? 인간이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 건 지상과제가 된지 오래다. 그래도 무차별적으로 파괴되는 것이 복구되는 것 보다 많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보면 오만은 아닐까? 도대체 인간이 얼마나 자연을 보호하고 살았기에 그런 말을 서슴치 않고 떠들어 댈 수 있는가 말이다.  

저자는 책에서 몇 번이나 친환경 개발이란 말을 마뜩치 않게 말하고 있다. 요즘은 저 말을 달지 않으면 허가 자체를 내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또 그래야 사람들이 안정감을 가질 테니까. 하지만 그것이 개발의 주체자들이 친환경을 정말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건 그야말로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미봉책에 불과한 것이다. 당장, 청계천을 보라. 청계천의 야경은 그지없이 아름답지만, 그 속을 파보면 생명이 살아갈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지 못하다. 분명 거기엔 '복구'라는 단어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정말 친환경적 복구였을까?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정책을 입안하기 위해 국회로 들어간 사람들이 한 권씩 읽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들꽃에 대해 공부하지 않은 사람은 아예 정치를 하지 못하도록 해야할 것만 같다. 세상의 모든 만물도 천적이 있어 그 개체수를 유지하며 산다. 즉 자연의 법칙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최근까지 외래종인 왕개구리가 천적이 없다고 알려졌는데 그것이 아니라고 한다. 천적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천적들이 인간에게 해가 되므로 예산을 써서 박멸에 나섰다고 한다. 웃기지 않은가? 어디 그뿐인가? 가로수로 플라타너스(양버즘나무)만큼 좋은 나무가 없다는데, 정치몰이배들이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이벤트 사업을 펼쳐 멀쩡한 나무를 쳐냈다. 효과도 크지만, 실패해도 정치적 손실이 적기 때문이 그 이유란다(26p). 과연 이런 무지한 사람을 국회로 들여보내 우리가 얻는 이득은 뭐가 있을까? 그리고 그 사람은 창피한 줄도 모르고 국회에서 친환경 정책을 입에 개거품 물며 떠들어대겠지? 

그들이 게으르고 시간없어 이런 공부조차 하지 않겠다면, 적어도 우린 그런 사람을 다음 선거 때 국회에 들여보내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 한다. 우리가 무지해서 자연을, 아니 (그것도 너무 거창하다) 들에 피고, 거리에 밝히는 꽃들 조차 지켜내주지 못하면서, 정치꾼들의 친환경 정책이 진짜 정책인지 쇼인지 어떻게 무엇으로 알 수 있을 것인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사람들이 웃으며 후려치는 뒤통수를 맞고 나중에 탓하고 욕하는 것 밖에 더했는가? 

저자의 이런 통찰도 통찰이지만, 저자의 눈을 한 번 거친 이 땅의 들꽃들은 하나도 나쁜 것들이 없었다. 그것은 거기 필요해서 거기 있는 것이다. 하다못해 더러운 하천을 뒹굴러야 사는 꽃도, 또한 외래종이라고 뽑아 버려야 한다고 핏대를 높이는 것 조차도. 그것은 과연 귀기울여 들을만 하다.   

특별히 내가 이 책에 다시보게 된 것은 잡초에 관한 새로운 통찰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무익하다고 해서 제초제를 써 가면서까지 없앨려고 하는데, 그것도 알고 보면 필요한 것이기에 거기 그렇게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함부로 그 무엇으로도 때릴 수도, 뽑아 버릴 수도 없는 게 들꽃이다.  

읽으면서 그 꽃들이 말하는 것 같다. "인간아, 철 좀 들어라. 늬들이 우리를 지킨다고?"하며 콧방귀를 뀌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이런 나의 생각과 상관없이 그 자리에 그 꽃은 피어있는 거겠지만. 새삼 그것의 고고한 생명력에 경이와 애정을 보내고 싶어졌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10-11-27 2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저책은 아니고 그냥 화보로 된 들꽃 사진책이 있는데,우리가 모르는 참 아름다운 들꽃이 많더군요.그리고 새삼 그 들꽃들은 찍던 사진가의 노고와 마구잡이 개발이 많아 아름다운 들꽃들이 조만간 사라질지 모르겠네요ㅜ.ㅜ

stella.K 2010-11-28 13:00   좋아요 0 | URL
읽으면서 좀 안타깝더라구요.
이 개발의 문제를 어떻게 해야하나 걱정스럽기도 하구요.

cyrus 2010-11-29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많은 들꽃들 중에서도 정말 아릅다고 이쁜 꽃들이 많은데,,
무분별한 개발 때문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언젠가는 사진으로만 보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10-11-30 11:54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 개발이란 말만 들으면 현깃증이나요.
이 손바닥만한 작은 나라에서 개발할 게 어딨디고,
땅 파고, 삽질들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정말 국회들어 갈 사람들은 필히 자연 공부 좀 하고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감은빛 2010-12-09 0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꾹! 눌렀습니다!
이번에도 스텔라님 특유의 패턴이 읽힙니다.
잘 읽었습니다.

stella.K 2010-12-09 10:15   좋아요 0 | URL
푸히히, 제가 좀 까칠하죠?
그래도 추천은 언제나 좋아요!^^
 
닉 부이치치의 허그(HUG) - 한계를 껴안다
닉 부이치치 지음, 최종훈 옮김 / 두란노 / 201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를 처음 보게된 것은 2년전쯤(어쩌면 1년전이었는지도 모른다.나의 기억력은 갈수록 저질이다.)TV를 통해서였다. 어떻게 팔도 다리도 없는 사람이 비장애인들 틈에 끼어 운동을 하기도 하며, 연사로서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을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그의  해 맑은 인상이 해표지증(팔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하긴, 장애인이라고 얼굴에 쓰고 다니라는 법이있나? 장애인이라고 해서 해 맑으면 안 되는 건가? 편견은 금물이다). 그리고 그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마다 감격해서 눈물을 흘린다. 특히 그는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많은데 무슨 마력인지 그들은 하나같이 그에게 감동한다. 나 역시 그날 그렇게 보고 그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정말 인상적이었다.

특히, 몸의 중심을 잡아주는 팔과 다리가 없으니 눕기는 어떻게 눕는다고 해도 혼자 일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도 부족해 그 닭발 같은 발로 드럼도 치고 있었다. 와, 저 정도라면 자기 혼자서 못하는 일은 거의 없겠는데?!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뭔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바로 그 궁금증이 이 책을 보게 만들었다.
 

역시 그는 그냥 거기에 존재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역시, 자신이 다른 사람과 같지 않다는 것에서 많은 좌절과 방황을 했음을 이 책은 말하고 있다. 특히 그를 본 사람들은 외계인이라고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그 역시 결혼을 할 수 있을지? 가정은 꾸려갈 수 있을지, 인간적인 고민들을 허심탄회하게 고백한다. 그런 것으로봐 그 역시 그냥 그렇게 되어진 것은 아니겠구나 싶다. 
 

말하자면 세상은 아직 장애자가 그런 고민없이 비장애자의 대등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그런 세상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런 세상을 극복해 갈 수도 있거나  둘중의 하나일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주목해서 본 것은 무엇이 그로 하여금 그토록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사람으로 만들었느냐는 것이다. 물론 그 배후엔 그를 헌신적으로 돌봐줬던 가족들의 헌신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누군들 사지육신 멀쩡한 자식을 낳고 싶지 않겠는가?

그의 어머니는 그를 임신하고 산달이 다가오도록 그가 그런 장애가 있을 거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장애자로 태어났다고 해서 다 불행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 들이느냐에 따라 인생은 좀 더 풍요롭고 상공적으로 살 수도 있고, 불행하게 살 수도 있다. 그것은 장애자건 비장애자건 그 공식을 피해가지 않는 것 같다.

그의 부모님을 그를 포기하지 않았으며, 헌신적으로 돌봐 주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은 그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것은 그에겐 상당히 크고도 중요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부모님이 아무리 지식이 많고, 현명하며, 돈이 많다고 해서 자녀에게 완벽한 유산을 물려줄 수는 없다. 부모도 인간이고, 인간은 완벽하지가 않다. 무엇보다 그 자식 곁에 언제나 있지 않는다. 그것을 아는 부모는 신앙을 자식에게 남겨준다. 그리고 그 자식이 하나님을 아는 일에 눈을 뜰 수 있도록 해 준다. 

그는 고등학교 때 한 신앙 써클 모임에 나가 자신의 살아 온 삶을 고백하는 것을 시작으로 지금과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 즉 하나님은 그를 향하신 놀라운 계획들을 가지고 계셨고, 지금도 그를 통해 일을 성취해 나가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를 멋지게 쓰시는 것을 볼 때 역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한 것을 통해 그분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닉 부이치치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더러면 그가 지금쯤 어떤 인상을 살지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는 지금도 세계 곳곳으 누비며 희망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가는 곳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정말 희망을 가진 인간은 그 한계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한계를 껴안는다는 의미에서 제목을 허그로 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책 사이 사이에 그의 여러 활동을 담은 사진이 수록 되어있다. 하나같이 밝게 웃고 있다(그리고 드는 상당한 미남이다). 특히 그가 우리 한식 밥상 앞에서 한박 웃음을 짓는 얼굴이 인상적이다. 아무튼 그 사진들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희망으로 쓴 그의 간증과 같은 책이다. 동시에 무슨 운동 선수의 코치처럼 많은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의 삶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마다 감동한다. 힘을 잃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사람이 잃으면 좋을 듯 싶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난 이 책이 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길 바랬는데 어찌보면 무슨 경영, 처세 관한 책처럼 정형화 된 듯한 느낌이 들어 약간의 거부감이 없지는 않았다. 하긴, 인생의 깊이를 논하기엔 그의 나이가 비교적 아직 젊다는 느낌도 든다.  아니면 이런 식의 편집이 대세라 편집의 입김이 너무 많이 들어간 듯도 하고.

그래도 그가 쓴 이러저러한 조언들 가운데 아직 잊혀지 않는 말이 있어 잊어버리기 전에 얼른 여기에 옮겨 놓는다.

"남들을 섬길 기회를 찾기 시작하지 떠났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돌아왔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배운 것이 있다면 가만히 앉아 기회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서 활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230p)"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0-11-2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사람,, 군대에 있었을 때 정신교육을 통해서 처음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저런 신체로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더라고요.

stella.K 2010-11-22 13:01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이 사람 비장애인 보다 더 건강하게 사는 것 같지 않습니까?
대단한 것 같아요. 이 대단하단 말이 그에겐 싫을지 모르지만...^^

카스피 2010-11-22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긍정적인 분이시네요.더불어 놀라운 정신력이 소유자시네요.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살기 힘들다고 세상을 뜨는 세상인데 말이죠.
근데 이분과 비슷한 분이 있던데 오체불만족이라고 일본분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stella.K 2010-11-23 12:10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일본 사람. 오토 다케시였나? 암튼...
그리고 우리나라에도 있지요.
그는 아직 소년이지만.
참 밝게 살아요. 그만큼 본인도 노력하는 거겠지만
사회가 그들을 보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는 생각도 들고,
아직 멀었다고 생각할 때도 있고. 지금은 과도기인 것 같습니다.

진/우맘 2010-11-23 04: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지내시죠?^^

stella.K 2010-11-23 12:10   좋아요 0 | URL
그럼요. 반가워요.
이제 아이들 많이 컸겠어요.
자주 봐요.^^

양철나무꾼 2010-11-23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사람도 이 사람이지만,
얼마전 TV에서 봤던 어떤 아이가 생각나서 말이죠~

전,이런 책,TV 될 수 있으면 안 봐요.
그들이 우리에게 원하는 게 동정이나 눈물 따윈 아닐텐데 말이죠,
보다보면 눈물이 앞을 가려서 말이죠~

stella.K 2010-11-23 12:13   좋아요 0 | URL
ㅋ 양철님 마음이 여리시군요.
전 오히려 그거 보면서 유쾌했는데.
이젠 장애자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한다고 봐요.
그들도 비장애자의 따뜻한 마음과 하나된 마음을
원할 거예요. 그 마음 가져 주자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