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주의 시학 - 개정증보판
장정렬 지음 / 한국문화사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시는 그저 느끼면 되는 것이라는 말을 흔히 들어왔다. 물론 이 말에 적극 동감해왔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역시 어려운 것이 시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등부의 수능에 출제되는 현대시들의 문제를 보면 이러한 개인적인 생각을 확인하게 된다. 몇 편의 시를 한 그룹으로 묶은 다음 통합 질문 해오는 문제들은 그 개념을 비롯하여 한동안 풀이 연습을 하지 않는다면 답을 내기가 결코 수월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시를 바라보는 관점을 분석하기위해 내놓은 책이라고 보기는 어려움이 있다. 저자의 저술 목적은 오로지 생태주의 시학에 집중하고 있으며 국내의 시인들이 그동안 우리의 생태변화에 그 얼마나 깊은 우려와 염려를 해왔는지 보여주기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바라보는 즉, 시를 읽는 관점의 중요성도 처절하게 느끼게 한다.

 

소설은 저자가 마음껏, 그야말로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전부를 무제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이 보장된 장르인 반면, 시는 공간이 지극히 제한된 범주 안에서 고도의 압축된 언어들을 어울려 버무려내야 하는 특성을 가진 장르이다. 하여 둘 중 어느 쪽이 더 어렵고 쉬우냐를 묻는다면 이건 완전 우문이겠지만 장르별 특성 혹은 차이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고 시가 꼭 어려워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해하고 공감하기 쉬운 시가 더 좋은 시임에도 틀림이 없다. 시 역시도 여타의 장르처럼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는 것이 공통된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 시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시를 찾아볼 수 있는 시인, 다형 김현승은 적합하지 않은 시어들을 제거하는 일을 마치 자신의 ‘살점을 떼어내는’ 느낌이라고 그 아픔을 비견했고, 언어의 연금술사 김춘수는 마땅한 시어 하나를 지어내느라 몇날며칠을 우두커니 앉아 마치 실어증에 걸린 사람마냥, 바보가 식음을 전폐하듯 그렇게 앉아 있곤 했다 한다.

 

시를 탄생시켜내는 시인의 아픔과 고뇌를 대변하는 위의 두 일화는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작품을 내놓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려주는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다. 이러한 어려움은 비단 시인만은 아닐 것이다. 한편의 시를 짓는다는 것이 그 얼마나 공을 들여야 하는 일이던가…….

 

시를 짓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듯, 이를 제대로 읽어내는 일도 마찬가지로 어려운 작품들이 있다. 시가 가지는 주제와 운율, 그리고 심상 게다가 압축 상징 그리고 시인의 정신을 읽어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화자가 처한 입장에서 그리고 독자가 처한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 공감력을 발휘해야 하는 고도의 능력을 요망한다.

 

어떤 시인은 말하길, 평론가가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는, 시인과는 전혀 무관한 이해를 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바 있다. 한마디로 시인도 모르는 일을 독자가 해낼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 독자의 평은 대단한 설득력을 가지더라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시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저자 장정렬께서 시인들의 원래 의도와 그 얼마나 일치하는 분석을 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는 없다.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시를 내 놓았고 독자의 손에 넘어간 이상, 그 시는 시인의 것 이라기보다는 이제는 독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손을 떠난 시에 대한 법적 소유권 혹은 재산권을 소유했다는 것 이외에는 더 큰 의미는 없어 보인다.

 

 

「생태주의 시학」은 내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다. ‘저자는 문학은 본질적으로 문학을 형성하는 시대의 환경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라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환경과 뗄 수 없다’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라는 표현이었다. 저자는 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질’이란 어떤 것에서 그 본질을 제외한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이 말이 내게 이토록 강렬하게 다가온 것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연과 친화해야 한다’는 말로 내게 들려왔기 때문이다. 자연친화적이지 못한 문학은 그 본질을 상실한, 즉 문학이 더 이상 아닌 것이 된다. 본질이란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니 말이다.

 

시의 형식은 변화하고 이미지들은 자본화되고 기계화되어가고 있다. 9쪽

 

시인은 생태계의 파괴를 인간사고의 방식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이는 지극히 바른 말이다.

 

헐벗은 뒷모습 드러낸 채

종로구와 서대문구 변두리에 주저앉아

늘그막에 셋방살이 하는

불쌍한 인왕산

 

김광규, 「인왕산」에서

 

위 시에서 인간에게 신성한과 삶의 힘을 주던 산이 불쌍한 산이 되어 버렸다. 중략...인간에게 있어서는 신성함과 상상력의 상실을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59쪽

 

 

 

내 눈엔

뿔뿔이 저마다 외롭고

무뚝뚝하게 몰려가는 甲皮魚들의 나라일 뿐,

건강한 야만인의 마을이 그리운

빛의 제국,

가짜비늘로 뒤덮인 화려한 빛의 제국.

 

최승호, 甲皮漁에서

 

‘비늘’은 물고기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어휘로서, 이것이 가짜 비늘로 표현됨으로서 정체성이 사라진 물고기를 상징한다고 하겠다.  67쪽

 

 

 

 

한 숟가락 흙 속에

미생물들이 1억 5천만 마리래!

왜 아니겠는가, 흙 한 술  

 

정현종, 한 숟가락 흙속에

 

흙은 모든 생명의 원천이며 본원적 처소이다. 흙은 모든 존재의 의지처이자 귀의처이기도하다.   187 쪽

 

 

 

저자는 우리의 시인들을 통해 자연과 점점 괴리되어가는 현대의 자화상을 좀 더 명료하게 보여주고자 한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물론 저자는 문학의 본질에 대해서 이미 밝혔다. 어디 시인과 소설가뿐이겠는가. 문학과 관여하는 사람들 모두 이에 관계해야하며 독자 역시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각하는 바이다.

 

생태주의 시학이라는 분야는 널리 인식되지 않은 분야인 듯하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고독한 열정이 더없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개척자가 되기로 자처하는 일이란 본디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서는 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욱 어려운 일이다. 저자께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저자 덕분에 나는 새삼 우리가 호모사피엔스 사피엔스인가를 되돌아보게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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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몸과 마음 건강을 위한 책을 만드는 판미동입니다.

간디가 사랑한 『바가바드 기타』에서 정조이산의 경전들까지!

경전을 쉽고 맛깔나게 풀어낸  『경전 7첩 반상』이 판미동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다산정약용, 정조이산, 간디, 괴테, 링컨 등 시대를 넘나드는
위대한 인물들이 경전을 평생 옆에 두고 읽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인문고전은 자신을 바로 세우는 데 필요하다. 경전은 그러한 인문고전 중 최고의 고전으로 손꼽히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지혜를 담아 놓은 책이다. 그곳에는 수천 년에 걸쳐 인간이 골몰해 온 생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답이 함축되어 있다. 그러나 그만큼 ‘경전’은 난해하고 복잡해 섣불리다가설 수 없는 책으로, 혹은 자신과는 동떨어져 있는 종교 서적으로 여겨져 오기도 했다.

이번에 판미동에서 나온 『경전 7첩 반상』은 인문고전 중의 고전으로서 독자들이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경전의 벽을 낮춰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핵심적인 지혜를 맛깔스럽고 쉽게 정리했다. 특히 우리가 이 험난한 시대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헤쳐갈 수 있도록 삶의 뿌리가 되어줄 깊고 단단한 명구들을 선별하여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생의 좌표를 재점검하고 안착하게 만드는 ‘지점’을 제공해 준다.

변곡점에 서 있는 시대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이 삶의 답을 찾으려 한다. 『경전 7첩 반상』은 그 답을 찾기위한 방법으로, 삶의 핵심에 다가서기 위한 ‘경전 읽기’를 시작하라고 말한다. 현인들의 지혜와 경험을 되새기는 작업은 우리가 현재 어디에 서 있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경전 7첩 반상 속 경전>

1. 동양 문헌 가운데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으로 간주되고 있는 『도덕경』
2. 양극단으로 치달은 우리 사회에 무엇보다 간절한 정신이기도 한 『중용』
3. 불교의 수많은 경전 가운데서 가장 초기에 모아졌기에 담박한 맛이 일품인 『숫타니파타』4. 인도를 넘어 세계의 고전이 된 『바가바드기타』
5. 그리스도교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선두 마차 『도마복음』
6. 우리 모두의 대 자유를 추구하는 대승의 중추인 『금강경』
7. 마지막으로 우리 종교, 우리 정신, 우리 철학을 보여 주는 『동경대전』

리는 『경전 7첩 반상』을 통해 어느 하나 흘릴 게 없는 천금 같은 문구를 만나게 될 것이다.

▶ 지은이
글·캘리그래피 성소은

서울 출생. 일본 릿쿄 대학교 법학과에서 합리적인 사고를, 도쿄 대학교 대학원에서 화엄세계처럼 얽혀 있는 국제관계를 공부 했으며, 이후 한일 양국 정부와 국제기구 등에서 공공선을 추구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찾아 순복음교회를 나왔고, 성공회를 지나, “붓다를 만나면 붓다를 죽이라.”고 하는 선불교의 칼끝 같은 가르침에 이끌려 3년간 출가수행을 했다. 이후 ‘나는 누구인가’를 참구하면서 선물처럼 “아하!”를 체험하고 기쁨으로 환속했다. 

현재는 인문, 사회, 종교, 과학, 문학, 신화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서로 배우는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를 운영하고 있으며, 성공회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에서 인간사회와 종교 관계를 관찰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의미 있는 만남을 담은 구도적 고백서 『선방에서 만난 하나님』과 경계 너머의 무한한 가능성을 담아 엮은 『종교 너머, 아하!』(공저)가 있다.
(지식협동조합 경계너머 아하! www.njn.kr)


▶ 『경전 7첩 반상』 서평단 모집 상세 내용


하나, 『경전 7첩 반상』 서평단 모집 포스팅을 개인 블로그에 스크랩 한 뒤,

서평단 응모 링크(http://goo.gl/forms/8GbsT5od5o)를 클릭하여 설문지를 꼼꼼하게 작성한다.


둘, 응모 기간은 2015년 3월 12일(목)부터 3월 18일(수)까지 입니다.


셋, 총 추첨인원은 5명입니다. (당첨자에게는 개별 연락 드립니다.)


넷, 서평기간은 도서 수령 후 10일이내 니다. 

(혹시 기간이 촉박 하거나 부득이한 사정이 있는 경우는

yoongy@minumsa.com 로 미리 메일 부탁드립니다.)


마지막, 당첨된 서평단 분들은 알라딘 개인 계정으로 서평을 작성한후, 담당자 메일(yoongy@minumsa.com)로 알라딘 블로그 및 개인 블로그 등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보내주셔야 최종 서평이 완료됩니다.


※ 해당 기간 안에 서평 및 서평완료 메일을 보내지 않을 시,

다음 서평단 모집에 불이익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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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퇴계와 기고봉은 스승과 제자로서 보다는 학문을 나누는 벗으로 서로를 대했다. 물론 서로 깍듯한 예를 잃지 않고 편지를 주고받으며 논쟁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 자료들을 보면 이퇴계와 기고봉의 관계를 언급할 때, 기고봉을 ‘이황의 문인(門人)’, 혹은 ‘32세에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는 마치 기고봉이 이퇴계의 문하생(門下生)인 듯 한 느낌을 준다. 문인(門人)이라는 말은 스승의 집안을 들고나며 직접 가르침을 받은 문하생을 말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간 편지의 내용 중에는 두 사람이 각자 어떻게 학문을 닦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퇴계는 자신의 학문에 대해 말하기를, 저는 젊어서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선생이나 동료가 이끌어주지 못했기에 얻은 것은 조금도 없이 몸에 병만 깊어졌습니다. (1559년 3월) 라고 쓰고 있고,

기고봉은 편지에서,

다만 어릴 적 얕은 재능으로 고금의 책들을 두루 읽을 수 있었을 뿐입니다. ...중략... 성현의 글을 구해보게 되었는데, 그것도 다만 스스로 즐겼을 뿐, ...(1559년 3월) 이라고 쓰고 있다.

 

이퇴계는 12세에 작은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2년 후부터는 혼자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한참 젊은 시절 주역에 깊이 빠지는 바람에 몸에 병이 들어 나이가 들어서까지 고생을 했다고 전해진다. 몸에 병만 깊어졌습니다, 라는 위의 표현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으로 추측된다.

 

기고봉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1519년 중종 당시 훈구의 강력한 반발로 발생한 기묘사화 당시 막내 작은 아버지였던 기준(奇遵)이 유배되고, 신사무옥으로 또다시 유배생활을 하던 중 교살되는 일이 벌어졌다. 역사에 기록된 화를 당한 집안이었으니 공부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여 부친과 막내 작은 아버지의 영향을 크게 받아 학문에 들었고 독학으로 갈고 닦았다고 볼 수 있다: 기준(奇遵)은 조정암의 문하였다고 한다. 기고봉은 그의 나이 31세(이퇴계를 만나 기 전)에 이미 주자대전을 완파하고 이퇴계로부터 통유(通儒)라는 별칭을 얻었을 정도였다. 이퇴계도 이미 기고봉에 대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의 글을 읽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이처럼 독학으로 학문을 닦은 독학 파들이었다. 물론 기고봉께서 이퇴계를 깍듯이 선생님으로 존중한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두 사람의 관계를 사제 혹은 기대승을 이황의 문인 이라 칭하는 관계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기고봉은 나이 32세가 되어서야 처음 이퇴계의 얼굴을 마주했다. 기고봉은 당시 과거를 보기위해 한양으로 올라오면서(1558년) 김인후(金麟厚)와 이항(李恒)등을 만나 학문(태극太極)을 논하던 중 정지운의 천명도설을 얻어보게되었다고 한다. 기고봉, 김인후, 노수신등은 서로 서신을 교환하며 학문을 논하던 사이였다. (이항은 조남명과 비견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평을 받던 대학자였다). 당시 학문을 논하는 분위기가 대략 그러했던 것이다. 요즘과는 달리 편지로 학문을 논하던 그 시절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세상이 많이도 달랐다.

 

문제의 발단은 이퇴계가 그 천명도설(天命圖說)의 내용을 수정한데서 비롯한다고 한다. 학자 정지운은 주희와 여러 학설들을 종합해 천명(天命)과 인성(人性)의 관계를 표로 만들어 설명했다고 한다. 참고서를 찾아보니, 이퇴계는 정지운의 천명도설에 있는 사단발어리(四端發於理), 칠정발어기(七情發於氣)사단이지발(四端理之發), 칠정기지발(七情氣之發)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즉, 「사단은 이로부터 발하고, 칠정은 기로부터 발한다」, 라는 천명도설의 내용을 이퇴계는 리와 기가 능동적이지 못하다는 판단,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다」 라고 고쳐 쓰도록 했다는 것이다. 하여 원본의 천명구도(舊圖)가 천명신도(新圖)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역사적 상황과 편지의 전후 상황으로 보아 첫 대면에서 바로 사단칠정은 논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고봉은 이기(理氣)를 서로 합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 이퇴계를 만나 논쟁을 펼쳐보고 싶었을 것이다. 기고봉은 사단과 칠정이 모두 기(氣)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고, 그 후 이퇴계가 먼저 편지를 전하며 조선의 철학이 주체성을 가지는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다음해인 1559년, 정월이 되자 이퇴계는 기정자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낸다. 기고봉은 급제 후 바로 임관, 승문원부 정자(正字)의 자리를 제수 받는다. 9급 공무원이 된 것이다.

 

.... 선비들 사이에서 그대가 논한 사단칠정의 설을 전해 들었습니다. ....중략..., 그대의 논박을 듣고 나는 더욱 잘못됨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고쳐 보았습니다. “사단의 발현은 순수한 이(理)인 까닭에 선하지 않음이 없고, 철정의 발현은 기(氣와) 겸하기 때문에 선악이 있다.” 이처럼 하면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편지의 내용과 날짜로 미루어보아, 기선달은 하늘같은 선배의 편지를 받자마자 답을 써서 박순(朴淳)을 인편삼아 보냈던 모양이다. 당시 기고봉께서 신속한 답을 올렸고, 이퇴계 또한 답을 받자마자 다시 붓을 들었던 모양이다. 설을 지낸 직후인 정월 5일자로 미루어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이퇴계의 마음을 급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 노장 이퇴계가 새로이 학문의 불을 당기게하는 벗을 만났기 때문이던가. 학문으로 맺은 벗은 대개가 이러하다.

 

위 편지에서 보듯이 이퇴계는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진정한 대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일면식도 없는, 게다가 족보에 먹도 채 마르지 않은 젊은이가 초면에 다짜고짜 강력한 태클을 걸어온 것이 아니던가.

 

성즉리(性卽理), 즉 성리학은 기(氣)의 활동 근거를 우주만물의 이치인 이(理)라 보았고, 기를 만물을 구성하는 재료이므로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도구라고 보았다. 이퇴계는 리는 원리적 개념이므로 절대적으로 선하고, 기는 현상적이므로 선악이 혼재한다고 보았다. 하여 이는 존귀하고 기는 비천하다고 여겼던 것이다(理尊氣卑).    

 

하여 위 편지는 이퇴계가 자신의 견해를 수정해가면서 좀 더 깊이 있는 초식을 선보이라고 기정자에게 채근하는 듯하다. 이에 기고봉은 올커니, 했을 것이다. 이퇴계가 몸소 한 판 놀아보세, 하고 멍석을 깔았으니 마다할 기고봉이 아니다. 망설일게 무엔가. 이 편지를 받자마자 기고봉은 이퇴계를 다시 직접 찾아 나선 다. 이미 서로 얼굴도 익혔겠다, 신이 난 기고봉은 이퇴계와의 한판 거침없는 설전을 벼르면서 대문을 나섰을 것이다. 막 벼슬을 받는 말단 9급 공무원이 하늘 같은 산전 수전 다겪은 고위직 2급 공무원을 직접 찾아나섰던 것이다. 현대에서 어떤 9급이 곧 1급을 앞둔 2급을 다이렉트로 만나기를 청할 수 있단 말인가. 겁도 없다 기정자여...    

 

당시 이퇴계는 공조참판으로 있었지만, 역시나 병약한 상태였던 듯하다. 하여 안타깝게도 이퇴계는 기정자에게 멍석을 깔아 주고는 휴가를 얻어 낙향한 후였다고 한다. 이에 기정자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설레기도 하고 심각하기도 한 이퇴계와의 두 번째 만남에 설레어 가슴이 부풀어 있었을 텐데 말이다. 어쨌거나 이 덕분에 당시 기정자가 이퇴계에게 보낸 사단칠정의 내용을 우리가 읽어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기정자가 이퇴계와 얼굴을 마주하고 직접 논하고 싶었던 자신의 주장을 글로 써서 보낸 편지가 지금껏 전해오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만나던 1558년은 그 미래의 조선 역사에 사실상 커다란 영향력을 끼친 시발점인 해였다. 그러나 현재 이퇴계에 비해 기고봉은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가 특별히 당파를 형성하지 않았던 탓이기도 하거니와 그 학맥이 계승되지 못한 탓이 아닌가 생각된다. 물론 기고봉은 율곡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율곡은 싫든 좋든 서인들이 그들의 종장으로 삼아 칼과 방패로 삼았으니 기고봉의 영향력을 인정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두 사람의 논쟁은 지극히 아름답다. 다양한 이유들이 있으나, 무엇보다도 널리 공인된 대유(大儒) 이퇴계가 자신의 학문의 절정에 달해있던 즈음에 까마득한 후학이며 새파란 젊은이의 날카로운 도전을 지극히 온유하면서도 즐거이 교류하는 장으로 변화시겼다는데 있다. 예나 지금이나 종장격의 인물에 대한 철학적 도전은 그야말로 어쩌면 한 거물의 생애는 물론 그 학파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사안이다. 하여 그 충격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에 조선에 거대 운석의 충돌과 다름없는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대 사건어었던 것이다. 

 

천만 다행한 일은 그때만 해도 당파가 아직 자리 잡기 그 이전이었기에 새파란 기고봉이 무사할 수 있었다고 본다. 사림이 동서로 분열된 해는 명종 사후 선조가 집권하던 1575년으로 노장 심의겸과 소장 김효원이 이조정랑의 후임를 놓고 갑을 박론하던 해였다. 소장 김효원을 지지하던 사림은 유성룡, 이산해, 이발, 김우옹 등이었는데 주로 퇴계학파로 동인이었고, 노장 심의겸을 지지하던 인물들은 박순, 정철, 윤두수 등으로 주로 율곡학파로 서인이었다. 이조판서와는 별도의 인사권을 쥐고 있었던 이조정랑, 비록 5급 공무원이었지만 그 힘은 막강했던 요직, 그 이조정랑의 후임을 놓고 서로 다투던 해가 1575년 이었던 것이다. 당시 전랑(정랑과 좌랑)은 요직으로 승진하면서 후임을 자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역사는 을해당론이라 기록하고 있다.

 

을해당론 후 동서의 갈등은 점점 깊어져 기축옥사를 계기로 조선 전역에 메가톤급 비극을 볼러 온다. 이후 끈임 없는 예송 논쟁과 고변, 역고변, 환국 등으로 조선은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론은 사림의 목숨 줄인 권력으로 변해버렸고 이론이 나오는 순간, 바로 처단의 대상이 되었다. 그것이 순수한 학문이었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림은 주희를 신성한 존재인 교주로 추앙했고, 주희의 견해에 토를 다는 자, 죽음으로 다스렸다. 그러한 비극적 운명을 맞이한 대표적 실례가 백호 윤휴와 서계 박세당이었다.

 

다행히 이공판과 기정자가 편지를 주고 받던 당시만 해도 학문의 장이 그만큼 자유로웠다는 이야기이다. 만약 시기가 조금 만 늦어,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도전장을 내밀었다면 기고봉의 목숨이 열 개였더라도 무사치는 못했을 것이다. 다행히 당론이 뿌리를 내리기 이전의 논쟁인지라 현대에까지 그들의 논쟁이 아름답고도 고밀도의 학문적 가치를 남길 수 있었던 것이며 조선의 진일보한 독자적 철학을 가질 수 있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

 

* 박순(호-사암): 서경덕, 이퇴계를 사사하고 이이및 기고봉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척신 윤원형 일당을 제거하는데 그 공이 컸고, 대사헌을 거처 이판,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거치던 중 율곡의 탄핵 사건 때 율곡을 옹호하다가 되려 탄핵을 받고 은거한 군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박사암이 이퇴계에게 전해주었다는 기고봉의 첫 답신은 이 책에 소개되지 않아 내용은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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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5-03-04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인사 댓글 남기면서 좋은 책 소개받고 갑니다.^^

차트랑 2015-03-04 1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랫만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마립간님,
써주시는 독서일기는 잘 보고있습니다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김영두 옮김 / 소나무 / 200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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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에서는 이퇴계를 이부자(李夫子)라 칭했다. 학문의 지고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성리학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조선의 선비로 평하고 존경했다.

 

사실 이퇴계는 학문 뿐 아니라 인품 또한 고매했고 언과 행은 일치했다. 안동을 중심으로 경상좌도의 학풍을 이끈 이퇴계는 인(仁)을 숭상했고 도학에 심취했다. 아마도 주희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한 이퇴계는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이퇴계의 가문은 부호였다. 부족함이 없는 가문의 자제였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실록에 서얼 차별의 강력한 주장에 앞장선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이퇴계의 가문이 가지고 있던 노비의 수는 367명이었고 전답을 합치면 현대기준으로 34만 평의 규모였다. 그런 그가 집안의 노비들로부터 무척이나 존경을 받았다. 노비를 물건 취급하던 시절 그는 노비들을 사람으로 대했다.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자 그 며느리를 재가시킨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당시로서는 불가한 일이었기에 그가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그는 갑의 위치에 있었으나 결코 갑질하지 않은 조선의 몇 안 되는 선비 중의 선비였던 것이다.

 

 

겸손과 이해의 휴머니스트 이퇴계, 고봉에게 캐치볼을 던지다

 

편지로 먼저 연서를 보낸 이는 다름 아닌 이퇴계였다. 얼핏 기고봉께서 먼저 편지를 보냈을 법도 한데, 사실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둘의 나이 차나 관직의 차이로 보아도 먼저 손을 내밀기란 양쪽다 쉬운 상황이 아니었다. 

 

당시 이퇴계의 나이 58세(1501년생), 관직은 대사성(성균관 총장)이다. 1527년생인 기고봉의 나이는 새파란 32세로 명종 13년 막 과거에 급제하고 아직 관직을 수여받지 못한 선달(先達)의 신분이었다. 관직으로 보아도 하늘과 땅 차이, 나이 차이로 보아도 26년, 기고봉은 이퇴계에게 자식뻘 되는 젊은이였다. 게다가 이퇴계의 학문은 성숙할 대로 성숙해있었고 기고봉은 아직 새파란 젊은이였다.

 

조선의 대사성이 이제 막 급제한 젊은이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것도, 아직 9급의 관직조차 제수 받지 않은 선달이 지체가 높아도 한참 높은 이퇴계에게 먼저 편지를 드리는 것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차라리 지방 공무원이 임금에서 상소를 올리는 일이 더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로서는 스승님으로 모시고 공부를 한 사제지간도 아닌, 선후배의 간극이 멀어도 너무나 멀기만 했다. (기고봉의 학문은 대개가 독학이라고 한다)

 

이렇게 극복해야 할 것들이 만만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퇴계가 기고봉에게 먼저 볼을 던진 것이다. 이퇴계가 보낸 첫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기고봉께서 이퇴계를 먼저 찾아 인사드리고 학문을 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고봉이 학문의 절정에 달해있던 이퇴계를 만나고 싶어 했을 것이고 이로서 13년간의 기나긴 캐치볼 성격의 서신 교환이 시작된 것이다. 1558년의 일 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이퇴계는 학문으로 당대 중국에서조차 그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반면 기고봉의 학문은 주로 독학이었다. 독학하며 궁금한 것도 많았을 것이고 의문을 가진 것도 많았을 것이며, 이미 널리 알려진 이퇴계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에 차이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독학이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발달시킬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쨋거나 이것이 이퇴계를 찾은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기고봉의 방문에 답하는 이퇴계의 짧은 편지는 정말 읽어보아야 그 맛을 알 수 있다.

 

기선달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씁니다.

병든 몸이라 문밖을 나가지 못하다가, 덕분에 어제는 마침내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룰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요. 감사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아울러 깊어져, 비할 데가 없습니다. 내일 남쪽으로 가신다니 추위와 먼 길에 먼저 몸조심하십시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만 줄이며 이황이 삼가 말씀 드렸습니다. 退

 

편지는 이렇게 쓰는 거다. 편지를 잘 쓰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연서도 이런 연서 또 없다. 특히, 이퇴계의 편지에 주목해도 좋다. 둘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이퇴계가 기고봉보다 편지를 훨씬 더 잘 쓴고 느낄 것이다. 연애편지를 대필하고 밥을 얻어먹곤 하던 그 시절을 보낸 분들이 계실 것이다. 과거 「편지 쓰는 법」이라는 책이 집집마다 꽂혀있던 시절도 있었다.

 

각설하고, 이퇴계가 병이 났다하니 문병을 핑계삼이 이참에 찾아뵙고 학문을 논하고 싶었을 기고봉의 마음도 전해온다. 이퇴계가 “ 뵙고 싶었던 바람을” 이라고 쓴 것으로 보아 이미 기고봉의 학문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퇴계도 사실은 기고봉을 은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기고봉이 1등으로 과거에 합격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문을 논할만한 사람이라고 퇴계는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벼슬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이퇴계의 행적과 학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면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춥고도 추운 겨울 이퇴계의 부실한 몸에 병이 들었고, 이를 계기삼아 초면이지만 서로 만나 학문을 논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때만 해도 조선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를 13년간이나 주고받는 캐치볼을 하게되리라 이퇴계는 생각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덕을 높이고 생각을 깊게 하여 학업을 추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는 대목이 이를 말해준다. 이퇴계는 아직 기고봉의 학문이 설익었다고 판단하고 있음을 은근 알려주는 대목이 아니던가. 그러나 기고봉은 앞으로의 기나긴 그들의 개치볼을 직감했을 것이다. 볼을 먼저 던진이는 이퇴계였지만, 그 볼을 뜨겁게 달구어 낼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있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첫 만남에서 이퇴계가 이토록 애정이 절절히 배어나는 연서를 먼저 보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퇴계가 누구던가. 주자대전을 손에 쥐자마자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학문에 정진하던 대가 중 대가요 선비 중 선비가 아니던가. 그런 선비가 이제 막 벼슬길에 오르려는 젊은이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기고봉의 문병에 대한 감사를 비롯, 그 인물됨을 한눈에 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대견스런 자식을 대하듯, 혹은 미래가 촉망되는 인재를 알아보듯 했을 것이다. 학문에 정진하는, 장차 조선을 이끌어갈 인재로 보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사람답게 대하던 이퇴계였던 것도 사실이나 기고봉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하여 그는 세대 차와 관직의 차이, 한마디로 넘사벽을 무너뜨리고 기고봉을 학문의 벗으로 여겼을 것이다. 학자에게 학문의 벗만큼 좋은 상대도 없다. 학문은 학문을 그리워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 학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다음해 편지의 마지막에 뭍어나 있다.

 

 "------ , 기미년 정월 5일, 황은 머리를 숙입니다. 退"

 

 

이퇴계. 영혼의 밥을 짓다

이퇴계의 인물됨과 벗에 대한 그리움이 이보다 더 잘 배어나오는 대목이 또 있을까..이 순간 나는 잠시 글을 멈추었다. 어린 벗에게 머리를 숙이는 이퇴계를 생각해보시라. 그의 인품이 아름답다. 물론 여러 곳에서 이런 모습들이 잘 드러나 있다. 어디 이 한 줄 뿐이랴. 그러나 이 순간,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하늘을 우러러 볼 수 밖에 없었다. 역자가 원문을  함께 싣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쉽고 서운할 따름이더라...

 

최한기에게는 벗이라 칭하는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 古山子 김정호가 바로 그였다. 사람이 없어서 벗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딱 한 사람의 벗이면 족하다는 말도 있다. 그만큼 벗하기란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이퇴계는 기고봉을 자신의 벗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동서양을 두루 살펴도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전설은 남아있지 않다. 오로지 조선 땅에 역사적인, 살아있는 전설을 남긴 두 사람이 있었을 뿐이다.

 

이퇴계의 인물됨은 십여 년을 이어가는 편지에서 더더욱 빛이 난다. 후학을 대하는 대가의 태도를 배울 수 있으며, 이부자라 칭송받는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생각을 굽힐 줄도 아는 진정한 대가의 자세를 배울 수 있다. 이 편지는 앞으로 진행될 실로 뜨거운 쟁점인 사단철정론도 담고있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학문의 절정에 달해있던 대가의겸허함과 신독(愼獨), 그리고 진정한 학자이며 선비로서의 자세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편지이기도 하다.

 

조선의 학문이 그 얼마나 왜곡되어있었고 편협되어있었던가. 선비들은 학문을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고 지키는데 사용했다. 이상하게도 조선땅에 학문이 발달할수록 그 백성들은 더 배고프고 고단했다. 이것이 조선의 역사가 가지는 이율배반이자 딜레마이다. 학문과 백성들과의 괴리, 그 거리감은 너무가 컸다. 제 아무리 무슨 말로 변명을 해도 소용없는 역사가 이를 반증하고있다.  이퇴계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상대방을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의 노비들에게마저 그 인격을 존중했다. 관용과 존중, 학문을 추구하되 행동이 따랐던 인물, 이퇴계. 그의 이름은 권(權)과 학(學)의 표본을 우리에게 남기고 갔다. 갑질로 소외감을 느끼며 삶을 살아가는 세상, 이퇴계가 짓고 간 영혼의 식사를 마다해서야 되겠는가.

 

학문과 실천이 일치했던 사람, 이퇴계. 그의 후예인 대한민국은 이퇴계가 남기고 간 영혼의 식사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맛있게, 기꺼이 먹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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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 총 추첨인원 10명입니다. (최종 응모자 수에 따라 추첨인원이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넷, 서평단 발표일 2015년 1월 27일 화요일입니다.


다섯, 서평기간은 2015년 1월 30일(금)부터 2월 6일(금)까지 14일간입니다.

서평단에 선정되신 분은 1월 28일까지 개인정보를 비밀댓글로 적어야합니다.

1월 28일까지 개인정보 확인이 안되면 당첨이 자동취소됩니다.


마지막, 첨된 서평단 분들은 서평기간인 14일간 알라딘 블로그 및 개인 블로그에 서평을 작성한 후, 『황제내경, 인간의 몸을 읽다』 서평단 발표 포스팅 알라딘 개인 블로그 및 그 외 블로그나 외부 채널 등에 남기신 서평 링크를 댓글로 달아주셔야 최종 서평이 완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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