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정권과 이랜드 자본의 광란을 심판할 것이다!

 
오늘 아침, 이랜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이 무참히 짓밟혔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요구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하루10시간을 서서 일하고 월80만원 받는 일자리나마 보장해달라는,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요구일 뿐이다.
파업투쟁은 노동자의 생존권 수호를 위한 적법한 권리이며, 사업장 점거는 파업투쟁 승리를 보장하는 유일한 투쟁수단이다. 점거투쟁이 진행되던 지난 20일간 이랜드 조합원들은 어떠한 폭력행위나 파괴행위도 없었으며, 경찰의 야만적 봉쇄조치에도 불구하고 사업장 내에 상품들을 철저히 보존했다. 그럼에도 노무현 정권과 이랜드 자본은 폭력경찰과 용역깡패를 동원하여 출입을 봉쇄하고 무자비한 고사작전을 시도했다. 끝까지 평화적 해결을 바라며 교섭에 나선 노조에 대해, 유일한 투쟁수단인 사업장 점거를 풀고 백기 투항하라는 요구만 되풀이했다. 결국 오늘에 이르러서는 노동자들의 처절한 애원에 대해 폭력진압으로 답한 것이다.
오늘의 사태는 국가권력의 본질이 자본의 대리인임을 재차 확인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노동자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마저도 무시하고 악질자본 박성수 일당의 앞잡이 노릇을 함으로써, 정권 말기적 광란을 드러내고 있다.

정권과 자본은 그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에 대해 정규직 이기주의로 매도하며 비정규직을 위해 정규직이 양보해야한다고 주장해왔다. 지금의 이랜드 투쟁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하나 된 투쟁이다. 이랜드 투쟁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탄압은 그들이 떠들어온 정규직 양보론이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에 다름 아님을 스스로 폭로한 것이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은 단지 이랜드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년11월에 날치기 통과된 비정규직 악법이 지난 7월1일부터 시행되면서, 비정규직 양산과 대량실직은 예고된 일이었다. 이제는 누구나 언제라도 비정규직이 될 수 있고 실직자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이랜드 투쟁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형에 직면하여 비정규직 투쟁의 성패를 가를 분수령인 것이다. 870만 비정규직뿐만 아니라 노동자․민중의 생존이 걸린 한판 싸움인 것이다.
이 투쟁은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될 싸움이다. 이랜드 조합원들은 새로운 구심점을 형성하여 지속적으로 투쟁할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조직의 명운을 걸고 이 싸움을 철저히 지원하고 보위해야한다. 그 과정에서 고용보장, 손배 및 고소고발 취하 등 최소한의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는 한에는 어떠한 타협도 있어서는 안 된다.

[전진]은 이랜드 노동자들의 투쟁에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우리는 이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여 노무현 정권과 이랜드 자본의 광란을 심판할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의 생존과 노동계급운동의 미래가 걸려있는 비정규직 투쟁에 승리의 길을 열어갈 것이다.

 
2007년 7월 20일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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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하지 ?/우석훈



안티 조선 시절에 내가 열심히 뭘 한 건 없다. 87년 이후로 조선일보를 거의 안 봤더니, 오히려 그 신문에 뭐가 실리고 어떤 어조가 있는지 사실 잘 모른다. 너무 오래 안보다 보니 그게 왜 문제가 있는지도 잘 모르게 되었다.

개인적인 신문과의 관계만을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내가 초짜 시절에... 아마 97년인가? 처음 나에게 와서 인터뷰했던 신문이 중앙일보였다. 그리고 다음날... 산자부 담당관에게 새벽부터 끌려가 아직 나이도 어린데 죽고 싶냐는 투의 얘기를 들었다. 물론 나는 콧방구도 안 꼈다. 다만 나를 불렀던 담당관이 아주 나이 많은 주사 아저씨라서 나이에 대한 예우를 해드렸을 뿐이다. 하여간 그 시절에는 신문에 정부를 불편하게 하면, 박사고 뭐고 당장 불려가서 초죽음이 되도록 잔소리를 듣고 와야 했었는데, 나같이 웃기지 말라고 버티면 사실 서로 별 수 없다.

그 시절에는 문화일보를 많이 활용했다. 음, 내가 현대에 있었으니까 당연했다.

가장 오랫동안 내가 기사를 제공했던 곳은 중앙일보였는데, 별 다른 이유가 아니라 환경 대기자라는 분이 새만금이나 이런 것에 대한 기사들에 관심이 많았고... 비슷한 이유로 가장 최근까지 같이 작업했던 곳이 문화일보이다. 새만금이나 골프장 같은 얘기 나오면 아무도 안 다뤄준다. 한겨레? 그 시절에는 똑같았다. 개그우먼 한 명을 데려다가 골프 아카데미인지 그런 거 하면서 열심히 골프 광고할 때,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정말이지 나도 피눈물을 흘렸었다. 그 시절에 골프가 환경적으로 문제 있다고 받아준 유일한 신문이 문화일보였다 (KBS와 MBC 피디들이 몇 번 골프장의 환경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서 아직도 개인적으로 고마움을 가지고 있는 분이 몇 분 계시다.)

문화일보에는 신문사 높은 분한테 직접 부탁을 받아서 기고도 몇 번 했고, 내가 쓴 기후변화협약에 대한 주장들은 대부분 문화일보 지면을 통해서 나갔다.

동아일보에는 서평을 몇 번 썼다. 5~6년 전 생태경제학 관련된 책들에 그나마 관심을 표시하고 서평이라도 실어준 곳이라서 종종 글을 보내게 된다.

2년 전인가? 신동아에 기고하고, 여성동아, 주간동아, 이런데 줄줄이 내 사진이 나간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신동아에 기고한 적이 있다. 하긴 그 시절에는 내가 뭘 잘 몰라서... 우리나라에 나오는 여성지 중에서 어지간한 데에서는 다 한 번씩 취재를 했었다 (그랬음에도 <음식국부론>은 1쇄를 결국 못 털었다... 이제는 인터뷰를 안한다는 삶의 작은 원칙 하나가 그 때 섰다.)

서울신문에는 1년 반이나 칼럼을 썼고, 한겨레에는 워낙 많이 써서... 새삼 생각할 것은 없을 것 같고, 이 두 신문을 제외하면 내 글이 가장 많이 실린 신문이 어디일까?

조선일보다. 내가 월급쟁이 시절에 높은 분들의 일종의 '고스트 라이터' 역할을 했던 셈인데, 처음에는 사장이나 그런 사람들이 비서실 통해서 "써라"하고 오니까 끽소리도 못했는데, 나중에는 나와는 무관한 관계에 있는 고위 공직자들의 칼럼도 대신 써주게 되는 약간 서글픈 상황이 되었었다... 월급쟁이 박사, 힘 없다. 쓰라면 쓰고, 욕하면 욕하는 대로 먹고... 하여간 대빠 힘쎈 사람들 글이 조선일보에 많이 실렸고, 그래서 조선일보에 사실 기고를 많이 하기는 했다 ^^... 나의 서럽던 월급쟁이 시절의 후일담이다. 요즘도 그런가? 높은 사람 중에서는 직접 쓰는 사람들이 많이 늘은 것으로 알고 있다.

올해 조선일보에 글을 써달라는 부탁이 돌고 돌아서 두 번이 왔었는데, 두 번 다 안 썼다. 물론 아주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안 썼다. 괜히 썼다가 내 주변 사람들한테 몰매 맞고 약값이 더 많이 들어갈 것이라는 아주 현실적인 이유가 있고, 어차피 내 책이나 혹은 시민단체에서 같이 진행하는 프로그램들에 대해서는 서평은 물론 일절 소개를 안할 것인데, 내막도 잘 모르고, "어이 조선일보 필자, 힘 좀 써보시지..."라고 하는 쫑코를 감당하기가 무섭다. 그런 게 연관된 현실적인 이유이다.

그렇다면 그런 쫑코가 사라지면 쓸 것인가? 물론 안 쓴다. 세 번째 현실적인 이유는... 아내가 조선일보에 글 쓰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아주 치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내 주위에 조선일보 필자라는 이유만으로 교수가 된 사람이 몇 명 있어서, 조선일보 필자에 대해서 아주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아마 내가 조선일보에 기명으로 글을 쓰면... 집에서 쫓겨날 거다. 큰 일 난다. 이 나이에 쫓겨나면 정말 대책 안 생긴다.

최근 시민단체 일각에서 조선일보에 기고를 해야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논의가 조심스럽게 있다. 현실적으로 조선일보가 망하지는않을 거고, 조선일보가 망했을 때에는 아마 새로 창간되는 시사저널 정도 제외하고 한겨레 등등은 이미 망했을 거다... 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좀 있다. 조선일보는 안 망한다. 지금도 시장점유율 1등에 수익률 1등이다. 객관적인 조건으로는 다른데 다 망하면 그 다음에 망할 회사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좌파들이 전부 철수하고 나니까 국민들이 가장 많이 보는 조선일보가 오히려 더 극우파 일색으로 변했는데, 그 사람들에게도 세상은 꼭 그렇게 돌아가는 것만은 아니냐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조심스러운 논의가 일각에 있다.

기원을 따져보면, 사실 조선일보와 좌파들이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 계기가... 아마도 김지하 선생이 "죽음의 굿판"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이 사건은 87년보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흐름을 바꾸고 지금의 모양새를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좋으나 싫으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조선일보가 직간접적으로 기획해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댓가는 조선일보에게도 컸던 것 같다. 10년 간 그들은 정권을 잃었다...

조선일보가 쎈 건 맞는데, 정론지는 아닌 것 같다. 정론이라고 하기에는 분석의 깊이가 너무 얕고, 또 이데올로기 편향이 너무 강하다. 내가 이 신문을 불신하는 건, 사실 이데올로기라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너무 얄팍해서 그렇다. 농업, 환경, 생태, 그리고 기업, 산업, 여기에 문화... 이 정도가 내가 약간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야인데, 이런 분야의 조선일보 기사들은 대부분 초보들이 저지르는 시각의 오류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조선일보에서 정치면을 제외하면 특히 문화면이나 경제면이 우수하다고 하지만, 내 생각은 정반대다. 정치면이야 자기들이 그렇게 하겠다는 거니까 오히려 뉴스의 가치가 있는데, 다른 분야는 오히려 분석 수준이 떨어져서... 그야말로 속보이는 날탕 기사들이 많다. 물론 한겨레도 그런 날탕이 많다. 결국 정론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어차피 그넘이 그넘이기는 하다.

자, 처음으로 돌아와보자. 조선일보에 글 썼다가 영 이미지 구긴 사람들도 역대로 한 리스트가 나온다. 김지하가 그랬고, 문부식이 그랬고, 아직은 그런대로 좀 버티지만 김호기가 그렇고...

난 개인적으로 이 이름 뒤에 내 이름을 보태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지만, 조선일보를 보는 나머지 국민들과 영 대화도 안하고 심통난 사람처럼 좌파들이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은 생각보다 쫙 갈라서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나는 안 쓰겠다는 말과 너도 쓰지 말라는 말은 조금 다르다.

물론 공개된 토론에서 이런 논의가 시작되면 결론은 집단적으로 대화하고, 시스템으로 움직이자라고 결의가 나올 확률이 많지만, 그거야 처음에 잠깐 해보는 얘기이고 결국에는 곧 개인이 판단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나는 써도 되고, 안 써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거야 자신의 소신과 생각에 따라서 판단할 일이다. 좁게 보면 조선일보에 글 쓰는 것이 원래 영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쓰지 말라고 해도 쓰게 될 것이고, 그게 별로 명예롭지 않다고 하는 사람들은... 원래 좌파들이 가난하니까 원고료가 "상당하다"는 수준이 되면 고민을 좀 하다가 결국 쓰게 될 것이다. 사실 개인의 선택에 관한 문제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조선일보의 기고의 경우에는 꼭 짚어봐야 하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대체적으로 신문사에서 원칙적으로 안 한다고 하지만 약간의 가필이나 삭제와 같은 첨삭을 한다. 대부분의 경우는 교정교열과 관련된 기술적인 얘기지만 문장 하나로 내용의 뉘앙스를 바꾸는 첨삭을 좀 한다. 한겨레에서도... 내가 한겨레 내부 비판한 문장을 편집국에서 지웠던 적이 있다. 이건 좌파나 우파나, 그런 문제는 아니고, 글이 사회로 나오는 중간장치, 그 매체의 운용원칙에 관한 원칙의 문제이다.

아주 유명한 저자들 몇 사람이 사석에서 나와 얘기를 하다가 조선일보에 기고했다가 항의를 하고, 정정보도 해달라는데, 팩스로 "미안해요"라고 찍 날라왔던 사연들을 얘기해준 적이 있다.

평소에 보도자료를 놓고도 살짝살짝 행간에 손을 대는 솜씨로 봐서는 외부 기고에 대해서도 아주 유연하게 결론을 전도시키는 일들을 아마도 살짝살짝 하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지우기는 어렵다.

어쨌든 조심스러운 논의이기는 하지만,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문제가 요즘 시민단체나 좌파들 내부에서 질문으로 제기되는 중이다.

핵심을 딱 짚자면, 결국 이렇게 된 상황의 한 가운데에는 안티조선 운동으로 마치 자신들이 무슨 운동권으로 철학을 가지고 살아왔다는 둥, 그야말로 완전히 신분세탁을 한 우스운 분들이 좀 계시는데, 이 분들이 노무현 시절에 꼭 일제 총독부 시절에 한국인 괴롭혔던 일본인 앞잽이 - 그러니까 조선분들이라는 뜻이다 - 마냥 온갖 패악질을 하고 다니기도 하셨다.

안티조선 출신, 총독부 앞잽이, 랭킹 탑 파이브... 팍 실명을 써버리고 싶은 충동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내가 참는다." 이 사람들, 현실에서는 초강력 울트파 파워를 가지신 분들이라서, 나같은 잔챙이는 눈 밖에 났다가는 당장 다음 달 밥 먹기도 어려워진다.

현실이 조선일보 보다 안티조선을 포장지로 사용한 청와대를 비롯해 정부의 온갖 고위급 위원회에서 패악질을 일삼았던 분들이 더 나쁘다. 조선일보는 자기들 나름대로 계통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 뮤턴트들은 계통도 없고, 그야말로 어디 숨었나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두더쥐 잡기랑 비슷하다.

운동권에서는 그들에게 "물 흐린다'라는 표현을 전문 용어처럼 쓴다.

이라크 파병할 때 파병해야 경제가 산다, 한미 FTA 때, 정권을 뒤에서 흔들지 마라, 골프장 때, 이제는 우리도 민중의 수준을 좀 높이자, 기업도시 할 때, 이런 숫제 평생을 기업에서 살아온 사람들처럼 꼭 대기업 홍보실 과장 같은 소리를 하면서 염치도 없었고... 그 초절정은 황우석 사태 때였다... 그 시절 이 안티조선을 포장지로 사용했던 분들이 어두운 곳에서 맹활약들 하셨다. 아니다, 정말 절정은 2006년 월드컵 때였다. 제발 축구 좀 쇼비니즘으로 몰고 가지 말라는 일부의 항의에... 너희들이 정치를 아느냐? 정말 볼만했다.

지난 4년간 패악질의 정도로 치자면 조선일보가 아니라 안티조선을 외피로 두른 분들이 몇 배로 컸다. 이건 진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선일보에 기고하는 것... 에 대해서 쉽게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은... 결국 기고를 하기로 집단적으로 결정을 하면, 또 역시 조선일보에 먼저 찾아가서 이런 기획을 해보자는 둥, 이런 시리즈를 열어보자는 둥, 아마 그분들이 제일 먼저 쓰게 될 것 같다는 우울한 예감이...

<닥터 지바고>의 진짜 주인공은 유리 지바고나 라라가 아니라 코마로프스키이다. 자본주의 시절에도 잘 먹고 잘 살았던 넘이 결국 사회주의 시절에도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이건 체계나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라 "나쁜 넘 피는 따로 있다"는 아주 숭고한 교훈이 담긴 이 소설의 코마로프스키를 연상시키는 사람이 지난 4년간 아마 열 분 정도는 맹활약하신 걸로 알고 있다.

사실 조선일보에 대해서 우리는 더 많이 생각해보고, 더 많이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은 맞는데, 그보다 더 많이 안티조선이 어떻게 결국 패악질하는 코마로프스키류의 인간들의 놀이터로 전락해버리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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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에서는

노동자가 농성을 하면

문을 산소용접해버린다.

이럴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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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닉네임을뭐라하지 > [우리시대의 논리] / 후마니타스

 

서점 근로 초기에 출판사 후마니타스에서 영업하시는 분이 찾아온 적이 있다. 첫 눈에도 신입, 같아 보이던 그 분은 아니나 다를까 "출판사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다고 말하며 내게 명함을 건네주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당시에 그가 온 이유는 최장집 교수 외 여러 분들이 쓴 글을 모은 [위기의 노동]에 띠지를 두르기 위해서였다. 얼마 되지 않는 책들에 띠지를 두르며 그와 나는 이런 저런, 이를테면 -

"후마니타스 책 좀 잘 팔리나요?"
"후마니타스의 의미는 말이죠..."

- 등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짧은 만남 후, 그는 다시 한번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최근 후마니타스에서 새로 발간된 책을 소개하려니 예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서두가 길었는데, 이젠 본격적으로 책을 소개해 보아야겠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책이라기보단 <우리시대의 논리>라는 타이틀이다.


우선, 책 뒷날개에 있는 글을 참고하면, <우리시대의 논리>가 갖고 있는 의의는 -

"한국 사회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대면하고 있는 저자들의 작업을 모으고 있다.
사건을 바라보는 독창적인 해석, 우리시대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기록은 물론,
현실의 표면에서 보이지 않는 심층을 발굴하려는 시도를 담고자 한다.
이는 '내용 없는 수사학'에 머물고 있는 이 시대 글쓰기 문화를 대신해,
'칼럼·에세이'문화의 새로운 전범을 만들려는 하나의 시도이다.
'우리시대의 논리'를 통해, 우리는 주제를 풀어내는 빼어난 논리와 사회를 보는 비파적인 시각 모두를 경험할 수 있다."

- 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현재 손석춘의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과 하종강의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 발간되어 있다. 근간 예정으로 [환멸의 문학, 배반의 민주주의]와 최장집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것]이 있다.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마음에 들었던 건 우선, 책의 판형과 분량 - 400페이지가 조금 못 되는 어느 정도의 묵직함과 가장 선호하는 책 싸이즈(A5신) - 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책의 크기. 게다가 아날로그적이면서도 디지털적인데다 포스트모던적(?)이기까지 한 표지 디자인도 눈길을 끈다. 

 글의 질적 우수함이야, 각 제 분야에서 활발히 움직이며 글을 쓰는 필자들이라 굳이 의심할 바 없겠다.


손석춘은,

"칼럼 한 편 한 편을 쓸 때마다 저자는 그것이 독자에게 보내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다. 독자에 드리는 서툰 사랑의 편지, 연서였다."

라고 말하며,

"그럼에도 아직은 붓을 놓을 때가 아님을 스스로 확인하고 있다. 독자에게 드리는 저자의 사랑을 책으로 묶는 데도 동의했다. 동시대를 기록하는 역사가인 언론인의 글은 어차피 역사가 최종 평가할 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를 기록한 저자의 '문집'도 예외는 아닐 터이다. 그 평가를 겸허하게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리고 살아 있는 동시대인들 앞에 심판을 받는 마음으로 책을 펴낸다. 중년의 언론인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분께 띄운 서툰 사랑의 고백에 부디 눈 흘기지 말기 바란다."

고 책머리(여는 말)에서 당부하고 있다.


하종강은,

"혹시 우리 사회 노동자들의 권리는 정상회되기도 전에, 흔히 말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이르기도 전에 다시 뒷걸음질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런 이야기들을 사람들에게 하고 싶었습니다."

라고 말하며,

"그렇게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됐습니다. /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부끄러운 많은 것들을 '자연스러움'과 '담백함'이라는 단어 뒤에 감춥니다."

고 글의 서두(들어가는 글)에서 고백하고 있다.


사실 칼럼들을 모아 펴낸 책은 독자로선, (오로지 그 저자를 보고 읽는 책이라면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의 위험성을 감내해야 한다. 진중권이 [시칠리아의 암소] 들어가는 말에 쓴,

"이 글들은 대부분 그때그떄 청탁을 받아서 쓴 것이다. 그 중에는 구미에 당겨서 쓴 것도 있지만, 어느 것은 오로지 청탁이 들어왔기 때문에 쓴 것도 있고, 심지어 쓰고 싶지 않은데 청탁을 거부할 만큼 모질지 못해서 쓴 것도 있다. 원고를 쓰는 게 실은 얼마나 괴로운지 아는가? 이런 글을 쓰다 보면 도대체 일관된 사고를 할 수가 없다. 매번 주제가 달라지고, 그러다 보면 정작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한 일관된 사유의 선이 번번이 끊어지면서 머릿속이 온통 포탄을 맞은 것처럼 파편이 되어 산만하게 흩어진다."

라는 언급에서도 알 수 있듯, 칼럼 모음집은 통일된 하나의 책이라는 측면으로 봤을 때, 그 농밀함이 조금 옅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하종강은 앞서 '들어가는 말'에서,

"제가 너무 바빠서 도저히 원고를 정리할 시간이 없다고 했더니 자기들이 내 글을 모아서 원고를 마련하는 수고를 감당하겠노라고 …. 벌써 책 한 권 분량의 글들을 모아서 직원들이 모두 돌아가며 읽었노라며 그럴 듯하게 제본된 책을 한 궈 내밀었습니다. / 이야기를 나눈 시간은 30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80년대의 헌신성'이 느껴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도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이 있나' 싶었습니다."

라고 하며, 후마니타스 출판사 직원들에 대해 호감이 가득 실린 이야기를 하였다.


(여기서 '저자'라는 개념에 대해 되새겨보고 싶으나 곁가지가 너무 커질 것 같고, 어쨌거나 요는,)


믿음직한 출판사에서 나온, 굉장히 마음에 드는 책이고, <우리시대의 논리>라는 타이틀로 곧 나올 다른 책 또한 무척이나 기대된다는 소리.

(장황한 듯 보이지만, 결국엔 이런 간명한(허무한)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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