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ús Gorriti, CC BY-SA 2.0 



스티븐 존슨. 코로나 19시대, 전염병 대처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소환되어 바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코로나 창궐 훨씬 이전인 2006년에 대중 강연으로 19세기 런던을 휩쓸었던 콜레라 사태를 분석했다. 사실 저자에 대해 깜깜한 상태로 그가 2006년에 쓴 [감염도시(원제: The Ghost Map)]을 읽으며 내공 면에서 그보다 윗 연배의 작가를 상상했는데, 놀랐다. 38세에 썼다. 그는 불혹 전에 이미 필력 하나로 온라인 오프라인의 유명인사이자 어마한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52세인 현재에도 여전히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학자도, 사학자도 아닌 그가 19세기 중반 런던에 창궐했던 콜레라에 대해 이처럼 밀도 높고도 적확한 정보를 담아낼 힘은 무엇인가?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는데, 책 말미 "감사의 글"에서 친절히 알려준다.

이 책을 쓰던 중에 나는 거의 20년간의 내 발자취가 바로 이 책을 쓰기 위한 준비였음을 깨달았다. 계기는 전염병에 대한 문화적 대응을 주제로 대학 논문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대학원에 다닐 때는 빅토리아 시대 도시 소설에 관심을 가졌다.

[감염도시] 300쪽

덕분에 [감염도시]의 독자는 단순히 콜레라라는 감염병이 런던 사람들을 어떻게 숙주 삼았는가 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런던이라는 도시의 환경과 삶에 대해 구체적 상상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1854년 런던에는 "분뇨수거," "개똥 수거," "(동물 사체에서) 뼈 수거"를 전문으로 하는 고소득 3D직업이 있었음을 [감염도시]를 통해 배웠다. 또한 이 시기 런던에서도 역시, 빈민과 부유층을 공간적으로 격리, 접촉 통로를 최소화하려는 거리설계가 작동했음을 배웠다.저자는, 소위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불결한 거리와 상류층이 사는 방역거리가 구별되는 사회적 지형이 1854년 콜레라 발발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역병은 타락하고 누추한 자들에게만 옮고 고작 몇 블록 거리라도 점잖은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36쪽)기에 전염병에 대해 가난한 자를 비난할 근거가 되어 주었다.

John Snow/ CC0



이를 뒤엎은 것이 바로 존 스노의 유령의 지도(ghost map)이다. 저자 스티븐 존슨은 존 소 스노 박사가 이룬 "진정한 혁신은 다이아그램을 낳은 데이터와 그 데이터를 수집한 조사 그 자체"(232쪽)이라고 극찬한다. 스노는 명망 있던 의사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콜레라가 창궐한 브로드 가를 가가호호 방문하며 수백 명과 인터뷰를 수행한다. 콜레라가 수인성 질환임을 입증하기 위해, 브로드 가의 펌프와 다른 수원의 펌프를 쓰는 공장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한다. 그렇게해서 탄생한 지도가 바로 그 유명한 "유령지도"이며, 이는 19세기 중반 유행했던 독기이론에서 수인성 이론으로 우세의 손바닥을 뒤집게 해주었다.





"Map of a late Colera outbreak in London" (1866) / UNESCO/ CC0



즉 존 스노 박사 덕분에 전염병이 숙주가 되는 사람들(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불결한 위생상태나 관리부실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19세기 런던 콜레라의 경우, 공공식수 관리 문제) 때문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기게 된다.

코로나 19 사태에서, 존 스노의 혁신적 방법과 헌신을 따라서 틈새를 고민해보고 싶다. 방역의 틈새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관습이나 신념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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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자들 - 한 난민 소년의 희망 대장정 미래그래픽노블 3
오언 콜퍼.앤드류 던킨 지음, 조반니 리가노 그림, 민지현 옮김 / 밝은미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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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성당의 한 미사에서 신부님께서 "멕시코 이민자들이 얼마나 어렵게 불쌍하게 사는지를 보세요, 그걸 보면, 나는 참 행복하구나."감사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발언에 실망했지만, 사실 비교급 행복,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서 상대적 안전감을 얻는 이가 많지 않을까? 나 역시 그렇고.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의 참사를 스냅샷 이미지로 파악하고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마음 기저에는 상대적 안도감이 있을 테다.



그래픽 노블, [불법자들]을 읽었다. 숲속 산책하다가 의자에서 천천히 읽으려 [불법자들]을 들고 나갔다가 산책로 한 중간에 서서 읽었다. 몇 번이나 울컥거리며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니, 1시간이 흘렀더라. 나는 더운 날씨에, 길 한가운데 서서 책을 읽었던 것이다. 이후, 지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전체공개 리뷰도 쓴다.



[불법자들]의 첫장에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엘리 위젤의 목소리가 인용되어 있다. "소위 불법)체류, 이민)자고 불리는 사람들이여.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법자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한 존재를 그저 "불법자"라는 용어로 축소해버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공통분모를 놓치게 한다.

사람을 가르는 범주명이 얼마나 무서운 효과를 지니는지, 요새 그 생각을 한다. 마치 "성소수자"라는 단어 하나로, 결이 풍부한 한 직물에서 오로지 날실 한줄이 내는 단색 하나로 옷감 전체의 이름을 정해버리듯, 성적 정체성 나타내는 용어 하나로 한 사람의 정체성을 덮어 버린다. 코로나 시대의 언어는 또 어떠한가? "확진자," "밀접접촉자," "자가격리자," "무증상 감염자," 인간이 바이러스의 포로(숙주)가 된 정도 혹은 가능성에 따라 층화된 범주명으로 나타낸다. 물론 이는 "질본"에서 전염병 관리, 통제 차원에서 유용한 범주이기에, 나는 그 실용성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단지, 이런 범주화가 일상에서 사람보는 시선에 반영돌 때의 암울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쩌면 나의 컴플렉스와 닿아 있다. 나는 완결점 찍지 못한 자에게 내려지는 '중도 이탈자'라는 명명에 사로잡혀, 내 자신을 덜 된 존재로 인식한다. 미생이군. 여기서 헤어나기 어렵다. 설령 손가락 한 마디가 끊겨 나간 상태라 해도, 다른 부위가 온건한데도 나는 사지가 다 잘려나간 비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옷으로 갈아 입거나, 과감히 겉껍질을 벗어내고 흉터 없는 속껍질 몸으로 살지도 못한 채, '중도 이탈자'라는 이름에 짓눌려 흉터입은 삶을 산다. 이 상태의 지속은 안 되겠다.



다시 [불법자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가나에 살다가 지중해를 건너는 12살 소년 '이보;의 이야기이다. 이보는 저자 '오언 콜퍼'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가 이 책을 쓰기 위해 만나 인터뷰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세포로 이뤄졌다. 살아 있는 소년으로 느껴진다. 이보는 삼 남매였으나, 누나가 먼저 떠났다. 사람들은 그녀가 유럽으로 갔을 거라 짐작했다. 이보의 형도 어느 날 자취를 감추었다. 역시 사람들은 이보의 형이 누나를 찾아 유럽으로 떠났으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이보도 형을 찾아 무작정 떠난다.

이후 아프리카 가나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이르기까지 이보의 여정은 험난하기 그지 없다. 약자가 더 약한자의 피를 빨며 고통을 이중삼중 가중시키는 먹이사슬, 망망대해에서는 유럽에 도착할 희망으로 기다리다가 막상 유럽에 도착하고 나서도 난민 쉼터에서 그저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 이름도 개개의 개성도 지워진채 뭉뚱그려 불법 난민들의 범주로 일원화된 사람들.

[불법자들]의 부제는 "한 난민 소년의 희망의 대장정"인데, 부제에서처럼 희망의 메시지가 있었던가? 찾았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하나는 이보네 삼남매의 강한 우애, 생명 나누기를 아까워하지않을만큼의 우애이다. 우애란, 결국 핏줄 차원을 떠나 확장시키면 인간애이기도 하기에 희망적이다. 둘째, 이보는 자신을 보호해줄 어른이나 돈 한푼, 쉼터 하나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선의를 전략삼아 상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능력을 보였다. 예를 들어, 이보는 트럭에서 떨어진 물티슈 한 상자를 들고 다니다가,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에게 요긴한게 나눠 쓴다. 덕분에 죽 한 그릇, 일자리 하나라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전략적 계산에 따른 생존방편일지라도 '친절'과 '선의'가 생존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설정은 희망적이긴 하다.

[불법자들]은 성인 뿐 아니라, 초등 중등 어린이에게도 유익 하다. 요즘 대한민국 어린이들 코로나 19로 반 자가격리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일상을 답답해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답답함은 희망이라는 막연한 끈 하나 붙잡고 지중해를 건너는 숱한 어린이들의 고통에 비하면 그저 사치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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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도시 - 대규모 전염병의 도전과 도시 문명의 미래
스티븐 존슨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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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로, 호흡기로, 생명의 줄타기로서 코로나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과 또 의료진에게 염치가 없다. 하지만, 5개월 째 기특한 자가격리 중인 나로서는 Corona는 온라인 채널이 전해주는 추상의 정보이기도 하다. 간혹 관련한 전문가들의 인터뷰나, 북미 및 유럽발 뉴스를 보지만 어디까지나 온라인 채널일 뿐이다. 철저히 "Untact"하다보니, 세계 유동성까지 막아 놓는 이 전염병이 추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활자중독을 어쩌지 못하고, 또 책을 들였다. 4권. 출판사와 저자가 각기 다른데도 표지 디자인에 일관성이 느껴진다면 과잉 반응일까? 팬더믹으로서의 전염병이 주는 경고인지 붉고 검다. 검붉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검붉은 [감염도시]부터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책 날개에서 저자 약력을 보고 [코로나 19: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부터 읽을 걸 그랬나 잠시 후회했다. [감염도시]가 논픽션 장르라는 설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Covid-19에 대한 사회문화적 해석을 기대했다. 게다가 저자 스티븐 존슨은 기호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전염병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감염도시]를 다 읽고 나니, 4권 중 제일 먼저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얻는 게 많았다.


우선, 저자 스티븐 존슨의 자유로운 글쓰기. 그는 전기문도 아니고 역사소설, 잡지 기고문도 아닌 독특한 장르의 글을 개척한 것 같다. 실제 영문학도로서 빅토리아 시대 소설에서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석사 논문 주제 삼았던 그인지라 픽션인 듯 논픽션 스타일로 썼다. 19세기 런던은 급습했었던 콜레라를 둘러싼 이야기를 역사적 자료들을 토대로 소설가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썼다. 게다가 그는 지면의 상당 부분을 당시 수인성질병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며 콜레라의 감염경로를 밝렸던 존 스노라는 인물에 할애한다.

자수성가한 저명한 의사였던 존 스노는 어떠한 사명감 혹은 야망에, 콜레라가 도는 도시를 돌며 사람들에게서 물 시료를 채집하고 병력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했던 것일까? 19세기 대다수의 보건전문가와 대중들이 '독기'이론을 믿었을 때 홀로 '수인성 감염병'의 경로를 주장했던 것일까? 왜 스티븐 존슨은 이러한 존 스노에게 절제되었으나 숨길 길 없는 존경심을 보내는 것일까?

어쩌면 작가로서의 스티븐 존슨의 작업 방식이나 위상이 존 스노의 그것과 닿은 지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집요함, 고집, 철저함. 닮은 꼴이기 때문에 더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책에서 19세기 영국에서 콜레라가 돌 때, 과감하게 우물 손잡이를 제거했다는 에피소드 정도로만 존 스노를 소개한다. 그런 에피소드 만으로는, 존 스노가 아래의 지도를 그리기까지 얼마나 많이 가가호호 방문을 하고 편견과 싸우면서 콜레라의 감염경로를 밝히려 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온라인의 시대로 넘어갔다지만, 존 스노의 접근법과 창의적 발산은 여전히 유효하다. 저자 스티븐 존슨 역시, 존 스노의 지도를 현대적으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제안한다. 한 마디로 "21세기판 스노의 지도"(293)이 필요하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위험 가능성이 높은 도심 공기를 감시하는 센서들로 엮은 정교한 감지망, 환자들에게 나타난 이상한 증상을 보고하는 병원의 1차 진료 담당자, 수질 오염 징후를 감시하는 공공 급수 시설 등에서 얻은 데이터"(293)로 그린 디지털 감염병 지도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느끼지만 나는 감탄하면서 질투하는 쪽이다. 이번에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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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0-06-2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갖 과학기술의 ‘결정체‘라는 device들이 잔뜩 있어도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여실히 느끼는 요즘의 트럼프독재치하의 아메리카입니다. 결국 노가다가 관건이라고도 생각이 들구요.

2020-06-25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침대 위에서 이따금 우울해진다 - UNTRUE
웬즈데이 마틴 지음, 엄성수 옮김 / 쌤앤파커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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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질투하는 건가? 웬즈데이 마틴의 새 책, [Untrue] 실망스러웠다.




저자는 명문대 박사학위 소지자인데, 대중을 겨냥한 가벼운 책으로 이미 유명세를 탔다. 그녀에게 인터뷰 요청이 많았던 데에는 잘 관리된 외모도 한 몫 했을 것이다.



Joel Moser / CC BY 3.0



 게다가 전작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에서 그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많이 흘렸다시피 그녀의 시댁은 물론 그녀 본인의 가정도 꽤 잘 산다. "아무나 주소지 삼을 수 없는" 뉴욕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시누이, 시부모 그리고 그녀 자신도 살았었다.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는 "아무나 들여다 볼 수 없는" 뉴욕 최상류층 여성들의 이야기를 "내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외부자"로 썼기 때문에 히트칠 수 밖에 없었다. 글솜씨가 아무리 좋은 작가인들, 최상류층 여성들을 이웃사촌으로  접근하여 관찰하기는 어려울테니, 웬즈데이 마틴의 소재선택은 우선 그 희소성 자체에서 탁월한 한 수! 


이번에는 불륜, 폴리아모리, 제도와 관습에서 자유로운 성을 꿈꾸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썼다. 이 선택 역시 탁월한 한 수! 게다가 이처럼 인상적인 Ph. D 학력과 우아한 상류층 외모의 작가가, 자신도 남편과 시들하다거나 여성들의 난교파티에 초대받아 초밀착 블랙 원피스를 입고 다녀왔다는 에피소드를 흘리니, 일반 대중들이 어찌 혹하지 않을까! 웬즈데이 마틴은 셈에 능하고 베팅을 잘하는 작가로군.   


[파크 애비뉴의 영장류]를 읽으면서도, 양수가 터져 긴박한 와중에도 페디큐어 샵에 가서 발톱을 다듬는(왜냐하면 산부인과 의사가 자신의 발톱을 보고 자신을 판단할 것이므로) 저자의 허영기어린 선택에 눈치는 챘다. [Untrue]를 읽으며 한 번 더 확신했다. 그녀가 셈법에 빠르고, 자기 연출에 능한 캐릭터라는 것을. 이건 질투인가?


한국 출판사에서도 [나는 침대 위에서 이따금 우울해진다]라는 상당히 자극적인 제목으로 출간했다. 저자는 테블로이드 가쉽란에 나올만한 에피소드들과 사라 블래퍼 하디 같이 저명한 학자들과의 인터뷰를 섞어 짜 넣어서 전무후무 독특한 높낮이의 책을 썼다. 그녀의 주장은 이미 몇십년전 사라 블래퍼 하디가 [여성은 진화하지 않앗다]에서 펼쳤고, 이후에도 많은 학자들이 목소리를 더한 것인지라 새롭지는 않다. 다만, 그녀가 이런저런 연망을 동원하여 여성 잡지 가쉽성 에피소드들을 좀 더 가미해 더 대중에게 친숙해보이도록 가공한 면은 있다. 


궁금한 점 하나. 그녀는 잘 나가다가 갑자기 별도로 흑인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장을 마련했다. 

뭐, 읽기 전부터 짐작했으나 여성에 대한 차별에 더해 "흑인"이라는 인종적 차별까지 더해져 이중 삼중의 차별을 받는다는 이야기인데.


구색 맞추기 용 챕터처럼 느껴졌다. 마치 흑인/백인의 구별이 선명하게 있는양, '흑인'으로 간주되는 이들은 모두 차별의 대상인양 제시한 모든 에피소드가 천편일률의 뉘앙스를 담고 있었다. 되레 저자가 '흑인됨, 흑인성'이라는 걸 실체처럼 상정하고 있다는 오해가 들만큼.....


뒤틀린 심정에서 뒤틀린 후기를 쓴 건지 모르겠다. 몇 주 휴지기를 두었다가 다시 읽어보면 다른 후기가 나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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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하기 싫은 날 라임 어린이 문학 34
오언 콜퍼 지음, P. J. 린치 그림, 이보미 옮김 / 라임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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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무 말도 하기 싫을 땐, 기분이 어떤 거지?"

예상했던 대로, 주인공들은 슬펐다. 적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슬픔에 푹 젖었던 경험이 있다. 동화의 중반까지는 사람에게 학대 당해 슬픈 강아지를 주인공 소년이 '사랑의 힘'으로 다시 '컹컹- 컹' 짖게 해주는 내용인 줄 알았다. 만약 사랑이 일방향으로 흐르는 이야기였다면 [아무 말도 하기 싫은 날]의 이처럼 감동적이진 않았을 것 같다.

강아지 오즈는 한 때 슬픔과 두려움 때문에 '컹컹' 짖지를 못했다. '짖고 싶은' 본능을 누를만큼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이 컸다. 하지만 자신을 유기견 센터에서 데려와 온 마음으로 보살펴준 패트릭 덕분에 케이지 밖으로 나왔고, 세상 냄새를 맡았다.





그런데 어느 날, 오즈는 자신을 애써 외면하고 갑자기 차갑게 대하는 패트릭에게서 한 때 자신이 풍기던 냄새를 맡았다. 바로 '슬픔'의 냄새였다. 영리한 강아지 오즈는, 음악가 출신 집안의 패트릭이 자신에게 했던 음악의 마법을 패트릭에게도 시도해본다. 현을 켤 수도, 건반을 두드릴 수도 없는 오즈가 택한 영리한 방법은 직접 책을 읽고 확인해보시길...(리뷰를 쓰다보니, 스포일러 같아서 예비독자에게 죄송한 마음에 급 수습 중)


강아지의 '컹컹'처럼, 사람 아이 패트릭 역시 슬픔 밖으로 나와 목소리를 내고, 사람 어른인 패트릭의 엄마 역시 엉엉 울며 감정을 뿜어낸다. 울고 '컹컹'하며 감정이 격하게 소용돌이 칠때, 패트릭의 외할아버지께서 남하신 말씀이 명언이었다. "여기서 다들 뭐 해? 왜들 그렇게 울어? 세상이 끝나기라도 했대? 아무리 세상이 끝났어도 일은 해야지." 생활 속 평범한 대화일텐데, [아무 말도 하기 싫은 날]의 저자 오언 콜퍼의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So Cool!


나는 동물과 교감해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차가운 독자였지만, 인간이나 강아지나  마찬가지로 음악의 마력으로써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교감함으로써 서로 일으켜 세워준다는 설정에 설레임마저 느낀다. 사랑은 도는 거구나. 구비구비 S자 강물처럼 감싸안듯 돌며 흐르는 구나. 꼭 인간끼리만 아니라, 인간 종 밖의 존재들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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