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동 타이거스 - 2013년 제1회 한국경제 청년신춘문예 당선작
최지운 지음 / 민음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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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은 아주 특별한 이야기다. 이 책에 묘사된 이야기는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서 누가 봐도 '아, 이 소설은 허구다'라고 생각할 수 있을 내용이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옥수동에 있는 용공고과 거기서 재학했던 오호장군이 실제로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옥수동 타이거스』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가상인 것을 알면서도 마치 진짜 있었던 일처럼 느끼게 하는 것. 사실 이 기법은 매우 어려운 방법이다. 그런데 신춘문예에 응모한 한 신인작가가 이 책을 썼다는 것이 더 놀라운 점이다. 사실 이런 가볍고 통속적인 소재를 다루는 소설치고, 신춘문예에서 뽑아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심사위원들은 이 놀라운 책에 반했을까? 그리고 나는 왜 많은 고전을 읽어놓고도 이 현대소설을 삼류로 분류하지 않은가? 그것은 『옥수동 타이거스』가 지닌 메시지 때문이다.

 

 첫 번째 메시지는 향수다. 오호장군의 멤버인 성혁, 규태, 재덕, 지선, 현승이 다른 학교 써클과 벌이는 싸움 이야기 등은 남자들에겐 로망일 것이다. 영화 <친구>가 대표적인 예이다. 싸움을 잘하는 아이들의 멋진 이야기를 다룬 『옥수동 타이거스』는 육체적인 싸움이 아니라 사회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치러야 하는 청장년 남자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성혁은.

 

 두 번째 메시지는 MB 정권에 대한 비판이다. 오호장군은 각자의 뜻깊은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옥수동 타이거스』는 성장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 최지운은 단순히 개인만이 성장한다고 그들이 성공한다는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법칙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이 다녔던 학교이자 낙오자로 살아가던 그들을 구제해준 용공고는, MB 정권이 들어선 이후(연보를 보면 알 수 있다-여담이지만 연보까지 만드니 더욱 리얼감이 있다), 폐교 결정이 나 버린다. 그리고 그 폐교 결정의 배경에는 님비 현상을 비롯한 현대 사회문제의 진상이 담겨 있다. 명문학교만을 원하는 부모들의 탐욕과 재개발 산업으로 터를 잃어버린 가난한 사람들의 아픔과 학벌을 위주로 하는 현실이 한데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나중에 가서는 그들이 폐교하는 장면에서 함께 분통해할 것이다. 『옥수동 타이거스』의 가장 주된 메시지인 '사회 비판'을 잊지 말길 바란다.

 

 세 번째 메시지는 성장이다. 오호장군으로 옥수동 일대를 잡아쥐던 다섯 명의 학생들은 사실 속마음은 착하고 꿈을 향해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을 도입한 덕분에, 그들 마음속으로 파고들 기회를 독자에게 주지 않았으나, 그것을 '인터뷰'라는 소재로 대신하고 있다. 오호장군은 각자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것이 프로게이머라도 상관없다. 과거에 잘못을 저질러도 상관없다. 학벌이 안 좋아도, 대학에 못 가도, 행복할 수 있다. 최지운은 오호장군의 성공을 기록하며 우리에게 이러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옥수동 타이거스』은 엄밀한 소설이다. 그러나 이 책은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과거의 로망과 현실에 대한 비판과 미래의 성장을 향한 갈망. 이 소설은 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담아냈을 뿐만 아니라 정교한 디테일을 자랑한다. 『옥수동 타이거스』는 멀리서 봐서는 평범한 통속소설 같지만, 진심으로 열의를 품고 탐구하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주제를 적고, 이 리뷰를 마친다.

 

  이 세상에 실패한 인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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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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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를 만나다

 

 나에게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매우 뜻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4년 전, 플라톤의 『국가』를 읽었을 때,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인 나에게 천재 중의 천재인 플라톤의 사유를 따라가라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까지 『국가』를 완주했다. 그 후, 나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차츰 알아가기 시작했다. 『청소년을 위한 국가』에서 시작해서 전남대학교에서 『파이돈』을 읽으며 토론하고, 『소피스테스(소피스트)』와 『정치가』를 읽기 위해 안달했다. 나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는 것을 즐거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다니는 '시나브로 인문학 교실'에서 플라톤을 읽자는 말이 나왔고,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말을 들었다. 첫 번째 대화편은 『프로타고라스』, 소피스트의 궤변을 폭로하고 '덕'이 무엇인지 다루는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전만큼의 감흥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 다음에 한 『메논』, 『크라튈로스』, 『소피스트』,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변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네 작품을 요약하는 숙제를 꼬박꼬박 했지만, 즐거워하지 않았다. 플라톤이 어렵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힘들어 하다가, 나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 플라톤의 작품 속에서 소크라테스라는 한 인물을 본 것이다. 처음에는 소크라테스가 대화편에 등장하는 인물로만 간주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크리톤』, 그리고 『파이돈』을 다시 한 번 보니, 부당한 죽음에 대해 용감하게 맞선 위대한 인물로 변해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국내에 출간되지 않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제외하고, 모든 플라톤의 글을 만났다. 그 중 나의 마음을 가장 끈 것은 『국가』와 이 책에 수록된 네 대화편이었다. 이 작품의 공통점은 모두 소크라테스가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야말로 나의 단조로운 플라톤과의 만남에 불을 지펴준 고마운 인물이기에, 이 글을 그에게 바친다.『국가』는 지금 필사하며 정독하고 있으니, 나중의 일로 미루고, 이 자리에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크리톤』, 그리고 『파이돈』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향연』은 생략한다). 물론 나의 글솜씨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깊은 생각에 닿을 수는 없으리라.

 

 

 

 중세 필사본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사실 이 그림은 잘못되었다. 지

금 붓을 잡고 있는 이는 소크라테스인데, 소크라테스는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았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진리를 포기하지 않은 소크라테스의 외침: 『소크라테스의 변론』

 

 (줄거리를 모르는 사람은 아래의 요약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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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의 진리에 대한 변론-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서 있다. 시인 멜레토스, 장인이자 정치가인 아니토스, 변론가 리콘이 그를 고발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죄목은 하늘에 있는 것과 지하에 있는 것을 탐구하고, 약한 주장을 강한 주장으로 만들며,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국가의 신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그는 변론을 하려고 한다. 그 전에 그는 청중에게 정중하게 자신의 말투에 대해 양해해달라고 부탁하고 자신이 올바른 것을 말하는지 살펴주기를 요청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고발한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었는데, 한 부류는 실제로 고소한 사람들이며 다른 한 부류는 전자보다 더 두렵고, 이름도 모르는 부류를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후자에 대해 변론한다. 이들은 자신을 자연을 탐구하는 자, 또는 소피스트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연이 아니라 인간적인 지혜를 탐구하는 사람이며 소피스트와는 다르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친구 카이레폰이 “소크라테스보다 현명한 자는 없다”라는 신탁을 받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그 말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아테네 사람들을 계속 캐물어 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현명한 존재로 알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과 “내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이 참으로 현명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현명한 자들로 여겨지는 시인, 장인, 그리고 정치가들을 차례로 만나 대화를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깨달음은, 시인은 자신들이 지혜가 아닌 소질과 영감으로 시를 짓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장인들은 자신들이 다른 곳에서도 훌륭하게 자기 기술을 발휘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캐물어서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변론한다. 소크라테스는 마치 신이 신탁을 통해 자기를 본보기 삼아 지혜와 관련해서는 사람들 자신이 전혀 보잘것없다는 사실을 말하려 하는 것 같다고 하며, 자신은 이 신탁을 따르기에 바빠 나랏일이나 집안일을 돌볼 겨를도 없다고 말한다. 한데 갑부의 자식들이 자신을 따라다니고 흉내내서 많은 사람들을 망신시켜놓고서, 망신당한 사람들이 오히려 소크라테스를 비난하고 공격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선입관이 쌓여버렸다고 말한다.

 

   이제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를 상대로 자신의 고발 내용이 진실이 아니라고 밝힌다. 그는 멜레토스에게 계속 캐물어서 결국 그를 자가당착에 빠지게 하고 그 스스로 소크라테스가 젊은이를 타락시키지 않았고 신을 믿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 후, 소크라테스는 아킬레스의 일화를 들며 자신이 받은 위치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고 설파한다. 만약 죽음이 두려워 도망간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자 수치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그는 만약 철학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무죄방면해주겠다고 누군가가 제안한다면 그것을 거절할 것이며 동정심을 유발시켜서 목숨을 구걸하는 짓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는 자신을 법으로 판결 내려주라고 호소한다.

 

   사형이 확정된 후에도 소크라테스의 태도는 변함이 없다. 그는 자신을 사형시킨다 해도 더 가혹한 캐물음이 배심원들에게 닥칠 거라고 예고한다. 또, 그는 죽은 후에 만날 현인과 영웅들과 대화하리라는 상상에 젖는다. 마지막으로 그는 죽으러 가는 길과 사는 길 중 어느 편이 더 나은 쪽으로 가게 될지 신을 빼고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며 변론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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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크라테스는 누구인가? 그가 죽은지 250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그를 인류의 4대 성인으로 여기며 인생의 모델로 삼고 있다. 그는 신의 신탁을 받고 난 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다가 아테네 시민들에게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재판 과정에서 소크라테스가 한 말들을 플라톤이 기록해 놓은 책이다. 하지만 이 현자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몇 시간 동안 변론을 아무리 해도, 사람들 마음 속에 깊이 박힌 선입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살려달라고 구걸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는다. 대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글쎄 언젠가는 그가 델피까지 가서 감히 이에 대한 신탁의 대답을 구했죠.-한데, 제 말씀대로, 여러분! 소동을 일으키지는 마십시오.- 실은 그가 저보다도 더 현명한 이가 있는지를 물었으니까요. 어쨌든 피티아 여제관은 더 현명한 자는 아무도 없다고 응답했습니다. (…) 그리고 그(정치인 아니토스)와 대화를 해 본즉, 이 사람이 다른 많은 사람한테는 현명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지만, 특히 자신이 그렇게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제게는 생각되었습니다. (…) 저는 그 자리를 떠나면서, 제 마음 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사람보다야 내가 더 현명하지. 그건, 실은 우리 중에서 어느 쪽도 훌륭하디훌륭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알고 있지 못하는 것 같은데도, 이 사람은 자기가 실은 알지도 못하면서 대단한 걸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나야, 사실상 내가 알지 못하듯, 알고 있다는 생각도 하지 않기 때문이지. 어쨌든 적어도 이 사람보다는 바로 이 사소한 한 가지 것으로 해서, 즉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이 사실로 해서, 내가 더 현명한 것 같아." (서광사,『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박종현 옮김, 2003, p. 115~118)

 

 

 

 소크라테스가 신탁을 받았다고 전해지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는 사실 이 신전 앞에 적혀있는 글귀다.

 

 이 변론에서 배울 수 있는 진리는 무엇인가? 바로 "내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 진정한 앎이다"라는 사실이다. 동양의 공자도 『논어』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자로야! 내가 너에게 아는 것이 뭔지 알려 주마.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이 말을 다른 말로 바꿔서 표현하면, '아는 척 하지 말고 자신이 아는 것만 말해라'는 것이다. 즉, 필요할 때 말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는 태도를 버리고, 겸손하고 경건한 자세로 진리를 추구하라는 의미이다. 자신이 참으로 아는 것을 계속 가지고 있다면, 그 거짓이 진리로 향하는 눈을 가로막으리라. 소크라테스는 70년 평생 이 한 가지 진리만을 추구했고, 전파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멜레토스, 아니토스, 리콘처럼 거짓에 눈먼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비방하고 죽이려 했다. 그리고 이제는 소크라테스에게 협박을 하면서 그 진리를 포기하라고 소리지른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보시오, 죽느냐 사느냐를 놓고 줄곧 고민하면서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이오.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오직 한 가지, 즉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그릇되게 행동하고 있는지, 그러니까 자신이 선한 사람처럼 행동하는지 악한 사람처럼 행동하는지만을 고심해야 한다는 말이오. (…) 사람이 일단 자리를 정했으면, 그것이 그에게 가장 좋아 보였기 때문이든 아니면 상관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든, 그는 죽음이든 그 밖의 무엇이든 괘념치 말고 오직 불명예만을 생각하면서 위험을 무릅쓱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서해문집, 『소크라테스의 변론·파이돈』, 2008, p.37) 

 

 이 말에서 나는 소크라테스의 진실된 태도에 감동했다. 올바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자,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린 자, 소크라테스. 이 용감함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을까?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의 항의에 못 견뎌, 진리를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건졌다면, 지금도 그가 이렇게 존경받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은 『크리톤』에서도 이어진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친구 크리톤의 부탁을 받아들여, 조국을 버리고 도망쳤다면, 오늘날까지 그가 명예로운 성인으로 남아있을 수 있었을까? 사실 죽음이 코앞에서 자신을 위협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겁을 먹어 그가 해달라는 대로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목숨까지 버리는 용기로 자신이 추구하는 진리와 올바름을 끝까지 지켜내어, 명예까지 얻었다. 결국 그는 사형 선고를 받지만,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 하는 것은 이런 자신감과 용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파올로 베로네세의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그는 『변론』 내에서 벌금에 보증 서 줄 사람들 중 

언급될 뿐이다.

 

 하지만 이제 떠날 시간입니다. 저에게는 죽으러, 여러분한테는 살아가려 떠날 시간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서 어느 편이 더 나은 쪽으로 가게 될지는, 신을 빼고는 모두에게 불명한 일입니다. (서광사, 같은 책, p.189)

 

 올바른 삶과 조국을 위한 선택: 『크리톤』

 

 (줄거리 요약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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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화편은 어둑새벽에 소크라테스의 친구 크리톤이 감옥에 있는 소크라테스를 찾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눈앞에 두고도 단잠을 자고 있었다. 소크라테스가 일어나자 크리톤은 그에게 그의 사형집행을 미뤄주던 배가 오늘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고 탈출하라고 설득한다.

 

   크리톤은 만약 자신이 소크라테스를 죽게 내버려둔다면 친구를 구할 수 있었는데도 돈 때문에 친구를 버렸다는 평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많은 사람들의 평판에 마음을 쓸 필요가 없다고 대답한다. 그들은 가장 나쁜 짓도, 가장 좋은 일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득에 실패한 크리톤은 돈이나 친구를 걱정해서 탈출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음을 설파한다. 값싼 밀고자들은 돈으로 입을 막을 수 있고, 소크라테스를 안전하게 모실 곳까지 마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톤은 아들들의 양육과 교육을 생각해서라도 그들을 고아로 만들지 말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사실 이 친구는 자신의 소심함으로 인해 소크라테스를 탈출시키지 못했다는 평판을 걱정했다.

 

   크리톤의 주장을 들은 소크라테스는 반론을 시작한다. 우선 그는 의견(평판)들 중에서는 유의해야 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되는 의견 역시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다중의 의견보다는 그 문제에 관해 이해가 깊은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몸이 건강해지듯이, 몸보다 더 귀중한 영혼 역시 전문가와 ‘진리’가 말하는 바에 유념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는 우리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것을 가장 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이곳을 탈출하는 것이 올바른 것이 아니라면 나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올바르지 않은 짓을 하는 것은 좋지도 훌륭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해를 입었다고 앙갚음을 하는 것 역시 올바르지 못한 짓이라고 크리톤에게 문답을 통해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이 서로 지키자고 합의한 것, 즉 법률이 올바를 경우 이것을 지켜야 하는지 친구에게 묻는다. 물론 그의 답은 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나라를 설득하지 않고 도망간다면 합의한 바 있는 그 올바른 것들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당황한 크리톤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법률과 시민공동체를 의인화시켜 그 답을 내린다. 만약 그가 법률을 어기고 도망간다면 이 나라는 전복될 것이다. 만약 그 판결이 잘못되었다 해도 그것 역시 합의된 것이고, 그를 양육하고 가르친 조국에게 앙갚음을 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동이다. 누구보다도 조국에 충성했던 자가 조국을 저버리는 것은 미천한 노예의 행동이나 다름없다. 그런 뻔뻔스러움을 무릅쓰고 외국으로 간다 해도 사람들의 비난을 들으며 비참하게 살 것이며 죽어서도 결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결국 이 긴 훈계의 결론은 어떤 것보다도 올바른 것을 귀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의 권유를 무릅쓰고 신이 인도하는 운명에 따르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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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소란이 끝나고, 달빛을 받으며 차가운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용감한 소크라테스. 사실 『크리톤』은 읽다 보면 웃음이 나온다. 탈출을 하느냐 마느냐의 긴박한 상황인데, 너무나 평온하게 대화를 주고 받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철학자의 칼이 있다. 크리톤의 설득도 상당히 일품이지만, 소크라테스의 반박은 그를 능가한다. 잠깐 들어보자.

 

 그러면 이보게! 이처럼 우리는 많은 사람이 우리를 두고 뭐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유념하지 말고, 올바른 것들과 올바르지 못한 것들에 관해 전문가인 한 사람 그리고 진리 자체가 말하는 바에 대해서 유념해야만 하네. (…) 즉 가장 중히 여겨야 할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라고 함이 우리에게 있어서 여전히 타당한지 아니면 그렇지 못한지 다시 생각해 보게나. (서광사, 같은 책, p.225~226)

 

 죽음 앞에서 사람은 가장 진실된 것을 털어놓는다고 한다. 삶과 죽음 사이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소크라테스의 말은 곧 '진리'가 된다. 맞다, 중요한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사는 것'이다. 왜 누군가는 그저 그런 삶을 살고, 누군가는 훌륭하고, 행복한 삶을 사는가? 사실 그것은 사고방식의 차이다.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훌륭하게 살면 그것이 바로 훌륭한 삶이요, 행복한 삶인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아테나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선택을 듣고 "그런 멍청한 녀석!"이라고 비웃었으리라. 그러나 지금의 내가 평가하는 소크라테스의 삶은 당대의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리고 선택만 보지 말고, 선택의 이유까지 보라. 소크라테스가 탈출이 아닌 죽음을 택한 까닭은 훌륭한 삶을 살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조국 아테나이를 위함이기도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라가 정한 법을 어기면 나라가 혼란에 빠져 전복될 수도 있다. 공동체가 힘을 모아 정한 법이 그렇게 쉽게 깨져버리면, 다른 사람들도 서로 법을 어길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혼란 속에서 불행해질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여기까지 본 것이다. 그의 마음 속에는 자신을 죽인 '원수' 아테나이 시민들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크리톤은 그 사랑을 보고 포기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사랑은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성립되는 '헌신'의 정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럼 그만두게, 크리톤! 신이 이렇게 인도하니, 이렇게 하세. (서광사, 같은 책, p.245)

 

 영혼과 죽음에 관한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논의: 『파이돈』

 

 마침내 대단원이 막이 내렸다. 이 대화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음으로써 멋진 삶을 마무리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스승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그를 기리기 위해,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대화편을 써냈으니까. 『파이돈』은 그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임종 장면을 그리는 동시에, '영혼'과 '죽음'이라는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해 깊이 논의하고 있으니까. 이 마지막 장면에서 플라톤은 자신을 병에 걸렸다고 밝힘으로써 겸손하게 물러난다.

 

 

 장 프랑수아 피에르 페롱 작, 〈소크라테스의 죽음〉.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인 만큼, 그

에 관련된 그림도 많다.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자신이 죽으면 신들과 함께 하리라는 확신을 품고 있다. 그는 자신이 죽어서 호메로스와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축복받은 자들의 섬(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섬)'에 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것에 화를 내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제자들에게 설명한다.

 

 올바른 방식으로 철학에 종사해 온 사람들은 평생 죽는 것과 죽음만을 실천하고 있다는 것일세. 이제 이 말이 사실이라면, 평생 이것만을 열망해 오다가 정작 오래도록 열망하고 예비한 것이 닥쳤을 때 화를 낸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짓이 되겠지. (서해문집, 같은 책, p. 91)

 

 

 『파이돈』의 키워드 중 하나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의 죽음이다. 이 대화편은 보통 사람의 죽음이 아닌, 지혜를 사랑하는 자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서 필연적으로 등장해야 하는 개념이 바로 '영혼'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 몸과 영혼의 분리라고 주장한다. 철학자의 말에 따르면, 사람이 숨이 붙어있는 동안에는 몸이 영혼을 붙잡아 참된 것을 못 보게 한다. 반면, 사람이 죽어 몸과 영혼이 분리되면, 그제서야 영혼은 진리를 볼 수 있고, '순수'해지는 것이다. 즉,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영혼과 몸이 분리되기(죽음)를 간절히 바라고 있고, 소크라테스는 그 순간의 직전에 있으니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해야 마땅하다. 나 역시 그의 엄청난 논박에 사로잡혀 버렸다. 난 지금 그의 제자가 된 것처럼, 그의 말을 모두 빨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마이클 하네트의 〈소멸과 불멸〉. 소크라테스는 '대립되는 것은 대립되는 것으로부터 생

겨난다'는 논박을 통해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에서 나온다는 논증을 얻어낸다. 그리고 그는 또 다

시 이로부터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낸다. 바로 '영혼 불멸'이다.

 

 영혼 불멸. 이것이 바로 『파이돈』의 주제다. 플라톤은 '영혼 불멸'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많은 장을 할애한다. 나는 기독교를 믿기에 오래 전부터 영혼이 불멸함을 믿어 왔다. 그런데 플라톤 역시 영혼 불멸설을 지지하고 있다. 여기서 잠시 플라톤은 『메논』에서 주장한 말을 다시 꺼낸다. 영혼은 순환하여 새로 생성되는 것에 들어간다. 하지만 영혼은 땅에 있는 것과 하데스에 있는 모든 것을 배웠다. 따라서 영혼을 지닌 존재인 사람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왜 사람은 덕과 지혜와 진리를 모르는가? 소크라테스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상기는 기억과는 다른 개념으로,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문답을 통해 끌어내는 과정을 뜻한다. 소크라테스는 오랫동안 문답법을 통해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진리를 끌어내는 산파 역할을 해 왔다. 이 산파는 '끌어내는 과정'을 배움이라고 말하며 "배움이 곧 상기다"라고 제자들에게 설파한다. 

 

 그들은 다시 영혼에 관한 대화로 돌아간다. 시간에 매여 있는 우리와는 달리, 영혼에게는 시간이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존재했고, 죽은 후에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신적이며 죽지 않고 지성을 통해야 알 수 있고 단일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체되지도 않고 그 자신에 관련해서 항상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 가장 닮았고, 반면에 몸은 인간적이고 사멸하며 지성을 통해 알 수 없고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해체되고 자기와 관련해서도 절대로 항상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는 것과 가장 닮았다고 말이야. (서해문집, 같은 책, p.129)

 

 

 

 자크 필립 조제프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몸의 쾌락보다는 영혼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크라테스

의 태도를 보고, 몸에 얽매인 나의 타락한 생활에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로마의 철학자 마르쿠스도

"죽음은 존재의 해체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영혼은 몸에 얽매인 존재인 만큼, 몸의 방종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영혼은 몸보다 더 월등한데, 왜 더 하등한 몸에게 얽매여 있어야 하는가? 하지만 영혼은 일종의 '조화'다. 만약 영혼이 몸을 내버려두고 자기 멋대로 움직인다면, 몸 따로 마음 따로 움직이는 사람이 될 것이고, 한 마디로 '미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 영혼은 스스로를 죽을 때까지 봉인시켰다. 하지만 그것을 꺼낼 수 있는 기회가 있으니, 바로 '논의'다. 소크라테스는 "논의를 싫어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란 없다"고 말한다. 논의를 통해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적어도 영혼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점에선 큰 축복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영혼을 사랑하는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는 생각하지 말고 진리를 훨씬 더 많이 생각하게나. 만일 내가 뭔가 참된 것을 말한다고 생각되면 동의해 주고, 그렇지 못하다면 자네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논의를 동원해서 저항하게"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이것만은 꼭 유념해두게"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한다.

 

 만일 영혼이 정녕 죽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다고 말하는 이 시간은 물론이고 영원한 시간을 위해서도 우리는 영혼을 보살펴야 한다네. 자신의 영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엄청난 위험을 감수해야 할 걸세. 만일 죽음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벗어남이라면, 나쁜 사람들에게는 천행일 테지. 죽으면서 영혼과 몸과 그들 자신의 나쁨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니 말이야. 하지만 영혼은 죽지 않는 것이 분명하니, 영혼이 나쁜 것들에서 벗어날 수단이나 구원받을 길은 가능한 훌륭해지고 지혜로워지는 것 말고는 없을 것이네. 영혼이 하데스로 가면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교육과 생활 방식밖에 없으니 말이야. 이것들이 저승으로 가는 여정의 바로 첫 단계에서부터 죽은 사람에게 가장 이롭거나 해로운 것이라고들 하지. (서해문집, 같은 책, p.193)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에 있는 지옥, '코키토스'에 관한

삽화.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보지 않았나?) 혈족을 배신한 자들이

이곳에 온다고 한다.

 

 "왜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까, 소크라테스?" 이 질문에 그 동안 많은 대답을 했지만, 위의 대답만큼 정확한 것은 없으리라. 죽음 앞에서 그는 모든 것을 털어놓는 것이다. "올바르게 안 살면 넌 죽은 이후 계속 불행하게 살게 될 거야"라고. 그 자신은 자신의 영혼에 확신을 가진 채로. 사실 나는 내 영혼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난 올바르게 살지도 않았고, 훌륭한 일을 한 적도 없다. 지혜도 없으며, 진리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보고 나의 영혼에 확신을 가지라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소크라테스가 죽기 마지막에 한 말일수록 그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나의 영혼에 확신을 품고 올바르게 살아가려고 노력한다면, 그 보상이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말이 아닐까? 나는 희망을 얻었다.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용기를, 『크리톤』에서 올바름을, 『파이돈』에서 희망을 선사해주었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참으로 고맙다. 비록 잘못된 선택으로 부당한 죽음을 맞았지만, 그가 보여준 모든 태도와 논의는 내 가슴 속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스승님.

 

 "왜 올바르게 살아야 합니까, 소크라테스 선생님?"

 "너는 너 자신의 영혼과 타인에게 빚지고 있기 때문이다. 올바르게 살아야 그것을 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소크라테스의 죽음〉. 다비드가 그린 이 장면은 『파이돈』의 글귀를 연상시킨다.

"선생님께서 독약을 마시는 모습을, 아니 이미 다 마신 것을 보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 자신만 해도 눈물

이 억수같이 쏟아져 얼굴을 가리고 상실감에 비탄해 했습니다. 제가 비통해 한 것은 선생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와 같은 동지를 빼앗겼다는 저 자신의 불행 때문이었습니다."

 

  아랫배 부분이 거의 차가워졌을 때, 이미 덮여 있던 선생님께서 직접 덮고 있는 것을 걷으면서 하신 마지막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크리톤! 우리는 아스클레피오스께 닭 한 마리를 빚지고 있네. 빚을 갚아 주게. 소홀히 하지 말고."

  "그리할 걸세. 그 밖에 달리 할 말이 없나 생각해 보게."

 크리톤의 물음에 선생님께서는 대답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몸이 흔들렸습니다. 마침내 그 사람이 선생님을 덮고 있던 것을 걷으니, 선생님의 눈동자는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를 보시고 크리톤은 선생님의 입을 다물고 눈을 감겨 드렸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이것이 우리 친구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이제까지 우리가 알던 사람 가운데 가장 훌륭하고 지혜로웠으며 올바른 사람이었다고 말해야 할 그런 분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서해문집, 같은 책, p.21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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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06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쓰신 글이지만 무척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몽테뉴의 수상록을 다시 읽으며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답니다. 물론 몽테뉴 자신이 워낙 소크라테스를 흠모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저 역시 소크라테스를 흠모하지만 글로 쓸 엄두는 차마 내지 못하겠더군요. http://blog.aladin.co.kr/oren/6695020)

플라톤의 책들을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내용들이 가물가물한데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봐야겠다 싶습니다.

starover 2014-01-09 11:36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역시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지혜의 메시지를 깊이 숙고하고 싶습니다.
또한, 플라톤의 책들은 위의 대화편 외에도 깊은 지혜와 철학이 담겨 있는 대화편(예를 들어 『소피스테스』나 『정치가』가 있습니다)들이 많이 있으니, 그 책들도 유익하게 읽으시길 바라겠습니다.

oren 2014-01-09 13:21   좋아요 0 | URL
플라톤의 책들은 웬만한 고전에서는 너무나 자주 인용되고 있어서 언젠가는 다시 한번(제가 80년대 초반에 읽었던 책들은 《국가》,《향연》,《소크라테스의 변명》등이었고 그마저도 얼마만큼 제대로 읽었는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네요) 깊게 일어봐야 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안 그래도 며칠 전에 플라톤의 책 세 권을 사긴 했답니다. 세 권 모두 천병희 님 번역으로 '도서출판 숲'에서 나온 최근판이고,『국가』『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파이드로스/메논』이랍니다.

starover 2014-01-09 14:00   좋아요 0 | URL
다시 읽는 책도 있고, 처음 읽는 책도 있네요. 부디 저처럼 얕은 독서가 아니라 깊이 있는 독서를 하시길 바랍니다. 『국가』는 현재 조금씩 필사 중인데, 이해하기에는 제 머리가 많이 부족하네요. 어쨌든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으며 삶의 지혜와 진리를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상 소설 전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
이상 지음, 권영민 엮음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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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포스트모던보이, 이상

 

 이상(李箱)은 이상으로 불리지 않는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수식어가 붙는다. '천재' 이상, 또는 '광인' 이상, 그리고 '모던보이' 이상. 모두 맞는 말이다. 이상은 천재이기도 하며, 광인이기도 하며, 동시에 모던보이이다. 그러나 나는 '모던보이'라는 수식어에서 몇 글자를 더 보태고 싶다. 바로 '포스트모던보이'이다. 모던보이란, 근대와 일제강점기 시기에 서양식 패션을 입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하지만 이상은 그런 '속물'이 아니다. 오히려 '모던'적인 것을 넘어선 '포스트모던'적인 인물인 것이다.

 

 '포스트모던보이'로서의 이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그의 소설이다. 실험적 기법과 특유의 문체로도 모자라, 이상은 작품 곳곳에 외래어를 그대로 쓰거나 일본어를 사용한다. 일본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동시에 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고(여기까지는 모던보이다), 나아가 우리 문화까지 함께 수용하고 나니, 그의 단편과 장편은 맛깔나는 짬뽕이 되었다.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13편의 소설밖에 남기지 못했지만, 그 소설들은 이상이 어떤 사고관을 가지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상 소설 전집』은 이상이 게재한 시와 논문들을 제외하고, 여러 신문에 올렸던 소설들을 모아놓았다. 나는 권영민 편집자의 능력을 칭찬하고 싶다. 작품의 배치 순서를 단순하게 연도순이나 중요한 작품순이 아니라, '이상'이란 작가를 가장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순서대로 배치했기 때문이다. 「지도의 암실」부터 나와 만나게 한 것은 정말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 단편은 이상 특유의 문체와 서술 기법,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관을 종합해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리뷰에서 이상의 13편의 소설을 일일이 검토하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면, 글이 너무 길어지니까. 대신, 이상의 단편과 장편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상 소설의 키워드'를 몇 개 찾아봤다. 나는 그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상의 작품들을 소개할 것이다.  글이 난잡해진다면, 그것은 나의 잘못이리라.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0권, 『이상 소설 전집』의 표지다.

 

 2. 이상 소설의 키워드 ①- '일과'

 

 이상의 소설은 특별한 사건이 없이, 평범한 하루에 관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지도의 암실」의 경우, 리상(이상)이라는 남자의 24시간을 관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문장을 계속 따라가다보면, 그의 행동보다는 그의 의식을 추적해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마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특징은 1936년에 발표한 「지주회시(거미와 돼지가 만난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이상의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단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내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나'의 하루는 그것으로 마무리된다. 띄어쓰기가 거의 생략된 「지주회시」에서 중요한 것은 '거미'로 묘사되는 '나'의 아내와, '돼지'로 묘사되는 '오'다. 이상은 주인공의 일과만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일과 사이에 일어난 것들에 대한 주인공의 심리를 낱낱이 밝힌다. 그리고 이 작품의 하이라이트는 마유미를 위해 쓸 돈이 부족하자 다시 한 번 아내가 걷어차이기를 바라는 대목일 것이다.

 

 또이십원이다. 십원은술값십원은팁. 그래도마유미가응하지않거든양돼지라고그래주고 그래도그만이면이십원은그냥뜨는것이다부탁이다. 아내야 또한번전무귀에다대이고 양돼지 그래라. 걷어차이거든두말말고층계에서내리굴러라.

 

 '일과'에서 중요한 것은 공간의 이동과 시간의 움직임이다. 만약 그것을 분명하게 서술하지 않는다면, '일과'의 개념 역시 흐릿해지리라. 그런데 이상의 소설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고 위에서 밝혔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그는 사건을 전개시키는가? 장편 「십이월 십이일」의 초반부는 '나'가 죽마고우 M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진행된다. 그러나 편지 소설도 아니고, 어떻게 장편소설을 편지만으로 전개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장편에는 사건이 필요하다. 이상은 그것을 깨닫고, 장편이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이후, 그는 단편소설과 시로 완벽하게 전향한다. 그러나 그로부터 19년 뒤(그가 요절한지 2년 뒤), 「실화」라는 단편에서 다시 한 번 편지가 등장한다. 이 단편은 9개의 소단락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나(이상)'의 동경 생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 편지는 친구 유정과 연이가 서울로 돌아오라는 내용의 편지다. 그러나 이상은 그로 인해 갈등을 할 뿐, 그로 인해 전개되는 새로운 사건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이상의 단편소설에는 '인과관계'가 없다. 보통 사람들은 "편지를 받으면 당연히 가겠다고 결정내리거나 안 가겠다고 결심하겠지"라고 생각한다(나도 보통사람이다). 하지만 '천재'이자 '광인'인 이 젊은 작가는 그 특별할 수 있는 사건마저 일과의 하나로 '자연스럽게' 연결시켜버린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계속 이렇게 부르짖는다.

 

 사람이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 

 

 3. 이상 소설의 키워드 ②- '의식의 흐름'

 

 이상의 소설은 모두 1인칭 주인공 시점, 또는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된다. 따라서 주인공의 의식이 항상 등장한다. 물론, 「날개」처럼 누가 말했는지 알 수 없는 독백, "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도 존재하긴 하지만, 소설의 대부분은 사건이 들어갈 자리에, 주인공의 주관적인 서술이 들어선다. 이상은 3인칭 시점의 객관적 서술과 분명한 행위를 포기하고, 대신 개인의 생각과 평범한 하루로 소설을 채웠다. 그 유명한 「날개」의 내용도 별 거 없었다. 집에만 처박혀 있는 '박제' 같은 '나'가 바라보는 자신의 일상과 아내의 행위에 대한 관찰이 전부다. 후반에 작은 갈등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이 새로운 사건으로 이어지지 않고 끝난다. 이쯤되면, 이상의 소설은 줄거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그의 소설은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 그 자체다.

 

 '의식의 흐름'의 힘은 이미 올더스 헉슬리의 『연애대위법』과 제임스 조이스의 작품들로부터 확인한 바 있다. '하루'라는 현재를 과거와 미래와 연결시켜 하나의 '과정'으로 탈피시키는 힘이 그 속에 있다. 이 주관적이고 끝을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이상은 작품에 필요한 것만 골라내어 '정제된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었다. 그런 점에 있어서 난해한 조이스의 장편들에 비해, 더 함축적이고 깊은 의미가 이상의 단편에 들어있다. 나는 이상을 『소설 전집』으로 처음 만났는데, 벌써 그에게 반한 모양이다.

 

 4. 이상 소설의 키워드 ③- '자기 성찰'

 

 이상의 소설의 대부분의 주인공은 아내가 있는 젊은 남성이다. 그들은 나이가 젊고, '모던보이'인 만큼 아내와 많은 갈등을 벌인다. 그에 따라 항상 주인공은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한다. 그 방식은 말이 될 수도 있고, 행동이 될 수도 있고, '의식의 흐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이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자기 성찰 자체만으로 독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날개」의 주인공은 무능력하고, 「지주회시」의 주인공은 바람을 피고, 「환시기」의 주인공은 아내와 별거하고 있다. 다양한 남성상을 독자에게 보여주며, 젊은 남자들을 '자기 성찰'하게 해주고, 동시에 글쓴이 자신도 돌아보게 한다. 이상 역시 유부남이니까.

 

 이상의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흥미로운 점들 중 하나가 작가 자신의 모습이 작품에 투영되어 있는 점이다. 그는 다양한 이름으로, 다양한 모습으로 단편과 장편 안에서 독자와 만난다. 「지도의 암실」의 리상, 「휴업과 사정」의 보산, 그리고 다른 소설에서 나오는 '이상'. 그는 독자 앞에서 망가지기도 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상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상은 익명의 독자 앞에서 자기 성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의 용기 있는 태도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다.

 

 5. 이상과 김유정, 그리고 나의 이야기

 

 끝으로, 이상과 친구 관계에 있는 소설가 김유정에 관한 단편, 「김유정」과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려고 한다. 김유정과 이상은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1937년에 젊은 나이로 요절했으며, 똑같이 <구인회>에 가입했다고 한다. 이상은 가족과도 같은 그를 위해 단편을 썼고, 이 작품 역시 사후에 출간되었다. 「김유정」에서 작가는 김기림, 박태원(구보), 정지용, 그리고 김유정을 소개하는데, 그는 후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모자를 홱 벗어 던지고 두루마기도 마고자도 민첩하게 턱 벗어 던지고 두 팔 훌떡 부르걷고 주먹으로는 적의 벌 마구를, 발길로는 적의 사타구니를 격파하고도 오히려 행유여력에 엉덩방아를 찧고야 그치는 희유의 투사가 있으니 김유정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구보' 박태원(왼쪽)과 이상의 절친인 김유정(오른쪽).

 

 친구를 위해 작품까지 써 주고 '투사'라는 찬사를 보내는 작가, 이상. 만약 두 사람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이들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친구 소설가로 남았을지도 모르리라. 그 점에서 나는 많은 안타까움을 느낀다. 김유정은 이상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궁금하건만........ 안타깝다.

 

 나로서, 이상의 13편의 소설을 만났건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휴업과 사정」이다. 이상의 문체가 가장 두드러지고, SS라는 익명의 남자와 보산(작가 자신) 사이에 벌어지는 작은 신경전이 무척 흥미로웠다. 이상의 서술 기법과 이상의 문체도 중요했지만, 역시 모든 글에는 핵심 내용이 있기 마련이다. 이상은 극 중 인물을 모던보이로 설정했지만, 그 자신은 포스트모던보이였다. 모두가 죽은 사람들처럼, 원숭이 흉내만 내고 있을 때, 그 '낡은 모던'에서 벗어나 '새로운 모던'으로 나아가길, 이상은 바랬던 것이 아닐까? 이상은 오늘날에도 살아 있다.

 

 20세기 한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가, 이상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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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신 2015-10-22 0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구본웅이 그린 친구 이상의 초상화로 알려진다.
그림을 양분해 놓고 보면 오른 쪽은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코 부분을 보면 자신의 굽은 등처럼 코가 휘여있다.
이상의 코 볼에는 각혈한 피의 흔적을 덧 발랐다.
작품명을 ˝다정한 친구˝라고 명명하고싶다.
http://blog.daum.net/gapgol1/16155123

starover 2015-10-23 22:38   좋아요 0 | URL
수정 감사드립니다. 민음사 출판사에 수록된 제목을 그대로 실었는데, 설명을 들으니 ˝다정한 친구˝가 더 뜻깊은 것 같네요~
 
니미츠 - 별들을 이끈 최고의 리더 KODEF 안보총서 54
브레이턴 해리스 지음, 김홍래 옮김 / 플래닛미디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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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미츠, 그는 누구인가?

 니미츠. 낯선 이름이다. 더글라스 맥아더는 많이 들어봤는데 체스터 니미츠라니. 많은 사람들은 그를 모르고 있다. 기껏해야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 해군을 이끌어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해군함모총장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이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극소수다). 니미츠, 그는 어떤 사람인가? 대체 누구이길래 '별들을 이끈 최고의 리더'라는 평을 받는 것일까? 국내에 존재하는 유일한 '니미츠' 평전인 『니미츠』만이 그 답을 말해주고 있다.

 

 사실 니미츠라 불리는 이 해군제독은 위인이라 할 수 없다. 1885년에 텍사스주의 프레더릭스버그에서 태어난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는 어떤 특별한 계기로 해군의 길을 걷지 않았다. 그저 가문의 전통을 따랐을 뿐. 그리고 그의 삶은 매우 평범했다. 해군사관학교에 다니고, 열심히 공부하며 승진의 길을 걷고, 마침내 해군을 이끄는 총독이 되었다. 어쩌면 그가 잊혀진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니미츠』의 저자 브라이언 해리스는 그를 특별한 사람으로 묘사했을까? 아니, 니미츠는 왜 특별한가?

 

 그것은 바로 니미츠가 젊었을 때 깨달았던 많은 가르침들 때문이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에 다닐지 말지 고민하던 중, 할아버지인 찰스 헨리로부터 이런 격려를 듣는다.

 바다는-삶 자체가 그렇듯이-엄격한 선생님이란다. 바다에서든 삶에서는 잘 지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배운 다음 '최선을 다하고 걱정 따위는 하지 않는 거'란다. 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리고 훗날, 진주만이 일본의 폭격을 당했을 당시, 니미츠는 자신이 한 짧은 연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Hoomanawanui(인내하라). (…) 때를 기다리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 그리고 때까 되면 그 기회를 놓치지 마라.

 니미츠는 이러한 지혜를 평생 간직하는 사람이었고, 그 특별함 때문에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삶을 본받기 어렵다면, 적어도 이 노장이 가졌던 지혜와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반대 입장: 니미츠는 전쟁 영웅일 뿐이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반대 입장 역시 존재한다. 이 평전의 대부분은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니미츠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 니미츠의 삶은 평범하기 그지없다. 비록 해군참모총장이라는 영예로운 지위는 얻었지만, 전쟁에서 활약한 용사일 뿐이지, 현실에서는 늙은 인간이었다. 게다가 니미츠의 결단은 때론 미국을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했다. 일본과의 전쟁 동안, 그의 판단이 항상 옳지는 않았다. 그래서 맥아더에게 명예를 뺏기고,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해군의 활약상은 사실상 무시되었다.

 

 무엇보다 니미츠는 원자력잠수함이라는 위험한 무기를 개발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 연구를 통해 미국의 군사 기술은 더욱 진보되었지만, 인류의 불안은 더해졌다. 오히려 이 무기의 개발은 냉전 상태였던 소련의 감정을 악화시켜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던 위험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전쟁 영웅 니미츠는 그것을 서슴치 않고 만들었다. 체스터 니미츠는 미국을 승리로 이끌어 준 고마운 인물이지만, 전쟁 이후에는 아무 필요 없는 인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이 반대 의견의 입장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별들의 리더였다

 그렇다. 반대 입장의 말대로, 니미츠는 그저 전장에서만 빛났던 거짓 영웅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리더십과 신념만큼은 전쟁이 끝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인생의 대부분을 바다 위에서 보내고, 자신에게 행복과 삶의 만족감을 준 해군을 사랑했다. 니미츠는 부하들을 믿고 임무와 책임을 맡긴 후 뒤로 물러가 지켜보았지만, 만약 그들이 실수를 할 경우에도 관대하게 포용해주고 그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며, 자기 편이 아닌 사람도 끌어안아주었다. 이러한 리더십과 현명함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에도, 그는 해군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다. 해군참모총장이 된 니미츠는 육군지상주의자들의 공격으로 해군과 해병대가 폐지될 위기에 처하자, 미래의 해군력 활용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소신껏 말함으로써 해군과 해병대를 지켜냈다.

 

 전쟁 영웅은 그저 잘 싸우는 영웅이지만, 니미츠는 그 후에도 현세의 진보를 위해 자신의 재능을 바친 인물이었다. 그는 단순히 '자체 유도 핵미사일'을 적재한 원자력잠수함을 개발한 것뿐만이 아니라, 잠수함의 디젤엔진 도입 및 해상유류공수급, 해군학군단, 원형진, 항공모함의 함대 편입, 실용적인 상륙정의 채택, 혁신적인 장교 훈련 프로그램 등을 추진했다. 이로써 그는 폐지 위기에서 간신히 벗어난 해군의 기술적·체계적 진보를 이루어냈다. 이러한 공 덕에, 그의 딸 케이트 레이는 원자력항공모함에 'USS 니미츠'라는 이름을 붙인다. 해군제독 니미츠로서는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이다.

 

 또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여기저기에서 보수가 두둑한 일자리를 제의받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화려한 군 경력을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니미츠가 맥아더, 킹, 홀랜드 스미스 등 다른 전쟁 영웅들보다 우리에게 덜 알려져 있는 이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용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당시 니미츠의 뒤를 따르던 인물들 중에는 앞에서 말했던 맥아더 등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들이 있었다. 니미츠는 분명 이 별들의 리더였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세상에 알리지 않고, 조용히 제 할 일을 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것이 브라이언 해리스가 쓴 국내 유일의 니미츠 전기가, 나에게 의미 있는 이유다.

 

  태평양에는 문제가 있네. 우리는 전쟁의 막바지에 와 있어. 우리는 언제 우리가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 알고 있네. 그리고 맥아더가 전쟁에서 승리하겠지. 이 전쟁이 끝났을 때, 누구도 해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을 모르게 될 걸세. 이번 전쟁은 언제나 해군의 전쟁이었지. 그러나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을 거야.

 

 

절제의 기도

 

 주여, 당신은 제가 나이를 먹고 있으며 언젠가는 늙게 된다는 사실을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제가 수다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게 해주시고, 아무 때나 어떠한 일에든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잘못된 습관을 갖지 않게 해주소서.

모든 사람의 잘못을 고쳐주고 싶은 갈망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사려 깊지만 침울하지 않게 하시고, 도움을 주지만 거만해지지 않도록 해주소서.

많은 지혜를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전부 사용할 수 없음은 애석한 일입니다만, 당신은 아십니다. 결국에는 제가 몇 사람의 친구를 원하게 될 것임을.

제가 끊임없는 지엽적인 문제에 연연해하지 않고 바로 핵심으로 날아갈 수 있도록 날개를 주소서.

제가 느끼는 많은 아픔과 고통을 입 밖에 내지 않도록 해주소서.

세월이 흐를수록 고통은 커져만 가고 그것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도 점점 더 간절해집니다.

다른 사람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자비를 주소서. 그들의 고통을 참고 들어줄 수 있도록 힘을 주소서.

남이 저에게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것처럼 저 또한 남에게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는 명쾌한 교훈을 가르쳐주소서.

언제나 제가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게 하소서. 저는 결코 성자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 어떤 성자들은 주위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합니다.

삶이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소서.

우리 주변에는 즐거운 일들이 많으며 저는 그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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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bellion 반역
이소영 지음 / 일송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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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1월 18일, 나는 『반역』의 번역 및 독서를 끝마쳤다. 작년 11월 13일 책을 구매한 이후로 정확히 370일 후다. 그 동안 나는 거의 매일 꾸준히 『반역』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물론 그 실력은 많이 미숙했지만. 600쪽이 넘는 소설을 다 끝마쳤다는 사실에 우선 속이 개운하다. 사실 초창기엔 이걸 언제 다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이렇게 끝내고 보니 600쪽이라는 소설의 내용이 매우 짧게만 느껴진다. 이래서 번역가들이 번역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번역가는 돈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번역을 하는 것이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번역한다. 나 같은 경우 다른 사람에게 이소영 작가의 『반역』을 알리고 소개하기 위해 번역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자연스럽게 즐거움을 얻게 되었다.

 

 처음에 그녀가 이 소설을 출간했을 때, 얼마나 큰 파장이 일어났는가. 중학교 2학년밖에 안 되는 소녀가 고대 로마의 스파르타쿠스 반란에 대해 이렇게 훌륭한 소설을 써내다니! 각종 언론이 그녀를 칭찬했고 오영숙 전 대학총장도 "모든 언령층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소설"이라고 극찬했다. 그 결과 출간 한 달만에 2쇄를 찍는 등, 중학생이 낸 책 치고는 큰 이변을 낳았다. 하지만 2011년인 지금, 비록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그녀와 그녀의 책은 잊혀져 버렸다. 저자가 『반역』을 쓰게 될 수 있었던 동기가 담긴 『영어 영재 소영이의 영어 정복법』은 출간되었으나 오영숙 총장이 번역하기로 되어 있는 번역판 『반역』은 아직도 근간 상태에 놓여 있다. 궁금해서 메일을 보내도, 감감무소식이다(그것이 내가 『반역』의 번역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나라도 이 소설을 번역해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번역의 잘못으로, 도리어 이 책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것이 아닐까?). 이소영이라는 저자의 유명세라면 몰라도, 적어도 책만큼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물론 나는 독자들에게 『반역』을 홍보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 책이 뛰어나기 때문에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는 것일 뿐이다.

 

 『반역Rebellion』은 기원전의 전쟁이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한 '스파르타쿠스'의 전쟁에 관한 역사소설이다. 역사소설인만큼, 저자는 그 당시 로마의 역사의 흐름을 잘 꿰고 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막 등장한 시점, 마르쿠스와 술라의 로마 내전으로 정치파벌 간의 분쟁이 고조되었던 시점, 점점 안일해지면서 썩어가던 로마 사회를 번쩍 깨어나게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스파르타쿠스가 이끄는 노예 반란이었다. 당시 로마 최고의 갑부로 알려진 크라수스 장군은 군단을 편성하여 그를 진압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노예들은 모두 십자가형이라는 극형에 처해진다. 이것이 배리 스트라우스의 『스파르타쿠스 전쟁』에 서술된 반란의 전체적인 흐름이다. 하지만 이소영 작가는 이 역사에 사랑, 질투, 그리고 한 청년의 성장을 집어넣어 흥미롭고 아름다운 한 편의 역사소설을 탄생시켰다.

 

 『반역』의 주인공 옥타비우스(이 인물은 실존 인물이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처럼 스파르타쿠스 반역의 주요 진압자가 아니라, 훗날 남은 노예들을 진압하는 역할에만 그친다)는 야심이 있지만 마음이 약하고 순진한 청년이다. 그에게는 루키우스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는 호전적이고 거칠다. 또한, 그는 카푸아의 총독의 아들이기도 하다. 옥타비우스 역시 사회적 지위가 높은 편이다. 두 귀족 청년은 어느 날 콜로세움의 검투사 경기를 보러 갔는데(사실 옥타비우스가 루키우스에게 강제로 끌려가다시피 했지만) 거기서 옥타비우스는 뛰어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와 눈을 마주치며 미묘한 관계를 이루기 시작한다. 게다가 그는 스파르타쿠스의 상대도 살려줘야 한다는 연설로 스파르타쿠스의 호의를 사게 된다. 하지만 그 순간도 잠시, 경기장에 찾아온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를 로마에 있는 크라수스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옥타비우스는 로마에 가기 전에 아버지 마르쿠스에게 받은 의문의 두루마리를 카이사르에게 넘겨주고 '삼촌'으로 설정된 크라수스의 집을 방문한다. 그러나 그의 집은 너무나 정치적이고 탐욕적이라 옥타비우스는 오래 있지 못하고 두루마리에 써져 있는 어느 평민구역을 찾아간다. 그 곳에서 그는 몰락한 정치인의 아들인 티투스와 만나는 데(첫 만남은 좋지 않았다), 왠일인지 율리우스도 있었다. 옥타비우스는 그의 말을 통해 티투스와 자신이 형제 관계임을 알게 된다. 한편, 카푸아에 남겨진 루키우스는 스파르타쿠스와 싸움으로써 그와 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이 소설의 시작이다. 내가 너무 장황하게 쓴 것 같지만, 이것이 전체 45장 중 4장까지의 줄거리의 최대 요약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당신이 직접 확인해야 한다. 나는 번역을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소설의 완전한 이해였다. 나는 『반역』 속의 모든 사건과 감정을 기억한다. 글라베르의 습격을 알린 군단병이 혹시 죽을까 봐 초조해 한 적도 있고, 루키아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희망에 찬 기대를 한 적도 있다. 『반역』 속에서 나는 또 다른 로마인이 되어 있었다. 감정의 공감이 그대로 느껴졌다. 옥타비우스의 마음은 나에게도 전해졌다. 그리고 소설 속에 담겨진 숨은 주제 의식까지.

 

 『반역』은 당시 정치 상황을 신랄하게 고발함으써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을 비교하게끔 한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하고, 믿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슬프게 해도 되는지 묻고 있다. 스파르타쿠스는 자기 입으로 고백한다. 난 그저 내가 믿는 것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을 학살하고 3백 명의 군단병을 서로 죽이게 하는 비인간적 행위의 이유가 되지 않는다. 한편, 로마인의 태도 역시 우리에게 많은 점을 던져준다. 이미 패배한 노예군을 그렇게 무자비하게 대할 필요는 있었을까? 노예들이 전염병과 추위로 죽어가는 데도 개인의 영광과 명예 때문에 그들을 포위하는 것이 인간적인 행동일까? 중학생 2학년이 던지는 문제치고는 상당히 심각하고 진지한 문제이다.

 

 우린 『반역』을 읽으며 많은 슬픔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 꿈을 잃어버린 슬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슬픔까지. 우린 『반역』을 읽으며 많은 아픔을 보게 될 것이다. 육체적인 아픔, 정신적인 아픔, 그것을 동시에 얻는 아픔까지. 그러나 잊지 마라.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바로 'smile'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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