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바이러스의 습격 - 신종플루, 메르스, 코로나19, 우리는 새로운 감염병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 이슈 리포트 1
김우주 지음 / 반니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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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코로나19 이전, 메르스 사태 때부터 대중에게 친숙해진 이름이다. 김우주. 그는 2015년 메르스 대응 국무총리 특별보좌관으로 활동했다. [바이러스의 습격]은 2020년 코로나 사태를 맞아 일반 대중에게 내놓은 가벼운 문고판 안내서이다. 프롤로그에서 김우주 교수는 왜 감염외과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터닝포인트로서의 군대생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한마디로 바이러스의 위험성, 무서움을 목격했기 때문이란다.

[바이러스의 습격]은 앞서 말했듯, 감염병에 무지한 대중을 주 타겟 삼은 만큼 얇고, 전달하는 정보도 간결하다. 1장에서는 공중보건 분야에서 등장하는 용어들- 사례정의(감염병이 유행할 때 감시, 대응, 관리 대상을 규정하는 것), 슈퍼 전파사건, 의사환자, 지역사회 전파-을 설명한다. 김우주 교수가 실로 메르스 사태 때 전염병 관리를 중앙에 선 위치였기에 내부자니까 알 수 있는 정보도 이 책에 담고 있다. 바로 2014년 메르스 사태 때, 대응지침에서 사례정의가 잘못되어 방역망에 큰 구멍이 난 사례이다.


"감염자와 2m이내 또는(or) 같은 방에 머무른 경우"로 WHO와 CDC가 분류하고 있으나, 대한민국 방역당국은 이를 크게 오독했다. "밀접 접촉자는 환자와 증상이 있는 동안 2m 이내의 공간에 1시간 이상 머문 사람"으로. 이런 어이없는 실수 때문에 밀접접촉자를 놓쳐 메르스 초기 방역망에 큰 구멍이 숭숭 뚫렸다. or를 and로 해석한 사례정의를 전국에 배포하고 따르게했다니? 도대체 누가 이런 기초적이면서 중대한 실수를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바로 잡지 않았을까? 누가 책임졌을까? 



2장에서는 아마도 [바이러스의 습격]을 읽는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내용, '코로나로부터 날 지키는 법'을 집중 설명한다. 개개인의 면역 증강법뿐 아니라, 진답 면역으로서의 '군집 면역(herd community)'까지 개념을 설명한다.




3장에서는 21세기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 원인과 그 특징 등을 설명한다. 흥미로운 점은 김우주 교수는 화난수상시장처럼 wet market을 바이러스의 온상으로 지목하지만, 실제 화난수산시상이 발원지인지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코로나 Q&A는 잘못된 상식을 바로 잡아주는 정보에 할애하는데, 나도 '코호트 격리 cohort isolation'의 의미를 덕분에 제대로 배웠으니 옮겨본다. "2~3명 이상의 같은 전염병 환자를 함께 격리하는 것(151)"이 사전적 정의이기에, 광주 21세기 병원에서의 격리를 '코호트 격리'로 표현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한다. 문재인 정부의 코로나 대응에 대한 날이 서다 못해 서슬이 퍼런 비판의 목소리는 [코로나 19: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코로나 19 사태에서도 문제는 계급이다"라는 글에서는 대구시 소재 신천지 교회 신자 집단 거주 아파트를 집단 격리 시킨 조치를 맹 비난한다. 140명 중 46명이 확진을 받았다고 아파트 전체를 집단 격리 시킨 것은 대구시가 저소득 노동자로서 이 아파트 청년들을 홀대하는 증거라고 울분을 터뜨린다. (노동자 연대의 기자인 장호종이 쓴 글이다)

사실, '코호트 격리'의 의미조차 잘 모를 정도로 공중보건, 방역에 대한 지식이 없기에 장호종의 주장이 타당한지 잘 모르겠지만 귀기울여 본다.



[바이러스의 습격] 덕분에 확실하게 배운 두 가지 용어가 있다. 아래에 인용한다.

WHO는 슈퍼전파자라는 용어 대신 '슈퍼전파 사건 super spreading events'라는 용어를 권장한다. 환자 개인에게 슈퍼 전파의 책임을 전가하는 듯한 표현인데다가, 슈퍼전파가 발생한 외부적인 환경과 상황을 살피지 못하게 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메르스 사태 때 슈퍼 전파자로 낙인찍힌 분들 중에는 지금도 여전히 심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분도 있다. 환자가 의도적으로 전파를 한 것이 아니라면 슈퍼감염자(전파자)라는 명칭은 피해야 한다.

[바이러스의 습격] 34쪽



스페인 독감은 1918년 미국의 군병영에서 시작되었다. 1차 대전 때 미국 군인이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에 상륙했다. 이와 동시에 유럽 전역에서 독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당시 스페인은...전시 상황이 아닌 까닭에 언론 통제도 없었다. 정작 독감이 유행한 미국과 프랑스 등은 언론통제 떄문에 보도가 되지 않아 자국민은 내막을 몰랐다. 스페인만 독감 보도가 여과없이 흘러나간 덕분에, 1918년의 패ㅔㄴ데믹 인플루엔자에 스페인 독감이라는 마뜩찮은 이름이 붙어 버렸다.

1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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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해석 -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때
말콤 글래드웰 지음, 유강은 옮김, 김경일 감수 / 김영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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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 American Center / CC BY 2.0



말콤 글레드웰 (Malcome Gladwell 1963~). 유명 작가란 건 알았어도, 그의 책 두 권은 몇 년간 서가에 꽂힌 그대로였다. 결국 최신간인 [타인의 해석(원제: Talking to Strangers]으로 그 유명한 말콤 글레드웰의 글 스타일을 처음 접했다.



두꺼워서 부담스러웠는데, 워낙 편집이 넉넉하고(김영사 출판사는 여백 많이두는 편집으로 두껍게 찍어내는 걸 선호하는 듯...유발 하라리의 3부작도 그렇고...) 각주 페이지도 길어서, 실제 읽다보면 200여쪽 분량이다. 가뿐히 꿀꺽. 아! '꿀꺽할' 가벼운 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말콤 글래드웰은 [타인의 해석]을 무려 3년 동안 준비하면서 많은 인터뷰를 수행하고 엄청난 관련 자료를 소화했다고 한다.


"당신이 모르는 사람을 만났을 떄"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차에서 내리시오"라는 실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2015년 산드라 블랜드 사건(The Sandra Bland Case) 말이다. 요즘처럼 "Black Lives Matter"의 구호가 미전역에서 울려퍼지는 시기에 다시 들으면 자칫 'bad cop'대 '흑인 여성'이 대립각 세운 이야기로 소비되기 쉽겠다. 말콤 글래드웰은 집요하리 만치 그 이면을 파고 든다. 어쩌자고 경찰인 앤니시아는 깜빡이등 켜지 않고 차선 변경을 했다고 산드라 블랜드의 차를 멈춰 세웠으며, 어쩌자고 산드라 블랜드는 그 억울함과 분통터짐에 대한 반응으로써 구치소 안에서의 극단적 선택을 취하게 된 것인지.... 말콤 글래드웰은 앤니시아가 블랜드를 체포하는 동영상을 수십번이나 반복해 보았다고 한다. 굉장한 안타까움을 느끼며. 결국 작은 삐걱거림이 극단적 결과로 커진 이 사건의 기저에는, 모르는 타인에 대한 신호 포착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로 인해 잘못된 판단에 빠지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보여준다.


결국 [타인의 해석]은 우리의 속단, 편견이 실은 타인을 오판하게 할 위험을 키우기에, 타인을 해석할 전략을 다시 짜자는 주장으로 이해했다.

1부, 2부에서는 미국에서 활약했던 피델 카스트로가 파견한 쿠바의 이중간첩들, 그리고 히틀러와 대면하면서도 오판한 외교관들 이야기를 통해, 진실기본값 이론을 이야기한다.

3부에서는 의외로 폴 에크먼의 권위에 도전하며, 투명성 가정의 실패가능성을 이야기한다. 폴 에크먼, 그는 FBI니 CIS에서도 높이 모시는 표정연구의 대가이다. 하지만 말콤 글레드웰은 표정은 내면을 감출 수 없다는 투명성이 신화라는 증거를 여럿 제시한다.

4부에서는 911이후 무려 4년간의 심문 끝에 자백을 한 테러리스트 KSM이 선진신문기법으로 자백은 했으나, 과연 그 이야기가 진실인가하는 날카로운 의심을 던지다.

결국 5부에서는 샌드라 블랜드 사례로 돌아온다. 마치 나쁜 일은 하나로 오는 게 아니라 몰려온다는 뉘앙스로 이해했는데, 사건사고가 일어나는 데는 조건(상황)의 결합이 필요하다. 샌드라 블랜드 역시 당사자들의 성격적 특징이나 화법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보다 구조적 차원의 조건에서부터 여러 상황들의 결합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타인의 해석]만 읽어봐서는 아직 내가 말콤 글레드웰의 팬이 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작은 하나의 사건을 꼬투리 삼아 큰 이야기로 발전시켜내는 그의 생각의 흐름, 자료 전개하는 법 등에서 배운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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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ús Gorriti, CC BY-SA 2.0 



스티븐 존슨. 코로나 19시대, 전염병 대처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소환되어 바쁘지 않을까 싶다. 그는 코로나 창궐 훨씬 이전인 2006년에 대중 강연으로 19세기 런던을 휩쓸었던 콜레라 사태를 분석했다. 사실 저자에 대해 깜깜한 상태로 그가 2006년에 쓴 [감염도시(원제: The Ghost Map)]을 읽으며 내공 면에서 그보다 윗 연배의 작가를 상상했는데, 놀랐다. 38세에 썼다. 그는 불혹 전에 이미 필력 하나로 온라인 오프라인의 유명인사이자 어마한 팬을 거느리고 있었다. 52세인 현재에도 여전히 정열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역학자도, 사학자도 아닌 그가 19세기 중반 런던에 창궐했던 콜레라에 대해 이처럼 밀도 높고도 적확한 정보를 담아낼 힘은 무엇인가?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는데, 책 말미 "감사의 글"에서 친절히 알려준다.

이 책을 쓰던 중에 나는 거의 20년간의 내 발자취가 바로 이 책을 쓰기 위한 준비였음을 깨달았다. 계기는 전염병에 대한 문화적 대응을 주제로 대학 논문을 쓰기로 한 것이었다. 대학원에 다닐 때는 빅토리아 시대 도시 소설에 관심을 가졌다.

[감염도시] 300쪽

덕분에 [감염도시]의 독자는 단순히 콜레라라는 감염병이 런던 사람들을 어떻게 숙주 삼았는가 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런던이라는 도시의 환경과 삶에 대해 구체적 상상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1854년 런던에는 "분뇨수거," "개똥 수거," "(동물 사체에서) 뼈 수거"를 전문으로 하는 고소득 3D직업이 있었음을 [감염도시]를 통해 배웠다. 또한 이 시기 런던에서도 역시, 빈민과 부유층을 공간적으로 격리, 접촉 통로를 최소화하려는 거리설계가 작동했음을 배웠다.저자는, 소위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불결한 거리와 상류층이 사는 방역거리가 구별되는 사회적 지형이 1854년 콜레라 발발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역병은 타락하고 누추한 자들에게만 옮고 고작 몇 블록 거리라도 점잖은 사람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36쪽)기에 전염병에 대해 가난한 자를 비난할 근거가 되어 주었다.

John Snow/ CC0



이를 뒤엎은 것이 바로 존 스노의 유령의 지도(ghost map)이다. 저자 스티븐 존슨은 존 소 스노 박사가 이룬 "진정한 혁신은 다이아그램을 낳은 데이터와 그 데이터를 수집한 조사 그 자체"(232쪽)이라고 극찬한다. 스노는 명망 있던 의사로 바쁜 일정을 소화하는 와중에도 콜레라가 창궐한 브로드 가를 가가호호 방문하며 수백 명과 인터뷰를 수행한다. 콜레라가 수인성 질환임을 입증하기 위해, 브로드 가의 펌프와 다른 수원의 펌프를 쓰는 공장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한다. 그렇게해서 탄생한 지도가 바로 그 유명한 "유령지도"이며, 이는 19세기 중반 유행했던 독기이론에서 수인성 이론으로 우세의 손바닥을 뒤집게 해주었다.





"Map of a late Colera outbreak in London" (1866) / UNESCO/ CC0



즉 존 스노 박사 덕분에 전염병이 숙주가 되는 사람들(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불결한 위생상태나 관리부실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19세기 런던 콜레라의 경우, 공공식수 관리 문제) 때문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생기게 된다.

코로나 19 사태에서, 존 스노의 혁신적 방법과 헌신을 따라서 틈새를 고민해보고 싶다. 방역의 틈새를 만들어내는 문화적 관습이나 신념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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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자들 - 한 난민 소년의 희망 대장정 미래그래픽노블 3
오언 콜퍼.앤드류 던킨 지음, 조반니 리가노 그림, 민지현 옮김 / 밝은미래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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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성당의 한 미사에서 신부님께서 "멕시코 이민자들이 얼마나 어렵게 불쌍하게 사는지를 보세요, 그걸 보면, 나는 참 행복하구나."감사할 수 있다고 했다. 그 발언에 실망했지만, 사실 비교급 행복, 타인의 고통과 불행에서 상대적 안전감을 얻는 이가 많지 않을까? 나 역시 그렇고. 지중해를 건너는 난민의 참사를 스냅샷 이미지로 파악하고 안타까워하는 이들의 마음 기저에는 상대적 안도감이 있을 테다.



그래픽 노블, [불법자들]을 읽었다. 숲속 산책하다가 의자에서 천천히 읽으려 [불법자들]을 들고 나갔다가 산책로 한 중간에 서서 읽었다. 몇 번이나 울컥거리며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니, 1시간이 흘렀더라. 나는 더운 날씨에, 길 한가운데 서서 책을 읽었던 것이다. 이후, 지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전체공개 리뷰도 쓴다.



[불법자들]의 첫장에는 노벨상 수상자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엘리 위젤의 목소리가 인용되어 있다. "소위 불법)체류, 이민)자고 불리는 사람들이여.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법자가 될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한 존재를 그저 "불법자"라는 용어로 축소해버림으로써, 인간으로서의 공통분모를 놓치게 한다.

사람을 가르는 범주명이 얼마나 무서운 효과를 지니는지, 요새 그 생각을 한다. 마치 "성소수자"라는 단어 하나로, 결이 풍부한 한 직물에서 오로지 날실 한줄이 내는 단색 하나로 옷감 전체의 이름을 정해버리듯, 성적 정체성 나타내는 용어 하나로 한 사람의 정체성을 덮어 버린다. 코로나 시대의 언어는 또 어떠한가? "확진자," "밀접접촉자," "자가격리자," "무증상 감염자," 인간이 바이러스의 포로(숙주)가 된 정도 혹은 가능성에 따라 층화된 범주명으로 나타낸다. 물론 이는 "질본"에서 전염병 관리, 통제 차원에서 유용한 범주이기에, 나는 그 실용성을 폄하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다. 단지, 이런 범주화가 일상에서 사람보는 시선에 반영돌 때의 암울함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쩌면 나의 컴플렉스와 닿아 있다. 나는 완결점 찍지 못한 자에게 내려지는 '중도 이탈자'라는 명명에 사로잡혀, 내 자신을 덜 된 존재로 인식한다. 미생이군. 여기서 헤어나기 어렵다. 설령 손가락 한 마디가 끊겨 나간 상태라 해도, 다른 부위가 온건한데도 나는 사지가 다 잘려나간 비존재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완전히 새옷으로 갈아 입거나, 과감히 겉껍질을 벗어내고 흉터 없는 속껍질 몸으로 살지도 못한 채, '중도 이탈자'라는 이름에 짓눌려 흉터입은 삶을 산다. 이 상태의 지속은 안 되겠다.



다시 [불법자들]의 이야기로 돌아가본다. 가나에 살다가 지중해를 건너는 12살 소년 '이보;의 이야기이다. 이보는 저자 '오언 콜퍼'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지만, 그가 이 책을 쓰기 위해 만나 인터뷰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세포로 이뤄졌다. 살아 있는 소년으로 느껴진다. 이보는 삼 남매였으나, 누나가 먼저 떠났다. 사람들은 그녀가 유럽으로 갔을 거라 짐작했다. 이보의 형도 어느 날 자취를 감추었다. 역시 사람들은 이보의 형이 누나를 찾아 유럽으로 떠났으리라 짐작했다. 그래서 이보도 형을 찾아 무작정 떠난다.

이후 아프리카 가나에서,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이르기까지 이보의 여정은 험난하기 그지 없다. 약자가 더 약한자의 피를 빨며 고통을 이중삼중 가중시키는 먹이사슬, 망망대해에서는 유럽에 도착할 희망으로 기다리다가 막상 유럽에 도착하고 나서도 난민 쉼터에서 그저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 이름도 개개의 개성도 지워진채 뭉뚱그려 불법 난민들의 범주로 일원화된 사람들.

[불법자들]의 부제는 "한 난민 소년의 희망의 대장정"인데, 부제에서처럼 희망의 메시지가 있었던가? 찾았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하나는 이보네 삼남매의 강한 우애, 생명 나누기를 아까워하지않을만큼의 우애이다. 우애란, 결국 핏줄 차원을 떠나 확장시키면 인간애이기도 하기에 희망적이다. 둘째, 이보는 자신을 보호해줄 어른이나 돈 한푼, 쉼터 하나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선의를 전략삼아 상황을 유리하게 이끄는 능력을 보였다. 예를 들어, 이보는 트럭에서 떨어진 물티슈 한 상자를 들고 다니다가,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사람에게 요긴한게 나눠 쓴다. 덕분에 죽 한 그릇, 일자리 하나라도 얻을 수 있었다. 이처럼 전략적 계산에 따른 생존방편일지라도 '친절'과 '선의'가 생존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설정은 희망적이긴 하다.

[불법자들]은 성인 뿐 아니라, 초등 중등 어린이에게도 유익 하다. 요즘 대한민국 어린이들 코로나 19로 반 자가격리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는 일상을 답답해한다. 그러나, 이 정도의 답답함은 희망이라는 막연한 끈 하나 붙잡고 지중해를 건너는 숱한 어린이들의 고통에 비하면 그저 사치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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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도시 - 대규모 전염병의 도전과 도시 문명의 미래
스티븐 존슨 지음,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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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로, 호흡기로, 생명의 줄타기로서 코로나를 경험하고 있는 분들과 또 의료진에게 염치가 없다. 하지만, 5개월 째 기특한 자가격리 중인 나로서는 Corona는 온라인 채널이 전해주는 추상의 정보이기도 하다. 간혹 관련한 전문가들의 인터뷰나, 북미 및 유럽발 뉴스를 보지만 어디까지나 온라인 채널일 뿐이다. 철저히 "Untact"하다보니, 세계 유동성까지 막아 놓는 이 전염병이 추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활자중독을 어쩌지 못하고, 또 책을 들였다. 4권. 출판사와 저자가 각기 다른데도 표지 디자인에 일관성이 느껴진다면 과잉 반응일까? 팬더믹으로서의 전염병이 주는 경고인지 붉고 검다. 검붉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검붉은 [감염도시]부터 읽기 시작한다.

하지만, 책 날개에서 저자 약력을 보고 [코로나 19: 자본주의의 모순이 낳은 재난]부터 읽을 걸 그랬나 잠시 후회했다. [감염도시]가 논픽션 장르라는 설명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Covid-19에 대한 사회문화적 해석을 기대했다. 게다가 저자 스티븐 존슨은 기호학과 영문학을 전공했다. 전염병 전문가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감염도시]를 다 읽고 나니, 4권 중 제일 먼저 읽기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얻는 게 많았다.


우선, 저자 스티븐 존슨의 자유로운 글쓰기. 그는 전기문도 아니고 역사소설, 잡지 기고문도 아닌 독특한 장르의 글을 개척한 것 같다. 실제 영문학도로서 빅토리아 시대 소설에서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석사 논문 주제 삼았던 그인지라 픽션인 듯 논픽션 스타일로 썼다. 19세기 런던은 급습했었던 콜레라를 둘러싼 이야기를 역사적 자료들을 토대로 소설가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썼다. 게다가 그는 지면의 상당 부분을 당시 수인성질병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며 콜레라의 감염경로를 밝렸던 존 스노라는 인물에 할애한다.

자수성가한 저명한 의사였던 존 스노는 어떠한 사명감 혹은 야망에, 콜레라가 도는 도시를 돌며 사람들에게서 물 시료를 채집하고 병력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했던 것일까? 19세기 대다수의 보건전문가와 대중들이 '독기'이론을 믿었을 때 홀로 '수인성 감염병'의 경로를 주장했던 것일까? 왜 스티븐 존슨은 이러한 존 스노에게 절제되었으나 숨길 길 없는 존경심을 보내는 것일까?

어쩌면 작가로서의 스티븐 존슨의 작업 방식이나 위상이 존 스노의 그것과 닿은 지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집요함, 고집, 철저함. 닮은 꼴이기 때문에 더 집중했을지도 모른다.



많은 책에서 19세기 영국에서 콜레라가 돌 때, 과감하게 우물 손잡이를 제거했다는 에피소드 정도로만 존 스노를 소개한다. 그런 에피소드 만으로는, 존 스노가 아래의 지도를 그리기까지 얼마나 많이 가가호호 방문을 하고 편견과 싸우면서 콜레라의 감염경로를 밝히려 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온라인의 시대로 넘어갔다지만, 존 스노의 접근법과 창의적 발산은 여전히 유효하다. 저자 스티븐 존슨 역시, 존 스노의 지도를 현대적으로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제안한다. 한 마디로 "21세기판 스노의 지도"(293)이 필요하다고 한다. 구체적으로는 "위험 가능성이 높은 도심 공기를 감시하는 센서들로 엮은 정교한 감지망, 환자들에게 나타난 이상한 증상을 보고하는 병원의 1차 진료 담당자, 수질 오염 징후를 감시하는 공공 급수 시설 등에서 얻은 데이터"(293)로 그린 디지털 감염병 지도이다.

그런데, 책을 읽다보면 느끼지만 나는 감탄하면서 질투하는 쪽이다. 이번에도 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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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0-06-2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갖 과학기술의 ‘결정체‘라는 device들이 잔뜩 있어도 결국 사람이 중요하다는 걸 여실히 느끼는 요즘의 트럼프독재치하의 아메리카입니다. 결국 노가다가 관건이라고도 생각이 들구요.

2020-06-25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