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라
스테판 에셀 지음, 임희근 옮김 / 돌베개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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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의 제목은 분노하라가 맞는가? 

왜 이책이 이토록이나 들끊는지 모르겠다.  객관적으로 분노가 건강에 얼마나 안 좋은지는 누구든지 다 아는 사실이다. 분노하는 당사자도 당사자지만, 그것을 지켜보거나 받아줘야 하는 사람 또 무슨 죄란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분노라는 것이 동대문에서 뺨맞고 남대문에서 화풀이 하는 식이 많지 않은가? 그것은 어찌보면 흡연자보다 비흡연자가 더 위험한 것처럼, 그 사람의 분노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제3자가 더 위험할 것이다. 더구나 한 개인의 분노가 불특정다수에게 행해지는 파급력은 또 얼마나 위험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하라니! 이책은 단순히 제목만 읽으면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이책을 읽은지 몇주가 지났지만 확실히 뭔가 자극을 받는 것 같고, 선동적이 되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 얇고 조그만 책이 뭐라고...   

실제로 이책을 읽어보니 과연 제목 그대로가 맞는가 싶기도 했다. 이책에서 저자 스테판 에셀은  말한다. "...... 나는 남들보다 훨씬 오래 살다 보니 분노할 이유들이 끊임없이 생겨났다."고.  우리에겐 낯설긴 하지만, 저자가 독일의 나치 시절 레지스탕스의 일원으로 활동을 한적이 있다. 그때문에 그는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을 하고, 그 이후 그 근거지를 프랑스로 옮겨 계속 저항적인 삶과 행보를 이어갔던 사람이다. 그가 1917년 생이니 그맘도 90이 훨씬 넘었다. 이 노인에게 오래 살다보니 분노할 이유가 끊임없이 생겼다니? 분노도 젊은 때 한때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나이쯤되면 분노를 다스리는 법에 대해 강의를 해야하지 않을까? 사람 저마다 그릇이 있고, 탈란트가 있다는데 아마도 저자는 이 분노하는 일이 맞는가 보다. 그러니 그렇게 분노하고도 저토록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 그렇다고 해서 분노하면 저자처럼 오래 산다. 뭐 이런 식으로 곡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는 않다. 어떤 경우 차라리 분노하는 것이 분노 안 하느니만 못한 사람도 있을 테니.      

그런데 이 할아버지의 책을 가만히 읽어보면 단순히 그냥 분노하라고마는 하지 않는 것 같다. 더 정확히는  저항하라. 즉 저항으로서의 분노를 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애매한 사람에게 하지말고 우리가 속한 사회에 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에게도 분노의 시절, 저항의 시절이 있었다  

이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우리나라 현대사의 한 장면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386세대를 대표로 한 민주화항쟁이다. 그 시절은 독재와 싸워야 하던 시절이었고,  개인 보다는 국가 또는 공동체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하는 어찌보면 거대담론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의 386 세대를 키워냈던 부모들은 무엇이 두려웠던 건지, 모난돌이 정을 맞는다며 남의 자식 시위 현장에 뛰어드는 걸 막지 못할지라도 내 자식만큼은 쥐 죽은 듯 살아주길 바래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대학생들의 시위를 아니꼬운 눈초리로 바라봤던가? 배에 기름이 끼어 저런다며, 말리는 전경을 더 측은한 눈으로 봐라봤던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온탕안의 개구리라고, 시민의 주권을 독재권력에게 담보한 현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모른 채 시끄러운 것이라면 당췌 못마땅한 우리의 착한 부모님들이 계셨다.  

오죽했으면 박정희나 전두환의 독재시절이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말하겠는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그분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만큼 순진하셨다는 말일 것이다. 역사는 독재를 허락한 적이 없다. 독재가 무너진다는 것은 나라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것과 맘먹는 것이 됨으로, 독재는 그만큼 위험한 것이고  그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는 것이었다. 민주화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 의해 애굽을 나왔을 때 자신에게 어떤 신분의 변화가 있는 것인지 모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애굽의 노예 신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신분의 변화를 알지 못하고, 말할 수 없는 노역에 시달렸는데도 어느 덧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것이다. 그 시절 먹었던 음식과 비록 몸은 고되더라도 마음마는 편했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행군을 불평하는 것이다. 이것이 막상 항쟁을 하고 민주화가 이루어졌을 때 불행 끝. 행복 시작 일줄만 알았던 우리의 부모님이나 우리의 세대가 느끼는 박탈감과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시절을 그리워 하는 거나, 다시 독재가 와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슷해 보이는 며,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위험해 보이는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독재도 일종의 신앙이었을까? 그래서 신앙은 마약이라고 했던 것일까? 독재가 무너졌을 때 행복은 시작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들끊음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무엇이든 하나가 무너지고 새로운 것을 세우려 할 때 그것을 세우기까지 심리적 공허와 비판과 들끊음은 당연히 거쳐야할 과정이다. 그래서 아폴리네르는 <미라보의 다리>란 시에서,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라고 읊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원했던 건 독재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합리적이며, 힘있는 정부를 원했다. 그것은 나의 삶과 내 가정의 안위를 보장해 주길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의 정부는 예전의 정부와는 다르다.  독재가 무너지고 민주화가 되고보니 여기 저기서 다양한 요구들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이전 세대에 비해 가난하지도 않다. 지난 세기는 하나의 정부를 원했지만, 지금의 정부는 국민들의 다양한 요구들을 들어줘야 하는 멀티플레이가 되어야 한다. 그만큼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정부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확률은 더 높아 보인다. 섣부른 판단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결과는 마찬가지일거라고 본다. 그럴 때마다 우린 아폴리네르의 저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희망은 어찌 이리 격렬한가!" 

왜 분노해야 하는가?  

책을 읽다보니 현재 프랑스가 안고 있는 문제나,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가 비슷해 보인다. 날로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 인권의 문제는 정말 우리나라도 심각하다. 특히 인간으로서 살 권리는 심각하게 침해받고 있는 느낌이다. 대학 등록금 문제 때문에 강의실에 있어야 할 대학생들이 이 뜨거운 여름 날 거리에 나와 시위를 해야 한다. 그것을 보면서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돈에서 한 시도 자유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민 소득 1만불의 시대가 된지가 벌써 언젠가?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최저 임금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자살률 역시 높다. 그리고 자살의 동기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택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경쟁과 그로인한 인간관계의 심각한 왜곡. 상업주의와 이기주의. 이 모든 것을 정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데 거의 뒷짐을 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과연 오늘 날의 정부에 희망은 있는 것인가, 묻고 싶지 않을 수가 없다.

어찌보면 정부가 힘이 있어진다는 건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온전히 나라의 장래와 국민을 위해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힘을 위한 힘이라면 그것은 위험할 수가 있다. 이책은 한마디로 국민의 저항을 촉구하는 책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 그에 대한 지침으로 무관심을 경계하고, 꼭 투표할 것을 권하고 있다. 언제나 나는 선거 때마다 갈등하는 것은 어느 당이든 국민에 의해 정권을 잡으면 꼭 국민을 배신한다. 국민을 대신해 일을 해야하는데 오히려 국민을 볼모로 아슬한 줄타기를 한다. 그런데 저자의 말대로 투표는 해야하는 것인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투쟁하지 않으면 국민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우리나라가 진정으로 국민이 대우 받는 나라였던가? 그건 아니었던 것 같다. 늘 있는 소수를 위해 없는 다수가 희생 당하는 나라였고, 있는 소수의 권력 때문에 저항해야만 하는 나라였다. 결국 그로인해 잡초같은 근성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않으면 살 수 없으니.  그러나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말은 맞는 말 같다.

희망의 분노, 희망의 저항 

예전엔 무조건 시위하는 무리에 대해 안 좋은 시각이었지만, 지금은 그 인식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시위하면 최루탄과 화염병으로 기억되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진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인식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1인 시위나 촛불이 그것을 대신했다.    

저항의 목소리도 다양해졌다. 예전엔 '독재타도'였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다. 지난 목요일 한 TV 프로를 보니 수능반대를 위한 시위도 있었고, 대학이 싫어 자퇴하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을 봤다. 거기엔 전혀 무력 같은 것은 없었다. 이책의 저자 스테판 에셀도 친절하게도 저항의 방법까지 가르쳐 주고 있는데, 무저항 비폭력을 강조했다. 그것이 가능할까 싶기도 했는데 과연 가능했던 것이다.  

막상 우리의 젊은이들이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자일 것 같아도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들의 그런 작은 몸짓에서 뭔가의 희망을 보는 것 같아 흐뭇했다. 우리 땐 감히 꿈도 꾸지 못한 것들을 그들은 하고 있는 것이다.  난 그런 그들의 시위가 작은 열매라도 맺게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그래서 대학제국이라 말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 더 이상 대학이 그 권력을 휘둘러대지 못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대학 등록금의 문제도, 우리와 우리의 이전 세대가 하도 대학 대학하니 결국 우리의 자녀들이 저리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무저항 비폭력이라는 게 말이 쉽지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폭력이 쉬워 보인다. 그 방법을 모색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이다. 말하자면 어디까지 저항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린 한번도 인간으로 살기를 포기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인간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우리가 분노하는 것이고, 분노해야할 이유일 것이다.  

사실 이책은 너무 얇기도 하거니와 특별한 것을 말하는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들끊었던 건 '분노하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그것은 분노는 여전히 도덕적이지 못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그 누구도 아닌 할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니 얼마나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가? 

나는 우리나라 노인 세대도 분노했으면 좋겠다. 우리의 젊은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누가 대신 우리가 살수있도록 삶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늙었다고 소외를 언제까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60은 더 이상 노인이 아니라는 세상에서 자신의 삶의 자리를 찾아가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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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8-09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프랑스 할아버지가 주장하고 있는 '분노' 라는 실천적 자세의 제안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적용되는건 좋은데,, 과연 이 행위가 대중들에게 정말 실천할 수
있도록 각인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올해의 '분노' 신드롬이
10년 전의 홍세화 씨의 똘레랑스가 처음 국내에 소개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어요.
처음 국내에 소개될때만해도 신선하고 좋은 반응이 이어졌는데,,
그 신드롬이 오랫동안 유지 못한채 잊혀진거 같아요. 이번 '분노' 신드롬도
똘레랑스 신드롬처럼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으면 하는 개인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네요. ^^

stella.K 2011-08-09 13:41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엔 좀 부정적이었는데
일전에 제가 소개한 <타임>이란 프로를 보면서
우리나라가 나름 시위를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일부 과격한 시위도 없지는 않겠죠.
실제로 2008년 쇠고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시청을 나간 적이 있는데
나름 잘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똘레랑스는 몰라도 분노 신드룸은 한동안 가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우리나라가 원래 분노할 일이 많은 나라잖아요.
그때마다 시위의 방법을 진화시킬 필요를 느끼긴 해요.
이책 읽으면서 무저항 비폭력주의야 말로 민주적 분노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이 조그만 책 리뷰 쓰기가 만만치 않더군요.
생각도 많고, 체력도 저질이고. 읽은지 한참 지나고 나서 쓰는 건데
역시 쉽지가 않더라구요.ㅠ
 
내 이름은 왜? - 우리 동식물 이름에 담긴 뜻과 어휘 변천사
이주희 지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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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그가 어떻게 자연만물의 이름을 짓나 보시고 짓는 이름이 그대로 사물의 이름이 되었다고 나와있다. 물론 아담이 분류학자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물의 이름은 인간을 위하여, 인간에 의해 지어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게 또 꼭 인간을 위한 것이기만 하겠는가? 김춘수의 시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아무리 하찮은 것이더라도 이름은 반드시 주어져야 한다. 그래야 사물과 사물끼리 구분하기도 좋을뿐만 아니라 사물에게도 나름의 격을 부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요, 인격이 있는 존재라면 사물에게도 나름의 격을 부여하는 것이 인격을 갖춘자의 몫은 아닐까?   

이책은 우리 동식물의 이름에 담긴 뜻과 어휘의 변천사를 다루고 있다. 읽다보면 새삼 아, 이런 뜻이었구나 흥미롭기도 하고,  내가 잘못알고 있는 것도 바로 알게되며, 왜 이런 것들에 대해 무관심했을까? 나의 무지함을 깨닫게도 된다.

특히 인간에 의해 이름이 붙여지긴 했지만, 오랜 세월 흘러오면서 다른 것과 섞여지기도하고 본래의 의미는 퇴색된 체 와전된 그것이 정식 명칭인 양(때론 뜻인 양) 잘못 알고 있는 예들이 많다는 것을 이책을 보며 새롭게 알았다. 흥미로운 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백조'는 일본인이 만든 한자어라고 한다. 그것은 백조가 아니라 '고니'라고 쓰는 것이 맞다고 한다. 그것의 발전은 '곤'이란 중세국이에서 곤 > 곤이 > 고니로 변화를 겪었다는 말이다.(199p) 하지만 이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다면 우리가 잘 아는 차이콥스키의 <백조의 호수>도 알고보면 '고니의 호수'가 되어야하는 것이 맞는 얘기일 것 같다. 하지만 고니의 호수는 또 얼마나 어색한 제목인가?  

그밖에도 한글인데 한자처럼 쓰인다든지, 반대로 한자인데 한글처럼 쓰이는 명칭에 대해서도 의식을 바로잡고 있으며, 동물이나 식물의 이름이 왜 지금의 그런 이름이 되었는가에 대해 쉽고도 명료하게 밝혀놓고 있다. 그렇게 하나 하나 알아가다보면 하찮은 것들이 더 이상 하찮은 것이 아니며 나름의 이름값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책은 청소년들을 위해 썼다고 하는데 어른들이 봐도 유익하다. 앞에서 잠깐 백조와 고니에 관한 이야기를 했지만 무엇을 새롭게 아는 것은 좋지만,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로 알고 그것을 고쳐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사람의 인식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 변경에 따른 기억 회로를 새롭게 해야한다는 귀찮음 때문에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새롭게 태어나고 사라져 갔다. 앞으로 우리 후대의 사람들이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바로 알고 바로 전달해 줘야한다. 그렇다면 우리 당대의 귀찮음 정도야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을까? 우리 당대에서 알고 끝나는 것이라면 그것은 반쪽짜리 앎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저자를 비롯해 이런 일에 헌신하는 사람들의 노력이 새삼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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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심층을 보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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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이책은, 저자의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이후 두 번째로 읽은 책이다. 이 책을 들으면 우선 두 가지 정도로 놀라는데, 하나는 그 두께에 놀라고, 또 하나는 종교 사상가들이 이렇게 많았나 하는 것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적어도 나는 그랬다).  특히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에히리 프롬이나, 빅터 프랭클 같은 사람은 세계적인 학자로 보지 굳이 종교 사상가로 볼까 싶기도 한데, 저자의 해석을 거치고 나니 아, 과연 그도 그렇겠다 싶기도 하다(빅터 프랭클은 말미에 다시 한 번 다뤄 보도록 하자).  그리고 한 가지 추가적으로 놀랄 것이 있다면, 몇 페이지 안 되는데도 각 사상가들의 생애와 사상을 저자가 어쩌면 그리도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는 해설해 놓았을까 놀라게 되지 않을까 한다.   

저자는 왜 이책을 썼을까?

그런데 읽으면서 느꼈던 건, 저자는 왜 이토록 많은 사상가들을 다룬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물론 세계엔 이렇게 많은 종교 사상가들이 있다고 소개할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고백하건데, 나는 저자가 소개한 사상가들을 꼼꼼하게 다 읽지는 못했다. 워낙에 책의 두께에도 압도됐지만, 내가 과연 이 많은 사람을 다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내가 관심도 없는 이슬람이나 인도의 영성가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에 대충 읽고 뛰어 넘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것도 편견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는 종교를 마약이라고 했지만, 그러기 이전에 편견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신봉하는 종교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믿고 있는 신 이외의 신에 관심을 두면 계율을 어기는 죄를 범하고, 자신의 영혼을 해치는 일종의 강박 내지는 순정주의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에 이용하고, 대중을 선동하는 요긴한 무기로 사용는 것은 아닐까? 또한 그러면서 전쟁을 일으키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인류가 치뤘던,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허다한 많은 전쟁의 거의 대부분은 종교전쟁이라고 하지 않는가?(그런데 더 정확히는 종교 전쟁이라기 보다는 이념과 정치를 위해 종교는 강력한 것이라고 해야 옳은 것은 아닐까?)  

아무튼 종교는 때로 강력한 편견의 산물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랬을 때 비난의 화살을 맞는 건 아무래도 기독교는 아닐까 한다.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통 인정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다른 종교도 크게든 작게든 내가 믿는 신이 제일이라는 독선은 있다고 본다. 단지 그것을 드러내지 않고, 화합과 관용을 주장하는 오늘 날의 분위기에 편승하고 맞혀 가다보니 묻혀 있을 뿐이지. 그래서 어쩌면 저자는 (전작을 통해서나) 이번 저서를 통해 진정한 종교의 화합을 이뤄 보고자, 종교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종교 사상가들의 삶과 사상을 알아보므로 우리의 시야를 넓혀줘야할 필요성에서 이책을 쓴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저자는 그것을  무엇보다도 기독교인에게 촛점을 맞출려고 한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추측해 볼 수가 있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기독교인들의 독선적인 것을 완화시켜 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저자 자신도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더 그러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점은  저자가 '예수'라는 장을 가장 많이 할애한 것에서도 짐작이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한스 큉'에 대한 부분에서 실마리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저자는 그렇지 않아도 한스 큉을 다석 유영모와 함께 가장 존경하는 종교가라고 밝히고 있다.   

한스 큉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한스 큉은 누구인가?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 평화 또한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가톨릭 신학자이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기독교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성경 말씀을 '글로벌 윤리'로 채택하며, 세계 평화에 이바지 하자고 외치고 있다. 또한 그는, 가톨릭과 개신교를 비롯해 교파 간의 작은 차이들은 지엽적인 문제이며 이런 사소한 문제로 원수처럼 갈라져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역설한다.  또한 그는 원래 가톨릭 사제이기도 했는데,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들어 그것은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를 전해주는 것이라며, 전통적인 가톨릭의 가르침을 배격하고 새롭게 해석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문에 바티칸으로부터 출두를 명령받지만 이를 거절하다 결국 가톨릭 신학자로서의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한스 큉은 범종교적이었으며, 진정한 에큐메니스트 였다. 그는 세계 모든 종교는 서로 협력할 뿐 결코 경쟁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했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한스 큉의 저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곧잘 지인들에게 선물하며 그에 대한 애정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신앙은 보수적으로 갖되, 학문은 통섭하라 

사실 저자가 왜 그토록 종교의 화합을 강조하는지 알 것도 같다. 하지만, 에큐메니즘은 진보 기독교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보수 기독교에서는 다소 경계하는 사상이다. 그런데 나는 저자가 전하는 '그리스도교의 선각자들'이란 큰  장에 소개된 여러 많은 선각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읽으면서 그들의 사상도 알고 보면 이렇게 저렇게 다른 타종교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란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보수 교회에서도 연구되어지는 사상가들이기도 하다.  나는 보수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으로, 그런 걸 생각하면 보수 교회가 너무 사람들의 사고를 제한 시키고 조정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도 된다. 그래서 우물안의 개구리를 만드는.  하지만 그러기 전에 '신앙은 보수적으로 갖되, 학문은 통섭'하라는 말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 스스로 빚장을 질러놓은 것에 좀 더 열린 자세로 접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자각내지는 반성을 해 보게 된다. 

하다못해 저자는 '붓다'를 다루는 장에서,  성불 즉 '깨친 이'를 '초개인적 자아'로 설명하며,  예수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는 말씀을 비교하기도 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이 성경절 때문에 예수 이외에는 다른 길, 다른 진리, 다른 생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그리스도교 이외에는 참된 종교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러나 예수도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한복음 5장 58절)"고 한 것을 보면 이때 '나'라고 하는 것도 역사적인 한 개인으로서의 예수를 지칭하는 것 이상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된다(441p)며 비교종교학으로서 해석을 시도한다. 그것에 대한 어떤 비평이나 판단을 유보하고 보면 이것도 나름 꽤 설득력 있는 해석이란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학문에는 해석의 차이와 진보만 있을 뿐, 진실과 거짓을 가린다는 건 그렇게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종교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인가? 나는 오감남 교수가 '테라사 수녀' 대해서 쓴 부분에서 그 답을 찾고 싶다. 우리가 아는 바대로 그녀는 수녀로서 평생을 인도에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헌신하다가 생을 마친, 지난 세월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최근 출판된 그녀의 전기에서, 그녀는 거의 50년 가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 의심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또 얼마 전, 최근 급부상한 어느 유명한 무신론자가 이것을 걸고 넘어지기도 했다. 봐라. 그렇게 믿음 좋을 것 같은 인도주의자도 신을 의심하면서 살지 않았냐? 그럼으로 신은 없다. 뭐 대충 이런 논조로 신은 없다고 말했던 것으로 안다. 물론 꼭 이것을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오강남 교수는 테레사 수녀가 겪은 의심에 대해,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모든 신비적 사상가가 거쳐야 하는 "영혼의 어두운 밤"을 테레사 수녀도 거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영적 깊이가 어느 경지에 이르면 유신론적 인격신에 대한 전통적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신은 존재나 비존재의 영역을 넘어서는 '없이 계신 이'쯤으로 이해될 수 밖에 없는데, 어찌 아버지 같은 존재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있다는 표층 종교의 전통적 신관을 그대로 답습할 수 있겠는가?(271p) 라고 설명하고 있다.  

나는 이것이 어찌보면 오강남 교수가 말하는 표층 종교에서 심층 종교로 가는 통로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처음 종교에 입문할 때 표층 종교의 단계로 들어가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복을 열심히 비는 것이다. 소원도 아뢰고, 나름 은혜도 받는다. 하지만 깊게든 얄게든 그렇게 신앙 생활을 접한 사람은 반드시 영혼의 어두운 밤을 맞이하게 된다. 어떤 사람은 이 밤을 통과해 더 깊은 신앙에 들어가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이 싫어 뛰쳐 나오게도 된다. 나도 짧지 않은 세월 신앙생활 하면서 늘 언제나 흔들리지 않은 믿음을 가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누구는 말했다. 의심이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그것은 맹신일 뿐이라고. 그래서 도마는 예수님은 성흔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했을 것이다. 정말 테레사 수녀가 경험한 "영혼의 밤"은,   믿음 안에서의 의심은 있을 수 있으며, 얄팍한 표층 종교적 시각을 가지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고, 심층 신앙을 가져야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일 것이다. 즉 사고를 환치시킬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일 게다. 그러고 보면 종교는 무궁무진의 영역이며 이 세상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또한 인간의 좁은 사고의 틀을 끊임없이 깨며 인간과 삼라만상을 좀 더 깊고 넓은 차원으로 인도하는 매개체인지도 모른다.  

맺는 말; 다시 생각해 보는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  

나는 오강남 교수가 빅터 프랭클은 종교 사상가 반열에 놓을 줄은 몰랐다. 이미 빅터 프랭클의 '의미요법'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잘 아는 줄 안다. 그는 저 죽음 같고, 지옥과 같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살아 나왔던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나왔는지 혹시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유명한 저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란 책을 꼭 읽어보기 바란다. 그런데 나는 그에 대한 것을 이책에서 다시 한 번 대하면서 오늘 날과 같이 자살이 많은 시대에 대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삶이 조금만 힘들면 쉽게 자살을 생각한다. 사실 빅터 프랭클이 어떻게 살아 남았는가를 생각하면 우린 "차라리 죽고 말겠다"는 말을 하게될 것 같다.  

이 자살이 얼마나 쉽냐면, 어떤 초등학생이 우리 담임선생님은 너무 늙었다고 흉을 보았단다. 그래서 너는 안 늙을 줄 아냐고 했더니, 자기는 그때까지 안 살 거라고 말하더란다. 그러니까 늙기 전에 죽겠다는 말이다. 물론 그냥 하는 소린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도 살 이유가 없는 것인가? 생명 경시 사상이 너무나 팽배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살을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삶으로 돌아선 사람에게는 살아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하며, 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되어야 한다. 바로 종교의 사명은 이것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하고, 실현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책을 읽으면서 종교란 인간에게 무엇인가란 질문에 조금은 다가가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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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7-2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니 저는 종교에 관련된 책을 읽어보지 못했어요.
특별히 종교를 믿는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종교를 싫어하는 편도
아니에요,, 군 복무햇을 때 주말에 종교행사를 기독교, 불교, 천주교
한번씩 다 가봤어요. 종교의 화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는 편인데
서로 열린 자세를 가지고 관용적으로 이해하면 세상이
참 평화로울텐데 말이죠 ^^

stella.K 2011-07-20 13:20   좋아요 0 | URL
그래도 뭐 예전에 비하면 많이 양반된 거죠.
작게는 개선이 됐는데 크게는 달라진 것 같진 않아요.
더 강력해졌죠? 911 테러 같은 거 보믄...쩝
 
[옛 그림 보면 옛 생각난다]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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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손철주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는데, 부끄럽게도 난 이제야 그의 글맛을 보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책날개에 저자 소개가 재밌다. '한시와 꽃. 그림과 붓 글씨, 한 잔 술이 있으면 썩 잘 노는 사람'이라 한다. 그래서 그럴까? 이 책을 펼쳐들면 몇 가지 사실에 놀란다. 우선, 한 잔 술이 있으면 잘 논다라고 했는데, 그럼 저자는 꽤 달변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일단 술김을 빌어 한 가지에 대해 1박2일도 풀어놓는 그런 사람 말이다. 그런 달변이라면 글도 온갖 미사여구와 질펀한 문장력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기획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글은 의외로 압축적이고, 군더더기가 없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그는 한시에 조예가 깊다는 것이다. 우리 옛 그림 어떤 것이 나와도 그것을 한시와 잘 조화시켜 그럴 듯한 설명을 곁들인다.  그러고 보면 우리 그림을 이해하려면 한시에도 능통해야 하는가 보다. 그래서일까? 그의 어휘력에 또 한 번 놀란다. 이런 숨은 어휘가 있었구나. 그것에 대한 꼼꼼한 각주가 돋보이는 것이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되어 있는데, 1년 사계절을 의미해 그에 따른 우리 옛 그림을 소개하고 있다. 사계절이 1년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네 인생과도 흡사해 보면 볼수록 깊이를 더해가는 느낌이다.  나 역시도 나이들수록 똑같은 느낌으로 한 계절, 한 계절을 보내고 맞이할 수 없음을 절감한다. 

 

꽃몸살이라는 것이 있단다. 이건 또 이 책에서 처음 안 사실이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몸살 끝에 꽃이 핀다는 뜻이 숨어 있단다. 봄이 오면 노인이 앓는다하여, 이것을 춘수라고 한단다. 춘수에는 약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엄마의 노년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는 나는, 엄마가 몇년 전부터 한 해 걸러 한번씩 이 계절에 꼭 호되게 앓는 것을 지켜볼 수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춘수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다. 왜 다른 계절 다 놔두고 봄만되면 그러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 그땐 약도 안 받는다. 속이 쓰려 더 이상 못 먹겠다며 생으로 앓고 일어 나시는 것이다. 만물이 생각하는 계절이라는 건 정말 듣기 좋은 말 같다. 그럴 때면 엄마는 늙느라고 그런다고 말씀하시곤 한다.  난 그저 그 곁에서 이번에도 잘 견뎌내길 마음 속으로 고대할 뿐이다. 아무튼 이것을, 저자는 18세기 화가 정선의 <꽃 아래서 취해>란 그림과 함께 늙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한미디로, 술에 취해 널부러져 있는 느낌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것은 짝이 없어 꽃과 더불어 대작을 했다(21p)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인지, 핑곈지 모르겠다.

예전에 나는 여름이 되는 것을 봄이 되는 것보다 더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차라리 봄이 낫다 싶다. 지내기도 여름보다 한결 좋을 뿐만 아니라, 여름은 더위도 더위지만 어느 정점에서면 곧 가을이 올 것을 생각해야 하고, 한 해의 스러짐을 지켜볼 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봄이 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같이 사는 노인네의 춘수를 지켜봐야 한다는 이 복병이 숨어 있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이들면 들수록 그리움이 많아진다는 것을 아는 나이니, 나는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젊다고 우쭐댈 나이는 이미 지났다. 하지만 엄마가 봄이면 앓고 나는 그 춘수속에 젊을 때의 그리움이 뼈에 사무쳐 있을 지 누가 알겠는가?  

사실 봄엔 꼭 춘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역시 같은 세기의 또 다른 화가 심사정의 <양귀비와 별 나비>를 들어 봄의 황홀함을 말하고 있다. 정말 양귀비꽃에 살포시 내려와 앉을 것만 같은 그림이 사실적이다. 사실 연애를 봄에 비유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 그림이 그것을 연상케도 한다. 하지만 아뿔사! 양귀비의 꽃말은 '덧없는 사랑'이란다. 그러면서 이규보의 시를 한 수 읊는다. 

꽃 심을 때 안 필까 걱정하고
꽃 필 때 질까 또 맘 졸이네
피고 짐이 다 시름겨우니
꽃 심은 즐거움 알 수 없어라  

                                                  - 꽃 심기- 

인간의 사랑이 이런 마음일까? 하지만 인생을 이 시에 비유해도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사랑할 땐 사랑을 모른다고 했던 얼추 이상은의 노래도 생각이 난다. 사랑할 땐 사랑만하면 좋겠다. 덧없을 것을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고. 하긴, 문학이 어느 만큼은 허무주의를 내포하고 있느니만큼, 사랑에도 독이 있다고 사랑을 못할까? 

여름  

요즘의 여름은 예전의 여름과 조금 달라졌다는 느낌이 든다. 이것은 비단 내가 나이를 먹어서마는 아닐 것이다. 정말 지구 온난화의 값을 톡톡히 한다싶으리만치 갈수록 험악해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요즘의 장마를 들어 차라리 우기라고 표현해도 되리만큼 비가 많이 오고 있다. 옛날의 여름도 이랬을까 싶기도 하다.  

저자가 길어 올린 여름 그림 몇 점은 시원하다기 보단 풍유스럽다는 생각을 해 본다. 신윤복이 그렸다던 <연못가의 여인>은 아무리 사람을 유혹해야 먹고 살 수 있는 기녀도 더위 앞에는 체면이고, 고혹적인 자태도 필요없는지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폼이 우습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 역시도 그림 속 기녀를 가리켜 조선판 '쩍벌녀'라고 쓰고 있다. 더위를 이길 미녀도 장사도 없을 듯하다. 또한 17세기 홍진구의 작품 <오이를 진 고슴도치>는 마치 고슴도치가 오이를 서리하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것을 등에 지고 제 집으로 돌아가 새끼와 함께 나눠 먹을까?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위할 줄 안다는 말이 여기서도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김홍도의 <포의풍류도>는 선비집의 인테리어를 설명하기 위해 쓰이기도 했는데, 어쩐지 약간의 유머스러움이 베어 있다는 느낌이고, 더우면 무조건 에어컨부터 틀어대 냉방병을 키우는 현대인을 생각하면 반성해야 할 것도 같다. 이 냉방병이란 현대의 듣도 보도 못한 병을 김홍도나 비파를 들고 있는 그림속 저 선비는 뭐라고 꼬집을까? 더우면 차라리 악기를 타는 것으로 잊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같기도 하다.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이 쳅터에서의 압권은 김두량(18세기)이 그렸다던 <긁는 개>가 아닐까 싶다. 여름을 견디기 힘든 건 사람만은 아니다. 인간과 가장 가깝게 생활하는 개 역시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게다가 여름은 견공들의 수난의 계절이기도 하지 않는가? 올해는 또 몇 마리의 개가 수난을 당할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저 그림 정말 잘 그리지 않았는가? 보는 순간 킥킥 웃음도 났다. 이런 사랑스러운 개와 함께 이심전심으로 남은 여름도 잘 견뎠으면 좋겠다. 잡아 잡수실 생각만 하지 말고. 

가을 

가을을 상징하는 사물들은 의외로 많을 것이다. 정조가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 군주라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그린 <들국화> 수묵 한 점은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흔히하는 시쳇말로 이 분이 못하시는 게 뭘까? 다시 한 번 경외감이 든다. 김두량은 '긁는 개'를 그렸지만, 김득신은 <짖는 개>를 그렸는데 풍경화 속의 하나로 그려냈다. 난 그저 개만 보면 좋다.  

  

봄과 가을은 역시 사랑의 계절인가 보다. 봄은 남자가 사랑하기에 좋은 계절인가? 가을은 여자가 사랑하고픈 계절이라고 생각했는지, 저자는 위의 그림을 가을에 배치해 놨다. 이 그림은 작자 미상의 <서생과 처녀>다. 이 그림을 보니 베시시 웃음이 나온다. 그림 자체도 그렇지만 나의 지난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이 생각나 마음을 사알짝 들킨 것도 같아서.  저 그림을 보니 서생을 일방적으로 짝사랑하는 처녀의 심경을 드러낸 것 같다. 그렇다면 '처녀와 서생'이라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여자가 어떤 사랑을 퍼부어대도 왠지 남자는 조금도 마음을 줄 것 같지 않다. 이럴 때 여자의 마음은 그야말로 애간장이 탄다. 그것을 저자는, '연기 없는 타는 가슴'이란 제목으로 설명했는데, (아무리 조선사회가 보수적 신분사회라고는 하지만) 왜 여자가 먼저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일까? 저 시대를 돌아가 일방적으로 목매달지만 말고 방법을 써 보라고 조언하고 싶어진다. 물론 사랑에 대해 뭣도 모르면서.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개츠비가 왜 위대한가를 새삼 알았다. "사랑에 실패해도 다시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능력, 즉 이것을 고 장영희 교수는, 언제라도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낭만적 준비성'이라고 했다.(장영희, '문학의 숲을 거닐다', 64p) 비록 사랑에 실패하더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이(그것이 다른 상대가 되어도) 거절 당할까봐 사랑을 하지 않겠다는 사람 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고 싶다. 그대여, 꼭 사랑을 이루시기를! 

겨울           

겨울은 여름 못지 않게 사나운 계절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책의 겨울편을 보면, 겨울은 또 겨울 나름의 상징과 낭만이 있는 거구나,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추워 지구상의 모든 생물이 얼어 죽을 것 같아도, 분명 언 땅속에 생명이 잠을 자고 있고, 눈 내린 잔가지에도 봄이면 어김없이 꽃을 피워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 한 가지 있다.  저자는 겨울에, 정선이 그림 <솟구치는 물고기>란 그림을 배치했는데,  글쎄, 왜 잉어일까? 진짜 기운이 좋아 수면을 폴짝 뛰어 오를 것만 같다.  이게 또 어찌보면 맞는 배치 일까 싶기도 한데,  저자의 말에 따르면, 원래 우리 민화를 보면, 용으로 변신하는 잉어그림이 많다고 한다. 그것은 또 높은 벼슬길에 오르기를 바라는 길상도라고 한다.  

물고기 어(漁)에는 나머지 여(餘)와 중국어 발음이 같다고 한다. 물고기는 여유를 상징한다고 한다. 세 마리를 그리면 '삼여(三餘)'를 뜻한다.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건 핑계다. 세 가지 여유만 있으면 충분하다. 곧 하루의 나머지인 밤, 일년의 나머지인 겨울, 맑은 날의 나머지인 흐린 날, 이 삼여는 독서하기에 알맞다고 했다.(262p~263p) 이 글을 읽으니 마음이 찔린다. 그렇게 해서 벼슬에 오른 사람도 없지 안겠건만 나는 너무 안일하게 독서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겨울은 뭐니 뭐니해도 농한기 때도 방안에서 물래돌리고, 길쌈하고, 책도 읽은 김홍도의 <자리 짜기>같은 부지런함이 베어있는 우리 민족의 부지런함의 풍경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것을 저자는 '다복함이 깃드는 집안'이라고 했다.  

겨울은 아무리 추워도 약속의 계절이다. 명년엔 다 나아지기를 바라고 다짐하고, 복을 비는 계절. 봄에 꼭 꽃을 피워낼 거라고 약속하는 계절. 그래서 우리는 또 겨울을 살아내고, 1년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니 새삼 우리 그림에 담긴 깊은 뜻과 해학이 보여 즐거웠다. 비록 화려하지는 않지만 우리 그림만이 갖는 필치가 친근감을 더한다. 다시 말하지만, 저자 손철주의 해설도 좋고. 추천해도 좋을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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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7-11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그림을 소개하는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은 책을
못 찾는데다가 아직 동양화에 대해서 모르는게 많거든요. 그래서 우리나라 그림에
대한 글이라면 그 중에 오주석 선생의 글을 좋아했어요. 스텔라님의 글을 읽고나니
이 책 읽고 싶어지네요. ^^
 
홀가분 - 마음주치의 정혜신의 나를 응원하는 심리처방전
정혜신.이명수 지음, 전용성 그림 / 해냄 / 2011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친구야, 
그날 내가 이책을 너에게 보여줬을 때, 너는 참 많이 읽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때는 내가 읽고 있는 중이라 당장 빌려줄 수도 없고, 다음 날이라도 책 배송이라도 시켜줄까 하다가 이내 마음을 놓아 버린다. 넌 이미 책을 너무 많이 읽고 때론 일부러 책을 멀리하는 중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좋다고 남도 좋으라는 법은 없으니, 난 꼭 내가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선물하는 그런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만 그러면 너무 얄미운 친구가 되는 걸까? 

네가 보다시피 이 글의 제목은 내가 이책에서 발견한 나희덕 시인이 쓴 '절창'이란 시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써 보았다. 너는 그날 그랬지, 나는 아주 미치도록 몰입해서 하는 일을 하던가, 아니면 법정 스님처럼 내려놓는 연습을 끊임없이 하면서 인생을 통찰하고, 혜안을 얻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그러자 너의 남편이 어떤 것이든 둘 중 하나만 하랬다고 해서 우린 웃었다. 그래. 그렇게 우린 양극단을 꿈꾼다. 우린 어느 새 나이를 먹어 이제 좋든 싫든 인생 2막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가끔 까이 꺼, 인생 한 번 살지 두 번 살아? 하며 영혼을 불사르고 싶을 때도 있다. 특히 시댁시구들하고의 갈등, 아이들이 너의 마음대로 따라와 주지 않을 때 열 받아 하고, 실망하는 너의 모습을 보면 그러고 사느니 이제라도 네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난 너에게 후자의 일을 하라고 권해주고 싶다. 물론 영혼을 불사르는 일을 하는 것도 좋긴 하다만, 그래서 나를 혹사시키고 닦달하기엔 우리가 이미 젊은 나이는 아니지 않니? 결국 이즈음 나희덕 시인의 말처럼 점점 더 깊이 들어가는 연습을 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보나, 주위 여러 사람을 보나 다 좋을거란 생각이 들어. 내가 건강하지 않으면 주위의 단 사람도 건강할 수 없거든. 

이책을 보면, '전략적 낮잠이 필요하다'란 제목의 글이 참 공감이 많이가. 비행기에서 비상시 산소호흡기를 사용할 때 어린 아이와 동승할 경우 보호자가 먼저 산소호흡기를 한 다음 아이에게 채우라는 거야. 그게 비행기 안에서의 상식이라네. 얼핏 보면 참 이상하지? 아이를 먼저 채워줘야 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데 그러는 이유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먼저 챙기다 보면 어른에게 호흡 곤란이 올 경우 아이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군. 그러고 보니 맞는 말 같지 않니? 그러면서 이책의 저자는, 때로 '나부터 챙겨야 모두가 평안해지는 경우가 있다'는 거야(94p).  

가끔 말 안 듣는 너의 아들내미 얘기를 친구로서 듣고 있노라면, 넌 참 아들을 사랑하는구나 느껴질 때가 있어. 얼마 전, 지난 봄 우리가 함께 간 부암동을 아들과 갔다왔다며? 그런데 넌 기껏 아들 건강 걱정해서 그런데 다녀오면 좋겠다 싶어 같이 간 건데 아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다고 투덜거렸다. 또한 요즘 신경 써서 이것저것 맛있는 것을 해줬더니 녀석이 너무 버릇없이 굴어 오늘은 도시락도 안 챙겨보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사랑은 그런 것 같다. 아무리 사랑을 해도 같은 길에서 만나는 경우는 별로 많지 않다는 것 말이다. 너는 분명 아들이 원하기만 하면 모든 걸 다 쏟아 부어 줄 준비가 되어 있는데, 아들은 그걸 한사코 거부하며 참견이라고 생각하니, 너의 마음이 얼마나 외롭겠니.  

더구나 너는 맏이이기도 하고, 엄마이기도 하다. 맏이든, 엄마든 그 역할로서 덧씌워지는 이상형이 있다. 그것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옥죄지는 않아 왔는지 묻고 싶다. 솔직히 그날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만일 너의 아들이었다면 굉장히 답답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몰래 했다. 다른 할 일도 많고, 갈 때도 많은데 무슨 이런데(부암동)을 오자 하는 건가? 짜증도 나고, 멋쩍기도 했을 것이다. 친구야, 너도 알겠지만 사람은 원죄가 있는 존재라 사랑 그 순수함만으로는 상대에게 가지 않는다. 사랑엔 반드시 그 이름으로 상대를 조정하려고 하는 힘이 작용하지. 그래서 때론 상대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기에 거부하기도 하고, 저항하기도 한다. 이제까지 너희 모자관계는 그렇게 이어져 온 것 같기도 하다. 그건 또 이미 너도 인정했던 부분이기도 하고.  

아, 물론 그렇다고 앞으로 아들과는 어딜 가는 건 생각도 말아야겠다고 지레 접지는 말아라. 또 언젠가 한번은 너의 아들이 바로 그날을 생각해서 "거기를 다시 한 번 어머니와 함께 걷고 싶어요." 할 때가 혹시 있을지 누가 아니? 그때가 되거든 말없이 따라 나서줘라. 사람은 미련해서 그때 당시에 깨닫지 못한 것을 한참 후에야 깨닫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의 고마움에 대해선 네가 땅에 묻혀도 네 아들내미가 모를수도 있고, 그때야 비로소 깨닫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건 아이의 몫이니 걔가 너를 몰라준다고 너무 섭섭해 하지는 말아라.  걔의 생각, 느낌을 네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니? 그래서 나는 너의 자식 사랑에 쏟는 에너지를 이젠 너 자신에게 쏟으라는 것이다. 그만하면 되지 않았니? 너의 사랑이 인정되지 않아 힘들어하고, 쓸쓸해하는 네가 이젠 측은해지려고 한다. 또 어쩌면 너의 아들도, 너의 남편도 너의 사랑을 모르는 바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너의 사랑을 몰라준다는 그것이 오히려 너를 힘들 게 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은 이기적이다.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만 때론 피투성이가 되리만치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나로인해 행복했으면, 아침햇살 가득 머금은 탐스러운 장미같고, 해바라기 같았으면 한다. 근데 그건 사실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거든. 상대가 그만큼 꾸미지 않으면 안 되는 거거든. 그런데 자신은 착각을 하지. 내가 예쁘게 만들어줬다고 말야. ㅋ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란 예수님 말씀은 언제 들어도 진리고, 명언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부터 챙겨야 모두가 평안해진다는 말은 대단히 맞는 말 같고. 

아, 그런데 우리 그날 칠성급 호텔의 그 주방장 얘기했었잖아. 공교롭게도 이책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더라('강해야만 살아남는 것은 아니다'146p). 그가 얼마나 혹독한 훈련을 받고 셰프가 됐는지 얘기를 하는데, 그날 내가 너에게 얘기는 안 했다만, 나 역시도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그렇게 혹독한 훈련을 받고 강해야 살아 남는다고 생각하진 않아. 사람들은 가끔 자기와 같아지라고 요구할 때가 많아. 이를테면 내가 이런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 남았으니, 너도 살아 남아라는 식. 그래서 자신의 사수보다 더 못 되게 자기 밑의 사람을 괴롭히는 거, 그것처럼 사람을 기만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 더구나 사람이 먹을 음식을 만들면서 극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음식. 보기엔 화려하고 맛있을지 모르지만, 그거 먹었다고 살로 갈 것 같지는 않아. 오히려 해가 되면 해가 됐지. 극도의 스트레스에서 잡은 소로 만든 스테이크가 결국 사람에게 보복을 한다는데, 그 요리를 만드는 셰프라고 다르겠니? 그런 의미에서 네가 사랑으로 아들에게 해 준 음식이 최고의 보약일 텐데, 사실 집밥은 너무 소박해서 때론 먹고 싶지 않을 때도 있어. 그지? 그 뒤에 감추인 사랑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사랑의 문제 정말 쉽지 않아. 인간의 문제가 알고보면 사랑하는 문제와 사랑 받는 문제이고 보면 이책은 가히 인간의 마음 그 타당성을 구하는 연애편지쯤으로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참, 이책의 제목이 왜 홀가분인 줄 아니? 이책에 의하면, 인간이 감정을 표현할 때 자주 쓰는 말이 430개쯤 된데. 그것을 불쾌와 쾌로 나누면 7대3 정도의 비율이 되는데, 쾌를 표현할 때 '홀가분'이란 단어처럼 최고로 좋은 말이 없다는 거야. 얼핏 생각하면 의미 있는 성취나, 짜릿힘을 느낄 때 죽인다, 황홀해, 앗싸! 뭐 이런 단어도 있는데, 그건 사실 알고보면 무엇이 보태진 단어잖아. 그런데 홀가분은 '거추장스럽지 않고 가뿐한 상태'일 때 쓰는 말이잖아. 그걸 인간이 가장 좋아한다는 거야. 미처 그 사실을 알지 못해 자꾸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심리적 헛발질을 하고 있는(79p), 너나 나를 볼 때 역시 우린 이 나이에 무엇을 새롭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 침잠해 들어가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의 혜안을 얻는 것이 좋겠다는 나의 작은 소망을 너의 바램인 양 담아 이 편지를 띄워 본다. 너도 이제 홀가분 해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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