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 은밀하고 뿌리 깊은 의료계의 성 편견과 무지
마야 뒤센베리 지음, 김보은.이유림.윤정원 옮김 / 한문화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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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타임"은 마구잡이로 쓰기에는 조심스러운 무거운 말이지만, 최근 "대상포진"에도 "골든타임"이 있음을 알았다. 발병 72시간 안에 치료를 받으면, 평생 후유증까지 안고 갈 만큼  3~4주까지 고생할 필요없는 병이란다. 흥미롭게도, 대상포진 처방과 치료 과정에서 의사 두 명을 만났는데 같은 말을 한다. 


"대상포진? 여자분들은 72시간 내 와요. 아픈데도 참다가 3일 넘겨 와 고생하는 사람들은 거진 남자지요."


'그런가 보다'했다. 여성이 몸의 소리에 더 촉 세워 귀 기울이고 빠르게 자기돌봄 모드 전환하나보지? 그런데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원제: Doing Harm)을 읽다 보니, 의사분들의 말이 달리 해석된다.  



"은밀하고 뿌리 깊은 의료계의 성 편견과 무지(The Truth About How Bad Medicine and Lazy Science Leave Women Dismissed, Misdiagnosed, and Sick)"라는 부제의 이 책은 저널리스트인 마야 뒤센베리가 생의학계의 젠더 편견을 비판하며 2018년에 펴낸 책이다. 김보은과 이유림 두 번역가 덕분에 2019년, 한국 독자들은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 를 익숙한 한국어로 만날 수 있다. (의료용어가 카톡 이모티콘보다 자주 등장하는 450여 쪽 분량의 전문서적을 매끈하게 번역한 두 분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다시 "대상포진"으로 돌아가 보자. "72시간 골든타임" 내 일차 구제 기회를 놓치는 이들 대다수가 남성이라는 의사의 말은 경험에서 나온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묵묵히 통증을 참아내는 남성과 "엄살쟁이, 건강염려증, 증세를 과장하는 수선스러운 심인성 질환자"로서의 여성이라는 젠더 편견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실로 대상포진의 경우, 수두와 마찬가지로 수포가 올라와 눈으로 증세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감기 몸살과 비슷해서 놓치기 쉽다. 그럼에도 여성들은 72시간 골든타임 놓치는 경우가 적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여성이 호소하는 고통에 대한 편견 더해진 이야기일 수 있다.


이런 주장이 바로 [의사는 왜 여자의 말을 믿지 않는가?]의 저자가 여성 백 여명에게 의료시스템 내 차별 경험을 수집하여 그 공통분모로서 추출해낸 굵은 줄기이다. 한마디로, 똑같은 증상으로 아프다고 했을 때 여자가 호소하면 진단지연이 발생하거나, 진단 오류의 가능성이 훨씬 커지고, 신체적 질환인데도 히스테리 환자인양 심인성 질환으로 엄살하는 것으로 잘못 다뤄지기 쉽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저자 마야뒤센베리가 "글을 마치며"의 제목을 "여성이 아프다고 말하면 믿어주길!"로 정했을까?


450페이지 본문에 더해 참고문헌과 자료만 72쪽이 더 붙어 있는 이 밀도높은 책에서 '~카더라'로 주장할 리가 없다. 의료계의 젠더 편견의 역사를 살피고, 그 구조적인 문제를 분석하며, 배제되어 온 여성의 몸과 건강은 실로 지식의 보물창고라는 주장을 하기까지 신뢰할 최신 연구성과를 곳곳에 배치해서 주장한다. 


젠더 편견은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고 말 문제가 아니다. 실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기에 더더욱 주목해야 한다. '남성 중심' 의료체제 속에서 진단 지연 대상이 되거나, 진단 오류로 적합하지 않은 치료를 받거나 혹은 통증을 인정받기 못하기에 그냥 참다가 생명단축으로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한다. 총 538쪽의 책이라 세련되게 압축해 리뷰 올리지는 못하겠고, 직접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아울러 저자도 서문에서 언급한 바버라 애런라이크의 책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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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09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앗 저 이거 읽고싶은 책인데 북사랑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2019-12-09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차이나는 클라스 : 고전.인류.사회 편 - 불통不通의 시대, 교양을 넘어 생존을 위한 질문을 던져라 차이나는 클라스 2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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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프로그램 중에 아는 것이라고는 "On-air'


"차클"이 뭔지 몰랐습니다! 


[차이나는 클라스]는 책들이 출간되어 제목만 알았지, TV 프로그램인줄은...."추천의 글"을 쓴 손석희 JTBC대표이사는 "차클"도 "모르는" 요즘 대한민국 어른이 있는 줄 "몰랐겠죠?"


현재까지 3권 출간된 시리즈 중, [고전, 인류, 사회 편]을 일요일 오후를 남김 없이 쏟아부어 읽었습니다. 


고미숙, 김상근, 폴킴, 이정모, 이명현, 이진우, 정산진, 박미랑, 이나영. 



고미숙 고전연구가를 제외하고는 평균 40쪽 분량의 강연을 했나본데, 예외적으로 고미숙의 분량은 2배, 거진 80페이지. 그만큼 [차이나는 클라스- 고전, 인류, 사회 편]에서 훈훈한 입담과 독특한 연구분야를 자랑한다. 특히 "연암과 구암에게 길을 묻다"에서 연암의 해학, 호방한 성격을 에피소드에서 추출해내는 예리한 눈이 남달랐다. 책 꽤나 읽었다할지라도 일단 한자가 늘어선 책들은 도망다닌 이들은 절대 알 수 없는 옛글의 묘미, 옛 학자들의 정취. 고미숙 연구가 덕분에 엿본다. 2018년인가 17년 강연장에서 만난 고미숙은 앞으로 "잠의 문제"를 집중해 공부하겠다고 했는데, 여기서도 현대인의 불균형한 생활로 인한 몸의 소외의 예로 잠을 든다. 



그나저나 이 책의 79페이지에 떡하니 소개된 문구, "결혼 안한 30세 이상의 딸을 둔 사족은 중죄인 취급한다"니 이거 왜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가. 플러스, 




이나영 교수(중앙대 사회학과)가 데이트 폭력을 소재로 박사논문 쓸 당시, 한국의 현직 경찰들마저 "없는 범죄를 만들어서 공부한다"고 반응했다니 이 또한 왠 봉창 두드리는 소리였던가. 


폴 킴 교수(스탠포드대)는 창의적 지성인의 생각전개 방식과 공익을 위한 실천의 방식 둘 다를 보여줘서 고맙고

이명현 박사야, 한 우물 파온 학자의 넉넉한 내공을 나처럼 천문학 까막눈 대중에게도 친절히 풀어주니 고맙고

이진우 교수는 포항공대(포스텍) 학생들이 왜 이 분의 강의를 들어야만 하는지 그저 고개 끄떡끄떡 인정하게 해주는 클라스의 강의로 철학자의 질문 영역 넓음을 보여주어 고맙다. 

메모할 게 많은 내용의 강의야, "세대"론과 "세대갈등"에 대한 사회학자의 해석을 명쾌히 보여주는 정상진 교수가 최고였다. 예를 들어 이분은 "세대"의 개념적 단순함과 모호성이야말로 '세대"가 정체성 규정의 축이자 사회현상 분석의 한 범주로 유용함을 강조한다. 또한 세대를 구별하는 데 단순히 나이를 준거삼는 일반 대중의 시선에서 나아가, W.G. 제발트의 "시간의 고향"개념을 빌어와서는 추억 공유를 중요한 준거로서 제시한다. 덕분에 더 생각해본다. 


[차이나는 클라스] 나머지 2편도 곧 읽게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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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두 얼굴 - 사랑하지만 상처도 주고받는 나와 가족의 심리테라피
최광현 지음 / 부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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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피"가 제목으로 들어간 책에는 딱히 끌리지 않는데, 이 책은 도서관에 막 들어온 새 책이라 집어 들었다. [가족의 두 얼굴]. 제목만 봐도, 뉘앙스 짐작되는데, 친절한 부제에는 "사랑하지만 상처도 주고 받는 나와 가족의 심리테라피"

저자 최광현 박사는 한세대학교 교수이자 트라우마가족치료 연구 소장이며 그의 아내 역시 놀이치료전문가이자 교수라고 한다. 여느 가벼운 에세이모음집처럼 통독할 책이 아니었다. 저자의 인품, 성격, 가족사까지 상상하게 하는 친근한 책이자, 현명한 조언을 담고 있기에 두 번 읽거나 곁에 두고픈 책이다. 그제서야 꼼꼼히 출판 정보를 살펴본다. 2019년 9월 25일자 발행이지만 이미 25쇄 발행이고, 이 책은 2012년 첫 출간되었다. 좋은 책은 독자가 알아보는 구나. 최광현 박사의 외아들이 초 3이라하던데, 이제는 최소한 대학생 성인이겠고 최광현 박사도 막 독일에서 귀국하여 대학에 자리잡아가며 신참 교수가 아닌 중견 학자이겠구나....



좋은 이야기가 참 많은 이책에서 어쩌자고 나는 "똥떡"에 가장 감명 받았다. 

재래식 변기에 빠진, 즉 똥통에 빠졌던 어린아이가 수치스러움 혐오감, 불안감,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현명한 문화적 장치로서의 똥떡. 


"현명한 부모들은 이런 아이의 마음을 헤아여 재빨리 집에 잇는 재료로 똥떢을 만들었습니다...(중략)...아이는 이웃들로부터 관심과 격려를 받으면서 자연히 똥통에 빠지 황당한 경험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극복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심리학에서 말하는 '직면'입니다.(72쪽)"


중독에 대한 흥미로운 정의도 인상 깊다.


"Christine Caldwell은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트라우마를 해결하려고 '지금 여기'의 몸을 떠나는 현상을 중독이라고 합니다. 중독이란 트라우마 때문에 상처 입은 어린 시절에 형성된 고정된 신체반응입니다. (186쪽)" 

"Christine Caldwell은 우리 몸에 남아 있는 트라우마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이 '자기 몸을 떠나는 방식'을 사용한다고 주장한다...(중략)...알콜, 니코틴, 도박, 게임, 섹스 등에 의존하여 평상시 자신의 몸 상태에서 잠시 벗어남으로써 트라우마의 고통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것이다 (39쪽)"


25쇄에서 최소한 10쇄는 더 찍힐 책이라, 혹은 그랬으면 싶다. 겸손하고 낮게 오는 전문가의 목소리, 흔치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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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나라에서 온 소년 라임 어린이 문학 28
토마시 콘친스키 외 지음, 다니엘 슈파체크 그림, 김지애 옮김 / 라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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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눈알을 꺼내서,

내장을 꺼내서,

혓바닥을 빼내서

맑은 물에 씻은 후

다시 제 자리!


잔혹 동화 혹은 공포 영화의 시놉시스가 아닙니다. 제가 예닐곱 살 때, 초등학교 안다니는 자유인일 때 자주 상상했었어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동화 [시간 나라에서 온 소년]을 읽던 중, 기억이 났습니다. 꼬마는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지는 것을 '더러워진다'라고 생각했던 게 분명합니다.  마치 양치질로 이를 닦아내듯 몸 안까지 주기적으로 꺼내 닦아서 한결같이 깨끗히 쓰는 상상을 자주했던 걸 보면.....


 [시간 나라에서 온 소년]의 주인공 타이포가 하는 일은  어린 시절 제 상상과는 반대방향으로 갑니다. "뭐든 엉망진창 뒤죽박죽, 무질서하게 만드는 게 주특기(15쪽)"인 타이포는 세상에 세월의 흔적을 남겨야만 하거든요. 타이포의 아버지는 "책 낡게 만들기 부서"의 책임자이며, 어머니 역시 같은 부서에서 "향기"를 담당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화장품의 '향기'가 아니라, 생활의 흔적으로서의 '냄새'죠. 오래된 책에서 특유의 곰팡내, 먼지내, 종이 쩐내 나게 하기. 타이포는 부모의 재능을 이어받았는지 오탈자를 만들어 내기에 능숙합니다.아직은 초등 4학년이라 "시간나라 초등학교"에서 열심히 배우는 중이지만, 하루빨리 인간 세상의 낡아가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어합니다. 

 


어느날, 타이포에게 멋진 기회가 찾아왔지요. 바로 현장학습으로 인간 세상의 빵집에서 시간나라 전문 요원들의 활약상을 보고 배워오는 기회였어요. 모험심에 충만한 타이포는 교칙을 깨고 인간의 집에 잠입했는데, 그만 믿기 어려운 진실을 알게 되죠. 인간들은 "낡은 상태"를, "낡아가려는 기미"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간들은 되레 "낡음"을 끔찍하게 여겼다고요. 예를 들어, 마거릿이 생일선물로 받은 새 테블릿을 떨어뜨리자 마거릿의 엄마아빠가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화를 내셨죠.



인간들은 시간나라 요정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수행하는 일(세상을 뒤죽박죽, 낡고 망가지게 하는 일)을 고마워하기는커녕, 피하려고만 들었지요. 시간학교의 교장선생님과 선생님들은 혼란스러워하는 타이포에게 "위대한 시간의 톱니바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득시키려 합니다. 과연 타이포는 "시간학교" 커리쿨럼에 순응하며, 인간들이 싫어하는 "낡고 더러운" 세상 만들기에 혁혁한 공을 세울까요? 아니면 그 "위대한" 시간의 톱니바퀴를 멈추는 대반역(?)을 시도할까요?




 [시간 나라에서 온 소년]은 변화를 "낡음"이라며 부정적으로 보고, "낡음"을 "새 상태의 것"으로 복구시키거나 대체하려드는 오늘날의 세태를 점잖게 꾸짖는 동화인 듯 같습니다. 

"네 주변의 물건들이 얼마나 빨리 낡고 있는지를 살펴봐. 세탁기며 냉장고, 텔레비전, 자동차는 물론이고 네 장난감도 마찬가지일걸. 물건이 이토록 빨리 낡았던 적이 없거든. 컴퓨터나 휴대폰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얼마나 빨리 새것으로 갈아치우는지! (45-6쪽)"


그렇다고 독자를 가르치려 들거나, 철학적 메시지를 어렵게 전하는 접근이 아닙니다. 세상 낡아가는 모든 것의 뒷무대에서 시간나라 요정들이 활약아닌 활약, 기여아닌 기여를 해왔다는 발랄한 상상력을 통해서 시간과 변화, 인간 존재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해보도록 유도합니다. 어린이 동화일거라 생각했는데, 어른들이 읽어도 [모모]읽을 때와 또 다른 재미를 선물해주는 책입니다. 한국 독자들에게 덜 친숙한  체코작가들의 동화를 한국어로 소개해준 푸른숲 출판사에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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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글쓰기 - 혐오와 소외의 시대에 자신의 언어를 찾는 일에 관하여
이고은 지음 / 생각의힘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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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뜻한 초록색 책표지에 "2019 우수출판콘텐츠 제작 지원사업 선정작" 엠블렘도 선명하다. 그런데 막상 [여성의 글쓰기: 혐오와 소외의 시대에 자신의 언어를 찾는 일에 관하여]를 읽는데, 초록색의 선명함과 달리 내용과 문체가 혼색이자 탁색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의아했다. 경향신문 정치부와 사회부 전직기자로서 "글쓰기 근육을 키웠(21쪽)"으며 3권이나 책을 펴낸 저자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여성의 글쓰기]가 작가지망자를 위한 글쓰기 방법론을 가르치려는 책인지, 한국사회 저널리즘과 사회 병폐를 고발하려는 글인지, 육아의 고단함 속에서도 글쓰기로 자아 찾는 과정을 드러내려는 고백서인지 모를만큼 집필 동기만큼이나 문체도 섞여 있었다. 


그러다가, 작가가 쓴 "나가는 말"에서 이유를 찾았다. 


"이른 아침, 늦은 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 있는 짧은 오전. 나에게는 귀하디 귀한 황금 시간대다. 쪼개고 쪼개어도 모두 합쳐 하루 평균 서너 시간이 채 못 된다. 짧고 불연속적인 이 금쪽같은 자투리 시간을 다시 자르고 이어 붙여 쓴 결과물이 바로 이 책이다(227쪽)"


교만을 토핑한 속단을 저자 이고은에게 사과하고 싶어졌다. 10년을 상대 가정의 숟가락 수까지 셀 정도로 가까이 지냈더라도 정작 이체하려다보면 친구의 이름을 몰랐음에 자괴감 든다는 엄마여성들의 우정 이야기가 떠올랐다. 경력 단절, 사회적 관계망에서의 고립감, 소위 말하는 "독바 육아"의 고독함을 수 년간 감내하다 보면 그저 '출구가 없다'고 포기해버리기 쉬운데, 이고은은 새벽잠과 밤잠을 포기하면서, 글을 쓰고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며 목소리를 묶어냈다. 독자로서 가벼운 속단을 제대로 다시 사과한다. 동시에 나는 여전히 책 중간 중간 별책부록처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쪽글 네 편을 끼워 넣은 선택에 공감 버튼을 누를 수가 없다.  저자 스스로도 "솔직히 '이렇게 쓰라'든가 '잘 쓰는 법'에 대해 논하는 것은 어색해서 미루고 미뤄서 썼다(230쪽)"면서 굳이 책에 끼워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먼저 각성한 자가 '아직' 미몽 상태의 이들을 가르치려는 뉘앙스도 담았기 때문이다. 자격지심이라고 보아도 좋다.  


"나의 목소리가 거센 파도 소리에 묻혀 의미 없이 흩어지는 것만 같은 공포에 짓눌렸다(200쪽)" "

글 생각을 하다 놓쳐버린 가사와 육아의 공백에 스며드는 죄책감은 내 몫이었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나의 글쓰기는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누리는 고고한 취미생활 정도로 치부되곤 했다(123쪽)."


청와대를 출입하며 박근혜 前대통령과 면대면 인사를 나눴다는 일화를 소개하는 이고은 (전)기자가 사직 후, 오로지 육아에만 올인하며 느꼈을 당혹감과 고립감, 아니 더 자극적으로 표현한다면 존재의 무너짐에서 어떻게든 탈피해보려 선택한 출구가 글쓰기 였다. 흥미롭게도 기자생활 하며 단련된 "글쓰기 근육"은 책의 1장에서는 무채색의 배경화면으로 작동하지만, 3장과 4장으로 갈수록 정서적 호소와 절박함을 담아 천연색으로 선명한 교차된다. 저자가 그만큼 "공포에 짓눌려(200쪽)" "죄책감은 내 몫" 삼아 절박하게 썼기에.....


솔직히 나는 후자의 글이 훨씬 좋다. [82년생 김지영]의 초대박 히트는 문학적 완성도에 있다기 보다, 독자 개개의 이름과 '김지영'이란 이름을 치환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많은 이들에게 공감받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여성의 글쓰기: 혐오와 소외의 시대에 자신의 언어를 찾는 일에 관하여] 역시, 꼭 글을 쓰려는 욕구나 의지가 없더라도, 읽으며 주어를 살짝 자기 이름으로 바꾸어 보기만 해도 카타르시스를 느낄 이들에게 오아시스 같은 책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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