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 - 일하다 죽는 사회에 맞서는 직업병 추적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기획 / 나름북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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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 


 “아픈 건 당신 잘못이 아니라 일 때문입니다.

 표지가 봄 여인의 스커트처럼 산뜻하다. 그런데 부제는 "일하다 죽는 사회에 맞서는 직업병 추적기"이다. 무겁고 무서운 느낌이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홈페이지http://www.kilsh.or.kr)가  기획해서 , "강동묵, 공유정옥, 김대호, 김영기, 김인아, 김재광, 김정수, 김형렬, 류현철, 송한수, 이진우, 이혜은, 전주희, 최민"이 썼다. 이 분들이 바로 그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이다. 많은 분야 중에서도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라 할텐데, 이들은 환자가 아플 때 단순히 증상만 살피고 진단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일하는 환경과 노동과정을 면밀히 살피는 일터의 유해요인을 파악하고 유익한 조언을 한다.

사실 이 책은 일종의 존경심에서 읽었다. 안락한 삶을 보장받은 이로서,"아픈 사람, 너만 손해'하는 태도로 모르쇠할 수 있는 문제를 애써 들춰내고 세상에 알리고, 그 아픔을 줄이고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소명의식에 존경심이 일어서 읽었다. 비록 지금 당장 내가 이 분들의 노력에 작은 힘도 보태고 있지 못하지만, 우선 알게 된다면 더 많이 알린다면 그 또한 고마움의 작은 되갚음이라는 생각에서 읽었다.

*

솔직히 처음에 서문에서 등장한,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일하자”는 문구가 생경하게 들렸다. 부끄럽지만 '지적노동'이라는 이름하에 편한 일만 해왔기 때문에 "다치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일할" 절실함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러나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에서 언급하는 이들의 아픔과 고통, 억울함은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절절했다.

아래 소개된 이야기 중 상당수는 요 몇년 사이 뉴스에서 들어보았다. 회사측에서 119요원을 돌려보내는 바람에 지게차에 받히고도 응급조치를 받지 못해 사망한 노동자, 급식실에서 조리하다 일산화탄소 중독이 되거나 골병이 든 노동자, 현장실습 나갔다가 자살한 청년, 스크린 도어 수리하다 희생된 노동자들.....

우선은 알고, 기억하자. 그리고 '고장난 쓰레기'가 아닌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노동자의 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들쑤시자. 압력을 가하자. 일회적 사탕발림이 아닌 구조적 변화가 올 수 있도록. 그런 의미에서 『굴뚝 속으로 들어간 의사들』을 많은 이들이 읽기 진심 기원한다.

 

 

 

 

 

 

 

 

제일화학의 기억: 끝을 알 수 없는 죽음의 먼지 석면
터널 끝 어둠으로부터 진폐병동까지: 석탄 광부 이야기
마음을 병들게 한 청구성심병원의 일터괴롭힘
간을 망가뜨린 독성물질, 죽음을 막지 못한 건강검진
도시철도 기관사의 정신질환도 직업병입니다
‘골병’의 현장을 바꾼 두원정공 노동자들
아픈 노동자 대우자동차 이상관, 죽음으로 항변하다
열사병, 그리고 저열한 제도에 쓰러진 조선소의 청년
숨겨진 산업재해들, 위험을 방치하고 생명을 무시한 범죄
작업중지권: 얼마나 위험할 때 일을 멈춰도 될까?
건강진단의 모순: 예방하려다 배제되는 불편한 진실
산재노협 활동가 남현섭의 삶과 죽음
위험한 첨단전자산업, 삼성반도체 피해자들과의 10년
돌먼지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유산과 기형아 출산
조리급식 노동자의 골병이 말하는 것
영혼까지 팝니다: 감정노동의 맨 얼굴
과로사와 과로 자살: 열심히 일한 당신, 죽는다
우울한 사회,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노동자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수은중독
태국 노동자 집단 앉은뱅이병을 일으킨 노말헥산
메탄올 중독사건: 법의 사각지대에서 시력을 잃은 파견노동자들
현장실습이라 불리는 어린 노동자 착취의 굴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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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애리얼리, 경제 심리학 - 경제는 감정으로 움직인다
댄 애리얼리 지음, 김원호 옮김 / 청림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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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Upside of Irrationality 경제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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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듀크대 경제학과 교수 댄 애리얼리는 한국의 출판시장에서도 어필하는 대중적 학자인가보다. 그의 이름으로 번역 출간된 저서가 여럿이다. 그중에서 『경제 심리학』은 원제가 『The Upside of Irratinality』로서 그의 첫번째 저서인 『Predicatbly Irrational』과 마찬가지로 "비합리성"을 제목에 키워드로 담고 있다. 그에게 '경제학계의 코페르니쿠스'라는 별명을 안겨준, 댄 애리얼리의 핵심 주장은 "인간은 비합리적이지만 그 행동 패턴은 예측할 수 있다"로 압축된다.

*

"무엇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가?"라는 제목의 프롤로그에서 댄 애리얼리는 독자들에게 불편한 자기고백을 유도한다. 다름 아니라, "당신은 해야할 일이 있는데도 자꾸 미루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누가 당당히 "아니오"라 대답할 수 있겠는가? 해야할 일을 제 때 수행하는 것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시킨다는 보장을 줄 지언정,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을 미룬다. 이것이 바로 '행동 경제학 Behavioral Economics'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비합리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가 된다. 그렇다고 행동경제학이 인간의 비합리성 (번역자 김원호는 irationality를 '비이성'으로 번역)을 꼬집어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결점, 비합리적 행동 이면의 동기를 이해함으로써 개인뿐 아니라 사회 차원에서 통제력을 높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한다.

*

서문에서 댄 에리얼리가 분명히 해두는 점은 비합리성은 단점뿐 아니라 긍정적인 면도 동시에 지녔다는 점이다. 또한 전작 『Predicatbly Irrational』과 달리 『The Upside of Irratinality』을 집필할 때는 3도 화상 환자로서의 개인적인 경험과 주관이 많이 개입되었음을 미리 밝힌다. 4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의 1부는 주로 직장에서의 인간행동 분석에 할애했으며 2부는 사적 관계에서 드러나는 인간 행동 분석에 더 치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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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군가 자신의 글을 읽어주리라는 기대 혹은 환상 때문에
2. 방문자들도 자신의 생각을 적극 표출할 수 있기 때문에
 
블로그에 글을 쓴다.

 

*

블로그에 글을 쓰는 그 동기가, 바로 우리가 '왜 일하는지?', 즉 일한다는 것의 의미를 유추하게 해준다.

1부 직장에서
CH3 "이케야 효과"  - 자기가 만든 것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의 성향, 이를 활용한 반조리 식품, 반조립 제품의 개발
CH4 "개인주의 바이러스 - 내 것이라면 무조건 좋아, 네 것보다 더 나아, 자사제품의 선호
CH5 "복수의 정당화" - 독일 라이프치히의 진화인류학연구소: 침팬지 사회에서도 복수 존재(사회 질서유지의 중요기제로서) : 무성의한 A/S가 고객의 복수를 부른다.
*

2부 가정에서
CH6 "적응과 행복의 비밀" - 고통, 쾌락에의 빠른 적응은 쳇바퀴에 비유할 수 있음, 따라서 인간은 행복을 극대화하려는 전략을 세울 수 있음.
CH 7 "연애와 외모의 상관관계" - 실제 댄 애리얼리는 3도 화상의 후유증으로 얼굴이 망가짐. 외모의 한계에 대처하는 방법은 사실 그의 이런 경험이 녹아든 전략. 그는 심지어 동료학자들과 온라인 데이트의 짝찾기 심리도 연구했다.
CH9 "동점심의 진화" - 불행한 다수보다 불행한 1인에게 더 끌리도록, 기부금계에도 빈익빈 부익부현상
CH 10 "일시적인 감정의 휴우증" - 저자의 개인적 사례를 들어, 감정에 휘둘린 의사결정은 부정적 연쇄반응을 일으킨다는 조언.
CH11 "경제학의 재발견" - 인간은 비합리적 성향을 많이 가지고 있기에 우리 스스로 '직관'을 의심하고 '익숙하고 습관적인 행동'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충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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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편견에 휘둘리는 만화주인공 호머 심슨에 더 가까운 존재다. 완벽하게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 애쓰기 보다는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불완전성의 효과를 이해하고, 우리가 극복해야할 문제를 파악하고, 우리가 가진 한계들 속에서도 우리의 불완전성을 활용할 수 있도록 주위 환경을 조성하려고 노력하는 편이 나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433)"
 
"당신이 직관을 무작정 따르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실험을 통해 더 나은 의사결정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의문을 제기하고 탐구하라. (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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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관찰주의자 - 눈으로 차이를 만든다
에이미 E. 허먼 지음, 문희경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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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Intelligence 우아한 관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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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창원 의원 같은 프로파일러도, 추리소설 작가도 아닌 그저  "Criminal Mind" 등 범죄물 미드 팬일뿐인데 책임감까지 느꼈다. <우안한 관찰주의자 (원제: Visible Intelligence)>를 꼭 읽어야ʳ다는.  "지각의 기술 The Art of Perception"을 강의하는 에이미 E. 허먼 (Amy E. Herman) 이 썼다. 370여쪽의 두꺼운 이 책의 1/5쯤을 읽을 때쯤에서야 작가가 아들을 키우는 엄마라는 사실을 알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법학박사학위를 가진 전직 변호사로서 미술사를 좋아하다 보니 "지각의 기술"이라는 독특한 강의를 개발하였다고 한다. 실제 강연 동영상을 보면 성공한 프로페셔널로서의 자신감이 말과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녀는 저돌적이라할만큼 일의 추진력을 갖춘 듯 하다. 강의를 구사하자 바로 NYPD(뉴욕 시 경찰국)에 전화를 걸어 경찰들을 박물관에 초대해 강연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반응이 좋았다. 그렇게 시작한 "지각의 기술" 강연이 FBI, Google. 의대생, 미국 팬터곤,  네이비씰, 포천 500대 기업 등을 대상으로 14년 이상 계속되오고 있다니 참 대단한 여성이다.
*

휴대전화와 인터넷 때문에 끊임없이 집중력을 방해받는 산만한 시대에 예리한 지각력(perception)은 IQ만큼이나 떨어지기 쉽다. 관찰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즉 뇌를 충분히 써주지 않으면 퇴화한다. 에이미 허먼은 굳었던 정신근육을 훈련시키고 지각력을 높이는 ("sharpen perception") 데 미술작품을 데이터로 활용한다. 덕분에 독자는 <우아한 관찰주의자>에서 르네 마그리트, 주세페 아르침볼도, 히에로니무스 보스 등 많은 유명 화가의 작품을 만나게 된다. 이 미술작품을 활용한 다양한 지각 훈련 연습문제가 등장하기에 독자는 독자는, 그녀를 강연을 직접 듣지 않았다하더라도 지각력 높이는 기술을 익히게 된다.


아래 사진은 에이미 허먼이 모든 강연마다 강연 도입부에 청중에게 질문을 던지며 활용하는 사진이다. "무엇이 보이는가?" 몇 분을 노려보아도 내겐 네 발 달린 동물이 이 그림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저자가 이 사진을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인간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든지 등의 지각 오류에 취약한 지각 필터를 지녔다는 것이다. 극복을 위해서는 치열한 연습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H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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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어느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객관적 관찰과 기술"을 연습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래 그림 속 여성을 묘사하라는 주문을 받는다면, 많은 응답자가 '대리석 탁자'를 들먹인다고 하지만, 검증된 바가 아니다. 틀리면 뭐 어떠냐고? 만약 이 사진이 범죄 현장의 단서를 담고 있는 증거라면 사소한 묘사의 실수가 어떤 치명적 결과를 초래할지 책임질 수 있는가? 마찬가지로 잘못된 관찰과 묘사로 병원이나 법원에서 의사소통에 혼동이 벌어진다면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겠는가?  2014년 6월, 미군 특수부대 병사들이 오인 폭격으로 미군과 아프가니스탄 동맹군 다섯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공식적으로 밝혀진 원인은 잘못된 소통이라고 한다. 이처럼 정확한 관찰과 날카로운 지각은 단순히 개인적 능력이라기보다는 사회 내 의사소통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무척 중요한 자질이다. 발달시킬 필요가 분명하고, 발달 시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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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한 관찰주의자>라는 잘 번역된 책으로서 에이미 하먼을 만나봐도 좋겠지만 유투브에 널려 있는 그녀의 강연을 통해서, 사람들이 질문받고 반응하는 방식, 그녀가 주장을 미술작품이라는 매개를 통해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방식도 배워볼만 하다. (내가 가진 편견으로는) 한국인과 일본인은 YES or NO보다는 회색지대의 두리뭉실한 대답이나 반응으로서 상대의 비호의적 태도를 유보시키려는 경향이 있는데 <우아한 관찰주의자>를 읽고 나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고,  치밀히 관찰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이 장기적 관점에서 상대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이롭다는 생각을 하게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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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인문학 -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지식 시리즈
이재은 지음 / 꿈결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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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도는 알아야 하는최소한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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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편적 인류애: 법과 제도로 강화, 혹은 촉진 가능할까? '孝道법 (폐기됨)' '호래자식방지법'

  • 대한민국의 공동체 지수? 덴마크의 타인 신뢰도.

  • 루마니아 차우셰스크쿠의 강압적 출산장려정책: 1인당 5명씩 할당.

  • 최악의 살인지도자들: 캄보디아의 폴 포트 (1925~1998), 벨기에의 레오폴드2세 (1835~1909) 콩고인 대학살, 칠레의 피노체트(1915~2006), 그 가장 위에 아돌프 히틀러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인문학? 아무리 인문학 열풍이라하고, 인문학으로 질문하는 삶이 영혼의 풍요를 가져와준다지만, 그 '최소한'은 누가 정하는가? 무엇을 위한 '최소한'일까?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인문학>을 읽는 내내 드는 생각이다. "이과형 인재를 위한 말랑한 지식"이라는 부제와 함께, 저자 이재은은 이 책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 용산고등학교 2학년 친구들과 신도중학교 3학년 학생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과를 지망하려는 중고등학생을 주요 타겟삼은 인문학입문서라는 계산이 나오는데…….
<최소한의 인문학>에 등장하는 미셀 푸코의 생명정치(biopolitics)나 부르디외의 아비투스(habitus), 레비스트로스의 이항대립,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banality), 데이비드 하비의 공간 계급화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등의 개념은 대학 졸업장을 딴 성인에게도 생소할 개념들이 아닐까 싶어, 놀랐다. 아무리 인문학이 필요한 세상이고 세상이 융합형 인재를 원한다지만 언제부터 대한민국의 중고등학생들은 '인문학적 소양 쌓기'라는 목표하에 이런 고차원의 공부까지 더해야하나 싶어서.
오해는 마시라. <최소한의 인문학>은 최근 내가 읽어본 그 어떤 인문학 입문서보다도 잘 짜여진 구조에, 저자 고유의 목소리가 분명한 훌륭한 책이다. 내가 의아한 것은 이 정도 수준의 지식과 생각의 깊이를 어찌 중고등학생들에게 '최소한'이라며 ,강요 아닌 강요 할 수 있을까?이다. <최소한의 인문학>은 차라리 애시당초, 평소 거의 책을 읽지 않아 스마트폰 거북목 증후군에 있는 대다수 성인을 위한 책이라 했으면 좋으련만. 나는 진심 <최소한의 인문학>을, 나와 내 가족 외 좀 더 큰 세상으로 '최소한'의 관심을 확장시키고 싶은 어른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정말 괜찮은 책이다.

"정말 괜찮은" 이라는 평가적 표현에 독자의 오만이 깃들어있을지 모르겠다. 변명하자면, 내가 <최소한의 인문학>을 "괜찮은"이라 말한데는 이유가 있다. 얻어갈 게 참 많은 책이다. 저자 이재은은 철학과 문학을 오래 공부하고 '공동체'라는 이상을 품은 이답게, 시와 소설,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명저를 비빔밥처럼 잘 버무려 문학가의 언어로 풀어놓았다. 그에게서 한 수 배우다 보면, 이재은은 소위 타생적 학문의 언어일지라도 자기안에서 잘 소화시켜 자생적 사유의 뿌리로 바꾸어 놓았구나를 느낄 수 있다. 중고등학생이 이 책을 읽는다면, 저자 이재은이 질문을 던지고 생각의 점들을 연결하는 방식에 주목하고 배우기를 권한다. 결국 <최소한의 인문학>에서 독자에게 궁극적으로 제시하고 싶은 것은 학술용어의 얄팍한 암기가 아니라,  이를 적극 삶에 끌어와 질문하고, 또 그 질문함으로써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힘을 표출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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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궁극적 관심은 '함께 살 만한 공동체' 만들기에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깨어난다'는 고야의 판화를 시작으로 생각이 곧 사람됨이요, 행동과 변화를 위한 저항의 근간임을 일깨워준다. 이어 2장에서는 타자화(othering)로서 '우월한 나'에 대비한 '열등한 너(너희)' 만들기가 결국 이해의 부족에서 오는 갈등을 빚어냄을 지적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인류애가 필요하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유토피아를 꿈꿀수 있다며 유토피아의 요건을 4장에서 나열한다. 5장에서는 유토피아를 디스토피아로 만드는 나쁜 리더와 좋은 리더를 대비시켜준다. 이재은 저자와 함께 유토피아 꿈꾸기에 동참하고 싶다. 꿈꾸다보면 고민하게 되고, 고민이 고민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면 촛불처럼 행동으로 이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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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페터 슬로터다이크 지음, 이덕임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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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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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지적 풍토, 독서열기는 한국과 어떻게 다르길래?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 (원제: Rage and Time: A Psychopolitical Investigation) > (2017[2006])가 "유럽 철학 에세이 분야 베스트셀러"라 한다. 80여쪽의 서문만 거듭 읽으며 활자의 늪에서 헤매는 우매한 독자로서는 '베스트셀러'가 시사하는 높은 가독률이 부럽기만 하다.
*
독일인 철학자이자 문화 이론가인 페터 슬로터다이크 (Peter Sloterdijk 1947~ )는 '분노'를 키워드로 서구의 역사를 새롭게 조망한다. 2017년 한국 사회에서 분노는 '분노조절장애'니 하는 개인 차원의 '욱' 수준으로 평가절하되지만, 저자에 따르면 분노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발전의 원동력이자 변화를 이끄는 중추 동력이었다. <일리아드 Iliad>의 인용으로 시작하는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의 첫 장에서는 영웅 서사시에서 분노를 칭송하는 것이 곧 당대 사람들이 분노를 가치 있게 여겼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하지만 분노가 가진 순수한 힘은 길들여지고, 현대에 이르면서 사람들에게 역으로 '망설임'이 권위이자 미덕으로 내면화되었다고 한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이처럼 분노가 개발되고 관리되는 단계는 거의 2000여년 전에 시작,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 과정을 본문에서는 "사육화된 분노(32)"라고 표현하는데 '사육'에 해당하는 원어가 궁금해진다.
'분노의 사육화' 관점에서 보면, 20세기의 폭력은 '분출된 것'이 아니라, 폭력의 대리인들이 자신들의 사업적 기준에 맞추어 장기적 관점을 가지고 대상을 통제하고 관리한 결과 (56), 즉 기획된 폭력이다. 분노는 증오의 문화를 통해 기획된 형태로 구현되는데 (117), 예를 들면 복수가 그러하다. 분노가 은행 형태로 축적되면 하나의 프로젝트로서 역사적 행태로 변모한다 (123). 성숙되지 못한 분노가 지엽적으로 표출되면 도리어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분노 자산을 낭비하지 않고 낡은 것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세계 혁명'의 동력이 될 수준으로 축적하려면 기다릴 필요가 있다. 냉정함을 유지하면서 끊임없이 증오와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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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존재의 티모스적 역동성에 대한 이해, 즉 사회 심리 체계에서 분노에 대한 연구는 현실적으로 차단되었다고 본다. (45) 그러나 21세기 전반부도 대규모의 갈등으로 뒤덮이리라 예측하기에, 우리는 우리 시대의 분노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근본적 반성이라는 어젠다를 붙들고 있어야 한다.(60) 이 작업을 바로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가 하는 셈이데, 그 스스로는 이 작업을 "전 세계적으로 작동되는 분노은행 건설과 관련된 연구관찰(266)"이라고도 칭한다. 이 작업을 위해 저자는 유럽지성사는 물론, 경제학, 정신분석학, 역사, 인류학, 정치학 등을 넘나들며 자료를 제시하기에, 나같은 무지한 독자는 뇌에 당분이 많이 필요해진다. 하지만 그의 논의가 난해한만큼, 독창적이어서 흥미롭니다. 특히 축적된 분노를 운용할 귀중한 자본으로 해석하는 점이 흥미로운데, 그에 따르면 분노은행은 정당이나 정치 운동, 특히 좌파적 정치 스펙트럼으로 표현된다고 한다. (255)
 *
중요한 것은 현대 사회에서는 "전 세계적 관점을 지닌 분노의 수집 장소가 없다(336)"는 점이다. 분노가 고립되고 분산되어 이전 시대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는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전망이다. 미래 세계에서도 분노는 공산주의의 보편적 집단적 형태로 결집되지 못할 것이다. (418) 안타깝게도, 교활하고 은밀하게 작동하는 신자본주의의 삶의 방식에서는 "분노와 반체제적 에너지"가 결집되기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운동성도, 이론적 구심점도 상실된 상태에서 언론과 TV가 '행복'이라는 환타지로 사람들을 눈 멀게 했으니 분노가 결집될 수가 없다. 급진적 행동주의라는 면에서 공산주의와 유사한 면이 있는 이슬람주의 역시, 세계화된 자본주의 국가 안에서 보편적 반체제 집단의 역할을 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415) 미래 사회에서 분노가 공산주의의 보편적 집
그렇다고 <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가 분노의 전복력을 부정하는 책은 아니다. 마치는 글에서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그가 희망하는 '세계 문화'를 제시한다. 그것은 "보복의 형이상학과 그 정치적 반향을 적절한 수준의 성찰로서 깨부수는 포스트 일신교적 문화 (421)," "문화 상호주의와 트랜스 문화적 균형을 갖추고 반권위적인 부드러운 도덕성에 바탕을 둔 실력주의이자, 뚜렷한 규범적 양심과 양도불가능한 개인의 권리에 대한 존중의 문화,"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인칭 시점에서 건설된 합리성의 문화 (42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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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이야기가 있는 집" 측에서 이 책을 주인공이 "분노"인 소설에 비유하며 강력히 권한다. 어려워도 포기말고 공들여 한장 한장 읽다보면 독자가 세상을 보는 시선에 변화를 맞을 것이라고. 절대 동감한다. 꽤 어려운 독해였지만, 희열이 대단하다. 특히 4부 '중심에서 분리된 분노'와 마치는 글인 '적대감을 넘어서'는 읽고 다시 또 읽으며 속뜻을 음미하고 싶어진다. 마지막으로 이렇게나 어려운 철학에세이의 번역을 해준 이덕임 번역자에게 고마움의 인사와 동시에 아쉬움의 말을 남기고 싶다. '문화 상호주의,'니 '분노의 사육화' 등 용어 중 일부 해설이 필요한 단어는 독자를 위해 언어를 병행 기재해주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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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세상을 어떻게 지배했는가>의 주제와 모티브는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의 <역사의 종언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1992) 와의 가상대화에서 비롯되었다 (76).  "후쿠야마의 창의적인 통찰력은 외부로 뻗어가는 문명의 전쟁 에너지가 종식된 바로 그 순간에 자유세계 시민들 사이의 특권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과 질투로 가득 찬 투쟁이 역사의 무대 중앙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성공적인 자유민주주의 세계의 시민들은 항상 자유롭게 흘러 다니는 불만족의 물결에 젖을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한다. 인간은 티모스적인 불안의 에너지에 시달리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81)" 물리적인 전쟁은 끝난 듯 보여도, 형이상학적 전쟁은 불가피.  "과거의 세상에는 노예와 농노, 시대에 대한 불만을 품은 양심의 소유자들이 있었다면 현대 사회에는 패배자 (Verliere)들이 있다.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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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이 패배자에는 '외모지상주의Lookism'라는 종교에 빠져, 얼짱 외모를 과잉 보상의 충분조건으로 생각하나 정작 자신은 외모로서는 수입을 기대할 수 없는 이도 해당한다. 페테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더 시니컬하게 나아가 '보통 사람'을 재정의하는데, "진보된 자본주의에서 과잉 보상으로부터 제외된 이 (368)"라고 콕집어 명쾌하게 말해준다. 분노가 가진 엄청난 전복 에너지를 인식하지도 못한 채, 급진적 무관심과 극단주의적 권태에 빠진 이야마롤 어쩌면 보통사람일지 모른다. 페터 슬로터다이크 교수는 무기력과 무관심에 젖어 있는 보통의 독자, 뒤통수를 확 친다. '거대한 숫자'는 의미가 있다고. 연합해서 집단적 이익을 위한 행동에 나선다면 강력한 당파가 될 수 있다고.

2016년 광화문 광장과 대한민국 전역을 달군 촛불집회의 열기가 바로 그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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