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란 놈은 매우 경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경쟁적이라는 게 잘만 승화하면 나쁠 거야 없겠지만, 그게 '술'에만 국한된다는 게 문제다. 누군가 내게 '술한잔 하자'라고 말을 건네면, 난 그걸 '한판 붙자'는 메시지로 해석을 하고, 누군가 내게 잔을 부딪혀 오면 '오늘 한번 해보자'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한창 때인 십여년 전, 난 내 옆에 앉아있던 주당에게 "2분마다 원샷합시다"라는 제안을 했다. 우리는 진짜로 시계를 봐가면서 소주 한잔씩을 마셔댔는데, 아무리 비워도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공포심이 들어 몸이 떨리는 차에 그가 나를 툭 치며 말했다. "2분 됐는데요" 그날 어떻게 집에 갔는지 물론 기억에 없다. 담을 넘다가 긁힌듯한, 10센티 길이의 상처가 내가 어떻게 집에 왔는지를 말해 줬을 뿐.
그런 경험은 사실 부지기수다. 내가 술을 마신 역사는 사실 술대결의 역사니까. 유유상종이라고, 술대결을 즐기는 내 곁에 묘하게도 그런 사람들이 많은 탓이다. 13잔을 스트레이트로 원샷을 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상대의 모습에 질려 '화장실에 간다'고 도망쳤던 부끄러운 기억도, 오징어 다리 하나가 남았다며 소주 한병을 더 시키려는 친구의 팔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빌었던 비참한 기억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런 패배의 기억들을 상기하며 더욱 열심히 몸을 만들곤 하지만, 이젠 은퇴할 때가 된 것 같다. 물론 아무리 많이 마셔도 다음날 속이 편하고 멀쩡하며,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을 하는 걸 보면 아직 난 늙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날의 생생함이 전날의 참패를 상쇄시키지 못할 터, 최근의 대결에서 번번히 정신을 잃은 걸 보면 아무래도 대결적 술마시기는 그만둬야 할 성싶다.
어제도 그랬다. 여자 셋, 남자 둘이 그 중 하나의 집에 모여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소주를 마셨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한명이 3.6.9를 제안했고, 걸린 사람은 원샷을 했다 (도대체 내 주위에는 왜 이런 사람들이 많단 말인가!). 난 3.6.9의 달인이었지만, 3.6.9가 너무 쉽다며 했던, 3.6.9의 원형인 고.백.점프에서는 숱하게 걸렸다. 하두 오랜만에 해서 예전의 감각을 찾지 못한 탓이다. 그래도 종합적으로 따진다면 가장 우수한 성적, 다시 말해서 술을 가장 덜 마셨다는 얘기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집을 나왔는지, 집에는 어떻게 왔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 중 하나로부터 "잘 들어갔냐"는 전화를 받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우리집이었고, 벤지는 한심하단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문제는 그때 시각이 9시 반밖에 안됐다는 것. 그렇다면 난 언제쯤 맛이 간걸까. 거기서 우리집까지 40분은 족히 걸리니, 8시도 되기 전에 취해 버렸나보다. 혹시 실수는 안했을까, 하는 생각에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편치않다.
스스로는 계속 부인하지만, 난 더이상 젊지 않다. 이런 대결적 술마시기에서 이제 그만 은퇴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