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한 공기의 사랑이다. 그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한 공기의 사랑을 할 수 있느냐가 문제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모든 사랑은 정말 사랑했다!”라는 나의 정신 승리는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온갖 고통을 가하는 끔찍한 일이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면 세 공기든 네 공기든 한 가마든 먹어야 한다고 그를 압박한다. 세 공기, 네 공기의 밥을 지은 자신의 수고를 내세우면서 말이다. “당신을 위한 나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말아줘. 그러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어느새 그의 배고픔과 포만감보다 나의 수고가 핵심이 되고 만다. 한 공기를 넘어서는 사랑은 이제 사랑의 궤도를 이탈해 공회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애지중지(愛之重之)하지 않게 되니까. 애지중지하는 마음은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한마디로 그를 내 뜻대로 부리지 않겠다는 마음이다.


(28)

과거 독재 시절, 시대에 걸맞게 학교에는 사랑의 매라는 것이 있었다. 학생들을 미워해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때린다는 체벌의 논리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선생님이 학생들의 종아리에 매를 대는 순간 아이들의 고통이 느껴진다면, 과연 선생님은 계속 매를 댈 수 있을까. 한 대 두 대 때리면 때릴수록 아이들의 아픔이 느껴진다면, 어떻게 아이들을 계속 때릴 수 있을까? 아내에 대한 사랑, 남편에 대한 사랑, 아이에 대한 사랑, 후배에 대한 사랑 등 타인에 대한 사랑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다시 말해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기 때문이다.


(31)

사실 모든 생명체의 고통을 느끼고 그것들을 사랑한다면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정확히 말하면 먹기가 힘들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자기 자신을 죽이게 된다. 아무것도 먹지 않으면 우리는 배고픔의 고통을 견디다 굶어 죽을 테니 말이다. 식물도, 토끼도, 사슴도, 독수리도, 늑대도, 그리도 인간도 생명체다. 식물을 살리려고 토끼를 죽여서도 안 된다. 토끼를 살리려고 늑대나 인간을 죽여서도 안 된다. 엄청난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사슴과 늑대가 동시에 배고픔의 고통을 토로한다면 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난감한 일이다. 어쩌면 이 딜레마, 이 난감함, 이 애절함, 그리고 이 간절함 속에서 산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일체개고의 진정한 의미, 혹은 고통의 기원이 아닐까.


(34-35)

내가 옆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은 최소한 그 사람이 나 때문에 더 힘들지 않게 하는 일이다. 존재한다는 이유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가중시킬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메를로-퐁티의 최소 폭력의 논리가 고통에 대한 감수성에 기초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세계가 모두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통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고통을 완화시킬 수는 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우리는 걷지 힘든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나의 고통과 타자의 고통을 동시에 최소화할 수 있는 어떤 균형을 매번 찾아내야만 하는 길, 균형을 찾는다 해도 그것이 진정한 균형인지 여전히 의문이 남는 그런 개운치 않은 길 말이다.


(41)

진짜 사랑이 열정적인, 그리고 자발적인 노동을 낳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배부르면, 사랑하는 사람이 지인과 행복한 담소를 나누면,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하면, 사랑하는 사람이 힘차게 잘 걸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명랑하면, 우리는 고맙기만 하다. 진짜 사랑할 때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상대적으로 약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누군가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이 완화되었는지 여부뿐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질투심이 강해질수록 우리의 사랑은 진짜가 아니라 가짜가 되어간다는 사실을.


(66-67)

놀이의 삶에는 근사한 표어가 주어진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표어이다. 반면 노동의 삶에도 그에 어울리는 표어가 있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라는 표어다. 이는 연애 시절과 결혼 생활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 연애 시절에 우리는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상대방에게 몰입한다. 가장 좋은 음식을 사주고 값비싼 선물도 아끼지 않는다. 오늘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지 않으면 내일은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하염없이 미루기 쉽다. 대출을 갚아야 하고 아이들 양육비도 생각해야 하니, 맛있는 스파게티나 여행 등 오늘의 행복을 속절없이 미루게 된다. 오늘이 수단이 되고 내일이 목적이 되는 순간, 오늘은 수단이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83-84)

이렇게 현재의 삶을 수단으로 만들고 내일의 삶을 목적으로 만들면, 오늘의 행복은 계속 내일로 미루어지고 만다. 이런 식으로 반복하다 삶의 끝자락에 이르게 되면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행복한 적이 없다는 후회가 밀려올 것이다. 물론 이런 후회는 금방 사라질 수도 있다. 죽음 이후의 피안이나 이데아 세계, 혹은 기독교의 천국이 바로 눈앞에 있다고 마지막 기대를 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미래의 행복을 위해 지금은 행복하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생각, “오늘보다 내일이 더 중요하다는 기만적인 생각은 충만하고 아름다운 현재의 삶을 좀먹는 독약과도 같아.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은 영원을 꿈꾸면서 무상을 직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헛된 사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114-115)

모든 존재는 영원하거나 불멸하지도 않고 동시에 순간적이거나 찰나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이것이 제법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실상(實相)’이다. 결국 나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영원과 불멸이라는 한 극단과 순간과 찰나라는 또 다른 극단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바로 이것이 싯다르타가 말한 중도(中道)의 의미다. <가전연경>에서 싯다르타는 산스크리트어로는 카차야나, 한문으로는 가전연(迦旃延)이라는 이름의 제자에게 말한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 카차야나야! 이것은 하나의 극단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카차야나야! 이것도 또한 하나의 극단이다. 카차야나야! 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여래는 중도로써 하나의 가르침을 설한다!” 모든 것은 존재한다는 극단은 모든 존재에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자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불교에서는 이런 입장을 상견(常見)’이라고 부른다.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또 다른 극단은 모든 존재가 어떤 연속성도 없이 끝없이 변화한다는 입장이다. ‘단견(斷見)’이라고 불리는 입장이다.


(130)

먼저 영원할 듯한 것에서 작은 변화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영원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가 그 대상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일 가능성은 줄어드는 말이다. 아내와의 관계나 남편과의 관계, 혹은 친구와의 관계가 예전 같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려고 노력하라. 돈독하던 관계에서도 조금씩 균열이 생기는 것이 보일 수도 있다. 어제와 다름없이 보이는 부모님, 아내, 남편, 아이의 얼굴에서 변화를 읽으려고 노력하라. 작은 주름 하나, 깊은 한숨 하나, 작은 새치 하나, 작은 어둠 하나를 찾아낼 수도 있으니 말이다.


(151-152)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남자의 사례를 통해 번뇌망집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카페에서 스마트폰을 발견하지 못하자 그의 마음은 복잡하기만 하다. ‘스마트폰을 카페 의자에 둔 것이 맞을까?’ ‘스마트폰을 카페 점원이나 손님들 중 누군가 가져간 것은 아닐까?’ 등등, 번뇌란 이런 것이다. 스마트폰의 없음을 경험하자, 그의 뇌리에는 사라진 스마트폰이 떠나지를 않는다. 그는 허탈해하며 카페에서 나와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미 없어진 스마트폰이야. 없는 건 없는 거지. 잊자!’ 하지만 스마트폰의 없음을 받아들이려 할수록 없어진 스마트폰에 대한 기억은 더 강해질 뿐이다. ‘잊자, 잊아라는 생각이 오히려 사라진 스마트폰을 떠오르게 하니 말이다. 바로 망집이다.


(176)

성숙을 확인할 수 있는 시금석은 단순하다. 성숙하면 자신이 강해지고 자신이 많은 것을 가지게 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을 아끼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아파하게 된다. 간혹 아이들은 엄마가 아파서 밥을 못 해주면 짜증을 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는 엄마가 아플 때 혼자 라면을 끓여 먹는다. 바로 이때 아이는 나이와 상관없이 성숙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의 마음이 타인의 아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고요한 물처럼 작동한 것이다. 비록 아이지만, 이 순간 아이는 부처다. 자신의 배고픔이 아니라 엄마의 아픔에 사무쳐 있기 때문이다.


(197)

조금 도식적일 수 있지만 편의상 정리해보자면, 생성을 설명하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로 다양한 연들이 존재를 만든다는 연기의 논리’, 둘째로 하나의 원인과 많은 조건들이라는 인연의 논리’, 그리고 셋째로 하나의 원인과 하나의 결과라는 인과의 논리가 그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인과의 논리는 인연의 논리로부터, 혹은 저 멀리 연기의 논리로부터 단순화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가지 논리는 지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어느 논리에 따라 살아가느냐에 의해 우리의 삶은, 우리의 미래는,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육아나 교육의 사례로 세 가지 논리의 상이한 효과를 생각해보자.


(216)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거나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세상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만성화된 슬픔, 고질적인 우울 속에 갇히게 된다. 행복과 기쁨이 더 이상 없을 것만 같다. 그러나 앞으로 앞으로삶을 밀어붙이면 알게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람이 부재하기에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하나의 인연이 끝나야 다른 사람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처음에는 이별이 절벽으로 떨어지는 수평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앞으로 앞으로걸어나가면, “앞으로 앞으로배를 수평선 쪽으로 밀어붙이면, “온 세상 어린이를 다 만나새로운 인연을 맺을 수 있다.


(227-228)

매달린 절벽은 사실 놓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놓으면 죽을 것 같다고 믿는 집착의 대상일 뿐이다. ‘매달린 절벽은 사람마다 다르다. 젊음일 수도 있고, 건강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집일 수도 있고, 아이일 수도 있다. 아니면 사랑일 수도 있고, 우정일 수도 있고, 타인의 인정일 수도 있다. 아이를 잡지 않으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사람에게 아이에게 그렇게 집착하지 말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그렇게 권고하는 사람도 돌아보면 돈이나 건강을 매달린 절벽처럼 붙잡고 집착할 수도 있다. 또한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사람의 손을 억지로 떼어내려 해서도 안 된다. 그럴수록 그 사람은 더 억세게, 저 집요하게 매달린 절벽을 잡으려 할 테니 말이다.


(241)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1947~) <냉소적 이성 비판>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성숙한 능력은 예스의 유일하게 타당한 배경이 되며, 이 둘을 통해 진정한 자유의 윤관이 비로소 뚜렷해진다.” “예스가 힘이 있으려면 라고 외쳤던 경험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스는 굴종의 표현이 아니라 자유의 표현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예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244)

멈출 수 있어야, 혹은 그만둘 수 있어야 자유다. 멈출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고, 관계를 단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자기 뜻대로 관계를 만들 수 있다. “!”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멈출 수 있어야 하고, 그만둘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럴 때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당당해지고, 그만큼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된다. 멈출 수 있는 자유를 가슴에 품을 때, 그가 누구이든 상대방은 우리를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가슴에 사표를 품고 있는 직원에게 사장이 어떻게 갑질을 할 수 있을까? 캐리어를 들고 집을 떠날 수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어떻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학위쯤이야 우습게 여기는 학생에게 교수가 어떻게 사역을 시킬 수 있을까?


(249)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들면 우리는 주인으로서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몸과 마음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지면 주인이 아니라 노예의 삶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301)

무엇이든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이다. 어쨌든 애지중지하는 대상은 그 존재만으로 우리 삶을 기쁨으로 물들이고, 우리 삶에 의미를 제공하며,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한다. 어떤 것도 아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봐라. 삶은 짙은 잿빛으로 우울하게 변할 것이고, 그러한 삶을 사는 우리는 심각한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고 말 것이다. 문제는 애지중지하는 대상이 인간일 때 발생한다. 타인을 아낀다는 것은 그를 대신해 그의 수고를, 그의 고통을, 그리고 그의 노동을 감내하며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짐을 짊어지고 심지어 그 사람을 업으면서도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끼는 사람을 최소한 한 명 가진 셈이다.


(303)

아끼는 사람은 그 존재만으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던 소중한 사람이다. 아끼는 사람이 무언가 해주기를 원하는 순간, 아낌의 관계는 무너지고 그 자리에 너저분한 거래 관계가 들어선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도 이만큼 해야 하는 것 아니야?” 이제 상대방이 나의 애지중지하는 모든 행동을 일종의 부채감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아낌의 관계는 막장을 향해 치닫고 만다. 이런 비극을 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아끼는 사람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처럼 보는 연습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밥을 해달라고, 쓰레기 봉투를 버려달라고, 청소를 해달라고 할 수도 없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아듣는다 해도 쫑긋한 귀와 해맑은 눈, 그리고 네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327)

우리 각자에게 아끼는 대상이 어머니일 수도, 아버지일 수도, 아내일 수도, 남편일 수도, 아일 수도, 친구일 수도, 반려견일 수도, 반려묘일 수도, 아니면 화초일 수도 있다. 아끼는 대상이 무엇이든 우리는 그것의 행복에 있어 한 공기의 연일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농부의 물꼬 트기처럼 이 한 공기의 연을 우리가 채우지 못하면, 아끼는 사람의 삶은 불행에 빠진다. 그러니 좋은 공기, 맛있는 음식, 쾌적한 잠자리, 따뜻한 태양, 싱그러운 바람, 아름다운 음악, 근사한 영화, 멋진 식당, 의사와 간호사, 친구들 등등이 아끼는 사람에게 건강한 연이 되어줄 때, 우리는 충분히 쉬어야 한다. 잘 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잠도 잘 자야 한다. 우리게는 한 공기의 연을 채워야 할 때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333)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아이를 아끼기 때문에 노심초사하며 아이가 잘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영어 학원에 보내고 태권도를 가르치고 수영 강습도 받게 하고 피아노도 가르치고 방학마다 여행을 가고 캠핑도 간다. 문제는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해야만 한다고 자신이 생각하는 것’, 혹은 언젠가 아이가 원할 수도 있다고 자신이 믿는 것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는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웃음과 미소를 점점 잃어가게 될 것이다. 반대로 간혹 우리는 아이를 방임해서 키워요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엄마도 있다. 김을 매지 않아 잡초들에 둘러싸인 벼처럼, 아이는 경쟁적 교육 환경, 왕따를 시키는 차별적 문화, 자본주의적 소비문화에 둘러싸여 시름시름 앓게 될 것이다. 결국 엄마는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되 지나치게 관여해서는 안 되고, 관여하지 않되 완전히 잊어서는 안 된다. 아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완전히 알 때까지, 혹은 엄마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알 때까지, ‘조장사이 혹은 물망물조장사이 그 어딘가를 지키며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끼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342-343)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이만하면이라는 말로 가늠할 수 있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다. 사랑했거나 사랑하지 않았거나, 제대로 살았거나 그러지 못했거나, 행복했거나 행복하지 않았거나, 자유롭거나 자유롭지 않았거나, 이제 이만하면이라는 말을 우리 삶의 사전에서 지우도록 하자.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남들의 시선이나 평가, 재산이나 소비수준과는 무관하게 전적으로 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잘 사랑하려면, 제래도 살려면, 정말 행복하려면, 그리고 자유로우려면, 우리는 이만하면이라는 전체를 붙인 너저분한 자기만족과 정신 승리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사랑도 삶도 행복도 그리고 자유도 아직까지 제대로 영위하지 못했다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이야기하자. 그래야 우리에게는 제대로 사랑하고, 제대로 살아가고, 제대로 행복하고, 제대로 자유로울 수 있는 희망이 생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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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사람의 길 - 下 - 맹자 한글역주 특별보급판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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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김용옥 님의 <맹자 사람의 길 下>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꾸나. < 맹자 사람의 길 上> 이야기하면서 맹자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맹자는 이야기한 것처럼 중국 전국 시대 사람이란다. 너희들이 나중에 학교에서 중국역사를 배우게 되면, 춘추전국시대라는 말을 듣게 될 거야. 많은 나라들이 생기고, 사라지던 혼란의 시기.. 그래서 많은 사상가들과 소위 말하는 영웅들이 출현했던 시기

아빠도 그 시대를 자세히는 몰라. 공원국이라는 분이 그 시대를 11권에 걸쳐 쓴 <춘추전국이야기>라는 책이 있단다. 그 책을 일 년에 한 권씩 읽겠다고 마음 적이 있는데, 3권에서 멈추고 말았어. 문득 김용옥 님의 < 맹자 사람의 길>을 읽다가 그 책을 끝까지 읽었더라면 좀 더 이해를 잘 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단다. <맹자>를 설명하면서 당시 전국 시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오거든나중에라도 다시 <춘추전국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봐야겠구나. 그리고 <맹자>에서 나오는 역사 부분은 잘 모르니까 그냥 흐릿한 눈으로 봐야겠구나. 삶의 가르침에 관한 부분에는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말이야.


1.

<맹자 사람의 길 下>에도 깊이 새겨 두었으면 하는 글들이 많이 있단다. < 맹자 사람의 길 上>의 책에서 발췌를 할 때는 되도록, 김용옥 님의 생각이 담긴 부분을 발췌하려고 했어. 이 책의 지은이는 김용옥 님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 맹자 사람의 길 下>에서는 <맹자> 원문에 나와 있는 좋은 글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더구나. 그래서 <맹자> 원문을 해석한 부분에 대한 발췌가 많았어. <맹자>의 핵심은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지만, 仁과 義란다.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지 않았지만, 맹자가 공자의 제자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그런 사상 때문이 아닌가 싶구나. 그리고 맹자도 스스로 공자를 사숙이라고 했고, 자신이 공자의 적통임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여럿 나온단다. 공자의 仁이라는 것에, 義를 추가하여 발전시킨 것이 맹자의 핵심이라고 아빠는 이해했단다. 仁과의 義의 차이는 ()이란 사람의 마음이요, ()란 사람의 길이다.”라는 문장으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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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한 나라의 최고통치자가 인()하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인()하지 않을 수가 없고,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가 의()로우면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의()롭게 되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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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7~638)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인()이란 사람의 마음이요, ()란 사람의 길이다. 그 길을 버려두고 그곳으로 걸어갈 생각을 하지 않으며,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다시 구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그 얼마나 슬픈 일인가! 사람들이 집에서 기르던 닭이나 개가 없어지는 일이 있으면 부지런히 쏘아다니며 그것을 되찾아오려고 열심이나, 자신의 마음이 사라진 것은 되찾아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학문(學問, 우리가 쓰는 “학문”이라는 말의 한 유래)의 길이란 별것이 아니다. 그 놓아버린 마음(放心)을 되찾아오는 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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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義만 강조한 것은 아니야. 仁과 중요하게 생각하고 仁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있단다. 맹자가 살던 시절이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이다 보니, 仁이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땅을 빼앗는 전쟁을 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지만, 욕심에 눈이 먼 당시 군주들이 그의 말을 들었겠니맹자가 이야기한 것은 오늘날 각 국가의 지도자들도 들어야 할 말 같구나. 특히 여전히 전쟁을 하고, 이웃 나라에 끊임없이 시비를 거는 나라의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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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1)

전쟁에 의존하지 않고 그냥 한 나라의 땅을 빼앗아 다른 나라에 줄 수 있는 역량이 누군가에게 있을 수 있다 해도 그가 진실로 인자(仁者)라고 한다면 그러한 짓은 하지 아니 할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을 죽여서 토지의 확대를 꾀한다는 것이 과연 사람이 할 짓입니까? 군자가 군주를 섬긴다고 하는 것은 그 군주로 하여금 정당한 길을 걸어가도록 인도하는 것을 힘쓰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오직 군주가 인()을 향하여 전력투구하도록 만드는 것밖에 딴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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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왕이 될 수 있도록 왕 옆에 있는 신하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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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4)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오늘날 군주를 잘 섬긴다 하는 자들은 모두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군주를 위하여 토지를 개산하여 조세를 잘 거두어들여 국고를 충실하게 할 수 있도다’. (여기 가장 포인트가 되는 말은 “위군(爲君)”이라는 말이다. “위민(爲民)”이 아닌 군() 개인을 위하여 복무한다는 뜻이다). ~ 진실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위대한 양신(良臣)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옛 성왕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모두 백성을 등쳐먹는 민적(民賊)들이다. 군주가 바른 정도의 도덕을 지향하지 아니하고, ()의 실현에 근본적으로 뜻을 두지 않고 있는데 그런 불선한 군주를 부강하게 만들기를 꾀한다는 것은 곧 폭군 잡놈 걸()을 부강하게 만드는 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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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에 이야기한 것처럼 <맹자>는 맹자가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실어 놓았단다. 그 중에 <맹자 사람의 길 下>에는 만장이라고 하는 맹자의 가장 나이 많은 제자와 나눈 대화도 있단다. 만장이 묻고, 맹자가 답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 만장은 날카로운 질문을 계속 맹자에게 맹자는 더 날카로운 답변을 한단다. 그러면서 맹자의 사상을 정리하는 것이야. 그 옛날에도 사람 사귈 때 어떤 사람을 사귀어야 하는지 궁금했나 보구나. 만장은 친구 사귀는 원칙을 맹자에게 물었단다. 이 때 한 맹자의 답변은 너희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구나. 너희들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사귀게 될 테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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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0~571)

만장이 여쭈어 말하였다: “감히 친구를 사귀는 원칙에 관하여 한 말씀 듣고자 하나이다.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참으로 좋은 질문이로다. 친구 사귀는 데도 중요한 원칙이 있으니, 친구 사귐의 사이에는 장유의 나이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되고, 귀천의 신분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되고, 연줄이나 패거리의식이 끼어들면 아니 된다(沃案 : 천하의 명언이라 할 것이다. 세 번째 “불협형제(不挾兄弟)”를 주희는 해설치 않았고, 조기는 사귀는 사람의 형제 중에 부귀한 인간이 있기 때문에 사귀어서는 아니 된다는 식으로 해석했으나, 그 주제는 이미 앞에서 말한 “귀()” 포함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형제”를 “등이(等夷)”로 보아 같은 한 동아리라는 의식, 타 인간 패거리와는 다르다는 의식, 혹은 대형교회 나가서 형제자매 찾는 연줄의식으로 보았다. 여기 맹자의 언급은 오륜에 얽매여 예의절차에만 충실한 듯이 보이는 동방문화에, 전혀 다른 인간관계(human relationship)가 상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매우 래디컬한 언급이다). 친구를 사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덕()을 벗하는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덕과 실력 이외의 어느 것도 끼어들어서는 아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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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사상 중에 또 대표적인 것 중에 하나 성선설이란다. 순자의 성악설과 함께 학창 시절 때 배운 기억이 있구나. 성선설(性善說)은 사람은 태어날 때 착하게 태어난다는 주장으로, 나중에 자라면서 악한 성품도 갖게 된다는 것이야… <맹자 사람의 길 上>에서 이야기했던 사단도 성선설을 뒷받침하는 사상이야. 이번 <맹자 사람의 길 下>에서는 물을 비유하여 성선설을 이야기하더구나.

물이라는 것은 원래 위에서 아래부터 흐르는 것이 당연하듯, 인성(人性)은 본래부터 善하다는 거야. 물을 거꾸로 가게 하려면 인위적인 외부의 힘이 필요한 것처럼, 불선(不善)도 외부의 힘이 가해진 결과라면서예전에 어디선가 성선설에 대한 비판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너희들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라온 것을 보면, 아빠는 성선설이 맞는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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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603)

맹자께서 이를 반박하여 말씀하시었다: “선생의 말씀은 매우 명료하오. 물은 진실로 선생의 말씀대로 동서를 가리지 않는다 할 것이요. 그러나 과연 상하의 분별조차 없다고 할 수 있으오리이까? 물은 본시 그 자체로 항상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소. 인성(人性)이 본시 선()하다고 하는 것은 물이 항상 아래로 흐르는 것과도 같소. 인성은 선하지 아니 함이 없고, 수성(水性)은 아래로 흐르지 아니 함이 없소이다. 지금 대저 물이라는 것은 손가락으로 튕겨 튀어오르게 하면 사람의 이마를 훌쩍 넘어갈 수도 있고, 인위적인 힘을 가하여 역류시키면 산꼭대기에 올라가 있게도 할 수 있소. 그러나 어찌 이런 현상을 물 그 자체의 성질이라고 할 수 있겠소이까? 그것은 외부적인 힘에 의하여 그렇게 될 뿐이오이다. 사람 또한 불선(不善)을 행하도록 만들 수는 있으나 그것은 그 본래적 성()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물이 본성에 어긋나게 격발되듯 잘못 격발되었기 때문이라 할 것이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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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나이를 하나 둘 먹으면서, 공부를 비롯하여 해야 할 일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아빠도 사실 안타깝구나. 그렇다고 그런 것들을 하지 말라는 용기도 없고 말이야. 이 사회 시스템을 벗어날 용기도 없으니 말이야. 무언인가 할 때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해 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맹자도 이야기하는구나. 하지만 사실 아빠는 어떤 일을 하다가 중단하기도 하고, 읽던 책도 중간에 덮는 경우가 많아서 너희들에게 무조건 중간에 그만두지 말라는 이야기는 못하겠구나.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끝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보거든어쩌면 아빠의 끈기 부족에 대한 핑계일 수도 있지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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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76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떠한 일을 한다고 하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도 같다. 우물을 판다는 것은 반드시 끝까지 지하수에 도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물 파기를 구인(, 조기는 1() 8()이라고 했다. 혹자는 7척이라고 한다. 9인이면 상당한 깊이를 나타낸다)이나 했어도 지하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중단해버리는 것은 우물 파기를 처음부터 포기한 것과 동일한 것이다. 결국 우물을 안 판 것이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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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하든 무엇을 공부하든 너희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너희들이 좋아하는 것을 공부하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꾸준하게 하는 것은 중요할 것 같구나. 마치 산에 난 길이 잡초로 뒤덮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야.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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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8)

맹자께서 방황하는 그의 제자 고자(高子)를 타일러 말씀하시었다: “산봉우리의 작은 길도 당분가 사람들이 열심히 그 길로 다니면 탄탄한 좋은 길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그 길로 당분간 사람들이 다니지만 않아도 금새 억새 같은 잡초로 길이 막혀 버리고 만다. 학문이란 이와 같이 끊임없이 쉬지 않고 정진해야 하는 것인데 지금 너의 마음은 억새로 덮여 길이 보이질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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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책의 끝 문장 : 14의 이지형의 역주는 다산 <맹자요의>의 충실한 번역이다. 많은 참고가 되었다..



맹자가 제선왕에게 고하여 말씀하시었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자기 자신의 팔 다리와 같이 여긴다면, 신하 또한 군부를 보기를 자기의 생명 같이 여길 것입니다(복심 腹心 : 뱃속과 심장이라는 뜻인데 옛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의 중추를 뇌로 보지 않고 복심, 즉 오장육부로 보았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자기가 기르는 개나 말 정도로 여긴다면, 신호 또한 군주를 보기를 성내를 걸어다니는 보통사람의 하나로 여길 것입니다. 군주가 신하를 보기를 토개(土芥, 짓밟는 흙과 쓰레기. 아주 천한 것)처럼 여긴다면, 신하 또한 군주를 보기를 죽여야 할 원수나 적수로 여길 것입니다. - P454

맹자가 말씀하시었다: "사람을 감복시키기 위한 동기를 가지고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진실로 사람을 감복시켜 존 적이 없다. 그러한 동기가 없이 스스로 선을 행하여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저절로 그들이 교화되도록 한 연후에나 비로소 천하사람들의 마음을 감복시킬 수 있다. 천하사람들이 가슴속으로부터 우러나와 감복되지 않고서 천하를 통일하는 왕자가 된다는 것은 여태까지 있어본 적이 없다. - P468

맹자는 민중의 평등사상을 존중하지만, 왕도의 실현을 위하여 문명의 번영을 동시에 주장한다. 무조건의 하향분배는 국가문명의 수준저하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묵가의 사상과 대비되는 맹자의 인문주의사상이다. 문명은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긍정되어야 하며, 그 긍정의 대전제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보편주의적 가치일 뿐이다. 따라서 세율이 과중하면 측정이 되지만 세율이 과하게 불급해도 야만의 정치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금의 "중용"이 이루어져야 한다. 세금이 문명의 번영을 이룩하여 그것이 다시 서민의 교육과 문화생활로 환원되는 피드백 시스템을 맹자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 P699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소목장, 대목수, 수레바퀴공, 수레거푸집 장인과 같은 최고의 기술자들도 후학들에게 콤파스와 곡척의 원칙을 가르쳐줄 수는 있으나, 후학들로 하여금 명인의 솜씨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줄 수는 없다. 그것은 오로지 자득하는 것이다." - P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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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쇼팽의 <영웅 폴로네즈>.

폴로네즈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볼로네즈 파스타와 헷갈리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파스타를 푸짐하게 삶아 줄 테다. 폴로네즈란 폴란드 무곡을 뜻하는 말인데 곡의 주선율은 과연 무곡풍이다. 서주부터 춤추는 듯한 선율이 이어져 듣는 이를 들뜨게 한다. 하지만 연주하는 입장에서 이 곡은 그야말로 난곡이다. 화음을 이루는 음표가 건반을 폭넓게 넘나들어 손이 작은 연주자가 치기에는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런 데다 연속되는 왼손 옥타브 때문에 엄지손가락을 거의 중노동 하듯 쉴 새 없이 움직여야 한다. 차라리 파스타를 삶는 게 훨씬 편하다. 실제로 중간부에 접어든 시점에서 내 손가락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다.


(107)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는 게 있지. 건반을 힘주어서 정확히 치고 싶은 나머지 손끝에 체중이 실리도록 의자를 높게 조절하거든. 그런데 건반의 무게는 고작 70그램이야. 지압하듯 센 힘이 필요 없어. 앉은 위치를 낮추면 자연히 등허리가 세워지고 근육을 곧게 펴서 잘못된 자세에서 벗어나는 게 중요하단다."


(123)

", 음이 연속해서 나면 드디어 연주의 기본 요소가 갖추어진 셈이야. 기본 요소는 세 가지인데 첫째 리듬, 둘째 음, 그리고 셋째 스타일. 리듬은 작품의 짜임새인 만큼 무조건 정확해야 할 것. 또 연속해서 내되 각각의 끝소리가 다음 소리와 붙어 버리면 안 돼. 리듬이 애매해지거든. 따라서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을 가늠할 필요가 있어.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의 시간은 오롯이 음절의 울림을 나타내는 셈이니까, 여기서도 너무 강하게 쳐서 울리지 않게 하는 건 마이너스야."


(234)

영롱한 음 하나에 달빛 한 줄기가 오롯이 담겨 있다. 음이 빛이 되어 마음속에 비쳐 든다. 눈꺼풀이 절로 감기더니 이내 정경이 떠올라 또 한 번 놀랐다. 미사키 씨에 따르면 드뷔시는 음과 영상의 관계를 중시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었다. 달빛이 호수에 살포시 내려앉는다. 교교한 달빛 아래 한 쌍의 남녀가 한가로이 왈츠를 춘다. 시간마저 느릿느릿 흘러가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온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잔물결 위로 퇴락한 고성이 또렷이 떠오른다. 한 음이 끊어지기 전에 다음 음이 이어진다. 곡이 끝나자 나는 무척 후회했다. 왜 이런 곡을 그동안 허투루 들었을까. 선율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했지만, 진지하게 들으면 이토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곡이었건만.


(271)

"아무리 근사한 옷이라도 취향과 체형에 맞지 않으면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런 걸 오시키세(주인이 고용인에게 철마다 해 입히는 의복을 뜻하는 말)라고 하죠. 제 지인 중에도 실제로 있는데요, 주변의 기대와 착각 때문에 본래 자신과는 다른 존재로 인식되는 건 비극입니다. 인간은 물이 아니라서 준비된 그릇에 강제로 집어넣으면 뼈가 뒤틀리고 피멍도 생기지요. 그런데도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무리를 거듭합니다. 그건 남의 인생을 사는 빈껍데기 같은 삶입니다. 그 괴로움과 허무함을 생각하니 암담한 기분이 드는군요."


(303-304)

"으음. 하긴 수업이나 레슨에서는 음악에 대해 생각할 기회가 거의 없으니. 다만 그러다 보면 신체와 직감, 기술과 정신이 따로 놀게 돼. 마음에 곡의 이미지가 확립된 상태에서 손가락으로 재현할 때 지금껏 상상도 하지 못한 운지가 나오는 경우가 있어. 반대로 새로운 움직임이 이미지에 새로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양쪽이 동떨어지면 연주는 절로 빈곤해지지. 잘 들으렴. 연주의 기본 요소 중 세 번째가 스타일이라는 건 전에 설명했지? 스타일이란 곡의 건축 형태를 가리켜. 연주자가 어떻게 칠 것인지는 곡이 만들어진 시대와 작곡가의 어법을 연주자가 어떻게 인식하느냐로 결정되지. 그리고 그 인식 방법은 직감과 조예를 통해 길러져. 악보에 기록된 이음줄, 악센트, 스타카토, 강약 등의 지시 기호를 존중한 상태에서 자신의 재능과 교양과 감수성이 그 곡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걸 선택하지.


(342)

쇼팽은 1831년 파리로 향하던 길에 고국인 폴란드 바르샤바가 러시아군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짓밟힌 고향과 남겨 둔 가족. 이 곡(혁명)은 그때의 실망과 분노를 즉흥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곡 전반에 걸쳐 쇼팽의 분노가 가득 차 있다.

곡은 왼손에서 시작해 낮은 음역부터 음계적으로 진행하고 내림나장조로 바뀐다. 도입부의 거친 화음은 몇 번이나 형태를 바꿔 나타나고 그때마다 흥분이 더해진다. 분노는 가라앉을 줄 모른 채 솟구치기만 한다. 선율을 배경으로 전쟁에 쓰러져 가는 민중과 무너져 가는 건물이 보인다. 권총, 파괴음, 그리고 아비규환. 관객은 모두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나도 두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359)

그것이 피아노였다. 피아노와 하나가 되었을 때 나는 목소리보다 더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말보다 더 전달력 있는 말로 이야기한다. 나이, 성별, 국경, 언어와 같은 모든 장벽을 뛰어넘어 마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다.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꿈같았던 마법이 지금은 미사키 씨가 가능성을 끌어올려 준 덕분에 현실이 되어 가고 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유일한 능력, 허락된 유일한 재산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내게 남은 건 피아노밖에 없다. 피아니스트로 인정받지 못하면 나는 나조차 아니게 된다. 그래서 매일 연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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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사람의 길 - 上 - 맹자 한글역주 특별보급판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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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읽고 싶어하지만, 능력이 안되어 읽지 못하는 분야가 있는데 바로 철학이란다. , 다른 분야도 제대로 이해하면서 읽은 것은 아니지만... 철학은 좀 심각하단다. 검정색은 글씨요, 흰색은 종이.. 이 정도란다. 그런데도 읽고 싶단다. 특히 동양 철학에 관한 부분은 관심이 많아서 예전에는 가끔씩 강의도 찾아보고, 책도 읽어 보곤 했단다. 이해는 잘 안 가더라도 말이야. 간혹 촌철살인 같은 글을 만나는 경우가 있어서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가끔 책을 읽었어.

어디선 봤는데, <맹자>가 동양 고전 중에 가장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책이라고 했어. 그러면서 <맹자>는 꼭 한 번 읽어봐야 한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늘 관심이 있던 책이긴 했어. 오래 전에 <맹자>를 필사하겠다고 마음 먹은 적도 있는데, 거의 작심삼일이었던 기억도 있구나. 도올 김용옥 님께서 동양 여러 고전들에 대한 강의를 하고 책으로 엮은 것을 알고 있단다. 그래서 <맹자>를 읽게 되면 김용옥 님이 쓰신 맹자를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이번에 드디어 큰 마음 먹고 읽어보았단다. <맹자>라는 책은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맹자의 삶과 철학에 대한 기록이란다. 그 글의 기록은 맹자와 그의 제자들의 노력으로 엮여졌다고 하는구나. 특히 중국 역사에서 가장 전쟁이 한창이라 전국시대로 불렀던 BC 320년에서 BC305년 사이의 맹자를 그리고 있다고 하는구나.

<맹자>에는 많은 교훈들이 실려 있지만, 왕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하느냐에 대한 내용이 가장 많이 실려 있는 것 같았어. 그래서 맹자 하면 왕도정치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아. 하지만 오늘날에는 왕이 없는 나라가 대부분이잖아. 하지만 그 가르침은 여전하단다. 한 나라의 리더들에게 필요하고, 한 회사의 리더들에게 필요하단다. 아빠도 이 책을 읽으면서 회사의 리더들이 한번 읽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 그뿐만 아니라 책 전체에 넓게 담겨 있는 주제인 인()과 의()는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도 좋은 교훈인 것 같단다.

책의 구성은 <맹자>를 번역한 부분, <맹자> 원문. 그리고 도올 김용옥 님의 주관적인 견해가 담긴 설명으로 되어 있단다. 번역도 평범한 번역이 아니었어. 그야말로 날 것 그래도 번역을 해 놓으셨단다. 진짜 구어체로 말이야. 그래서 그나마 읽기 쉬웠단다.


1.

그럼 맹자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맹자는 추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라고 하더구나. 세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와 함께 생활을 했다는구나. 너희들도 잘 알고 있는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있듯이 맹자의 엄마가 교육열이 높았나 보구나. 맹자의 전체 인생은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 볼 수 있으니 아빠는 생략할게. 할 이야기들도 많고 말이야. 전국시대가 지나면 진시황이 중국 대륙을 처음으로 통일하여 진나라를 세우는데, 진시황은 세상의 모든 책들을 불 태우라는 무식한 명령을 내리게 된단다. 몇몇 책들은 제외를 시켰는데, <맹자>도 그런 사태에서 살아남았다고 하는구나. 책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인기가 없었고, 더불어 맹자도 인기 없는 사상가였다는구나. 춘추전국시대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했으니, 맹자도 그 중에 한 사람에 불과했던 것으로 생각했나 봐. 그런데 양송시대에 한유라는 사람에 의해 <맹자>라는 책이 세상에 소개되어, 이후 많은 사람들이 맹자와 <맹자>를 칭송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북송시대에는 맹자에 대한 찬반논란이 있긴 했지만, 맹자의 철학은 공자의 철학과 함께 오랫동안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된단다.

맹자의 첫 번째는 위나라 양혜왕과 만나 나눈 대화로 이루어져 있단다. 맹자는 책 전체가 대화로 이루어져 있단다. 질문과 대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면 된단다. 양혜왕과 나눈 첫 번째 대화에 <맹자> 전체의 주제가 나온다고 하루 있어.

하필왈리(何必曰利). 하필이면 왜 이로움을 말하는가. 이 문구들 포함한 첫 문장은 아빠의 학창시절 한문 교과서에도 나왔던 기억이 있구나. ()를 말해야지, 왜 리()를 말하냐고, 양혜왕은 공자에게 한 소리를 들은 것이야. 당시 양혜왕의 나이 80세였다고 하는구나. 지나온 삶은 돌이키면서 이런 저런 질문을 한 것 같은데, 하필이면 첫 번째 질문이 저거였을까 ㅎㅎ


2.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맹자>는 왕도정치의 교훈들이 많이 담겨 있단다. 가장 우선인 것은 민생질서와 도덕질서가 왕도정치의 핵심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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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민생질서와 도덕질서, 이것이 그의 왕도론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논어>에도 <자로>9에 보면, 공자가 위나라에 당도하였을 때 염유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염유가 참 인구가 많기도 하다고 감탄하니까, 공자는 이들을 풍요롭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 위에 또 무엇을 해야 할까요?”하고 물으니까, 공자는 이들을 교육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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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 이미 나라의 주인은 왕이 아니고 인간이라고 주장을 하였고, 국가의 기본이 되는 것도 인간, 즉 사람이라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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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국가의 기본은 인간이며, 인간의 기본은 가족윤리에 있다. 가족윤리는 한 가족의 이해만을 중시하는 편협한 패밀리즘의 이기주의가 아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도덕심을 함양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minimal moral unit)를 말하는 것이다. 이 기본이 무시되는 사회는 아무리 외관이 훌륭하다 할지라도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추구할 수 있는 국가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맹자의 입장이다. 가족의 윤리를 통하여 국가의 질서와 윤리를 정립하고자 하는 맹자의 도적주의는 매우 아둔하게 보이지만, 결국 우리가 국가의 기본으로서 생각하는 민중”(프롤레타리아라고 불러도 좋다)의 간절한 소망도 민생이며, 민생의 기본은 한 가정의 안락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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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가르침을 여러 왕들과 정치인들을 만나 나눈 이야기에 담겨 있단다. 그 이야기를 교훈으로 삼아 나라를 다르셨다면 훌륭한 왕이 되었을 테고, 그렇지 않다면 그저 그런 왕이 되었을 거야. 맹자가 위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갔을 때, 제나라의 젊은 왕인 제선왕과 이야기를 했는데, 이때도 맹자의 왕도의 가르침은 여전했단다. 제선왕이 맹자의 가르침에 말문이 막혀 딴청을 한 것도 그대로 적혀 있다니 재미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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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다면 또 왕의 군대를 통솔하는 참모장격인 장수가 사졸(士卒)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제선왕은 말하였다: “나는 그 장수를 해임시키겠습니다.”

말씀하시었더: “그렇다면 또 국내 사경(四境) 전체의 민생고가 가중되고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문이 꽉 막힌 왕은 좌우를 둘러보며 딴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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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의 왕도정치가 혁명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왕이 잘못되면 백성들이 그 왕을 갈아엎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래. 이런 맹자의 급진적인 성향으로, 일본에서는 예전에 오랫동안 <맹자>가 금서였다고 하는구나.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내용이라면 회피하는 일본의 성향이,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니었구나. 오랜 세월 만들어진 그들의 습성이로구나.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맹자>는 필독서였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조선시대 왕이 쫓겨나는 일들도 생겼지. 그리고 백성들 무서운 줄 알라는 거지. 현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민주화 항쟁과 촛불 시위가, 예로부터 <맹자>를 중요시 했던 이유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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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

맹자의 담론에 깔린 전체 논리구조는 이와 같은 것이다. 즉 첫째로 인륜에 의하여 처자식은 남편에게 위탁된 것이다. 따라서 남편은 처자식의 안위에 관하여 상황여하를 불문하고 책임이 있다. 둘째도 마찬가지로 군대의 장군에게는 왕권에 의하여 사졸이 위탁된 것이다. 장군은 상황여하를 불문하고 사졸의 안위에 관하여 책임이 있다. 셋째도 마찬가지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는 천명에 의하여 왕에게 위탁된 것이다. 나라와 백성의 안위와 복지를 지키지 못하면 최고의 지도자는 혁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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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맹자>에서 유래된 많은 고사성어들이 있단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여기저기 그런 고사성어들을 만날 수 있단다. 대표적인 것 몇 개만 소개해줄게. 먼저 호연지기(浩然之氣)에 대한 내용이야. 호연지기는 중학교 때인가 고등학교 때 윤리 시간에 배운 기억이 있는데, 호연지기라는 그 느낌은 알겠는데, 그걸 말로 설명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더구나. 이 책에서 짧게 나와 있어서 발췌해 보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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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

말한다: “감히 묻겠나이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호연지기란 과연 무엇입니까?”

말씀하신다: “정말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의 기()됨이 지대하고 지강하여, 정의감에 의하여 배양되고 사악함에 의하여 상해 받지 않는다면 6척 단신의 기라 할지라도 천지지간(天地之間)에 꽉 들어차는 것이다. 그 기()됨이란 항상 의()와 배합되며 도()와 더불어 하는 것이니, 인간에게 이것이 결여되면 그 인간은 활력이 없어지고 시들어버린 쭉쩡이가 되고 만다. 그러기 때문에 호연지기라는 것은 의로움에 의하여 일상적으로 축적되어 인간 내면에서 온양 배양되는 것이지, 어떤 돌발적인 정의감의 우발적 행동에 의하여 취득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이 행동을 하고, 그 행동을 마음에 돌이켜 볼 때 꺼림직하거나 뒤가 켕기는 구멍이 있으면 그 인간은 결국 시들어버리고 만다. 호연지기가 상실되어 활력이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항상 말하기를 고자(告子)라는 분이 의를 미처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 분은 의를 심외(心外)의 어떤 것으로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의는 외재적 존재일 수 없으며, 인간이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하는 행동으로부터는 생겨나지 않는다. 반드시 호연지기를 배양하는 노력을 끊임없이 하면서도 그 노력의 결과를 예기(豫期)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의를 배양한다고 하는 큰 목적을 잊어서는 아니 되지만, 빨리 효과를 얻기 위해 조장(助長)하는 짓을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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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맹자의 사단(四端)으로 유명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도 이번 책에 소개되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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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7)

다음에 측은지심측은함이라는 감정을 노출시키는 심적현상일 뿐이다. 측은지심이 곧 인()이라는 덕()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화되어 있는 덕의 (), tip”일 뿐이다. 따라서 ()”은 인이라는 덕이 표현된 심적인 현상이므로,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감정에 속하는 것이다. “가슴이 덜컹 하는 측은도 감정이다. 따라서 사단(四端)”은 기()가 아니라 ()”라고 말하는 후대의 논설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사단도 칠정의 선한 형태일 뿐이라고 하는 고봉의 논의는 정당한 것이나 고봉은 애석하게도 퇴계의 논박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키지 못했다. 맹자의 논의를 후대의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고 하는 분별적 카테고리 속에서 논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주자학적 태제를 가지고 맹자의 웅혼한 융통(融通)의 심()을 성()과 정()으로 갈라 말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오류이다. 맹자에게 있어서는 심() 그것이 곧 성선(性善)의 근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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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자답다는 뜻으로 쓰이는 대장부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도 <맹자>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이라 아빠는 이제서야 알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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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

맹자는 이러한 당대의 비극적 정황을 고려하면서도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국가의 권력을 뛰어넘는 자래야만 대장부라고 말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국가의 권력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장부! 죽음으로써 천하의 광거, 천하의 정위, 천하의 대도를 지킬지언정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사나이! 그 사나이의 진정한 용기는 실존 내면의 도덕성에서만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공자도 말했다: “신장은 항상 욕심이 앞서는 사람이니 어찌 그를 강하다 하리오?” 사사로운 욕망을 벗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진정한 용기를 발휘할 수 없다. 공자는 또 말한다: “삼군의 거대병력에 맞서 그 장수를 빼앗을 수는 있다. 그러나 초라한 필부에게서도 그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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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예전에 <맹자>를 필사하려다가 며칠 못하고 그만두었다고 했잖아. 이번 김용옥 님의 <맹자 사람의 길 上>을 읽고, 그 생각이 문득 다시 나더구나. 하루에 조금이라도 괜찮으니 이 책을 필사해보겠다고 말이야. 시간이 한참 걸리긴 해도, 언젠가는 끝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과 함께 말이야. 하지만 책 읽을 시간도 적고, 너희들에게 도서 편지는 잔뜩 밀려 있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지금 당장은 아니고 아빠가 잘하는 나중으로 미루기 리스트에 넣어두어야겠구나. 오늘은 이만하고 조만간 <맹자 사람의 길 下>도 이야기해줄게.


PS:

책의 첫 문장 : <맹자>는 고전이 아니다.

책의 끝 문장 : 군자의 3락 중에 왕천하(王天下)”는 들어있지 않다고 말한 것이 그 대표적 예이다.


이러한 리얼리스트들의 균형감각에 비하면 맹자의 아이디얼리즘은 참으로 무모한 것이다. 맹자는 이들의 패도에 대하여 왕도를 주장한다. 왕도라는 것은 인의(仁義)의 실현이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운의 쇠미기에, 서바이벌을 위해 합종이냐 연횡이냐를 점쳐야 할 긴박한 시기에, 어느 철인이 나타나 인정(仁政)을 외친다고 생각해봐라! 과연 누가 그 말을 듣겠는가? 맹자는 중국의 동키호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동키호테는 픽션이나 신화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지만, 맹자가 돌진하는 세계는 완벽한 논픽션이다. 맹자에게는 모든 아이디얼리즘이 리얼한 현실이다. 그가 신봉하는 이상적 가치는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실현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 P37

자하가 공자에게 여쭌다.: "정치는 어떻게 하는 것이오이까?" 공자는 타이른다. : "속히 성과를 내려고 하지 말라. 작은 이익에 구애되지 말라. 속히 성과를 내려고 하면 전체적으로 통달할 수 없고, 작은 이익에 구애되면 큰 일을 이루지 못한다." - P76

공자가 "상향"의 발돋움을 한 사람이라면 공생애의 맹자는 철저한 "하향"의 사명감이 있다. 맹자에게 있어서 가장 두드러지고 있는 것은 당대 민중의 고초에 대한 열렬한 공감이다. 그의 민중의 삶에 대한 묘사는 <맹자>라는 텍스트에 즉하여 보면 너무도 처참하다. 민중은 일상적 삶 속에서도 뙤약볕, 가뭄, 홍수, 한해, 기근에 시달린다. 이들은 이러한 악조건에도 굴하지 않고 경작, 제초, 관계 등의 노동에 전력을 다한다. 그러나 이렇게 괴롭게 달성하는 작은 평화도 군주의 학정에 항상 무너지고 만다. - P104

그리고는 결론 짓는다:"술이란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게 마련이요, 즐거움이란 극도에 이르면 슬퍼지게 마련이요. 만사가 모두 이와 같소. 사물이란 극도에 이르면 아니 되는 것이며, 극도에 이르면 곧 쇠한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요." 위왕은 이 말을 들은 후로 밤새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곤을 제후의 주객으로 삼았다. 그 후 왕실의 주연에는 항상 곤이 위왕을 곁에서 모셨다. 그러니까 순우곤은 위왕을 도덕적 교훈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골계로써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 P138

맹자의 정전의 구상은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약자보호의 사상이며, 평등주의적 분배의 사상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구상은 하부고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대중교육이라는 상부구조의 도덕질서에까지 평등주의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높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항산과 항심은 동시적 교육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항산도 교육되어야 하며, 항심도 교육되어야 한다. - P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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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15 08: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철학에 완전 취약한데 동양철학은 더 취약한거 같아요 ㅜㅜ 북홀릭님 완전 대단하신거 같아요 👍👍

bookholic 2021-07-15 08:53   좋아요 4 | URL
저도 아무것도 모르고 관심만 있어요...^^
알라딘 서재 보시다 보면 정말 대단한 하신 분들 많고, 저는 대x리만 단단해요~~
오늘도 아침부터 더운데 시원한 하루 되십시오~~
 














(12)

과학을 해석하려면 과학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발견했는가뿐만 아니라 우리는 왜 그것을 알아내려 했는가를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과학 지식이 인정되거나 거부되는지 알 수 없으며 어떤 것이 과학이 충족시킬 수 있는 약속이고 어떤 것이 의심해봐야 할 주장인지도 구별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을 질문해야만, 우리는 과학을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


(18)

히포크라테스는 눈에 보이는 세계, 질서 잡힌 우주에 의지해 질병을 설명하려 했다. 그가 보기에 질병은 신의 분노로 생기는 것이 아니었고, 따라서 자애로운 신의 은혜로 치료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악마에 씐 상태이거나 신성에 씐 상태라고 오래도록 여겨져온 간질도 그가 보기에는 다른 질병보다 더 영적이거나 신성하지 않으며, 그것 또한 자연적인 원인으로 생기는 것일 뿐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사람들이 무지해서 질병을 신의 의지 때문으로 여긴다고 생각했다. ‘질병이 신성 때문에 생긴다는 개념은 질병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갖는 믿음이라는 것이었다.


(29-30)

여기에 더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진화라는 개념을 가능하게 했다. 플라톤의 세계에서는 변화가 부패이고 이데아에서 멀어지는 것이었으며 덜 효과적이고 덜 발달된 상태로 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에서는 자연이 더 완전하게 실현된 종착지를 향해 발달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진화 개념과 꼭 같지는 않다. 오늘날 알려진 생물학적 진화는 정해진 목적도, 전체적인 설계도 없는 과정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은 목적론이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 의도적으로 완벽을 향해 나아간다고 믿었다.


(42)

아르키메데스는 당시에 널리 받아들여지던 우주 모델 대신 다른 모델을 사용하기로 했다. 태양이 중심에 있는 모델이었다. 고대에는 우주를 상호 연관된 구체들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비교적 작은 체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는 이 자그마한 우주가 그에게로 별로 도전할 거리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62)

나는 더 합리적인 궤도의 배열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었습니다.

-       코페르니쿠스 <주해>


(86)

우리 시대에는 새로운 사건들과 새로운 관찰들이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 살았더라면 이 새로운 사건들과 관찰들을 보고 자신의 견해를 바꾸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갈릴레오 갈릴레이 <대화:천동설과 지동설, 두 체계에 대하여>


(107)

이에 더해, 실험은 반복해서 행해져야 했다. 보일은 나중에 이렇게 언급했다. ‘그 실험들을 매우 조심스럽게 한 번 이상 해보아야 한다. 그렇게 한 다음에야 이론적으로든 실용적으로든 상위 구조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한 번의 실험에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 조건이나 물질이 달라지면 결과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여러 번 반복해서 얻은 결과만을 이론의 기반으로 삼아야 했다.


(113)

“(진정한 자연 철학은) 손과 눈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기억을 통해 진전되고 이성에 의해 계속 나아간다.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손과 눈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자연 철학은 하나의 역량과 기관에서 다음의 역량과 기관으로 계속 돌면서 생명과 힘을 얻는다. 혈액이 손, , , 심장, 머리를 돌면서 인체가 힘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러한 방법을 부지런히 집중해서 따르고 나면 인간의 분별력 안에서 이해되지 못할 것은 없다. … 대화, 주장, 논쟁은 곧 노동으로 바뀔 것이다. 모든 현란한 견해들의 꿈, 보편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속성, 명석한 뇌가 고안한 이런 사치품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견고한 역사와 실험과 노동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처음에 인류가 금지된 지식의 열매(선악과)’를 맛보고 타락했듯이, 그들(아담과 이브)의 후예인 우리는 동일한 방법에 의해, 즉 그저 보고 사유하는 것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아직 금지된 적이 없는 자연 지식의 열매를 맛봄으로써 구원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구는 더 이상 감각의 확장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훅이 보기에, 이제 도구는 지식의 열매이자 완벽으로 가는 길이었다.


(145)

이렇게 복잡하고 단절된 지층의 과거를 시간 순서대로 정연하게 읽어낸 것은 자연 철학계에서 약간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유럽과 영국 모두에서 광물학자들과 지질학자’(여전히 새로운 용어였다.)들이 저마다 자기 지역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지층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튀비에 자신은 이론을 더 넓게 확장했다. 그는 파리 분지의 여섯 지층이 지구의 소우주라고 결론 내리고 파리 분지에서 발견한 것을 지구 전체의 이론으로 확장했다.


(177)

그리고 과학은 재미난 이야기에 약하다. 라이엘이 말한 길고 점진적인 역사는 딱히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흥미롭지는 않았다. 재앙적 사건을 다시 도입한 것은 이 분야에 약간의 이야기(와 멜로드라마)를 불러왔다. 1997년에 앨버레즈는 이 가설을 <티나로사우루스 렉스와 멸망의 운석 구덩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책의 대부분은 앨버레즈와 그의 연구팀을 결론으로 이끌어준 과학적 증거들을 꼼꼼하게 제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1장에는 아마겟돈이라는 제목이 달렸고, 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구절이 인용됐으며, 재앙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을지에 대한 묘사가 실렸다(전체 숲에 불이 붙고, 대륙 크기만 한 거대한 산불이 땅 전체를 휩쓸었다. … 숲이 불타는 동안 또 다른 공포가 해안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과학 저술가 킴 짐머가 말했듯이, ‘갑자기 생명의 역사가 어떤 공상 과학 영화보도도 더 영화 같아졌다.’


(196-197)

월리스는 이러한 생각을 원래의 유형에서 무한히 멀어지려는 변종들의 경향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짧은 글로 작성해서 편지와 함께 다윈에게 보내면서 이 글을 찰스 라이엘이나 그 밖에 관심 가질 만한 자연사학자들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다. 다윈은 깜짝 놀랐다. ‘이 글은 내 이론과 정확히 같은 이론을 담고 있다.’ 편지에 적힌 부탁대로 다윈은 이 글을 라이엘로 보냈다. (‘나는 이보다 더 놀라온 우연의 일치를 보지 못했습니다. … 그게 무엇이건 나의 독창성은 깨질 것입니다.’) 그리고 다윈 자신의 연구에 대한 간단한 초록도 보냈다. 라이엘과 동료인 조지프 후커(왕립 식물원장이자 다윈의 친구)는 두 글 모두를 린네 학회에서 발표했다(린네 학회는 100년 역사를 가진 자연사 학회다). 1858 8월 월리스와 다윈의 이론이 린네 학회 모음집에 나란히 게재됐다.


(245-246)

하지만 뉴턴의 물리학이 승리했다. 너무나 잘 작동했기 때문이다. 사실 뉴턴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잘 작동했다. 뉴턴의 중력 법칙과 운동 법칙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놀랄 만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뉴턴은 태양계에서 작용하는 온갖 중력의 힘들이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각 천체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는데, 각자가 움직이므로 그 영향이 계속해서 달라진다) 그대로 두면 무한히 갈 수 없고 가끔 한 번씩 신이 개입해서 천체들을 섬세한 균형 상태로 되돌리는 초기화가 필요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이렇게 복잡하기 짝이 없는 체계라면 적어도 최초에 출발시킬 때라도 신의 힘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1690년대 초에 이렇게 언급했다. ‘행성들이 태양 쪽으로 가게 하는 하강 운동은 중력이 일으킬 수 있지만, 각자의 궤도에서 공전을 하게 하는 수평 운동을 일으키는 데는 신의 팔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 다른 서신에서도 이렇게 언급했다. ‘중력이 행성들의 운동을 일으켰을 수는 있겠으나 신의 힘이 없었다면 그 운동을 태양 주위를 운동으로 만들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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