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이 휩쓴 세계사] 덕분에, 역사학 세부 분야 중에서도 의학사, 그 중에서도 질병사가 현재 코로나 사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겠다는 느낌이 왔다. 한 마디로, 좀 더 읽어봐야겠다는 부담감이 확 왔다. 저자 김서형의 박사 논문뿐 아니라 '전염병'을 주제로 한 거의 모든 책에서 "1918년 인플루엔자'가 빠지지 않기에 이왕이면 이 시기를 포함한 자료를 찾았다. 그 제목이 [세균의 복음]인데, 원어는 말 그대로 "The Gospel of Germs"이다. 




저자 낸시 톰스는 "질병세균설 the germ theory"의 대중화가 이뤄진 문화적 맥락과 역사적 특수성에 관심을 둔 역사가이다. 그녀는 젊은 후학들에게 더 나아간 비교연구 작업을 부탁하고 본인은, 계속 주력해온 미국의학사 중에서도 "1870~1930년대"에 집중해 글을 썼다. 질병에 대한 믿음이 미국인들의 의식과 실천을 집합척 차원에서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중심 질문으로 삼아서. 물론 "집합적"의식화의 탐색이지만, 일반화를 경계하고 미국 특유의 이질성에 대한 언급도 잊지 않았다.


아직 이 두꺼운 책의 1/10 정도 분량인 서문까지만 읽었을 뿐이다.



CC0



사실, 최근 내 독서 계획은 온통 코로나 펜데믹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인데 부끄럽게도 나는 "전염병," "감염병"을 어떤 맥락에서 쓰는지, 교차적으로 쓸 수 있는 용어인지 잘 모른다. 매번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전염병'이라 했어야하나? '감염병?" 이 수준의 고민을 해왔다. 자칫 이 분야 전문가들은 동의하고 쓰고 있는 용어를 제 멋대로 교차해 리뷰 쓰다가 본문의 좋은 내용을 오염시킬까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세균의 복음] 서문의 마지막 문단에서 굉장히 반가운 문장을 만났기에 책 읽다 말고 옮겨놓는다.



'감염 infectious'는 그들 사이에 실질적인 접촉 없이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병을 뜻한다 반대로 '전염병 contagious'은 사람들 사이에서 직접 전해진다...그러나 실제로 사용될 때 이러한 용어는 그 구분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나의 연구 대상 시기에 의료 당국은 흔히 그런 용어를 사용하는 데 정확성이 떨어졌다. 특히 감염병과 전염병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1866년 <미국 의사협회 회보>에서 한 의사는 그 점에 불만을 드러냈다. "유행병, 전염, 감염, 이 세가지 명칭은 빈번하게 조사원을 혼동하게 만든다. 그 경계선은 equator보다 더 공상적인 것 같다." 나는 감염과 전염이 엄밀히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적도 무시하기 ignoring equator'를 선택하고 이 책에서는 그 용어를 호환해서 쓰겠다." (낸시 톰스 2019:60)



[세균의 복음] 및 다른 책들을 더 읽어가면서 "감염"  / "전염" 용어에 대한 생각도 정리해가봐야겠다. 일단, 좀 몰라서 두 용어를 교차해 쓰는 데 대한 부끄러움은 낸시 톰스 박사의 서문을 읽고 좀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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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휩쓴 세계사 - 전염병은 어떻게 세계사의 운명을 뒤바꿔놓았는가 생각하는 힘 : 세계사컬렉션 17
김서형 지음 / 살림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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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이 휩쓴 세계사]는 "생각하는 힘 - 세계사 컬렉션" 시리즈의 열일곱번째 책이다. 빅히스토리, 질병사 등의 특화된 주제로 활발한 저술활동을 해온 김서형 교수가 썼다.  [1918년 인플루엔자와 미국 사회: 전쟁, 공중 보건 그리고 권력]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만큼 이 분야 전문가이다. 김서형 교수의 시야가 넓고 앎이 깊은 만큼, 눈 앞의 2020년의 코로나에만 온 촉을 세워왔던 근시안적 관심이 이 책을 읽다보면 넓게 펼쳐진다. 



코로나 19의 팬데믹화가 폭주하는 세계의 연결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하지만 이런 전염병의 확산 이면의 글로벌 네트워크는 비단 21세기만의 현상이 아니다. 바로 이것이 김서형 박사가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만원경적 시야이다. 



호모 사피언스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환경을 찾아 이동하고 적응하며 협력, 혹은 상호작용해왔다. 글로벌 네트워크는 아주 오래전 인류 조상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인류는 각종 전염병들과 마주해서 때론 굴복하기도, 좌절하기도, 승리에 통쾌해하기도 했다. 표면상 그렇게 보이지만 인류의 역사는 사실상 바이러스와의 공존의 역사이다. 에이즈가 그러하듯, 코로나 역시 "붉은 여왕"처럼 인간사회에서의 공존에 최적화된 방식으로 살아 남을 지도 모른다. 김서형 교수가 [전염병이 휩쓴 세계사]를 통해 진정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단순히 전염병이 "늘 있었고, 늘 인류를 괴롭혀왔다"가 아니다. 


Plymouth Chapter of the Society for Effecting the Abolition of the Slave Trade/Public domain


전쟁, 이민, 교역 등등 인간의 활동이 바이러스의 교환, 즉 전염병의 확산 원인이 되는 동시에 인간은 이를 제어하고 통제하기 위한 대응책을 항상 찾아왔다. 그것이 설사, 마녀사냥이건, 효엄없는 소금물 소독이건 인간은 항상 전염병에 대한 치료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왔고 21세기의 우리가 할 일이 바로, 이런 역사적 경험을 돌아봄으로써 현재의 문제해결에 통찰을 얻는 것이다. 


아참, 그 동안 왜 경우에 따라서는 "스페인 독감"이라고도 하는 1918년의 무시무시한 독감에 대해 어떤 이들은 의도적으로 "1918 독감"이라 하는지 무척 궁금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아하' 싶었다(이 부분 꼭 찾아보시길). 또 삼각무역과 노예선의 참상, 전쟁, 기후 변화 등과 얽혀 전염병의 확산 양상은 역시나 정치경제적인 차원에서 이해됨을 다시금 상기 받는다. 


Otis Historical Archives, National Museum of Health and Medicine • Public domain


[전염병이 휩쓴 세계사] 덕분에, 그 동안 단어 혹은 어구로만 머릿 속에 떠돌던 많은 전염병들이 안착할 맥락을 찾아 머릿 속에서 정리되었다. 다음 리딩도 역시 전염병에 관한!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를 읽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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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8-10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요즘 읽으면 귀에 쏙쏙 들어올 것 같군요.
코로나19 발생으로 카뮈의 <페스트>가 많이 팔렸다고 하더군요.

2020-08-11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남극의 아이 13호 라임 청소년 문학 43
알바로 야리투 지음, 김정하 옮김 / 라임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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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읽어대면서도 가장 가까이하지 못했던 장르가 소설이었는데 간만에 참 재미있는 책을 만났다. [남극의 아이 13호 (La paz de las maquinas)]는 스페인 작가, 알바로 야리투Álvaro Yarritu가 쓴 첫번째 "청소년" 소설이라 한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청소년보다 훨씬 어른인 독자까지 팬으로 끌어들일만한 작품이다. 깜빡거렸던 유년기의 상상력 스위치가 다시 켜졌나 기뻤을만큼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캐릭터들이 영화의 장면처럼 마음 속에서 움직였다. 특히나 인간 주인공보다도 기계주인공이 더 잘 그려지다니 놀라웠다. 작가의 필력 덕분일까, 아니면 나름 Sci-Fi 영화 초보 마니아로서 그동안 보아온 영화들 덕분일까. 오래 기억할 소설이다. 


Jcurz / CC0


거슬러 올라가면 [걸리버 여행기]의 "공중도시"에서부터 [아키라] 혹은 [배틀 앤젤]에서의 "공중도시"까지,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은 수직, 주로 위로 올라가는 경향이 있는 듯 했다. 그런데 [남극의 아이 13호]에서는 지구 대기권을 벗어나지 않고 "남극"을 무대로 전개된다. 소설에서 "남극"은 파괴적인 대규모 전쟁 이후, 인간과 기계가 평화를 약속하고 유일하게 공존하는 중립지역이다. 하지만 말이 좋아 "공존"이지, 기계와 인간은 엄밀히는 "분리"되어 있다. 필요에 따라 "협력"은 하지만, 긴강관계이다. 이미 기술적 특이점을 넘어버렸고 기계에게 잔혹하게 사냥당하는 전쟁을 겪었기에 인간은 기계, 네트워크를 믿지 못한다. 단지 불신을 넘어, 아예 기계와의 공존이라는 발상 자체를 부정하고 기계를 몰살하려는 인간세력도 있다. 작가는 이 단체에 "러다이트"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과거의 러다이트만큼 소설 속 러다이트 역시 기계를 몰아내고 인간들만의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꿈꾼다. 


그러나 이미 많은 Sci-Fi 영화와 소설에서 보여주었듯이, 그런 이분 대립의 세계에는 늘 연결적 존재가 있게 마련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반역자가 될 수도 있겠다.) 인간은 상상 속에서나마 대립보다는 공존을 희구하는 것 같다. 스페인어 제목을 달고 나온 원서 표지색은 차가운 화이트와 블루이다. 한국어 번역판의 표지는 분홍빛이 감돈다. 마치 분홍빛 공존을 꿈꾸듯이.....어쩌면 우리는 이미 무서운 시나리오들에 충분히 압도되어왔기에, 가끔 분홍빛 미래도 상상해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는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면서도 회색톤 시나리오로써 경고하지만, [남극의 아이 13호]은 독자에게 다른 가능성도 그려보게 한다. 훨씬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방향의 가능성을.  그러나 내 안의 공포심 때문에 "13호"를 "아이"라고 부르기 어려우니 아이러니이다. "13호"가 인간과의 공존가능성을 보여주는 아이콘일지라 할지라도 "인간"이 아니기에, 더더욱 "아이"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나야말로 "러다이트"? 자학적 자문을 해본다. 그래도 작가가 [남극의 아이 13호]를 통해 그리고 싶어하는 공존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더 마음 편하다. 걱정인형을 미리 안고 사는 편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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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0-08-11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도 있네요. SF라니 관심이 갑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구해보겠습니다.

2020-08-11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봇과 친구가 되는 법 푸른숲 새싹 도서관 27
하르멘 반 스트라튼 지음, 유동익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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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더믹 시대가 2020년에만 머물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마음 속엔 어떤 시나리오가 그려지나요? 저는 걱정을 끌어 안는 사람인지, 걱정들의 쓰나미가 보입니다.  아파서 고통스럽고 생명을 잃는 사람들 문제가 가장 긴요하겠지만 그 외에도 식량자급도 떨어지고 빈곤한 국가에서의 식량 문제, 백신 개발 이후 분배와 보급 문제...... "초사회적"이라 자평했던 호모 사피엔스들이 관계맺는 양상과 실제 사회적 행위들... 


요샌 '심리적 방역"이란 용어가 유행이더군요. 코로나 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집콕"이 장기화되어가면서 마음의 안전망이 무너지지 않도록 "방역"하자는 의미겠지요? "우울감," "우울증"하면 보통 어른들을 떠올릴텐데, 저는 아이들이 걱정입니다. 집콕하면서, 운동장이나 놀이터에서 뛰어놀지 못하면서, 친구를 자연스럽게 알아가고 친해지는 경험을 하기 어려우니까요. 점심 시간 짬에, 혹은 학교 끝나고 자연스럽게 운동장에서 모여 놀다가 알아서 흩어지는 모양새가 요즘은 안 나옵니다. 정식으로 부모님이 초대한 경우, 해당 시간에 초대받은 친구만 가서 놀고 오는 경우가 많죠. 친구끼리의 약속은 안 통합니다. 적어도 제가 관찰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은 아이들의 사교방식이었어요.






[로봇과 친구가 되는 법]은 친구 사귀기에 용기를 불어 넣어주고, 친구 사귀기 예행연습을 시켜주는 그림책 같습니다. 어느 날 로봇이 빨간색 하트가 그려진 편지를 받았어요. "난 네가 좋아!"라고 써 있었지요. 로봇은 그 편지를 보낸 주인공을 찾아다닙니다. 생각보다 편지의 주인공이 바로 나타나지 않았어요. 게다가 로봇은 "심장"이 없다는 이유로 배척당하거나, 이미 다른 단짝이 있기에 필요없다고 내쳐지지요. 로봇은 슬퍼집니다. 친구 사귀기, 아니 친구 찾기 참 힘드네요. 


타인들이 자신을 비난하며 규정하는 말로 로봇은 스스로를 저평가 합니다. "나는 심장이 없어서 친구를 사귀지 못해." 개인적으로 제가 차갑게 분노하게 하는 악순환 구조입니다. 언어 폭력에 노출된 이들은 그 언어로 자신을 규정하여 스스로 저평가하거나 움츠러 들게 마련입니다. 로봇이 보이는 반응이 딱 그렇네요. 그림책 속으로 들어가서라도 좀 도와주고 싶은 주제 넘은 참견욕구가 발동합니다. 



다행히, 로봇도 축 늘어져 있지만 않았습니다. 하트를 그려서 심장 부위에 붙여놓았지요. 그림 심장은 쿵쿵 뛰었어요. 로봇이 그정도로 설렜다는 은유겠지요. 이제 로봇은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왔던 그 친구를 만납니다. [로봇과 친구가 되는 법]은,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알아가는 과정이 다이어리 스케줄표의 일정과 달리 예측불허의 모험, 즐거운 모험이라는 걸 알려줍니다. 어린이들이 온라인 상에서가 아닌 오프라인에서도 이런 예측불허의 의외성으로 친구를 만나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뛰어 놀면서 친구 사귀고 친구 때문에 웃고 울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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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5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5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태초건강법 심신치유 편 - 성인병 난치병 유전병 희귀병, 희망이 보인다 태초건강법
박중곤 지음 / 아라크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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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에서 추천이 많이 올라오길래 호기심에 [종말의 밥상]을 읽었습니다.  신념의 색이 독특해보이는 저자 박중곤 박사에게 호기심이 발동해서 바로 책 2권을 더 찾아 읽었습니다. 2권으로 분권된 [태초건강법]입니다. "태초건강"이라니 일상에서 전혀 들어본 바 없는데, 저자가 최초 제안자이자 이 건강법의 창시자랍니다. 



저는 책을 좋아하고, 책 만드는 분들과 글을 쓰는 분들을 존중하기에 예의 없는 독자는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태초건강법] - [심신치유편]과 [생활치료편]을 읽고 나니 예의가 없어지려 합니다. 괜히 읽었습니다. [종말의 밥상] 읽고 딱 거기까지만 흡수하고 말 것을, 책 읽은 게 후회스러워집니다. 






건강에 대한 신념과 실천이 사람마다 문화마다 시대마다 다양할 수 밖에 없고 존중해야한다는 생각입니다만 도무지 이 [태초건강법]에는 수긍이 잘 안 갑니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 몸에는 병이 나면 이를 스스로 고칠 수 있는 '자율적 치유 프로그램'이 내장" 되어 있는데, "태초에 인간의 육체가 탄생할 때 그런 프로그램이 고도로 설계되 장착된 것"(4쪽)이라는 전제에서 "태초건강법"을 제안합니다. 한 마디로, 아파도 병원 가지말고 자기 몸과 마음을 이완상태, 휴식모드에 놓음으로써 치유 에너지를 그러모아 만병을 통치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은 비록 가족분들 중에 의료를 업 삼으셨던 분이 계셨다고는 하지만 본인은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수 많은 환자들을 상담하고 치유로 이끌었다고 내내 자평(자찬)하십니다.  자신이 제안한 [태초건강법]을 잘 수행한 환자 중에는 70대인데도 30대 중반으로 사람들이 오인할만큼 동안인 환자도 있다 합니다. 또한 저자 스스로도 "태초건강법"을 통해서 37개의 난치병을 모조리 다 고쳤다고 한다. 너무나 기적적인 일이기에 일부러 다 옮겨본다. 저자가 "태초건강법," 즉 자기 안의 치유에너지를 통해 스스로 고친 병으로는 


저자는 "뇌전증, 뇌경색, 경도인지장애, 군발두통, 비문, 이명, 비염, 갑상선기능항진증, 목디스크, 오십견, 석회화건염, 천식, 폐결절, 기흉, 고혈압, 혐심증, 손목결절종, 담남용종,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허혈성장염, 과민성대장염, 대장선종, 허리디스크, 발기부전, 전립선비대증, 치질, 치루, 요로결석, 퇴행성무릎관절염, 발목관절염, 좌측하지마비, 만성피로증후군, 섬유근육통, 자율신경실조증," 이에 더해 심지어는 베체트병과 고환암까지 완치했다고 한다..........[심신치유편]의 274쪽 본문을 옮긴 것으로써, 저자의 병명을 더해거나 빼는 짓을 하지 않았다. 


또 하나, 저자에게 궁금한 점이 있다. PhD학위도 있고, 기자 생활 30년 하셨다. 본인이 뜻을 세운 분야에서 전문가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자기표절을 하였을까? 2020년 출간된 [종말의 밥상]을 무척이나 꼼꼼하게 읽은 독자로서, 바로 이전 해인 2019년에 출간된 [태초건강법-생활치유법]의 내용과 구성, 심지어 비유법이나 문장까지 빼박은 것처럼 유사한 데 출처도 없다는 사실이 굉장히 놀랍습니다. 마치 [태초건강법-생활치유법]이 [종말의 밥상] 출간을 위한 사전 스케치 자료처럼 느껴질 정도로 유사하니 자기표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프고 치유의 지난한 과정을 겪고, 또 치유되었을 때의 기쁨.

본인이 아니고서는 알기 어렵기에

활자로만 읽고 속단내린 제가 무례한 독자인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제가 놓친 부분이 더 크겠지만, 제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해 저자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고견 듣고도 싶습니다. 여전히 제 무례가 분명하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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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6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6 17: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