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 당신을 위한 어떻게든 글쓰기
곽재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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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관한 책은 가급적 읽지 않으려고 했다. 요즘 그런 책이 얼마나 많이 나와 있는지 아는 사람은 안다. 물론 읽어서 나쁠 리 없다. 하지만 읽으면 뭐하나? 중요한 건 내 글을 써야지. 그래서 글쓰기 강사가 될 것이 아니라면 가급적 안 읽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 책은 왠지 끌렸다. 제목이 길기도 하지만, 뭔가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있는 책 같아서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지난 날 글 쓰다 엎은 적이 어디 한 두 번이랴? 왠지 그런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말하는 책인 것 같아서였다.

 

제목에서 풍기듯 이건 글쓰기 생초보를 위한 책은 아닐 거라고 지레 짐작한다면 걱정은 붙들어 매시라. 생초보라도 읽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표지 중앙의 그림에서 느껴지듯 이건 어려운 책이 아니라는 것쯤 빤히 알 수 있다. (고양이를 그려 넣을 생각을 하다니.)

 

(여러 번 밝혔지만)나의 꿈은 작가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꿈을 이룬 것도 같다. 오래 전교회에서 대본을 썼고, 2년 전엔 책도 냈으니. 하지만 인생이 어디 내 뜻대로만 되던가? 이건 내가 원하던 그림은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그림은 소설로 데뷔하는 거였다.

 

사실 내가 교회에서 대본을 쓴 것도 소설을 써 보고자 하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다. 책에서도 저자가 지적하지만, 글 쓰는 일이 지난한 것도 있지만 지지부진한 것도 많아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대본 쓰는 일이 그랬다. 소설이야 혼자 하는 작업이니 지지부진해질 누가 뭐랄 사람이 없지만, 연극이란 장르가 워낙에 여러 사람과 협업으로 해야 하는 것이니 대본은 잘 쓰든 못 쓰든 제때 나와 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작가가 마감에 맞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저자도 그런 말을 한다. 기왕이면 마감에 맞추는 작가가 되라고. 마감에 못 맞추면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간다. 그러나 마감에 맞추면 출판사나 잡지사로부터 신뢰를 얻고, 그 다음을 도모할 수가 있다. 나는 바로 이 훈련을 대본 쓰는 것으로 했기 때문에 겹쳐서 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마감에 맞추는 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그런데 저자는 책에서, 전업 작가가 좋으냐, 아니면 자기 일을 하면서 글을 쓰는 것이 좋은가 했을 때, 당연 후자에 손을 들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업 작가는 아마도 신이 내려준 직업일 것이다. 글만 써서 집세 내고, 공과금 내고, 생활비 한다? 이건 정말 꿈같은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배우자를 잘 만나거나, 부모님 집에 그야말로 잠만 자고 밥만 먹는 입주 가사도우미가 되어, 눈물에 밥을 말아먹을지언정 절대로 부모님 그늘을 떠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꿈같은 이야기지만, 본인이 금수저이거나.

 

결국 작가는 훌륭한 직업이긴 하지만 현실을 생각할 때 거의 수익을 보장할 수 없으니 겸업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소리다. 그렇게 생각하면 서글프긴 하다. 직업이 뭐가 됐든 그것은 자아실현과 경제적인 안정을 보장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작가란 직업은 이 두 가지를 충족시키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작가는 여타의 직업과 겸직을 하게 되는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저자는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한다. 때로는 자신의 직업이 무엇이든 직장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소재로 삼을 수 있으니 좋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저자의 이력을 살펴보니, 화학자 출신이고 그래서 그런지 전작들도 과학적 요소가 많기도 하다.

 

아무튼 나도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나는 오래도록 교회에서 글을 썼으니 오죽 겪고 본 일이 좀 많겠는가? 그걸 책으로 써도 책 몇 권은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겸직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작가에겐 어쩌면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어느 작가도 편의점에서 일한 것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고 그러고, 우리나라 어느 법조인은 자신의 경험을 소설로 써서 그게 현재 TV 드라마로까지 방영되고 있다(말에 의하면 작가가 직접 각색까지 했다고 하는데 무슨 복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정작 원하는 소설을 안 쓰고 있다. 아니 못 쓰고 있다. 역시 저자가 지적하기도 했지만, 작가로 살아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 두 권의 책을 내 본 것으로 작가 딱지를 달았으니 거기에 만족하는 것이다. 거기엔 작가의 의지의 문제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야말로 생업이 발목을 잡아서 못 쓰게 되는 경우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는 좀 복잡하다. 그렇게 대본을 써 봤으니 소설도 금방 잘 쓰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대본 쓰는 일과 소설 쓰는 일은 결코 같은 게 아니다. 그동안 내가 대본을 쓰면서 소설은 안 써 봤겠는가? 그런데 꼭 실패했다. 어떤 땐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가당치 않다고 생각할 때도 많았다. 그야말로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작가란 꿈은 가져서 이런 생고생을 하나? 차라리 없었던 것으로 하려고 발버둥쳤던 때도 있고, 글 쓰는데 매번 실패를 하니 일부러 팔짱끼고 있다가 뭔가 내 안의 욕구가 빵빵해져 더 이상 못 견디겠다 싶을 때 써 보는 것은 어떨까 하던 때도 있었다.

 

이 책은 애석하게도 그런 심리 상태를 진단해 주는 책은 아니었다. 즉 왜 실패하는가에 대해 다루지 않는다는 것이다. 단지 항상 앞부분만 쓰다가 그만두는상태에서 어떻게 하면 계속 쓸 수 있는가를 모색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책에서 주목해 본 것이 두 가지가 있었다.

 

먼저 저자는 베껴 쓰기가 얼마나 고역인지를 털어놓는다. 사실 베껴 쓰기는 창작을 공부할 때 빠지지 않는 수련 과정 중의 하나다. 그것에 대해 저자는, ...... 아닌 게 아니라 어떤 글을 찬찬히 베껴 쓰면, 그 글의 특징과 구조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는 기회가 될 때도 분명 있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에는 베껴 쓰는 일에만 몰두하다가 정작 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상상하는 일을 방해할 때가 많고 소모되는 힘과 시간도 너무 컸다. (162p) 그 뒤 저자의 설명은 그냥 기계적으로 무의미하게 베껴 쓰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고, 글을 쓰면 내 글을 쓰는 것이 중요한데 그 일에서 내가 뭔가를 했다고 만족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건 나 역시도 동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왜 글쓰기에 관한 책들이나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하나같이 필사가 중요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저자의 의견에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솔직히 난 내 글 쓰는 것만으로도 어떤 땐 팔이 떨어져 나갈 지경이다. 베껴 쓰느라 에너지를 쓴다는 건 너무 힘들다.

 

대신 저자가 추천하는 방법이 있다. 이건 나도 언젠가 한 번 해 보고 싶은 것이기도 한데, 베껴 쓰기를 아주 안 할 수는 없으니 괜찮은 영화나 드라마를 자기 식으로 베껴 써 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로 옮겨보는 것이다. 그것이 소설이면 시나리오나 대본으로 옮겨 써 보는 것이다. 그냥 베껴 쓰기는 단순하지만, 이 작업은 상상을 해야 하고, 문체를 다듬기도 해야 하니 좀 보람 있는 일이 되지 않을까? 등장인물의 심리가 어떤지 글로 표현해 보기도 하고.

 

저자는 그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거기서 개작을 해 보라고 한다. 즉 모작을 해 보라는 것이다. 나라면 이 작품 또는 이 장면을 어떻게 해 볼 것인가를 써 보는 것이다.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구조를 바꾸고, 구성을 바꾸고 하면서, 새로운 창작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겠지.

 

또 작가는, 자신이 쓰고 싶은 데서부터 글을 써 보라고 한다. 이건 꼭 소설이나 시나리오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수필이든 일기든 지간에 전체 쓰고 싶은 글에서 가장 쓰고 싶은 부분부터 쓰는 것이다. 그 부분을 읽으니 갑자기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생각이 났다. 거기서보면 해리는 책을 읽을 때 맨 끝 페이지를 먼저 읽은 후 첫 페이지부터 읽는 버릇이 있다. 그러자 샐리는 왜 그렇게 하냐고 묻는다. 해리는 첫 페이지부터 읽기 시작하면 혹시 자신이 심장마비나 사고로 죽기라도 하면 맨 마지막 페이지는 못 읽게 되니 그러는 거라나 뭐라나.(워낙 본지가 오래라 정확히 옮기는 건 불가능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침 기가 막힌 장면을 염두에 두어두고 있는데 갑자기 죽게 된다면 이건 영구미제로 남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모든 컴퓨터엔 워드 기능이 있다. 이것은 자유로운 편집이 가능하다. 아주 오래 전,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는데, 마르셀 프루스트였는지, 제임스 조이스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암튼 원고를 보여주는데 그야말로 누더기였다. 노트에 메모를 길게 늘여 붙였는데 왜 그랬는지는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은 그렇게 글을 쓰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실제로 나도 발단 쓰고, 전개 쓰다 정작 중요한 부분을 못 쓰고 중단했던 적이 너무 많다.

 

사실 나 같은 사람은 귀도 얇아 남의 말은 잘 듣는 편이다. 과거 나를 가르쳤던 글 선생님은 한 번도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 베껴 쓰기는 많이 하면 할수록 좋다고 했고, 어느 한 장면을 위해 앞뒤로 무엇인가 살을 붙이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난 이 책에서 이 두 가지만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움이 느껴졌고, 당장이라도 해 보고 싶어졌다. 하긴, 글쓰기에 왕도가 어디 있겠는가? 내 나름대로 쓰면 그게 내 길인 거지.

 

그런데 작가는 또 말한다. 그렇게 못 쓰겠으면 쓰지 않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그래도 계속 쓰서 어떻게든 끝을 보는 것이 좋은지. 둘 다 나름에 일리는 있는데, 결국 저자가 내린 결론은 그래도 계속 써서 끝을 보라는 것이다. 안 쓰면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글이라도 어떻게든 완성하면 후에 고칠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건 맞는 얘기다. 고칠 것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희망이 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더불어 기억할 말은 그렇게라도 완성한 후에 그 다음에도 또 쓰고 싶어지냐고 묻는 것이다. 만일 또 쓰고 싶어지면 작가가 되는 것이고, 쓰고 싶지 않으면 작가는 내 길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고, 나의 사부가 했던 말씀이다(왜 그 말이 생각이 나는 것일까?).

 

아무튼 글쓰기에 관한 책은 정말 오랜만에 읽어보는데, 나름 알뜰살뜰 유용하게 잘 쓴 책이라고 생각한다. 가끔 기력보충용으로 비타민 먹듯 한 번씩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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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25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5-26 19:10   좋아요 0 | URL
ㅎㅎ 이런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주시다닛!
알겠습니다. 한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겠슴다.^^

마태우스 2018-05-26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용. 저도 겸직작가설에 동의합니다. 작가가 제일 잘 쓸 수 있는 건 자신의 경험을 글로 쓸 때거든요. 교회소설 아직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감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안팔리는 책을 마구 낼 때는 마감 정말 잘지켰어요. 근데 지금은...ㅠㅠ 1년 2년 늦는 건 일도 아니더군요. ㅠㅠ초심을 잃은 걸까요.

2018-05-26 19: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6 22: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27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8-05-26 17: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괜찮은 영화나 드라마를 자기 식으로 베껴 써 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소설로 옮겨보는 것이다.˝
- 이것 좋은 방법 같습니다. 저도 해 보고 싶군요.

˝책을 읽을 때 맨 끝 페이지를 먼저 읽은 후 첫 페이지부터 읽는 버릇이 있다.˝
- 제가 이미 종영된 드라마를 재방송 해 주는 채널이 있어서 시청할 때가 있는데 재미가 있더군요. 만약 부부의 이야기라면, 아 저렇게 해서 처음 만났구나 또는 저런 일이 있어서 헤어지게 되었구나 하고 끝 장면과 연결해서 보는 특별한 재미가 있더라고요.

˝베껴 쓰느라 에너지를 쓴다는 건 너무 힘들다.˝
- 저의 경우엔 필사를 많이 하지 않고 며칠에 한 문단 정도 베껴 쓰기를 한 적이 있어요. 지금도 신문의 칼럼을 읽고 맘에 드는 문단이 눈에 띄면 그 문단만(5~6줄) 필사해 둡니다. 그렇게 조금씩 해 놓아도 1년이 되면 꽤 많은 글 필사가 됩니다. 티끌모아 태산이 되어요. 힘 빠질 정도로 필사하는 건 저도 반대입니다.

stella.K 2018-05-26 19:34   좋아요 0 | URL
저는 벌써 정했습니다.
<밥 잘 사 주는 예쁜 누나>로 해 보기로.ㅋㅋ

정말 좋은 글만 베껴 쓰기하는 게 더 좋은 것 같습니다.
책 전체를 베껴 쓴다는 건 그냥 의무에 매여서 뭐가 좋은지 모르겠더군요.
제가 또 팔 힘이 약해서 서너 시간만 글을 써도 팔이 빠질 지경이라 꾸준히
할 자신도 없고. 저도 매일 조금씩이라도 해 봐야겠습니다.^^

서니데이 2018-05-27 17: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요즘 손글씨를 매일 조금씩 쓰고 있는데, 글씨 쓰는 것에 신경을 쓰면 내용은 잘 기억이 남지 않는 것 같아요. 좋은 글을 필사해서 두면 나중에 읽어보면 좋다는 점은 있겠지만, 손글씨 쓰는 것이 시간도 많이 걸려서 워드로 작성하거나 아니면 사진을 찍어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필사하는 것을 하시니까, 아마도 제가 알지 못하는 좋은 점을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stella.K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편안한 하루 되세요.^^

stella.K 2018-05-27 18:37   좋아요 1 | URL
ㅎㅎ 저도 그래요. 더구나 요즘엔 뒤돌아서면 잊어버리는지라.
과연 필사가 필요한 건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래도 안하는 것 보단 낫지 않을까요?
전체 필사는 필요가 없을 것 같고, 기억하고 싶은 구절이나
부분만 해도.
아니면 색인 카드가 더 유용하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무엇에 관한 것이 무슨 책 몇 페이지에 있다는 거요. 암튼...

요즘엔 마음 먹은 게 있어 주로 오전과 오후에 걸쳐 글을 쓰니까
서재에 글은 잘 안 쓰게 되더군요.
전에는 오후에 글을 쓰려고 하면 잘 안 잡혀서
대신 서재에 뭐라도 써야지 해서 쓰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일단 오전에 글을 쓰니까 좋긴한데 서니님과 멀어지는 것 같아
아쉽긴 하더군요.ㅠ
이해하시고 가급적 댓글 남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음 한 주도 활기차시길...!^^

 
우리는 눈물로 자란다
정강현 지음 / 푸른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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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해도 저자는 눈물이 많은 사람인가 보다. 그러니까 제목을 그렇게 지었겠지. 요즘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 자랄 때만해도 남자가 눈물이 많으면 안 된다고 했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고 했을까? 그만큼 인생에 있어 중요한 때를 간과하지 말고 울라는 뜻도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좀 바꿔도 되지 않을까? 울고 싶으면 수시로 울되 중요한 세 번은 지나치지 마라. 뭐 그런 뜻으로 말이다.(더구나 여자는 울어도 되고 남자는 울면 안 된다면 그건 사회적으로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불행한 사회인가.) 솔직히 어찌 어찌하다 보니 때를 놓치는 때도 많지 않은가.

 

저자는 기자면서 왜 그렇게 눈물에 관심이 많은 걸까?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서는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온다. 하긴, 우리가 세월호를 어찌 있을 수 있을까? 저자는 기자로써 세월호를 취재하기도 했다.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슬픈 소식을 들으면 그냥 울어버리면 그만이지만, 그 소식을 전하는 기자나 앵커는 울면 안 된다. 그러나 그 사건을 취재할 땐 아마도 우리 보다 몇 배의 눈물을 흘리고 삼키지 않았을까? 그것을 소회처럼 남겼다.

 

언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김대중이나 김영삼 대통령 때도 국가적으로 세월호만큼 재난이고 슬픈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땐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만 취급되어 건조하게 보도만하고 지나간 경우가 많았다고. 그래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보다 개인의 책임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예가 삼풍백화점 붕괴를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로부터 거의 20년 만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물론 그 사이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을 대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각이 달라진 것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더 이상 그것을 개인적 사고로만 보지 않게 된 것이다.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자각이 생긴 것이다.

 

세월호는 분명 가슴 아픈 사건이지만 그 토록이나 많은 사람들이 아파하고 슬퍼했다는 건 내 이웃의 아픔을 끌어안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이렇게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일에 같이 아파하고 울어주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 사회는 분명 좋은 사회고, 건강한 사회가 될 확률이 높다고 믿는다.

 

이 책 어딘가 에도 저자가 그런 말을 한다. 눈물방이라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피시방, 비디오방처럼 눈물방이라는 걸 만들어서 편히 몸을 기댈 수 있는 소파에다 각 티슈 몇 통 갖다놓고, 종업원은 손님의 울고 싶은 심경을 건드리지 않게 최소한의 안내만 한다. “한 시간 동안 우는 데 삼천 원입니다. 필요하시면 함께 울어드리는 서비스도 있습니다.”라고. 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법 그럴 듯하다.

 

그러고 보니 오래 전, 지하철을 타고가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전동차 출입구에 기대서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서럽게 우는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게 벌써 10년쯤 된 일이었던 것도 같은데, 그녀는 왜 우는 걸까? 아는 사이라면 어깨라도 빌려줬을 텐데, 오히려 무심한 척 외면하려니 민망한 생각이 들었다.

 

성경에도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했고, 잔칫집 가기를 바라지 말고 초상집 가기를 더 바라란 말도 있다. 모든 사람이 지하철과 버스만 타면 다 스마트폰만 보고, 졸고 있는 것 같아도, 또 많은 사람이 안구건조증에 시달리는 것 같아도 누군가는 그렇게 울고 있는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상상해 보라. 백만 년 후의 사람들은 눈에 눈물샘이 퇴화되어 웃기는 하는데 우는 것을 모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지.

 

저자는 기자란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기자라는 완장을 떼고 온전히 인간으로 돌아가 쓴 저자의 에세이라고 보면 좋을 것 같다. 그것도 이제 40대에 든 남자의 인생 고백이 들어있다.

 

나도 40대 이전을 생각해 본다. 20대는 좌충우돌이 많았고, 그나마 30대쯤 되니 비로소 세상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나놓고 보면 30대 때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쓸데없는 자존심이 팽팽했던 시절이었다. 나만 세상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세대를 살고 있는 선후배들 역시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으니 그 안에서 얼마나 자존심의 싸움이 치열했던가. 그게 언제까지나 계속 된다면 난 오늘 이렇게 한가하게 이 책의 리뷰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40대는 확실히 꺾였다. 옛날 같이 피터지게 싸울 힘도 자존심도 없다. 뭔지 긍휼에 눈이 뜨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평생 미워할 것만 같은 사람도 (물론 여전히 밉겠지만)너도 사느라 힘들겠구나 조금은 한숨 지어줄 생각이 드는 나이가 40대는 아닌가 싶다. 무엇보다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 거기에 계셔줄 것 같은 부모가 정말 늙으셨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는 나이도 40대다. 그래서 저자는 세월호에 대한 단상 못지않게 부모에 관한 속내를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저자가 부모가 되고 보니 자신의 부모가 더 선명히 보이는 것이다.

 

인생은 살아지는 것 같아도 사느라 얼마나 많은 짐을 지고 살아야 하는지 때로 미친 척이라도 해서 짐을 털어버리고 일탈을 꿈꿔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으련만, 꾸역꾸역 살아내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에게 힘들게 살지 말라고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냥 말없이 안아주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것도 40이란 나이에 들어서면서부터가 아닐까. 40대를 이 책에서 발견하고, 독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저 잘 건너오시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밖에 책이 못지않게 할애한 건 문학과 음악에 대한 단상이었다. 그러고 보니 3분의 1씩을 할애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호를 빙자해 자신의 일에 관한 이야기/ ()부모와 가장으로서의 이야기/ 취민지 투잡인지 모를 팟캐스트 운영자로서 문학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중간 중간 끼어드는 저자의 단상들로 구성된. 그렇게 되면 4분의 1이 되는 건가? 아무튼.

 

기자가 문학에 관한 글을 쓰면 꽤 흥미롭다. 작가나 기타 문학 종사자들이 문학 작품을 쓰는 것 하고는 확실히 다른 맛이 있다. 이 책도 그랬다. 모르긴 해도 작가는 한때 작가를 꿈꾸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문학에 관한 애정이 느껴지고 실제로 문학 담당 기자로 일하기도 했다.

 

작가는 무엇으로 글을 쓰는가? 나는 오래도록 분노가 너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들 것이라던 나의 사부님의 말씀을 철석 같이 믿었고, 나는 그것으로 세례를 받았다. 나는 여전히 그 말을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요즘은 좀 달라졌다. 분노만이 글을 쓰게 만드는 건 아닌 것 같다. 길은 여러 가지가 있지 않을까? 그중 하나가 분노겠지.

 

저자는 작가를 꿈꾸기 전에, 기자가 되기 전에 오래 전부터 독자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소설과 시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는 소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게 좋은 소설이란 가장 잘 아파하는 소설이다. 그러니까 타인의 고통을 잘 느끼는 작가가 등장인물의 아픔 속으로 깊이 들어간 소설이, 나는 좋은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 그렇게 인물속으로 들어가다 보면, 나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는데, 좋은 소설은 그 이해의 공감대가 넓고 깊게 형성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106~107p)

 

이 말을 후에 유안진 시인과의 인터뷰에서 뒷받침 해주고 있기도 한데, 유 시인이 그런 말을 했다고 한다. 시인은 져야 합니다. 져줘야 이기는 게 시거든요. 지는 건 진실이고 이기는 건 사실이죠. 역사(사실)는 승자의 기록이고 문학(진실)은 패자의 기록이잖아요. 진실을 아름답게 지켜내는 게 문학이죠.” 그리고 저자는 이 말 끝에 이런 말을 남긴다. 진실이 패자의 기록이란 말은, 진실이란 결국 패배한 이들에게서 길어낼 수 있다는 뜻일 테다. 또한 좋은 소설에는 좋은 대화가 있다고 했다. 좋은 대화는 소설의 이야기를 확장시키면서, 동시에 삶의 진실을 가장 나긋나긋한 방식으로 일러주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저자는 베스트셀러는 잘 읽지 않는다고 했다. 그것은 온전한 책의 힘이 아니라, 잘 설계된 기획의 산물처럼 여겨져서라고 한다. 출판시장에서, 잘 기획된 책은 잘 쓴 책을 자주 이긴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취향에서, 잘 쓴 책은 잘 기획된 책을 항상 이기고야 만다고 했다. 이게 다 책은 단순한 글 묶음 상품이 아니라, 글 그 자체여야 한다는 편견 때문이며 당분간 그 편견을 고칠 생각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런 독자를 단 한 사람만 알고 있어도 작가는 글을 쓰는데 힘이 날 것이다. 얼마나 많은 작가(지망생)들이 자신의 글을 쓰기도 전에 세상의 잘 기획되고 편집된 글에 목을 매는지. 또한 독자는 요즘 잘 나가는 책이 뭔지를 알아 스스로의 선택을 유보하거나 불신하는지. 작가도 글을 쓰는데 자기 철학이 있어야하듯, 독자도 책을 읽는 것에 대한 자기 철학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닌지. 그러면 더 좋은 책 세상이 될 텐데. 너무 우주적인 바람을 갖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유안진 시인의 말처럼, 기자 역시 승자의 기록이나 쓰는 역사가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약하고, 소외되고, 문제 많은 곳을 건드려주고 보여주는 게 기자 정신에 더 부합되지 않을까? 저자는 그런 낮은 곳을 볼 줄 아는 따뜻한 눈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아 흐뭇했다. 또한 이곳저곳 밑줄 긋다 나중엔 그것을 포기했다. 공감하고 생각할 문장들이 얼마나 많은지.

 

다시 세월호로 돌아가서, 마침 오늘 세월호가 똑바로 세워졌다는 뉴스 속보를 보았다. 무려 4년의 일이다. 기울어졌던 세월호를 바로 세우는데 왜 그처럼 많은 세월이 필요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앞서 같이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있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좋은 사회, 건강한 공동체로 나가는 징조라고 믿는다고 했다. 하지만 우린 그 사건으로 인해 이미 너무 많은 가족들이 상처를 받았다. 국가가 국민과 가족의 안위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우리가 함께 흘리는 눈물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난 4년 동안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해 난 아무런 답도 달지 못했다. 사실은 그런 불행한 일에 함께 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나눌 좋은 일이 더 많아 함께 웃을 수 있으면 그게 더 좋은 일 아닌가. 함께 누릴 수 있는 행복도 많아졌으면 좋겠다.

 

* 글제목은 줄리아하트 밴드가 부른 <당신은 울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 제목을 그대로 옮겼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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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5-10 2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눈물만큼, 아픈 만큼 사유가 깊어질 것이라 해도 역시 우린 행복의 길을 지향하죠.
더 이상 슬픈 사고는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국민이 흘린 눈물 중 세월호로 흘린 눈물이 가장 많지 않았을까 싶어요.

stella.K 2018-05-11 15: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전에도 이후에도 사건 사고가 많았는데
유독 세월호는 쉬 잊히지 않는 건 왠지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미처 다 피워보지 못한 아이들이 많이
희생되서 일까요?
함께 나눌 수 있는 행복과 기쁨이 충만한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ㅠ

hnine 2018-05-10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인용한 유안진 시인의 말이 명언이네요.

stella.K 2018-05-11 15:48   좋아요 0 | URL
h님 좀 생뚱맞지만 나중에 기회되시면
<미스티>라는 드라마 한 번 보세요.
거기서도 보면 사실과 진실이 뭐냐는 사유가
미스터리하게 펼쳐지는데 정말 잘 만든 드라마예요. 흐흐
 
시, 현대사를 관통하다 - 19세기 말 이후 한국 현대사와 시의 만남
이성혁 외 지음 / 문화다북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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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역사와 문학을 같은 프레임에 넣고 보려고 했던 시도는 여럿 있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적 사건 즉 스토리를 다룬다는 점에서 소설이나 평전이 채택하는 방식은 아닐까 한다. 그런데 시로 역사를, 그것도 근현대사를 돌아보려고 했다는 건 이전에도 있어왔는지 모르겠으나 나로선 꽤 신선한 시도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 이병주 작가는 자신의 책에서, 역사가 생명을 얻자면 섭리의 힘을 빌릴 것이 아니라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했다. 이는 사실을 추구하는 역사와 달리 사실보다 진실에 가까운 것을 추구하는 게 문학(22p, 이병주, <변명> 296)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문학 그것도 시라는 장르는 어떠한가? 과연 진실을 말해줄 수 있을까? 물론이다. 시는 어떤 예술 장르보다 가장 넓은 범위의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 그 이유는 시가 여러 문학 장르 중에서도 모든 제약에서 가장 자유롭기 때문이다. 정해진 스토리 라인이나 구조를 따를 필요도 없고, 아예 플롯이 없어도 되는 시는 상상력의 정점과 깊이 있는 사유를 보여주며, 제한 없이 폭넓게 세상을 담아내기 때문이다(23p).

 

나는 이 책을 처음 펼쳐들었을 때 역사 그것도 우리나라 근현대사와 시의 콜라보레이션쯤으로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즉 역사도 알고, 시도 알고 일석이조의 학습효과 뭐 그런 거 말이다. 물론 약간의 그런 느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 속에서 시인들은 어떻게 시대의 아픔을 노래했는가를 다시 한 번 짚어 볼 수 있는 시간이어서 나름 좋았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과 시가 있다. 우린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무수히 많이 물어보았을 당대의 시인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윤동주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살던 시대 전후해서 많은 시인들이 시대를 노래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김소월도 있었고, 백석도 있었다. 임화도 있었고, 이육사도 있다. 또한 친일파로 알려진 서정주도 있고, 이광수도 있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서정주와 이광수 같은 친일 문학인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단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하상일 문학평론가의 글을 읽다가였는데, 그는 친일을 논의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판단 기준은 내재적 비판이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 가지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일제 강점기 일본어로 쓴 작품이라고 해서 모두 친일이라는 편협한 언어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어떻게 썼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일본어냐 조선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일본어라고 해도 반일 정신을 드러낸 작품이 있는가 하면, 조선어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친일 협력을 드러낸 작품도 아주 많다는 것이다.

 

둘째로, 일제 말 일본에 의해서 조직된 친일 단체에 소속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로 규정하는 태도는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강요와 억압에 의해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국보국회를 만들어 작가들을 강제로 소속시켰는데, 그 단체 내부에서의 구체적인 활동 양상과 당시 발표한 작품의 내용을 기준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해야지, 단지 이런 단체의 소속 여부를 갖고 무조건 친일 협력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로, 창씨개명 역시 친일의 지표로 삼는 것도 조심스런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창씨개명은 친일적 요소가 아주 많았고, 실제로 상당수의 사람들이 친일의 명분으로 삼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광수 같은 경우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철폐하는 의미에서 창씨개명을 지지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무조건 친일로 볼 수 없는 건 그 대표적인 예로 윤동주를 들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잘 알다시피 윤동주의 일본식 이름은 히라누마 도쥬다. 그것은 그가 연희 전문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지 일주일 전 <참회록>에서 자신의 과오를 깊히 성찰한다(131~132p).

 

사실 우리는 대대로 윤동주는 사랑하면서, 미당이나 춘원에 대해선 석연치 않은 감정을 굳이 숨기지 않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왜 윤동주는 되면서 미당이나 춘원은 안 되는 것일까? 이제 우린 미당이나 춘원에 대한 생각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필요도 있지 않을까? 불평등과 차별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는 당해 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그것이 철폐된다면 창씨개명 아니야 그 보다 더한 일을 했더라도 당대를 살아보지 않은 우리는 뭐라고 할 자격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민족의 정체성 보다 앞서는 건 차별 철폐라는 건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들에 대한 연구를 좀 더 활발하게 진행시켜도 좋지 않을까? 그들은 당대 지식인이다. 그들이 그렇게 쉽게 자신과 나라를 팔아 먹었을 거라곤 나 역시 쉽게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당대 시인들은 저항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러니만큼 지금까지 난 시인들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건 아닌가 반성도 해 보게 된다. 솔직히 옛날에 험악한 시절을 살았을 땐 문인들도 결코 가만있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긴 하다. 지난 번 박근혜 대통령 탄핵 때 문인들이 시국선언도 하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오늘 날 같이 부요하고 평화로운 시대에 저항할 이유나 필요를 모르는 시인들은 어디서 그 존재 이유를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언어의 유희를 즐겨보겠다고 시를 쓰지 않는가? 괜히 시 한 편으로 감옥에 들어가고 하는 건 김지하 같은 시인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 날의 시인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함민복 시인은 그의 소설을 통해 자신의 시 한 편의 가치는 몇 백 원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조하기도 했다. 오늘 날의 시인의 쓸모는 뭘까? 어느 시대고 시인과 고독. 또는 시인과 가난은 자웅동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가난과 고독이 있기 전에 저항이 먼저 있었음을 또한 상기하게도 한다.

 

이 책을 읽다 재밌는 부분을 발견했다. 언젠가 이승만이 처음 대통령에 당선이 되고 자유경제원이라는 곳에서 그의 체제를 찬양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백일장을 개최한 적이 있었나 보다. 그때 장민호라는 사람이 1등에 뽑혔는데 그 후 바로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자세히 보니 그의 시가 가로로 읽으면 이승만을 찬양하는 것이 되지만 세로로 읽으면 그를 비판하는 글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을 보면서 무릎을 탁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시인의 살아있는 저항정신이요 풍자가 아니겠는가? 과연 오늘 날의 세대에도 이런 시인을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도 시인은 있어야 한다. 그들만의 청정한 언어로 세대를 정화시키고 그들로부터 깨어있기를 촉구 받아야 한다. 시인들에게 부단한 응원과 애정을 보내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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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4-28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로 읽기와 세로 읽기에 따라 내용이 달라지다니... 묘하군요.

2018-04-28 18: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28 20: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카프카 - 카프카와 브로트의 위대한 우정
막스 브로트 지음, 편영수 옮김 / 솔출판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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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카프카의 <일기>를 읽고 혼쭐이 났다.

일기만큼 그 사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무엇보다 어렵게 쓰이지 않았다는 것과 어느 정도 관음증을 만족시켜준다는 점에서 일기를 읽는다는 건 만만찮은 재미와 흥미를 갖게 만든다. 그런데 카프카는 그것을 완전히 무산시켰다. 누가 어려운 작가 아니랄까봐. 그렇게 생각하니 왠지 모를 외로움이 느껴졌다. 카프카를 좋아하는 독자도 많다만 나는 좀처럼 좋아지질 않으니.

 

카프카의 일기에 혼쭐이 났다면 다시는 도전을 안 할 것 같은데 또 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또 도전을 하고 말았다. 이번엔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그의 친구가 쓴 책이다. 이번엔 좀 쉽지 않을까 아니 읽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먼저 읽은 것에 비하면 그나마 읽히긴 한데 나을 것은 없다. 그 알량한 읽힘도 책 자체가 좋아서라기 보단 그나마 읽어준 것이 있어 읽혔다고나 할까? , 이렇게 어려운 작가에, 이렇게 어려운 친구라니.

 

글쎄. 이 책을 규정하기를 평전이라고 했는데 글쓴이가 당대 카프카 못지않은 지식인이었으니 오죽 할까 싶기도 하지만 나는 왠지 평전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르게 좀 아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면 단번에 네가 카프카를 알아?’ 타박과 오해를 받을 테니 입을 다물어야 할 것 같다.

 

물론 평전이 맡긴 맡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 개인으로 볼 때 카프카에 대한 (친구라도) 존경과 경의의 뜻으로 쓴 일종의 고급진 에세이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글도 보면 앞에 나오는 전기에서 저자가 느끼고 봤던 일인칭 시점에서 카프카를 묘사하기도 했다. 평전은 그 보다 더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무래도 저자 자신의 카프카에 대한 감정과 주관적 느낌이 들어갔다는 점에선 평전이라고 보기엔 다소 애매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하지만 또 전기 이후에 나오는 카프카의 신앙과 학설, 작품에 나타난 절망과 구원 등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카프카의 문학을 학문적으로 잘 정립하려 했는지 그 애정과 열정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 것을 보면 평전은 평전일 것이다. 그 사람에 짐작이 아닌 직접 보고 느끼고 연구한 것을 쓴 것이니까.

 

책을 읽으려고 펼쳐든 순간 도대체 카프카가 저자에게 어떤 존재였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새삼 부럽기도 했다. 나에 대한 평전은 고사하고 내가 죽고 난 뒤 내가 어떠한 사람이었다고 글 한 줄이라도 남겨줄 사람이 나게 과연 있는가? 난 또 그러리만치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왔을까? 거기에 대해 나는 결코 긍정할 수가 없다.

 

<일기>를 읽었을 땐 무조건 어렵다고만 느꼈고, 이 책 역시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저자로 인해 카프카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난 이 책에 좀 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사실 카프카에 대해선 단편적으로만 알고 있을 땐 시쳇말로 좀 찌질 하지는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평생 아버지를 어려워했고, 그렇게 많은 글을 썼음에도 늘 자신은 글을 조금밖에 못 썼다고 자책하며 살았다. 게다가 전업 작가가 된다는 건 아예 꿈도 꾸지 않았고 평생직장을 그만두지도 못했다. 게다가 결혼을 번복했으며 더구나 자기네 집을 돌봐주던 가정부와 결혼할 생각도 가졌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그는 한마디로 사회부적응자는 아닐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책 읽어보면 이런 판단이 얼마나 섣부른 판단인지를 반성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카프카는 지적인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문학에 뜻이 있었음에도 법학 학위까지 받았고, 저자의 말에 따르면 조용하고 겸손하지만 어느 순간 농담도 잘하고 유쾌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관용과 확고한 사람으로도 묘사되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저자 브로트가 언젠가 니체를 사기꾼이라며 비판하고 성토하는 자리에서 카프카는 그렇지 않다며 반박했고 그 후 브로트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어줬다고 한다. 그리고 둘은 평생지기로 살았다.

 

카프카의 연애도 그렇다. 일개의 가정부와 결혼할 생각을 했었다면 그는 연애는 해 봤을까 싶기도 하겠지만 그는 확실히 연애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밀레나에게 그렇게나 많은 편지를 보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았고 적대자가 없었다고 브로트는 말한다. 또한 그가 평생직장에 다녔던 건 밥벌이를 위한 직업과 글쓰기 예술은 날카롭게 서로 분리되어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저널리즘이 표현하는 직업과 글쓰기의 혼합을 거부했다고. 그것을 브로트는 직업과 소명을 얻기 위한 투쟁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까 글 써서 돈을 못 벌 것이라는 판단 하에 직장을 병행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글쓰기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직장을 다녔던 것이다.

 

뭐 이런 것만 보더라도 카프카가 얼마나 성실하고 선량하며 유쾌한 사람인지 짐작이간다. 그러므로 그의 사후 세간의 이목에 의해 덧씌워진 잘못된 이미지를 좀 벗겨낼 필요도 있어 보이고, 이 책은 그러기에 충분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브로트와 카프카가 친구가 된 후로 그 둘은 거의 매일 만났고 필요하면 하루에 두 번도 만났다고 한다. 과연 대단하다 싶다. 우린 아니 적어도 난 아무리 좋아하는 친구라도 거의 매일 만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에 들이는 공력도 공력이지만 매일 만나면 아무리 좋아하는 친구더라도 좀 질리지 않을까? 그럴 수 있는 이면엔 서로 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새삼 궁금하기도 하다.

 

이 책서도 카프카의 일기와 편지가 빠지지 않는다. 카프카는 작품도 작품이지만 이제 일기와 편지로 더 유명한 하지 않을까? 그의 시대나 요즘이나 편지를 주고받는 인간관계란 흔치 않아 보인다. 그런 점에서 부러운 것도 사실이고 꽤나 지적여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모든 것을 말 보단 글로써 풀어내려고 했던 카프카가 뭔지 모르게 짠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건 왜일까? 그건 하나의 깊은 확신이기도 하겠지만 말로써 풀어내지 못하는 그의 내적인 한계가 있어서는 아닐까? 그냥 네 멋대로 생각해 본다. 그래서도 그는 작가로 충실했던 거고.

 

,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 중 또 하나는 고독이라는 건데 이 책 그 이미지도 다소나마 걷힌 느낌이다. 이렇게 몰랐던 (또 알더라도 잘못 알고 있는)카프카를 알아가는 건 (작가들의 삶을 알아가는)나에겐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이다. 이 책 카프카에 대해 가장 직접으로 알 수 있는 책은 아닐까 한다. 카프카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복근에 힘을 뽝 주고 읽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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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03-27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프카는 작품 속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독특한 내면 세계가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 직장이나 옆집 이웃으로 만났다면 평범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을 것 같습니다. 실은 만나보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어쩐지.^^:
stella.K님, 저녁 맛있게 드시고,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세요.^^

stella.K 2018-03-28 14:2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막상 그 사람의 실재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람이 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걸 편견이라고 하는 거겠죠?
저는 이 책으로 카프카가 조금은 더 가까워진 느낌이긴 하지만
여전히 카프카는 아니 어쩌편 독일 문학(폴란드가 포함된)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ㅠ

2018-03-28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28 14:23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우리나라에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있지만 누구 하나 그의 친구가 평전을 써줬다는 말은
들어 본적이 없는데 역시 그 사람에 그 친구라고 해야할까요?
부럽기도 하고. 저 주위의 사람들은 저를 어떻게 평가할지
것도 참 그렇더라구요.ㄷㄷㅋㅋ

서니데이 2018-03-30 06: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 매일같이 공기가 좋지 않은 날이 이어지고 있어요.
알레르기와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stella.K 2018-03-30 13:30   좋아요 1 | URL
아, 네. 서니님도요.^^

희선 2018-04-01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프카 소설은 거의 읽지 못하고, 《카프카 평전》(이주동)을 봤어요 한국 사람이 쓴 거예요 한국 사람이 써서 잘 읽히고 괜찮습니다 작품 이야기도 조금 하지만... 카프카가 살던 때는 편지를 많이 썼지요 카프카는 브로트한테 자기가 쓴 글 다 태우라고 했지만 브로트는 책으로 냈어요 브로트만 그런 건 아니군요 카프카가 마지막에 사귄 여자도 카프카가 쓴 글을 가지고 있다가 책으로 냈는지 자손한테 물려줬는지... 이건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카프카가 쓴 글을 없애지 않아 지금 사람이 읽는 거네요


희선

stella.K 2018-04-02 13:25   좋아요 1 | URL
아, 읽으셨군요.
이책은 문체가 좀 어렵더군요.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이 좋을 것 같아요.
아무래도 이해를 돕도록 썼을 테니.

맞아요. 태우지 않고 출판을 했으니 우리가 읽은 거죠.
그런 점에서 브로트나 카프카의 마지막 연인에게 고마워해야죠.^^

서니데이 2018-04-01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주는 미세먼지가 많았지만, 날씨가 매일같이 따뜻해지는 시간이었어요.
오늘도 따뜻한 날이예요. 바깥에는 꽃이 피는 시기이고요.
stella.K님, 오늘 부활절입니다. 기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부활을 축하합니다.^^

stella.K 2018-04-02 13:30   좋아요 1 | URL
아, 고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의 성경공부 리더님이
부활절 계란을 선물로 주시더군요.
어제 못 먹고 좀 아까 점심으로 먹었습니다.ㅋ

내일 모레 비오고 조금 추워질 거라더군요.
아무래도 한식이 지나야 완전 봄날이 되는 것 같습니다.
어제는 미세먼지 보통이라더니 좀 뿌옇더군요.
외려 오늘이 좀 낫나요?
5월까지는 미세먼지낀 날이 많을 거라네요.
어쩔 수가 없는 것 같아요.^^

2018-04-03 0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4-03 1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1980년대 글동네의 그리운 풍경들
정규웅 지음 / 책이있는마을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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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나에게 왠지 모를 원죄의식이 있다.

어려서부터 작가가 꿈이었던 내가 그 꿈을 버렸던 건 순전히 80년대를 잘못 인식한 때문이었다. 즉 당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단 말이다. 80년대 하면 군사독재로 대비되던 시절이었다. 민주화와 최루탄(또는 화염병), 주사파, 전두환의 정권 탈환 등 그야말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지러운 시절이었다. 그런 가운데 문학만이라도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청정지역으로 남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마저도 참여문학이었으니. 숨이 막혔다. 더구나 그 시절엔 민주화 하면 빨갱이 공산당과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어 문학 역시 오염됐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정말 머리가 크긴 커졌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글을 써서 돈을 번다는 건 들이는 노력에 비해 남는 장사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한번 읽고 말 책. 그나마 거들떠라도 보면 다행이다. 쳐다도 보지 않을 책이 쳐다라도 보는 책 보다 훨씬 많은 세상에서 내 책이 후자에 들 가능성을 보장 받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독자로서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인데 그럴 때 작가는 어떤 마음이겠는가를 생각하면 도저히 그 참담함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우연찮게도 90년대 중반에 들어설 무렵 모처에서 작가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땐 그나마 또 그렇게 되려고 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가서야 되겠나 그런 마음으로 다시 작가의 꿈이 살아나고 있을 때였다. 타이밍도 기가 막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원했던 장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작가는 작가였다. 그땐 정말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 신춘문예 따위는 가볍게 제치고, 우리나라 대표문학상 이를테면 이상이나 동인 문학상 수상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그들이 부럽지 않았다. 어쨌든 이렇게 첫발을 내딛었다는 게 중요했으니까. 하지만 쉽게 얻은 기회는 또 쉽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법이다.

 

하지만 나락에도 길은 있더라. 다시 못 일어날 것만 같은 내가 다시 일어나 찾아간 곳은 시인 김정환 선생이 하시는 창작 학원이었다. 창작은 학교에서나 배우는 건줄 알았는데 이런 학원이 있다는 게 신기했고 거길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은 어찌 보면 신선이 사는 곳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80년대 참여문학을 했던 작가들이 강사로 활동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내심 놀라웠다. 그토록 거부했던 내가 참여문학의 당사자들을 코앞에서 보게 되다니.

 

그들은 하나 같이 강의 도중 지나간 세월을 얘기했다. 하긴, 그때가 90년 대 중반으로 그들 가슴속엔 그 뜨거웠던 80년대를 아직 잊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너무 빨리 그 시절을 잊고 사는 것 같았다. 또 그 때문에 내 눈엔 그들이 더 초라하고 외롭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80년대를 견뎠던 그들의 기백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신선같이 앉아 수강생들에게 글쓰기나 가르친단 말인가. 물론 그들의 하는 일이 원래 글을 쓰고 그렇게 필요하면 후학도 가르치고 하는 일이겠지만 뭔가 모를 낮선 느낌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은 또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시절 문학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것이다. 저 엄혹한 80년대 참여문학을 해서 내가 숨이 막혀 문학을 멀리했던 것이 아니라, 어쩌면 참여문학이 나를 거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즉 난 현실인식을 전혀 하지 못하는 미욱한 독자였던 것이다.

 

책은 앞부분에서 한수산 작가의 필화사건 다루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아는 지인과 술자리에서 몇 마디 시국을 논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문을 당한 사건이다.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지 않는가. 그 앞에 자유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런 나라에서 비판 좀 했다고 끌려가 고문을 당했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이게 빨갱이 공산주의와 다를 게 뭐가 다르단 말인가?

 

박완서 작가는 문학의 효용은 우리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위안을 주고 힘이 돼주는 것(195p)이라고 했다. 어느 시대고 어렵지 않은 시대는 없었겠지만 이 시대의 작가들은 거의 대부분 4, 50년대에 태어나 왕성한 필력을 자랑하던 시대다. 그 시절 그들의 나이는 대략 3, 40대의 나이었을 것이다. 가장 혈기가 왕성하고 그들의 붓끝이 가장 날카로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그들이 민중을 대변하고 대신 울어주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일을 대신해줄 수 있을까? 그런데 내가 보는 시각이 전혀 틀리지마는 않은 것이 얼마 전 읽은 전성원의 <길 위의 독서>에서 그런 말을 한다.    

 작가들은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을 끊임없이 소환해낸다. 우리 전통 장례 풍습으로 치자면 유족과 함께, 유족들을 대신해 곡해주는 사람들인 셈이다. 우리 문학은 민주화를 통해 ‘5월 광주에 대한 막중한 부채의식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빠르게 현실에서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중략)

존재하는 현실을 부정하도록 가르친 문학이 1990년대 이후 위기에 직면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소설 보다 현실이 더 극적인데 누가 문학 작품을 사서 읽겠느냐는 지적도 있지만,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에서 현실과 직접 대면하려는 자세마저 보기 어려워진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없다(183p). 

 

그렇다면 내가 그 창작 학원에서 본 80년대 작가들이 90년대가 되면서 신선 같아 보였던 것은 아주 잘못 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의 이슈가 주어졌을 때 전력투구하다 그것을 달성하거나 사라져버리면 그 순간 노쇠해져 버리는 것이다. 80년 대 참여 문학을 했던 그 쟁쟁했던 작가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런데 지금 또 생각하는 건, 그 시절 문학이 정말로 참여문학 일색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대세였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든 작가들이 참여문학을 했던 건 아닌 것 같다. 또 이것을 두고 작가들 간에 파가 나뉘어졌을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1982년부터 내가 어떤 책을 읽어왔나 소위 완독 리스트를 기록해 왔는데 그해의 베스트셀러를 읽기도 했다. 물론 그건 별로 참여문학의 성격을 띠지 않는 책이었다. 그런 것을 보면 참여문학 일색은 좀 과한 표현이었을지도 모른다.

 

80년대에 문학 활동을 했던 작가들은 80년대 주류문학이 해체되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미리 앞서 내다보고 활동을 했을지 그건 모를 일이다. 그 시대의 문학이 어떤 역할을 했으며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작가 보단 평론가나 기자들이 더 잘 알지 않을까? 우린 또 그것을 알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작가가 어떤 사람들이고 그들의 활동상을 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 책이 나와 줘서 얼마나 반갑던지. 무엇보다 저자가 신문사 문화부 기자 출신이다. 난 이런 문화부 기자들이 쓴 책을 좋아한다. 그들이 직접 발로 뛰고 간결한 문장으로 써낸 책들이 좋은 것이다. 작가의 작품은 내가 조금만 노력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작가와 작품의 이면은 잘 모를 수 있다. 그럴 때 기자들은 그런 걸 취재해서 독자들에게 알려줄 수가 있다. 작가는 너무 힘들다. 물론 세상에 힘들지 않은 직업이 몇이나 되겠냐만 난 다음에도 생이 있다면 그땐 작가를 취재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

 

책은 80년대 활동했던 문인들을 다룬 만큼 물론 민주화를 비껴가지 않는다. 하지만 역시 당대 문학이 참여문학만을 의미하지 않듯 한 작가, 한 작가 그들 문학의 특징과 삶을 잘도 포착해냈다. 읽다보면 이렇게나 많은 작가들이 자기 색깔을 내며 활동할 때 나는 너무 우리나라 문학을 과소평가하고 홀대해오지 않았나 반성하게 된다. 70년대는 나도 한창 자라느라 잘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80년대는 뭔가 사고 체계도 얼마만큼 자리를 잡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난 우리 문학을 보는 안목을 키우지 못했다.

 

지금도 난 우리나라 문학이 재미없는 줄 안다. 그건 맞는 말이기도 하고 또 어느 점에선 틀린 말이기도 할 것이다. 작가들이 문학을 생산하면 독자는 소비할 줄 알아야 하는데 그 사이를 연결시켜고 유통시키는 중간자들(평론가, 기자, 서평가 등)의 역할이 너무 미약했던 건 아닌가 한다. 뭔가 여기저기서 얻어 들리는 말이 있어야 사 볼 생각도 하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나라엔 문학 권력에 대한 비판 소리가 높다. 작가(가 되려는 자)와 심사위원간의 유착이 어느 정돈지 나 같은 독자는 잘 알지 못한다. 단지 그것에 대한 좋고 나쁨의 평가의 몫을 독자에게 돌려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기자나 평론가를 포함한 서평자들은 어디에 뭐가 있다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역할을 좀 더 충실히 해줘야 하지 않을까?

 

특이한 건 저자는 현존하는 작가 몇몇을 빼놓고 매번 그 작가가 언제 태어나서 언제 죽었는지를 정확히 밝히고 있다. 그러고 보면 80년대 쟁쟁했던 작가들이 지금은 거의 사라진 느낌이다. 다른 누구는 몰라도 나 개인으론 이청준과 박완서, 박경리 이 세 작가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도 어디선가 글을 쓰고 있을 것만 같다.

 

그런데 저자가 옛 사람이긴 한가 보다. 간혹 읽다보며 여류라는 말을 여과 없이 쓰고 있어 눈에 거슬렸다. 이건 교열 과정에서라도 뺏어야 했던 건 아닐까? 모처럼 선물 같은 책에 이것 하나가 오점으로 남았다. 다음엔 출판사의 좀 더 세심한 배려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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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17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단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박완서, 박경리 같은 원로작가들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그분들이 살아있었더라면 쭉정이 작가들이 설치는 문단을 비판했을 거예요.

stella.K 2018-03-17 12:26   좋아요 0 | URL
그나마 조정래나 황석영 작가가 아직은 건재하잖아.ㅋ
정말 80년대 작가는 읊을만한 작가가 있는데
90년대부턴 과연 30년 뒤에도 기억될만한 작가가
얼마나 있을지 몰라. 기껏해야 김영하나 은희경
김연수 정도가 될 것 같은데 80년대 작가에 비하면
현저하지. 문학의 위상을 키우지 못한 탓도 있는 것 같아.ㅠ

2018-03-17 1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8-03-17 12:31   좋아요 0 | URL
와우, 아직도 신춘문예 응모! 대단하네요.
사실 우리나라는 등단 나이를 설정해 놓는 경향이 있죠.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말 정도로 잡고 있잖아요.
그 나잇대 등단하면 거의 천재죠.
등단한 나이가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신춘문예도 신춘문예지만 일반인도 글을 써서
등단할 수 있는 창구가 많이 열려야 할 텐데
우리나라는 참 그런 게 많지 않아 아쉬워요.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