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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부터, 책달력을 써왔다. 책 한권을 다 읽고나면 달력의 날짜 밑에 기록을 했더니, 월별은 물론이고 일년에 내가 얼마나 책을 읽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책을 읽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난 술마시는 데 투자한다. "술자리의 횟수가 많은 것은 내 인기도가 그만큼 높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허황된 믿음에 빠져, 이놈, 저놈과 허구헌날 술을 마셔댔다.

책달력을 만들기 전, 술달력을 만든 적이 있다. 도대체 내가 얼마나 마시는가, 이런 식으로 계속 마시다 보면 오래 못살지 않을까 걱정되어서 술을 마실 때마다 체크를 했다. 책달력을 쓰고 나니 기록 경신에 눈이 어두워져 훨씬 더 많은 책을 읽게 된 것처럼, 술달력 역시 나로 하여금 갖가지 기록을 양산하게 만들었다. "18일 연속 술 마시기"를 비롯해서 "한달간 27회"라는 믿지 못할 기록도 그때 나왔다. 97년, 그렇게 줄기차게 술을 마시다가 달력을 보니 97년은 닷새가 남았고, 그때까지 마신 횟수가 298회다. 딱 300번을 채우면 사람이 좀스러워 보일 것같아, 사람을 바꿔가면서 닷새 내내 마셨다. 97년 세운 303회의 기록은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았지만, 이듬해인 98년에 놀랍게도 305회를 마심으로써 간단히 기록을 깼다. 술달력이 있는 한 제명에 못살겠다는 생각이 들어 99년부터는 그런 짓을 안했고, 그래서인지 99년에는 역사상 가장 적은 술을 마셨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략 150회 이하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리 오래가지 않아 새천년이 도래한 2000년부터 난 다시금 술에 매진했고, "주 4회 이하를 마시자"는 결심이 별로 지켜지지 않은 걸 보면 그동안 해마다 꾸준히 200회 이상을 마셔온 것 같다. 2003년 12월은 그 하이라이트로, 하도 술을 마셔대니 어느날 저녁에 어머니가 현관 앞에 버티고 서서 내가 나가는 것을 말리는 일도 벌어졌고, 취미생활인 헌혈을 했더니 "간수치가 높으니 당분간 헌혈을 자제해 달라"는 통보까지 받았다.

2004년 새해, 다시금 술달력을 만든다. 기존의 술달력이 나로 하여금 더 많은 술을 마시게 하는데 일조했다면, 지금의 술달력은 나에게 성찰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올해 난 "연간 180회 이하"라는 목표를 세웠다. 이틀에 한번이니 달성하기가 그리 만만치 않을 것이다. 술에 길들여진 나쁜 친구들이 적극적인 방해를 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내가 누군가. 97,. 98년 연속으로 300회 이상을 달성한 인간이 아닌가." 300회를 마실 수 있는 사람은 180번도 마실 수 있다"는 타고르의 말을 상기하면서, 올 한해를 살 작정이다. 여기 기록되는 나의 술 행적이 나의 수명을 연장시켜 줄 것을 기대하면서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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