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정의 - 정의로운 사랑은 가능한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지음, 홍종락 옮김 / IVP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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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 1932년 1월 21일 ~)를 처음 만난 때는 2010년 11월이었다. 당시 철학이나 신학에 무지했기에『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1가 매우 어렵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 지적 깊이만큼이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통해 추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더욱 구체화되고 명료화되었다. 사회 곳곳의 부조리와 구조악에 관심이 많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새롭게 깨달았으며, 그러한 죄와 소외로부터 자신과의 연합을 꿈꾸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월터스토프는 알빈 플란팅가(Alvin Plantinga)와 함께 미국의 대표적 기독교 철학자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30년간 모교인 칼빈 칼리지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의 학문적 경력은 세계적 명성이 있는 두 강좌에 연이어 초빙된 것에서 절정을 이룬다. 첫재는 옥스퍼드 대학의 와일드(Wilde) 강좌(1993-94)였고 다음 해엔 인문 과학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성 앤드류 대학의 기포드(Gifford) 강좌(1994-95)의 연사로 선발되었다. 그는 분석 철학 전통에 서 있으며, 미학과 인식론, 그래고 해석학을 섭렵하고 사회 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월터스토프의 철학은 전통과 현실의 대화를 기본 골격으로 하며, 실천과 이론을 조화를 모색한다.2


'정의'에 대한 그의 관심은 1983년에 출간된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Ivp 역간)로부터, 2008년에 'Justice: Rights and Wrongs' 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사랑과 정의』서문에서도 밝히지만 앞의 책 『정의』(Justice: Rights and Wrongs) 집필을 계획하면서 정의와 사랑의 관계를 논하기 위해 한장 정도의 분량을 할애하려고 했으나 한권의 책이 필요함을 느꼈고, 2011년 『사랑과 정의』(Justice in Love, Ivp 역간)를 집필하게 된다. 2013년에 그는 정의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과 과정을 보여주는 자전적인 책『하나님의 정의』(Journey towards Justice, 복있는 사람 역간)를 낸다.


『사랑과 정의』에서 저자는 정의와 사랑이 긴장관계라고 생각하는 것은 두 가지 명령을 잘못 이해한 것에 기인했음을 밝힌다. 따라서 그의 목적은 이러한 사랑과 정의의 명령을 이해하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이다. 


서론에서 그는 안녕 증진의 세 가지 규칙을 말한다. 그것은 곧 이기주의, 행복주의, 공리주의다. 이러한 규칙의 특징을 제시하면서 그는 각 관점에 대해 비판한다. 이러한 비판 뒤에 대안으로서 '아가페주의'를 제시한다. '아가페주의'는 많은 사상가들이 주목하지는 않았다. 월터스토프는 이 운동의 탁월한 구성원으로 키에르케고어(Søren Aabye Kierkegaard)와 함께 니그렌(Ander Nygren)과 칼 바르트(Karl Barth),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폴 램지(Paul Ramsey)를 꼽는다.  


아가페 사랑은 무엇인가? 바르트는 교회교의학 4권의 두번째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In agape-love a man gives himself to the other with no expectation of a return, in a pure venture, even at the risk of ingratitude, of his refusal to make a response of love, which would be a denial of his humanity"3 결국 아가페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며,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니그렌은 아가페 사랑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불어넣어져야만 가능하다고 말하며, 케에르케고어는 아가페 사랑을 우리의 의무로 생각할 때에 가능하다고 말한다.


월터스토프는 '아가페주의'의 기여를 많은 부분 인정한다. 하지만 '아가페주의'를 주장한 많은 신학자들이 '사랑'과 '정의'를 뚜렷하게 대립시키고 분리시키려고 했던 부분에서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다. 특히 그는 니그렌이 말하는 정의를 배제시키는 아가페 사랑에 반대한다. 또한 니버가 말하는 아가페 사랑과 정의의 충돌이 일어날 때는 현실적으로 사랑보다는 정의를 선택해야한다는 관점도 비판한다. 저자는 오히려 사랑을 자비로 해석하는 고전적인 아가페주의의 대안으로 배려(care)로서 사랑의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을 통해 그가 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사랑 가운데 행하는 정의'이며, '정의 가운데 행하는 사랑'이다.


그는 그의 논증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기존 철학과 신학에서 보여주는 한계점을 비판하는데 그치지 않고, 3부와 4부에서 용서와 칭의의 문제를 다룬다. 이 지점이 이 책이 보여주는 아주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는 로마서를 새롭게 해석하면서 라이트(N. T. Wright)를 중심으로 하는 새관점학파와 유사하면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풀어낸다. 그는 로마서에서 다루는 것은 정의의 문제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존재 자체를 받아주셨고, 우리의 죄과를 묻지 않으시고 용서해주셨다. 이것이 곧 '정의'이며, '칭의'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정하다. 월터스토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의로운 사랑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에 대해 정의로운 삶을 살아가야한다고 말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사랑에 대한 관점이 볼프(Miroslav Volf) 관점과 유사함을 보게 되었다. 볼프 또한 그의 책 『베풂과 용서』에서 용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배제와 포용』에서는 배제와 포용의 관계를 통해 정의와 사랑의 문제를 다룬다. 특히 그는『배제와 포용』3장에서 용서는 정의를 긍정한다고 말했다. 이 책의 추천사에서 볼프는 아주 짧게 그의 책을 추천한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는 자신의 권위 있는 전작 『정의』의 논의를 잇는 『사랑과 정의』를 통해 정의의 진정한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철학과 신학의 개념을 오가며 논의가 진행되기에 다소 어려운 부분이 많다. 하지만 천천히 정독해나가다보면 그동안 우리가 모호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에 대한 확실한 정리와 함께, 새롭게 고민하고 해석해야할 지점들을 보게 된다. 우리의 신앙은 명제적이며 추상적인 차원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내세적이며 개인적인 구원으로 만족해서도 안된다. 우리의 신앙은 더욱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실천적이며 현실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구원은 더욱 편만하게 사회와 세상을 품을 수 있어야한다. 기독교 신학과 신앙에서 핵심적인 '사랑'과 '정의'의 문제에 새롭게 관심가지고 정리해보려는 독자에게 최고의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Nicholas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홍병룡 역,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서울: Ivp, 2007).
  2. 신국원,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샬롬을 위한 테오리아를 지향하는 기독교 철학자", 『하나님을 사랑한 철학자 9인』 (서울: Ivp, 2009), pp. 223-252.
  3. K. Barth, Church dogmatics. Vol. 4. Part 2: The Doctrine of Reconciliation, ed. T. F. Torrance, trans. G. W. Bromiley (Edinburgh: T&T Clark, 1958), p. 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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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예배학
존 제퍼슨 데이비스 지음, 김대혁 옮김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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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제퍼슨 데이비스 (John Jefferson Davis) 는 1975 년부터 고든 콘웰 신학교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 에서 조직 신학 및 기독교 윤리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복음주의 교회들의 현 상태를 진단하고, 이후에 성경적이고 신학적으로 복음주의 교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을 판가름할 수 있는 잣대는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의 실재는 반복되는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있고, 그 만남을 통해 우리의 존재와 삶이 변화하고 있는가하는 것일 것이다. 예배는 우리의 신앙에 있어 핵심이며, 중심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여러 예배를 참여한 후 실제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 예배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이 예배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하나님을 실재하시는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생생한 인식이 있는가?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실재가 없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한 인식과 반성으로 이 책이 탄생했다고 저자는 밝힌다.


예배 그룹의 분류와 기준은 예배학자들마다 각기 다르다. 이 책이 저자는 미국 내 복음주의 하위문화를 여섯 그룹으로 간단하게 나눈다. '복음주의 좌파'는 짐 윌리스(Jim Wallis)와 토니 캠폴로(Tony Campolo)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의 사회적 책임을 소명으로하는 그룹이다. '대중 종말론적 예언파'는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에 기원을 두는 세대주의 진영이다. '카리스마파와 오순절파'는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 베니 힌(Benny Hinn), 피터 와그너(Peter Wagner) 등이 중심이 되는 성령의 능력과 임재를 중요시 여기는 그룹이다. '윌로우크릭 버전'은 '구도자 중심 교회'라고 할 수 있는데, 구도자에 친근한 예배를 기획하고 그들의 철학에 관심을 보이는 그룹이다. '이머징 교회'는 브라이언 맥라렌(Brian McLaren), 랍 벨(Rob Bell) 등이 이끄는 그룹인데, 더욱 초월적이고 신비적인 경향을 보인다. '개혁주의 정통파'는 핫지(Hodge), 워필드(Warfield) 등의 구 프린스턴 파에 뿌리를 두면서, 정통 장로교와 미장로교 같은 교단과 웨스트민스터와 같은 신학교 교단까지 이어지는 광범위한 그룹이다. 데이비스는 각각의 전통과 그룹이 가진 장단점에 대해서 밝히면서, 어떻게 각각의 강점을 취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그는 다음 세대의 복음주의와 그들의 예배는 "구원론에서는 개혁주의일 것이고, 신학의 이해에서는 삼위일체를 믿으며, 교회가 가지는 가장 높은 우선 순위로 예배를 이해하는 측면에서 송영적일 것이고, 회중의 삶에서 성령의 임재와 은사를 확인함에 있어서는 은사주의적일 것이며, 마지막으로 예배의 고대-현대식 형식의 측면에서 예전적일 것이다"라고 대안을 제시한다. 특히 더욱 중요한 것은 "깊고, 두텁고, 다른" 속성으로 구분되는 교회에 대해서 그는 강조한다. '깊은' 교회는 수적인 성장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깊게 만나는 교회이며, '두터운' 교회는 더욱 두터운 상호관계와 헌신을 특색으로 하는 교회다. '다른' 교회란 교회의 존재론, 신학, 예배, 도덕적 행동에서 당당하게 그 문화와 구별되는 교회를 뜻한다.


이러한 논의를 중심으로 저자는 2장에서 복음주의 교회의 예배의 회복은 예배의 참여자인 하나님, 교회, 그리스도인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요구한다는 점에 대해서 말한다. 3장에서 그는 진정한 예배는 성령의 권능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실재적이고 인격적으로 만나는 예배임을 강조한다. 4장에서 그는 성찬신학을 새롭게 조명한다. 주의 만찬에 대한 신약적 이해와 함께 반복적이고 빈번한 성찬 실행의 중요성을 말한다. 5장에서 그는 앞에서 논한 교회 예배의 갱신을 위해 교회 지도자들에게 예배 갱신을 실행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공한다. 


신학적 성찰 없이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에 맞추어진 예배를 강조하는 그룹을 많이 보게 된다. 혹은 그 반대로 한 사람에 대한 세밀한 관심없이 그 동안 해왔던 익숙한 방식을 아무런 고민과 질문없이 되풀이하며 생명력 없는 교회의 예배도 종종 보게 된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우리 신앙 생활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예배'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고민에 적절한 질문을 던져줄 것이다. 또한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해 줌으로 생동감 넘치는 예배를 실제적으로 어떻게 적용하며 구체화할지에 대해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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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뿌리
한나 앤더슨 지음, 김지호 옮김 / 도서출판100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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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책을 선택할 때 가장 중점적으로 보는 것은 '저자'다. 간혹 새롭거나 잘 알지 못하는 저자일 경우에는 출판사를 본다. 신뢰할 수 있는 출판사일 경우 믿을만한 저자의 책을 출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경우가 꼭 이와 같다. '한나 앤더슨'은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고, 검색을 해도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얻지 못했다. 도서출판 100은 이 책을 포함해 네 권의 책을 출간한 신생 1인 출판사이지만, 각 권의 내용이나 출판의 방향성 등이 분명하고, 그 결과물도 훌륭했다. 그래서 어떤 의심도 없이 마땅히 '좋은 책'임을 확신하며 첫 장을 펼쳤다.

이 책의 첫 이미지는 따뜻하고 부드럽다. 표지만 봐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차분해진다. 이전의 책들에 비해 두께가 있으나, 그럼에도 무겁진 않다. 한 손으로 들고 보기에 알맞은 크기와 무게다.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한나 앤더슨'은 버지니아에 있는 아름다운 블루리지 산맥에 살고 있으며, 목사인 남편과 함께 시골에서 목회사역을 하고 있다. 또한 세 명의 자녀가 있고, 신앙과 문화, 믿음의 삶에 대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하고 있다. 

책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겸손한 뿌리'는 '겸손의 뿌리'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는 책이다. 더하여 나무와 꽃의 이미지와 습성을 통해 겸손이 어떠한 특징이 있는지를 연결하여 말하는 독특한 책이다.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직접 꽃과 나무를 재배하면서 경험한 다양한 사건들을 통한 묵상과 통찰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경험에서 우러나온 통찰은 압권이다. 성경을 해석하여 적용하는 부분에서도 깊고 세밀하다. 그 동안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관점은 책을 놓을 수 없게 하는 이 책의 묘미다.

서문과 1장부터 이 책은 반짝인다. 작가의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마태복음 11장 28절("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을 해석해간다. 평온은 결국 그분의 겸손함을 배움으로 시작한다는 놀라운 통찰과 함께 말이다. 이 책에서 줄곧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위치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그 분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지음 받았다는 것을 늘 잊지 않아야한다. 그 사실은 오히려 우리에게 큰 위안과 평안을 허락한다. 

저자의 신학적 성찰의 핵심은 이러하다. 우리의 불안과 동요 가운데 놓여있는 교만을 직시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전제 가운데 겸손은 우리를 비로소 자유롭게 한다. 스트레스와 성과와 경쟁의 반복 가운데서 참된 자유를 허락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매 장마다 겸손은 다른 이미지와 특성을 가진다. 저자의 그림언어를 통해 매 장을 넘길 때마다 우리는 겸손에 대한 더욱 풍성한 이해와 놀라운 비전을 발견하게 된다. 겸손은 우리의 자세나 태도를 뛰어넘는다. 우리의 전존재와 인격의 변화를 통해서 참된 겸손에 이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통해 우리는 참된 겸손을 배워간다.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정하며, 우리의 나약함을 제대로 인식할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과의 참된 관계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시작점은 바로 겸손이다. 그렇기에 겸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첫 단추임과 동시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열매 맺게 되는 마지막 결실이다. 

이 책은 신학적 통찰이 번뜩이면서도 따뜻하고 풍성하다. 많은 현대인들이 불안과 초조, 우울함과 좌절감과 싸우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광야에 있는 것만 같은 외로움을 호소하는 분들이 많다. 그런 모든 분들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면서도 올바른 방향설정을 도와줄 수 있는 선물과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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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케네스 E. 베일리 지음, 오광만 옮김 / 이레서원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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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의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는 본래 Poet & Peasant의 번역서로 이전에 『시인과 농부』로 번역되었던 책이다. 저자 베일리 박사는 부친이 아프리카 지역에서 선교사로 계셔서, 이집트, 수단, 에티오피아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본인도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이집트,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이프러스 등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중동에서의 오랜 생활을 바탕으로 신약성경을 중동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존에 서구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왔던 것을 탈피하여, 신약성경이 쓰여졌고 읽혀졌던 그 때 당시의 상황 가운데로 들어가서 그 문맥 가운데서 성경을 읽어야만 성경의 원래 메시지를 더욱 명확하게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중동에서의 오랜 경험은 그의 주장이 단순히 이론적이고 추상적인 명제로 머물지 않게 해준다. 성경의 본문을 더욱 입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여러 책 중 Poet & Peasant은 베일리 박사를 세상에 알린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누가복음의 비유 중에서 네 개의 본문을 택해서 팔레스타인 농부의 입장에서 설명하고 있다. 중동의 농촌 문화와 더불어 이러한 비유들의 문학적 양식을 면밀하게 분석하여, 이 비유들이 가진 핵심적인 메시지를 제시하고 있다. 특히 많은 논란과 다양한 견해가 있는 누가복음 16장 1-8절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문화적이고 문학적인 자신의 해석학적 틀에서 명쾌하게 풀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은 이 책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는 방법론의 문제를 다룬다. 2부는 1부에서 제시한 방법론을 가지고 누가복음 예루살렘 여행 기사 속의 비유 네 편과 시 두 편을 분석한다. 특히 눈여겨 볼 것은 1부에서 제시한 방법론이다. 베일리 박사가 비유 연구에 사용한 해석방법론은 "동양식 주해"다. 


이 방법론의 핵심은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중동의 농경문화를 이해함에 있다. 이러한 이해가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함에 필수요소가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동양어 역본들의 사용이다. 번역은 그 문화권의 정서를 반영한다. 그렇기에 베일리 박사는 아람어와 콥틱어 역본 등을 통해 팔레스타인 주변의 문화가 반영된 번역을 통해 세밀한 해석들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비유의 문학적 구조이다. 이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강조한 부분이지만, 베일리 박사는 더욱 명쾌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또한 유대인들의 삶에 이미 자리잡고 있는 문학적 기법인 대구법과 수미상관법을 더 세밀하게 적용하고 발전시킨다.


이러한 해석학적 방법론을 통해 저자는 누가복음 16:1-13, 11:5-13과 누가복음 15장을 분석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가 해석하고 적용했던 부분들도 있지만, 저자는 본문을 더욱 구체적으로 분석하며, 자신의 해석학적 방법을 하나하나 적용시킨다.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다양한 학자들의 해석과 저서들이 있지만, 베일리 박사의 이 책은 필수적으로 구비해야할 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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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와 교회 -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교회에 대한 가톨릭·동방 정교회·개신교적 이해를 찾아서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황은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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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Miroslav Volf)의 가장 큰 장점은 자료를 이해하고 분석하는 독해 능력일 것이다. 방대하고 폭넓은 텍스트를 다루면서도 핵심을 짚는다. 또한 그 텍스트를 적절하게 배치한다. 뿐만 아니라 적절한 비판과 대안제시는 감탄을 자아내게한다. 자칫 철학과 인문학적 사상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전혀 새로운 가치나 독특한 관점을 제시할만한데, 그는 철저히 신학적 작업을 수행한다. 그는 결코 그 중심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신학은 삼위일체 중심적이다. 그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페리코레시스적 교제 안에서 기독론과 성령론, 교회론을 재해석해낸다. 개혁주의 신학의 중심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통찰과 번뜩이는 아이디어들을 보여준다. 본 서평에서는 『삼위일체와 교회』의 모든 장을 다루지 않고, 핵심적인 장들을 중심으로 다루고자 한다(내용을 전개함에 있어 이후의 장들은 앞의 챕터들의 내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Ⅲ장 ‘교회의 교회성’에서는 교회론에서 다루어야 할 핵심적인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미로슬라브 볼프의 언급대로 교회성에 대한 질문은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 즉 교회가 갖추어야 할 본질적인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일 것이다. 이것은 다름아닌, 교회의 전제조건은 무엇인가?’ 의 질문과 맞닿아 있다. 교회론은 다른 조직신학의 각론과 분리되지 않으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특히 저자는 교회론은 구원론과 인간론, 삼위일체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만 온전한 교회론을 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교회론은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에 근거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자연스럽게 종말론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의 관계 가운데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지속적으로 고대한다. 한편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 사건과 성령 하나님의 보냄 이후에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그것을 드러내야한다.


저자는 교회성의 공통된 두 조건으로 성례전과 하나님의 백성의 현존을 말한다. 초기의 자유교회 전통은 여기에 그리스도의 계명에 대한 순종과 교회의 성서적 조직을 추가한다. 볼프는 이와 같이 최초의 침례교도인 존 스미스(John Smyth)의 신학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스미스의 사상을 자유교회 전통의 핵심적 사상으로 간주한다. 이후에도 볼프는 스미스와 Ⅰ,Ⅱ장의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와 지지울라스(John D. Zizioulas)의 교회론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이를 비교분석한다. 이는 곧 감독제와 자유교회에 대한 비교이다. 감독제와 자유교회의 가장 특이할 만한 차이점은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에 대한 차이일 것이다. 


저자는 보편교회와 지역교회을 연결하는 주요한 통찰들을 제시한다. 특히 공동체적 신앙 고백이 개인적이고 사적인 사안을 넘어서는 사회적이고 공적인 차원임을 말한다. 교회적 발화의 객관적 수행과 교회의 모든 개인적 구성원들의 주관적 신앙을 연결시키는 통찰도 큰 공감을 일으킨다. 다만 교회의 존재에서 직임과 성례전의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에서 성례전에 비해 직임에 대한 분량이 적은 것이 아쉽다.


제Ⅴ장 ‘삼위일체와 교회’에서 볼프는 라칭거와 지지울라스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교회와 삼위일체 사이에 상응하는 지점의 가능성과 한계를 분석하고 있다. 삼위일체적 개념을 면밀하게 분석함으로서 교회의 통일성과 보편성, 상호관계성 등을 고찰할 수 있다. 즉, “삼위일체적 용어를 통해 보편화와 다수화 사이의 이원론을 피해가는 것이다(323).” 삼위일체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통해서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더욱 다양한 발전적 논의가 가능하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이미 삼위일체적 논의를 통해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물론 서방교회 전통에서 신적 본질의 통일성이 우선되고, 동방교회 전통에서는 삼위 인격의 삼중성이 우선된다. 그렇기에 이러한 차이는 서방교회는 보편교회를 우선하고, 동방교회는 지역교회를 우선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신학적인 차이가 실제적인 현상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교회 전통에서는 교회와 삼위일체의 상응 관계에 대한 개념은 발전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학적 근거가 기독론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볼프는 자유교회의 교회론을 삼위일체적으로 재구성하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모든 유비에는 한계가 있지만, 추상적이고 명제화된 개념에 비해 유비는 더욱 풍성한 이해를 함에 있어 많은 기여를 한다. 교회론적 인격과 교제의 개념에 있어서도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를 통해 더욱 풍성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비록 인간 존재는 피조물적 방식으로만 하나님에 상응할 수 있지만, 이러한 점을 인정하면서 우리의 인식을 더욱 확장할 필요가 있다. “교회적 교제는 언제나 인간 존재를 삼위 하나님과의 교제에 있게 하는 세례와 그러한 교제가 완성되는 종말론적인 새 창조 사이에 있는 길에서 실현된다. 이 지점에서 교회는 역사적 최소치와 종말론적 최대치 사이에 존재하게 된다(333). “우리의 교회에 대한 이해는 이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볼프는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의 관계를 삼위일체의 개념을 통해 더욱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라칭거로 대표되는 서방교회와 지지울라스로 대표되는 동방교회의 차이는 각각의 전통이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방식에 따라 확연하게 구분된다. 우리는 제3의 길을 모색해야하며, 저자는 이를 ‘페리코레시스’의 개념을 통해 발전시키고 있다. 물론 삼위일체의 페리코레시스를 통해서 보편 교회와 지역 교회의 상관성을 완벽하게 만족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의 교회됨에 대한 이상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더욱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성령의 내주함’이 교회의 페리코레시스적 교제의 매우 주요한 근거로 제시하는데, 어떻게 성령의 내주함이 가능한지에 대한 더욱 구체적 설명이 있었다면(물론 논지를 벗어나는 우를 범할 수 있지만), 더욱 실제적이고 현실적이었을 것 같다. 


제 Ⅶ장에서 볼프는 교회의 ‘catholicity’에 대하여 말한다. 그는 교회의 보편성이 전체성을 지향하긴 하지만, 저마다의 특정한 방식을 따라 보편적이라고 말한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는 ‘보편성’에 대해서 강조하지만, 정작 상대방의 교회를 인정하지 않음으로 보편성을 잃어버렸다. 즉 보편성이라는 용어를 자신들의 교회적 정체성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말처럼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논의는 항상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도달하고자 노력할 때에만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보편성’은 언제나 통일성과 다수성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즉 전체성에 대한 이해는 그것을 요구하거나 허용하는 통합과 차별의 정도에 따라 다른 것이다. 결국 교회의 내적 문제임과 동시에 외적 문제인데, 이러한 외적 차원은 포용성과 배타성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편성의 문제는 양적 이해와 질적 이해로 분류되는데, 저자는 양적 이해는 교회의 고유한 속성이라고 보지 않는다. 지리적 차원에서의 보편적 확장은 교회의 결정적 특질이 될 수 없다고 말하며 보편성의 양적 이해를 비판한다. 결국 보편성은 질적 이해로 귀결되며, 이는 충만함(fullness)으로 표현될 수 있다. 구원의 충만함이 실현된 교회가 보편적임은 모두가 동의하지만, 이를 어떻게 실제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볼프는 이를 종말론적 구도 안에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의 종말론적 새 창조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보편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종말론적 전체성이라는 틀 안에서만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새 창조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영화롭게 된 백성들이 상호 내주하는 것이다(계 21-22장). 인간과 세계의 전체 역사는 심판에 의해 부정성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새 창조라는 포괄적 실체로 편입될 것이다. 새 창조는 따라서 그 시초로부터 계속된 창조세계 전체의 총괄갱신(recapitulation), 즉 하나님, 그분의 전체 백성, 전체 우주가 하나의 분화된 통일성을 구현할 전체성일 것이다. 그 분화된 통일성은 교제인데, 삼위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게 될(엡 1:10; 고전 15:28을 보라) 그러한 교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전일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종말론적 전체성이라는 틀 안에서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전체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전일성은 결국 창조된 실제 전체를 위한 구원의 종말론적 충만함이 가지는 교회론적 차원이다.(p. 442)"



통일성은 각각의 독특성과 함께 가야하며, 교회는 이러한 이해를 잘 실현시키고 구현해야 할 것이다. 삼위 일체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전체 하나님의 백성과의 포괄적 관계를 통해 우리는 교회의 보편성뿐만 아니라 각 그리스도인의 인격적 보편성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됨의 핵심적 요소이며, 필수불가결한 전제이다.


그동안 교회의 하나됨에 대한 우리의 호소는 추상적인 구호에 머물렀던 것 같다. 논리적인 근거가 많이 부족하여, 그만큼 설득도 쉽지 않았다. 볼프의 이러한 주장은 지역교회와 보편교회의 관계에 대한 풍성한 이해를 갖게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 각 그리스도인들은 전 세계와 우주적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갖게 되는지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준다. 더불어 계속되는 질문은 수많은 교단으로 분열된 한국 교회의 현실 가운데 어떻게 하나됨을 이룰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에서 탈피해서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어떻게 하면 향상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새 창조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분의 영화롭게 된 백성들이 상호 내주하는 것이다(계 21-22장). 인간과 세계의 전체 역사는 심판에 의해 부정성으로부터 해방되어서 새 창조라는 포괄적 실체로 편입될 것이다. 새 창조는 따라서 그 시초로부터 계속된 창조세계 전체의 총괄갱신(recapitulation), 즉 하나님, 그분의 전체 백성, 전체 우주가 하나의 분화된 통일성을 구현할 전체성일 것이다. 그 분화된 통일성은 교제인데, 삼위 하나님이 ‘만유 안에 계시‘게 될(엡 1:10; 고전 15:28을 보라) 그러한 교제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론적 전일성은 오로지 하나님의 새 창조의 종말론적 전체성이라는 틀 안에서만 적절하게 이해될 수 있다. 전체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전일성은 결국 창조된 실제 전체를 위한 구원의 종말론적 충만함이 가지는 교회론적 차원이다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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