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에 훤해지는 역사 - 남경태의 48가지 역사 프리즘
남경태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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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에 이책을 읽었다. 물론 책 제목이 주는 매력도 매력이지만, 언젠가 저자의 책은 꼭 한 번은 읽고 싶었다. 일단 느낌을 말하라면, 일종의 역사 칼럼 같다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역사 칼럼 쓰기는 또 얼마나 만만치 않겠는가?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을 논증하고 통찰할 수 있어야 한다. 보통 우리가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그건 그 시대를 살아보지 않는 사람으로서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것과, 실제로 그 시대를 살아보긴 했지만 이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이고, 교훈이 무엇인가에 대해선 정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나 같은 경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던 날 학교에 갔는데 반 분위기는 대체로 침통했고 어두움이 깊이 드리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 원수의 죽음에 대해서만 슬퍼할 줄 알았지 그것이 우리나라 역사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참 후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책은 한 번 더 그 의미를 새롭게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역사는 그 의미에 대해 통찰이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에 대한 통찰을 얻기 위함일 것이고,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좀 더 나은 삶을 구현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역사 칼럼이 많이 나와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을 들어 논증하는 저자의 글솜씨가 나름 읽을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어떤 내용은 다소 산만하여 오히려 몰입에 방해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책은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부분이 있어 대체로 만족스러운 독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한 번쯤 읽어도 좋은 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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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07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진해도 벌받는다
유태영 지음 / 북치는마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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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 안 읽었으면 후회할 뻔했다. 

저자에겐 좀 실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얼핏 저자의 연배가 나의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뻘은 되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요즘 젊은 사람이 읽으면 어떨지 몰라도, 나는 약간의 향수도 느껴지면서 참 따뜻한 책이란 생각을 했다. 또 그만큼 글에서 삶의 연륜이 느껴져 좋았다. 예전에 수필을 읽는 맛은 이랬다. 요즘엔 하도 스마트, 스마트 떠들어대서일까? 요즘에 나오는 에세이들 역시 스마트해진 느낌이 든다. 뭐 그 자체로도 나쁘진 않지만 깊이는 덜하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이책을 읽으면서 또 지난 가을 시인 문정희님의 에세이를 읽으면서도 그렇고 과연 수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글쎄, 나이가 드니 소설 보단 수필이 자꾸만 좋아진다. 항창 감성이 풍부한 사춘기나 젊을 때는 수필은 잘 안 읽게 되는 것 같다. 어디 수필에 대해 뭐라 한정지어 놓은 게 있나? 그냥 편하게 마음 가는대로 쓰는 글. 뭐 그 정도가 아니겠는가? 그런 책은 왠지 밋밋하고,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하여 읽기가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같은 문학 문야라고 해도 흉내내기 가장 좋은 분야가 수필은 아닐까? 사람의 마음이 또 그러해 만만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시시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수필을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그렇게 만만하다고 생각하여 쓴 수필(이랍시고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면 웬만한 낙서 보다 못할 때가 많다. 상황에 대한 묘사는 어느 정도 어설프게나마 갖췄을지 모르겠지만 깊이는 없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내심 수필을 만만하게 여기던 젊은 시절 또는 사춘기 때 쓴 글이 대부분이다(물론 많이 쓴 것도 아니지만). 

 

하지만 이책을 보거나, 앞서 말했던 문정희님의 수필을 읽으면 삶의 연륜이 느껴져서 감동을 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 수필은 거져 써 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편하게 쓸 수 있는 글이 수필이라고 해도 삶의 향기가 베어있지 않으면 쓰지 못할 분야가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이책은 삶의 향기뿐만 아니라 작가가 문학 교수라서 그런지 문학적 족적을 종횡으로 엮기도 하고, 삶의 교훈도 내포하고 있어 마치 아버지나 선생님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이들면 누가 나에게 훈화하는 사람이 없어진다. 어릴 땐 그것을 드러내놓고 싫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좋은 때임을 지나놓고 나면 깨닫게 되는데 그땐 이미 나이가 들만큼 들때라 돌이킬 수가 없다. 특히 책의 말미에 문학을 하려는 사람에게 온화하면서도 엄중히 써 놓은('문예 창작, 그 험로를 넘어') 부분을 읽으면 정말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였다. 물론 그런 말은 여태까지 어디선가 많이 듣던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저자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뉘라서 이런 말을 또 해 줄까 싶은 묘한 감동이 있다. 게다가 이책을 읽는 또 하나의 기쁨은, 나는 옛 문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춘원 이광수나 김유정 작가의 이야기를 읽는 건 정말 이책을 읽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새롭게 알게된 '서음(書淫)'이란 단어의 이야기도 재밌고. 강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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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2-2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필 좋아하시면 김수미 할머니 수필도 읽어 보셔요. 참 아름답답니다~
 
절망은 나의 힘 - 카프카의 위험한 고백 86
프란츠 카프카 지음, 가시라기 히로키 엮음, 박승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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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는데 다소의 망설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프란츠 카프카라는데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그러나 문학을 좋아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작가를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편견이겠지만, 나 같은 경우 카프카의 작품은 중학교 때 처음 접해보고 왠지 넘지 못할 산맥같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그 난해함과 우울함, 약간의 괴기스러움은 내 취향은 아니지 싶었다. 그리고 거기에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더하자면, 작품의 분위기 못지 않게 그의 삶이 그리 유쾌한 삶은 아니었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차라리 순탄치 못했다면 그를 이해했을 것 같다.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삶이 뭐 그리 알고 싶고, 본받고 싶을까?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사귀느냐에 따라 그 삶도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책도 그런 것 같다.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을 읽느냐에 따라 기분뿐만 아니라, 사고나 영혼까지도 좌우하기도 한다. 실제로 난 그런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가령 에밀졸라의 <작품>이란 책을 읽다가 주인공의 불행한 삶이 가위에 눌리는 기분이어서 결국 그 책을 다 읽지도 못하고 덮어버렸던 적이 있다. 그후 난 에밀졸라의 책은 선택하기를 주저하게 됐다. 이처럼 책 한 권을 읽어도 사람의 기분을 좌우할 때가 많은데, 이책을 읽는다는 건  나에게 얼마만한 모험이 될런지 알 수 었는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이 책을 엮은 가시라기 히로키도 그를 가리켜 '실패의 달인'이라고 했을까?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책은 그리 가위 눌릴만큼 기분이 안 좋아지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카프카를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고 할까? 그러리만큼 이책의 저자는 카프카를 아주 잘 소개해 놓았고, 카프카를 빌어 절망이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주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해 놓았다. 솔직히 읽으면서도 저자가 이 정도로 쓸 정도라면 카프카에 대해 상당히 통달해 있지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저는 에필로그에서, 학창 시절 <카프카 전집>이 간행 되었을 때 한 권, 두 권 모으는 일이  작은 즐거움이었고, 현재하는 일도 카프카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평론을 쓰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카프카는 어떤 사람이였나? 

 

이책을 읽어 본 바에 의하면, 카프카는 무척이나 소심한 사람 같다. 오죽했으면 그가 약혼자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에 "우유 컵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조차 두려워집니다. 그 컵이 눈앞에서 깨져서 파편이 얼굴로 튀어 오르지 말란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24p)"라고 했을까? 사실 이 정라면 거의 신경증 환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뿐인가? 그는 평생 부모로부터 작가의 꿈을 인정 받지 못했고, 아버지 앞에서는 기 한 번 제대로 펴 보지 못했다. 게다가 한 작가의 애인이라면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 아름답고, 지적인 사람일 것 같지만 카프카는 사람을 볼 줄 몰랐던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집에서 일해주는 하녀였다고 한다. 그런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 했던 건 단지 그녀가 카프카에 비해 큰 덩치를 가져서였는데 바로 그점이 왠지 자신을 보호해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두 번의 청혼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도 용기와 책임의식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너무나 나약한 사람이었기에 그도 쉽지는 않았으리라.  

 

또한, 사람이 너무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 해도 안 되지만, 과소평가해도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늘 자신이 글을 너무 못 쓴다고 학대에 가까우리만치 자책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 저마다 잘 하고 싶은 일이 있을텐데 과도하리만치 잘 해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못할 거란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손대는 작품마다 끝을 본 작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확실히 나에게 새삼 놀라운 부분이긴 했다. 미완성 작품도 작품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니. 물론 그런 작품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작가의 작품이라면 미완성은 미완성일뿐 그것을 작품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나름 그것도 작품이라고 인정해 주는 문단의 풍토가 약간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카프카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오늘 날에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을 보면 말이다.   

 

그의 과소 평가는 그의 작업 태도에도 영향을 미쳐, 이미 방대한 양의 원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늘 작업 양이 부족하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은 늘 전업 작가가 되길 원했지만, 빵을 위한 직업에 불만을 가졌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그가 가난하게 살았던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하긴, 아버지가 부자인 것과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걸 카프카는 일찌감치 깨달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그가 원치않는 일을 한다고 업무 능력이 형편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능력을 인정 받아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했단다. 그럼에도 그는 늘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확실히 자아상에 적지않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인간관계는 원만했을까? 인간관계도 서툴고, 기피하여 자신의 작품을 의뢰할 줄도 몰랐다고  그래서 브로트라는 당대 유명한 대중작가 겸 그의 친구가 대신 출판을 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왜 그는 그처럼 한사코 당당하고, 적극적인 자기 자신을 인정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걸까?         

 

절망의 카프카에서 공감의 카프카로...

 

사람이 이해가 가면 연민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연민이 느껴지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카프카를 좋아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또 어느틈엔가 그를 공감하기도 하고,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그는 학교에 절망하면서, 그는 자신이 받은 교육은 해로운 독에 지나지 않았다(106p)고 일기에 토로하곤 했는데, 나는 왠지 깊은 공감이 갔다. 나 역시 중학교 2학년 때를 제외하고, 어떤 시기에도 학교를 결코 좋아해 본적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중학교 2학년 때 잠깐 학교도 어쩌면 다녀 볼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왜 그런지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시절에 알았던 친구들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입시 한파에, 더욱 깊어지는 고질적인 사춘기 병(?)이 학교를 불신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또한 카프카는 친구 관계에 희망은 없다며, 그가 친구관계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그것은 허무한 도움닫기였다(178p)고 단편에서 고백하기도 했는데,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다. 솔직히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친구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는 게 쉽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지난 번 만났을 때만 해도 까르르거리며 잘 지냈던 친구가 오늘 다시 연락을 해 보면 이유없이 화를내고, 으르렁 거리는 것이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다면 이 친구는 그동안 나를 만나오면서 가졌던 불만을 참고 있다가 표출을 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문제에 빠져 누가 건드리기만 폭발 일보직전의 찰라였는지, 그걸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 후 이내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으며, 멀어져간 친구가 몇 명 된다. 그러면서 나는 친구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으며, 새롭게 누구를 만나게 될지라도 현재 만나고 있는 것에 충실할 뿐 거기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하긴, 그런 일이 없던, 있던 친구는 한때 친구일 뿐 한번 멀어지기 시작하면 좀처럼 다시 가까워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그나마 지금도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함없이 만나는 친구가 두어 명 정도 있는데 그만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아닌가? 물론 그들도 언제 연락이 끊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카프카는 친구 관계를 허무한 도움닫기로 표현했는데, 그건 맞는 말 같다. 

카프카는 심약한 자신을 자책하곤 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선 여러가지로 생각해 봐야겠지만, 아무래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부유한 환경에서 문학을 좋아고, 생각이 많은 사람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아니었을까? 또한 그는 당대 훌륭한 필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인정 받는 것. 작가가 돼 제대로 된 돈을 벌며 산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자주 툴툴거렸다고 한다. 그건 그때나 이때나 작가라면 하나 같이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또 많은 작가지망생들이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바로 작가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겠지. 

 

그는 삶 모든 부분에서 다 절망을 했다. 미래에 대해서, 직업에 대해서, 결혼이나, 자식 또는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학교나 직업, 음식 등, 하다못해 꿈이나 진실에 대해서까지도 절저하게 절망했다. 과연 이런 사람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왜 그리도 절망함으로 자신을 철저히 짓밟았던 걸까? 그건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기인한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했다시피, 그는 아버지에게 인정 받지 못했으며, 어머니나 다른 형제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니 그럴만도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절망은 무엇이었을까?

 

고백컨대, 나는 이 책을 읽기를 잘 했지만, 동시에 이 책을 읽기를 또한 잘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잘한 것은, 이 책으로 인해 그동안 외면만했던 카프카에 대해 다소나마 관심이 생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책의 작가의 의도처럼 과연 카프카가 절망만 했던 사람이었을까에 의문을 가져본다. 그것은 저자가 테마를 그렇게 잡았기 때문에 그런 스펙트럼에서 보자면 카프카는 실패의 달인이고, 절망의 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저자는 요즘 너무 팽배해 있는 하면 된다는 식의 지나친 낙관주의나, 반대로 염세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이책을 썼던 건 아닌가 싶다. 뭐든 지나치면 모자란만 못하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카프카가 절망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절망을 했다면 왜 절망할 수 밖에 없는지도 알아야 하고, 힘이라고 얘기했던 것처럼 그는 이 절망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는 거의 모든 것에 절망했지만 한 가지 절망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이었고,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을 늘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작가는 어떤 족속이냐는 것이다. 만일 정말 우리가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면 그 세계에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직업은 바로 작가일지도 모른다. 불만이 없는 완벽한 세계. 여기에 불만 많은 작가가 필요할까? 역대로부터 작가들은 끊임없이 인간과 세계의 불일치에 대해 그 불만을 끊임없이 들춰냈던 족속들이다. 거기에 카프카도 존재해 있었다. 누구는 불만이 나의 힘이라고 했다. 작가는 바로 이 불만과 불일치를 글로 쓰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세상의 변혁을 가져온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이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안에 이상적인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작가는 혁명가가 아니다. 다만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며 문제제기만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카프카의 절망이란 건 그 나름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람 보기엔 절망하는 것처럼 보여졌던 건 아닐까? 

 

더불어 그가 절망하지 않고 불만으로 삶지 않았던 유일한 삶의 분야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러니 하게도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살면서 그는 늘 불면중에 시달렸는데, 죽음을 생각하자 마음에 편안을 느끼며 비로소 잠을 잤다고 했다. 사람이 너무 염세주의에 빠져 죽음만을 생각하는 것도 문제긴 하겠지만, 오늘 날의 세대는 건강 염려주의의 세대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냐에만 온통 관심이 가 있지 죽음에 대해선 통 관심이 없다. 거기에 죽음을 오히려 기대했다던 카프카는 오히려 기이하기까지 하다. 그가 너무 이른 나이에 죽어서 그렇지 죽음에 대해서도 좀 기대하며 사는 것도 살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 아무튼 그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내 결핵으로 절명하고 만다. 아마도 그제서야 그의 이 세상에 대한 불만과 절망이 끝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저 세상에서도 그가 타고난대로 절망을 했을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작가에게 문학은 구원이다 

 

나는, 카프카가 다른 모든 것을 배신했지만(난 왠지 그의 절망이 세상에 대한 등돌림 곧 배신처럼 느껴졌다), 끝까지 자신이 작가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든다. 그 절망을 문학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던 카프카는 진정한 작가고, 작가에게 있어 문학이 구원이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카프카를 알고 싶어졌다. 그래도 기왕이면 그를 알고자 원했다면 순수하게 그의 작품으로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너무 게을렀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서만은 절망하지 않고 희망했던 카프카. 이제 그를 만나러 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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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1-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수는 높은데, 댓글은 없네요. ㅋㅋ
이 책 벌써 읽으셨군요. 이 책의 어떤 구절에서 글감을 얻어서
글을 쓸 예정이었어요.
절망 속에서 사는 사람도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같아서
책 제목이 맘에 듭니다. ^^

작가들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낙관보다는 비관을 향한 사람들 같아요.
그렇게 어두운 색채를 띤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쓰는 경향이 있고요.
그래서 밝음을 가진 사람들은 소설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어요.
어두우면 사색적, 철학적이 되어서일까요?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stella.K 2013-01-29 18:03   좋아요 0 | URL
오, 아니어요. 이렇게 와서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정말 이책은 할 말이 많은 책 같았어요.
그보단 카프카 자체가 할 말이 많은 작가인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절망속에 산다고 성공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 같더라구요.
하지만 행복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걸 또 구분해야 하다니...ㅠ
 
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 위대한 문학작품에 영감을 준 숨은 뒷이야기
실리어 블루 존슨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채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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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수십 년째 괜찮은 소설을 써 보는 게 꿈이다. 그러려면 소설도 많이 읽어야겠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소설 그 자체 보다는 소설의 이면 그러니까 그 소설의 탄생 배경나 그 작품을 쓴 작가는 누구인가? 어떤 생각에서 그런 작품을 쓰려고 했는가에 알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분명 이 이야기가 막연히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리 없고 , 들었던 또는 보았던 이야기가 작가의 영감을 빌어 생겨났을 터인데, 작가는 또 어디서 이야기를 찾아 썼을까? 궁금하고 알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또 꼭 내가 문학에 대해 관심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나의 욕구는 그런 것이다. 어차피 없는 이야기를 가공해서 만들 수 없을 것이라면, 내가 잘 아는 이야기를 쓰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초짜 작가들의  작품은 자전적 작품일 확률이 높다고 하지 않는가? 하지만 새내기 작가들만 자전적 작품을 쓰는 것은 아니다. 중견 작가들도 아예 그런 작품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자신은 체험이 아니면 쓰지 않겠다고 선언한 작가로 유명한 작가는 프랑스의 작가 에니 아르니노가 있고, 이 책속에 발견한 앤 라모트라는 작가도 있다(그녀는 소설가 겸 논픽션 작가며, 자전적인 경험을 글로 쓴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작가들은 과연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써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가 그런 의문도 든다. 사실 이건 나의 고민이기도 하다.

 

지금은 유명한 성석제 작가가 몇년 전 <참말로 좋은 날>이란 작품을 내놓고 독자와의 만남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날 나도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곳에 간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작가가 지금만큼 유명하지 않았고, 이 독자와의 만남이란 것도 지금만큼 활성화 되기 이전이었다(아마도 그 무렵부터 활성화가 되었으리라). 이런 말을 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성 작가는 지금은 상당히 유려한 입담으로 주어진 시간을 이끌어 가지만,  그때는 처음 불려나온 사람마냥 어색한 빛이 영력했다. 그나마 그 어색함을 완화시켜 줬던 것이 질의응답 시간이었는데(지금쯤 성 작가와 질의응답을 갖는다면 나 같은 사람은 끼지도 못할 것이다. 하도 여기 저기서 치고 받고 올라오는 질의자들이 많아서 잠시의 틈도 없다. 이건 가장 최근에 그의 독자와의 만남에서 확인한 것이니 믿어도 좋다), 질문하는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아 나는 용감하게 질문 하나를 한적이 있다. 요는, 소설을 쓸 때 실제인물을 다루게 되는 경우를 피해 갈 수 없을텐데 나중에 그 사람이 와서, 왜 나를 작품에 다뤘냐고 시비거는 사람이 없었냐고? 그런 경우  어떻게 대처하느냐고 물어 본적이 있다. 그때 작가는 예의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다고 했다. 조폭을 다룬 작품에서 실제로 조폭 두목이 찾아와 멱살을 잡힌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그는 침착하게, 나에게 이러지 말고 위에 계신 분을 만나 보라고 해서 위기를 넘긴 적이 있다고 해서 웃은 기억이 있다. 그 사람은 위에 계신 분 누구를 만난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금 생각해도 그것이 참말로 정답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건 극히 드문 예고, 보통은 작품에서 자기를 다룬 것을 알면 사람들은 좋아하는 편이라는 말도 덧붙였다(하도 오래된 이야기라 정확한지는 확신할 수는 없다).

 

사실 그 질문은 나의 고민의 일부를 내보인 것이기도 하다. 만일 내가 작가가 되어서, 최대한 실제 인물을 직접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가공하겠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나의 작품에서 자기를 읽게된다면 싫어하지는 않을까? 뭐 그런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없지는 않았다. 벌써 십수 년 전, 내가 교회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을 때 나는 우연찮게도 아이들에게 연극을 지도한 적이 있었다. 뭘 알고 했던 것은 아니고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시작한 일이었다. 짧은 연극이긴 하지만 그것도 나름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던 일이라 때마침 내가 가르쳤던 아이 하나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와서 나를 도와주겠다고 했다(그런 일은 주일학교에서 흔한 일이다). 그것은 확실히 대견한 일이 아닐 수 없겠지만 웬걸, 녀석은 겉으로만 나를 돕겠다는 거였지 그 속내는 따로 있었다. 팀 아이들과 선생인 나를 갈라놓고, 제멋대로 팀을 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난 도무지 이 난세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다 중여지책으로 그 상황 그대로를 연극으로 재연시켜 무대에 올렸다. 제발 좀 깨달으라고.  녀석은 금세 내가 자기를 타깃으로 만든 연극인 줄 알았고, 그 다음부터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짐작은 갈 것이다.  좀 특수한 상황이긴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 때 부딪히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표절 시비와 함께 이런 문제가 아닐까 싶다. 즉 실제 인물을 다루는 것 말이다.  그것에 대해 모 작가는,  작가가 되려면 못된 사람이 되기를 각오하라는 말로 스스로를 격려하기도 했나 보다. 

 

 이책도 그렇다.  결국 소설도 사람의 이야기고 보면 등장인물 내지는 주인공은 현실 어디에선가 있을 법한 인물을 가공하던가, 그대로 이미지화 하던가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 어느 날 어느 작가가 자기를 작품속에 출연시키더라도 놀라거나 노하지 말기를 바란다. 물론 그것을 오히려 기대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그 작품속에서 자신을 멋지게 그렸을 때나 가능한 거지,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알면 어느 누구도 작가의 손에선 착하고 멋지게만 그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멱살잡힐 것을 두려워 작가로서 글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책에서 가장 나의 마음을 찡하고(물론 이책은 가슴 찡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천기가 누설된 것만 같은 책은 아무래도 제일 첫번에 나온 '안나 카레니나'를 쓴 톨스토이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안나 카레니나가 실제로는 두 인물을 합쳐놓은 것이라니!  하지만 그 작품이 찡한 건, 주인공과 톨스토이의 마지막이 같다는 것일게다. 마치 자신을 예언하기나 한 것처럼. 얼마 전, 그를 다룬 영화를 본 것과도 겹치기도 하고. 

 

책은 솔직히 기대했던 것만큼은 아니다. 뭐 서양 문학사에서 다룰 법한 작품들의 이면을 다룬 것까지야 그럴 수 있다고는 쳐도, 생각했던 것만큼 깊이있게 다루지는 못한 것 같다. 각 작가의 작품을 쓰는 패턴을 다룬 것은 흥미롭기는 하다. 어디 가면 이런 책을 또 만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런데 읽다보면 작가란 과연 어떤 족속일까에 대해 다시 한 번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도대체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일까? 오래 전, 신경숙 작가의 말을 또 한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작가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 천형으로 끊임없이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를 써야만 하는 존재라고 했다. 거기에 더해,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땅속에 대고라도 외쳐야 하는 존재는 아닐지?

 

언젠가 배우 유준상이 나와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본적이 있다. 그 사람을 보고 감탄한 것은, 그는 한마디로 연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연습 벌레라는 건 익히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는 인터뷰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이 상황을 연기에 어떻게 써 먹을 수 있을까를 연구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혼 반은 연기 연구에 반은 현재에 있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반쯤은 미친 사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을 보면서 작가도 그러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내가 오늘 들은 이야기, 어떤 사건, 상황이 작품에 어떻게 표현되고, 다룰 수 있을까를 끊임없이 상상하고, 연구하는 사람이 작가인 것 같다. 그래서 책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사건이나 계기를 다루지만, 작가들 자신이 이미 훌륭한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단순히 이야깃거리 하나를 두고도 어떻게 비틀고 매만져야 흥미로운 작품으로 재탄생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06p)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다.  작가는 이런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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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3-01-09 1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는, 삶을 짓는 이야기, 생각을 짓는 이야기,
이것저것 아울러 글을 짓는 사람이겠지요

stella.K 2013-01-10 14:59   좋아요 0 | URL
그렇죠? 함께살기님처럼.
잘 지내시죠?^^

마립간 2013-01-09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로 돌아오셨군요. 환영합니다.

stella.K 2013-01-10 15:46   좋아요 0 | URL
네. 오랫만에 이곳에 글을 쓰려니 꽤 멋쩍네요.
잘 지내시죠?
환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페크pek0501 2013-01-10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영합니다 2.

오랜만이에요. 무척 반갑습니다.
새해에 이루고자 하는 것, 꼭 이뤄지시길 빌겠습니다.
저의 마음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
(닉네임을 바꾸셨네요.ㅋ)

stella.K 2013-01-10 15:46   좋아요 0 | URL
다 언니 덕분이어요.ㅠ
그렇지 않아도 제 글을 봐 주실까? 내심 기다리기도 했는데
정말 약속대로 봐 주셨네요. 고맙습니다.
언니도 새해 꼭 바라는 소원들 다 이루시길 빌어요.
(네. 바꿨습니다. 마음에 드시나요?ㅎ)

2013-01-10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1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01-10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티커스님 안녕. 갑자기 생각났는데 그 '담요'는 어떻게 됐나요? 저랑 인연이 없었으니 애티커스님께는 갔나요?ㅋㅋ

stella.K 2013-01-11 10:46   좋아요 0 | URL
ㅎㅎ 아이리시스님께 인연이 없는 걸 저라고 있겠습니까?
워낙 경쟁률이 센데다 모집 인원이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그때 기회가 왔을 때 잡았어야 했던 건데 하필 아파 가지고.ㅜㅜ
참, 님 프라하의 묘지는 어떻게 됐나요?ㅋㅋ


2013-01-12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2 11: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3-01-14 00:04   좋아요 0 | URL
오, 두분의 재회다! 꺅

아... 재회아닌가 ㅋㅋㅋ

2013-01-12 0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2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 류시화 제3시집
류시화 지음 / 문학의숲 / 2012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시는 언제나 나에겐 관심 밖이었다.  

어쩌면 그리도 속 깊은 것인지? 어쩌면 그리도 낮선 것인지? 

내가 나를 알 수가 없는데 남의 속 깊은 뜻을 어찌 알까 싶어 일부러 외면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보니 문외한이 되었다. 그래도 시인 류시화를 모른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워낙에 시로, 번역으로 잘 알려진 사람이라 언젠가 한번은 그의 작품을 마주하고 싶었다. 

 

비록 우리는 시인이 될 수 없을지라도

 

 시인의 시는 뭐랄까, 명상을 하는 시인이라서 그럴까? 상당히 깊은 언어의 세계를 구가한다. 또 그래서 그럴까? 그는 시인의 시어를 사랑한다. 정말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만들어질까 궁금하다. 그에 대한 실례로 시인은 몇 가지 단어를 그만의 언어로 재해석 한다. '만일 시인이 사전을 만들었다면 세상의 말들이 달라졌으리라'고 하면서,

 

봄은 떠난 자들의 환생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제비꽃은 자주색이 의미하는 모든 것으로

하루는 영원의 동의어로

인간은 가슴에 불을 지닌 존재로

얼굴은 그 불을 감추는 가면으로

                                         (32p) 

그렇다. 세상에 벼라별 사전이 다 있으면서 시인의 사전이 없다니? 만약 시인의 사전이 있었더라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워질까? 다른 건 몰라도 시인은 단언하건데, 세상의 많은 단어들이 바뀌었으리라고  말하고 있다.

눈동자는 별을 잡는 그물로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로(33p) 말이다.

그리고 또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 사랑은? 인생은? 죽음은? 미움은? 후회는? 절망은? 어제는? 만남은? 이별은......?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나 나름의 언어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요는 자신만의 사전을 가지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도 같다. 그것이 꼭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니어도 좋으리라.

언어가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에 어느 정도 긍정하고 싶다. 요즘의 싸구려 언어는 타인을 공격하고, 스스로를 자해하고 있다.  메스가 사람을 살리는 도구도 될 수 있고 해하는 도구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언어 또한 그렇지 않는가? 오늘 하루동안의 생각들, 무심코 썼던 말들을 종이에 써 보라. 그것이 그 사람을 말해 줄 것이다. 

자신이 믿는 신에게 기도를 할 때 나쁜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다 좋은 마음과 정제된 언어로 기도를 한다.  인간이 쓰는 언어는 그래야 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비록 시인이 될 수 없을지라도 소망의 언어탑을 쌓아야 할 것이다.

 

 가끔 K2본부에서 하는 <김승우의 승승장구>라는 프로를 보면 그날의 출연 게스트에게 자신을 나타내는 단어를 꼽으라고 한다. 그래서 그 단어의 의미와 자신이 생각하는 의미를 재해석하게 한다. 사람이 쓰는 언어란 그런 것이구나 싶다. 

 

상처를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 

 

시인은 말한다.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이라고.

시인은 유독 시집에서 상처를 얘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히 긍정적이고,  자기치유적이다.

요즘은 하도 상처 받았다는 사람이 많고, 그것을 다루는 책도 많이 나왔고, 치유법도 많아졌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겠지만 그런 현상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다. 뭐 그리 상처가 많아서 성처, 상처 하는 것일까? 세상은 온갖 이론을 앞세워 상처를 규명하려고만 한다. 상처가 있으면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도 자기 안에 가지고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것들을 무력화시키고 자기 스스로는 고칠 수 없다고 그러고, 다른 것에서 상처를 치유 받으라고 하고, 잊으라고 한다. 

왜 상처는 똑바로 응시하면 안 되는 걸까? 내 안에 상처 이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걸까?

 

나는  '상처는 세월이 지나서야 열어 보게 되는 선물'이라는 말에 동감한다. 나도 지난 날 적지 않은 상처를 받고 살아왔다. 아니 상처 받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물론 그것은 되네이기도 싫은 것들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그때 이해하지 못한 것들이 지금은 이해가 되면서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되고 나는 더 넓고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시인이 상처를 가장 잘 표현한 것은 '옹이'라는 시에서가 아닌가 싶다.

 

흉터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이것도 꽃이었으니 

비록 빨리 피었다 졌을지라도

상처라고 부르지 말라

한때는 눈부시게 꽃을 밀어 올렸으니

비록 눈물로 졌을지라도

 

죽지 않을 것이면 살지도 않았다

떠나지 않을 것이면 붙잡지도 않았다

침묵할 것이 아니라면 말하지도 않았다

부서지지 않을 것이면, 미워하지 않을 것이면

사랑하지도 않았다

옹이라고 부르지 말라

가장 단단한 부분이라고

한때는 이것도 여리디여렸으며

다만 열정이 지나쳐 단 한 번 상처로

다시는 피어나지 못했으니  (12P)

상처에 대해 이만큼 통찰적이고 잘 표현한 시도 드물것이다. 상처는 없애고,  잊어버려야 할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어쩌면 상처는 보듬고, 이해하고,  토닥여줘야 잘 아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상처는 미워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야 하는 대상인지도 모른다. 그 상처도 상처가 되기까지 얼마나 싫었을까를 생각하면 말이다. 상처는 어찌보면 미리 열어 본 판도라의 상자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시집의 제목은 '이런 시를 쓴 걸 보니 누구를 그 무렵 사랑했었나 보다'란 시에서 따온 것이다.

'너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만 나는 너에게 꽃을 준다, 삶이여 나의 상처는 돌이지만 너의 상처는 꽃이기를, 사랑이여 삶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는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잘 가라, 곁방살이 애인아(110P)

사랑도 대상이 있어야 하듯 상처도 대상이 있어야 한다.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다분히 자조적이기도 하고 나로 인해 상처 받았던, 다시 말하면 상처를 줘야만 그 누구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도 같다. 그것도 너무 미안해 직접 구하지 못하고 한낱 자의적으로 조그맣게 구하는 용서. 나는 그에게 사랑이 되길 바랬는데 한낱 돌 같은 상처 뿐이었다니. 그돌 나에게 주고 너의 기억속에 나는 꽃같이 남아 있기를 사람들은 하나 같이 바라는 걸까? 사랑도, 상처도 이해 못할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것을 삶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이었던 적이 있냐고 자조적으로 되묻고 있다. 우리의 것이 었다면 상처도 주지 않고 사랑을 이루고 살았겠지.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 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그렇다. 따지고 보면 내 삶이 아니었던 그 알량한 삶도 나의 삶인 것이다. 그것은 얼굴을 마모 시키고 주름으로 남겠지.  '잘 가라, 곁방살이 애인아' 끝내 다가서지 못한 사랑을 곁방살이 애인이라면서 보내기 까지 했다.  상처만 줬던 곁방살이 애인. 사랑은 그리도 두려운 것이었을까? 피해버리고 말게. 그렇다면 앞으로 누구를 만나든 사랑 아니면 상처를 주겠구나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난 이 시가 참 마음에 든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중략)

중심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는 많은 눈물 흘리면서도

비켜선 것들을 위해서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중략)

곁눈질이라도 바라보아야 할 것은

비켜선 무늬들의 아름다움이었는데

일등성 별들 저 멀리 눈물겹게 반짝이고 있는 삼등성 별들이

있었는데

절벽 끝 홀로 핀 섬쑥부쟁이처럼

조금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저녁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증명을 위해

수많은 비켜선 존재들이 필요했다는 것을

언젠가 그들과 자리바꿈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한쪽으로 비켜서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했다는 것을

비켜선 세월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내 생을 비켜 갔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잠깐 빛났다

모습을 감추는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118~119P) 

문학의 증명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비켜선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예의를 갖추도록 하는 것.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그것만이 그들의 세상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 그래서 문학은 늘 약자의 편이고, 잊혀지고 감추어진 것의 편인 것이다. 그것이 문학의 사명이며, 인간적이 아닌 것에 대해 끊임없이 저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문학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매력적이면서도 위대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또한 그것은 나에게 '시'가 아닐까 싶다. 나는 앞서 시에 대해 문외한이라고 말했는데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시에 대해 예의가 없었는지 이 시를 대하는 순간 조금은 뜨끔했다. 시는 나에게 '절벽 끝 홀로 핀 섬쑥부쟁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금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저녁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는 시인의 말처럼 언젠가 자리바꿈할 날'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시는 그저 항상 거기에 그렇게 있을 뿐이다. 그것의 진가를 알아주고 못 알아주는 것은 시를 대하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둘 뿐이다. 시를 좀 더 가까이 해야겠다. 

 

그밖에...

 

나는 시인의 이런 말도 좋아한다.  

'적신호에도 멈추지 않는 사랑을 좋아한다

빛을 들고 어둠 속으로 들어가면 어둠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시인을 좋아한다'(122p)

나도 이랬으면 좋겠다. 상처를 받아도 언제 상처를 받았느냐며 열심히 사랑을 하고, 열심히 자기 사명을 다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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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5-14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적이면서 좋네요, 시요.. 저는 현실적인 시어들보다 관념적인 걸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포착한 시어들이 좋은데 류시화님은 그런 분이라고 생각 안했는데 인용하신 부분은 좋은 것 같아요.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그건 뭐지.. 뭘까요.. 뭘까..

stella.K 2012-05-15 18:01   좋아요 0 | URL
시가 조금은 어렵더라구요.
좋은 건 아주 좋은데.
하긴 시는 다 어려운 것 같아요. 이 작가뿐 아니라.
저는 류시화의 책을 정식으로 읽어 본적은 없는데
언뜻 언뜻 보면 정말 잘 쓴다 싶어요.
통찰적이고. 깊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번에 제대로 읽어 본 건데 아이님한테도 그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