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언어 - 더없이 꼼꼼하고 너무나 사적인 무라카미 하루키어 500
나카무라 구니오 지음, 도젠 히로코 엮음, 이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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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600페이지가 넘는 것을 보고 솔직히 좀 식겁했다. 어느 정도 도톰한 책을 선호하긴 하지만 6백 페이지는 좀 부담스럽다. 하지만 하루키의 많은 저작물을 생각할 때 6백 페이지는 결코 두꺼운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발췌독을 하게 되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웬걸, 막상 받고 보니 풋 웃음이 나왔다. 책 모양이 좀 특이한데, 손바닥만 한 단어 카드 묶음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정말 "야레야레, 하루키."란 말이 절로 나온다. 여기서 야레야레란 "이런, 이런" 뜻이라고 한다. 


사실 난 하루키의 작품을 그리 많이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 번씩 하루키에 관한 책이 나오면 관심이 간다. 세상엔 저명한 작가들도 많고 그 작가의 저작물은 물론이고 그에 관한 책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하루키만큼 많이 나오는 작가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게 하루키 한 사람에 대한 부가가치는 생각보다 큰 것 같다. 오죽하면 이젠 하루키스트 또는 무라카미 주의자란 말이 있을까. 이만하면 (전에도 느끼긴 했지만) 그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도대체 하루키가 누구라고 글 깨나 쓰는 먹물들은 그에 관한 책을 쓰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것일까. 이 책도 보라. 사전식으로 정리하긴 쉬운 일인가.


그런데 반해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막상 하루키 자신은 자신이 이룬 문학적 업적에 대해 덤덤한 자세를 견지한다. 그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만 특별한 표정이 없다. 웃는 얼굴도 없지만 찡그리는 것도 없다.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을 수 있을까? 그렇게 많은 책을 쓰고 번역을 했음에도 글쓰기가 천명인 양 흔들림이 없다. 그렇게 많은 책을 냈다면 앓는 소리나 잰 척을 해도 누가 뭐랄 사람도 없을 텐데 그는 항상 똑같은 표정을 짓는다. 난 그저 내가 할 일을 할 뿐인데 뭐가 문젠 가요 하는 식이다. 글쎄, (너무도 유명한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젊었던 어느 날 야구장에서 튀어 오르는 야구공을 보면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날부터 글을 썼다고 했는데 도대체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 마음을 매일 골 천 번을 먹어도 끝내 어느 지점에서 절필하고 문단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작가도 수두룩 빽빽한데, 어떻게 하루키는 나이 70이 넘도록 한결같은 자세를 유지하며 그처럼 많은 사람들의 총애를 받는 작가가 될 수 있는지 부러워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는 야구공이 튀어 오르는 순간 우리가 모르는 번개를 맞았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되기로 한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 번개 말이다.


아무튼, 그런 하루키의 한결같음을 재수 없어하는 사람도 있는가 보다. 하지만 하루키가 그와 정반대의 사람이 되어도 똑같이 싫어하지 않을까? 또 누구는 하루키가 그런 자세를 유지하는 건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이 배어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앞서 말한 대로 그의 작품을 별로 즐겨하진 않지만 하루키 자체는 존경하는 쪽이다. 이 세대가 어떤 세대인가? 책을 정말 안 읽는다. 이건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일본도 책을 안 읽기는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럼에도 하루키는 그것에 크게 상관하지 않고 작가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상 꾸준히 글을 썼고 책을 냈다. 내가 그를 존경하는 건 그것이다. 그의 문학적 업적 때문도 아니고, 그가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기 때문도 아니다. 꾸준히 책을 낸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어떤 신인 작가 또는 작기 지망생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많은 책을 냈어도 그의 시작은 데뷔작 한 권에서 시작이 되었을 테니까.   


그는 이제 문학에 있어서만큼은 하나의 왕국을 건설했다. 그야말로 하루키 월드다. 거기에 하루키스트도, 무라카미 주의자도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우리는 일본의 모든 것을 싫어할 수 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하루키만큼은 싫아할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하루키만 추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역시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갖기까지 실상 미국 문학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니까. 특히 스콧 피츠제럴드. 많은 사람들이 하루키스트, 하루키언을 자처할 때 그는 피츠제럴드언이었다. 그는 미국 문학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미국 작가들의 작품만 번역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루키를 따라서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책을 보면 하루키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번역을 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그는 번역이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 말은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하루키스트가 되려면 정말 바쁘겠구나 싶기도 하다. 영어도 잘하고, 번역의 기술도 배워야 할 테니. 뭐 그게 아니어도 하루키가 좋아한다는 미국 문학은 꿰뚫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에 관한 책들이 많기도 하지만 이렇게 사전식으로 일목요연하게 나오기는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개인적으론 기대 이상이었다. 물론 저마다 온도차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루키에 대해 웬만큼 아는 사람은 이 책이 뭐 대단한가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소설은 나름의 장점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취약한 점도 없지 않다. 즉 내가 알고 이해한 게 맞나 싶을 때가 있다. 특히 장편 같은 경우 이 사람이 그 사람 같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 맞나 작가의 서사를 따라간다는 게 가끔 버거울 때가 있다. 물론 독자의 자유 중 오독의 자유도 있다지만 딴 데 가서 남의 다리 긁고 있는 것도 작가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이다. 그 책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어느 정도 알면 오독률을 줄여 볼 수도 있고,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읽은 척할 수도 있을 테니 이런 책 한 권쯤 옆에 끼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매 페이지마다 삽화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도 꽤 즐길만하다.

 

참, 우리가 언제부턴가 자주 쓰는 '소확행'은 알고 봤더니 하루키가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란 글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 뜻으로 처음 쓰기 시작한 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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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10 19: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10-10 19:45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러게요. 정말 작죠?
소설 싫어하는 사람은 하루키 정말 최악일 수도 있어요.
실제로 오래 전 저 아는 사람은 읽다가 머리에 쥐났다고 하더군요.
근데 전 이 책 정말 괜찮았어요.아무 생각없이 읽기만 하면 되니깐요.ㅋ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 이윤기가 말하는 쓰고 옮긴다는 것
이윤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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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의 책을 읽으니 내 안에 책 읽는 뇌가 모처럼 세로토닌이 발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읽으면서 문득문득 이윤기처럼 살면 좋겠다 싶다. 인생을 흔히 고해니 고통의 연속이니 하며 세상 못 살 것처럼 말하기도 하는데 꼭 그러기만 하겠는가? 인생은 유레카다. 발견에서 기쁨을 누리고 희열을 느끼는. 그런 것 없이 재미없어 어찌 살겠는가.


그는 책에서 자신에겐 행복한 징크스가 있다고 했다. 그는 뭔가에 관심이 생기면 꼭 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여건과 환경이 생긴다고 했다. 이를테면 오랫동안 작가와 번역가로서 어떤 책이나 분야에 관심이 생기면 꼭 출판사로부터 그 분야에 대한 번역이나 조사를 의뢰받는다고. 원서를 정독할 절호의 기회가 생기고,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즐거움에 출판사에선 돈까지 준다고 하면서 '책 읽기', '책 옮기기'에 관한 한 자신은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쯤 되면 그는 꽤 행운아처럼 느껴진다.


이왕 행운아란 말이 나왔으니 잠시 생각해 보자. 그거 왠지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것만 같다. 그렇지 않은가? 남은 그렇게 좋은 일이 많이도 생기는데 나만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행운도 하늘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작가 이윤기는 자신이 그럴 수 있기까지는 어느 정도 떠들고 다닌다고 괄호 쳐 놓고 얘기한다. 작가의 괄호 친 말은 보통 내용과 크게 상관이 없지만 그래도 참고로 밝혀둘 때 쓰이기도 한다. 우린 바로 이런 괄호 쳐 놓고 하는 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행운이라는 것도 그냥 가만히 있는데 굴러들어 오지 않는다. 그것도 알고 보면 준비된 자에게 들어온다. 그러니 행운을 원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떠들어라. 그래야 행운이 알아듣고 그 사람에게로 갈지 모른다.


그런 것을 보면 난 왠지 작가가 인생의 묘미를 아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겸손하게 말해 '행복한 징크스'란 것이지 알고 보면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어 가는데 타고난 재주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즉 좋게 말하면 책략가고, 나쁘게 말하면 꾀돌이라고나 할까.


거기에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야가 있어야 하고, 그것을 요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가 관심 있어하는 쪽은 늘 책이었다. 그는 60년 대 초 한 출판사에서 초등생을 겨냥한 각각 100권짜리 소설 전집과 위인 전기을 읽으면서, '일찍이 나에게, 장차 무슨 짓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다고 술회한다. 그의 입말이 참 좋다. 무슨 짓을 하면서, 어떻게 사냐니. 


그러고 보면 꽤 일찍 발견한 것 같다. 그것을 발견하고 가슴은 얼마나 뜨거웠겠는가. 그리고 그건 훗날 번역으로, 신화 연구로, 소설가로 아깝지 않은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직함으로 그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지만, 많은 독자들이 기억하기는 그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와 움베르고 에코의 여러 소설 그중에서도 <장미의 이름>을 번역한 것으로 유명하다. 사실 <희랍인 조르바>의 번역은 그 말고도 몇 명의 번역자들이 더 있다. 그리고 이윤기를 포함해 대부분 영역을 번역한 것으로 아무리 번역이 뛰어날지 몰라도 중역의 오명을 피하지 못한다. 게다가 완역본도 최근에야 나왔다. 물론 난 아직 그 누구의 번역본으로도 읽지 못했지만 그 누구의 번역본을 읽는다면 이윤기 번역본은 꼭 한번 읽어보고 싶다. 그만큼 오래전부터 그의 번역본이 갖는 아우라가 결코 작지 않으며, 그 역시 그 소설은 자기 문학의 '성서'라고까지 했다. 그러니 이윤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번역본을 읽지 않는다면 그건 그에 대한 예의는 아닐 것이다. 


또 그래서일까? 이윤기에게서 왠지 조르바의 느낌도 나는 듯하다.(나는 책으로는 못 읽었지만 영화로는 봤다. 영화 속 조르바 역을 맡은 앤서니 퀸은 그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 책에서 조르바의 그림자를 느낀다는 건 엉뚱하게도 그가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 번역을 언급할 때다. 움베르토 에코가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당연 이태리어로 글을 썼겠지만, 그는 이태리어를 번역했던 것이 아니고, 영어로 된 것을 번역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번역은 철학자 강유원 박사로부터 찬사와 오명을 동시에 받는다.


옛날 일제 강점기 아무리 유명한 작품도 영어나 일어를 중역으로 하더라도 그게 그렇게 흉이 안 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독자들의 욕구가 높아져 중역은 웬만해선 읽지 않으려고 한다. 게다가 우린 학(學)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한가. 물론 학문을 중요시 여기고 그것에 완벽함을 기하는 거야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다가 사대주의에 갇힐 수도 있다.  


그도 자칫 그럴 뻔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이 말하는데 무엇으로 반박하겠는가. 그러나 그것으로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있으면 그건 우리가 알던 이윤기가 아니다. 그는 에코의 소설을 비롯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오독과 오역으로 인한 질타 속에서도 '중세 이후 유럽의 예술가들이 그토록 다양하게 변주하던 신화에 대해, '창'을 '도끼'라고 썼다고 해서 '문화를 오역한 자'로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111p)라며 반박했다. 그는 어쩌면 학적인 완벽함보다 사상의 자유로움이 더 중요함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싶다. 그것이 문득 자유인으로 살았던 조르바와 오버랩되기도 했다.


그는 무엇이든지 마음먹은 일은 하고야 마는 성격이다. 우리나라는 단편이고 장편이고 소설을 쓰는 사람이면 무조건 다 '소설가'라고 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오직 장편을 쓰는 작가에게만 그 이름을 허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라이터(글 쓰는 사람 정도)만을 허락할 뿐이다.  그는 거기서 충격을 받았을까? 나중에 기어이 장편소설을 쓰고 기어코 노블 리스트가 되었다. 그건 좀 우리나라도 배워야 할 것 같다. 미국만 해도 그렇게 장편을 쓰는 소설가를 대우하는데 우리는 아직도 장편을 꺼려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가 스스로 소설은 죽었다고 말하는 건 바로 이런 분위기가 배면에 깔려있기 때문은 아닐까. 쓰기도 전에 패배의식부터 갖게 되는 이 분위기는 언제쯤 걷히게 될지. 이윤기 작가는 그것을 결단코 허용하지 않는다. 소설 가지고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생각을 하냐고 오히려 나무라는 듯하다. 그래서 그럴까, 우리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이 책 곳곳에 깔려있다. 문득 답답해지거든 문학 선배로서의 그에 대한 생각에 귀를 기울여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호기심이 많고 의욕이 넘치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도 다르다 싶다.


책을 읽으면 그가 글을 쓰는지, 말을 하는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쉽게 쓴다. 한마디로 착착 감긴다. 그걸 두고 껍진껍진한 입말이라고 한다는데,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싶은 대로 쓰는 구어체 즉 입말을 의미한다. 그리고 앞으로 글의 추세는 이렇게 갈 것이라고 한다. 그것을 작가 박경덕은 생각하는 대로 글을 쓰지 않고, 말하고 싶은 대로 쓴다는 '말글'로도 설명하고 있는데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그는 호기심이 많고 지식욕이 대단했다. 그것이 그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욕구만으로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아 보인다. 지구의 한 귀퉁이에 틀어박혀 숨만 쉬고 살지 말자. 그런 욕구가 있어야 세상을 지루하지 않고 재밌게 살 수 있다.


그런 욕구로 그는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오래 장수하며 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오래 살지 못했다. 지금도 그는 책상에 앉아 번역에 몰두하던가, 지중해 어딘가를 헤매고 다닐 것만 같은데 말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꽤 된듯하다. 아직도 그의 책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게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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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19-07-15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새 리뷰를 쓰셨네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노땅 소리 듣겠지만
분명 요즘 작가들은 스텔라님 어린 시절보다 넓이는 모르지만 문학적 깊이에서
작가적 역량이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 시절 문학이 주는 감동을 퍼스널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고 나서
게임이나 스마트폰 검색 같은 생활 유희가 문학의 자리를 대체했기 때문이죠.

더 이상 이윤기 선생 같은 분들을 만나기 쉽지 않은 문학적 토양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이윤기 작가의 부재가 더 아쉽습니다.
스텔라님도 공감하시죠.


stella.K 2019-07-16 15:05   좋아요 0 | URL
그리 말씀해 주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이곳에 따로 글을 올리지 않아도
아깝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잘못 생각했네요.
그러면 니르바나님과 이렇게 안부 인사도 못하는 건데...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잘 지내시죠?

맞아요. 이윤기 작가는 정말 아타까운 작가입니다.
언젠가 EBS에 나와 인문학 강의도 했었는데
그게 왜 그렇게 지금도 선명한지.ㅠ

2019-07-16 11: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16 15: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6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윤기 선생의 <그리스 로마 신화>에 처음 자전거를 탄 딸을 위해 선생이 자전거를 뒤에서 밀어주는 일화가 나와요.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선생은 그 일화를 언급하면서 자신을 ‘신화를 처음 읽는 독자를 위해 천천히 뒤에서 밀어주는 존재’라고 묘사했던 것 같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중학생인 저를 신화의 세계에 갈 수 있도록 천천히 밀어준 분이 이윤기 선생이었어요. 그 분 아니었으면 신화에 대한 매력을 몰랐을 거예요. ^^

stella.K 2019-07-16 19:58   좋아요 0 | URL
맞아. 나도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분을 통해 알게 되었지.
그리고 소설도 읽고, 에세이도 읽었는데 후회해 본적이 없어.
아직도 읽은 책 보단 안 읽은 책이 많은데
따님하고 쓴 플루타크 영웅전인가? 그게 여러 권 있더군.
근데 출판된지가 꽤 돼.
언제고 이분의 선집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도 따님이 정리한 것으로 알고 있어.
참 아까운 분이지.

서니데이 2019-07-18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윤기 선생은 번역서가 많지만, 이 책은 번역서가 아닌 이윤기 선생의 책이네요.
오늘 날씨 많이 더웠는데 잘 보내셨나요.
편안한 밤 되세요.^^

stella.K 2019-07-19 14:03   좋아요 1 | URL
직접 쓴 글이 생각 보다 많아요.
원기왕성한 분이죠. 전 항상 비실비실인데.ㅠ
여러모로 부러운 분이시죠.

페크pek0501 2019-07-21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의 출현이십니다. 환영합니다!!!!!

이윤기 선생의 작품을 저도 몇 편 읽었어요. 그의 부고 소식에 안타까웠던 게 생각납니다.

stella.K 2019-07-21 19:54   좋아요 0 | URL
잘 지내시죠? 잠깐 짬을 내어 올렸습니다.
읽기는 오래 전에 읽었는데. 올핸 이상하게 완독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그날 그날 내키는 대로 읽고 있습니다.
그래야 제 방에 쌓아둔 책들 손떼라도 묻혀 보겠더라구요.
물론 이 책은 완독했습니다. 오랜만에 이윤기님의 책을 읽으니
좋더군요. 더구나 이런 글쓰기 책을 좋아하거든요.^^

2019-08-13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3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
이슬아 지음 / 헤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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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이 책은 언제 샀나?

 

A. 책이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산 것으로 기억한다. 사 놓고 조금씩 읽다가 최근에 다 읽었다. 웬만치 관심을 갖지 않으면 신간은 잘 안 사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이상하게 관심이 많이 갔다. 책 자체 보다는 작가에게 관심이 많이 간 것 같다.

 

우연한 기회에 이 작가의 활동을 접했다. 자신의 SNS에 구독자 모집을 하고 독자의 이메일로 한 달에 20번. 자신의 글을 월요일부토 금요일까지 전송한다. 그리고 구독료가 1만원이란다. 그게 꽤  흥미로웠다.

 

Q. 어떤 생각이 들었나?

 

솔직히 처음엔 좀 놀라웠다. 과연 한 달에 만원씩 내고 볼만한가? 책이란 서점에서 값을 치르고 사서 보는 게 일반적인데 굳이 만원씩이나 내고 이메일로 본다는 게 어떤 의민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작가가 그렇게 독자들에게 전송한 글들을 모아 책을 냈다. 어차피 이렇게 책으로 나오는데 책으로 사 보지 굳이 돈을 더 줘가며 이메일로 본다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생각이 바뀌더라. 책을 사 보는 독자의 입장에선 그런 생각 당연한 것 같은데, 작가의 입장이라면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한 번 내봤고, 한 때는 나도 연재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블로그에 몇 번 하다 중단했지만.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났다. 나는 그렇게 연재를 하다 중단했지만 이 작가는 그것을 무려 1년을 했다. 그것도 당당히 구독료를 받고. 이 작가는 했는데 왜 나는 못하고 중단했을까 갑자기 회의가 밀려오더라.

 

Q.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생각이 바뀌지 않았던 것 같다. 비록 하다 중단 했지만 내가 연재를 했던 때가 아마 10년도 훨씬 전이었던 것 같다. 블로그에 올리고 댓글 호응 받는 것도 감지덕지지 어떻게 독자에게 돈을 받겠는가. 그땐 그런 생각에 감히 꿈도 꾸지 못했다. 정말 격세지감이란 생각이 든다.

 

더구나 그때나 이때나 책은 무조건 출판사를 통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다. 조금만 뚝심을 발휘했다면 그렇게 연재했다 책으로 냈을 것이다. 물론 그후 비슷한 방식으로 나도 책을 냈지만 여전히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건 정말 새로운 패러다임 같다. 

 

사실 이 책을 사기 전 작가에 대한 기사를 어느 무가지 잡지에서 보았는데 자꾸 보게 되더라. 어떻게 이런 작가가 있을 수 있을까? 자꾸 궁금해지니 결국 책도 따끈따끈한 신간일 때 사 보게 되는 것이다.

 

Q. 책을 꽤 오랫동안 읽어 왔다. 책에 대한 생각이나 기준 뭐 그런 게 있을 것 같은데...

 

 A. 책을 꽤 오래 전부터 읽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책을 오래 읽기도 한다. 책 한 권을 읽는데 짧아야 일주일이고 열흘을 넘겨 읽는 게 보통이다. 그러다 보니 많이 읽지도 못했다.

 

특별한 기준이 있는 건 아니고 많이 오래 읽다보니 나름의 분류가 가능해졌다. 이를테면, 어려운 책, 쉬운 책, 객관적으론 좋으나 개인적으론 별로인 책. 남들은 그저 그렇다고 하는데 나는 좋은 책, 남도 좋고 나도 좋은 책. 좋은지 나쁜지 남도 모르겠고 나도 모르겠는 책 등등이 있을 것 같다.  

 

그중 가장 좋은 책은 나를 대변해 주거나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책이 아닐까? 더 나아가 행동하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 같다.  

 

솔직히 <안나 카레니나>나 <닥터 지바고>가 세계적인 고전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걸 읽고 심장이 뛰거나 무슨 행동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 책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오히려 남들한텐 별 것 아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이 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이 책은 객관적으로 보면 그냥 에세이다. 더구나 난 작가의 나이를 한참 전에 지나왔다. 작가 특유의 진지함과 재기발랄함, 요즘 2,30대가 이런 생각을 하며 사는구나, 새롭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주 많이 감동스러운 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확실히 나의 가슴을 뛰게 했고 뭔가 행동하게 만들었다. 

 

Q. 그게 뭔지 말해 줄 수 있나?

 

A. 이를테면 나도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독자 직거래로 이메일 연재를 시작했다. 벌써 두 달째다. 다 이 작가 덕분이다. 작가가 아니었다면 난 그렇게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는 건 누가  최초로 했는지 모른다. 이슬아 작가도 어떤 작가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자신도 따라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쓰는 건 자서전? 자전 에세이 또는 자전 소설? 요즘엔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따로 두질 않으니 좀 애매하긴 한데 아무튼 그런 계통(?)의 글을 쓰고 있다. 

 

제목은 <기억 수집가-유년시절>이다. 뭔지 감이 올 것이다. 그렇다. 자서전이든 자전 소설 에세이든 그건 쓰는 사람이 온전히 기억에 의해 쓰는 것이될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붙여 보았고 현재는 유년시절에 관해서만 쓰고 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유년시절에 관한 것만으로도 결코 작지않은 분량이 될 것 같아서다. 그냥 어렸을 때 기억 나는대로 두서없이 자유롭게 쓰고 있는데 시간이 갈수록 시간순으로 배열되는 느낌이다. 아무튼 유년시절의 기억을 자유롭게 쓰는 중이다.

 

Q. 두 달째 이어 온다면 구독자가 꽤 있다는 말인데 직접 독자를 상대로 글을 전송한다는 건 어떤 느낌인가.

 

A. 구독자가 많은 건 아니다.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있고 없고의 차이인 것 같다. 난 정말 구독자가 한 사람도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구독자를 모집하는 광고를 올렸을 때 많이 떨렸다. 나 역시 안 해 보는 일을 하는 것이고 파워블로거도 아니기 때문에 과연 구독자가 있을까 싶었는데 놀랍게도 있었다. 그것도 9명이나. 광고에 그런 문구를 넣었다. 단 한 사람만 신청해도 그 사람을 위해서 쓰겠다고.

 

사실 이 문구는 이슬아 작가가 처음 시작할 때 썼던 걸 벤치마킹 한 것이기도 한데 지금이야 핫한 작가가 됐지만 처음 광고를 했을 때만해도 얼마나 두렵고 떨렸겠는가. 누구나 처음은 있지 않은가. 독자가 많고 적은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내 글을 읽어주겠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적잖이 안도했고 기뻤다.    

 

이슬아 작가는 일주일에 다섯 번을 보내준다는데 그건 너무 버거운 것 같고, 나는 거기서 하루를 뺀 4일 그러니까 목요일까지만 보내는데 처음엔 그것도 좀 버거웠던 것 같다. 지금은 어느 정도 익숙해져서 해 볼만하다. 

 

보내면서 순간순간 이 작가를 생각했다. 처음에 이 작가도 그랬을까? 나 보다 어리지만 당차고 배울 게 많은 작가란 생각이 든다.

 

 

Q. 아까 출판사를 통해 책을 내봤다고 했다. 지금은 출판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독자에게 연재를 보내고. 그 차이나 장단점은 뭔가?

 

음...작가중엔 연재를 싫어하는 작가가 있다. 대표적인 작가가 하루키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그런 말을 했다. 매일 일정량을 써서 어딘가에 보내는 것이 부담스러워 싫다고. 그 양반은 정말 그럴 것 같다.

 

나 같은 경우엔 꼭 해야하는 의무가 있지 않으면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적어도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 마감이 있어야 쓸 생각이 난다. 그건 아마도 오래 전, 교회에서 연극 대본을 썼는데 마감에 시달리며 썼다. 그게 몸에 베인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나는 연재가 좋은 것 같다. 

 

또한 작가와 고독을 거의 동의어로 보고 작가는 철저하게 고독속에서 글을 쓴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어떤 작가는 적당히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취미 활동도 겸하면서 즐겁게 글을 쓰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나 같은 경우도 철저한 고독속에서 글을 못 쓰겠더라. 아마 그래서도 대본 쓰기를 즐겨했던 것 같다. 대본은 어느 정도 배우들과도 소통하고 관객들의 반응을 보기도 하는데 난 그게 좋다. 이를테면 이 일이 그런 것 같다. 독자와 간간이 소통하며 글을 쓴다. 난 그게 즐겁다.  

 

하지만 이 방법이 꼭 다 좋은 건 아니다. 출판사를 통하면 일단 뭔가 보호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편집자와 교정을 봐주는 사람이 있어 다소 부족하고 실수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다. 또 일정 원고료를 받기 때문에 손해 볼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비해 독자 직거래만으로 언제 돈을 모으겠는가. 유명한 작가가 되지 않는 이상. 게다가 편집이며 오타, 맞춤법 심지어 광고까지 작가가 다 해야한다. 피곤한 일이다. 오타나 맞춤법의 경우, 분명 세심하게 뜯어보고 전송을 했는데 다음 날 다시 보니 어떻게 내가 이런 글을 보낼 수가 있을까 해서 다시 문장을 다듬어 보낸 적도 있다. 특히 오타는 좀비같고 신출귀몰하기까지 한다. 이걸 독자에게 보냈다고 생각하면 경악할 정도고 정말 이 일은 오래 못할 일이다 싶다.

 

하지만 작가라면(또는 작가를 지망생이라면) 한 번 정도는 수련 삼아 꼭 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작가의 마음은 독자를 향해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출판사에 가 있고 기타 여러 문학상에 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서 소기의 목적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건 당연한 것 같다. 시스템이 그러니까.

 

하지만 이 일은 온전히 독자만 생각할 수 있다. 마치 창호지 하나를 두고 글을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면서(물론 아주 모르지는 않지만) 그들의 실루엣을 앞에 두고 글을 쓰는 것 같다.

 

게다가 작가가 직접 원고지 한 장 팔아 보지 않고 작가의 삶을 논할 수가 없을 것 같다.ㅎ 정말 작가가 모든 것을 다 해 보면 조금 과장해서 출판사 하나 차리겠다 싶다. 실제로 이슬아 작가는 <헤엄>이라는 1인 출판사를 운영중에 있다.

 

그리고 공부도 정말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책이 혹시 글 쓰는데 뭔가의 도움이 되지 않을까, 영감을 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정말 많이하며 보게 된다.

 

Q. 정말 생활이 많이 달라졌을 것 같다.

 

A. 하루살이 인생이란 말도 있는데 정말 이 일에 있어서 만큼은 오직 이 달만 생각한다. 그 다음은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한다. 첫 달은 그렇게 9명의 구독자가 있어 비교적 순탄하게 시작을 했다. 그리고 그 한 달이 거의 다 지나고 있을 때 다음엔 또 어떻게 하지? 막막했다. 무엇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은 하는데 이번에 구독한 독자가 다음 달에도 여전히 구독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실재로 전달의 구독자 거의 반이 이번엔 구독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뭔가를 잘못했나, 내가 뭘 잘못했나 약간 의기소침해 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빨리 떨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다시 처음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 사람을 위해 쓰겠다는 마음으로 말이다.

 

여전히 나에겐 독자로 남아 주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새롭게 신청하는 독자들이 있다. 물론 새로운 독자들 거의 대부분은 나의 지인들이다. 내가 어디가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함부로 하는 사람이 아닌데 내 글 한 번 읽어 보라고, 딱 한 달만 읽어 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읽어도 좋다는 장삿꾼 같은 멘트를 하고 있다.ㅎ 그야말로 매문이다. 내 글을 팔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의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몇주 전, 거의 10년만에 친구를 만났는데 마치 목적있어 만난 것처럼 내 글을 권했다. 그런데 의외로 너무나 순순히 그러겠다고 해서 오히려 내가 다 미안할 정도였다. 또 어떤 사람은 놀라워 하며 한껏 관심을 표명했지만 요즘 책도 별로 읽지도 않는데다 SNS 에서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구독할 수 없다고 하기도 한다. 또 어떤 독자는 읽을 때마다 거의 매번 짧은 피드백을 보내 오기도 한다. 그밖에 여러 이야기가 많지만 생략한다.

 

그런 일을 통해 내가 많이 달라졌다. 좀 더 적극적이 됐고, 이렇게 저렇게 독자의 소식을 알게되면 예사로 넘겨지지 않는다. 그를 위해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결국 기도라도 하게 된다.  

 

난 요즘 거의 어떻게 하면 이 일을 잘 해 볼 수 있을까에만 골몰해 있다. 더불어 세상을 다시 배우는 느낌이다.

 

Q. 그밖에 무엇을 해 봤나?

 

A. 이슬아 작가가 이달 초부터 연재 시즌2를 시작했다. 작가가 거의 매일 보내주는 연재를 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독자로 체험해 보고 싶어 구독을 신청했고 지금 받아보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확실히 작가의 글을 책으로 읽는 것과 이메일로 읽는 건 다른 것 같다. 거의 비슷할 것 같은데, 나의 메일함을 보면 청구서나 스팸 메일 또는 업무에 관한 메일이 전부다. 나도 그런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인터넷에 여러 많은 글들이 넘쳐 난다. 그런데 구독료를 내고 본다는 게 가능한가 그런 생각을 했다. 하지만 막상 구독료를 내고 보니 다른 글이 아무리 좋고 유익하더라도 내가 돈 내고 보는 글부터 챙겨 보게 된다. 돈이 아까워서라도 보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공짜를 좋아하는 것 같아도 그 보다는 돈을 낸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만족하면 그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작가의 이메일 연재 시즌2에 적잖이 만족한다. 글을 정말로 진지하게 잘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시즌 2는 지난 시즌과 달리 작가가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인터뷰도 하고, 시각 장애자를 위해 음성으로 자신의 글을 읽어주기도 하고,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도 하고, 동료 작가를 위해 자신의 지면을 내어 주기도 한다. 정말 기획이나 운영을 잘 하는 것 같다.

 

Q. 부럽다는 생각 안 드나?      

 

A. 당연히 든다. 사람은 어차피 질투의 존재 아닌가. 특히 작가는 문화계 셀럽들과 인터뷰를 자주 시도할 모양인데 그게 참 부럽다. 발이 넓고 그야말로 발로 뛰는 작가구나 싶다. 작가는 부지런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런데 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한창훈 작가는 왜 작가가 됐냐는 질문에 종이와 펜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작가는 그렇게 생각 보다 쉽게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도 그냥 웃자고 한 말일 것이다.

 

어쨌든 부럽다가도 포기가 되는데 딱 한 가지 안 되는 게 있더라. 언젠가 이 작가가 자신의 책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그 앞에서  폼 잡고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는데 어찌나 부럽던지. 거의 만 부 가까이 팔린 것으로 안다. 넘었을지도 모르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느 싯점이 지나면 내 글을 구독해 보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구독 신청하고, 무사히 출판도 하고 그러면 좋겠다.

 

Q. 독자 직거래 이메일 연재에 대한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나?

 

이 책을 읽으면서 난 작가 보단 오히려 독자의 역할이 더 커지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그렇듯 승자독식의 사회 아닌가? 작가의 세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청탁은 받는 사람만 받고, 책은 내 본 사람만 내는 것 같다. 더구나 문학계 카르텔과 성폭력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느 특정인이 작가를 키운다는 생각은 이제 좀 없어져야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의 비중이 더 커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중세 시대 호사가들은 단순히 예술작품을 사 들이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작품을 만든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것이 당대 문예부흥을 이끌기도 했다. 독서가 일반적이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귀족이나 양반들만 할 수 있었던 시절 말이다. 그러나 이제 독서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또한 후원은 작은 액수로도 누구든지 할 수 있다. 난 독자들이 단순히 어느 작가의 책을 사 보는 것에서 작가를 후원하는 좀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때라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독자 직거래 이메일 연재는 단순히 독자가 작가의 글을 구독료를 내고 보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 작가를 후원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어느 작가가 이런 또는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적어도 한 명의 작가만이라도 후원의 의미에서 구독을 했으면 한다. 이슬아 작가는 스스로를 연재 노동자라고 했는데 이 연재 노동도 해 보니 쉽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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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 장영희 에세이
장영희 지음, 정일 그림 / 샘터사 / 200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의 책을 읽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10년 전이었나 <문학의 숲을 거닐다>란 책을 읽고 정말 문학의 피톤치드를 한껏 들이마신 느낌이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못지않은 감동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사람과 자신의 장애에 관한 글이 유독 많이 눈에 띈다. 미국의 유명한 수필가 E. B 화이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글을 잘 쓰는 비결은 인류나 인간(Man)에 대해 쓰지 말고 한 사람(man)에 대해 쓰는 거라고. 특이한 점이 있다면 사람에 대해 쓰되 이미 고인이 된 사람들에 대해 썼다. 특히 화가 고 김전선에 대해 쓴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뭔가 아련한 느낌이 든다.

 

이뿐인가? 저자는 언젠가 글을 쓰려고 자료를 찾던 중 발견한 미국의 영화배우 크리스토퍼 리브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고 한다. 알다시피 그는 영화 <슈퍼맨> 출연 이후 낙마 사고로 척추를 다쳤고 전신마비 중중 장애인이 되었다. 그런 중에도 그는 용감하게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가고 있고 중인데 그것을 매스컴이 너무 크게 떠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영화 속의 슈퍼맨이 아니라 진짜 슈퍼맨 되었다. 그때 리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무척 언짢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게 슈퍼맨이라면 그래요, 전 슈퍼맨이지요. 그러나 환상 속이 아니라 현실 속의 슈퍼맨이 되는 것은 너무나 힘겹습니다. 왜 저의 상처에도 역할이 주어져야 하는 지요.”

 

이렇게 말하던 크리스토퍼 리브도 고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학생 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저자의 친구 김윤을 회상했고 그 친구 역시 고인이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글은 2001년도에 쓴 것으로 참 새삼스럽다고 했다. 이번엔 내가 진짜 슈퍼맨이 되기 위해서, 내 가족들, 내 학생들 그리고 내 독자들의 잘 싸워 주리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그들이 했던 용감한 싸움을 계속한다(147p)고 했다. 그렇게 말하던 저자도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저 글을 썼을 때만해도 저자는 꽤나 비장했던 것 같다. 장애자의 몸으로 대학 교수로 여러 가지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무엇보다 암 치료를 끝낸 직후였다. 그러니 얼마나 삶을 대하는 자세가 남달랐을까.

 

또한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예전에 비하면 많이 좋아진 듯도 하지만 저자가 어린 시절만 해도 측은지심 내지는 이상한 눈초리로 많이 봤을 것이다. 사실 저자 보다 좀 뒷 세대이긴 하지만 나 역시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그런 눈초리를 받으며 살아왔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저자는 살아생전 모 잡지사와 가진 인터뷰에서, 그전에 자신이 거의 암 투병 환자로 많이 알려진 게 부담스러워 인간 장영희, 문학 선생에 초점을 맞춰 줄 것을 조건으로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받았는데 심히 불쾌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기사 제목이 신체장애로 천형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 장영희 교수로 나왔기 때문이다.

 

천형 같은 삶이라니. 누가 함부로 천형을 논하는지 모르겠다. 이건 내가 봐도 불쾌하다 못해 무례하단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불행한 삶은 무엇이고 행복한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행복한 삶은 비장애인의 특권이고 불행은 장애인의 전유물이란 말인가? 그런 이상한 이중논리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이건 비장애인의 장애인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소치다. 그러자 저자는 즉각 해명에 들어간다. 저자는 자신의 장애는 천형이 아니라 축복이라며 조목조목 그 이유를 밝힌다.

 

첫째로 자신은 인간이라며 짐승이나 곤충으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또한 주위에 늘 좋은 사람만 있다고 했다. 나도 그랬다. 사실 나는 10살 때 갑자기 오른쪽 팔 다리에 마비가 와 한 학기를 쉬고 전학한 뒤 학업을 이어갔는데 그때 은근 걱정했던 게 내가 장애가 있다고 아이들이 나와 안 놀아주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하지만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주위에 좋은 사람이 없었던 때가 없었다. 또한 덧붙여 얘기하자면 나도 싫은 사람 있다. 그런 만큼 그 누구는 나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런 수평적 이해관계만 있을 뿐 장애인이어서 소외돼 본적은 없다. 그리고 세상엔 나쁜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못지않게 좋은 사람도 많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세 번째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이 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에서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게 천운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반박한다. 나 역시도 그렇다. (지금은 좀 주춤하긴 하지만)나는 대본을 쓴 덕에 배우와 뛰어난 자질을 가진 연출을 만나고 그들과 웃고 떠들며 공연을 했다. 그것은 지금도 나의 자부심이다. 솔직히 그런 일 아무나 할 수 있는 거 아니다. 누구는 잘난 척 한다고 하겠지만. (반면 속 썩는 것도 많다.) 그리고 끝으로 남이 가르치면 알아들을 줄 아는 머리와 남이 아파하면 같이 아파할 줄 아는 마음을 갖고 있다. 몸은 멀쩡하지만 아무리 가르쳐도 못 알아듣는 안하무인에, 남을 아프게 해놓고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이상한 사람도 많은데 말이다(‘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중에서).

 

장영희 교수는 이렇게 자신이 누리는 천운을 설명했는데 4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잘 생각해 보면 50가지, 100가지로도 설명할 수 있다. 이건 정말이다. 나는 오래 전에 인간관계 훈련 프로그램을 주도한 적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나의 자랑 50가지를 쓰는 것이었다. 참가한 사람들은 처음에 “50가지나요?” 하며 한숨을 쉬지만 하다보면 정말 50가지 이상으로도 쓰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 이건 장영희 교수가 글 말미에 가르쳐 준 건데 나도 중요한 것 하나를 빠뜨렸다. “책은 아무나 내는 줄 아나? 이렇게 내 글을 읽어 주는 독자가 있어 책을 낼 수 있고 간간히 날 알아보는 독자가 선생님 책을 읽고 힘을 업었어요. 말해주는(182p)” 아직 그 경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나도 책을 냈다. 그러므로 나도 저자와 똑같이 말하고 싶다. ‘천형은커녕 천혜(天惠)의 삶이다. 그렇게 읽다보니 저자는 무한긍정의 사람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득 난 새해 벽두에 이런 책을 읽었다는 게 행운 같이 느껴진다.

 

좋으니 싫으니 해도 2019년 새해가 밝았고 어느 덧 첫 달이 지나간다. 올해가 어떻게 지나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무사히 살아지기를 바라며 조금은 불안하게 새해를 맞은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불안은 나이가 들어도 안 없어지는 것 같다.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을 것 같다. 특히 꼭 징크스라고 할 것 까지는 없는데 지금까지 살아 온 패턴을 보면 안 좋은 일은 홀 수년에 일어났다. 올해가 홀수 해이다. 그래서 올해는 조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 중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생각을 고쳐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 책의 에필로그를 읽으면서다. 저자가 대학교 2학년 때 헨리 제임스가 <미국인>이란 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보면 한 남자의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그때 이미 저자는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라고. (, 이 얼마나 무한긍정인가!)

 

그도 맞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 살아보니 좋은 일이 나쁜 일로 이어지는가 하면 나쁜 일은 다시 좋은 일로 이어지고...... 끝없이 이어지는 운명행진곡 속에 나는 그래도 참 용감하고 의연하게 열심히 살아왔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그렇다. 우리의 삶은 나쁜 일을 만날까 봐, 나쁜 일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조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저자처럼 용감하고 의연하게 열심히 사는 것이다. 저자의 어머니는 평소, 뼈만 추스르면 산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암이 재발했고 또 어느 날엔가는 암을 이기지 못하고 영면에 들어갔다. 죽기엔 아까운 나이였지만 그래도 조심하며 살지 않고 용감하고 의연하게 살았으니 여한은 없지 않을까. 천국에서 하나님 앞에서나 아버지 장왕록 박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았을 것 같다.

 

문득 천국은 어떤 곳일까를 생각해 본다. 저자는 천국에 있으니 벌써 오래 전에 목발과 다리보조기는 벗어던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여전히 목발을 짚고 저자의 표현대로 여전히 정그렁 찌그덩 정그렁 찌그덩 다니는지도 모르겠다. 천국은 어쩌면 그런 사람들조차 아무런 이물 없이 사는 곳 아닐까?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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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9-01-31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리스토프 리브는 진짜 슈퍼맨으로 살았죠 ~승마중에 낙마해서...정말 위기 가운데 빛나는 인물입니다 장영희님의 글도 읽어보고 싶네요^^

stella.K 2019-01-31 20:36   좋아요 0 | URL
ㅎㅎ 그런데 본인은 그걸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잖아요.
그냥 그가 원하는대로 해 주죠.

장영희님은 정말 글을 너무 잘 쓰시는 것 같습니다.
존경스러워요. 조금 더 오래 사시지 않고...ㅠㅠ

서니데이 2019-01-31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서 인용해주신 잡지사의 인터뷰 제목은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방식의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표현이 좋은 것 같지 않아요.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앞부분에 쓰인 말이 부적절한 것처럼 보여서요.
장영희 교수님은 장애를 극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영문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영문학자가 된 거니까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해도, 상대를 이렇게 힘든 사람일거야, 하는 표현이나 시선으로 보는 건 좋은 일이 아닐 것 같아요.
한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쓰신 글을 읽으면서 따뜻하고 좋은 사람일거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떠나시고 벌써 10년이나 지났네요.
잘 읽었습니다.
stella.K님 따뜻한 밤 되세요.^^

stella.K 2019-02-01 14:50   좋아요 1 | URL
저때는 저렇게 얘기해도 크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거예요.
장애가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순수할 거라고 해서
순백의 영혼이니 그런 표현도 서슴치 않았거든요.
장애자나 비장애자나 똑같이 평범한 사람인데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게 벽이 느껴지는 거죠.
비장애자란 말도 비교적 최근에 나온 말인데
이 말도 그닥 적절한 단어는 아니죠.
천형 보단 나은 단어일지 모르겠지만.

장영희 교수는 정말 아까운 분이예요.
살아계셨다면 좋은 글 많이 쓰셨을 텐데...

syo 2019-01-31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학의 숲을 거닐다> 같은 유명한 책조차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작가의 글은 도리어 손대기가 만만치 않더라구요.

카알벨루치 2019-01-31 22:23   좋아요 1 | URL
손만 갖다 대면 되는데...터치 터치 터치 ㅋㅋㅋ

stella.K 2019-02-01 14:41   좋아요 1 | URL
스요님 지금 읽는 책 중에 훗날 내가 이런 책에
손댔었단 말야? 하는 책도 상당수 있을 거예요.
스요님 안 읽은 책을 제가 읽어서 기분이 묘하게
좋긴한데 이분 책 언제고 읽어 보세요.
감동이고 피톤치드 그 자체입니다.ㅋ

카알벨루치 2019-02-01 14:51   좋아요 1 | URL
피톤치드 오오오~

stella.K 2019-02-01 14:58   좋아요 0 | URL
카알님, 저 이름을 바꿀까봐요. 피톤치드로.ㅋㅋ

카알벨루치 2019-02-01 18:03   좋아요 1 | URL
그것도 개안은데 많은이들이 스텔라님 몰라볼까바 걱정이네유 ㅋㅋㅋㅋ

2019-01-31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9-02-01 14:44   좋아요 1 | URL
아유, 이거 제가 먼저 인사 드려야 하는 건데
매번 먼저 받는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님도 명절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십시오.
새해 복도 마지막 찬스로 듬북 받으시구요.^^

cyrus 2019-02-01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에 있을 때 장영희 님의 글을 처음 알았어요. 그때 읽은 장영희 님의 글은 메마른 제 마음을 촉촉이 적셔둔 단비와 같았어요. 군 복무 중에 부고 소식을 듣게 돼서 정말 마음속으로 많이 슬펐어요.

stella.K 2019-02-01 16:09   좋아요 0 | URL
그랬구나. 그만도 벌써 10년이야. 돌아가신지가.ㅠ

그런데 너와 내가 안 지도 그쯤 되지 않나?
너 제대 얼마 안 남기고 처음 알았던 것 같은데.ㅋ

카알벨루치 2019-02-01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차 스텔라님 피톤치드 넘치는 명절연휴 보내시고 맛난거 많이 드시고 오소서~^^

stella.K 2019-02-02 13:38   좋아요 1 | URL
ㅎㅎㅎ 카알님도 피톤치드 넘치는 명절되길 바랍니다.
마지막 남은 새해 복도 많이 받으시궁. 고맙습니다.^^

후애(厚愛) 2019-02-02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행복한 설연휴 되시길 바랍니다.^^

stella.K 2019-02-02 18:13   좋아요 0 | URL
아, 후애님, 고맙습니다.
후애님도 즐겁고 행복한 설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서니데이 2019-02-02 2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tella.K님 서재는 올 때 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느낌입니다.
설연휴 즐겁게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tella.K 2019-02-03 11:22   좋아요 1 | URL
ㅎㅎ 괜찮은가요? 가끔씩 변화를 줘야죠.
서니님 연휴 잘 보내고 계신가요?
고맙습니다. 서니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얄라알라 2019-02-14 1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버 색스 교수님의 마지막 작품과 장영희 선생님의 글....

특히 장영희 선생님께서는 요즘 세상에, 진정 대학에서도 제자를 만들고 아끼시는 보기 드문 교수셨는데....

stella.K 2019-02-14 19:40   좋아요 0 | URL
그랬군요. 정말 아까운 분이시죠.
책 정말 좋더군요.^^
 
영화기자의 글쓰기 수업 - <씨네21> 주성철 기자의 영화 글쓰기 특강
주성철 지음 / 메이트북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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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저자가 현재 다니고 있는 주간 <씨네21>에서 기자의 일주일이 눈에 띈다.

월요일엔 기회회의를 갖고, 수요일엔 이틀 전 그 회의 때 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다음 주 잡지에 들어갈 글과 인터뷰 등을 확정한다. 최종 마감이 수요일 자정이나 목요일 새벽쯤 이루어지기 때문에 수요일 오전에 인터뷰를 해야 한다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또한 이것들과 별개로 시사회장에 가야한다.

 

가장 바쁜 날을 화요일과 수요일이란다. 특히 수요일을 너무 바빠 변변한 식사를 해 본적이 없단다. 수요일 밤의 야식과 회식은 당연히 폭식으로 이어지고 체중이 늘어가는 건 당연하다. 그래도 저자는 월간지에서 일할 때보다 주간지에서 일하는 게 훨씬 편하다고 말한다.(저자는 지금은 폐간된 월간지 키노에서도 기자로 일했다). 왜냐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주말마다 쉴 수 있으니까.

 

물론 기자가 한가한 직업은 아니라는 건 알지만 엄청 바빠 보인다. 내가 왜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냐면 그런 와중에도 글쓰기 강의를 하고 이런 책을 냈기 때문이다. 한 권의 책을 내기위해 저자가 참고한 책도 여러 권이다. 스티븐 킹의 <글쓰기의 유혹>은 물론이고 조지 오웰의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윌리엄 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 유시민의 책 기타 등등. 뭐 글쓰기 강의나 관련된 책을 쓸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읽어봐야 할 책들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을 저자는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읽고 참고했다는 게 새삼 대단하다. 그리고 부럽다 못해 은근 화가 난다. 난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게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저자를 공공의 적이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은 건 왜 일까?

 

이 책, 영화 기자의 글쓰기 수업이라고 해놓고 글쓰기에 관한 얘기 보단 영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다. 6473 정도? 그래서 글쓰기에 관한 정보를 얻겠다고 이 책을 읽는다면 약간은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미 글쓰기에 관한 책은 포화 상태로 많이 나와 있다. 이 책을 들 쳐 볼 정도라면 그 전에 글쓰기에 관한 책들은 어느 정도 섭렵하지 않았을까? 요는 나는 저자가 글쓰기에 관한 것 보다 영화 전반에 관한 이야기, 기자로서의 마인드 뭐 이런 얘기를 들려줘서 오히려 더 좋았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문득 학창 시절이 생각났다. 왜 교과대로 가르치는 교수가 있는가 하면, 그건 시작 때 쬐금 가르치고 시국이나 업계(?)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그게 얼마나 재밌고 신선했던지. 나중에 졸업하거나 수료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교수나 강사를 떠올리면 교과 매뉴얼대로 열심히 가르친 분 보단 열라 비판하고 까는 교수나 강사가 더 많이 생각난다. 말하자면 이 책에서 그런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을 무슨 불온서적 같은 걸로 오인하면 안 된다. 그냥 난 시크하고 건조한 저자의 글이 마음에 들었다는 말을 하려했을 뿐이다.

 

사실 책 전반에 어떤 묘한 기류가 있는데 (그게 저자만의 것인지 영화 기자들 대부분이 그런 것인지 모르겠다) 다른 기자와 달리 시쳇말로 어떤 쌈마이 정신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영화 기자는 영화계에선 일개 기자로 보고, 저널리스트 쪽에선 영화인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난 90년 대 스크린 쿼터 때 영화 관계자의 한 사람으로서 시위에 참가하려고 했으나 영화인이 아니란 이유만으로 저지를 당했다고 한다. (그걸 읽는데 왜 그렇게 코웃음이 나던지. 그 위기의 순간에도 사람 차별을 하다니. 우리나라 영화계가 그때도 정신을 못 차리거나 덜 차렸구나 싶다.) 그러니 영화 기자가 된다는 게 보통의 정신이나 명예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영화 평은 영화 평론가가나 관객이 하는 것이고, 영화를 보게끔 만드는 촉매 역할을 하는 사람인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건 영화 마케터가 하는 일 아닌가? 하지만 기자는 이 둘을 아예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한때 우리나라 영화 잡지가 부흥기를 맞이하는가 싶더니 지난 2000년 대 들어서 굵직한 잡지들이 잇달아 폐간됐다. 저자만 해도 <키노>를 시작으로 <필름 2.0>을 거쳐 지금의 <씨네21>에 안착했지만, 그가 거쳐 온 잡지마다 폐간을 했다. 이제 <씨네21>만 폐간되면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는 것이라며 우스갯소리를 한다지만 참 쓸쓸한 말이다. 그럼에도 그대 정녕 그 길을 가려는가?’ 식으로 영화 기자의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다.

 

나 역시도 뒤늦게 기자가 되겠다고 이 책을 읽지는 않았다. 그게 저자를 더 쓸쓸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이 글 처음에 영화 기자의 하루에 대해 썼지만 난 워낙에 저질체력이라 벌써 거기에서부터 결격사유다. 단지 난 오래 전부터 블로그에 영화의 감상기를 적곤 했는데 글에 정답이 어디 있냐며 잡글로 썼지만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도 뭔가 모르게 헛헛한 느낌이 들더라. 그래서 어떻게 하면 영화 글을 잘 써 볼까 이런 생각에서 읽었을 뿐이다.

 

그런데 난 어쩌면 저자의 책을 읽을 자격이 조차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사가 최전선에서 총칼 들고 싸우고 있는데 무지몽매한 민초가 배 두들기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차라리 영화 에세이 쓰는 법. 뭐 이런 책이었다면 더 떳떳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내가 기자질을 하든, 에세이를 쓰든 나는 저자의 기준으로 보자면 영화 보는 자세조차 제대로 갖추질 못했다. 올 한해 내가 개봉관에서 영화를 본 건 거의 전무했던 것 같고 그만큼 영화를 VOD로 집에서 봤다는 것인데 저자는 무엇보다 앉은 자리에서 다 보라고 한다. 하지만 난 그 알량한 집에서 보는 영화조차도 한 쾌에 본 적이 거의 없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시간에 몇 번에 걸쳐 이어보기로 본게 다수다. 그것도 밤에 불 끄고 누워서. 그 다음은 어떨지...

 

또한 영화에 대한 정보는 최대한 많이 확보하고 보라고 하는데 그것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영화를 본다. 물론 감독이 누구며, 누가 나오고, 장르 정도는 알고 보긴 하는데 이런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야말로 나는 뭐하겠다고 영화를 보는지 모르겠다.ㅠㅠ

 

이 책을 읽고 나면 적어도 앞으로도 내가 영화를 계속 즐길 마음이 있다면 보는 자세만이라고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은 저자의 말대로 하려다가 아예 영화 볼 생각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그래도 이 책 너무 좋다. 왠지는 모르겠는데 영화 <영웅본색>에 나온 주윤발이 생각난다(정말 그런지 안 그런지는 확인하여 보라). 자신만의 단어가 있는 것도 멋지고. 무엇보다 저자가 유명하지 않은가? 이런 사람의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건 영화 <넘버3>의 송강호의 대사처럼 배신이다. 배신.

언제고 저자의 육성을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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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12-20 17: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평을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겠지만, 영화를 관객에게 소개하는 영화평보다는 영화를 분석하면서 까는 영화평을 쓰는 걸 좋아해요. 그런데 극장에서 본 영화에 대해 영화평을 쓰는 일이 어려웠어요. 인상 깊은 영화 장면이 1도 생각나지 않거든요. ^^;;

stella.K 2018-12-20 18:34   좋아요 0 | URL
저자가 그런 말을 하긴 해.
영화에 대해 쓰려거든 장면이나 대사, 인물에 대해
쓰라고.
생각해 봤더니 나도 그렇게 쓴게 별로 없어.
느낌을 주로 많이 썼던 것 같아.
하지만 뭐든 다 관심이지.
잘 보고 쓰면 쓸 수 있을 거야.^^

얄라알라 2019-01-06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보고 바로 주문했어요^^

stella.K 2019-01-07 14:35   좋아요 0 | URL
앗, 북사랑님도 영화 글 관심 많으신가 봐요.
이 책 좋아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