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타니컬 아트 그 꽃 - 계절을 걷다
김은정 외 지음 / 아이생각(디지털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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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을 섬세하게 그리는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프롤로그 중에서]


"세밀화"라고 알아온 장르, "보타니컬 아트"라 칭했다. 게다가 "Botanical Artists"에 "Korean Botanical Artists Association"도 있다. [보타니컬 아트 그 꽃]이라는 책 덕분에 처음 배운 몇 가지 사실이다. 이 협회 소속 대표 작가인 김은정, 김지영, 이영숙, 최지연이 의기투합하여 낸 이 책은 꽃을 사랑하는 이들뿐 아니라 자신의 손으로 꽃의 기록을 남기고 싶은 이들이 환영할 책이다. 일종의 텍스트북으로서의 기초적 지식전달에 더해, 실전할 수 있는 활동지의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먼저 "프롤로그" 파트에서는 식물관찰하고 기록하는 방법, 식물그림에 필요한 도구 및 재료와 그 관리법, 마지막으로 보타닉 아트의 다양한 접근법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소개한다. 




이어 실전 연습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변화에 따라 이어진다. 예를 들어 봄꽃에는 진달래, 목련, 개나리, 애기똥풀 등 봄을 대표하는 꽃의 리스트가 올라있다. 각 꽃마다 학명, 그 꽃의 매력 및 특징,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그 꽃을 그리는 데 필요한 색 차트 분석이 이뤄진다. 작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 해당 꽃을 그려내고 주의사항이 무엇인지도 깔끔하되 자세하게 정리해준다. 


나는 실은 [보타니컬 아트 그 꽃], 꽃 소개마다 등장하는 색 차트에 마음을 빼앗겼다. 사물을 인지할 때 그 대상의 주조색이 무엇인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도 관심 두어본 적도 없었던지라, 세상을 보는 시각이 무척 새롭게 느껴졌다. 미술 비전공자로서 '척보면 착'하고 알 수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겠지만, 사물 구성의 색차트 뽑기 작업 굉장히 유용해 보인다. 






작가분들이 보타닉 아트하기 좋은 재료들을 각각 소개해주었는데, 내겐 오직 색연필뿐이다. 소심해서 따라 칠하기만 해도 손이 부들부들. 마음으로 그려야하는데 마음에 조바심이 가득하다. 수련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여백을 채우다 보면 봄날의 진달래가 내 손 끝에서 화사하게 펴겠지. 일기 대신 일주일에 꽃 한 개씩 완성하기로 마음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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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얼라이브 - 남자를 살아내다
토머스 페이지 맥비 지음, 김승욱 옮김 / 북트리거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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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몇 번 후회해 봤다. 일기장 구석구석을 오려낸 듯한 내밀한 문장들을 묶어 따끈따끈한 신간으로 공개한 작가들을 은근히 비아냥거리고는 후회했다. '작가를 질투했니? 정작 책 한 권 쓸 깜냥 없으면서?' 비아냥을 자책하다 보면, 그 작가에게서 내 성향을 본다. '자기성찰성'으로 포장한 예민함, 사소한 순간에서 의미를 증폭시켜내고 주위 사람들도 같이 같은 방향 봐주기 종용하는 중심성. 그래서인지, 비슷한 성향 작가의 책을 읽으면 푹 빠지는 만큼 읽고 나서 그 책 표지를 유난히 매몰차게 덮는다. 


       


<Man Alive> 역시 비슷하다. 일단 시작했으니 100m 결승점을 찍겠다는 듯 내달려 읽었다. 독자 역시 엄청난 정신력 소모를 하게 하는 지독한 자기탐색의 책이다. 


토머스 페이지 맥비Thomas Page McBee가 썼다. 이름이 긴 데는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이 책을 쓴 이유이기도 하다. 저자는 "Page"라는 여자로 살아왔다. 성전환 수술을 받은 이후로는 Thomas라는 이름을 쓴다. "Twin"을 의미하기에 일부러 고른 이름이란다. 몸과 정체성이 쪼개지는 듯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과거의 자신, 자신을 쪼갠 아버지와의 관계, 예전의 자신과 '테스토스테론'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는 수술 이후의 자신을 연속선에서 같이 품어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이름 같기도 하다. 


https://youtu.be/-i_30LFk5bc



<Man Alive>의 한국어판 부제는 "남자를 살아내다"인데, 원서 부제는 "A True Story of Violence, Forgiveness and Becoming a Man"이다. 그 삶을 살아보지 못한 독자로서 책을 다 읽고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단어 역시 "용서"였다. 맥피는 자신의 삶을 다르게 만들어버린 어떤 이를 이해하려고 무진 노력한다. '왜 그랬을까? 그에게 다른 면이 있지?'를 확인하고 싶어 친척집을 찾아 가문의 역사를 뒤질 정도로 이해하려 노력한다. DNA검사를 통해 친부(biological paternity) 아님이 밝혀졌을 때도 여전히 연결성을 찾는다. 용서를 비는 아버지 앞에서 아무 말 않는 대신 속으로 말을 삼켰다. "나는 나보다 작은 것에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가 아니다." 이제는 늙고 초라해진 가해자(?), 아버지를 무시하는 말이 아니다. 맥피가 다른 경지의 화해, 용서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트라우마가 그의 삶을 참 많이도 바꿔놨구나를 다시 상기시키기에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이다. 




"나는 나보다 작은 것에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가 아니다."만큼이나 울림 준 문장이 있었는데 맥피의 파트너가 한 말이다. 법적 이름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급변하는 파트너, 다리털이 무성해지고 체취도 달라지고 이두박근 삼두박근 근육이 솟아나는 파트너에게 딱 지킬 수 있는만큼 약속한다. 


"난, 네가 너로 살아가는 데 결코 방해가 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다른 건 전혀 약속할 수 없어."


So Cool! 그대들, 멋져 버렸어! 


그 어떤 보증수표 남발하는 약속보다 "약속 할 수 없어"라는 이 말이 든든하게 들린다. 

이 책은 진정 부제, "A True Story of Violence, Forgiveness and Becoming a Man," 용서와 변화,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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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흠 찾기는 쉬운데, 제 흠은 안 보였나 보다. 

[아키시]라는 그래픽 노블을 집에 들여와서, 휘리릭 맛 보기를 하면서 '아프리카의 가난, 인권 그런 얘기겠구나' 속단했다.

한 방 제대로 먹었다. 아키시는 밝디 밝고 귀여운 아이이며, 주인공의 이름을 그대로 딴 이 그래픽 노블은 자연스러운 일상, 어린이다운 상상, 독특한 아프리카식 유머가 가득했다. 한 마디로, 유쾌한 작품이었다.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삶에 지친,' '소외된' 그런 이야기가 전혀 아니었는데!

"아프리카"를 뭉뚱그려 '검은 대륙,' '고통, 가난, 지체,' 등의 이미지로 타자화시켜온 그 숱한 시선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내 안의 통제 안된 편견이 그냥 치고 올라왔을 때, 나는 고개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도 고개 숙여 사과하는 한 방식이다. 



아키시의 저자, 마르그리트 아브에는 서아프리카 코르디부아르 태생이다. 열두 살에 파리로 와서 유학 생활을 하며 작가의 꿈을 키웠다고 한다. <요푸공의 아야>로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수상했고, <아키시>에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담았다고 한다. 그러니 당연히 이야기의 배경은 서아프리카이며, 주인공 역시 아프리카 소녀인데 보통 깜찍하지가 않다.

족히 천 권 이상 그림책을 보아왔다고 자부하는데도 <아키시>처럼 독특한 개성의 책은 처음 만나본다. 어쩌면 내가 무지해서 미처 상상 못 해본 세계의 이야기인지라 새로운 것인데, 마치 작품 자체가 무척 개성적인 것처럼 돌려 말하는지도 모른다. 아키시는 그냥 귀여운 소녀, 친구 욕심 많고 칭찬받고 싶고 대장 되고 싶은 아이인데, 나는 자꾸 '아프리카 소녀'를 보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다.


책의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유난히도 '주술'로서 불임을 치료하는 장면이나, 말라리아를 앓다가 꾼 꿈을 판타지 영화처럼 풀어낸 에피소드를 기억하는 것을 보면 나는 <아키시>에서 이국적인 것, 내 경험 세계에서 흔히 보지 못한 것들만 보려 하고 또 찾아낸지도 모르겠다. 반성한 척하면서 일도 반성하지 않은 것이다. 

그나저나 이런 사랑스러운 아이의 이야기는 혼자 보기 아깝다. 나 같은 어른보다도 아키시 또래의 어린아이들이 많이 찾아주었으면 한다. 작가 마르그리트 아부에가 어린 시절 대륙을 건너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면서도 작가의 꿈을 꾸고 또 실현한 점도 진심 응원한다. 아키시의 다른 시리즈를 찾아 읽는 것으로 응원을 행동으로 보여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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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용감한 마흔이 되어간다 - 기숙사에 사는 비혼 교수의 자기 탐색 에세이
윤지영 지음 / 끌레마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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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기숙사 사는 이야기를 글로 써보라"는 제안 받기 어렵다. 사회학자 에릭 클라이넨버그의 말을 빌자면, "Going Solo"가 '사회적 실험(social experiment)'이자 대세인 요즘은 더욱 더. 그런데 윤지영은 그 제안을 받았다. 그리고 책을 썼다. 책 제목에 왜 작가가 그런 제안을 받았는지, 단서가 무더기로 담겨 있다. 


[나는 용감한 마흔이 되어 간다: 기숙사에 사는 비혼 교수의 자기 탐색 에세이]


"비혼, 사십 대 중반, 여성."


여기까지는 도시 1인 가족에서 쉽게 찾아 볼 공통분모이다. 이제 독특한 요소가 가미된다.


"부산 동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등단 시인, 무주택자, 대학기숙사 거주자


솔직히 나부터도 그 독특한 조합에 끌려서 이 책을 찾았다. 영구 주소지를 대학 기숙사로 삼으며 몇 년씩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도대체 "마흔"이 뭐길래 콕 집어 '용감한 마흔이 되어간다'고 제목지었을까? (본문의 단서로 추정하면 저자는 2020년에 최소 43세이다.)


궁금해서 읽었는데, 책 읽으며 궁금함이 거의 해소되었다. 우선 그녀는 국문학 교수였던 아버지, 등단 문인이었던 어머니, 그리고 등단시인이자 고전산문 박사인 여동생을 두었다. 심지어 여동생의 남편도 문학박사인 문학가족 출신이다. 교육을 통한 신분상승의 장기 플랜을 세웠던 아버지의 진두지휘에 따라 서강대 국문학과에 들어갔다. 아버지의 관리 하에 강의시간표를 짜고 교수들에게 과제를 제출하기 전에 아버지에게 점검받았다. 아버지의 그랜드 플랜대로 마흔 전에 국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30대 후반에 인생의 사랑을 만났다. 하지만, 죽음으로 연인을 떠나 보냈다. 비혼을, '누군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기를 마음 먹었다. 33평 아파트에 살았지만, 공간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안식년마다 외국에서 방랑생활을 하기 위해 과감히 아파트를 처분했다. 대학교 게스트하우스에서 산다. 빨래는 이용자 적은 시간에 공용세탁실에서 돌리고, 통금 시간이 지나 기숙사로 못 돌아가면 연구실에서 침낭 깔고 잔다. 이 정도만 늘어놓아도, 저자 윤지영이 어떤 이유에서 현재의 선택들을 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 질문은, '어떻게 살고 있는가?'이다. 


우선 저자는 외롭기 때문에 가급적 기숙사에 머무르지 않는 대신 연구소에 상주한다. 부산 동의대학교 교정의 나무와 풀들을 자택 앞뜰의 수목처럼 상상한다. 교정을 산책하다가 까마귀를 만나면, "까악 까악"하고 놀래켜주기도 한다. 학자니까 '논문 써야지'하면서도 Netflix에 필 꽂히면 정주행 시청한다. 저자가 시간을 환산해보니 12달 중 1달을 꼬박 본 셈이라 한다. 그래도 강의평가 좋은 교수인지라, 까마귀랑 서로 "까악까악" 교감한 이야기를 강의 소재로 끌어낼 만큼 일상을 학문하는 삶과 연결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세번 째 질문들은 책을 읽고도 풀리지 않는다. 

1) 윤지영 교수는 꽤 자학적 조크를 한다. 왜 했을까? 무척 궁금하다. 실은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4차원 안드로메이다" "괴짜스러움과 소탈한 매력" 이런 생각을 했는데 본인도 알고 있나보다. 이렇게 자평한다. 


얼마 전 SNS에서 나 같은 부류의 사람에 관해 쓴 글을 보았다. 우주가 자기를 중심을 돈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 글은 이들이 얼마나 피곤한 족속인지 조목조목 분석하고 나서 그런 사람에 대처하는 법을 제시했다...(중략)...맞는 말이다. 나도 이런 내가 싫다. 그런데 잘 고쳐지지 않는다. 고쳐지기는커녕 나이가 들면 더 심해질 가능성이 높다. (223쪽)


질문 하나, 윤지영 교수는 자신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가? 게다가 이렇게까지 독자에게 솔직할 필요가 있을까?


질문 둘, 동의대학교에서 우수강의상도 받았을만큼 인정받는 교수인데 왜 단 한 수강생의 비판에 그토록 집착할까? 오죽했으면 책을 내며, 자신을 비판한 학생의 문장을 토씨하나 안 빼고 그대로 옮겨 소개하기까지 하다니! 왜 그랬을까? 등단시인이라면, 강단에 서 온 교수라면 어느 정도의 비판에는 무뎌지는 자기 훈련을 거치지 않았을까?


다음에 인용한 문단은 윤지영 교수의 강의에 대한 익명의 학생 평가



현실적이지 않고 뜬구름만 잡는 수업이었으며,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하는 철학적 이야기, 작가나 영화감독이 주고 싶은 메시지를 자신의 생각으로 덮어씌워 더렵히는 수업이었고 영화의 정확한 내용이나 상황등은 무시하고 보이는 것과 교수의 생각으로만 설명하는 괴상한 강의이다. (31쪽)


나는 왜 윤지영 교수가 처음엔 이 익명의 학생을 괘씸해하며 색출하고 싶어하다가, 마지막에는 "찾아내서 꼭 A+를 주고 싶었다"고 굳이 공개적으로 밝히는지 굉장히 궁금하다. '(학생인)너는 나를 욕했지만 (교수인)나는 너에게 "A+"을 주고 싶어.' 이 말을 왜 한 걸까? 결국 최종적으로 널(학생을) 평가할 사람은 나라는 권력관계의 우위성이 안 감춰지는대도?


다음엔 책 말고, 연극무대에서 그녀를 직접 보고 싶다. 섬세하기에 상대를 피곤하게 할 수 있으나 사람을 끄는 매력이 크기 때문에. 활자 밖의 그녀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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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사회 -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
에릭 클라이넨버그 지음, 홍경탁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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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뉴욕대 사회학과 교수인 에릭 클라이넨버그Eric Klinenberg 교수가 24세, 버클리 사회학과 대학원 입시를 준비하던 1995년 7월, 폭염(Heat Wave)이 시카고를 강타했다. 하지만 불과 한 달만에 같은 미국 안에서도 이 폭염은 기억에서 사라져가고 있었기에 클라이넨버그는 혼란스러워졌다. 이에 그가 이 폭염에 대해 "사회적 부검(social autopsy)"를 서둘러야겠다는 학자적 의무로 메스를 들어 5년여의 연구 끝에 내놓은 책이 [Heat Wave: A Social Autopsy of Disaster in Chicago]. 



초판은 2002년, 새로 쓴 서문을 곁들인 재판은 2015년 발간되었는데 한국어 번역판은 2018년에 출간되었다. 당시 내 관심은 홍경탁 번역자가 번역작업을 시작한 시점이었는데, 2018년 여름 한국 뉴스에 연일 "폭염 사망자"가 키워드로 등장했다. 따라서, 폭염이 단순히 기후재앙이 아닌 사회적 재앙이자 사회극(social drama)라는 인식, 적어도 폭염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던 딱 그 시점에 이 책이 출간되었으니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내 기억으로, 이 두꺼운(참고문헌까지 450여 쪽을 가뿐히 넘긴) 사회학 책은 이례적으로 온라인 서점의 메인 페이지에 수 주간 올라왔다. 번역자가 수년전부터 2018년 여름 발간을 목표로 꾸준히 작업해왔을까? 아니면 2018년의 기록적 폭염 사태를 계기로 초인적 스피드로 번역해냈을까, 몹시 궁금했다. 또한 얼마나 팔렸을까? 출판사 영업 비밀이겠지만 몹시 궁금하다. 짐작하건대 김승섭 교수의 베스트셀러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도 이 책을 언급했기에 더욱 많은 독자들이 찾았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이다. 


  김승섭 교수가 이미 두 권의 스테디셀러를 통해 "사회역학"의 지향을 일반에 알렸지만, [폭염사회]는 구체로서의 적용을 보여준다. 또한 적어도 클라이넨버그 교수가 2015년 재판 서문을 쓸 때만 해도 변방에 있던 "환경사회학environmental sociology)"의 관심영역과 기여가능성을 제대로 보여준다. 무엇보다, 왜 같은 폭염 아래 누가 더 죽음에 취약한지 그 취약이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 사회적인 동시에 정치적 실패라는 경종을 독자들에게 울려준다. 1995년 7월 시카고 폭염의 경우, 취약한 이들은 그저 에어컨이 없거나, 수도세를 낼 돈이 없어 물공급이 끊긴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사회적 연망에서 고립된 이들이었다. 보다 엄밀히는 사회적 연망자체가 생길 여지가 낮은 공동체 사람들이었다. 


사회학자로서의 에릭 클라이넨버그는 CDC로 대변되는 보건학자들과 다른 접근으로 1995년 시카고의 폭염을 "사회적 부검"했다. 역시 "다행이자 고맙게도" 이 면밀한 부검은 일회용 보고서로 끝나지 않고 이후 기후재앙에 대비한 시스템 구축에 실제적 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단순히 첨단기술 업그레이드 뿐 아니라 공동체의 회복 탄력성 높이기 등 사회적 대응기반구축이 따랐다. "폭염은 사회를 어떻게 바꿨나"의 한국어판 부제에 대한 답이 되지 않을까 한다.  









2002년 초판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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