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받아들면 조금은 뜨악해진다. 판형이 여느 시집처럼 되어있는데 막상 펼쳐보면 지문과 대사로 이루어진 희곡집이다. 그런데 저자인 김경주는 자신의 글을 '시극'이라고 말한다. 시극이라. 서지 분류도 애매해 이 책은 시에도 들어가 있고 희곡에도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독자는 이걸 어떻게 봐야할까? 나는 시의 운률은 잘 모르겠고 아무리 봐도 한 편의 희곡 같다. 그런데 굳이 '시극'을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장르로 분류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요즘 돌아가는 우리나라 연극계의 흐름을 잘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 분야가 너무 안 알려져서 그런지 몰라도 저자 김경주는 벌써 십년 전부터 이 시극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경주가 말하는 '시극'이란 무엇인가?  어려울 것도 없다. poetic drama. 즉 대사가 시의 형태로 쓰인 희곡을 말하는데, 산문적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각의 글에 라임과 운율이 살아 있는 문학적 장르라고 한다.  쉽게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렇고,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에서부터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가 그렇다고 한다.  원래 시와 극은 하나였고, 시인은 곧 극작가였다고 말한다. T.S. 엘리엇의 <캣츠>도 시극이었다고.

 

그렇게 설명하니 이해가 갈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작년 말에 보았던 안중근의 삶을 조명한 연극 <나는 너다>란 작품도 시극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배우 윤석화가 연출을 맡았고, 탤런트 송일국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이 단순한 정보만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연극은 배우들이 구사하는 대사에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뭔가 일상어가 아닌 시에 가깝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으니까. 처음엔 대사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관객이 알아 먹겠나? 뭐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 시간 내내 대사를 듣고 있노라니 상당히 고급하면서도 응축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원래 희곡은 이래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책 얘기는 안하고 잠시 딴 얘기를 해서 그렇긴한데,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지만 영화, 드라마와 같은 촘촘한 스토리텔링이 각광받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시극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리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나 드라마는 그 대사가 일상어와 약간의 B급 언어로 이루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드라마의 언어 수준은 중학교 2학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맞혀져 있다고 한다. 우린 어느새 그것이 정석인 양 그 보다 다른 차원의 언어에 대한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건 좀 생각해 볼 일이긴 하다. 언어가 구사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을 거부하고 상업주의와 결탁한 오염된 언어가 전부인 양 하고 살아 온 것은 아닌지. 

 

김경주는 그동안 이 시극을 알리기 위해  홍대의 클럽과 카페, 버려진 공장, 들판, 부둣가, 길거리 등 장소를 초월해 시극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가히 그의 노력이 어떠한 것인지 알 것도 같다. 적어도 우리는 이 카페라는 곳을 좀 더 문화 공간으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프랑스의 카페는 당대 유명한 철학자와 작가들에 의해 발전해 온 공간이 아니던가.  또한 카페라는 공간이 있었기에 그 나라의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날 우리의 카페는 프랜차이즈에 듣도 보도 못한 음료를 팔고, 음악이나 틀어주는 상업주의의 대표 공간일 뿐이다. 물론 요즘엔 카페를 조금 이색적인 공간으로 활용하는 곳도 없지는 않지만 아직은 미약하다.  어느 날 우연히 카페 갔다가 최소한의 무대 장치와 소수의 배우들에 의해 흘러나오는 시극의 대사를 듣는다면 그날은 그야말로 눈과 귀가 호사하는 (소위 말하는)계 탄 날은 아닐까?

 

하반신 대신 고무 튜브를 끼고 거리를 기어 다니며 구걸을 해서 먹고사는 김 씨. 눈 내리는 겨울밤, 파출소 직원은 얼어붙은 길바닥을 배회하는 김 씨를 등에 업어 파출소로 데려 오고, 파출소 직원은 김 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이 시극의 주요 내용이다.  잠시 이들의 대사를 음미해 보자. 

파출소 직원/ 또 뭘 보았지?

 

김 씨, 의자에서 내려 창가 쪽으로 기어간다.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김씨/ 몰래 떨어지는 눈물요.

파출소 직원/ 왜 그걸 자네 손등에 함부로 떨어뜨리고 지랄이야.

                  그건 집에 가져갈 수도 없잖아.

김씨/ 맞아요. 몰래 얼른 주어서 집에 가져갈 수도 없는 거죠.

파출소 직원/ 그런 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나아. 갈 길을 가야지. 앞으로.

김씨/ 그게 누구의 것이든 눈물은 따뜻해요. 손등에 떨어지면.

파출소 직원/ 눈물 나네. 왜 바다로 기어가려고 하지?

김씨/ 배가 고파서 아가미를 열어놓고 물을 마시고 싶었어요.

파출소 직원/ 내가 업어서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으면 자넨 눈사람이 됐을 거야.   지느러미가 있는 눈사람.

김씨/ 한 번이라도 저를 업은 사람은 절 내려놓고 모두 떠났어요.

                                                                            (74~75)         

 

 시가 한 번 읽어서 그 운율와 의미 파악이 쉽지 않은 것처럼 시극 역시 반복해서 읽고 음미해 보면 대사가 주는 의미와 매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부러 찾아 읽기도 해야겠지만 그것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제목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에서 장만옥이 흘러간 사랑을 회상하며 애잔하게 읊었던 대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등장인물의 대사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미학적 코드가 숨어있다.  뒤에 나오는 문학평론가 허희의 평론도 눈여겨 봐 두면 좋겠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돼지 2015-02-1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동사서독 다시 보고 싶습니다...

stella.K 2015-02-18 19:2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그 영화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요.^^
 
나의 하루 - 스물셋 청년 하용조의 친필 일기
하용조 지음 / 두란노 / 201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책이 기존의 형태 달라 조금은 놀랍고 신선했다. 아무래도 일기집이다 보니 조금은 다른 시도를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었나 보다. 그리고 또 하나 놀라운 건 페이지마다 글자 수가 많지 않다. 개인적으로 난 글자가 빽빽한 책을 좋아하는데 그 부분에선 조금은 실망했다. 하지만 이내 또 놀라운 건 하용조 목사님의 육필을 그대로 실었다는 것이다. 물론 다는 아니고 일부가 그렇다는 거다.  

 

그 육필을 보고 있노라면 하용조 목사님도 어지간한 악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생전 이 분은 일기를 쓸 때 한자를 병행해서 썼나 본데, 물론 한자라 이해하지 못할 독자를 위해 옆에 한글을 덧붙여 놓긴 했지만 이분이 워낙에 악필이니 한글 병용은 불가피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또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이 일기집은 목사님의 청년 시절 지병인 폐병을 앓았던 시절에 쓴 일기다. 아무래도 글 쓰기가 건강할 때 보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남자가 쓴 일기다. 여자 같으면 주저리 주저리 썼을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남자는 일기를 잘 쓰지 않거나 써도 길게 쓰지 않는 편이니 그 속성이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이 일기를 쓰고 그는 지금 천국에 있다. 아득하고도 왠지 모르게 가깝게 느껴지는 건 왜 일까? 나의 아버지는 살아생전 일기를 쓰시진 않았지만 가계부 비슷한 것을 쓰셨다. 무슨 생각이셨는지 당신이 가지고 계신 돈 중 하루하루 얼마를 지출하셨는지를 거의 매일 쓰셨다. 돌아가시고 유품 정리할 때 그 수첩을 발견했는데 묘하게도 천국과 지상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걸 누구더러 치우라고 매일 꼬박꼬박 쓰셨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일기였다면 내가 보관했을 텐데. 

 

하용조 목사님의 일기집을 읽고 있으려니 몇년 간 다니던 교회를 잠시 접어두고 이분이 시무하셨던 교회를 다녔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땐 교회 다니기가 몹시 힘이 들었다. 왜 이렇게 상처가 많았는지. 보통 그렇게 되면 교회를 떠나기도 하겠지만 신앙을 잃지 않기 위해서 이분의 교회로 잠시 피신 가 있는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하용조 목사님의 교회는 치유나 회복을 위한 교회로 유명했다.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던 때는 목사님 역시 병 때문에 잠시 강단을 떠나 계셨다 복귀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고 했다. 

 

목사님의 설교는 참 푸근했다. 특별히 설교를 하고 계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냥 뭔가의 얘기를 들려주는 사람처럼 편안하게 설교하는 것이 그분의 장점이었다. 그때 나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건 그분은 하나님의 사역을 너무나 신나고 즐겁게 여긴다는 것이었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난 이렇게 힘들어 만신창이가 된 느낌인데. 그분은 언젠가 설교에서 예수님이 인간의 모든 고난을 다 가져가셨는데 우리가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며, 고통스럽게 사역해야 하냐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난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셨으니까 우리도 고난 당하는 마음으로 고통을 감내하며 일하는 건 그분의 뜻이 아니라고 했다. 그게  코미디 같은 이야기일 것 같지만 가능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이분이라면 말이다. 

 

그분의 사역의 특징은 특별히 사람을 붙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교회주의를 몹시 싫어하셔서 교회를 6, 7년 다녔으면 다니던 교회로 돌아가던가 아니면 새 교회를 섬기러 떠나라고 하셨다. 그건 정말 훌륭한 목회 마인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떠나 있을만큼 있어서였는지 나는 다니던 교회로 복귀했다. 그리고 거의 이분의 설교는 듣지 못 했다. 그 교회를 떠났으니 안 들었다는 게 더 맞는 얘긴지도 모르지. 그런지 몇년 뒤에 부음 소식을 들었다.

 

일기는 온통 예수님 믿는 감격으로 가득차 있다. 누구는 은유로서의 질병으로 현대는 암이겠지만 3, 40년 전만해도 폐병이라고 했다. 그런 병을 젊은 날 걸리고 일기를 썼다니 뭔가 있어 보이긴 한다. 일본의 저명한 기독교 소설가 미우라 아야꼬도 생각이 나고. 그러고 보면 육체의 질병이 꼭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내면이 더 단단해지고 그래서 질병을 치유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므로 질병이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절망이 죽음으로 몰고 간다는 말은 진실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하용조 목사는 자신의 병을 하나님께 감사했다. 바울의 가시에 비유하면서. 

 

이 책을 읽으니 하 목사님의 목회 성공의 비결이 어디에 있었을까를 대략 짐작해 본다. 그것은 자신의 질병을 결코 절망적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고, CCC 같은 선교회에서 하는 훈련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감당했다는 것이며, 여러 다양한 사람과 편지를 교류 했다는 것등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를 진지하게 고민하다 못해 일종의 채무의식으로까지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르긴 해도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한 세대는 딱 이분 세대까지가 아닐까 란 생각이 들었다. 신앙의 순수는 요즘 떠는 보수주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즘은 보수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조차도 구원은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떠드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아예 주일 하루 교회에도 가고, 성당도 다니며, 절에도 가 보라고 권한단다. 신앙을 마음의 수양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거기에 신앙의 순수함이나 진지함이 있을까 싶다. 어느 한 가지도 순수해질 수 없고 진지해질 수 없으면서 수양만을 운운한다는 건 다 가짜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요즘 흔한 테라피나 힐링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믿음의 대상이 그것 밖에 되지 않는다면 굳이 뭐 때문에 신앙을 가져야 한단 말인가.  그리고 그런 교회에서는 더 이상 설교다운 설교는 없고 강연만 넘쳐난다.  이분의 신앙의 진지함은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오늘 나는 무엇을 했는가?

평범한 하루가 아니었던가?         

이처럼 귀중한 시간은 없다.

나는 이렇게 살 수가 없다.

생활을 혁명하고, 타성을 깨며, 습관을 혁명하자. 정말 이렇게만 살 수 없다.

 

나를 봐라.

나를 봐라.

이상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나를 봐라.

 

주님, 나의 사랑하는 주님 비참한 저의 상처 난 마음을 보살펴 주옵소서.

아무리 가도, 아무리 하여도 저는 주님을 울렸습니다.

못된 나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117p)

 

신이 있기에 인간은 참으로 위대하다.

고민과 고통은 그러기에 진실히 부딪히게 된다.

신이 없이 인간을 추구하는 허구,

아! 사랑하는 주님이 있기에

나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이 역사 속에 살아 계시기에

이렇게 괴로운 것이다.

어찌 이러한 분노를 인간은 아무런 연민 없이 당해야 한단 말인가.       (141p)

이런 진지함이 오늘 날에도 가능할 수 있을까? 스스로 묻지않을 수 없었다. 나 또한 이분만큼은 아니지만 예수님 믿는 감격으로 뜨겁고도 두근두근 했던 때가 있었다.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지금은 교회서가 아니면 찬송을 흥얼거리는 일 조차 거의 없어졌다. 한때는 목사라는 사람이 좀비가 되어 영혼을 잃어가고 있는데도 그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주님께 따져 묻던 나 역시 영혼없는 크리스챤인지도 모른다. 갈수록 침잠해 들어간다. 그러면서 주님을 울리고 있다. 이 책이라도 붙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작의 탄생 - 소설이 끝내 우리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
이재은 지음 / 강단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글을 써 본 사람은 안다. 마음은 청산유수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막상 써 보면 정말 쉽지 않는다는 걸. 특히 소설은 그런 것 같다. 하도 안 써지면 그런 생각도 든다. 내 안에 괴물이 있나? 그래서 이 괴물이 못 쓰도록 나를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 게다가 이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는다면 어떻게 될까?      

이재은: 전업작가로 산다는 것도 나름 고단함이 있을 것 같아요. 인세만으로 살기 괜찮은가요?  

권여선: 그게 좀 함정입니다. 단편집은 4,000~ 5, 000부 팔리는데 인세가 10%죠. 보통 단편집 하나 내면 원고료와 인세 합쳐서 1,000만원 정도 번다고 생각하면 돼요. 3년에 한권 정도 나오니까 연봉이 330만원이네요.(웃음) ......(25쪽)    

 

게다가 심상대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이재은: ...... '대한민국에서 지적으로 우월하면서도, 가난한 직업인으로서 으뜸은 소설가가, 다음은 대학 시강강사, 그 다음은 영화 시나리오 작가'라고. 현실도 그렇다고 생각하세요?

심상대: 대개 그렇습니다. ...... 현재 우리나라에서 지속적으로 연수입 1억원 이상인 소설가는 10명도 안 되니 소설가는 여전히 가난한 직업입니다. ...... 실용적 권력이나 실질적 유흥물이라면 모를까, 누가 불편한 이상과 마주 하려고 돈을 내겠습니까. 앞으로도 솔설가는 지속적으로 가난해야 마땅합니다. (305쪽)

 

또는 소설가 정영문이,

우선 나에게는 소설이 치유는 아닌 것 같아요. 소설을 쓰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기는커녕 항상 삶이라는 자체에 대해 혼란을 겪게 됩니다. 오히려 소설을 쓰면 쓸수록 그 혼란이 가중되는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일종의 병적 상태를 악화시키는 것도 있고요.  ......(342쪽)                                                               

(물론 정영문 소설가는 저 말 뒤에, '그래도 그런 혼란을 정리할 수 있는 것 또한 글 쓰기'라고 하긴 했다.)이런 글을 읽는다면 멘붕이 오면서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소설 쓰는 일이란 것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일을 기어이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그들의 그런 정신과 내면을 읽기를 원했다. 그래서 읽게된 책이 이 책 <명작의 탄생>이다.   

 

책에서 소설가 박상우가 이런 말을 했다.

...... 글을 쓰는 사람은 자기구원을 먼저 해야 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어느 날부터 글을 쓰고 싶으면 자기구원을 위한 자발적 의지가 의식화한 거라고 봐야죠. 글쟁이들은 공통적으로 정신체계가 약해요. 에고가 강하고, 남과 잘 타협하지 않고, 편협하고 집착도 강하죠. 그러한 것들을 극복하게 만드는 치료제가 글을 짓고 생산하는 일이죠.  ......자신을 구원한 사람의 작품이라야 양분을 지니게 되고, 그것이 세상에 나가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지니게 되는 것이죠. (86쪽)   

 이 말은 확실히 작가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 시금석 같은 말인 것 같다.  나는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글 속에서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이 과연 나를 구원할만 하고, 남에게 공감과 감동을 줄만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과정이 없다면 내가 쓰는 글은 끊임없는 합리화와 포장으로 일관하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박상우는 이런 말을 했다. 문학은 단지 내 인생의 도구(tool)일 뿐이죠. 나를 진화시키는 데 필요한 도구라고. 그렇다면 글 쓰는 걸 너무 어려워하거나 크게 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19인의 소설가들을 인터뷰한 인터뷰집이다. 읽다보면 작가 개개인이 문학과 글 쓰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가 있어 읽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특히 저자는 40대에서 70대초반까지 비교적 다양한 연령층 작가들을 인터뷰 했다. 무엇보다 8, 90년대 문단계에 주목을 받던 젊은 작가들이 어느덧 4, 50대가 되어 문학을 논했다는게 새삼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이들은 무엇으로 밥의 문제를 해결해 가며 소설이란 지난한 작업을 지탱해갔을까? 아무래도 순수하게 쓰는 것 가지고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프로필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그들은 거의 대부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해 가며 그 작업을 했다. 어찌보면 이젠 쓰는 일을 경제활동에 포함시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순수문학은. 뭐랄까, 그냥 나를 구원하고 고양시키는 정신 활동? 그쯤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걸 경제적인 것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는 구조에 살고 있긴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가 되야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순수 예술의 세계에서 돈은 옵션일 뿐이다. 

 

4, 50대 작가는 또 그런데 6, 70대 작가들을 인터뷰 한 것을 보면 깊은 공감과 함께 어떤 감동마져 느끼게 된다. 김원일이나 박범신, 이문열, 조성기, 한승원 같은 작가들을 보면 이분들은 어느새 문단계의 노장이 되었다. 특히 이문열은 읽으면서 찡한 느낌이 있다. 12년이나 지난 일인데도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저자의 질문에 순순히 응한 것을 보면 그래도 처음보단 많이 자유로워진 것 같아 다행이다 싶다.       

 

아무튼 이들은 하나 같이 경제적인 걸 생각하면 지금까지 글을 써 오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한승원 작가 같은 경우, 제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제 존재의 이유이자 의무예요. 반드시 먹고 살기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쓰지 않고는 못 견디니까 그래서 쓰는 거예요. 생명체로서의 욕구 그것 때문에 쓰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것을 떠나서 쓰지 않고는 못 베기니까요. 나는 살아 있는 한 소설을 쓸 것이고, 소설을 쓰는 한 살아 있을 것입니다. ...... 소설을 써서 팔리느냐 안팔리느냐, 독자가 읽어줄 것인가, 안 읽어 줄 것인가는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159쪽)라고 했다. 그런 것을 따졌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데 글 쓰기 앞에 멈칫하게 만드는 건 그런 것들이 아니겠는가? 얼마나 팔릴까? 어떤 독자가 읽어 줄까? 글 쓰기 앞에 그런 것을 따진다는 건 아직 작가 의식이 없거나 쓸 생각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새삼 나의 주목을 받았던 작가는 조성기 작가였다. 그는 지난 90년대 문학계에 누구 보다도 뜨거운 주목을 받았던 작가다. 아마도 소설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 하나 이상은 읽지 않았을까? 나도 그의 작품은 두어 작품 읽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모르는 사이 그는 무수히 많은 작품을 꾸준히 내고 있었다.  새삼 속으로 그는 독자가 모르는 사이 이렇게 글을 쓰고 있었구나. 마치 숙제처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애초에 돈 따지고, 대중의 관심을 논했었다면 자신이 숙제처럼 또는 사명처럼 여기고 있을 글을 썼을까? 그러므로 돈을 따지고 독자의 관심을 따진다는 건 우습다 못해 유치한 일이다. 그건 모르긴 해도 돈으로 중무장한 영화나 드라마에 대중의 관심을 빼앗긴 잃어버린 자의 열등감같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소설이 어디 영화나 드라마 보기와 비교가 될 것인가? 앞서 말한 심상대의 말을 기억하며 무소의 뿔처럼 잔말 말고 그냥 쓰는 것이다. 

 

그런데 소설이 여타의 장르 이를테면 영화나 드라마에 비해 그렇게 열등한 분야인 것이냐에 대해 우리는 좀 더 새로운 시야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가 방현석의 말은 우리가 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문학(소설)은 다른 장르에 비해 승률이 높은 장업이라고 말한다. 열심히 쓰면 최소한 소설책을 낼 수 있어요. 소설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100% 들려줄 수 있어요. ...... 영화는 아무리 노력해도 못 들려주는 경우가 많아요. 자기 혼자 노력으로 소설은 돼요. ......그러니까 문학하는 사람들이 의기소침해 하지 말고 좀 더 담대해져야 한다는 거죠.

...... 문학이라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정신'이에요. 그런데 정신의 깊이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아요. ......소설이라는 게 그렇게 고정된 완결적 형식이 아니거든요. 소설은 과정의 형식이죠. 계속 엎어지고 전복햐야 하는데, 너무나 완고한 틀과 형식에 따라 신인을 선발하는 제도는 아니라고 봐요.

요즘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들을 뽑는 기준이 아예 다 똑같아요. 특징도 없어요. 저는 그게 걱정이고 문학 발전의 저해요인이라고 봐요. 우리나라 등단제도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아주 독특한 제도이죠. 글 쓰는데 무슨 라이선스가 필요해요? 무슨 영업허가서도 아니고.(225쪽)

나는 글을 쓰는 것이 무슨 라이센스나 영업허가서가 아니란 그의 말에 백번 동의 한다. 예전엔 신춘문예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것을 통과하지 않으면 작가로 명함도 못 내미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문학이 그렇게 제도화되도 되는 것일까 묻고 싶다. 

 

또한 앞으로 작가가 될 사람이나 이미 작가가 된 사람이라도 한승원 작가의 말은 두고두고 새겨 볼만 하다.

소설가는 현실세계와 상상의 세계, 그러한 세상과 허공에 뿌리를 내려서 이야기를 만들고 그 속에서 참다운 진리를 찾아내는 사람이죠. ...... 그리스 소설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소설가를 향해 이렇게 말했어요. '이 한심한 영혼아 너는 돈을 주고 고기를 사 먹고 포도주를 사 먹고 빵을 사 먹는 것이 아니라 하얀 종이를 꺼내서 거기에다 빵이라고 쓰고 포도주라고 쓰고 종이라고 써서 그 종이를 먹는구나.' 그래서 한심한 영혼이라고 한 거죠. 현실적인 삶을 살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면서도 현실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잘못하고 있는 삶을 교정해 주는 노력을 하는 것이 소설가이고 소설가의 역할이죠.

...... 승려나 목회자가 도를 닦으며 살 듯, 소설가도 도 닦듯이 삶을 살아야 해요. 스님들이 욕심과 탐욕을 버려야만 제대로 살 수 있듯이 소설가들도 탐욕을 버리고 그 탐욕에 젖어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든지 창녀처럼 사는 여자의 이야기라든지 바람둥이처럼 사는 사람이라든지 그런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깨달은 것을 쓰는 거예요. 더 잘 사는 삶, 더 아름답고 예쁘게 사는 삶을 꿈꾸는 사람이 소설가죠.(163쪽) 

 

그렇게 해서 탄생한 문학 책 한 권 설혹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옛 성현의 말에 '군자저서전유구일인지지'(군자가 책을 써서 전하는 것은 다만 그 책을 알아주는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꼭 이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시대가 바뀌어도 문학의 고귀한 가치는 지켜졌으면 좋겠다.

 

책 제목이 약간 거창한 느낌이 들긴하다. 인터뷰집인만큼 인터뷰이로 참여한 19인도 훌륭하지만 인터뷰어인 저자의 인터뷰 솜씨도 탁월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 인터뷰 할 작가의 텍스트를 일일이 다 읽고 인터뷰를 했을까 그 성실함과 독자가 궁금해 할만한 사항들을 잘도 짚어줬다는 생각이 든다. 좀 아쉬운 건 끝에 후기로 마무리를 해 줬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몇년 전, 나는 원재훈의 <나는 오직 글 쓰고 책 읽는 동안 행복했다>를 읽어었다. 그것도 작가들을 인터뷰한 책인데 거기에 몇몇 작가가 이 책과 겹치기도 한다. 그 작가들의 글 쓰기는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비교해 보는 작업도 꽤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더불어 내가 독자로서 우리나라 작가들한테 너무 관심이 없었다는 걸 아울러 반성해 보게 됐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왕의 한의학 - 낮은 한의사 이상곤과 조선 왕들의 내밀한 대화
이상곤 지음 / 사이언스북스 / 201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조선의 역사는 왕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왕을 중심으로 정치과 경제, 문화가 얘기되어진다. 그런데 이 책은 한의학으로 풀어 보는 조선 왕의 역사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있자니 새삼 왜 이책이 이제야 출간이 된 걸까 싶기도 하다. 솔직히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건 학교에서 배우는 국사 시간이 아니다. TV 드라마를 통해서다. 거기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사약을 받고, 왕이나 세자를 살리기 위해 어의가 진맥을 하고 침을 놓는 장면 등을 보면서 왜 이 부분에 대해선 그리도 무덤덤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대장금>에 와서야 역사 드라마가 좀 달라졌다고 감지하는 정도였다. 그래도 왕의 병에 관해서는 드라마가 다루기를 거부했던 듯 하다. 우리가 아는 정도는 세종이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이라는 정도랄까? 책은 세종의 병에 대해 자세히 알려 줌은 물론 역대 왕들의 병에 관해 비교적 소상히 밝히면서 그 치료에 관한 한의학에 대해 펼쳐 보인다. 읽으면 우리 나라 국왕의 역사에 대해 가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연산군에 관한 부분은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우리는 어디가 아프면 단 하루도 못 살겠던데 조선 왕들은 온갖 질병을 안고 정사를 돌봤다니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 병만이라면 그나마 나은 것이다. 시시때때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정적들과 간계들 속에 그야말로 하루하루 버티고 사는 것도 힘들었겠다 싶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지 않던가? 조선 왕들의 병은 천성적이라기 보다 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 재밌는 건 저자는 적자에서 왕이 된 사람은 대부분 단명한 반면 영조 같이 방계에서 왕이 된 사람은 오래 장수했다는 통계도 내놓는다. 재밌기도 하지만 저자가 참 꼼꼼하게 글을 썼다는 생각이 들게도 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한의학으로 왕의 역사를 논한만큼 요즘 흔히 다뤄지는 팩션으로 인해 왜곡되어진 역사의 부분을 바로 잡으려고 한다. 팩션은 알다시피 역사와 상상력이 결합된 이야기 형태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는 TV 드라마나 영화의 영향이 가장 크다. 우리가 그런 매스컴을 통해 역사에 다가가는 것은 좋은데 그러다 보니 왜곡된 부분도 의외로 많다. 물론 역사적 사실이 좋은 것만은 아닐 수 있다. 일견 너무 경도된 면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팩션은 너무 상상력을 강조한 나머지 인물을 왜곡할 수 있고. 그중 하나가 책에서도 다룬 광해군일 것이다. 지금까지 광해군을 직간접으로 다뤘던 드라마나 영화는 하나 같이 그가 올바른 군주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책은 과감하게 광해의 가리워진 부분을 드러내 보여준다. 또한 정조 역시 독살된 것처럼 알려지고 있는데 저자는 한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일견 예견 거라고 한다. 누구는 또 이걸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를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만 볼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으로 보는 눈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저자의 관점도 참고해 볼만한 좋은 자료가 될 것이다.

 

병을 가지고 있지 않은 왕은 없었지만 이걸 가지고 자신을 방어하기도 하고, 이것이 위협이 되는 순간이 있었다는 건 확실히 생각해 볼만하다. 예를들면 광해나 연산군은 병을 핑계로 정무나 경연을 멀리하기도 했단다. 나라도 그랬을 것 같다. 내 얘기지만 나도 초등학교 시절 학교가 너무 가기 싫어 병이라도 낫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너무 건강한 것도 문젤까? 그런 일은 나에게 여간해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마음 알 것 같다.

 

이 책을 읽고 있자니 예전에 대통령의 스트레스를 다룬 재밌는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대통령이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인지 대통령직을 수락하는 순간 빠른 속도로 늙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해 영부인들은 활짝 피고. 그런데 스트레스로 팍삭 늙긴 하지만 퇴임 후 생에 대한 만족도는 높아서 대체로 장수한단다. 그러고 보니 과연 그렇다 싶다. 물론 책의 내용과는 다소 배치가 되는 것도 같지만 그거야 오늘 날은 의학도 발달하고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 능력이 옛날에 비해 강화되었으니까 그럴 것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만 놓고 보자면 그냥 넘길 부분은 아니다. 

 

이 책이 시사하는 바는 물론 그런 왕의 병증을 다루면서 한의학은 발전해 왔을 것이다. 하지만 지혜로운 왕일수록 자신의 병을 어의에만 맞기지 않고 스스로 다스려나갔던 반면 폭군일수록 몸은 돌보지 않은 채 방탕하고 온갖 스태미너에 의존했다. 자신이 자신의 몸을 위해 무엇을 했더란 말인가? 그걸 할 줄 모르는 지도자 그리고 그 밑의 신하들과 백성들은 힘들어진다. 그래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고 했을까?

 

아무튼 이 책은 역사와 한의학 두 마리의 토끼를 확실히 잡은 것 같다. 좋은 책이다. 일독을 권해 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5-01-18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흥미진진한 내용 같네요. 한의학과 조선왕이라.... 한의학적 접근이겠네요.
이런 기획 의도 좋습니다. 신선하잖아요.

stella.K 2015-01-18 17:41   좋아요 0 | URL
그렇죠. 솔직히 개인적으론 제 취향은 아니라 막 좋은 건 아닌데
객관적으로 보면 정말 괜찮은 책이다 싶어요.
무엇보다 저자가 조선 시대 왕에 대한 지식이 좀 해박한 것 같더라구요.
한의학이야 뭐 전공이니까 당연한 거고...^^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 책읽기에서 글쓰기까지 나를 발견하는 시간
장석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졸작이라도 '쓸 수 있는 용기'이다.(101p)'

벌써 7년쯤 된 일이 되어버렸다. 그때 난 예전에 배웠던 글선생님을 찾아 가 다시 배움을 청한 적이 있다. 이 선생님을 찾아간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그건 소설을 쓰기 위함이었다. 웬지 이때야말로 나의 남은 생은 오로지 소설에 바쳐야겠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기 전 선생님께 점검 겸 마지막으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선생님이 소설을 가르쳤냐면 그렇지도 않았다. 선생님의 시작은 소설이었지만 지금은 시나리오를 가르치신다. 하지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시나리오와 소설이 아무런 관련이 아무 것도 없다고 누가 그러더란 말인가.

워크숍 방식으로 진행되는 선생님의 수업에서 나는 내가 글을 쓰는 수준이 어느 정돈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도 하필 가장 글쓰기가 어렵다는 시나리오로. 선생님을 처음 뵈었던 13년 전엔 단편 소설을 써서 칭찬을 받았었다. 비록 장르는 다르지만 이번에도 내가 칭찬을 받을만 한지 알아 보고 싶었다. 그동안은 어디가서 글 못 쓴다는 소리는 안 들었으니까. 깐엔 여기서 평가 받고 후에 난 소설을 쓰겠다고 다짐했던 게지.

지면상 시시콜콜한 얘기는 다 할 수는 없고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한마디로 참패였다.

선생님이 워낙에 기가 세신 분이라 나중엔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였다. 더구나 착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당시 어떤 남자 수강생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을 텐데 나에게 적잖은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나는 이것을 차마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선생님과 (그를 포함한)모든 수강생으로부터 좋지 않은 평가를 받고나니 더 이상 글을 못 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그동안 내가 글을 잘 쓰는지 못 쓰는지도 모르고 살아왔던 것일까? 뭔가 모를 자괴감이 들었고 무엇보다 그 남자 수강생에게 부끄러웠다. 

시간은 때로 빨리도 가지만 어느 땐 느리도 간다. 하지만 확실한 건 어쨌든 시간은 흐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이 책의 저자에게서 위의 구절과 마주하는 것이다.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졸작이라도 '쓸 수 있는 용기'이다. 이 비슷한 이야기를 당시 나와 단짝이던 강이 하기도 했다. "언니, 우린 어쨌든 써 냈다구. 저 안 쓰는 인간들(워크숍 작품을 내지 않는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가 훨씬 나은 거야." 나를 위로하느라 하는 말이지만 당시엔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은 내가 앞으로 겪어야 하는 많은 혹평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책은 말한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바로 실패를 낳는다. 실패를 즐기고, 실패에서 배워라. 실패나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 자신의 길을 단박에 찾아가는 사람은 드물다고(57p)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해 본다. 나는 그때 왜 옛 선생님을 찾아갔던 걸까? 어쩌면 뭔가 직선으로 가야할 길을 돌아갔던 것은 아닐까? 내가 나를 생각해도 정말로 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순간 멈칫거리고 주저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습성에 따라 나는 글을 쓰지 않고 그렇게 선생님을 찾아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겪어야 하는 일을 겪지 않았던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라. 눈물이 찔끔거릴 정도로 참패였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늘 남이 이해하지 못한 글은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것은 언젠가 그런 글을 써 봤기 때문에 하는 말일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 단 한편의 글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과연 남을 위해 쓰는 글은 얼마나 진실할 수 있을까? 늘 필요에 의해서만 글을 쓰다보니 언제부턴가 '좋았어요'란 말 한마디 듣는 게 내 역할과 가치를 정해버리는 기준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


이 책의 저자는 저 유명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졸작이라도 쓸 수 있는 용기'이다 밑에 이런 말을 남겨 놓았다. '졸작은 누구나 쓸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써라. 느끼는 대로 솔직하게!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글을 쓰지 말라. 칭찬받기 위해서도 쓰지 말라. 오직 피 흘리기 위해 써라. 자신의 치부, 결점, 상처,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 자신에게 치명적인 바로 그것을 써라. 당신이 모르는 당신을 드러내보도록 하라. 무의식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아, 당신의 내면 깊은 곳에 숨은 '상처받은 용'을 바깥으로 끌어내라. 밖으로 나온 그 짐승은 용틀임하며 크게 분노해 당신을 할퀴려 들 것이다. ...... 하지만 상처받은 용'을 세상 밖으로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내면을 응시할 수 있으며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101p)


나는 그 선생님에게서 두 번의 배움의 기회를 가져었다. 그랬을 때 한번은 단편 소설을 썼고, 또 한번은 시나리오를 썼다. 한번은 칭찬을 들었지만 한번은 혹평을 받았다. 그리고 이 둘의 공통점은 다 나의 이야기를 썼다는 것이다. 나는 안다. 사람들이 꾸며내고 지어낸 이야기 보다 자신의 이야기에 더 많이 반응한다는 것을. 그런데 단편 소설을 썼을 땐 좋은 평을 받았지만 왜 두 번째는 그런 혹평을 받았던 걸까? 뭐 이유야 따져보면 없지 않겠지만 중요한 건 혹평을 받은 글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어하지 않을 거란 거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봤어야 했다. 아주 똑똑히. 그래서 내 동기가 무엇이고, 내 치부와 결점이 무엇인지, 내 안에 상처 받은 용이 무엇인지를 봤어야 했다. 그러고 보면 작가야 말로 수시로 정신분석을 받아야 하는 존재는 아닐까? 아니면 고백성사를 가장 많이 해야하는 존재는 아닐까?

이렇게 저자 장석주는 저 말을 통해 작가를 무섭게 응시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또 책 전반에 걸쳐 수시로 다른 말로 표현되어 있다. 오죽했으면 작가는 노출증 환자라고까지 했을까?

 그렇다면 그때 내가 선생님을 다시 찾아가 눈물이 찔끔거리도록 호되게 꾸지람을 들었던 건 의미없는 짓이었을까? 물론 그렇지는 않다. 솔직히 적지 않은 나이에 배움을 청한다는 건 적어도 나 같은 성격에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이렇게 쓰기도 어느 만큼의 부끄러움을 감수하고 쓰고 있으니까. 하지만 앞서 저자도 말하지 않는가? 자신의 치부, 결점, 상처,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 자신에게 치명적인 바로 그것을 쓰라고. 그래서 쓰는 것이다. 솔직히 그 일은 다리미로 데인 듯 상당히 오래 갔었다. 한 2년, 3년까지도 갔던 것 같다. 그리고 세월이 이렇게 흘러 이 책과 함께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 옛날 그런 말씀을 하셨다. 그 글 이후에도 또 쓰고 싶은지 자신의 욕구를 들여다 보라고. 그렇다. 나는 그렇게 다리미로 데인 듯 그 일이 충격적여 당시론 다시는 글을 못 쓸 것만 같았다. 그런데 2012년 나는 우연히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내 전공인 대본을 쓰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어느 극단에 의해 대학로 무대에 올리기까지 했다. 그때 보았다. 나의 욕구는 항상 글을 쓰는 것에 머물러 있다는 걸.

한번 좋으면 또 한번은 나쁜 법일까? 그렇게 대학로에 내 작품을 올렸으니 비로소 작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고, 내 작품이 공연되어지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내 생애 최고의 일이라고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정말 꿈만 같았다. 그리고 연이어 계속 새로운 작품으로 활동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의 행복은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더 좋은 작품을 써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있다. 왜일까? 글쎄, 사실은 그 작품을 올리면서 그리고 올린 후에 인간의 부조리한 면을 보고야 말았다고나 할까? 뿐만 아니라 그 부조리에 항거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난 그렇게 한 죄로 그 다음 작품을 못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고 싶냐고.

솔직히 인간의 부조리한 면을 보면 너무도 역겹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기엔 작가 근성은 그렇지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이 역겨운 인간의 부조리함을 글로 쓰는 것에 진짜 작가 근성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난 다음 차기작을 포기하거나 뒤로 미루는 한이 있어도 이 부조리함만큼은 글로 밝혀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작가는 여기에 더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당장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글을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추고 싶은 치부를 들어내는 것. 

저자는 말한다. 한시도 글 쓰는 손을 멈추지 말라. 글을 쓰는 손을 멈추는 순간 글쓰기를 향해 흘러가던 에너지까지 멈출 수 있다.(80P) 

난 장석주의 글은 이 책이 처음이다. 그의 여러 많은 저서와 명성에 비하면 참 게으른 독자다. 어쨌든 읽고난 나의 느낌은 이분은 문학에 순정을 바친 분이구나 싶었다. 아니 더 나아가 문학을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겠구나 싶다. 문학 순교자. 그러면서 문득 문학 구도자라던 마루야마 겐지가 생각이 났다.   

글쓰기는 스타일이라던 저자의 문체는 상당히 쉽고 깔끔하면서도 동시에 싯적이고 사유적이다. 이 책을 통해 다시 한 번 격려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저자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hnine 2015-01-13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님을 한번 시험에 들게 하시느라, 그걸 딛고 일어서는 과정을 거치게 하시느라 선생님께서 그때 혹평을 하셨던건 아닐까요?

장석주의 다른 책을 떠올려볼때 이 책도 어떤 분위기일지 조금은 짐작이 가기도 해요. 더구나 Stella 님이 이 책을 읽어보고 싶게 리뷰를 쓰셨네요 ^^

stella.K 2015-01-14 13:29   좋아요 0 | URL
아이고, hnine님 이 어인 문안이십니까?
황송하여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너무 격조하였지요? 죄송합니다. ㅠ

그래요. h님께서 딱 바로 보신 것 같아요.
아마도 선생님은 그러셨을 겁니다.
그때 당시엔 어찌나 무안하던지. 내가 지금 나이가 몇인데...
뭐 그런 생각도 했더랬지요. 그런데 돌이켜 보면 야단 맞을 수 있는 것도
특권은 아닌가 해요. 나이들면 누가 야단쳐 주는 사람도 없잖아요.
선생님이 워낙 독특하신 것도 있지만 그분 입장에선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해주신 거죠. 조언도 많이 해 주셨는데.

제가 워낙에 글쓰기와 작가에 관한 책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초보자가 읽으면 감동을 많이 받을 것 같아요.
저는 장석주란 이름에 관심이 가서 읽은 건데 아, 이 분이 글을 이렇게 쓰는구나
좀 감동했고 글을 참 사랑하시는 분 같았어요.

참, hnine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비종 2015-01-14 0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쓴다는 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인 것 같습니다. 앞모습이냐 옆모습이냐는 작가의 선택일테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 모습이 비춰지겠지요. `용기`라는 말에 공감합니다. Stella.K님도 용기를 내셨기에 스스로 들여다본 조각을 보이셨겠죠? 화이팅!!입니다^^

stella.K 2015-01-14 14:40   좋아요 0 | URL
나비종님, 반갑습니다.
솔직히 제가 이런 류의 책을 만날 때마다 제가 글공부한 얘기를
종종 많이 했어요. 그래서 이번 리뷰는 좀 대충 써 볼 생각이었는데
막상 써 놓고 보니 너무 솔직하게 쓴 것 같아 부끄럽긴 하더군요.
하지만 저자의 저 긁은 글씨의 말에 넘어간 것 같아요.ㅠㅠ
예쁘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페크pek0501 2015-01-1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는 갖고 있지만 어떤한 글(예를 들면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글 따위)도
쓸 수 있는 용기는 없사와요. 향상시킬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거겠죠? ^^

stella.K 2015-01-16 13:22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니 못 쓰는 글 보다 안 쓰는 글이 더 나쁜 거겠다 싶더군요.
물론 작가가 될 사람에겐 말이어요.
그래서 한 시도 글 쓰는 손을 멈추지 말라고 했나봐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