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독서 - 바람구두 인생 서평
전성원 지음 / 뜨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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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자를 알게 된 건 오래 전 알라딘이 서재라고 하는 개인 블로그를 개설한 초창기 때였다. 지금이야 개인 블로그 하나쯤 운영하지 않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때는 뭐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운영을 해야 할지도, 누구와 인사를 하고 친구를 맺어야 해야 할지 모를 때 그는 수줍게 내 서재에 다가와 먼저 인사를 했었다.

 

그는 지금도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긴 제목의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게 무려 2000년부터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는 개인 홈피를 운영하면서 알라딘 서재가 생기자 함께 운영을 한 것인데, 저자의 서재를 방문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서평이 시쳇말로 장난이 아니다. 쓰기도 많이 쓰지만 다방면의 글들이 올라와 있다. 알고 봤더니 그는 <황해문화> 편집장이었다. 어쩐지. 예사롭지 않은 글은 직업과도 관련이 있었다. 그런 그가 나의 서재에 먼저 다가와 인사해줬다는 건 나에게 꽤 자존감을 높여줬던 것도 사실이다. 내 허접한 서재에 뭐 그리 볼 것이 있다고. 게다가 내가 성격상 낯가림이 좀 있는 편이라 아무나 덥석덥석 아는 척 하는 성격도 못되는데 이렇게 먼저 손내밀어줬으니 고마울 밖에.

 

그렇게 시작된 저자와의 인연은 짧다면 짧고 기다면 긴 시간을 같은 알라디너로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어느 곳이나 그렇듯 떠나는 사람이 있고 머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머무는 사람은 떠나는 사람을 지켜봐야 한다. 머무는 사람은 떠나나는 사람을 강제할 수 없다. 물론 그 토록이나 많은 글을 쓰는 걸 보면 그는 자신의 홈피를 근거지로 또 어디선가 활발한 활동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또 나의 성격이란 늘 다니는 경로로만 다니는 습성이 있어 평소 그의 글을 좋아함에도 굳이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사람에게 정말 촉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보다. 누군가를 생각하다 보면 그 사람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다. 그도 그랬다. 이 책이 나오기 전 문득 생각이 나곤했는데 그의 책이 예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했다. 어디선가 무엇을 하고 있겠거니 했더니 세상에 나오려고 이렇게 출격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의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의 실하면서도 각잡힌 글을. 그의 글은 감히 따라할 수는 없지만 읽는 것만으로도 생각이 정리되고 서평의 좋은 모범을 보는 것 같다. 물론 보고 싶으면 그의 서재로 가 살짝 보고 나오면 된다. 하지만 그것도 마음뿐 주인 없는 서재에 가기란 생각 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의 기운과 손이 닿지 않는 집이 흉가가 되듯 서재 또한 주인이 없어 소통하지 못하면 그저 방기될 뿐이다. 뭐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나 역시 아날로그 세대라 그런지 좋은 글은 책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인터넷에서 야금거리고 있는 건성에 차지 않는다. 책은 사각사각 책장 넘기는 맛도 있고.

 

하지만 책이라는 게 그만큼 내가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마음에만 있지 못 읽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책중에 내가 그 책을 읽는다는 건 그야말로 억겁의 인연이 있어야 읽는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 책도 나에게 그런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평소 저자가 덕을 많이 쌓았거나 아니면 알라딘에서 내게 먼저 아는 채 해 준 공덕 때문일 것이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 마침 어느 고마운 알라디너가 책 선물을 하고 싶다기에 두 번도 생각하지 않고 이 책을 지목해 덥석 받아버리고 야금야금 읽었다.

 

뭔가의 인연이 있는 사람의 책을 읽는다는 건 오랜 친구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는 느낌과 맘먹는다. 전기도 전신도 그리 발달하지 않은 시절 편지는 인간관계의 끈을 이어주는 주효한 매체였을 것이다. 나 어렸을 때만해도 편지 한 통을 받으려면 평균 4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니 편지 한 통을 보내고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 일인지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선 감히 상상도 못할 것이다.

 

책은 어느 사랑 받지 못하고 자란 한 사내의 신산한 삶의 고백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분명 서평 집이면서 신산한 삶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하다니. 그 뜻을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다. 틀리지 않다면, 사람이 인생을 4, 50년쯤 살면 뭔가 갈무리를 하고 싶어진다. 내가 어느 집 자식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엇을 경험하고 누구를 만나왔는지 어떤 형식으로든 들려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쓰고 싶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회적 분위기는 그것을 쉽게 허용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아직 젊은 사람이 무슨 자서전이냐고 타박을 놓을 수도 있고, 설혹 쓴다고 하더라도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에서 남의 삶을 들여다 볼 시간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나도 2년 전 책을 낼 기회가 있었을 때 호기롭게 이참에 나의 독서 경험을 빙자한 일종의 자서전을 모의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내 전 생애를 통해 볼 때 밥 먹고 잠자는 일 외에 가장 오래 해 왔던 일이 그거였으니까. 하지만 내 책을 내준 출판사 사장 겸 편집장이 그냥 여태까지 써왔던 서평을 다듬으면 좋겠다는 말에 두 말도 않고 모의를 접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좀 얼굴 붉혀지는 이야기지만 그러지 않기를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 이미 난 내 책에서 내 지나 온 삶을 언뜻언뜻 얘기했으니 아쉬움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저자는 언제고 본격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써 봐도 좋지 않을까? 그렇잖아도 그는 <황해문화>를 벌써 20년째 편집 일을 하고 있다. 매번 그것을 발행하기까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긴 하다. 모르긴 해도 그는 아마 10년 내에 이 일을 감행하지 않을까?

 

프란츠 카프카는 말했다. 우리가 읽는 책이 단 한 주먹으로 정수리를 갈겨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 하러 우리가 책을 읽는가?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만 한다고. 책을 많이 읽는다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독서를 그저 취미로 생각하는 사람에겐. 또 아직 자신의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은 책을 만나지 못한 사람에겐. 한 권의 책이 나의 내면을 깨는 도끼가 되려면 우린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른다. 나의 내면은 그렇게 쉽게 깨지는 것이 아니며 깨줄 책은 쉽게 찾아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가능성을 믿기에 우린 꾸준한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닐까? 동시에 독서는 부단한 축적물이기에 그런 책을 못 만났다고 낙심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그거야 말로 오만일 것이다.

 

책을 꾸준히 읽어 온 사람이라면 그가 어떤 책을 읽었던 크게든 작게든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있다. 그것이 뭔가의 행동을 하게 만들고 결정짓게 만든다. 그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살아 온 사람들은 더더욱. 그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어려서부터 책을 읽어왔고 커서는 노동을 하다 대학을 갔으며 거기서 운동(데모)을 하게 되었다고. 그리고 몇 개의 경로를 거쳐 지금의 <황해문화> 편집장이 됐다고. 그게 과연 책없이 가능했을까?

 

젊었을 땐 책을 전투적으로 읽었던 것 같다. 책을 무조건 빨리 많이 읽고 싶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나이 드니 그것이 좀 달라졌다. 저자가 왜 이렇게 썼을까를 생각해 보고, 나라면 이것을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읽은 책에 나의 지나간 삶을 조금 조금씩 묻어 놓는다. 매일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은 그것 자체가 하나의 제의가 되고, 그가 쓰는 문장은 제물이 된다. 그래서 나이 들어 갈수록 그의 글은 더 깊어지고, 비문이 적어지며, 신중해진다. 이것이 바로 앞서 말했던 카프카의 말과 일맥상통하지 않을까? 또한 그건 정확히 자서전이 아닌 고백록이나 참회록쯤이 될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 자기 삶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거나, 이 책처럼 책속에 넌지시 묻어놓는 저자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근한 예로 (이미 쓴 적이 있긴 하지만)나는 몇 년 전에 읽은 인디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 이석원의 두 번째 에세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에세이가 소설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되는가 다소 놀란 적이 있다. 물론 그것이 어떤 사람 보기엔 다소 부담스럽게 여길지 모르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난 이렇게 솔직한 글을 쉽게 내칠 수가 없다.

 

속 얘기는 웬만치 친하지 않으면 얘기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책에 썼다는 것은 그 책을 읽은 독자하고만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자와 작가는 한층 더 가까운 사이가 된다. 또 그것은 그만큼 자신을 객관화 할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내가 책을 보는 기준이 달라진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떤 책은 정말 지적이고 매끄럽긴 한데 삶이 드러나지 않는 책이 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독서를 하고 책을 썼을 텐데 삶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독서의 재생산물인 글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작가가 아닌 독자가 쓰는 것으로서(독후감이 됐건 서평이 됐건) 어떻게 나의 삶을 드러내지 않고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지적 허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많이 감동하는 책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의 저자도 그런 말을 말했다. 교양이란 한 인간을 세상 속에서 자유로운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만드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진정한 소유는 이 세계 속에 나만의 고유한 자리를 갖는 것이요,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다.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것(교양)을 바탕으로 세상과 교류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의 세상을 소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314p) 이것은 책을 읽지 않고 사색하지 않는 사람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마침내 그만의 바람구두연방의 문화망명지-사람으로 본 20세기 문화예술사란 그만의 세계를 탄생시켰을 것이다.

 

블로그 활동을 하다보면 자신의 본명 대신 닉네임을 쓰고, 자기 블로그에 이름을 붙이는 경우를 보게 된다.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내 블로그에 이름 하나 제대로 붙여줄 생각을 못했다.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라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물었던 것 같다. 닉네임의 뜻이 뭐냐고. 그런데 그에게 만큼은 묻지 못했던 것 같다. 바람구두야 천재 시인 랭보에게서 따온 것일 테고, 그 긴 블로그 이름은 뭘 뜻하는 거냐고 묻지 못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블로거들이 물어봤을까? 거기에 나의 궁금증까지 더하기가 뭐했다. 그의 블로그를 탈탈 뒤져보면 알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 자연스럽게 알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국 그 기회를 놓친 것 같아 아쉬웠었다.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의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의 서평 글에서. 그는 말한다. 우리를 에워싼 체제의 외부를 상상하려면 너무도 익숙한 기존의(자본주의적) 문화와 결별하는 절차와 형식이 필요하다. 나는 그것을 문화망명이라고 불렀다.(290p) 다른 설명이 뒤에 나오지만 이것만 읽어도 그의 서재명의 뜻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언제나 그렇지만 그의 글엔 그다운 저항 정신이 깃들어 있다.

 

한 권의 책을 어떻게 읽을 것이냐는 사람 저마다 선택하기 나름이겠지만, 확실한 건 그 책에 대한 사전 정보와 얽힌 사연을 알게 되면 훨씬 의미 있고 읽기가 수월해진다. 그래서 이런 서평집이 요긴해지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편집의 달인(?)답게 읽은 책을 요약을 잘 해 놓고 있어 굳이 그 책을 힘들 게 읽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물론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책을 직접 읽어보지 않고 아는 척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냐고 할지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언제나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다. 독서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효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반대로 이게 그런 내용이었어? 하며 읽어 볼 마음이 비로소 생기게 만드는 것도 있다. 그래서 서평집은 유용하다. 사실 저자와 나는 독서 취향이 많이 다르다(물론 저자가 한 수 위다). 다르기 때문에 책을 보는 시야가 더 넓어진 느낌이었고, 실제로 몇몇 책은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결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책이었을 텐데 보관함에 넣어 놓기도 했다. 한마디로 서평집은 지은이의 독서와 삶이 녹아져 있어 읽는 맛이 다르다. 우리가 이런 기쁨과 보람이 없다면 뭣 때문에 서평집을 읽겠는가? 이 책은 특히나 더 기쁘고 반가웠다.

 

이 책을 읽으니 앞으로 당분간은 촉을 곤두세우며 저자를 궁금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는 또 어디선가 변함없이 열심히 책을 편집하며 왕성히 글을 쓰며 부단히 소통을 꽤하고 있을 것이다. 난 그런 그에게 말없는 응원과 우정 어린 관심을 보낼 것이다.

언제나 건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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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3-11 12: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엔 하루에 백권 이상이 출간된다는 말을 듣고(요즘은 하루에 몇 권 출간되는지 모르겠고.) 책의 홍수 시대에 사는 것 같아 꼭 책을 낼 만한 역량 있는 사람만이 책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다르게 생각해요.
모두가 한 번씩 책을 내서 자신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 뭐가 반성할 점이고 뭐가 후회할 점인지 아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나만 해도 글을 쓰면서 저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거든요. ㅡ그런데 이게 착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성추행 사건이 있던 누구가 그렇게 많은 책을 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그 사건으로 인해 그 책들을 수거해 판매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출판사의 결정 소식을 들었어요. 그의 글쓰기는 그를 조금도 성숙시키지 못한 모양이에요. 그의 글쓰기는 가짜였던가 봐요. 그래서 저는 헷갈리게 되었어요.

stella.K 2018-03-11 18:38   좋아요 0 | URL
저도 언니와 같은 생각을 해요.
분명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어 좋은 경험이 되죠.
그런데 책이라는 게 읽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도 참 그렇더라구요.
결론은 모두가 내되 역량있는 사람이 되서 내야되는 것 같았요.ㅋ

예전에 어떤 분이 그런 말씀하더군요.
어떤 사람은 멋진 집을 지어놓고 막상 자신은 그집에서
살지 않는다고.
자신이 쓴 글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상누각인 거죠.
그글이 아무리 훌륭해도.
사상누각이 아니라 결국 자신을 해치게 되는 거죠.
이번 미투 운동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큰 것 같습니다.

2018-03-11 12: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3-11 18: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천로역정 (양장, 조선시대 삽화수록 에디션)
존 번연 지음, 김준근 그림, 유성덕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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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실 이 작품은 오래 전에 한 번 읽은 적이있다. 기독교인이라면 한 번쯤 읽게되는 작품아닐까? 세상에 책이 하도 많아 아무리 좋은 책이라도 두 번 이상 읽기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다시 읽게된 것은 겉표지에도 나와 있지만 조선시대 삽화가 무려 42점이나 수록되어 있다는 말 때문이기도 하며, 평양 장대현교회의 길선주 목사님이 당시 우리말로 번역된『텬로력뎡』을 읽고 1907년 평양 대부흥을 이끌어 냈다는 말 때문이기도 하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사실 난 이 시기가 궁금하다. 그것은 언젠가 우연히 손양원 목사의 전기를 읽고 난 후부터였는데, 손양원 목사가 신앙의 절개를 지키며 순교할 수 있는 밑바탕엔 바로 이 평양 대부흥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평양 대부흥의 밑바탕엔 이 책의 영향이 있었다니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처음 읽었을 땐 이런 배경 없이 읽었는데 배경을 모르고 읽을 때와 배경을 알고 읽을 때의 느낌이 다를테니 감흥도 남다르지 않을까? 

 

장정도 최대한 옛날 조선시대 책 분위기가 나게 꾸몄다. 옛날 문자가 발달되기 전에는 '텬로력뎡'이라 썼다는 것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이 책이 처음 번역된 것은 1895년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James Scarth Gale)이 부인 해리엇(E. G. Harriet)이 이창직의 도움을 받아 번역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번역된 서양 소설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최초의 번역 소설이란 말은 나도 오래 전에 들은 것 같다.

 

이 책은 한마디로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순례자가 온갖 어려움과 유혹속에서도 믿음을 지켜 마침내 천국에 이른다는 단순해 보이는 설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장면이나 이야기 흐름속에 성경 말씀을 정말도 꿰었다는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도대체 성경을 몇 번 읽으면 이런 서사가 가능한지 모르겠다. 

 

사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기로 하고 그 믿음을 일생 동안 믿음을 지켜 나간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 중간에 믿음에 대한 회의와 위기가 오기도 하고, 그래서 믿음의 길을 떠나기도 하고 떠났다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잘 믿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포기하고, 그 반대로 살아 있을 땐 온갖 방탕한 생활을 하다 죽는 마지막 순간에 주님을 영접하는 사람도 있다. 가끔 이를두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인간적으로 이중 가장 좋은 건 세상에서 해 볼 거 다해 보고 마지막에 예수님 믿고 턱걸이로 천국 들어가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고. 그만큼 믿음을 지키며 산다는 게 어렵다는 얘기다. 

 

믿음은 마라톤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래서 멘토가 필요하다. 더구나 100세 시대다. 옛날엔 신앙 하나면 그 모진 세월을 견딜 수 있고 핍박도 감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신앙 말고도 위로 받고 즐길 수 있는 것들이 무궁구진하게 많아졌다. 또한 온갖 이단 사설도 세분화되고 조직적이 되었다. 또한 교회를 다니기는 하지만 교회안에서도 방황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가운데 신앙의 순수함을 잃지 않도록 격려 받는다는 건 얼마나 필요한 일인지 신앙을 가져 본 사람은 알 것이다. 그래서 천로역정은 시대와 상관없이 오늘 날에도 신앙인이라면 성경과 함께 꼭 읽어야 할 필독서다.   

 

책에 나온 기산 김준근의 그림을 처음에 보면 김홍도를 연상케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풍속화가였다. 그런데 또 자세히 보다보면 중국의 느낌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것으로 봐 기산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텬로력뎡>은「천로역정(합질)」이라는 이름으로 2017년 5월 29일 문화재청에 의해 등록문화재 제685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소장 가치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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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2-13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아는 분의 초대로 어느 교회에서 천로역정 연극을 보았어요.
큰 내용은 알지만, 연극으로 바로 앞에서 보는 느낌은 또 달랐던 것 같아요.
한글의 예전식 표기법은 조금 더 중국어의 느낌에 가까운 것 같고, 그리고 조금 더 오래된 책 같은 느낌이 듭니다.
stella.K님, 좋은 하루 보내세요.^^

stella.K 2018-02-13 16:51   좋아요 0 | URL
아, 연극으로 보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이 대본처럼 구성이 되어 있어서
연극하기 딱 좋겠다 싶더군요.

그런 오래된 느낌 때문에 소장하고 싶더라구요.^^

2018-02-14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14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02-14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웃겨요. ˝가장 좋은 건 세상에서 해 볼 거 다해 보고 마지막에 예수님 믿고 턱걸이로 천국 들어가는 게 제일 좋은 것 같다고.˝ - 저도 이런 생각을 했던 1인이거든요.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웃겨요. ㅋ

stella.K 2018-02-14 13:51   좋아요 0 | URL
ㅎㅎ 웃긴가요? 그런 생각 누구나 하지 않나요?
저는 13살 때부터 신앙 생활을 했는데요
진짜 너무 일찍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좀 누릴 거 다 누려보고 이 나이쯤 시작해도 늦지 않을 텐데...ㅋㅋㅋ
 
고백 에클레시아 -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
양광모 지음 / 선율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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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역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그냥 교회 예배만 왔다 갔다 하니 무슨 사역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카페 목회가 있다는 것도 이 책을 읽었을 때야 알게 되었다. 하긴 예배를 꼭 교회에서만 드리라는 법 있나? 벌써 오래 전부터 서울의 알만한 교회는 예배당이 아닌 학교 강당을 이용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시다. 교회만 계시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도 계시고, 병원, 교도소, 양로원 어디에나 계신다. 그러니 카페라고 계시지 않을 리 없다. 결국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인정한 사람들의 모임이니 장소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다. 그 옛날 그리스도인이 핍박을 받을 때 동굴에서도 예배를 드렸다. 더구나 북한의 지하 교회 사람들은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알 수 없다. 무엇보다 21세기다. 최첨단 4차 산업을 부르짖을 때 교회는 여전히 20세기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런데 난 왜 이 책에서 사역의 다양성과 희망을 보기 보단 왠지 모를 우울함과 답답함이 느껴지는 건 왜일까? 물론 처음에는 어떤 희망을 가지고 읽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기존의 것과 무엇이 다른지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 내가 현재 너무 건강하고 스마트한 교회를 다녀서일까? 아니면 오랫동안 예배만 드리는 선데이크리스챤으로 전락한 탓일까? 아니면 욕하면서 닮는다고 나도 한때는 모든 교회의 칭송을 받는 교회를 다녔지만(현재도 다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하기는 정말 쉽지 않아 울기도 많이 울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그러다 어느새 동화되고 닮은 것인가? 그러나 나는 평신도로서 그렇게 상처 받고, 울면서 교회를 다닐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선 한 번도 회의를 해 본적은 없다. 싫으면 그 조직에서 나오면 그만인 것이지 교회 자체를 부정하고, 신앙을 배반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과의 갈등의 문제였지 조직의 문제는 아니었다.

 

오늘 날 대형 교회가 비판을 받고 있다. 하도 비판을 받으니까 이것도 하나의 트렌드는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분명 대형 교회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형 교회는 문제가 없는가?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 모이는 곳은 어디나 문제가 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말하는 사람이 있다. 대형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소형 교회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확신하는가? 그렇게 말하는 건 말의 오판이며 논리의 비약이다. 하나님이 언제 그에게 이것을 판단하고 비판하라고 명령하셨는가? 요는 그도 교회를 다닐진대 비판하는 데는 빠르고 기도하는 데는 느리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그것부터 점검해 봐야할 일은 아닐까?

 

이렇게 얘기하면 내가 무슨 대형 교회를 옹호한다고 오해할까봐 그것도 조심스럽긴 하다. 요는 그 사람 마음속에 하나님이 계시면 그런 과격하고도 이분법적인 비판은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토기장이의 비유에 대해서 나온다. 토기장이가 그릇을 빚을 때 어떤 그릇은 귀히 쓰일 그릇으로, 어떤 건 천히 쓰일 그릇으로 빚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토기장이가 그 용도에 맞게 빚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대형 교회의 비판이 어디에서 나왔겠느냐는 것이다. 상대적인 열등감을 느끼는 소형 교회 목회자들에게서 나왔을까?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대형 교회 자체의 내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또한 동시에 사이비 종교의 음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은 영적으로 봤을 때 분열케 하는 사탄 마귀의 짓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대형교회의 부정과 부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 모범적인 교회가 어느 날 사회적 이슈가 되고 비판을 받을 때 평신도로서 그것을 감내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난 그런 교회를 지금도 다니고 있다. 나라고 그런 교회 다니고 싶겠나? 그런데 나도 잘 모르겠다. 왜 다니고 있는지. 늘 다니던 교회를 다니는 관성 때문이라고 말 한다면 섭섭한 말이 될 것이다. 그 교회 말고도 좋은 교회는 얼마든지 있다. 그중 하나를 선택에 옮겨가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안 됐다. 다른 건 고사하고 은혜 받은 교회는 함부로 못 떠나겠는 것이다. 선대 목사님이 한때 기독교계 명망 있는 지도자였고, 그분의 기독교계에 미친 설교와 공로라는 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그런 교회에서 조차 상처를 받았다. 상처만 받았다고 한다면 못 다닐 교회가 내가 지금 현재 다니는 교회다. 분명 은혜를 받았기에 나는 교회가 공격을 받고 비판을 받을 때 같이 비판하지 않고 기도할 수 있었다. 이건 또 신비라고 밖에는 얘기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왜 이런 말을 구구하게 하는지 모르겠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교회 사역자들은 평신도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목회자들은 교회는 하나님이 지으시고 있게 하셨다고 교인들에게 철석 같이 가르쳐 놓고 그들은 정작 교회에 있지 않은 것 같다. 평신도는 교회가 어려움에 빠졌을 때 교회와 함께 순교할 마음이 있는데 과연 교회 사역자들은 그럴 마음이 있는지 묻고 싶기는 하다. 새로운 목회를 해 보겠다고 잘 나가던 교회를 사임을 했다. 거기에 나름의 이유와 기도로 씨름한 나날과 명분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떠나면서 지금까지 알아왔고 격려해줬고 격려 받았던 교인들을 두고 발길이 떨어지던가? 잘 나가는 교회 목사들은 떠나는 뒷모습도 멋이 있더라. 그리고 당장 떠나지 않더라도 교회 안에 서서 각 지역을 거점 삼아 2년마다 한 번씩 뺑이 돌리더라. 그러니 목사와 평신도 간에 무슨 정을 쌓겠는가? 저 목사는 길어야 2년 후면 헤어질 사람. 물론 기도 부탁 정도는 하고 그러면서 사람을 파악하는 정도지 오래 두고 볼 사이는 못 되더라.

 

남자들은 가르치는 것을 좋아한다고, 어디나 그렇지만 교회도 남성 목회자가 다수를 이루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비해 평신도는 여성이 많다. 언제나 그렇지만 여성은 대화를 원하는데 남자는 지시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지 듣는 귀는 발달되지 못했다. 내가 이 책이 가면 갈수록 별로라고 생각했던 건 ‘6평 카페의 기적 같은 이야기라고 했으니 생생히 살아있는 그야말로 활어회 같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섬기던 교회에서도 내내 가르쳤을 목회의 신학적 원리를 이 책에서조차도 반복하고 있더란 것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의 이야기는 없고, 교회에서 세례 받을 때 간증문처럼 그 카페를 다니면서 은혜 받은 성도들의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었다. 그게 나쁘다는 얘기가 아니다. 귀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이 기존의 교회와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뭔가 형식과 틀을 과감하게 깰 필요도 있을 것 같은데 교회의 틀을 그대로 가지고 소형화시킨 건 아닌지.

 

나름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 목회자들은 제사장의 옷을 벗고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즉 말씀만을 대언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성도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중간자적 목회자의 탄생을 기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그것에 근접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글속엔 아직도 뭔가 자신이 없던 걸까? 뭔가 끊임없이 자신의 목회 형태를 설명하려고 하고, 합리화하려고 하는 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마치 기업을 세일즈 하는 것처럼. 하긴 이제 5년 된 사역이라고 하던데 증명 보다는 설명이 더 많은 시기 아닌가? 한 사역이 뭔가를 증명하려면 적어도 1015년은 두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나는 카페 목회를 반대하는 건 아니지만 우려하는 것도 없지 않다. 결국 거기서 은혜 받고 교인이 된 사람들이 훗날 어떻게 될 건지. 물론 그것까지 신경 쓸 건 아닌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성 교회에 대한 편견만 높아져 결국 진입하지 못하고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눌러 앉을 건지. 물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와 목적이 또 다른 측면해서 오염되고 훼손되는 건 아닌지. 분명 기성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고 교회가 새로워지려는 노력은 명백히 필요한 거지만, 교회는 기성 교회가 아니면 배울 수 없고 알 수 없는 신앙의 깊이와 넓이가 있다.

 

책을 보면 교회가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고 지적하는 대목이 나온다. 난 이게 왜 문제가 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옛날 한국 초대교회 시절 사경회를 하면 거의 하루 종일 했다고 한다. 얼마나 말씀 듣는 게 좋으면. 게다가 우리나라 교육열 끝내주지 않는가? 물론 저자가 지적이 처음도 아니고 나름 타당성은 있다. 하지만 그게 본질적인 것인가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는 있다. 평신도들은 옛날의 평신도들이 아니다. 옛날엔 사회가 단순하지만 지금은 복잡하다. 그러므로 뭐든 취사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너무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고 죄의식에 시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문제는 뭐든 편중이고 편식이 문제 아닌가?

 

이런 식으로 해서 마치 기성 교회는 없어져야 할 암적인 존재로 몰아가는 건 아닌지? 그리고 그 주범(?)이 한때 그런 교회에서 일했던 사람이라면 그 민망함은 또 어쩔 것인가? 그건 마치 괜찮은 집을 지어놓고 게스트 하우스나 마당에 텐트쳐 놓고 지내는 집주인은 아닌지.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다 못 짓고 그의 아들 솔로몬이 지었다. 모름지기 왕이 지었으니 얼마나 화려했겠는가? 하지만 우린 솔로몬이 화려한 성전을 지었다는 것뿐 그 성전이 어떻게 운영이 되었는지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오늘 날 교회가 너무 화려하다고 사회에서 뭐라고 하면 그것에 동조한다. 교회는 화려할 수도 있고 아담할 수도 있다. 그게 뭐가 문제가 되는 것일까?

 

교회는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과 성도를 위한 공간이다. 거기에 존재하는 목회자와 주요 임직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며 관리자일 뿐이다. 오늘 날 교회가 목회자의 권한이 큰 건 유감이긴 하다. 아마도 그건 우리나라의 가부장 문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또 그것이 아니면 성도들이 목사를 쥐고 흔든다. 언제나 그렇듯 조화는 없고 극과 극만 있다. 중요한 건 교회에 깃든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것을 회복하기 위해 기존 교회에 남아 있어야 하는지 개척을 해야 하는 것인지는 분명 그 목회자의 몫일 것이다.

 

교회도 조직이고 보면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조직이 섞지 않으려면 자정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 자정 능력이 그 조직의 몇 퍼센트면 가능하겠는가? 5 퍼센트다. 이건 그냥 상징적인 숫자일 뿐 진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근거는 있다. 성경을 보면 의인 다섯이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을 했다. 오늘 날 교회가 그토록이나 문제가 많다면 벌써 없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줄어들지언정 존재 자체는 사라지지 않았다. 왜 그럴까? 한 가지는 얘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러 방면에서 기도하는 사람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치유하는 교회를 자처했던 모 교회는 정말 유독 새신자 보다는 기성 신자들이 많았다.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오히려 치유 받고 섬기던 교회로 돌아가라고 했다. 모순을 지적할지 모르지만 그 교회도 나름 큰 교회다. 어느 교회는 새신자만 등록 가능한 교회도 있다. 그 교회도 나름 큰 교회다.

내가 판단할 일은 아니지만 어떤 형태의 목회가 됐던 사명을 받아서 하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맡겨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 문제가 너무 많아서 그에 대한 대안으로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한다. 물론 세상적으론 틀리지 않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하나님 편해서 그게 과연 최선인지는 따져 봐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하는 것이 나중엔 차선의 것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나는 저자의 목회를 비판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단지 책을 읽어 보았더니 평신도에 대해 잘 모르기는 기성 교회 목회자와 무엇이 다른지 몰라서 나의 평소 생각을 밝히는 것뿐이다. 새로운 형태의 목회를 하던 기성 교회 목회를 하든 크게 봤을 때 평신도는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단지 선택만 할 뿐이다. 결국 목회자란 그가 옳은 선택, 옳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도전을 주고 협력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아직도 목회자는 평신도가 자신의 사역에 협력해 주길 바라고 있다. 그게 잘못 됐다기 보다 선후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아무튼 저자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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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2-08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규모가 큰 교회보다 작은 교회가 문제점이 더 많을 듯합니다. 한 사람의 권력이 크게 작용하는 곳도 역시 작은 교회일 듯해요.
정들만 하면 2년 후 떠나는 목사 - 이것은 한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하는 걸 피하려는 목적도 있는 건가요?

stella.K 2018-02-08 13:29   좋아요 0 | URL
캬~! 역시 예리하시군요.
그런데 알려지기는 큰 교회가 문제가 많은 것처럼
그렇게 보도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작은 교회라고 문제가 없겠냐는 거죠.
마치 작은 교회는 동정을 받아야할 거처럼 되고.
물론 작은 교회에서 힘들 게 목회하시는 분들 계시죠.
그니까 제 말은 교회뿐 아니라 무엇을 보더라도
장단점을 보고, 긴 안목에서 보고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완벽한 조직이나 단체는 없으니까요.

그건 맞아요. 그런데 그것도 장단점은 있는 거죠.
같은 사람 2, 3년 봐주기는 어려울 수도 있거든요.
저도 어떤 일을 하건 그 조직에서 2, 3년 이상
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제가 워낙에 그런 체질이 못 되서
상처 받는 일도 많답니다.ㅋㅋ

2018-02-08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2-08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련꽃 필 무렵 당신을 보내고
이춘기 지음, 이복규 엮음 / 학지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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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담한 마음으로 이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이 일기의 주인인 이춘기 옹은 아내가 암 발병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전엔 왜 일기를 안 썼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래도 그가 왜 그때를 기점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했는지 알 것도 같다. 물론 아내의 발병 사실에 만감이 교차했겠지만 그렇다고 속절없이 무너질 수마는 없지 않았을까? 스스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는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읽는 나는 왜 이리도 마음이 먹먹하던지. 뭔가 동화된 느낌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이 책을 20대 초반에 읽었더라면 그냥 그런가 보다 했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까운 누구도 불치의 병으로 죽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때까지 불행은 다 나와 한 다리 건너의 사람들의 것인 줄 알았다.

 

당시는 1960년대가 막 시작됐을 때다. 나의 아버지 돌아가셨던 90년대도 암은 어려웠는데 그 시절은 더 암담하지 않았을까? 시간차만 있다뿐이지 그나 우리 집이나 하루 세끼 밥 먹고 돈 버느라 일했고, 밤이면 자는 똑같은 일상을 살았을 텐데 이렇게 누구는 병이 들고, 누구는 그 병든 가족을 간호해야하며 고통을 견뎌내야 한다는 게 참 아득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이춘기 옹의 일기는 참 담담하고 담백하다.

 

내가 남의 일기를 이렇게 문학으로 향유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물론 최근 카프카의 일기를 읽어 본 적이 있다. 남의 일기를 읽는 것만큼 관음의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는 게 어디 그리 흔한가? 그런 기대를 가지고 카프카의 일기를 읽기 시작하다가 그만 학을 떼었다. 어찌나 어렵고 난해하던지. 카프카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으면 모를까 나 같이 지식이 일천한 사람은 멋모르고 펼쳐들다 낭패 보기 쉽다. (그건 또 어쩌면 시간에 쫓겨서 읽느라 더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기억 속엔 사춘기 때 읽었던 <안네의 일기>를 읽었던 감동은 여전하다. 그렇게 엄혹하고 참혹한 세상에서도 그녀의 일기는 얼마나 순수했는지. 하지만 그것이 끝이었던 것 같다. 그나마 최근 들어 유명 작가의 일기가 나오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한동안 일기를 문학의 범주에 넣어 주지도 않았(던 것 같). 이 책 말미에도 이춘기 옹의 일기를 엮은 이복규 교수가 그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 책은 우리 학계에서 비교적 열세에 있는 일기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은 일기인 만큼 이춘기 옹의 개인 일상사를 다루고 있지만 아내의 간호기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물가, 사람 사는 표정,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한 이름 없는 사람으로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다루고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처럼 사대주의가 강한 나라가 또 있을까?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말의 값어치가 달라진다. 어느 분야든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특히 역사를 보는 시작은 더하다. 전문가가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것만을 들으려고 하고 믿으려고 한다. 그래서 너무 한정적이다. 예를 들면, 이 책 읽다보면 1997625일에 이춘기 옹이 쓴 6.25 회상 부분이 나온다. 한 개인으로 그날이 어땠는지를 짧지만 강렬하게 쓰고 있다. 벌써 29년이 지난 시점인데도. 거기에 그런 말이 나온다.

......아이들이 개 두 마리하고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난데없는 총성이 나더니 마당의 개 두 마리가 그만 피를 토하고 죽어 나자빠지고, 아이들은 마당에 그대로 쓰러졌다(354p).

얼마나 놀랍고 사실적인가? 그 일이 일어났던 똑같은 시간에 어떤 사람은 또 어떤 것을 보고 어떻게 쓸지 새삼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인지하는 것이야 똑같겠지만 보고 느끼는 것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우린 사실이란 관점에서 이것을 좀 더 넓게 수용해야할 필요가 있는데 개인이야 어떻든 오직 교과서에만 의존하려고 하니 우린 역사를 너무 소극적이고 소홀하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삼 개인의 6.25 회상기란 책이 있으면 한 권 사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시대를 표현한다면 나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 다음 날을 회상하고 싶다. 그날 내가 일기를 썼는지도 기억에 없다. 워낙 오래 전 일이라. 하지만 그 시절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열심히 일기를 썼던 것도 사실이다.

 

이 책이 기억해 줄만한 건 이춘기 옹이 그날의 시세를 일기에 자주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화폐개혁이 있기 전이라 원 대산 환으로 계산을 했다. 그리고 62년인가? 그때 화폐 개혁이 되면서 원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게 좀 이해가 갔다. 당시론 복숭아를 재배해 그것으로 살림을 꾸리곤 했는데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을 테니 돈의 들고 남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나의 아버지도 자수성가한 자린고비 스타일이라 병으로 사경을 헤매시기 전까지 조그만 수첩에 돈의 지출내역을 꼬박꼬박 적으셨던 기억이 난다. 그걸 지금도 가지고 있었다면 좋은 기록이 되지 않았을까? 일기였다면 내가 어떻게든 보관했었을 텐데 저런 건 써서 뭐하나 구두쇠니까 저러시겠지 하며 관심도 갖지 않은 게 못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난 중학교 들어가면서 일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야 방학숙제로 썼으니 그걸 일기라고 할 수도 없고 그걸 쓴 노트는 남아 있지도 않았다. 그런데 확실히 중학교는 초등학교완 달라도 많이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쓰기 시작한 일기 쓰기가 성인이 되고부터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내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기를 쓰지 않았다. 그런 사람을 쫓은 건 아니지만 어떤 신념 비슷하게 안 쓰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죽을 때 가급적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일기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일기를 쓰는 많은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이 이 세상을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이 친구는 그 반대였던 것이다. 그래도 너만의 고백이나 정리가 필요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러자고 살아 있는 사람에게 짐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되면 그 일기를 태워줄 사람이 필요한데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견 타당한 것도 같았다. 아니 오히려 멋있게 보였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쓴 일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난 이때부터 일기에 대한 애증이 시작이 된 같다. 정말 나도 그 친구처럼 죽을 때 될 수 있으면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과 기록의 의무와 흔적이 서로 충돌했다. 그런 와중에 인터넷에선 블로그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이걸 쓰니 굳이 일기라고 따로 쓰고 싶지 않았다. 이 책의 엮은이도 노트든, 스마트폰이든 블로그든 어디든 열심히 기록하라고 권한다. 그런데 일기를 블로그에다 쓰는 건 간단치가 않다. 그건 낙서나 잡담의 의도가 많고, 아무리 짧은 글이라도 몇 번의 정서가 필요하다. 또 아니 할 말로 함부로 대놓고 누구 욕도 못하겠다(물론 비밀글로 쓸 수도 있지만 블로그의 기본은 글을 공개한다는 것에 있다). 책엔 이 옹이 재혼녀와 의붓딸에 대한 미움도 가감 없이 쓰곤 하는데 말이다. 그런데 고전적 일기 쓰기는 그것이 가능하다. 누가 문법 틀리고, 철자 틀려도 뭐랄 사람이 없다. 요즘엔 다시 고전적 일기 쓰기를 하고 있는데 블로그에 쓰는 것 보다 훨씬 편한 마음으로 쓸 수 있어 좋다. 하지만 난 엮은이의 말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무엇이 됐든 써라다.

 

사실 일기는 어떠한 비판이나 가치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 봐주는 것이 쓴 사람에 대한 예의 같기는 하다. 그런데 아무래도 시대 차와 성의식의 차이로 인한 해석과 가치 판단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는 이 옹이 아내를 잃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도 이해가 갔지만, 이후 재혼과 삼혼을 하는 동안 결혼에 대한 생각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새삼 놀랍기도 하고 좀 아쉽기도 했다. 그것은 그때는 가부장이 문제가 되지 않았던 시대였고, 또 그러니만큼 여성의 지위가 그리 높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한다. 그는 그저 가정을 건사할 여인이 필요했다. 식모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그래서 결국 재혼녀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데 그가 일기 중 성경 잠언을 인용한 바 있는 이 현숙한 여인이 당시의 남자들에게 어떻게 이해됐을지 알고 새삼 놀라웠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봐줄 필요는 있어 보인다. 그래야 연구 가치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한 가정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짐, 두 어린 아들에 대한 애틋함, 하다못해 기독교인으로서 너무 바빠 예배를 드리지 못한 생활인으로서의 버거움이 일기에 올올이 드러나 찡했다. 문체가 좋은 글만이 문학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진솔한 글을 읽으면 자신이 평범해서 초라하다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런 평범함에서 오는 것이다.

 

난 이 책 계기로 엮은이 말대로 우리나라가 개인의 일기를 활발히 연구하는 풍토가 조성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이것조차도 사대주의에 빠져 유명하고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사람의 일기만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야말로 초야에 묻힌 한 노인의 일기고, 기록이며 미시사이기도 하다. 그가 원래 유명해서가 아니라 30년을 일기를 쓰다 보니 유명해졌다. 작지만 한 가지 일을 매일 성실하게 한다는 건 중요하다. 그러므로 일상이 무료하다, 의미가 없다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범한 사람은 평범함에 묻혀 사는 거지만 그 평범함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는 걸 이춘기 옹은 몸소 보여줬다.

 

사실 처음엔 책의 두께가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이춘기 옹이 30년간 쓴 것에 비하면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다. 좀 더 편집을 다양화 하거나 내용이 겹치는 것을 제외하고 그대로를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러기엔 이 옹이 유명하지 않아서인지 뭔지 모르게 아쉬웠다. 하지만 하루를 의미 없이 보냈다는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그러지 않으려면 관찰하고 일기를 쓰라고. 그것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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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2-02 21: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그 너머에서도 의미를 찾으시며 읽으시는 것 같아요.
작고 사소한 것 같아도 꾸준히, 성실하게 한다는 것, 중요한데 갈수록 그 가치를 알아주지 않는 것 같지요? 한방에 대박을 터뜨려야 성공한 것으로 보는 사회 풍토가 안타까워요.
저도 6살때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꾸준히 써왔는데, 어릴 때 쓴 그 그림일기장을 어머니께서 이사하시면서 다 버리셨다는군요 ㅠㅠ

stella.K 2018-02-03 18:19   좋아요 0 | URL
일본은 그런 풍토가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작고 소소해도 재밌고 즐거우면 기꺼이 읽어 주잖아요.
우리나라는 쓸때없이 대륙적 기질이 있어서일까요?
그냥 그렇게 봐주기로 했습니다.ㅋㅋ

이책 정말 편안하게 읽혀서 좋았어요.
일찍 상처하고 가장으로 참 부단히 노력하며 살았구나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아 마땅하고 노년엔 복락을 누려야 하는데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게 참 아쉽더군요.
그런데 우리네 인생이 다 비슷하지 않겠어요?
그냥 위로하고 위로 받으며 살면 좋겠어요.^^

2018-02-03 0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2-03 18:22   좋아요 1 | URL
아, 그랬나요? 옛날 선비는 그랬군요.
우린 기록을 함부로 다루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이춘기 옹의 일기가 이렇게 나올 것 같으면
더 많은 사람들의 일기가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근데 일기는 잘 쓰고 계십니까?
우리 역사 한번 만들어 보십시다요!ㅋㅋ

2018-02-03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2-03 18:28   좋아요 1 | URL
ㅎㅎ 그건 운이 좋아서 낸거죠.
무엇보다 저 같이 초야에 묻힌 사람의 책이
뭐 그리 대단해서 후속을 내자고 하는 출판사가 있겠습니까?ㅋ

그런 건 고사하고 저도 일기 쓰고 있는데
나중에 저 죽어서라도 책 내자고 하는 출판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ㅎ
님도 건강하시죠? 댓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18-02-0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K님, 오늘은 입춘입니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올해도 좋은 일들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18-02-05 13:07   좋아요 0 | URL
입춘대길 건양다경. 좋은 말이죠.
서니님도 그리 되시길 빌어드립니다.^^
또 새로운 한 주입니다. 힘차게 시작하시길!

페크pek0501 2018-02-06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뭔가 풀어 내서 속 시원해지는 느낌이 좋아서 일기를 씁니다. 제가 나중에 보려고 기록을 위해 일기를 쓰기도 하지요.
제가 죽은 다음에 글이 흔적으로 남는 건 싫어서 만약 죽음이 가까이 오고 있다고 느끼면 가족에게 제가 쓴 모든 것들을 태워 없애 달라는 유언을 할 것 같아요. ㅋ

stella.K 2018-02-06 20:36   좋아요 0 | URL
오, 그러지 마세요.
그리고 가족이 듣지도 않을 거예요.
유산으로 남겨야죠.ㅋㅋ
 
함께 떠나는 문학관 여행
김미자 지음 / 글로세움 / 2018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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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발길 닿는 대로 나그네 같이 하란 말도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다. 여행 고수이거나 바보이거나. 나는 여행 고수가 아니니 바보가 되지 않으려면 뭔가 목표 내지는 목적을 세우고 이정표대로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내가 목적을 세운다면 어떻게 세워 보겠는가? 아무래도 난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문학 기행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여행이라는 것도 그저 단순히 그곳에 그게 있다더라는 주마간산식의 여행 역시 여행고수거나 바보들이 취할 자세인 것 같다. 뭘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그것을 알고 떠나는 것과 모르고 떠나는 건 천지 차이일 것이다. 그러니 이런 책이 좋을 것이다. (딱 아는 척 하기에도 좋다.)

 

언제 한 번 이런 책이 나온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모르긴 해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 국한되어 있거나, 어느 한 문학인을 집중 조명하기 위해 쓰인 책은 아닐지. 그런데 비해 이 책은 우리나라 38군데 44명의 문학인을 간결하면서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놨다. 그야말로 음식으로 치면 잘 차려진 뷔페 같다.

 

작가는 또 언제 이런 곳을 파고 다녔을까? 처음엔 혼자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안 되겠는지 남편이 따라 나서 줬다고. 얼마나 든든하고 힘이 되었겠는가. 나도 혼자는 너무 외로울 테니 마음에 맞는 친구 딱 한 명만 동행해 준다면 그 여행길이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을 것 같다. 아무튼 작가는 남편을 잘 만난 것 같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여행도 여행이지만 우리나라 문학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점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선 대접 받는 일이 없다고, 우리가 학창 시절 국어 시간이 아니면 한국 문학사를 꿰뚫을 일이 그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잊히고 잘 모르는 문학인도 부지기수일 것 같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자국민이 자국의 문학에 대해 잘 모르고 알려고 하지도 않다니.

 

하지만 이게 비단 사람의 잘못이겠는가 싶기도 하다. 출판계나 매스컴이 좀 나서줘야 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요즘 출판계에선 전집을 기획하면서 고전이나 한 작가의 작품들을 한 질로 내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거기에 우리나라 작가들은 좀 멀찍이 있는 것도 같다. 물론 몇몇 작가들이야 여전히 관심을 받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문학을 어떻게 알릴 것인가는 기획의 문제이기도 하겠는데 여행과 문학인을 한 테마로 잡은 것도 꽤 괜찮은 시도인 것 같다. 그리고 새삼 우리나라에 문학관이 이렇게도 많은가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봐야 38곳이다. 더 찾아보면 더 나오지 않을까?

 

나 개인적으론 목포 문학관에서 김우진을 다룬 부분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냥 김우진하면 잘 모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 옛날 가수 윤심덕이 현해탄에 몸을 던졌을 때 함께 몸을 던졌던 사람이 그다. 알고 봤더니 나름 당대 출중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이미 17살 때 공상과학 소설을 쓰기도 하고, 논문을 잘 써 영친왕으로부터 상과 상금을 받기도 했단다. 와세다 대학 원예과에 진학했지만 시를 쓰고 조명희 등 20명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발족하는 등 문학과 공연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나중에 영문학으로 전공을 바꿔 졸업 후 시와 평론을 발표하고, 번역에도 힘을 쓴다. 저자 역시도 그런 그를 왜 몰랐을까 탄식하기도 했다는데, 여행이란 또 그렇게 몰랐던 것을 새롭게 아는 기쁨, 즐거움 아니겠는가또한 소설<혼불>로 기억되는 최명희 문학관을 다룬 부분도 먹먹했다. 최 작가가 타계한 나이는 겨우 50대의 나이다. 지금도 어디선가 숨어서 글을 쓰고 있을 것만 같다. 

 

책을 읽다보면 쓸쓸함과 아련함이 밀려온다.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가 없다더니 꼭 이를 두고 하는 말 같다. 한때는 문학계를 호령했을 이 걸출한 문인들이 지금은 어디로 다 사라졌단 말인가. 

 

글 시작 전에 그 문학관에 관한 짧은 소개와 주소, 전화번호 등 이용안내를 밝혀 놓고 있어 실용성을 높였다. 중간 중간에 간간히 저자 자신의 사생활도 밝혀놓고 있는데 그 나름 글 앞에 진실하고자 하는 의도는 알겠지만 자칫 군더더기로 비칠 수가 있어 그 점은 조금 아쉬웠다. 또한 모르는 작가에 대해선 솔직히 모른다고 하는 겸손한 자세도 좋긴 하겠지만 그게 또 보기에 따라선 좀 아마추어처럼 보일 수가 있어 그럴 땐 차라리 한 템포 쉬어 가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저자가 이전에도 책을 몇 권 내봤다면 이젠 프로가 아닌가. 어찌 보면 우리나라 문학관을 가능한 한 많이 소개하고픈 저자의 의욕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저자가 우리나라 문학관을 소개하고자 들인 수고를 생각하면 독자로서 그런 지적이 가당키나 할까 싶기도 하다. 그저 한 지리멸렬한 독자의 시샘이라고 생각해 주면 고맙겠다.

 

꿈은 이루어진다는데 손 떼 묻혀가며 빌면 언제고 나도 이런 여행 떠나 볼 수 있지 않을까? 저자의 수고에 심심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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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8-01-18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목차를 보니 가보았던 곳이 제법 있네요.
저의 첫 책에서 집중 다루어 썼던 곳도 세 곳 다 있구요. 반가운 책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랑 동명이라 깜짝 놀랐다가, 아니네요.
그러고 보면 문학관이 참 많은데 여행과 두 마리 토끼 잡기로 좋은 코스이지요.

stella.K 2018-01-18 17:44   좋아요 0 | URL
어쩐지... 읽으면서 저도 혹시 저자를 프레이야님이
아시지 않을까 했습니다. 근데 아닙니까? 좋다 말았는데요?ㅎㅎ
읽으면서 부럽기도하고 수고도 많이 했겠구나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