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하라 - 박노자, 처음으로 말 걸다
박노자.지승호 지음 / 꾸리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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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주진우 기자의 '정치정통활극 주기자'란 책을 읽어서일까? 내가 우리나라 상황을 너무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자각과 함께 그런 류의 책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었다. 그래서 연이어 읽게된 책이 바로 이책이다. 박노자 씨야 워낙에 오래 전부터 유명한 사람이라 새삼 말이 필요없지만, 이번에 읽은 '좌파하라'는 주진우 기자의 책과 비교하기는 뭣하지만 더 강력하고 '급진'적이지 않나 싶다. 한마디로 앞의 책은 몰랐던 것을 깨우쳐 주면서도 특유의 인정과 감성이 묻어나는 느낌이 드는데, 이책은 그야말로 물기 쫙 빼고 건조하다 못해 좀 심하다 싶을 가혹한데가 있다.

 

이책은 알다시피 우리나라의 전문 인터뷰어 지승호 씨가 박노자 씨를 인터뷰한 것을 책으로 옮긴 것이다. 작년 말 또는 올초부터 소위 말하는 우리나라 '야인'들의 대중적인 정치평론집(?)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그건 아무래도 올해가 정치의 계절이기에 그렇지 않은가 싶다.

 

이책을 읽다보면 박노자 씨는 연말 대선에 누가 대통령이 되던지 하등 관심이 없다는 말을 했다. 물론 그것이 알다시피 그가 (귀화한)외국인이기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읽다보면 그가 우리나라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많고 애정이 많은지 느껴진다. 그는 오히려 우리나라 국민이 대통령에게 과도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말을 했던 것인데, 이것도 관심이 없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그만큼 그는 대화에 막힘이 없었고, 우리나라에 대해 진짜 우리나라 사람 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하긴, 어느 나라든 자국인 보다 외국인이 그 나라의 실정을 더 잘 아는 경우가 있다. 그만큼 외국인은 객관적일 수 있기 때문에 시각에 치우침이 없다. 그런데 비해 자국인은 일단 좌와 우가 나뉘어져 힘의 논리 때문에 보는 시야가 치우쳐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중 박노자 씨가 초두에 지적한 고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주의를 주기도 한다. 그건 확실히 맞는 말이긴 하다. 워낙에 비운의 대통령이기에 그에 대한 연민 또한 큰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정서를 노무현의 남겨진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이용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박노자 씨는 노무현 대통령이 살아생전 잘못했던 것을 지적하므로(예를들면 우리 군의 이라크 파병 같은) 그에 대해 치우쳐 있는 감정을 바로할 것을 지적한다(나는 하루빨리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나와주길 바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노무현 대통령의 살아생전 강력한 오른팔이었던 유시민이나 문재인에 대해서도 경계할 것을 지적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신뢰할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솔직히 이 부분을 읽으면 조금은 혼돈스러웠다. 믿어야 하는 것인가, 믿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적어도 나는 주진우 기자의 책을 읽으면서 내친김에 아직 읽어보지 못한 문재인의 '운명'이란 책을 읽어 볼 참이었다. 그런데 내가 팔랑귀는 팔랑귀인가 보다. 그런 말을 들으니 슬그머니 그책에 대한 관심이 한풀 꺾였다(그래도 언젠가는 읽어봐야겠지ㅋ). 

그밖에도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처음엔 외국인이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런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에 대해 정통한 사람이다. 물론 다소의 견해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읽다보면 이만한 식견을 가지고 하는 말이라면 새겨들을 필요는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사실 그의 말을 다 알아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야 워낙에 정치와는 무관하게 살아 온 사람이라 어떤 말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대충 파악만 하고 넘어가야 했던 것도 적지않았다(인터뷰의 한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다. 그는 좌파 논객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 좌파를 함부로 두둔하지 않는다. 아니 같은 좌파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좌파를 더 강도 높게 비판한다. 심지어 우리나라 좌파는 그저 우파에 대한 불온한(?) 좌파지 진짜 좌파는 아니라고까지 한다. 즉 그들은 진짜 뼛속까지 좌파는 아니라는 말이다.

 

솔직히 좌우파에 대한 논쟁은 우리나라로선 (아직)좀 불가능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예전에 이념의 시대엔 좌파와 우파는 오직 한 가지였다. '빨갱이'냐 아니냐는 식의. 하지만 탈이념화된 지금은 보다 복잡해졌다. 그러니 나름 좌파라는 사람조차도 자신이 무엇을 주장해야 하는지 우왕좌왕한다. 이럴 때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다. 더 좌파다워지는 것. 그래서 아마도 박노자의 말은 더 자극적이고 강경하게 들리는지도 모르겠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책을 읽으면서 악한 국가라도 없는 것 보단 있는 것이 나은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자고로 보수 진영의 정치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80년대부터 이어 온 좌파의 시끄러움을 폄하하거나 이해 못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작금의 나라의 현실을 지켜볼 때 우리는 더 들끓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국가의 개인에 대한 폭력과 인권 탄압으로부터 개인을 지켜내는 것은 연대하여 들끓는 것 밖에는 없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런 의미에서 좌파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박노자는 말하는 것이다. 한번쯤 그의 말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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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10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밌을 것 같아요. 유익할 것 같고. 많이는 못 읽었는데 정치색과 상관없이 이 분 너무 좋아요. 외국인의 눈으로 본 우리를 꾸준히 말해주니까요. 그런데 귀화외국인은 이제 우리나라 사람인 거죠?ㅋㅋㅋ 조만간 다른 분 또 찾아야겠네.. 좀 덜 오래된 분이요ㅋㅋㅋ

stella.K 2012-05-10 19:15   좋아요 0 | URL
대단한 사람 같아요.
정치인들이 말하는 건 아무래도 구라가 없지 않죠.
그런데 비해 이 사람은 칼 같고 거리낄 것이 없죠.
읽으면 읽을수록 우리나라를 정말 이 사람만의 방법으로
사랑하는구나. 수긍이 가요.

귀화한 사람중 덜 오래된 분이라...
글쎄요. 저도 언뜻 생각 나는 사람이 없네요.
생각나면 알려드릴게요.^^
 
주기자 :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진우 지음 / 푸른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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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은 그다지 높지 않다. 누구는 아예 대놓고 무식하고, 꼴통이란 소리를 한다. 기자가 쓴 책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책을 받아들고 제목을 몇번씩 음미해 보았다. 처음엔 '정통시사활극'이라고 했을 때 감은 벌써 왔다. 엄청 '까데는' 이야기겠구만. 솔직히 나는 점잖은 것을 선호하는 편이라(하긴 요즘 내가 하는 짓을 보면 별로 점잖은 것도 아니다. 알만한 사람만 알지어다.ㅋ) 들끓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의 정치적 성향을 굳이 말하자면 진보 보단 보수에 가깝다고 해야하지 않을까? 고백하자면 난 정치나 시사에 대해 쥐뿔도 모르면서 그냥 무턱대고, 보수가 뭐? 이명박이 뭐 어땠는데? 하는 식이다. 그건 뭘 알아서라기 보단 하도 욕을 먹으니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다고 진보에서 '까데는' 것을 보면 보수가 잘하는 것은 없는 것 같은데 이럴 때 취하게 되는 건, 하느 한쪽을 지지하거나, 양쪽을 잘한다고 하기 보다, 양쪽이 다 못한다는 양비론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 같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나름의 치사한 이유는 있다. 욕 먹기 싫은 것이다. 양쪽 어느 진영으로 든지 말이다. 그런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말할 가치가 없어져 버리기도 한다. 이건 또 얼마나 비열한 태도일까?

 

어쨌든 '정통시사활극'이란 제목도 나에겐 그다지 흥미롭다기 보단 약간의 반감이 있었다. 좀 구라적이지 않나? 근데 보면 볼수록 저자의 이름과 직업이 정말 잘 타고 났다는 생각이 든다. '주기자' 이건 저자의 직업인 동시에 '죽이자'의 소리음이다. 그래. 이왕이면 기자로써 죽을 각오를 하고, 이왕이면 죽이는 이야기를 하고, 이왕이면 거짓을 죽여버릴 각오를 하고 뛰어 다니면 좋겠지. 무엇을 위하여? 진실을 위하여! 그게 어찌하다 보니 보수를 겨냥했다는 것 뿐이지 사실은 주진우 기자의 마음속엔 진실과 의를 향한 갈망이 더 컸으리라 생각한다.

 

사실 앞에서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나의 정치적 성향 보수쪽에 가까울 것이라는 건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김대중을 싫어하셨고, 조선일보를 오래도록 구독했으며, 오랜 세월 강남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겠는데, 우리가 김대중 대통령에 원한 산적이없고, 강남에 뿌리 내리고 살았다고 떵떵거리며 잘 살지 않으며, 내가 조선일보를 보는 지면은 딱 정해져 있는데 문화면과 방송 프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정치적 성향이 보수에 가깝다고 하는 건, 강남은 비교적 들끓는 동네가 아니고, 조용하고 점잖은 편이며 그러다 보니 야당쪽에서 하는 말 보단 여당쪽에서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는 구조라서 그렇다는 얘기다. 말하자면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영향을 더 많이 받는 쪽에 기울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내가 이책의 저자가 언급한 동네 이를테면, 14세 소녀가 집단 성폭행을 당했던 익산이나, 대추리 또는 용산, 제주 해군기지나 봉하 마을과 인접한 곳에서 살았다면 나의 성향은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사람이 자기 사는 곳을 무시 못한다는데 내가 딱 그짝이다 싶기도 하다. 아니면 이 동네에 사는 사람들을 강남에 살게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나의 그런 성향 때문에 난 요즘 이런 정치를 평하는 책들을 읽는 것이 조금은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보려고 하기 때문이다. 아닌 것을 알게 되거나 보게되면 혼란스럽고, 내가 뭘할 수가 있지 하는 자괴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읽었다. 그것도 아주 재밌게. 이 상황에서 재밌다란 말이 좀 안 어울리기도 하지만, 내가 몰랐던 것 또는 대충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좀 더 명확히 알게 되서 그런 의미에서 재밌다란 표현을 쓴다.

 

그런데 주진우 기자의 인물됨됨이가 참 좋아 보인다. 그는 자신을 17세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뭐 정신연령을 규정하는 것이라기 보단 17세의 감수성 즉 순수함, 열정, 들끊음, 반항 그런 것으로 대비될 수 있음은 아닐까. 그게 종종 정신연령으로 뭉뚱그려지거나 꼴통으로 불려지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겁없는 짱돌처럼 살아왔다고 스스로를 말한다. 어렸을 때 소위 불량 소년이 할 짓은 한번씩 다해봤고, 소년원이나 교도소 언저리를 배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하면 쌍욕도 하고, 전화통 붙들고 연기 아닌 연기도 한다. 그는 사는데 겁이 없다. 없으면 없는대로 살고 있으면 있는대로 산다. 이쯤되면 나로선 상당히 부러워진다. 난 뭐가 그렇게 두려움이 많아 세상을 범생이처럼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그건 또 그렇다 치자. 사람은 자기가 자신을 느끼는 것과 남이 자신을 보는 것과 얼마나 일치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진가가 들어나는 법이다.

 

"이명박 정부의 공적 1호 기자가 바로 너다." 청와대 한 관계자의 말이다. 그런데 참여정부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나는 참여정부에서도 사고를 가장 많이 친 기자였다. 문재인 수석은 "주기자 때문에 고생 많았다."고 말했다. 민정수석을 지낸 이호철 씨는 "주기자 때문에 죽는 줄 알았다."라고 말했다.(229p)  

 

 소위 기자라면 이런 소리쯤 들어야 하지 않나? 갑자기 저자에 호감도가 확 올라가는 느낌이다. 그 신출귀몰하다던 조선의 홍길동이나 어사 박문수 같은 캐릭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아직도 이런 사람이 있다니!

 

특별히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은, 나는 역사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7장의 '친일파와 빨갱이'를 읽으면서 내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 한번도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웠다. 이것은 또 자연스럽게 고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하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물론 책의 순서상 저자는 7장에 앞서 6장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담았는데, 이 두 개의 장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앞으로 어떻게 쓰일지 심히 궁금해졌다.

 

솔직히 나 개인적으론 보수가 나라를 맡던 진보가 나라를 맡던 큰 이변이 없는 한 국가 발전에 있어서 특별한 차이는 없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꼭 그놈이 그놈이라는 정치 냉소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 어느 쪽이 맡아도 그만큼은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건국이래 보수가 집권해 온 형국이다. 세상에 이런 나라가 또 있을까? 가까운 일본이나 미국만 하더라도 한번은 보수가 맡고 한번은 진보가 왔다갔다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진보가 맡으면 나라를 말아 먹는 줄 안다. 보수가 나라를 갉아 먹는 것은 얼만데. 그나마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했다는 건 헌정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그것조차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법치국가요 민주주의의 꼬락서니다. 우린 북한의 김정은으로 이어지는 3대 세습을 비판하지만 우리가 북한 보다 나은 것이 뭐가 있단 말인가. 보수의 그늘이 이리도 깊은데. 그런데 보수가 조금도 자리를 양보해주지 않는 그 배후에 친일파가 아직도 건제하기 때문이라는데 새삼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뭘 모르고서야 어찌 대한민국의 국민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저자가 종교를 '가장 강력하고 오래된 마피아(3장)'으로 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거란 생각이 든다. 저자의 눈은 틀리지 않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아프다. 우리나라는 원래 기독교가 발을 붙이기엔 너무나 어려운 나라였다. 때문에 순교의 피의 댓가로 교회가 세워졌다. 내가 얼마 전부터 알게된 손양원 목사만 해도 진짜 빨갱이에 의해 두 아들을 잃고도 그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아들로 삼았고, 그 스스로도 순교의 길을 갔던 분이다. 그런 분이 오늘 날의 한국교회가 마피아 조직과 다를바 없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 돌아 올 일 아닌가. 그분의 순교의 피를 헛되게 만드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한 33인 중 적지 않은 수가 기독교인이고,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 역시 기독교인이 많았다. 어떻게 그들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일을 오늘날의 교회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 정말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바라기는 저자가 지목한 문제의 교회가 있다고 해서 싸잡아 한국의 모든 교회가 그렇다고 보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남이 알아주던 못 알아주던 건강한 복음을 전하고 좋은 일 많이하는 교회도 찾아 보면 많다.  

 

지난 주 아는 지인과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무슨 말 끝에, 경찰이나 검찰을 유일하게 무서워 하지 않는 나라가 있다면 그건 우리나라란 말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깔깔대고 웃었다(경검만이겠는가, 우리나라는 미국도 무서워 하지 않고, 일본도 무서워 하지 않는다. 심지어 대통령도 우습게 본다. 한마디로 간땡이가 부었다 ㅋ). 거기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정부가 국민을 지켜주지 않고, 경찰마저 오히려 조폭을 풀어 국민(철거민)을 삶의 터전에서 내쫓고 있다. 오히려 정부가 국민이 안락하게 살 권리를 지켜주고, 조폭들의 횡포에서 지켜 줘야할 경찰이 그러고 있는데 경찰을 우습게 보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8장 '우리는 모두 약자다')? 그뿐인가? 우리의 딸들이 성폭력으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데도 경찰이건, 학교건, 그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건 나몰라라 한다. 그러니 어떻게 국민이 경찰을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학교를 신뢰하고 그 지역의 권력자들을 신뢰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 국민은 예전의 국민이 아니다. 예전 박정희, 전두환, 심지어 이병박의 국민이 아니란 말이다. 앞으로 이책을 비롯해 이런 책을 읽을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지금까지 배를 두들겼던 기득권자들 그들이 언제까지 칼자루를 휘두르며 배를 두들길 수 있을지 이제부터 지켜볼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책은 재밌긴 하지만 읽고나면 좀 우울하다. 그렇다면 이 나라엔 정의는 하나도 없고 다 썩었단 말인가? 한숨이 나온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나라 어딘가엔 정의가 꽃피는 곳이 있지 않을까? 그래도 우리는 희망이다. 정의가 없다고 우울해 하지 말고 이책을 읽는 내가 희망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이책을 읽혔으면 좋겠다. 우리의 아이들 중엔 국회에 들어가고, 기업체에 들어가고, 경찰도 되고, 판검사도 될 텐데 제 밥벌이 하자고 이런 책 한권쯤 안 읽고 그런 사람이 되면 이 나라의 장래는 여전히 어두울 것이다. 제발 내 아이 영어 단어 하나, 수학 공식 하나 더 알게 하려고 악다구니 좀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중요한 건 그것 배워서 어디서 써 먹어야 할지는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 목적도 의미도 없이 그 일을 한다는 건 얼마나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인가.

 

이책 뒤에 보면 딸자식을 성폭력에서 구해주지 못한 아버지가 저자를 만난 것이 애비노릇 했다는 생각이 들어 고마운 마음에 쌀 한 가마니와 돈봉투를 가져왔다고 한다. 그때 저자는 자신이 기자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딸은 우리나라 유수의 여자대학을 다닌다고 했다. 성폭력을 당했다고 다 불행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보는 것 같다. 그렇다. 한때 불행한 일을 당해도 사람과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 줄 것이냐에 따라 그들은 그 수렁에서 나올 수도 있고 방치된 채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다. 저자처럼 서로 힘이 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사실 저자는 그다지 잘 생긴 사람은 아니다. 책표지 사진을 보라. 잔뜩 찡그린게 한 눈에 봐도 호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참 매력적인 사람임엔 틀림없다. 지난 주 어느 서점에서 사인회를 가졌던 것 같은데 책을 들고 나갈 걸 그랬나 살짝 후회가 들만큼. 가서 힘내라고 응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것 같고 이 지면으로 대신한다. 주진우,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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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2-04-30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09님도 파이팅. 저는 사소한 것에도 버거워 하고 있습니다.
밑줄긋기 ; 그래도 우리는 희망이다. 정의가 없다고 우울해 하지 말고 이책을 읽는 내가 희망이라고 생각했으면 좋겠다.

stella.K 2012-05-01 13:04   좋아요 0 | URL
마립간님도 파이팅!!
이렇게 오셔서 댓글 달아주시니 그저 반가울 다름입니다.
제가 가끔 쓸모있는 말도 하는가 봅니다.ㅋㅋ

페크pek0501 2012-05-01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텔라님 파이팅!!!!!!!!! 꾸준한 독서에 경의를 표합니다. ㅋ

저도 마립간 님을 따라해 보는 밑줄긋기 : "한때 불행한 일을 당해도 사람과 사회가 그들을 어떻게 대해 줄 것이냐에 따라 그들은 그 수렁에서 나올 수도 있고 방치된 채 세상을 원망할 수도 있다." - 좋은 글이라고 생각해요.

stella.K 2012-05-01 13:18   좋아요 0 | URL
에고, 요즘엔 게을러져서 많이 못 읽습니다.
지난 알라딘 평가단 때 받은 책도 아직 못 읽었어요.ㅜ
다시 심기일전하여 열심히 읽어야죠.ㅋ
페크 언니도 파이팅!!이어요.^^
제가 저런 말을 하다니.ㅋㅋ
 
찰스와 엠마 - 다윈의 러브 스토리
데보라 하일리그먼 지음, 이승민 옮김 / 정은문고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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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책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해 보게 만드는 책이다. 겉으로는 찰스 다윈이 그의 사촌 엠마 웨지우드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을 선택하고, 인생을 함께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찰스 다윈(그의 아내 엠마도 마찬가지겠지만)이 결혼을 선택하기까지의 과정과 어떻게 세계관(이를테면 신앙인과 불신앙 또는 유물론자와 유신론자)이 다른 사람과 만나서 조화를 이루며 살 것인가에 대한 모범적 사례를 보여주는 책이라고나 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과 '언제' 사이에서 

 

책의 시작은 이렇다. 어느 날 결혼적령기에 이른 찰스가 '결혼하기와 결혼하지 않기'의 목록이 기록된 노트를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결혼해서 좋은 점과 불편한 점. 결혼하지 않아서 좋은 점과 나쁜 점 등을 대차대조한 것이다. 이것은 읽는 나로 하여금 찰스 다윈의 현명하면서도 어찌보면 깜찍한 일면을 보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세상에 이것을 꼼꼼히 따져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나는 기독교인이고, 진화론에 대해선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관계로 다윈 역시 그다지 좋은 인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그가 어떤 사람이건 간에 본인도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라고 시인했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이런 인간적인 일면이 있다니! 그건 확실히 그를 다시보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늑대 같은 일면 보단 여우 같은 일면이기도 하다.

남자들은 결혼에 의해 상대를 선택하기 보다 상대가 좋기 때문에 결혼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물론 여자도 별로 다를 바는 없어보이긴 하지만)? 그런데 이렇게 결혼을 먼저 생각하고 후에 사람을 생각했다는 것은 새겨 볼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그의 결혼에 대한 대차대조는 이런 것이다. 결혼을 하면, '저녁시간에 독서를 못함, 비만과 나태, 불안과 책임, 자식이 많아 생활비를 벌어야 하며 책을 살 돈이 더 적어짐.'(23p) 이것은 확실히 결혼해서 안 좋은 점들에 속한다. 하지만 결혼해서 좋은 점은, '상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한결같은 동반자','사랑과 재미를 함께 나눌 대상'이 있어 좋을 것이라고 쓰고 이것은 아무리 나빠도 '어쨌거나 개보다는 낫겠지'라고 까지 썼던 것으로 보아 그렇게 냉정하게 결혼을 생각하려고 해도 상당히 결혼하는 쪽에 후한 점수를 주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어쨌거나 개 보다 나을 것이라니! 어찌보면 도박하는 마음이 이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결혼은 정말 도박일까? 아무튼 그가 이런 기록을 했다는 것은 그가 인정을 하던 안하든 그는 결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그런 기록은 씌여지지 않았거나 이 보다 훨씬 뒤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또 '만약'이란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만약에 결혼을 한다면. 만약에 결혼을 안 한다면. 하지만 그 초점을 '언제'로 돌리면 그건 좀 더 진지한 것이 된다. 그는 말한다. 결혼을 일찍하지 않으면 순전한 행복을 너무 많이 놓치게 된다. 아내를 어루만지고 그 뜨거운 열정을 느끼는 행복 말이다(82p). 이건 확실히 개 보다 나은 생각에서 훨씬 발전된 형태고, 구체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그를 결혼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런 말을 한다. 결혼은 아무 것도 모를 때 하라고. 그런데 이말처럼 무책임한 말이 어디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무책임성을 조장하는 말이다. 결혼은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를 철부지 나이 때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다윈 같은 생각을 가급적 어린 나이에 해 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내가 몇 살에 결혼할 것이며, 상대는 어떤 사람이 좋을 것이며,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가급적 구체적으로 해 보는 것이다. 아무 것도 모를 때 결혼한다는 것은 사춘기를 두 번 사는 것과 같지 않을까? 이제 겨우 정체성이 뭔지를 알고 그것을 확립할 나이는 10대 말에서 20대 초반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그럴즈음 결혼을 해버리면 닥쳐 오는 혼란을 슬기롭게 해쳐 나가게 될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 거기다대고 결혼은 아무 것도 모를 때 하라고 부추기다니. 물론 그래서 잘 살면 다행이지만, 바로 아무 것도 모를 때 결혼해서 실패한다면 그것을 책임져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럴 땐 다시 한번 말하건데, 결혼은 아무 것도 모를 때 하라고 하지 말고, 아무 것도 모를 때 생각해 보라고 권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또 그만큼 결혼에 대해 이것저것 듣는 것이 많으면 오히려 결혼을 못한다고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아는 것 같다. 어차피 몇 살에 결혼을 하든 결혼은 선택이다. 그만큼 신중히 생각해 보고 선택하는 것일테니 그것도 지나친 기우다. 단지 다윈은 결혼을 생각한 이상 하루라도 빨리 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을 얻은 것 같다.

하지만 오늘 날의 결혼은 어떤가? 이런 절차 보다는 한 눈에 반해서 결혼이거나 정략적인 결혼을 많이 하는데 그건 또 아무 것도 모를 때 결혼해야 한다는 그것과 얼마나 쌍벽을 이루는 말인가. 물론 그래서 평생 잘 사는 커플이 없지 않지만, 나는 대체로 그런 결혼은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따라나오는 말이 결혼은 도박이라고 까지 하지 않는가? 그렇게까지 결혼을 속되게 표현해도 좋은 것인지 모르겠다.

 

나의 아는 남자 후배는 20살이 되면서 결혼을 생각했고, 기도해 왔다고 했다. 그말을 들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결혼에 대해 적잖이 회의적이었으므로 그의 말이 그다지 좋게만 와닿지 않았다. 무슨 결혼 못해 걸신이 들렸나 싶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가 결혼한 때가 30무렵이었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무려 10년 동안을 사모하며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럴까, 그는 지금 아이 셋 낳고 잘 살고 있다. 물론 사람들 누구나 드라마 같은 사랑과 결혼을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 준비나 생각없이 결혼해서 실패하는 경우도 많이 본다. 그러므로 이 책이 말하는 것은 '결혼은 신중한 선택'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세계관(또는 인생관)이 다른 사람과의 결혼에 대하여

 

사실 찰스와 엠마의 결혼이 주목이 되는 것은 찰스가 결혼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서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건, 세계관이나 인생관이 다른 사람이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느냐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끼리 서로 결혼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해 보면 비슷하다는 건 어느 한 두 개의 경우에만 해당이 되고 많은 부분 서로 다름에 놀라게 되는 것 같다. 특히 신앙인과 비신앙인과의 결혼을 문제 삼는 경우가 있는데, 찰스와 엠마 그들의 결혼이 신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결혼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찰스 역시 처음엔 신앙인이었다고는 하나(유니테리언) 그다지 믿음 좋은 사람은 아니었고, 훗날 진화론을 확립한 후엔 교회와 멀어졌다. 그런데 비해 아내 엠마는 독실한 크리스찬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 날에도 적지않은 남녀가 결혼하는데 발목잡는 문제거리다. 물론 성경에도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마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구약 시대로부터도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을 경계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보다 정확히는 이교도와의 결혼을 경계해왔다고 보는데 그것은 신앙의 정통성을 흐려놓는 것 때문에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이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해서 믿음을 지키기 보다는 믿음이 약화되거나 배반히는 것 때문인데 이것에 대해서는 따져 볼 것이 많다.

 

물론 오늘 날 정통파 교회들은 이것을 아직도 고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안에서도 다소 유연한(때론 파격적일지도 모르겠다) 사고를 취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 사람이 교회를 다니느냐 안 다니느냐고만 판단하지 말고, 그 사람의 인격이 어떠한지, 인생관이 어떠한지를 먼저 보라고 조언하기도 한다. 그건 상당히 중요하다. 예전엔 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의 전인격과 인생을 걸었다는 것과 같기 때문에 상대가 믿는 사람이냐 아니냐는 너무나 중요했다. 하지만 오늘 날의 신앙은 예전의 절박한 그 무엇인가가 없기 때문에 무늬만 신앙인 경우도 많다. 때문에 상대가 신앙이이냐 아니냐만을 가지고는 선뜻 결혼 상대자로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논리가 되어버렸다. 배우자가 비신앙이어서 나의 신앙을 핍박하거나 덩달아 나의 신앙이 흐려진다면 그건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을 봐야할 문제라는 것이다.

 

사랑하면 배우자가 신앙을 가졌다고 핍박을 할 것이 아니다. 믿지 않는 자와 결혼하고도 나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면 결혼하라고 조언하는 입장이다. 이 책도 바로 그점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찰스는 믿음이 없었지만 아내의 신앙을 핍박하거나 믿지 말라고 종용한 적이 없다. 그는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 아내의 신앙도 존중했다. 물론 그에 비해 아내 엠마는 남편 찰스가 믿음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 했지만 그녀 역시 남편에게 신앙을 종용하지는 않았다.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처럼 교회가 무조건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을 금한다는 건 맹신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오늘 날의 교회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찰스와 엠마의 시대처럼 말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지나치리만큼 그런 교회가 있다면 그건 좀 의심해봐도 좋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이 책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조금은 덤덤하고 처음보단 흥미가 다소 떨어진다. 하긴 남의 결혼도 연애하고 결혼식 할 때까지만 관심이 있지 결혼하면 더 이상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이 책도 그런 한계는 있다. 엠마의 계속되는 출산, 찰스의 연구 과정 그리고 아이의 탄생과 죽음 그 가운데 결혼생활을 관조하는 것 정도인데 결혼생활의 관조가 좀 약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뒤로 갈수록 찰스 다윈의 위인 전기를 읽는 느낌이랄까? 그래서일까? 엠마의 계속되는 출산이 나는 보면 볼수록 안쓰럽게 느껴졌다. 사람이 애 낳은 기계도 아니고. 하지만 그 시대는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아이의 생존율이 그렇게 높지가 않았다(그것은 어느 나라 마찬가지다). 그러니 힘 닿는 데까지 계속 낳는 수 밖에. 오늘 날의 다둥이는 거의 영웅 대접을 받지만 그 시대는 그렇지는 않다. 남자 역시 아이를 먹여 살리고 가정을 책임져 나간다는 건 그 시대나 이시대나 똑같이 어려운 것 같다. 무엇보다 내 시간이 없지 않는가? 그래서 전에는 결혼하는 쌍을 보면 무조건 좋아 보이거나 부러웠는데, 지금은 안쓰럽고 걱정되는 부분이 더 많다. 

결혼하면 나는 없다. 그래서 결혼을 인생의 무덤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혼해서 나를 찾고 가꾼다는 건 모순이다. 그럴 것 같으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혼자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군가를 위해 끊임없이 사랑을 주고 희생되어질 때 완성되어진다고 했던 것 같다. 통계에도 보면 끊임없이 가정을 돌봐야 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도 건강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에게만 집착되어 있는 사람은 우울증이나 자살할 확률이 그렇지 않는 사람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한다. 또한 종교를 가진 사람이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 보다 건강하게 살 확률이 훨씬 높다고 한다. 그것을 여기서 새삼 짚지는 않겠다. 그런데 찰스 다윈은 좋은 신앙관만 가지고 살았더라면 건강하고 더 오래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는 평생 건강은 안 좋았지만 시대치고 오래 살 수 있었던 것은 만족한 결혼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니 이 책의 결론은 이런 것이다. 신앙이 없으면 결혼생활이라도 잘하라. 신앙도 좋고 결혼생활도 좋으면 금상첨화다.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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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4-28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과 '다윈'에 대한 아주 상세하고도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다윈의 '결혼에 대해서의 깊은 생각'은 그의 성격이 얼마나 치밀하고 꼼꼼하고 진지했는지를 보여주는 일면이라고 봅니다.

다윈의 젊은 시절의 마음의 의혹을 나타내는 '종잇조각'에 대한 내용은 참 흥미롭습니다. 제가 읽었던『종의 기원』뒷편에 실린 '다윈의 생애와 사상'에 담긴 내용은 다음과 같더군요.

'결혼하면 - 아이 - 변함없는 반려, 그리고 가사를 돌보는 누군가 - 음악과 여자의 젖꼭지의 매력, 그것들은 건강에 좋다. ······ 결혼하지 않으면 - 아이가 없음 ······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는 자유 - 사교계의 선택, 클럽에서 슬기로운 사람들과의 대화 ······'

stella.K 2012-04-28 21:26   좋아요 0 | URL
참, 오렌님 찰스 다윈 좋아하시죠? 그래서 제 졸필을 읽으셨군요. 하하.
감사합니다. 저는 그다지 관심을 안 갖고 있다가
김보일님이 쓰신 '다윈의 동물원'을 읽다 내친김에
이책도 읽었습니다. 처음엔 별로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 보다 재미있더군요. 저자가 글을 잘 쓴 거 같아요.
다윈에 대해 새로 알게되서 좋긴한데 저는 역시 이 정도에서
일단은 관심을 접어야 할 것 같더군요.
그건 다윈에 대한 거부감 보단 제가 자연과학은 영 댕겨하지 않아서.ㅎㅎ
근데 확실히 이책은 세계관이 다른 사람과의 결혼에 대해
좋은 화두가 될 것 같아요.^^

숲노래 2012-04-28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나 성격보다도
어떤 마음인가에 따라
같이 잘 살 수 있거나 같이 못 살 테니까,
그런 테두리에서
두 사람은 잘 맞았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사람들은 으레 종교나 학벌이나 재산이나 외모로
결혼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따진다지만
생각하는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거는 하나도 안 따지며
잘 살아가리라 느껴요

stella.K 2012-04-28 22:17   좋아요 0 | URL
그니까요. 결혼은 배려고, 인내고, 이해고 그런 것 같아요.
그것을 어느 한쪽만 강요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둘은 아주 잘 살았던 것 같아요.
보기 좋더라구요.^^

기억의집 2012-04-28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다윈은73살까지 살았어요. 그 시절에 70 넘어서 살았다면 장수한 셈이죠. 게다가 젊은 시절 5년 간비글호를 타면서 탐사한 것이 결정적으로 건강을 해쳤다고 해요. 특히나 갈라파고스 섬 같은 곳은 물한방울 마실 수 없는 곳이어서 커다란 물통을 이고 험난한 지형을 걸아다니면서 탐사했다고 하더라구요. 살기 편해진 지금도 그 곳을 탐사하는 것은 고난의 길이라고 합니다. 하물며 다윈시절에는 더 했겠지요.

부부끼리 가치관이 맞으면 행복한 것 같아요.
우리나라 경우는 유교적 사상이 지배적이어서 여자입장에서 보면 불합리한 게 많아요. 서서히 그런 병폐를 없애하겠지요.

stella.K 2012-04-28 22:33   좋아요 0 | URL
아, 다윈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
그러시군요. 힘드시겠어요.
결혼은 평생 맞혀 가는 거라고 하던데
지금도 현재진행형이시죠?
다윈과 엠마도 그랬던 것 같아요.^^

기억의집 2012-04-28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혼을 권하는 경우가 있는데, 배우자의 바람, 폭력, 도박은 이혼하라고 해요. 그건 평생 못 끊더라구요.

stella.K 2012-04-29 11:3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그러니까 가정을 책임지고 이끌 사람만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은 저절로 되고, 가정도 저절로 지켜지고 그런 건 없는 거 같아요.
그런 의지가 있을 때만 가능한 거죠.

페크pek0501 2012-04-29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에 대해 뭔가 기대하기보다 자기가 먼저 상대에게 어떻게 해 줘야 둘이 행복할까, 하고 연구해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중요한 건 연구하는 자세.
대부분 직장생활과 육아문제 등에 치여서 보다 나은 결혼생활에 대해 연구할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다윈은 훌륭하군요. ^^

stella.K 2012-04-29 22:07   좋아요 0 | URL
오, 맞아요. 결혼도 연구해야 해요.
직장생활 육아문제로 결혼을 연구하지 않는다는 건
그냥 짐 하나를 더 얹는 셈이 되겠군요.ㅋㅋ

cyrus 2012-04-30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다윈과 그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볼 수 있는 책이군요.

저는 아직 구체적인 결혼관은 없지만 신중하게 해야한다는 건, 맞는 사실이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속도위반 먼저하고 결혼하는 것이 유행이니 배우자의 성격이랑
그 밖의 주변 정보를 먼저 알고, 앞으로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필요한 자금도 충분히
마련한 상태에서 천천히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봐요, 요즘 경기가 어려워서
이렇게 결혼준비하는 게 쉽지 않지만요.

그런데 조금은 외람된 말이지만 내 동갑내기 친구가 6월달에 결혼한대요 ^^;;

stella.K 2012-04-30 16:22   좋아요 0 | URL
ㅎㅎ 거 충격이겠다!
그래도 걱정하지마. 네가 좋은 사람 만나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으면 꼭 그렇게 될 거야.
대신 난 네가 좋은 사람 만나고 결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결혼이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고 그에 따라 좋은 사람도
만났으면 좋겠어. 뭔 말인지 알지?^^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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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아래 새것이 없나니...

 

수필을 많이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토록이나 산문을 무게있고 진지하게 쓰는 작가는 처음 보겠다. 물론 이만하거나 이보다 더 진지한 산문을 찾아보면 많겠지만, 그동안 내가 읽은 것은 하나 같이 일상을 소재로한 편안하고 담백한 것들이 아니었나 싶다. 제목 또한 시의하는 바가 있는 것 같아 처음 볼 때부터 끌렸다.

 

우리가 알다시피 저자 유하의 프로필은 시인에서부터 출발한다. 시에서 출발해서 소설을 쓰는 작가들도 있지만, 그는 시를 쓰다가 영화 감독이 되었다. 그런 그가 산문도 썼다니 조금은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그를 아는 개기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전까지 나는 그를 영화로만 안다고 생각했다. 그의 영화를 보면서 꽤 잘 만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보여주는 그의 이미지가 나에게는 긍정적으로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뭔가모를 열등감 또는 뭔가의 열망 같은 것이 느껴졌고, 때론 뭔가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문제는 그 '뭔가'를 무엇으로 정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뿐. 그런데 이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작가가 한 장르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장르를 왔다갔다 할 수도 있겠지만, 시를 썼다 영화감독을 하는 그는 이제 다시는 시는 안 쓸 모양인가 보다 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시를 사랑하며 시에 대한 열망을 잠재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오죽했으면 이책 어딘가에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면 어느새 시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고 고백했을까. 이쯤되면 난 아직 시에 대해선 문외한인데, 왜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 '시'에 대해 그토록 집착하는 것인지 알고 싶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시를 읽고 써 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가 언문을 깨친 건 만화와 영화를 보면서부터다. 그것도 아주 집착적으로. 거기엔 TV로 빠질 수 없는 요소중의 하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세대는 이를테면 TV 중흥 1세대쯤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그가 TV에 집착하게 된 때는 각 TV 방송국이 개국한지 얼마 안 되었던 때고 그러니 얼마나 신기하게 여기며 TV 속으로 빨려 들어갔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지금이야 TV 수상기가 집집마다 한 대도 모자라 방방이 있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가 TV를 보기 시작한 때는 집집마다는 고사하고 마을 사람들이 공동시청을 해야할 정도고, 집에 TV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집이 부자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때였다. 그러니 TV 프로 중 어느 프로가 중하고 재미있지 않은 프로가 있었겠는가. 채널도 몇 되지도 않았다. 더구나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 저녁 6시부터 12시 정도였고, 아침 프로가 있다고 해도 그건 오전 10까지 밖에는 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TV 중흥 1 세대의 풍경은 바로 이랬다. 그 접점에 나 역시 포함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책은 나에게 분명 아련한 추억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1부 추억은 나의 힘'이란 쳅터는.

 

아,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네

 

내가 정식으로 극장에 가서 영화는, 중학교를 막 올라와서 당시의 과외 선생님과 그학동들과 함께 본 <챔프>라는 영화였을 것이다. 권투 선수였던 아빠를 링에서 잃고 서럽게 울던 꼬마가 관객들을 울렸다. 나 또한 울었다. 영화의 힘은 바로 이런 거구나를 그때 처음 깨달았다고나 할까? 그때 처음 본 페이다나 웨이의 퇴폐미는 또 어떠한가. 만화 같은 건 국민학교 졸업과 함께 졸업하고 나는 중학생이 되면서 영화를 본격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 시절엔 오드리 헵번의 영화가, 제임스 딘의 영화가 결코 고전 영화라고 볼 수 없던 때였다. 그때 TV에서 보여주는 영화는 꼭 밤늦은 시각에 했기 때문에 나같이 밤잠도 많고 아침잠도 많은 사람은 TV 영화 보는 것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는 10시에 하는 소위 주말의 명화도 12가 다 되거나 넘어서야 끝나는 것이기에 안방에 딱 한대 놓인 TV를 볼라치면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엄마는 일찌감치 잠에 골아 떨어지는 타입이었고, 아버지는 당신이 영화 보는 것을 즐겨하는 편이라 딸의 영화 사랑을 눈감아 주신 적이 많았다. 하지만 가끔은 당신의 잠을 방해 받는다 생각되면 가차없이 뭐라고 하시기도 하셨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영화의 러닝타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면 영낙없이 안방을 물러나와야겠지만, 엔딩이 얼마남지 않았다면 나 역시도 양보하지 않았다. "쫌만요. 쫌만 있으면 끝나요." 조금만 있으면 끝난다는 딸의 말에 아버지는 이내 당신의 고집을 꺾으셨다. 그래바야 금방 또 언제 그랬냐싶게 잠에 빠져드실 거면서 앙탈은. 그래서 보기 시작한 영화가 광 수준은 아니어도 대화에 못 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뭐든 오래 하지 못하는 나는 언제부턴가 영화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또 오래지 않아 영화를 다시 가까이 끌어 들이게 했던 건 나의 꼰대(나의 글선생)를 만나고 나서다. 지금 생각하면 꼰대를 만난 것이 참 이상한 인연이란 생각이 든다. 그를 만난 의도는 소설을 배우고자 함인데 정작 소설 보다는 영화를 알게되니 말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 중 꼰대를 만난 건 두 번이었는데 두번 다 그랬다(물론 나중에 두번째는 내 자의로 잡혀준 셈이긴 하지만).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다시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한 해 동안 무려 120편까지 본적도 있었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땐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나의 꼰대는 뭔가의 자력을 가진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되게끔 만드니까.   

 

나의 꼰대는 어찌보면 굉장히 자상하고 어찌보면 상당한 개인주의자 같기도 했다. 그를 처음 만났던 1995년이었던가?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이 한국에 상륙했다는 소식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는 그의 모습은 제법 진지했다. 그동안 영화를 멀리한 탓이었을까? 생판 알지도 못했던 영화감독을 꼰대에게서 듣고 그날로 그는 우리를 그 영화감독의 세계로 인도했다. 나는 꼰대가 <중경삼림>을 알게해 줬다는 그 감격보다는, 그 옛날 나의 과외 선생님과 함께 <챔프>를 본 추억이 새삼 떠오르게 해줘서 좋았다. 뉘라서 성인인 제자와 함께 선뜻 영화를 보러 가자고 끈단 말인가. 그것은 그 옛날 과외선생님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화 보는 수준이 낮아서일까? 왕가위 감독은 스타일리시한 것은 있지만 내용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내겐 그다지 감동스럽지만은 않았다.

그렇더라도 나는 꼰대에게 감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나의 옛 과외 선생님을 떠올리게 해줬으니까. 아니 그 배역을 친히 맡아줬다고나 해야할까? 그리고 그것을 아직도 못 잊어한다. 술에는 안주거리가 있어야 하듯, 인생이란 술엔 안주삼을만한 추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추억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강해지는데 그만큼 추억 또한 강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옛날로 돌아갈 수 없는 바에야 추억한들 무엇하겠는가. 추억뒤에 오는 생각은 그만큼 나이 먹었다는 것과 그때를 돌이킬 수 없다는 안타까움뿐. 잡을 수 없고, 뭔가를 두고 온 것 같은 찜찜함이 남는다. 요즘은 보는 것마다, 생각하는 것마다 과거를 떠올리지 않기란 쉽지 않은 것이어서 미래보다 새롭다고 긍정적으로 말할 수 같다. 더구나 앞으로의 미래가 장미빛일 거라고 장담하지 못할바엔 말이다. 하긴, 저자가 책 제목을 이렇게 정했을 땐 미래에 대한 전망이 좋은 것만은 아니기에 차라리 과거가 나을 거라고 해서 그렇게 정한 것일까?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우리가 보고 경험한 것들은 과거 어느 시기에 비슷하게 경험한 것들의 재현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겠는가.

서태지의 음악도 새로운 것 같지만, 샘플링적 요소, 즉 있는 것을 '재활용'한 측면이 강하다. 미래가 더 이상 새로운 신천지가 아니므로, 대중이나 문화 생산자들은 다시 '과거'로 향수 어린 시선을 보내게 된다. 결국 조로한 현실이, 조로한 대중이 과거로의 문화적 귀환, 즉 '노스텔지어 미학'을 낳는다.(245p)

 

난 그제야 작가가 제목을 왜 그렇게 썼는지 알 것도 같았다. 

 

전원주에게도 내면연기를 허하라

 

책을 읽다보니 작가가 언젠가 영화 <붉은 수수밭>을 보고 쓴 글이 공감이 간다. 일종의 배우 얼굴론이라고나 할까?

 

우스운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붉은 수수밭>이나 <부용진> 같은 중국영화에서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본 것은 배우들의 얼굴이었다. 그 속에 등장하는 얼굴들은,우리가 미의 기준으로 볼 때, 소위 '뜰 수 있는' 배우의 얼굴과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생김새를 하고 있다. ...... 다시 노자에 기대어 말하자면 그 얼굴들은 '自然스럽게 짜짜로니'스러운, 또는 '스스로 그렇게' 생겨먹은 얼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들이 하나의 감동으로 다가 오는 것은, 그것의 생김새 속에 어디에도 오염되지 않은 중국적 오리지널리티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비해 지금 우리 배우들의 얼굴은 어떤가, ... 현재 활약하고 있는 우리 배우 대부분의 얼굴엔 포토제닉함이 부재하다. 얼굴 속에 관객의 눈동자를 붙잡아둘 수 있는 정령(精靈)이 살지 않는다는 얘기다. 정령이 살지 않는 까닭에 배우로서의 생명도 그리 길지 않다. 어디선가 베낀 듯한 얼굴들이 반짝 떠올랐다가 소리 없이 사라져간다. 베낀 얼굴이 더 잘 베낀 얼굴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 그 '미인병'적 사고가 우리 영화의 개성과 고유성을 많이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얼굴은, 국화빵 틀로 찍어낸 예쁜 인형 같은 얼굴이 아니라 그만의 미적 아우라가 존재하는 얼굴이다. (223~224p)     

 우리는 왜 그토록이나 늙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나이들어 늙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일종의 성숙이라면 성숙인데 그것을 역행하기를 바라는 것은 역시 TV다. TV나 영화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늘 변함이 없는 연예인들이 화면을 장악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슨 권력이라도 되는 양 자랑스러워 한다. 하지만 시청자들 또는 관객들은 작품 보단 누가 성형을 얼마나 하고, 보톡스를 얼마나 맞았는가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래서 정작 작품에는 몰입을 할 수가 없다. 미는 주름 하나를 제거했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렇게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거든, 자신의 늙은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일찌감치 은퇴하고 은둔해버린 프랑스의 어느 여배우처럼 해라. 차라리 그게 오히려 신비롭다(행복해 보이진 않지만). 

이책을 읽고 있을 무렵엔 공교롭게도 TV에선 영화배우 하지원과 탈랜트 전원주 씨가 나오고 있었다(물론 각자 다른 프로에서). 하지원은 여전사 같은 캐릭터와 무엇보다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아 내가 좋아하는 배운데, 어느 인터뷰 프로그램에 나와 마구 깔깔대며 이야기 하는 모습이 의외로 참 과장되다 싶었다. 말하자면 나이들어 뵈는 것이 싫어서 자신은 30대지만 여전히 20대처럼 싱그럽게 봐주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도 능력이긴 하겠지만 30대는 어때야 하는 지를 모르는 사람같아 조금은 안쓰럽기도 했다. 물론 30대는 이래야 한다고 정해 놓은 건 없지만 자연스럽지는 않아 보였다. 난 이 배우가 앞으로 10년 뒤에 어떤 모습일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또한 전원주 씨가 나왔는데, 나름 방송계에서는 입지전적의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는데 그는 억척스럽고 수선맞은 캐릭터만 할뿐 내면 깊은 연기는 못해봐서 아쉽다고 해서 공감이 갔다. 과연 이 배우는 정말 그런 내면 깊은 연기를 하면 안되는 걸까?

작가의 지적이 온당하긴 하지만 그 배후에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방송의 권력구조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카메라에 온전히 맞지 않으면 가차없이 퇴출시켜 버리는 그 생리구조부터 이제 좀 바뀌었으면 한다.

작가의 지적에 공감하며, 언젠가 영화 <색,계>를 보면서 거기에 탕웨이가 겨드랑이 털을 밀지 않고 나와 약간 놀란 적이 생각났다. 그게 우리나라의 관점에선 놀랄 일이지만 중국은 리얼리티를 강조해서인지 그렇게 인공적인 것을 거부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최대한 살리려는 노력이 뭐 하나라도 허투로 보이지 않았다. 우리도 그런 점은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에선 겨드랑이털은 고작해야 개그의 소재 밖에 더 쓰는가? 

 

난 그런 점에서 자신의 얼굴의 주름을 솔직하게 보이고 나오는 배우들이 언제부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보면 처음엔 깜짝 놀라게 된다. 오, 당신도 늙는구료! 남의 일 같지가 않아 탄식이 절로 나온다. 하지만 이내 편안해지고 친근감마저 느낀다. 관객과 함께 나이들고 늙어가는 배우가 진정한 배우 아닐까? 늙음을 거부하는 배우는 예전에 자신을 좋아해줬던 펜들과 함께 늙을 수 없는 배우다. 그렇다고 그들이 젊은 관객에게도 어필하지 못한다. 지금은 늙지 않았다고 자부할지 모르지만 팬들을 잃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우왕좌왕하다가 가장 빨리 도태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런 영상시대에 활자언어는 가능할까

 

좀 우문이긴 하겠는데 나는 얼마 전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대본집을 읽으면서 과연 내가 대본집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녀의 작품은 얼마 전 종편 TV에서 보여줬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책으로 읽는 것이 의미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책으로 읽어야만 할 당위성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책으로 읽기보단 영상으로 보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것에 대해 저자는 영상언어와 활자언어를 굳이 나눌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한다. '호모비디오쿠스'란 신조어가 등장한 것도 사실이지만 대중은 단순히 소설 읽기의 부지런함보다는 TV 드라마 보기를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미리부터 우려할 필요는 없다고 못 밖는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를 버리기 전엔 영상으로 사고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문자언어 즉 시나리오 없이 만들어진 한 편의 영화를 상상할 수 있는가. 나는 영상언어의 홀로서기에 대해 회의한다. 존 포드 감독은 좋은 시나리오가 없다면 차라리 농사나 짓겠다고 했지만, 나 역시 모든 영상은 활자의 상상력으로부터 출발한다고 믿고 있다. 

 영상언어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있는 자라면, 적어도 '문학의 위기'를 '문학의 열등감'으로 바꿔 부르진 않을 것이다.(213p)      

 그의 말을 읽으니 비로소 내가 노희경의 대본집을 읽은 당위성이 확보된 느낌이다. 그런데 이건 또 생산자라면 그 말이 유효하지만 여전히 소비자의 입장이라면 해당사항은 없어보이지 않을까? 마침 지난 주 토요일 토크쇼 <두드림>에 개그맨 홍록기가 나왔는데 그는 고백인지 자랑인지, 자기는 지금까지 책을 읽어본 적이 없는데 요즘 뭔가를 끄적이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책을 읽지 않는대신 TV는 엄청 본다나. 확실히 자랑 같이 보이기는 했다. 그렇다면 책 열심히 보고 영화 만들고 드라마 만드는 사람은 뭐란 말인가. 이건 완전히 날로 먹겠다는 심산이 아닌가. 그러자 옆에 있던 송승환이 그건 자랑할 것이 못된다는 듯 이제부턴 책을 좀 읽으라고 일침 같은 조언을 한다. 그런데 좀 더 생각을 해보면 그렇게 책을 읽지 않는 그도 활자로된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저자의 말을 옳긴하다. 단지 생산자와 소비자의 묘한 권력구조를 안다면 영상의 소비자들도 영상의 생산자를 알아야 하고 그렇다면 활자언어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편한 것만을 추구하면 결국 도태되는 종이 아닌가. 영상언어는 세련되고 활자언어는 구태의연 하다고 생각하면 그건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맺는 말

 

저자가 영화감독이라고 해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재즈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은 듯하여 과연 하루키만 재즈를 좋아했던 건 아니란 생각을 했다. 모르긴 해도 재즈에 대해서는 하루키만 하던가 아니면 그를 능가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역시 지명도가 주는 아우라는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나는 저자가 대중에게 알려지기는 영화감독이라고 해도 이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자신의 직함에 대중문화 평론가란 수식을 하나 더 달아도 좋지 않을까 싶게 글발이 깊다. 영화나 대중문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이책은 한번 읽어줄만 하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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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0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10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트랑 2012-04-10 14: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꼰대'라는 말을 제가 어릴 때
'아버지'를 뜻하는 말로 통하는 속어였어요^^

우리 꼰대가...이러구..
야, 니네 꼰대, 저러구...했죠^^

한마디로 꼬장꼬장한 어르신을 빗대는 지칭어였던 기억이 가물거려서
사실은 친근한 말이랍니다. 정감도 듬뿍 배어있는 그런 말이지요^^

스텔라님께서는 2번이나 평가단에서 활동을 하셨군요.
역쉬...스텔라님의 글발을 알아주었군요^^
읽고 싶은 책이 아니라는 점만 빼면
나름 장점도 있다는 말씀...

조언을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언을 듣고도 고민이 되지만...
마감일까지 고민을 좀 더 해보고^^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stella.K 2012-04-10 15:05   좋아요 0 | URL
생각 있으시면 고민하지 마시고 편하게 도전하세요.
어차피 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습니까?ㅎ
되면 열심히 하면 되는 거구요.^^

그리고 저의 꼰대 꼬장꼬장해요.ㅋㅋ

차트랑 2012-04-10 20:57   좋아요 0 | URL
에잇~!
좋습니다. 스텔라님 쿨~한 말씀에
지원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실 떨어질까 걱정도 되고...
(주저하는 주된 요인)
원치도 않는 책을 읽느라 시간을 소비할까 걱정도 되고...
읽어야 할 책이 10권 이상 기다리고 있는 형편 ㅠ.ㅠ
사실 독서를 적게하는 편이 아닌데 ㅠ.ㅠ

고맙습니다 스텔라님~
 
다윈의 동물원 - 국어 선생님의 논리로 읽고 상상으로 풀어 쓴 유쾌한 과학 지식의 놀이터 1
김보일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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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저자의 책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글을 참 쉽게 쓴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러운 것이면서도 본받고 싶은 것이기도 한데,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오랫동안 교육현장에 있는 교사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할 것이다. 선생님의 하나 같은 고민은 어떻게 하면 교과 내용을 학생들에게 쉽게 전달하느냐가 아니겠는가. 그것이 오늘날 저자의 책을 있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저자가 철학에 대해 다루어 놓은 책과 국어에 대해 다루어 놓은 책을 읽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번엔 생물 그것도 '진화'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사실 난 학교 때 이과계통의 과목을 참 지지리도 못했다. 그래도 생물은 그나마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학교를 떠나온 뒤로 새삼 이 나이에 무슨 과학이냐며 스스로 문외한임을 자처하면서 살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 진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안 쓰는 몸의 기관은 퇴화한다고, 역시 정신이나 사고도 그쪽으론 퇴화하다 못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살아온 것 같다.

 

지금까지 난 사람은 어쩔 수 없는 편견의 존재라고, 책 또한 어쩔 수 없이 편식을 하게 되더라고 자조 반, 탄식 반 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젠 그것에서 한 술 더 떠 그럴수 밖에 없고, 그게 정상이라고 까지 말할 뻔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안 쓰던 근육이 우드득 소리를 내며 활개를 치듯,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또 얼마나 잘못된 생각인가 입술 언저리에서 맴돌던 말이 쏙 들어가버렸다.

이 책은 공히 말하건데, 내가 저자의 읽은 책 중 가장 재밌게 쓴 책은 아닐까 싶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생물이나 과학 선생님이냐면 그렇지도 않다. 저자는 국어 선생님이다. 국어 선생님이면서 생물 선생님인 양 한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의 전달 능력은 아무래도 우리말을 가르치는 국어 선생님이 한 수 위는 아닐까? 요즘 통섭도 많이 한다는데 말이다. 이미 저자도 고백했지만, 자신은 과학의 전문가가 아니라고 밝혔다. 저자는, 여기에 묶인 글들은 치열하고 엄정한 사색의 기록이라기보다는, 루소가 벌처럼 이 식물에서 저 식물로 옮겨 다니며 즐거움을 느꼈듯이 이 책에서 저 책으로 옮겨 다니며 과학적 사유가 주는 즐거움에 푹 빠졌던 놀이의 기록 (286p)라고 했다. 그러니까 저자는 어느 한 기간 동안 과학에 관한 책을 읽고 그것이 너무 좋아 정리하면서 독자들에게도 전하여 주겠다고 마음으로 이 책을 썼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럴까? 정말 한 쳅터 한 쳅터 넘길 때마다 저자는 꼭 누구의 무슨 책에 보면...이라면서 꼭 책과 저자를 밝히고 자신의 논지를 펼치고 있다. 그것을 대하다 보면 가끔은 나도 어디선가 제목 정도는 알고 있는 책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어머, 그게 이런 내용이었어?'하며 관심을 갖게도 되고, 어쩌면 과학은 어려운 분야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긴 요즘 일반인도 쉽게 관심을 가질 법한 소위 말하는 '과학 대중서'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가? 그래서 실제로 과학에 관한 책을 접하게 되는 개기가 되기도 한다. 

솔직히 나 같은 게으름뱅이 독자도 이 책을 통해 아, 정말 과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겠구나 하는 뿌듯함과 희망(?)을 갖게 되었는데, 바로 이것이 이 책이 갖는 성과는 아닐까 싶다.

 

솔직히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처음엔 책 제목에서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진화론자들은 기독교를 공격하거나 기독교가 믿는 창조론에 배치된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거의 자동적으로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저자도 밝히기도 했지만 제목이 다소 급진적(?)으로 보여 그렇지 진화를 직접적으로 들이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말대로 과학자가 아닌만큼 그냥 편하게 자신의 읽은 책에 대해 기술했을 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평소 다윈과 진화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왔는가를 다시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기독교인이면서 과학에 대해 문외한인 내가 진화론과 창조론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이면서 똑같이 과학에 대해 문외한이면서 창조론을 비판하는 것도 옳은 태도는 아닐 것이라고 본다. 무신앙이도 신앙이라고 신앙과 학문은 엄격히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기독교 과학자들 중엔 (어느 정도)진화론을 인정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비기독교인 중에도 (역시 어느 정도)창조론을 인정하는 과학자도 있을 것이다. 과학을 바라보는 눈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듯 하나님이 지으신 우주만물을 우리가 어찌 다 알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을 읽으니 나도 다윈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과연 기독교와 대립하기 위해 진화론을 말했을까? 모르긴 해도 그건 아닐 것이라고 본다. 얼핏 그도 기독교인이라고 했던 것 같다. 그의 이론이 기독교에서 너무 배척을 받으니까 화도 나고 상대적으로 기독교가 편협하다고 느껴져서 자신의 이론을 옹호하다 보니 기독교와 대립하는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아도 책 중간에 다윈에 대해 언급해 놓은 부분이 있었다. 물론 기독교와 진화론을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얼마나 위트와 유머가 많은 사람인가를 다룬 내용이다. 특히 결혼에 관해. 그는 결혼에 관한 손익계산 즉 대차대조표를 꼼꼼하게 작성하고, 결혼하지 않았을 때의 좋은 점과 결혼했을 때의 좋은 점을 비교했나 보다(아무튼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 뒤 얼마만에 사촌인 엠마를 만나고 그 모든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 정도로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136~137p). 그것을 읽는 순간 최근 다윈의 러브스토리로 잘 알려진 '찰스와 엠마'라는 책이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콧등으로도 보지 않았던 책이었는데 말이다(독자 평점도 높은 편이다). 

이렇게 책을 읽다가 그 책에 소개되어진 또 다른 책에 꽂혀 읽어보고 싶거나 실제로 읽게 된다면 그 책에 대한 성과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이다. 또한 뭔가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유연한 사고 내지는 방향을 틀게 된다면 그것 역시 책이 갖고 있는 결코 작지 않은 성과다. 그것은 또 의외로 대단한 책이 아니고 이렇게 온갖 재미로 무장해제시키는 책일 수 있다. 그러니 책은 정말 우습게 볼게 아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자는 다윈의 결혼 대차대조표를 소개한 그 쳅터에서 그런 말을 했다.

이성 없는 감정은 맹목이고, 감정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 이성이 감성을 인도하고, 감성이 이성을 부축해야 한다는 것! 때론 감성 앞에 이성이 고스란히 무릎을 꿇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다윈은 그렇게 했고, 다행히 행복했다.

                                                                     (137p)  

 

 이것이 어디 다윈의 결혼에만 적용이 되겠는가. 앎을 추구하는 자세도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앎을 추구하는 것도 궁극엔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학문하는 자세, 책 읽는 자세 역시 그래야 한다. 그러려면 저자의 일침을 가하는 쓴소리도 읽어야 할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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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3-31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이렇게 책을 읽다가 그 책에 소개되어진 또 다른 책에 꽂혀 읽어보고 싶거나 실제로 읽게 된다면 그 책에 대한 성과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이다." -저도 이런 경우가 많아요. 리뷰를 보고 그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댓글에서 주고받다가 언급된 책을 찾아 읽기도 합니다. 또 누가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하면 그 책이 갑자기 읽고 싶어져 읽죠. 집에 책은 쌓여 있고 전부 읽은 것은 아니라서요. 어떤 책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면 읽게 되는 거죠.

2. 137쪽의 인용 문장- 을 보니 인간은 결국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감정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마는 존재라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속 한 문장이 떠오르네요.
인간은 수수께끼인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 인간 심리의 책을 즐겨 읽게 돼요.

3. 아, 첫 댓글이라 기분 좋다. ㅋ

stella.K 2012-03-31 17:56   좋아요 0 | URL
1. 그래서 전 <찰스와 엠마>를 읽어볼까 생각중이어요.
2. 그래서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한다 잖아요.
마음 끌리는대로 행동하고. 그래서 인간은 요물이라잖아요.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ㅠ
3. 저도 첫 답글을 언니한테 달아드리게 돼서 좋아요. 주말 잘 보내세요.^^

cyrus 2012-04-01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며칠 전에 다윈의 자서전을 읽어봤는데요, 사실 다윈은 애초부터
기독교적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서 진화론을 주장한 것도 아니었대요.
오히려 기독교의 창조론에 부합할 수 있는 쪽으로 이론을 구상하려고 했대요.

<찰스와 엠마>는 저도 곧 읽어보려고 해요. 이 책 이외에도 다윈이 생전에 쓴 서간문들을
모은 두 권짜리 서간집도 있어요.^^

stella.K 2012-04-01 18:52   좋아요 0 | URL
그렇구나. 정말 이 책 읽고 '찰스와 엠마'가 확 끌렸어.
그거 읽어보고 괜찮으면 평전도 읽어 볼까 했는데
알아 봤더니 넘 두껍네.ㅠ
근데 서간집도 있었구나. 좋은 정보 고맙.^^
아, 근데 자서전도 있었네. 그건 몰랐어.ㅎ

2012-04-06 08: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6 15: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