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우리는 왜 예언서에 끌리는가

2009 02/03   위클리경향 810호

대부분 ‘십승지’ 소개… 핵심 키워드는 ‘생존’
미네르바 신드롬, 주류 미디어 불신서 비롯





“그냥 전체적으로 2009년은 어떨지, 아이 취학이나 건강은 어떨지 궁금해서 봤어요.”
주부 정서혜(가명·39)씨는 올해 초 토정비결을 봤다. 따로 비용이 든 것은 아니다. 정씨는 요즘에는 인터넷 포털 같은 사이트에서 회원에 가입하면 무료로 토정비결을 봐주는 곳이 많다고 귀띔했다. “총평을 먼저 보고 월별 운세를 보는데, 앞으로 예정된 일, 이를테면 취학이나 이사 같은 것이 예정된 달의 운세를 보면 ‘아, 그 달은 어떻겠구나’ 하고 감을 얻는 식이에요.” 정씨는 토정비결을 ‘마음의 위로 또는 위안’이라고 규정했다. “나쁜 일이 생길 것이라고 했던 해도 돌이켜보면 딱히 나쁜 일은 없던 것 같고, ‘좋은 일이 많다’는 해도 딱히 대박에 해당하는 일은 없던 것 같아요. 그래도 인생사에 상담이 필요할 때 나름대로 카운슬러 역할을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연초, 한 해의 운세를 살펴보기 위해 토정비결을 보는 것은 대표적인 한국 풍습이다.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관련 연구자들은 19세기 후반께 이 풍습이 널리 퍼진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국에도 비슷한 전통적 점술이 있다. 타로 카드나 점성술이 대표적이다. 지금은 외국의 점술 문화도 많이 들어왔다. 인터넷 등을 통한 글로벌 문화가 확산한 덕분이다.

매년 새해에는 개인의 길흉화복뿐 아니라 국운(國運), 즉 나라의 운명도 점친다. 언론매체는 매해 초, 유명 역술가들의 국운 예측 기사를 즐겨 싣는다. 국운을 예측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자미두수(紫微斗數)나 육임(六任), 태을신수(太乙神數) 등도 주요한 방법론으로 거론된다. 수백 년 전 만들어졌다는 비기서(秘記書)의 해석을 두고 설왕설래도 벌어진다.

연초 토정비결, 대표적인 한국 풍습
은 2007년 대선을 일주일 앞두고 그해 연초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국운을 예측한 유명 역술인의 예언을 검증했다. “대통령 선거 결과는 국운 예측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일부 역술가를 제외하고 대부분 예측은 빗나갔다(본지 754호 ‘2007 대선, 역술인 최종 예언 뭘까’ 기사 참조). 그럼에도 중요한 국가적 사건 등을 앞두고 반복적으로 비기서나 역술가 들의 예언에 솔깃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글쎄 말입니다. 수많은 가짜 예언서를 봤으면서도 저 역시 누가 어떤 예언을 했다든가 새로 비결서(秘訣書)를 발견했다고 하면 흥미가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김하원(52)씨는 역학이나 운명·예언을 연구하는 데 반평생을 보냈다. 예언서나 비결서를 발견했다고 하면 이를 입수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김씨는 1995년 <위대한 가짜 예언서 격암유록>이라는 책을 펴내 <격암유록(格菴遺錄)>은 후세에서 조작한 위서라는 주장을 폈다.

도참(圖讖)적 성격을 띠고 있는 비결서는 토정비결과 차원이 다르다. <정감록>을 비롯한 예언서들을 문헌고증학·역사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저서 <한국의 예언문화사>를 저술한 백승종 경희대 학부대학 객원교수는 토정비결을 ‘점술을 반대하는 점술서’라고 규정한다. 토정비결의 가장 큰 기능은 ‘위안과 격려, 불안을 달래주고 힘을 복돋아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백 교수는 “적어도 토정비결 때문에 패가망신했다는 이야기는 없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화제가 된 비결서는 많은 ‘뒷담화’를 낳는다. 2003년 선풍적 화제를 몰고 다녔던 <송하비결>과 관련해 한 역학연구자는 “초판에서 부시가 저격당해 죽는다고 했는데, 부시가 재선하니 나중에 개정판을 내서 입장을 정반대로 바꿨더라”라며 “(그런 말로) 돈을 버니까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든지 혹세무민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난했다.


개인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토정비결>과 국운을 예언하는 비결서는 차원이 다르다고 관련 연구자들은 말한다. 사진은 신년을 맞아 길거리에서 토정비결을 보는 사람들. <김석구 기자>

<송하비결>의 공동 편역자인 황병덕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혹자들이 돈에 눈이 멀었다는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다”라며 “강남에 재건축 아파트 한 채라도 구입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나보다 더 많이 번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는 “내가 동양학에 관심이 있는 것을 알고 있던 주위 친구들이 ‘그러지 말고 네가 해석해봐라’ 해서 나선 게 여기까지 온 것”이라며 “일부에서는 종교적 배경을 의심하지만 <송하비결>은 다른 비결서에 비교했을 때 그런 색채가 거의 없는 책”이라고 덧붙였다.

비결서는 아무나 쓰거나 해석할 수 없는 책이라고 불린다. 최소한 주역과 하도낙서, 음양이론·팔괘 등 ‘원리’에 도통해야 한다. 흔히 ‘명복의상산(命卜醫相山)’이라고 하는 동양사상이 집약된 것이 비결서라는 것. 한자도 통달해야 한다. 파자(破字)와 측자(測字)도 능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 난리의 피난처는 부산(釜山)이다’는 말을 파자하면, ‘다음 난리의 피난처는 팔금산(八金山)이다’라는 식으로 파자를 통해 암호화할 수 있다. ‘팔금’ 이외에도 부금산(父金山)이라고 할 수도 있고, ‘부(父)+옥(玉)+점 하나 더’로 풀어 ‘부옥가점산(父玉加點山)’이라고 쓸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해석도 제 각각이다.

비결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역학연구자들은 “길게는 1000년, 짧게는 100~200년 전에 한국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을 예언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대부분 비결서가 세상에 공개된 시점에서는 지나간 큰 사건을 모두 맞혔다고 주장하지만, 이후 미래 예측은 엇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평가절하한다. 김하원씨는 “한학과 음양오행, 주역원리를 꿰뚫어야 비결서를 쓰거나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파자 등 몇 가지 원리를 이해하고 고등학교 수준의 한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결서를 조작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혼란기 국가권력에 도전하는 무기

비결서에는 근·현대사의 주요 사건이 망라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를 입증할 수는 없다. 위부터 6·25전쟁과 4·19혁명, 5·16쿠테타, 10·26 박정희 암살 사건.
비결서에 대한 학문적 연구자들은 문자 그대로의 예언, 앞날을 내다보는 비결로 해석한다면 그 수명은 이미 끝난 것이라고 말한다. 백승종 교수는 “모든 예언서는 가짜이자 진짜라고 할 수 있다”라며 “중요한 것은 예언의 내용이 아니라 예언서를 만들고 유포하는 사회적 배경, 민중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즉 어떤 맥락에서 예언서들이 등장하고 어떻게 해석하려고 했는지가 중요하지 ‘10가지 예언 중 3개가 맞았다’는 식의 시시비비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다. 예언서는 백성들이 정치에 정상적인 방법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시절, 자연스러운 분출구 역할을 하던 매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또 주의해야 하는 것은 비결서라고 전해진 책들이 모두 고래(古來)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감록>이나 <남사고비결>과 같이 <조선왕조실록>이나 각종 수사 기록에서 존재가 확인되는 도서를 제외하고, 대부분 이르면 19세기 말부터 일제강점기, 심지어 1950년대나 1960년대와 같은 최근년도에 조작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예언의 사회사’를 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발견된다. 예언은 국가가 통제력을 상실하는 역사적 혼란기에 국가 권력에 도전하는 새로운 사회세력의 무기로 사용된다. 왕건이 신라에 맞서 고려를 건국하거나 조선이 건국할 당시 예언을 이용해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도모한 것은 대표적 예다.

하지만 국가가 성립한 이후에는 이런 ‘도참(圖讖)’을 담고 있는 비결서는 탄압 대상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예언의 주된 담당 계층은 지배세력의 일부분에서 피지배층으로 내려왔다. 일반민중, ‘평민지식인’들이 국가 권력을 상대로 예언으로 정치·사회적 운동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것이다.

백 교수는 “예언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기본적으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며 “그렇기 때문에 뭔가 믿음의 끄나풀, 희망의 싹을 발견하려고 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예언이 인기를 끌 때는 그만큼의 사회·정치적 배경이 존재한다는 지적이다. 진위 여부를 떠나 전해 내려오는 비결서의 핵심 키워드는 ‘생존’이다. 십승지(十勝地·천지개벽이 일어났을 때 이를 피해 목숨을 보존할 수 있는 장소 10곳)는 여러 비결서에서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단어다. 비결서가 예언서로서 수명을 다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누가 그 역할을 대체했을까.

제2, 제3의 미네르바 나올 수 있어
회사원 김일현(41)씨는 지난해 10월부터 다음 아고라 경제방에 미네르바라는 필명으로 올라온 글을 주목해왔다. 김씨는 “소위 주류 일간지와 경제지를 병행해서 봤는데, 미네르바가 올린 내용은 거기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전혀 정반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면서 “투자에는 언제 들어가고 나와야 하는지 결단해야 하는 중요한 ‘모멘텀’마다 미네르바가 올린 글이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김씨는 솔직히 아직도 박모씨가 미네르바라는 것을 믿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는 “유명 증권사 애널리스트 친구가 하는 말이, 독학으로는 도저히 쌓을 수 없는 지식이며 최소한 현장 경험을 가진 사람과 네트워크가 없으면 나올 수 없는 주장”이라고 말했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미네르바 현상’은 정보사회에서 입학·졸업·시험과 같은 제도를 토대로 부여하던 전문가적 권위가 흔들리고 정보와 지식의 생산·소비·유통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풀이했다. 전통사회에서 예언서가 하던 기능을 현대사회에서는 합리적인 예측이 대체한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 평민은 오늘날 시민보다 수집할 수 있는 정보량이 절대적으로 적았다. ‘생존’을 위해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방법도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적 색체를 띤 예언은 중요한 정보 유통의 매개체이자 변혁 지침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오늘날은 ‘웹’이라는 정보·소통 공간이 있고, ‘아고라’라는 익명의 활동이 보장된 포럼이 있기 때문에 종교성은 필요 없을 뿐 아니라 훨씬 더 전문적 지식을 바탕으로 날카롭게 예측할 수 있는 조건이 존재한다는 점이 다르다는 지적이다.

과거 황우석 사태 등에서 나타난 국가주의적 실태를 분석한 김명진 성공회대 강사(과학사)는 ‘미네르바’ 신드롬이 나타난 이유에 대한 정부 정책과 주류 미디어에 대한 불신을 꼽았다. “미네르바에 대한 열광의 바탕에는 세계적인 경제위기 아래서 오락가락하는 정부정책, 공권력이 절대 다수인 공중의 이익보다는 ‘강부자’로 집약되는 소수 가진 자를 대변한다는 대중인식, 그리고 주류 언론매체가 날마다 내놓는 엉터리 진단에 대한 불신이 깔려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물론 예언과 예측은 다르다. 신광영 교수는 “다가오는 위기로 피해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구체적 지침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경제 예측과 예언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경제예측은 지표나 계량 분석을 한다는 점에서 미네르바의 예측은 사건의 징후를 통해 유추하는 도참사상 비결 서류와 다르다”고 지적했다.

백승종 교수는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홍경래나 장길산처럼 이미 미네르바는 박대성씨의 닉네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라기보다 일반명사가 되었다. ‘리먼 브러더스 인수에 도전’식의 태도를 보였던 주요 미디어나 정부가 자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제2, 제3의 미네르바가 나타나는 일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1월 15일, 법원은 ‘범죄의 중대성’ 등을 예로 들어 미네르바 박씨에 대한 구속적부심 청구를 기각했다. 문제는 새겨들어야 할 이들이 아직 귀를 닫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과 예측, 어떻게 다를까


최근 경제 위기와 관련해 화제가 되고 있는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의 저서 <블랙 스완>.
왜 사람들은 예언과 같은 기이한 것(weird thing)에 끌리는 걸까. 마이클 셔머·토머스 키다 등이 주도하고 있는 회의주의(skeptics)는 유령·예언이나 점술·불가사의한 사건에 대한 집착 성향을 주된 논제로 삼고 있다. 질문을 다른 말로 한다면, 왜 예언은 계속해서 틀리는데도 지속적으로 살아남는지 문제다.

토머스 키다는 그의 책 <생각의 오류>에서 ‘믿고 싶은 것만 선택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욕구’와 더불어 ‘포러 효과(Forer effect)’가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포러 효과는 아주 일반적인 묘사에서 자신의 성격적 특성의 일부를 확인하는 현상이다. 즉 사실은 모호하고 일반적인 설명인데도, 이것이 특별히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믿는 현상이다. 혈액형별 성격 유형이나 각종 예언에서 묘사하고 있는 문구 대부분 그렇게 설명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언은 역설적으로 항상 사후적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9·11 테러 이후 이전에는 다르게 설명하던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알고 보니’ 뉴욕 쌍둥이빌딩에 대한 테러를 예언한 것으로 사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단적이다.

당초 2004년 탄핵 무효 시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한 <송하비결>의 ‘역신회두 국사번요(逆臣回頭 國事煩擾)’는 2008년 나온 책의 4개정판에서 2008년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로 재해석했다.

그렇다면 경제 예측은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미국발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블랙스완(Black Swan)’이라는 개념은 전 세계적으로 화두가 되었다. <옵저버>가 ‘월가의 새로운 현자’라고 별명을 붙인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2007년 낸 동명의 저서에서 유래한 개념으로, 아무리 수백 년간 백조(swan)라는 이름이 붙었어도 단 하나의 검은 백조 사례를 발견하면 종래의 통설이 부정된다는 통찰이다.

간단히 말해 위기는 ‘검은 백조’처럼 나타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예시한 것처럼 1001일째 살아온 칠면조가 어느 날 갑자기 식탁에 올라가는 것을 칠면조로서는 예견할 수 없다. 과거에 대한 분석, 다시 말해 과거의 정규 분포 곡선이 미래를 예측하는 도구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경제 예측은 과학이 될 수 없다는 급진적 주장으로 치환된다.

미네르바의 경우는 어떨까. 김명진 성공회대 강사는 “인간 행위자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경제 예측이 자연과학적 예측 수준의 정확성은 획득할 수 없다”라면서도 “그렇다고 경제학이 역술과 똑같다는 것은 맞지 않고, (미네르바가) ‘학위가 없다면 무자격자’식의 주장은 더 맞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미네르바 구속 논란과 관련해 “유력한 경제 관련 연구소들이 내놓은 전망 상당수가 결과적으로 틀린 경우가 많은데 그렇다고 그런 연구소를 폐쇄하자는 이야기는 없지 않냐”고 꼬집었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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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구, 그의 아내 

재문과 예준은 군대 동기로 절친하다 . 예준은 재문 +지숙 부부를 도와주지만  묘한 우월감을 가지고 있다 .요리사 재문은 미용사 지숙과 결혼하여 아기를 낳는다 . 그리고 미국이민 사기를 당하여 좌절한 재문부부는 갈등을 겪다가파리로 미용박람회에 간 지숙은 아기를 잃는다 . 순간적인 실수로 . 

예준은 과거 학생운동권 출신으로 재문부부 아기에게 민혁(민중혁명 )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 딸을 낳으면 예니, 맑스의 아내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옛사랑의 그림자를 밟고 있다 . 그러나 자산관리사가 된 예준은 민중혁명을 실수로 죽이고 기층민중인 재문부부를 갈라놓는 역할을 하게 된다 . 그리고 상황을 모르는 지숙은 자본의 첨병이 되는 예준과 몸을 섞는다 . 더 악의적으로 말하면 자본을 대변하는 예준이 친구(서민)의 아내를 범하는 거다 . 통정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까닭은 , 자기들 부부에게 닥친 불행의 전모에 대해 지숙은 아무 해명도 들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 따라서 그건 통정이라기 보다는 유린이라고 해야 적확한 상황이다 .  

예준은 씻을 수 없는 모든 과오를  자본으로 무마하려고 하낟 . 그리고 서민이며 피해자인 재문+지숙에게 소리지른다 .   

" 미안하다고 하라고 ? 이것들이 누구 덕분에 사는 줄도 모르고! " 

바로 이거다 . 청와대로 들어갔던 386 운동권 <수레기>들은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노동자를 대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혁영을 했다고 감정과잉으로 어게인 2002 어쩌고 하더라 .  

용산에서 여섯 명이 죽었는데 전철연이 도와주었다고 테러라고 한다 . 이런 말을  명박패밀리가 할 수 있다 . 그들은 몬스터니까 . 하지만 노무현패밀리들은 더했다 . 당시에 죽어간 수많은 노동자, 농민을 생각해보면 확연하다. 

나중에 재문은 예준의 생명을 구해준다 . 그냥 죽게 냅두는 게 내 정서에 맞지만 영화는 그렇게 많은 아픔을 다독면서 엔딩을  보여준다 . 친구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존재인가 ?  

그런데 지숙역으로 나오는 배우는 국어책 낭독신공을 보여준다 . 음...일부러 그러는 건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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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바마를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바마가 부른다면...


분류없음 2009/01/26 11:53

최근 워싱턴에 사는 사람들 몇 명을 직접 만나기도 하고, 간접적으로 얘기를 건네 듣기도 하였다. 이중에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시민권자인 한국인도 있고, 미국 공무원들도 몇 명이 있었고, 또 권위있는 분석가들도 있었다.

이들이 하는 얘기를 모아보면,

"나는 오바마를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바마가 부른다면 기꺼이..."

이런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몇 번의 정권 교체에서 한국에서 소위 진보 진영에 있던 사람들이 했던 얘기와 비교해보고 싶어졌다.

DJ 때는 어땠을까?

"나는 DJ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정권에는..."

DJ 때는 사람이 없다는 얘기가 많이 떠돌았다. 그러나 정권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일종의 미덕처럼 되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나는 그 시절, 현대를 그만두고 정부기관으로 자리를 옮겼었고, 정권 내부에서 꽤 많이 움직인 편이다.

노무현 때에는...

"나는 노무현을 좋아할 뿐이고, 다만 좋아할 뿐이고."

이런 열풍이 있었던 것 같다. 처음 정권을 가졌던 것과 비교하면, 어려웠던 승부를 가까스로 역전을 했다고 생각한 많은 사람들은 이제 한나라당은 곧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이고, 민주당, 민노당 그리고 시민정당 혹은 녹색당, 이렇게 3분 체계가 되면 좋을 것 같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 회상해보면, 사람들은 "기다리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다"라는 너무 강한 낙관론으로 빠져들었던 것 같다.

김진표의 정권인수위원회는 그런 낙관론의 귀결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나는 그걸 보고 "이제 망했다"라고 생각하고 공직 생활을 정리하고 시민단체 활동을 시작했다. 노무현 초기 2년, 소위 좌파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국강병'을 외칠 때, 좀 괴로웠다. '골프장 좌파'들이 득세할 때, 이건 정말 아니다 싶었다.

이명박 때에는 어땠을까?

절망과 좌절이 한 번쯤 흘렀던 것 같은데, 내 주변의 우파 인사들은 어떻게든 줄을 대서 청와대에 들어가 보고 싶어하던 인간들과, 역시 이명박은 내 스타일 아니다라고 선거에서 이기자마자 선을 긋고자 했던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어차피 모두가 원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일은, 이 세상에서는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정의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최근의 용산살인 사건을 보고, 자신의 입장을 결정하기는 한 것 같고, 미처 정리하지 못한 우파 인사들도 이 사건으로 꽤 입장을 정리한 것 같다.

어쨌든 공과에 대한 평가는 몇 년이 지나야 제대로 나올 것이지만, 살인 정권과 이름을 같이하기는 좀 어려운 것 아닌가?

가끔 남재희 장관과 이것저것 얘기할 기회가 있기는 한데, 이 양반이 전또깡 시절의 얘기가 나오면 상당히 괴로워한다. 아무리 보수 인사라도 살인정권에 대한 협력은 결국 자신의 자서전을 쓰는 순간에 어떻게든 변명하든, 미화하든, 하여간 설명을 위해서 각별히 노력을 해야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타칭 이명박노믹스라고 하는 것이 기초 설계자의 한 명이라고 하는 사람을 잘 안다. 타칭인 것은,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는데, 본인은 그냥 깃털이라고 극구 부인하기 때문이다.

촛불이 한참일 때, 어느 방송국의 토론 프로그램에서 꽤 길게 이 양반하고 이것저것 길게 논의할 시간이 있었는데, 그는 그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열심히 준비한 경제정책들이, 촛불에 바베큐 되어버렸다.

그러나 곧 촛불이 잣아들면, 우리의 정책이 본격가동될 것이다.

그 때 내가 한 질문은, 그 경제정책이 본격 가동되면 한국에 본격적으로 경제위기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으셨나요?

그럴리가 없다고 대답한 기억이다.

지금 자신들이 만든 이명박 정권을 기본적으로는 자랑스러운 정권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용산 살인사건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기는 하다.

오바마라고 특별히 지금의 미국 정치의 의사결정 과정이나 권력의 균형 속에서 아주 다르게 하지는 못할 것이고, 특히 이스라엘 문제 등 결국 보수로 상당 부분 회귀할 것이라는 게 워싱턴에 있는 많은 오바마를 지지했던 사람들의 입장인 것 같다.

그건 객관적이지만, 혹시라도 오바마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면 언제든지 도와주겠다...

그게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혹은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이든, 다음 번 정권을 가지고 싶은 사람들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입장을 가지도록 하는 게 필요할 것 같다.

그게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대의이고, 대세일 것 같다.

오세훈을 믿지는 않지만, 오세훈이 부른다면?

동대문 운동장 부수고, 서울시청 부순 파괴 대마왕 오세훈이 부르면, 지금에 와서야 웃기지 마라고 얘기할 사람이 더 많지 않나?

박근혜가 부른다면?

야야, 웃기지 마라, 할 사람이 많아 보인다.

정세균이 부른다면?

새만금부터 정리하고, 경인운하 정리하고... 대답이 복잡하다.

심상정이 부른다면?

묘한 페이소스가 흐를 것 같다.

노회찬이 부른다면?

많은 사람이 오바마와는 반대로, 노회찬은 믿지만, 불러준다면, 에, 사양의 미덕을... 이러지 않을까 싶다.

참 어려운 조건인데, 개인은 믿지 않지만, 부른다면 자신의 것들을 기꺼이 내놓겠다는 이 조건이 약한 점 하나가 광야를 불사르는 일이 벌어질 때의 사회적 조건 혹은 정치적 조건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지금 이 조건에 가장 가깝게 간 사람이 강기갑 의원 아닐까 싶기도 한다.

강기갑 개인이 뭘 잘 할 것 같지는 않아보여도, 그래도 도움을 청한다면 이 국면에서는 뭐라도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는 않을 것 같다.

하여간 한국 정치인들은 "믿어주세요"라는 말을 맨 앞에 꺼내기는 하는데, 믿지는 못해도 도와주기는 하겠다는 이 묘절한 조건, 그게 최근 오바마 취임을 전후해서 워싱턴의 정가와 시민사회에 묘하게 흐르는 기저인 것 같다.

다음 총선 때 일본에서는 드디어 자민당 정권이 민주당 정권으로 넘어갈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솔직히 오자와가 다른 자민당 인사와 뭐가 근본적으로 다른지, 혹은 민주당이 어떤 정책 기조를 펼칠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유야 어쨌든 최근 일본인들과 일본 경제가 이렇게 어려운 것에 대해서 논의할 때, 고이즈미와 '네오 리베'라는 표현을 하면 약간 폭넓은 동의가 나오는 것 같다.

그 고이즈미와 오자와가 정책 기조가 어떻게 다를지,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하여간 천년만년 갈 것 같은 자민당이 금년 상반기의 총선 때 정권을 내놓게 된단다.

이 오자와에게도 많은 일본인들은 유사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오자와는 믿지 않지만, 아소 다로 가지고는 어렵지 않나? 그래서 표는 오자와에게 주겠지만, 내가 뭘 적극적으로 이 민주당 정권에서 할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한 마디들을 덧붙였다. 어쨌든 자민당은 좀 집으로 보내야 하지 않겠냐...

아사히나 동경신문 기자들 같이 현장에서 취재하는 사람들은 물론, 아직도 바닥에서 움직이고 있는 파견 마을의 조직가들이나 활동가들도 유사한 얘기를 하는 것 같다.

용산 살인 사건, 하여간 이 가슴아픈 사건을 경계로, 한국에서 묘한 흐름의 전환 같은 게 생겨나기는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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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 제럴드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  

브래드피트가 특별히 연기를 잘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이든 외모로  아이의 마음을 가지고  

나중에는 점점 젊어지고 어려지는 시간의 역행을 통해  

그는 시간이란 무엇인가를 환기시켜준다 .  

우리가 80 대 노인 외모로  태어나서 점점 어려지는 외모를 가지고  

나중에는 아기가 되어 치매에 걸린다면  

인생에 대해 오류를 저지르지  않을까 ?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까 ? 

문제는 하드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인데 

우리는 나이들어 노쇠해가는 육체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반성을 하게되는 영화다 .  

시간을 거슬러 생각한다면 나는 지금 스물 여덟 쯤인데... 

아,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 그런 고단한 젊음... 

그냥 이대로 사는 거에 익숙해져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내일 일하러 갈 준비를 해야겠다 . 

아, 노는 거 정말 좋았다 .^^ 

 (새해 복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십시오 . 

연대는 쭉~ 지속됩니다 ^^근데 봄이 오면 다시  

촛불을  드는 건가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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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자인 왈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한국전 참전용사로 세상 모든 일이 마땅찮다. 아내의 장례식에 온  두 아들과 손녀도 마땅찮고 양로원 보내려는  아들 내외를 생일날에 쫒아버린다 .이미 늙어버린 코왈스키는 그를 닮은 늙은 개 데이지와 함께 흐멍족 이민자들과 흐멍족 양아치들이 가득한  동네에서 묵묵히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코왈스키는 양아치들이 이웃의 흐멍족 소년 타오를 위협하는 것을 구해준다. 경찰에 신고하는 대신 산탄총과  저음의 음산한 목소리로 놈들을 코왈스키는   타오 + 슈 가족과 친분을 쌓는다 . 그러다 타오와 슈가 놈들에게 해고지를 당하자 가장 멋진 방법으로 복수를 한다 .

 

나는 코왈스키가 더티해리처럼 다 쏘아죽이는 복수를 하기를 기대했다 . 나는 늘 사악한 놈들은 다 쏴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 (지금도 그렇다 ^^:)그런데 코왈스키는 한국전에서  17 세 소년병 13 명쯤을  명령에 따라 죽인 거에 평생 부담을 안고 살았다 . 그래서 흐멍족 소년들을 쏘아죽이진 않는다 . 그러나 멋진 복수를 한다 . 죽이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한 코왈스키...아니, 클린트 이스트우드 ......나는 지붕달린 다리 위에서 늦연애를 하는 영화 그거 뭐지 ? 거기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늙어서 이제는  쓰임새가 없을 거라 예단했다 . 그러나 이 영화를 보니 늙어도 그 나름대로 알맞은 배역으로 쓸모가 있고 사람이 늙으면 지혜로어 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 우리나라 우익들은 왜 지혜로워지지 못하고 음흉하거나 망령만 나는 걸까 ? 내가 알기로 클린트이스트우드는 평생 공화당원이었고 보수주의자로 산 사람인데  이런 상식있는 보수가 제 목소리를 내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텐데 다 극우꼴보수만 설치니 ....아으, 다롱디리....

 

마지막에 코왈스키는 예수처럼 보였다 . 아니, 그는 예수가 된 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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