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리틀 레드북 - 100명의 솔직한 초경 이야기 '여자는 누구나 그날을 기억한다'
레이첼 카우더 네일버프 엮음, 박수연 옮김 / 부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프롤로그 

이야기 발상부터가 깜찍하다.  

이 책의 엮은이는 13살 때 처음 초경을 경험하게 되는데, 하필 외할아버지 댁에서 수상스키를 타다 그렇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또 그때 따라 탐폰도 생리대로 없어 휴지로 대충 처리를 했는데, 이를 눈치 챈 외할아버지는 생리대를 산다는 것이, 요실금 기저귀를 사다 준다. 그도 그럴 것이 외할아버지가 사는 동네는 젊은 여자는 없고 할머니들만 득실대는 곳이라 생리대는 팔지 않았던 것. 얼마나 창피하고 당황스러웠을까? 그런데, 엄마와 이모들은 그런 그녀를 위로하기 보다 그 일을 두고두고 우스개 이야기거리로 삼았다고 한다. 옛적 당신들의 경험을 추억 삼아.  지은이는 바로 이 점에 착안을 해 초경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했고, 그것은 의외로 많은 이야기거리를 낳았다. 그리고 이렇게 빨간색 책으로 탄생한 것이다. 정중앙에 팬티 그림이 앙징맞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있으려니, 뭔가 나의 이야기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지는 이 글 마지막에 이르면 밝혀지리라. 자, 그럼 내 이야기를 해 볼까? 

나도 하게 될 거야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아주 어렸을 적, 그러니까 10살이 되기 이전이었던 것 같다. 이모들이 집에 놀러왔는데, 갑자기 언니와 오빠를 놀려주겠다고 숨자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집엔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방 하나가 있었는데, 그 방엔 잡동사니를 넣어 놓는 다락이 있었다. 거긴 출입구가 워낙 작고 높아 잘 가지 않는 곳인데, 그곳에 숨게 되었다. 그때  언니와 오빠가 우리를 찾아낼 때까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이었는데, 어쩌다가 이모들과 엄마가 생리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순간 나만 소외되는 것도 같고, 나를 너무 어리게만 보는 것이 싫어 불쑥, "나도 하게 될 거야."라고 말 해 버렸다. 그러자 막내 이모는 의혹의 눈빛으로 "뭘?" 하는데,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방금 신나게 떠들어 놓고 뭐라니? 그러자 이모는 "뭘 하는데?"하며 재차 물었다. 나는 속으로, '그 얘기 하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 왜 시치미를 떼지? 난 다 알고 있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걸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 거다.  척하면, 착하고 알아 들어야 하는데 우리 이모는 그런 센스가 부족했다. 아, 그때 내가 '월경'이나 '멘스'란 단어를 알았어도 꿀 먹은 벙어리는 면했던 건데. 그러니까 엄마의 자매들은 말중에 그 말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사용했더라도 난 아직 그런 단어를 구사하기엔 언어능력이 달렸던 거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신들이 나를 너무 어리게 보는게 여간 섭섭한 게 아니었다.  

'이래뵈도 저 알건 다 안다니깐요. 흥!'    

뻘(빨)갱이가 쳐들어 왔어!

사실 '월경'이란 말 보다 '멘스'란 말을 먼저 들은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그건 당시 우리집 입주 가사도우미, 그러니까 식모 언니에게서 처음 들었는데, 엄마가 다른 것은 다 맡겨도, 생리 때면 써왔던 천 기저귀를 그 언니에게 맡기지 않은 것이다. 그것마는 당신 손으로 직접 빨았는데, 그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왔던 말이 '멘스'였고, 그것을 그 언니가 나에게 옮긴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월경을 멘스라고 한다니? 훨씬 멋있고, 매력적인 단어라고 생각했다. 하긴, 그 나이 때 어떤 영어 단어, 외래어가 멋있지 않은겠는가? 더구나 당시는 외래어 사용 금지, 국어 순화 운동이 그 어느 때 보다 치열했던 때다. 왜 하지 말라면 더 한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튼 '멘스'는 너무 매력적인 단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는 월경 때면 '멘스' 말 보다는 이걸두고 하는 은어가 있는데, "뻘갱이 가 쳐들어 왔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면 알이 들을만한 사람들은 다 알아 듣는다. 빨갱이도 아니다. 뻘갱이다. 엄마는 항상 그랬다. 반공시절, 북한 괴뢰군을 지칭할 때도 뻘갱이였고, 월경을 지칭할 때도 뻘갱이다. 뻘갱이는 사투리였음직도 한데, 빨갱이 보다 더 강렬하다는 느낌이 든다. 그 후 나도 본격적으로 월경이 시작이 되고, 엄마가 몰라주면 흉내낼 겸 가끔 그것을 따라하곤 했다.  

생리대의 역사                          

내가 어렸을 때의 생리대는 지금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언니가 생리를 시작했는데, 월경 때면 입는 월경 팬티에 위 아래 가로로 두 줄의 끈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생리대는 접착식이 아니라 부직포 같은 것이 한겹 더 씌워져 위 아래로 길게 늘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패드가 마치 사탕껍질 모양으로 한겹 더 쌓여있는 있는 모양이랄까? 그것을 그 끈이 고정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때 너무 어려 '이 도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했었다.  생리대를 알지 못했던 나는, 마치 깨끗한 휴지가 여러겹 쌓여서 예쁘게 부직포 로 포장이 되어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호기심에 그 껍질을 벗겨보고 싶었는데 도무지 어디에도 쉽게 벗겨낼 수가 없었다.  그게 나름 신비로웠다.  

그러다 접착식 생리대가 나왔고, 나는 그것부터 사용했던 것 같다. 이것이야 말로 가히 생리대의 혁명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 얼마 뒤엔 '방취식 생리대'가 눈길을 끌었는데, 말하자면 생리할 때 냄새를 잡아주는 것이라고 하는데 다른 냄새로 전환시키기 위해 짙은 향수 냄새를 풍겼다. 그리고 그건 오히려 남자들의 표적이 된다고 해서 잠시 나왔다 사라졌지만, 지금은 좀더 친환경적인 소재의 방취식 생리대가 다시 나오고 있다.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나는 그 옛날 우리 엄마가 썼던 천 기저귀가 시쳇말로,  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건 못 쓸 것 같은데, 생리대의 진화에도 불구하고 새는 생리를 완벽하게 차단시켜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기저귀만큼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난 한번도 엄마가 생리 때 잠을 자다가 옆으로나, 뒤로 샜다는 말을 들어 본적이 없으니까. 지금의 오버나이트가 나오기 전까지 나의 초기 생리 땐 넘쳐나는 생리를 주체할 수가 없어 아예 첫날밤은 요를 깔지 못하고 맨바닥에서 이불만 덥고 잔 적도 있다. 그런 다음 날이면 몸이 베겨서 잠을 잤는지, 뭐에 두들겨 맞았는지 모를 정도로 몸이 안 좋았다. 그렇지 않더라도 판매되는 생리대는 알고보면 화학 처리가 불가피 해 피부에 자극을 준다고 한때 천 생리대를 사용하자는 운동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래도 생리대의 눈부신 발전은 90년대 들면서 본격화 됐는데, 그것의 필두가 '위스퍼'였던 것으로 안다. 그때 그것을 처음 사용해 보고, 역시 생리대는 할 수만 있으면 좋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을 깨달았다. 그것은 다른 기존의 제품보다 거의 두 배 가까이 비쌌는데, 그렇게 비싸더라도 꼭 좋은 것을 쓰고 싶다는 욕망을 갖도록 해준 게 바로 그 생리대였던 것이다. 

나의 초경 

얘기를 하다보니 생리 중의 이야기를 먼저하게 됐다. 나의 초경은, 초등학교 6학년 여름에 시작이 되었다.  이미 학교에서 또는 나의 엄마나 언니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던 거라, 나도 얼마 남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초경이 있기 얼마 전부터 어느 때가 되면 갑자기 몸에서 뭔가가 한 방울 흘러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럴 때가 되면 곧 초경이 얼마 안 남은 거라고 당황하지 말라고, 당시의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이 책의 엮은이를 비롯해 여기에 나온 대부분의 여자들이 황당하게 초경을 맞는 걸 볼 수가 있는데, 나 역시도 그런 선생님의 가르침과 몸의 신호에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해도 좀 멍청하게 초경을 맞이했다 싶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또래에 비해 비교적 일찍 초경이 시작된 셈인데, 다들 그 무렵 겨울이나 중학교 들어와서 시작되는 것을, 나는 여름도 다 보내기 전에 시작됐으니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오긴지 아니면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발견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팬티만 갈아 입었을 뿐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엄마와 언니가 걱정을 하고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난 "아냐. 그럴리 없어. 내가 벌써? 말도 안돼." 팬티는 금방 피로 억룩져 다리를 타고 흘러 나올 지경인데도 난 이렇게 쉬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언니가 킥킥대고 웃으며, "빨리 대책세워."하며, 너도 별 수 없는 여자라는 걸 인정하라는 눈치였다. 나도 더 이상 버틸 수마는 없었던지라 언니의 말이 떨어지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하지만 그때의 황당함과 허망함이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이대로 나의 어린 시절은 영영 가버린 건가? 그리고 이대로 여자가 되어버리는 건가? 나의 유년 시절이 새삼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망있는 가문에서는 생리가 시작되면 포도주도 따고, 축하를 해 준다는데 우리 엄마는 그런 것도 안 해 주고, 오직 언니의 야릇하고도 묘한 웃음만 째려 보는 것 밖에 없었다. 언니라고 하나 있는 것이 엄마 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하긴, 엄마가 그러는데 언니라고 낫겠는가? 그런 걸 바라는 내가 잘못이지.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 초경을 축하해 준다는 것에 대해 굳이 인위적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런 것을 해 줌으로 밝은 느낌으로 월경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초경 이후에도 그것을 긍정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인식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사실 여자들이 월경에 갖는 느낌이나 인식이 그렇게 밝지마는 않다는 느낌이다.  

스티븐 킹, 당신 실수한 거야! 

물론, 이 잘난 작가를 헐뜯을 생각은 없다. 그런데 내가 초경을 할 그 즈음, 이 영화가 상륙했다. 아직 어린 나이라 영화관 출입이 자유롭지 못했고, 이런 공포 영화는 접할 기회가 없어 영화는 못 봤지만, 당시 영화와 함께 책이 번역 출간 되었다. 그때 난 학교에 읽을만한 책을 들고 다녔는데, 마침 스티븐 킹 동명소설을 들고 다녔다. 그땐 스티븐 킹이 얼마나 유명간 소설간지 잘 몰랐다. 단지 이 책을 읽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남자 아이들은 그닥 그렇지 않은데, 여자 아이들이 얼굴을 찡그리며 치우라고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무서운 소설이라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소설 속 주인공 캐리가 초경을 경험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해서 눈치를 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스티븐 킹이 다른 소설을 잘 썼을지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신사답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여자의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을 이렇게 기괴한 이미지에 써 먹을 생각을 했을까? 물론 해석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조소 당하는 느낌이어서 기분이 좋지는 않다. 그것을 영화에 그대로 써 먹은 제작진도 그렇고. 

이렇게 우리는 알게 모르게 월경을 자랑스럽지 못한 것으로 인식해 온 것도 사실이다. 아니, 책을 치우랬다고 해서, 생리를 할 운명에 봉착한 계집 아이들이 생리를 안하는 것이 되는 건가? 지금은 그런 의식이 많이 흐려진 것 같긴 하지만, 우리 한창 때는 남자가 카운터를 지키는 슈퍼나 약방에서 생리대를 살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반드시 여자가 주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생리대를 사곤 했다. 하긴, 작년이던가? 편의점에서 생리대를 사는데, 새파란 젊은 남자가 카운터에 서 있다. 내가 생리대를 내밀었더니 묘한 분위기와 손놀림으로 그것을 계산하고 봉지에 담는 것이다. 속으로, '이런 촌놈!' 했다.  

또, 내가 20대 젊은 날, 교회 아는 또래 남자애들이랑 섞여서 이야기를 하다가 누가 휴지를 찾기에 내가 얼른 휴지를 내준다는 게 하필 가방에서 잡힌 물건이 생리대였다. 나는 번개같은 손놀림으로 즉시 생리대를 집어 넣고 재빨리 휴지를 꺼냈는데, 그 0.0001초를 참아내지 못하고, 여자 아이들은 민망해 고개를 전부 아래로 숙이고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다. 실수한 사람 무안하게 그렇게까지 할 건 또 뭐가 있는가? 휴지와 생리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다 위생을 위한 필수품 아니던가? 마치 생리도 안하고 사는 고고한 한 마리 학인 양 하는 게 더 우습지 않은가?  

기억하는지 모르겠는데, 지금으로부터 한 10년 전이었나? 여성의 생리대 값을 나라에서 지원해 주자는 법안을 놓고 말이 많았다.  앞서도 말했지만 정말 여자는 좋은 걸 쓸 권리와 의무가 있다. '위스퍼'를 필두로 생리대의 고급화가 이루어지니 그 비싼 생리대가 어느새 평준화가 되어버렸다. 이런 건 정말 나라에서 지원을 해서 좀 싼 가격에 쓸 수 있도록 해 줘야 하는데 그게 통과를 하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가 어느 남자 국회의원이 여자의 생리대 값을 지원해 줄 것 같으면, 똑같이 남자의 면도에 드는 비용을 나라에서 지원을 해 줘야한다나 뭐라나. 순간 누군지 모으지만 쪼잔하기 한량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견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니가 여자의 생리를 알아?' 콱 주어박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좋다. 그런 거 법안 통과 안 시켜도 좋으니 민생이나 책임져라!  

하지만 한 나라의 여성의 생리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나라의 국민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은 여자들이 죄가 많아 한 달에 한번씩 생리를 하며 속죄를 하는 거라는 생각을 신앙처럼 믿고 살아왔다. 그렇다면 남자는 뭐 죄가 많아서 밖에 나가 뼈 빠지게 일하는 것인가? 연출가 오태석 씨가 여성의 생리를 두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차오르고 나면 기우는 달처럼 자신의 몸에서 달의 주기를 체험하는 위대한 분들, 어떻게 이런 분들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나."(8p) 정말 여성의 생리를 이렇게까지 존중해 주는 남자가 있다면 어찌 그를 흠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건 가히 스티븐 킹의 소설 <캐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비스런 수사다. 

폐경 즈음에 월경을 되돌아 보다                           

물론 난 아직 폐경은 아니다. 아직까지는 오태석 씨가 말한 달의 주기를 꼬박꼬박 체험하는 위대한 사람 중 한 사람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 달의 주기를 얼마나 더 체험할 수 있을까? 손꼽아 볼 나이가 되었다. 월경을 일찍 시작한 사람은 내 나이 정도에 폐경을 맞이한 사람도 없지는 않으리라. 이쯤되니 이맘도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폐경이 됐을 때 나는 엄마를 꽤 부러워했다. 여름 한철 월경을 시작해 보라. 이때 만큼은 정말 어느 북극에라도 다녀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건 정말 아는 사람만 안다.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되니 엄마는 얼마나 좋을까? 부러웠다.   

이놈의 월경은 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며, 너무 많이해도 문제고, 적게 해도 문제다. 내가 초경을 했을 때 나는 공공연하게 같은 또래 여자 아이들에게 "하니?", "시작됐어?"라고 묻고 다니곤 했다. 그런 것처럼 이제 난 또 가끔 묻는다. "아직도 하니(해요)?"라고.  초경을 다소 초조하게 기다렸던 내가, 지금은  그것이 서서히 그림자를 보이며 사라져 가려고 하고 있다. 그 기분은 어떤 것일까?  정말 홀가분하고, 더 이상 아랫도리에 촉수를 예민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마냥 좋아할 수 있을까? 그런데 왠지 초경을 시작했을 때만큼이나 서글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더 이상 젊지 않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고. 그래서 가끔 엄마를 폐경을 맞이한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볼 때가 있다. 얼마나 당당한가? 얼마나 자유로운가? 나도 그렇게 당당하게 폐경을 맞이해야지.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본다. 

이 책에 대해서    

이 책은 막상 읽으면 비슷한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 것 같아 약간은 지루할수도 있다. 하지만 또 읽다보면 의외로 웃음짓게 만드는 부분도 많다. 그건 '아, 저건 내 얘기야.', '어머, 나만 그러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잖아?' 또는 '그래, 그럴수도 있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도 된다. 그럼에도 이 책에 별점을 매기라면 나는 다섯 개를 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완벽한 작품성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의 체험이란 거, 자신이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건 다 귀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동질감을 느끼며 말의 축제를 벌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나도 이 책이 아니었으면 나의 그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했을까?  

자,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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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5-29 0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男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초경을 하게 되면 어른이 된다는 막연한 불안감의
정서를 가지지 않나요? 그걸 스티븐 킹은 초자연적인 소설의 모티브로 따온거 같아요.
캐리가 주위 동급생들로부터의 왕타에다가 갑작스런 초경을 경험하게 되면서
사춘기 시절 특유의 불안감이 증폭되어서 알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이 생길 수 있었잖아요.

하지만, 스텔라님 글을 읽고나니 스티븐 킹의 설정은 기발한거 같은데,,
우리나라 작가가 그렇게 썼다면 독자들의 이해와 공감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았을거
같아요, 게다가 미국처럼 월경에 대해서 쉽게 꺼낼 수 있는 사회도 아니니까요. 오히려 월경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보네요.

이 책,, 남자들도 읽어보면 좋을거 같아요, 무엇보다도 아버지가 되어서
딸이 생기면 초경을 겪는 딸의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게 중요하다고 봐요.

stella.K 2011-05-29 14:12   좋아요 0 | URL
그럴수도 있겠네요. 하지만 캐리가 우리나라에 상륙한 게 78년도 거든요.
그땐 시루스님만큼이나 영화를 깊이 볼 줄 아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냥 공포스럽다는 것과, 몇몇 인상적인 장면 가지고 얘기하는 정도지.

당연하죠. 지금은 여성의 월경에 대해 자연스럽게 얘기하지만,
저때만해도 쉬쉬했거든요.

맞아요.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이 시루스님 장가 갈 때까지도
계속 팔릴지 의문이어요. 혹시 절판되지 않을까요?
제가 볼 땐 단명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 책 사실은 서평단에서 받은 건데, 실제로 여자들만 신청했지
남자는 한 분이 관심을 보였을 뿐이었어요.
솔직히 여자 보단 남자가 더 읽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혹시 필요하시면 말씀 하세요. 보내 줄 수도 있어요.^^

cyrus 2011-05-30 11:3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이 은근히 권하시니(?) 읽어보고 싶은데요 ^^
게다가 친분이 있는 분의 블로그에서도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봤는데,,
재미있을거 같아요. 그 분도 이 책을 호의적으로 보시더군요.

stella.K 2011-05-30 11:49   좋아요 0 | URL
어떤 분은 이 책 킥킥대며 읽었다는데,
저는 좀 시크해서 그럴까? 그냥 나쁘지 않다는 정도였어요.
그러고 보면 사람들 저마다 느낌이 다르긴 해요.
시루스님은 어떤 느낌일지 궁금한데요?
급할 거 없으면 가지고 있다 천천히 보내드릴게요.
그래도 되죠? 제가 워낙에 나무늘보띠라...ㅋㅋ
암튼 시루스님, 찜!!

안인용 2011-05-3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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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대학교 - 고양이에게 배우는 마음공부
잇사이 쵸잔시 지음, 김현용 옮김, 이부현 감수 / 안티쿠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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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을 읽을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읽을 책이 산더미 쌓아놓고 이런 작고, 얉은 책이 눈에 들어올까? 모처에서 잘못 보낸 책이라 돌려보내던가, 받고도 시치미를 뚝 떼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하지만 또, 그 얉고도 작은 책을 읽는데 얼마나 걸린다고 그냥 넘어가나 싶어 결국 서평에 대한 양심적인 책무를 다하기로 했다. 

이책은 싸움에 관한 책이다. 싸움하면 얼핏 <손자병법>을 떠올리겠지만, 이런 책도 있었네! 하며 작은 탄성을 질러볼만도 했다. 그리고 읽으면서 밑줄긋게 만드는 부분도 많았다.  한마디로, 작은 책의 위력을 톡톡히 한다.

이야기의 시작은 대충 그런 것이다. 검술가 쇼켄의 집에 쥐를 퇴치할 고양이를 데려다 놔야겠는데, 다른 날쌔고, 카리스마 있는 고양이를 두고, 하필 살찌고, 늙은 고양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 고양이 모양은 그래도 범상치가 않다. 그 고양이는 병법을 아는 고양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쇼켄은 그 고양이로부터 병법자의 마음을 전수 받게 되고 그것을 정리한 책이 바로 이책 <고양이 대학교>가 되겠다. 저자의, 늙은 고양이를 통해 병법자의 마음을 설명하게 한다는 발상이 기발하다. 그러면서, 육조단경이니, 노자니, 장자니 하는 동양철학의 온갖 진수들을 다 끌어왔다.  

내용을 보면 그런 말이 있다. 검술을 배우는 자는 먼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칼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게 참 모순된 것 같지만 곱씹을만 하고, 제법 비장미까지 느껴진다. 왜 그럴까? 흔히 고양이와 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로 묘사되기도 하는데, 이 늙은 고양이는 특징이 하나가 있다. 다른 여타의 고양이는 쥐를 잡지 못해 아웅다웅 하는데, 이 늙은 고양이는 쥐가 피해 가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주위엔 쥐가 한 마리도 없다. 쇼켄은 바로 이것을 보고 늙은 고양이에게 한 수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고양이들은 쥐를 잡으려하나 잡지 못하면서, 왜 이 늙은 고양이는 쥐 조차 피해가는가? 그래서 그 주위는 항상 평온하다. 쥐가 고양이를 두려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말 쥐도 막다른 골목에서는 고양이를 문다. 결국 힘을 쓰면 상대도 같은 힘을 쓴다는 것인데, 그래가지고는 이기는 싸움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니 내가 지금까지 어떤 자세로 싸움에 임했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마시라. 내가 무슨 싸움닭도 아니고. 하지만 살다보면 본의 아니게 불가피하게 싸우게 되는 경우가 있다. 어렸을 땐 육두문자를 누가 더 얼마나 치열하게 구사하느냐에 따라 싸움의 우열과 성패가 좌우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철들고 나서는 그게 제일 낮은 수준에서의 싸움이라는 걸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상대가 어떻게 했는가를 증명하며 될수있으면 논리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려고 했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구사하는 싸움의 방법이다. 뭐 그래서 대충 싸움을 잘한다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여전히 싸움은 내겐 익숙하지도 않으며 썩 유쾌하지도 않다. 하지만 피할 수 없으면 즐기랬다고, 괜찮은 싸움의 기술 하나쯤 읽혀두는 것도 호신을 위해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이책은 상당히 통찰적이다. 읽다보면 고개를 끄덕일만한 대목이 많이 나온다. 그런데 결국 말하는 것은 한 가지다. 싸움의 가장 높은 경지는 무위가 되는 것이라는 것. 바람이면 바람과 하나가 되고, 물이면 물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나는 없다. 이것이 싸우는 자의 가장 높은 경지라는 것이다. 늙은 고양이는 바로 이것을 할 수 있었기에 쥐 조차도 그 주위를 피해갔던 것이다.  그럴 듯하긴 하다.  내가 없다고 생각하면 모든 건 나를 피해간다.  하지만 이 무위평온한 상태는 또 얼마나 유지하기가 힘든 것인가? 어떻게 미워하는 상대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적이 나를 향해 공격해 오는데 피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체질적으로 이걸 너무나 잘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디를 가도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은 꼭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 아예 투명인간이려니 한단다. 말하자면 (개)무시한다는 말인데, 무위가 되는 것과 상대를 무시하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이책 나름 좋긴한데 다 읽고나면, 그럼 뭐야, 싸우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아리송한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그래도 싸움의 기술을 익히는데 처음부터 무위를 익히는 건 좀 재미없지 않을까? 다른 것을 알고 그것을 실험도 해 보고, 재미도 좀 보다가 싫증나면 그때가서 무위를 익혀도 되지 않을까? 물론 처음부터 싸우는데 힘 빼기 싫으면 바로 이 방법을 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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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시사인 만화 - 신세기 시사 전설 굽시니스트의 본격 시사인 만화 1
굽시니스트 지음 / 시사IN북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우선, 필명인가 본데 왜 이름을 그렇게 정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별명 같은 필명이야 조합에서 이루어지니 만들기 나름이라지만, 우리나라에서 굽신거리다는 의미는 그리 좋은 뜻으로 통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저자가 이 이름을 필명으로 한데는 모르긴해도 두 가지 의미는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는 아마도, 우리나라 정치인을 향한 통렬한 비웃음에서 나온 것 같고. 또 하나는, 저자 자신을 의미했을 것 같다.  낮은 자의 자리에서 높으신 분들을 올려다 보려니 어찌 굽신거리지 않을 수  있겠으며, 올려다나 볼 수나 있겠는가? 그리고 저자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자기나름의 풍자와 해악의 해석을 펼쳐보이는 것이다.  

사실 보면서 내내 감탄했던 건, 도대체 어디서 이런 풍자가 나올 수 있는 걸까 하는 것이었다. 문제를 문제로만 보면 현실은 답답하다. 하지만 이것을 다른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그리 답답할 것도 없고, 현실도 참을만 하다. 다행히도 우리의 심성엔 그렇게 볼 수 있는 일종의 프리즘 같은 것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그런 것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 같지는 않고, 저자와 같이 창의적 사고가 발달된 사람들이 있으니, 우리가 그런 능력이 없다고 해서 낙심할 것은 없는 것 같다. 그냥 우리는 그들이  차려주는 상차림을 보고 즐기면 되는 것이다.  

사실 저자의 만화는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다. 보다 보면, 지금도 그런 코너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몇 년 전까지만해도 정치 풍자 개그가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그런 느낌이다. 정치 풍자 개그는 또 얼마나 웃기고, 때론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가? 정치판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한때 여의도를 폭파시켜야 한다든가, 불을 놓아야 한다는 험한 말까지 돌정도로 일개 시민으로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실제로 그럴수는 없지 않은가?  그럴 때 누구는 이 가려운데를 긁어주고, 시원하게 해 줘야 한다. 책을 보면서, 저자는 실로 그런 것에 탁월한 재주를 가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굽시님은 교육도 잘 받고, 기량도 뛰어난 것 같다. 어쩌면 그 어렵다던 사자성어를 가지고 우리나라와 중국간의 외교문제를 그리도 잘 풀어냈는지(중국, 중원에서 답을 얻다,126~127), 보면서도 무릎을 탁 칠 정도로 감탄했다. 그뿐아니라 노래나('마법의 성'을 '편법의 성으로'), 유명한 세계 동화(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이상한 나라의 앨리숙'으로), 초베스트셀러('정의란 무엇인가'를 '성의란 무엇인가')를 패러디 해 정말 웃게 만들었다. 그런 것을 보면 그의 창의력은 어디까지인지 모르겠다. 단지 약간 거슬리는 건, 요즘 유행하는 비속어들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뭐 그런 것이 없이 풍자가 가능할까 싶기도 하지만, 워낙에 비속어의 홍수에 살고 있는 시대라 이런 것을 조금은 피해갈 수는 없었을까? 개인적으로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새삼 드는 생각은 도대체 '정치인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누구든 저자의 레이더망에 걸리면 금방 웃음거리가 되고 만다. 아마도 가장 많은 풍자의 대상이 됐던 건 이명박 대통령이었을 것이다. 지금이야 세상이 좋아져서 그렇지 옛날 2,30년 전만해도 한 나라의 국가 원수를 풍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만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었다는 것인데, 확실히 정치인들은 시민을 의식하되 연예인들과는 조금 다른 전술을 가진 족속들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치인들의 싸움은 링 위의 권투선수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들은 링 위에서 치고 받고 싸우지만, 알고 보면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난, 정치인들이 서로 밀고 당기는 정치쇼는 이제 그만 좀 봤으면 좋겠다. 진정 나라와 국민들을 위한 정치를 한다면 환호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을까? 그들은 힘겨루기만 하면서 국민들의 심리만을 교묘히 자극한다. 그런 심리전에 말려들면 나라는 또 사분오열로 찢어지며 블랙홀로 빠지게 된다. 하지만, 어찌보면 이런 정치 풍자 만화가 그런 것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모든 것엔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존재한다고, 이것도 너무 좋아하면 정치를 너무 냉소하게 만드는 것이 되기도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하긴, 우리나라만큼 정치에 관심이 많은 나라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좀 정치를 냉소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든, 냉소하든 정치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국가가 있어야 정치가 있고, 국민이 있어야 정치인이 있다는 것이다. 분명 그들도 저자의 만화를 한번쯤은 봤을 것이다. 보면서 어떤 느낌일지 모르겠지만, 이 말을 잊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정치인들이 그렇게도 외치는 선진 정치 의식이 구현된다면 저자의 만화는 또 어떻게 바뀔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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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5-09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이 책이 신간도서로 선정되었군요,, 제목이나 내용면으로 봐서 재미있을거 같아요. 특히 만화라서 쉽게 읽혀졌을거 같은 생각도 들구요 ^^;;
정치 풍자 만화나 글도 읽어보면 재미있잖아요 ㅎㅎ

그리고 오늘 <유토피아> 우편으로 보냈어요, 원래는 내일 스텔라님 집에 도착할거라고
예상되지만 하필 내일 휴일이라 내일 온다는 장담은 못하겠네요,,^^;;
어쨌든 이번 주 안으로 책이 올거에요 ^^

stella.K 2011-05-09 20:07   좋아요 0 | URL
아차, 그랬지요? 잊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잊고 있다 생각나게 해 주시니, 꼭 뜻밖의 선물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은데요?ㅋ
<유토피아> 청소년 시절부터 한번쯤 읽어보고 싶긴 했는데,
쉽게 읽혀질까 모르겠요.
그래도 시루스님 덕분에 한번 도전해 봐야겠습니다.
내일 징검다리 휴일 마지막 날인데, 보람있게 보내길 바랄게요.고맙습니다.^^


은비뫼 2011-05-11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돌잔치가 있었어요.
일찍 읽고는 그전에 서평쓰려했는데 아직도 못썼네요.
스텔라님의 글에 공감합니다. ^^
만화가의 풍자 정말 멋지더군요~~

stella.K 2011-05-11 11:12   좋아요 0 | URL
그렇죠?^^
나머지 책도 써야하는데 못 쓰고 있네요.ㅜ

잘잘라 2011-05-12 13: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분노할 땐 분노해야 하는데, 이런 풍자 만화로 '해소'되 버리면 안되지 않나, 오히려 분노가 폭발할 수 있게 기폭제 역할을 해야하는 거 아닌가, 아니 뭐 풍자 만화로 해소될 정도의 분노라면 분노라고 하기 좀 민망한가, 등등 이런 저런 생각이 듭니다.

stella.K 2011-05-12 14:49   좋아요 0 | URL
그렇죠. 동감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분노는 차있는데, 한방울만 더하면
확 넘칠 것 같은데, 그 한방울을 더하지 않아요.
귀찮고, 책임지기 싫거든요. 신변에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우린 앞으로 이러고 살게 될 것 같아요.
변혁이라는 거,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ㅋ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정수복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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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러니까 엊그제, 나는 친구와 함께 두 번째로 부암동엘 갔었다. 

비록 처음 갔을 때만큼의 감동은 아니었지만, 겨울이 보여주는 그곳과, 봄이 보여주는 그곳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역시 좀 더 화사해졌다고나 할까? 같이 간 친구도, 서울에 이런 숨은 곳이 있는 줄 랐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바로 이것이 부암동을 가면 첫번째 느끼는 것이고, 두번째로 느끼는 건 프랑스의 어느 마을이 꼭 이렇지는 않을까? 하는 착각이다.  

마침 그때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이쯤되면 상상을 더 확대 해, 프로방스와 부암동을 함께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 부암동은 한국의 프로방스. 프로방스는 한국의 부암동쯤은 되지 않을까? 시쳇말로, 상상하는데 세금 내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프랑스, 그것도 프로방스를 아직 한번도 가 보지 않은 나는 어찌보면 부암동에서 그곳을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난 느낌은, 실제로 프로방스에 가 보면 더 많이 감탄하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 말처럼 들릴수도 있겠는데, 사실 사진이나 책만 보고 그곳엘 갔다가 실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거니와, 이 책이 굳이 단점이라면 단점은, 사진은 저리 예쁘고 낭만적인데 비해 저자의 글이 (때론 지나치리만큼) 차분하고 사색적여서 하는 말이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을 했지만, 우리나라의 숨막히게 돌아가는 라이프 스타일이 맞지 않아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 저자의 선택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며 공감한다. 아마 나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저자를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을까? 프로방스의 풍광과 정취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상당 부분 고흐를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을 보면, 어쩌면 고흐를 잊지 못해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짐작도 해 보게 된다. 그만큼 프로방스 아를은 고흐가 살았던 동네고, 뒤에 가면 아예 <반 고흐의 '장소'들을 찾아서>란 쳅터를 따로 할애할 정도로, 저자는 반 고흐 애호가고, 또는 '고흐니스트'라 불러 줄만했다.  

책을 읽으면서, 고흐는 과연 그가 누구이길래 이토록 지식인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만큼 저자와 프로방스, 반 고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나도 전염이라도 된듯 예전에 읽었던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이 우울하고 을씨년스러운 반 고흐의 그림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고흐의 그림은 뭔가의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한때는 우울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 싫어 외면했던 그림을 나이 들어서야 점점 좋아지고 있다. 그것은 또 어쩌면 고흐의 그림 자체보단 그의 그림을 칭송해마지않는 사람들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글과 말을 통해 고흐를 이해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하긴, 꼭 고흐가 아니어도 우리 나이 정도가 되면 뭐 하나에는 정통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난 이 얘기를 들으면 이게 솔깃하고, 저 얘기를 들으면 저것이 솔깃한, 아직도 사춘기적 감수성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지가 않다.  

저자는 프로방스가 시간이 정지된 곳 같다고 했다. 그래서 빨리빨리를 외치는 보통의 한국 사람이 정서라면 꽤 따분하고 심심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글쎄... 사람 사는 것은 어디든 같지 않을까? 30대 때까지는 도시가 좋다가도 40이 넘어가면 그런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고요한 곳이 좋아지는 때이기도 하다. 내가 부암동에 매료된 것도  알고 보면 저자가 프로방스를 두고 얘기한 것과 비슷한 맥락 때문인 것 같다. 재밌는 건, 저자가 자신의 일상을 써 놓은 대목이 있어 소개해 볼까 한다. 

미란이 8월1일 아침에 발목을 다친 지 벌써 6일째다. 요즘음 나의 일상생활은 일하는 주부의 처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침 8시경에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해 미란과 함께 먹고 난 다음 12시경까지 글을 쓰다가 다시 점심식사를 준비해서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서 아를 시내의 유적과 박물관을 다니다가 (중략) 돌아와 샤워를 한 다음, 저녁식사를 준비해 먹고 치우고, ...... 텔레비전을 조금보다가 저녁 산책을 나갔다 들어온 다음,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든다. 살림을 하는 주부이면서 동시에 글을 쓰는 작가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집안일과 직장일이라는 이중의 노동에 시달리는 취업주부들의 처지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211p)  

뭐 저자가 아내가 발목을 다친 후 비로소 취업주부를 이해하게 됐다니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 가지고도 그것을 깨달았다면, 서울에서 취업주부를 이해하려면 이것의 두 배, 세 배는 더 해야 체험이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오히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자가 참 목가적으로 산다는 느낌이 들어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추구하고 싶은 삶이 이런 거 아닌가? 배우자가 다친 건 차치하고라도, 밥 먹고, 글 쓰고, 박물관 나들이나 산책 다녀오고, 다시 오붓하게 둘만의 저녁을 만들어 먹고 책 읽다 자는 것. 이 얘기가 프로방스니까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림없다.  

읽으면서 느꼈던 건, 선진국의 조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진국에 진입하려고 하는 나라는 그것에 진입하지 못해 휴식도 반납하고 안달복달하면서 산다. 하지만 선진국일수록 산책로가 발달이 되어있다. 그 길을 산책하면서 많은 것들을 사색하고 힘을 키웠다. 우리도 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책이 참 지적이란 생각을 했다. 읽으면서,  반 고흐는 물론이고, 까뮈와 페트라르카를 알게 되고, 크리스티앙 가이란 작가도 알게 된 건 의외의 수확이었다. 나는 이런 지적인 에세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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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4-20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나오자마자 보관함에 담아두고 있어요. 표지의 저 초록색은 정확하게 무슨 색이라고 부르는지 그것도 찾아본다고 하고 아직 못찾아보고 있네요.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프로방스와 그 반대의 한국, 두 곳을 동시에 좋아하기란 가능성이 참 희박할 것 같아요.
지적인 에세이를 좋아하시는군요 ^^

stella.K 2011-04-20 11:41   좋아요 0 | URL
전에 신영복 교수의 <더불어 숲>이란 여행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참 좋더라구요. 그책 생각이 났어요.
좋기도 그책이 더 좋았구요. 이책도 나름 그에 못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oren 2011-04-2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이 은근히 '완전한 휴식'을 꿈꾸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듯싶네요.
stella님의 글을 읽어보니 '부암동'도 궁금하고 프로방스에도 가보고 싶네요.

stella.K 2011-04-20 11:42   좋아요 0 | URL
ㅎㅎ 당장 가능성있는 것부터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부암동에 한번 가 보십시오.
제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하실 거예요.^^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박중서 옮김 / 까치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보며 문득, 초등학교 때 거의 누구든지 가졌던 '전과'가 생각이 났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두께에 압도 당했다고나 할까? 넓적한 크기에 글씨도한 빽빽하다. 오래 전부터 제법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빌 브라이슨을, 나는 이제야 이 책으로 접하게 됐다.  사실, 빌 브라이슨은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백과사전적이며, 전방위적 글쓰기를 해 온 작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 특유의 입담도 한몫했던 것으로 알고 있고. 그런 그가 이번엔 (내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집'을 주제로 책을 썼다.  

그는 현재 영국의 어느 목사관을 빌려 살고 있는가 본데, 책 첫 페이지를 펼치면 그 목사관 집 1층 평면도가 나온다. 배열 순서에 따라, 쓰레기통, 우물, 홀, 부엌, 거실, 보라색 방(일종의 또 하나의 거실), 또 아래는 식료품실, 설거지실, 또 하나의 부엌(그 안쪽엔 식료품실과 설거지실을 포함), 식당 (그 구석엔 종복의 저장품실)과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집무실로 되어있다.  

일단 이렇게만 보면, 우리나라엔 없어도 되는 몇 개의 방과 시설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식당이나, 보라색 방, 집무실은 없거나 있어도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엔, 보라색 방이 또 하나의 거실로 쓰였다면, 그건 얼핏 우리나라에서 사랑방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 이곳으로 이사왔을 때 그곳의 벽이 보라색이었기 때문에 그냥 보라색방이라고 한다. 거기에 600권 가량의 책이 있었다고 하니 우리나라고 치면 서재용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집무실은 우리나라에선 사랑방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나라면 그렇게 썼을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서민의 집은 이렇게 문화적이지마는 않다. 아주 단출하게 있어야 할 것만 있을 뿐 이런 문화 주택이 어디 흔하겠는가? 

그렇다고  저자의 집을 마냥 부러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가 살고 있는 집도 지어진지는 제법 오래된 모양인가 본데, 몇백 년을 이어 온 우리나라 고택도 알고보면 나름의 용도와 운치와 멋을 지닌 문화주택이란 걸 금방 실감할 수 있을 테니.  

내가 집에 관심이 있는 건,  순전히 드라마와 살면서 점점 알고 싶어지는 우리나라의 한옥 때문일 것이다. 전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란 혐의 때문이고, 후자는 한옥이야 말로 사람에게 맞춘 집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오늘 날의 현대식 집은 사람에게 맞추었다기 보단, 사람이 집에 맞추어진 형태가 아니던가?  순전히 드라마 때문이란 건, 특히 사극을 말하는 것인데 드라마가 어차피 허구의 이야기인만큼 무대 세트도 현대식 감각을 아주 배제할 수만은 없을진데, 보다 보면 과연 저 시대 실제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집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지는 않다.  특이하게도 집의 세부 구조를 소재로 그 안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나를 미시사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읽다보면, '정말 이런 일이 있었어?' 기절초풍할 일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내가 집을 다룸에 있어서 관심있어 한 쪽은 화장실이고 다음이 침실인데,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가장 들어나지 않는 곳이고, 은밀한 곳이기도 하니까. 그나마 화장실은 최근에 속속들이 많이 들어나긴 했다. 적어도 하이힐이 왜 발명되었는지, 18세기 이전만하더라도 프랑스나 영국의 거리가 온통 분뇨 천지였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모를 건 옷에 관한 미스테리다. 그토록이나 거리가 더러워 하이힐을 만들어 신고다닐 정도였다면, 당연 옷도 좀 짧아져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시대 여자들의 옷은 짧아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분뇨가 많았던 거리에서 그 치렁치렁한 옷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아찔하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빌 브라이슨옹이 다음 번엔 인간의 복식에 대해 다루어주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나의 바람을 그가 알리 없겠지만).  

사실 이 책은 미시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는 하나, 읽다보면 인간 더러움의 역사, 또는 인간 미련함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이럴수가...?!"가 저절로 나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게 만드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빌은 일부러 이런 역사만 알아가지고 짖궃게 우리에게 장난을 치는 것도 같다. "늬들이 인간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그래 알게 되니까 어떠냐? 재밌지? 히히히"  조금 맛보기를 해 볼까? 기왕 화장실 얘기가 나왔으니(화장실 얘기는 어렸을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항상 흥미진진하다) 좀 더 얘기해 보자. 현대의 화장실이 그래왔듯이, 목욕실과 변소를 같은 공간에 두듯이, 저자 역시 그렇게 다루고 있다.     

변소(privy)라고 해서 애초부터 이름처럼 사적인 공간은 아니다. 로마인은 특별히 배설과 대화의 조합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의 공중화장실은 대개 20개 남짓의 좌석이 서로 상당히 가깝게 놓여 있어서, 그곳을 이용하는 로마인은 십중팔구 버스를 이용하는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서 불가피하게 제기될 법한 문제에 미리 답변하면, 각 좌석 앞의 바닥에는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고 있어서, 사용자들은 막대기 끝에 달린 스펀지를 거기 담가서 뒤를 닦는 데에 사용했다). 화장실에서 낯선 사람과도 편하게 어울리는 관습은 현대에 와서도 한동안 지속되었다.(428p)

역사상 대(大)문화인일 것만 같은 로마인이 변소를 이렇게 사용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한때 화장실 꿈을 잘 꿨던 (지금도 아주 가끔씩 꾸는) 나는 그다지 놀랍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실제로 저 광경이 있었다는 게 놀랍긴 놀랍다(오늘밤 꿈에 나올까 겁난다ㅜ).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고 한다면 좋다. 조금 급수를 높여서, 

가구목수이자 자물쇠공인 조지프 브라마가 최초의 현대식 수세식 변기를 가지고 1778년에 특허를 얻었다. ...... 그러나 초창기의 변기는 그다지 잘 작동하지 않았다. 때로 역류가 일어나서 애초에 없애고자 했던 오물보다 더 많은 오물이 방 안을 채우는 바람에 사용자가 혼비백산하기도 했다.(433p)  

가히 어떤 모양새였을지는 알 것도 같다. 뭐 이 정도는 수위조절이라 해 두자.  600년 간이나 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니 그에 대한 각종 전염병의 역사를 우리의 빌 브라이슨옹은 참 친절하게도 알려준다. 그 밖에 "헉"소리 날만한 장은 많으니까 지면상 생략한다.  

그래도, 우리의 빌이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잘 다룬 장이 있다면, 홀을 다뤘던 3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이걸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한때를 풍미했던 외화들, 이를테면 '초원의 집'이나 '뿌리' 같은 드라마 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영화의 배경이 됐던 집의 구조물들이 보기에만 그럴듯할뿐 실제로는 화려하지도 않으며, 허술하기 짝이없는 것이라는 걸 이 책을 보면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안락하고, 문명스러워 보이는 벽난로도 그다지 따뜻한 것이 아니며 애물단지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집은 처음부터 사람 완벽히 지켜주던 구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우리나라의 온돌이 언제부터 있어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서양의 그것보다 훨씬 몇 배는 더 우수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무튼 이런 웃지못할 역사의 한 단면들을 빌 브라이스는 끊임없이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장을 보든지, 이것 말하고 있는가 보다 싶으면 또 금방 저걸 얘기하고 있고, 저 얘기가 또 언제 끝났지 싶게 새로운 이야기들을 굴비 엮어내듯 엮어내고 있다. 과연 이 사람의 백과사전적 지식의 끝은 아닌가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얼마 전에 읽었던 <토머스 페인>의 작가 폴 콜린스를 연상하게도 된다.  

이 책은 솔직히 역사적인 사실만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편하게 읽을 수만은 없는 책이다.  그렇다면 빌은 뭐 때문에 이런 걸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내는 것일까? 뭐 지적 과시? 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오늘 날 하나도 쓸모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이 역사의 어느 한 시대에선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때가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정말 웃음이 나올 정돈데, 또 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과연 우리 시대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앞으로 50년 또는 100년 뒤에 어떻게 평가를 받을까? 생각하니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인생이란 가까이 보면 비극이고, 멀리 놓고 보면 희극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역사도 그런 것이 아닐까? 특히 미시사는 더더욱.  게다가 인간이란 종은 어쩌면 그리도 척박하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명백을  지켜올 수 있었을까? 신기하다 못해 경외감을 가질 정도다. 또 그러면서 인간이 왜 그렇게 극악스럽게 자연을 해쳐가면서까지 살고자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저자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선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은 지식을 쏟아내고 있어 때론 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강추 하기 보단, 독자의 선택에 맡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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