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4-365)

당신은 재건의 역사를 식물들의 관점에서 재구성해보겠다고 했습니다. 아직도 그 작업이 수행되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울 정도입니다. 인류는 그간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역사만을 써온 것일까요. 식물 인지 편향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가진 오래된 습성입니다. 우리는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식물을 과소평가합니다. 동물들의 개별성에 비해 식물들의 집단적 고유성을 폄하합니다. 식물들의 삶에 가득한 경쟁과 분투를 보지 않습니다. 문질러 지운 듯 흐릿한 식물 풍경을 바라볼 뿐입니다. 우리는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식물과 미생물, 곤충들은 피라미드를 떠받치는 바닥일 뿐이고, 비인간 동물들이 그 위에 있고, 인간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히 반대로 알고 있는 셈이지요.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으니까요. 인간은 언제나 지구라는 생태에 잠시 초대된 손님에 불과했습니다. 그마저도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태로운 지위였지요.


(379)

마음도 감정도 물질적인 것이고, 시간의 물줄기를 맞다보면 그 표면이 점차 깎여나가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어떤 핵심이 남잖아요. 그렇게 남은 건 정말로 당신이 가졌던 마음이라고요. 시간조차 그 마음을 지우지 못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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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저널 그날 조선 편 5 - 광해군에서 인조까지 역사저널 그날 조선편 5
역사저널 그날 제작팀 지음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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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가끔씩 읽는 <역사저널 그날> 시리즈 5권을 읽었단다. 이 책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방송에 나왔던 내용을 편집한 책이라서 쉽고 재미있게 잘 써져 있었단다. 너희들이 조금 더 크면 읽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더구나. 너희들이 역사를 좀 안 좋아하는 것 같지만 말이야. 이번 <역사저널 그날> 5권에서는 광해군부터 인조까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단다. 우리 Jiny도 학교에서 역사를 배워서 광해군과 인조라는 사람을 들어봤는지 모르겠구나. 작년에 <역사저널 그날> 4권의 이야기가 임진왜란 이야기였는데, 그 다음 이야기라고 보면 된단다.

광해군도 왕인데 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가 왕자리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란다. 연산군과 광해군이렇게 두 명의 왕이 왕자리에서 쫓겨났지. 사실 단종도 오랫동안 노산군으로 불렀는데, 단종은 쫓겨난 것이 아니라 삼촌한테 왕자리를 빼앗긴 것이니 그들과는 좀 다르단다. 그런데 연산군과 광해군도 좀 많이 다르단다. 연산군이 쫓겨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지만, 광해군이 쫓겨난 것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부당하다는 의견이 많이 있단다. 아빠도 오래 전에 한명기 님의 <광해군>이라는 책을 통해서 그의 진면목을 알게 된 이후 광해군을 쫓아낸 것은 부당하고 생각하게 되었단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조선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 그 와중에 어려운 국제 문제를 해결해 가는 모습이 현명한 왕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단다. 당시 신하들 대부분은 명나라를 받들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광해군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잘 이해하고 대처했어. 당시 명나라는 쇠퇴해가고 있었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은 기병부대를 앞세워 세력이 커지고 있었거든. 광해군은 그런 후금을 오랑캐로 보지 않고 하나의 나라로 보았고, 그런 명과 후금 사이에 조선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을 거야. 그는 명의 눈치도 봐야 하고, 후금의 눈치도 보면서 요령껏 대처했단다. 명에서 조선에 원군을 요청했을 때도 일단 원군을 보냈지만 후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전투에서 지면서 바로 항복을 했단다. 당시 이 원군을 이끌던 사람은 강홍립 장군이라는 사람인데 사전에 광해군과 의견 조율이 있었을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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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계승범] 그렇죠. 명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죠. 게다가 명이 후금 진영으로 들어가 선제공격을 하겠다며 원군을 요청했는데, 광해군은 명나라 군대가 반드시 패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광해군은 조선이 명을 도와서 군대를 보내면 아까운 조선 병사들만 죽을 것이고 거기에 후금의 원한까지 사서 후금이 우리에게 보복하려 들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죠. 반대로 신하들은 명이 분명 이길 텐데 우리가 미적거리면서 확실하게 돕지 않으면 나중에 후환이 있지 않겠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누가 이길 것인가? 그 판단에 차이가 있었던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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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정세도 어려웠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내 사정도 어려웠어. 광해군은 여러 당파의 인재들을 등용하였고, 나라의 조세를 안정화시키기 위해서 대동법을 시행하려고 했단다. 대동법은 기득권의 거센 반발로 결국 경기도만 시범 적용하는 것으로 축소되었어.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들의 자기 밥그릇 챙기는 버릇은 알아줘야겠구나. 광해군의 콤플렉스는 자신이 적자가 아닌 서자라는 사실이었어. 그래서 늘 역모 사건에 대한 걱정이 있었던 것 같아. 실제로 적정자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세우자는 역모가 발생하기도 했단다. 이 사건이 진압되긴 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여덟 살이었던 영창대군도 강화도로 유배를 보냈단다. 물론 영창대군은 이 역모와 관련이 없었지. 지금은 여덟 살로 어리지만 그가 스무 살이 된다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지.

강화도로 유배를 간 영창대군은 불을 뜨겁게 달군 방에서 죽게 되는데 이를 주도한 사람이 이정표라는 사람이란다. 광해군의 지시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싶구나. 광해군이 잔인하다고 하지만, 당시 조선에서 권력 싸움으로 상대진영을 죽이는 것은 아주 흔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드문 것도 아니었단다. 태종이나 세조 모두 가족들을 죽이고 왕이 되었잖니.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엄마이자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도 폐위시켰단다. 자신의 친엄마는 아니지만, 현재는 자신의 엄마이니, 엄마를 폐위시킨 격이 된단다. 위에서 아빠가 이야기한 것들이 인조 세력이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들이야. 명과 후금 사이의 줄다리기 외교를 한 것은 조선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고,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것은 권력 다툼의 부산물이라고 보면 이것이 과연 반정을 할 정도의 잘못이냐 라는 것일까? 그래서 오늘날까지 계속 논란이 되었던 거야.


1.

하지만 인조반정은 손쉽게 성공하고 만단다. 광해군도 반정이 일어나기 전에 반정이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대. 지나가는 소문으로 흘렸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고, 반정이 일어나고 왕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유배 생활. 유배를 가서도 18년 동안 지내고 나서 나이 들어 죽었다고 하는구나. , 그의 삶도 참 파란만장하구나.

만약 인조반정이 일어나지 않고 광해군이 계속 왕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일단 후금이 이름을 바꾼 청나라와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 같구나. <역사저널 그날> TV 프로그램의 패널로 참여하신 역사학자 최태성 님은 더 낙관적으로 보시더구나. 인조반정, 참 안타까운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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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최태성] 일단 명나라는 멸망했을 거 아니예요. 그럼 광해군 그늘 밑에서 친청 세력이 성장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실제로 이로부터 100년 뒤에 북학파가 나와서 청의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하잖아요.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아마 그런 세력이 더 일찍 형성되었을 테고, 청의 문물을 빨리 수용하면서 근대 사회로 일찍 진입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일제강점기도 없었을 테고 산업화도 더 빨라졌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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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돌이킬 수 없는 법. 인조 반정은 일어났고, 인조와 반정세력은 이제 자신들의 나라로 만들려고 했어. 무너져가는 명나라에 무조건 숭배하고, 강력해지는 후금을 멸시하고는 감각 떨어진 세력들. 그리고 인조반정에 성공한 데 기여를 했다고 공신책봉을 하는데, 왜 나는 적게 주냐고 불만인 사람들그릇이 딱 그 정도에 모양도 엉망인 그릇들이었단다. 인조 또한 준비된 왕이 아니니 우왕좌왕. 그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진 신하들의 이야기나 따라야지

공신책봉에 불만을 가졌던 이 중에 이괄이라는 사람이 변방으로 좌천까지 되고 역모를 꾸민다는 누명까지 쓰자 화가 나서 실제로 난을 일으킨단다. 역사는 이괄의 난이라고 불렀어. 이 한 사람이 일으킨 난도 제대로 막지 못하고 한양을 두고 공주성까지 도망을 가는 것이 당시 인조와 측근 세력이었단다. 그러면서 후금을 쳐야 한다는 소리를 하다니이괄은 한양까지 점령을 했어. 그렇다고 이괄의 군대도 제대로 된 군대가 아니다 보니 오래 가지는 못했단다. 한양 입성 3일만에 정규군에 의해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단다.

이 반란에 참여했던 한윤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반란이 실패하고 후금으로 도망가서 투항했단다. 조선의 사정을 잘 알고 있고, 조선 조정에 미움 박힌 그가 후금에 가선 조선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했을까. 조선 조정이 갖고 있는 후금에 대한 의견에 거짓말까지 더해서 이야기를 했겠지. 당시 후금은 누루하치가 죽고 홍타이지가 정권을 잡았는데, 홍타이지는 늘 조선에 강경한 자세를 보였던 사람이란다. 거기에 한윤의 이야기까지 들었으니그것이 직접적 원인은 아니겠지만, 후금은 명을 공격하기 전에 후방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을 쳐들어왔단다. 정묘호란이었어.

이때 한윤은 후금의 앞잡이가 되어 함께 쳐들어왔단다. 후금의 기병부대를 조선이 막을 힘이 있었겠니. 다시 도망가야지. 이번에는 강화도로 도망을 갔단다. 기병부대가 주력인 후금이 바다를 건너오지 못하겠다는 생각으로육지에 있는 백성들이 어떻게든 나 몰라라 하고 자신들만 살겠다고 강화도에 콕 박혀 있는 인조와 신하들. 후금은 여기서 오래 시간을 끌 수 없어서 먼저 화친 요청을 했고,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형과 아우 같은 관계를 갖자고 했단다. 인조는 이에 동의하고 강화도에서 나와 한양에 입성했단다.

지금이라도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후금과 사이를 좋게 유지해야겠지만, 그들은 여전히 후금에 대한 자세는 오랑캐를 보는 듯한 자세였단다. 외교 사절단이 와도 오랑캐 취급을 해서 그들 속을 뒤집어 놓는 등 다시 사이가 급격하게 안 좋아졌단다. 얼마 뒤 홍타이지는 다시 조선을 쳐들어왔단다. 인조는 이번에도 강화도로 도망을 가려고 했지만, 타이밍을 놓치고 남한산성으로 도망갔단다. 남한산성이 지대가 험하긴 하지만, 바다 위에 섬도 아니고 날씨는 엄청 추운 겨울이고, 먹을 것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몰래 강화도로 도망가려고 했지만, 빙판길에 넘어져 다쳐 다시 남한산성으로….

이 싸움은 이길 수가 없는 싸움이고, 산성 안에 갇혀서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겠니거기에 강화도 마저 무너지고 말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단다. 사실 강화도에 왕과 신하들의 가족들이 대피하고 있었거든결국 조선의 왕 인조는 항복을 하고, 삼전도에서 삼배구고구례라는 굴욕을 감당해야겠단다. 이 일을 인조 속마음은 굴욕이라고 생각했을지는 잘 모르겠구나. 그저, ,, 살았구나..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구나.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었어. 왕이 되면 안 될 사람.

오늘 이 이야기들은 아빠가 예전에 한명기 님의 <병자호란>을 읽고 해준 이야기들과 많이 겹쳤구나. 그 때 이야기해준 독서 편지를 찾아보면 조금은 더 자세히 나와 있단다. 참고하시고


2.

광해군과 인조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 책에는 당시 유명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온단다. 그 중에 동의보감으로 유명한 허준도 나왔어. 허준은 아빠가 이미 다른 책을 읽고 쓴 독서편지에 여러 번 소개를 했던 것 같아서 생략할게. 또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까 말이야. 우리나라 의사의 원탑이라고 할 수 있잖니.

그리고 또 한 사람 허균. 학교에서 허균이라는 사람은 국어교과서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사람으로 배웠던 기억이 있어. 아빠가 학창 시절 역사에 관심이 없어서 역사 교과서에도 그가 나왔는지 잘 모르겠어. 나중에 커서 허균이라는 사람의 실체를 알고 그의 가치관과 그의 최후를 알고 놀랬던 것이 있단다. 그리고 아빠가 좋아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뽑기 시작했단다.

아빠가 허균을 제대로 알게 된 책은 허경진 님이 쓰신 <허균 평전>이라는 책이었단다. 이 책을 일고 나서 허균 팬이 되어 그가 쓴 산문들을 찾아 읽고, 허균에 대한 책들도 찾아 읽고, 허균의 누이 허난설헌에 관한 책들도 찾아 읽었단다. 읽으면 읽을수록 허균이라는 사람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더구나. 허균은 한마디로 시대를 앞서 산 사람이었어. 예전에도 허균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기 때문에 오늘은 따로 안 하고, 허균이 주장한 호민론에 대해 설명한 부분만 발췌하는 것으로 대신할게. 아무튼 허균이 역모 사건으로 안타깝게 죽지 않았다면, 더 좋은 작품들을 남겼을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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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103)

[신병주] 허균의 혁명가로서의 면모를 가장 뚜렷이 보여 주는 글이 바로 <호민론>입니다. <호민론>에서는 백성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눕니다. 먼저 시키는 일만 하는 백성인 항민(恒民)이 있습니다. 또 세상에 원망을 품는 원민(怨民)이 있죠. 원민은 저항은 하지 않고 억울함을 속으로 삭힙니다. 반면 세상에 대한 울분이다 원한을 풀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서는 사람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호민(豪民)입니다. 결국 활빈당을 조직해서 조정 관리들에게 맞서는 홍길동이 호민이라는 구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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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인조 세력이 반정의 명분으로 내세운 광해군의 죄목은 숭청배명과 폐모살제였다.

책의 끝 문장: 이런 참담한 비극은 꼭 막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하죠.


[이다지] 저는 이 얘기 들으면서 중국의 유명한 명의 편작이 떠올랐어요. 편작이 그런 말을 했잖아요. "저보다 더 뛰어난 의사 두 명 있는데 모두 제 친형들입니다. 형들 중에는 큰 형님이 가장 뛰어나고, 둘째 형님이 그 다음입니다. 큰 형님은 환자가 증상을 느끼기도 전에 환자의 얼굴만 보고 무슨 병이 생길지를 미리 알고 치료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고마운 줄을 모릅니다. 둘째 형님은 환자의 병세가 미약할 때 병을 알아내어 치료해 주니 환자들은 간단한 치료를 받은 줄로만 알고 크게 고마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병이 커져서 심한 고통을 느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치료를 시작하니 환자들은 큰 병을 치료해 주었다고 믿고 고마워하는 것일 뿐입니다." 양생이란 결국 이런 개념이 아닐까요? - P77

[정철상] 허균이 남긴 글과 기록을 추론해 볼 때, 허균은 언변능숙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외향적이며 낙천적 성격을 가지고 있죠. 실제로 허균은 임진왜란 시기에 왜군에 쫓기면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경치를 즐기고 누정마다 걸린 시판을 평하는 여유까지 즐겼다고 합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허균은 풍부한 직관적 감성을 지닌 것으로 추론됩니다. 이러한 성격이 타고난 천재성과 결합되어 소설이나 시 등 문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것으로 보입니다. 허균은 감성만 풍부한 것이 아니라 추상적 세계를 다루는 이론 분야에도 능했습니다. 유학뿐 아니라 불교, 도교, 천주교 등을 깊이 있게 파고든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P94

[윤성은] 그렇죠. 이 인절미가 오늘 얘기하는 주제와 연이 깊은 음식이거든요. 백성들이 피란 온 인조에게 인절미를 가져다 줬다고 해요. 그때 이 떡을 처음 먹어 본 인조가 너무 맛있어서 ‘누가만든 떡이냐?’ 했더니, 답하기를 ‘이름은 정확히 모르나 임씨가 만든 떡입니다.’ 해서 임절미, 임절미 하다가 인절미가 됐다는 거죠.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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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타국에 나라를 빼앗긴 슬픈 현실, 말문마저 탄압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 이중섭은 민족의 존엄성을 그림에 담고자 했습니다. 그 존엄성을 은밀하게 담아 우리 민족만이 알아챌 수 있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을 가능케 할 존재는 소였습니다. 그의 소 사랑은 일반적인 수준을 넘어섰습니다. 틈만 나면 들에 나가 소를 구석구석 관찰하며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기숙사에 있는 그의 방에는 소의 몸통, 앞발, 뒷발, 꼬리, 머리 등을 스케치한 그림들로 가득했고, 중섭은 그 스케치와 함께 잠들었다고 합니다. ‘소를 나만의 방식으로 그려내겠다는 그의 열정은 주변 지인들이 보았을 때 미친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44)

우리는 왜 이중섭을 국민화가라 부를까요? 아마도 그의 삶에서 나온 소를 비롯한 모든 그림이 20세기 한민족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는 타인의 삶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삶 자체를 소에 이입해 그렸죠. 그가 겪은 고난과 아픔은 당시 한반도 위에서 생을 이어가던 모든 이의 고난과 아픔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고난과 아픔을 직접 겪어본 적 없지만, 이상하게도 중섭의 그림을 볼 때마다 마치 기억 속에 묻어둔 어떤 파편을 끄집어내 마주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아마 중섭이 시대의 산증인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그림에 온전히 이입시키고 있기에 가능해진 일일 것입니다. 그 결과, 중섭의 그림은 영원히 살아 숨 쉬며 우리와 감정으로 소통합니다. 중섭과 중섭의 그림은 우리의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와 애달프면서도 따뜻한기억의 조각이 됩니다. 그렇게 중섭은 국민화가로 우리 마음 한편에 남게 되었습니다.

(59)

이를 위해, 혜석이 선택한 아이템은 붓과 펜이었습니다. 붓은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서 자신의 화업을 만들어가는, 신여성의 길을 가는 지팡이였습니다. 펜은 여성 운동가로서 자신의 사상을 글로 표현해 세상에 알리는 확성기였죠. 사실 혜석을 최초의 서양화가라고만 기억하고 평가하는 것은 많이 아쉽습니다. 글쓰기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문필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글을 정말 잘 씁니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작법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합니다. 단순히 논설문을 넘어 시, 소설, 희곡, 수필 등 글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을 자유자재로 구사합니다. 글로써 자신의 생각과 감정, 더 나아가 사상까지 솔직담백하게 담아냅니다. 그녀의 글은 흡입력이 상당하죠.

(114)

당시 내 머릿속에는 민족적인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어요. 모두들 서양화만을 그린다면 동양화는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그는 동양화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전통 동양화가 아닙니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조화롭게 융합시키는 미지의 길을 선택합니다. (사실상 지구상에) 어느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그 길을 개척하기로 한 것이죠. 동양화로는 이미 일정 수준의 경지에 오른 응노. 그렇기에 이제 그가 할 일은 서양화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서른두 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길에 오릅니다. 가족들에게 논밭까지 장만해주던 간판점 개척사를 미련 없이 처분하고 말이죠.

(121)

노력. 그것도 목적이 있는 노력. 50대의 나이에도 항상 깨어 있고자 노력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과 작품에 반영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바로 이응노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예술에서 영원히 늙지 않는 젊음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시대에 깨어 있던 그의 작품은 1957년 미국 뉴욕 월드하우스 갤러리에서 열린 한국현대미술전에 출품됩니다. 그리고 유일하게 판매되어 뉴욕현대미술관에 소장됩니다. 곧 이어 자크 라센느(세계미술평론가협회 프랑스 지부장)가 프랑스로 그를 초청하죠. 이미 한국미술계에서 승승장구하며 환갑을 앞두고 있던 거장 이응노. 이제 좀 쉬겠다고  해도 누구도 안 말릴 나이에 그는 새로운 도전에 또 한 번 몸을 내던집니다.

(138)

한국인이지만 한국에 갈 수도, 작품을 나눌 수도 없던 예술가. 20년 전부터 주변에서 권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이 거절해왔던 그것, 프랑스로의 귀화를 1983년의 응노는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사람이 되나, 나는 한 번도 내 조국을 잊어본 일이 없어요. 비록 조국이 나를 버린다 해도 난 나의 피와 정신 속에 살아 있는 조국을 버릴 수 없지.’ 유럽에 온 이후 끝까지 한국 신문을 놓지 않았던 그. 전시를 위해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저 멀리 보이는 한반도를 바라보며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그. 프랑스 유수의 미술관들이 자신의 작품으로 국가사업을 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재능이 외국을 위해 사용되고 있음에 깊은 안타까움을 토론했던 그.

(139)

나는 우리가 쓰는 말과 문자, 흰 옷을 입는 기상 등 깨끗하고 고상하고 착한 우리 민족성을 그리고 싶습니다.”

 -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 중에서

격동의 20세기 한국의 근현대사. 끝없이 변모하던 시대의 물결을 예민하게 감각하며 자신의 작품을 변신시킨 예술가. 자칫 사라져버릴지도 모를 민족의 예술정신을 현대에 살아 있게 하고자 삶의 모든 것을 던진 예술가. 86년의 생애 수없이 작품의 외형을 변신시켰지만, 그 안에는 오직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만을 채웠던 고암 이응노. 시대를 초월해 그의 작품에서 영원히 울려 퍼져 나갈 시는 이것이 아닐까.

모두, 함께, 어울려, 자유와 평화의 춤을.

(167)

(유영국)에게 사업은 가족을 경제적으로 지키고, 자신이 예술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예술에 대해선 무한한 꿈을 가지고 있던 이상주의자였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선 돈이라는 수단이 기반이 되어야 함을 알고 있던 현실주의자였죠. 그런데 그는 또 너무 많은 돈을 원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243)

백자가 가진 평범한 빛깔과 평범한 형태. 한마디로 평범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환기는 지극히 평범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임을 직관으로 깨닫습니다. , 조선 백자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닭이 알을 낳듯이 자연에서 출산한 것임을 환기는 발견하게 되죠. 그리고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백자를 빚은 조선의 도공에게서 찾습니다. 조선의 도공은 완벽한 비례와 균형을 갖춘 도자기를 잘 만들기 위해 인위적인 이론, 규범, 기교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잘 만들고 싶은 마음 없이그저 꽃을 피우는 무심(無心)’한 자연처럼, 도공은 무심하게 백자항아리를 빚습니다. 자연과 하나되어 무심의 경지에 이른 도공이 빚었기에 백자항아리가 자연 그 자체의 미=평범의 미를 고스란히 품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조선이 가진 미의 정수이며, 우리의 미가 가진 특유의 멋임을 통찰하게 됩니다.

(290)

그 평범한 서민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생존을 위해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평범한 일을 매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림 그리기를 반복하는수근처럼 말이죠. 전쟁이 몰고 온 비참한 상황 속에서 가족을 위해 그림을 그리던 수근은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반복적인 그림 그리기와 서민들의 반복적인 일이 결국 모두 가족을 위한 노동이었음을. 평범한 서민 중 한 명이었던 수근은 자신과 그들과의 끈끈한 동질성을 발견합니다. 문만 나가면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서민들에게서 깊은 동정과 연민을 느끼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따뜻한 온정을 느끼며. 마치 그들에게서 자신을 보는 것과 같던 수근은 그들을 화폭에 담습니다. 그 어떤 고상한 정신도, 심오한 주제도 그의 그림에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의 현실이었고, 주변에서 함께 숨 쉬며 하루를 살아내던 사람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수근은 자신의 자화상과도 같은 그 평범한 사람들을 화폭에 담고 또 담기를 반복합니다.

(316)

나는 소녀 적부터 가슴속에 커다란 감상의 주머니를 지니고 있다. 그 주머니가 이날 이때까지 나를 살게 하는 것 같다.”

소녀 시절부터 가슴에 품어 온 감상의 주머니’. 그 주머니에서 외할아버지와의 행복한 추억이 담긴 <조부>가 나왔듯이 뱀 역시 그 주머니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경자에게 뱀은 행복한 추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어릴 적, 친구(화자)가 산나물을 캐다 독사에 물려 죽은 기억이 뇌리에 남아 있는 만큼 뱀은 저주를 불러오는 악한 것이었죠. 자신의 삶이 저주의 늪에서 빠져나와지 못하고 있을 때, 그녀는 본능적으로 감상의 주머니에서 뱀을 끄집어냅니다. 그리고 그 저주의 대상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기로 합니다. 자신의 삶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저주를 물리치기 위해 뱀을 그리며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합니다. 말이 좋아 예술이지 그녀에게 이 행위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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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고세훈 지음 / 한길사 / 2012년 4월
평점 :
품절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아빠가 지금까지 읽은 조지 오웰의 책은 <동물 동장> <1984> <카탈로니아 찬가> 이렇게 세 권이란다. 세 권 모두 재미있게 읽었고, 조지 오웰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단다. 그래서 그의 전기 같은 책을 찾아보다가 우리나라 사람이 쓴 <조지 오웰,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라는 책을 알게 되었단다. 지은이는 고세훈이라는 분인데 아빠는 잘 모르는 사람이야. 책이 두꺼운 양장본이고, 평점이 나쁘지 않았고, 아빠가 좋아하는 출판사 중에 하나인 한길사에서 나온 책이라 샀단다. 그렇게 사 두고 몇 년 동안 책장 한 켠에 꽂혀 있다가 이번에 아빠의 눈에 띄어서 읽게 되었단다.

다시 지은이 소개를 읽어보았어. 정치학을 전공하고 그와 관련된 책들을 많이 쓰시기도 하고 2019년에는 고려대 명예교수로 계신다고 하더구나.(현재는 잘 모르겠어) 고세훈 님은 조지 오웰의 광팬이셨나보구나. 조지 오웰에 관련된 1차자료들 대부분을 반복적으로 읽고 나서 조지 오웰에 관한 글을 써서 모은 것이 바로 아빠가 이번에 읽은 <조지 오웰,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라는 책이란다. 이 책의 분량이 600페이지가 넘는데, 한 사람에 대한 책들을 읽고 그에 대한 독후감일 수도 있는데 그 분량이 600페이지가 넘더니 지은이 또한 대단한 사람이로구나.

조지 오웰. 그동안 아빠는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대충 예상했던 대로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평생을 함께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단다. 이 책의 내용 자체도 방대하지만 아빠는 인상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되도록 짧게 이야기하도록 할게.


1.

조지 오웰의 본명은 에릭 블레어이고 영국인이지만, 1903 6월 인도 식민지 벵갈에서 태어났단다. 아버지가 인도 정부의 하급관리로 일하고 있었거든. 태어나서 얼마 안 있어 영국으로 건너와 교육은 영국에서 받았단다. 조지 오웰의 집은 가난했어. 당시 영국에서는 빈부의 차이에 대한 차별도 심했는데, 조지 오웰이 학생 때 그런 차별을 받기도 했다는구나. 어렸을 때부터 이런 사회의 부조리를 몸소 체험해서 그의 피에 저항이 쌓였을 것 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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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무엇보다 부자애들은 결코 매질을 당하지 않았는데, 오웰의 기억에 따르면, 연소득 2천 파운드 이상의 부모를 둔 아이가 매 맞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가난한 집 학생은, 일류 사립고에 진학하여 학교의 명성을 높일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학비가 감면됐고 따라서 입학이 가능했다. 학교의 명성이 금전적 이익과 직결되던 산황에서 장학금은 학교()편에서는 장기투자였던 셈이다. 우웰이 그 경우에 속했다. 그런데 공짜 점심은 정말 없었다. 반액장학생이던 그가 치러야 했던 비용은 주로 정신적인 모욕과 상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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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마치고 그의 첫 직장은 버마의 경찰공무원이었단다. 당시 버마는 인도 정부 관할 소속이었어. 그러니까 영국의 식민지 중에 하나인 버마에서 경찰로 일한 거야. 이곳에서 약 5년간 생활하고, 1927년 휴가차 영국에 왔다가 경찰공무원을 그만두고 작가를 하겠다고 다짐했단다. 아무래도 버마에서의 경험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 같아. 버마에서 생활은 그가 이후 작가로 일하면서 줄곧 글쓰기의 소재로 쓰이게 되었단다. 저항의 피를 가지고 있는 조지 오웰이 식민지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홀대를 보면서 얼마나 분개했을까 싶었단다. 그 자신이 모국인 영국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제국주의 영국에 대한 비판은 평생 이어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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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134)

오웰이 제국경찰을 그만두고 7년이 지난 1934년에 출간된 <버마 나날들>은 오웰이 동양에 대해 쓴 유일한 반제국주의 소설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붙들었던 <끽연실 이야기>는 버마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미완성으로 남았기 때문에 그 의도와 내용은 추측하기 힘들다. <버마 나날들>은 영국제국주의의 실상에 관한 현장기록이면서 동시에 독자의 정치적 각성과 반성을 유인하기 위한 지식인 오웰의 행동이었다. 버마 체험에 대한 오웰의 회상들이 대체로 그렇듯, 책의 행간 곳곳에는 도저한 석벽(石壁)과도 같은 인종적 편견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이 스며 있다. 오웰은 거기에서 제국주의가 현지인들뿐 아니라 지배자들의 일상에도 깊숙이 침투해서 모두의 싦과 의식을 어떻게 파멸시키는지를 집요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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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본격적으로 글쓰기를 결심한 조지 오웰은 파리에서 1 6개월 동안 글쓰기 전념하였단다. 수입이 없던 그에게 덮친 건 극심한 가난이었고, 폐질환이 처음으로 나타났는데 이 폐질환은 지병이 되어 평생 그를 괴롭히게 된단다. 파리에서의 가난한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영국 런던으로 돌아왔단다. 그렇다고 영국에서의 생활이 넉넉한 것은 아니었어. 그는 영국에서도 가난과 함께 했는데, 이때의 생활을 소재로 한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단다. 왜 사람이 기본적인 삶도 보장받을 수 없는가. 온 세상이 자본주의에 점령당해서 그런 것이었어. 그래서 자본주의를 비판하였단다. 민주주의가 정치 체계에서 옳은 체계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세계에 있는 민주주의라면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하고 파시즘과 똑같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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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특히 전쟁 발발 이전 즉 오웰이 아직 평화주의를 고수하던 때에, 자본주의하에서 민주주의란 파시즘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은 보통사람들의 존엄이 구현되는 사회였다. 그는 인간이 지닌 본질적이고 태생적인 위험이 형제애에 대한 신뢰 그리고 보통사람들의 전통이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평화주의를 떠난 이후에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보통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경계하고 그것의 개선(예방)을 위해 노력하는 한 절망은 언어도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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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내놓은 책이 버마에서의 생활을 바탕으로 한 소설 <버마 나날들>이라는 소설이란다. 그리고 이후 에세이, 소설, 평론 등으로 계속 쓰지만 눈에 띄게 인기를 끄는 작품은 없었단다. 그 즈음에 스페인에서는 좌파 정부가 프랑코가 이끄는 쿠데타에 의해 무너지고 프랑코 독재가 시작되면서 내전에 휩싸여 있었단다. 스페인 내전에 지원하여 직업 참가하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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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스페인 내란 소식을 접한 오웰은 즉시 보통사람의 존엄을 위해 싸우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1936 12 23일 런던을 떠나 26일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신혼생활을 시작한 지 6개월 만의 일이었다. 스페인에서는 공산당이 지지하는 정부가 공포정치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웰의 눈에 바르셀로나의 거리와 사람들 사이에는 평등이 넘쳤다.” 그 광경은 싸워서 지켜낼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보이게 스페인 전쟁은 본질에서 계급전쟁이었다. 이기면 보통사람의 대의는 강화되고, 패한다면 지대수익자들이 환호하리라는 사실, 그 외에 나머지는 모두 거품이었다. 스페인에서 혁명전사가 된 오웰은 바르셀로나에서 일주일 머문 후에 POUM의 독립노동당 분대원으로 아라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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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을 다녀오고 나서 그는 그곳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카탈로니아 찬가>를 썼단다. 이 책에서는 <카탈로니아에 경의를>로 번역을 했는데, 아빠가 읽었던 책은 <카탈로니아 찬가>로 번역을 했단다. 아무튼 그 책에서는 조지 오웰은 자신이 좌파이지만, 좌파에 대한 좋은 글들만 적지 않았단다. 좌파를 이끌어가는 이들의 잘못에 대한 비판을 적어 놓았어. 특히 스탈린이 이끄는 러시아 공산주의의 기회주의에 대해 비판하였고, 스탈린에 대해 무비판적으로 받아 적는 좌파미디어에 대해서 비판하였단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좌파 정당인 독립노동당에 가입해서 활동하게 되는 것도 스페인에서 실망한 좌파의 모습을 보고 나서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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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3)

귀국 즉시 스페인 반파시스트 진영의 내분, 정확히는 스탈린 공산주의 세력의 반혁명적 기회주의적 실상을 낱낱이 밝힌 <카탈로니아에 경의를>의 집필에 착수했다. 그런 작업은 좌파정치의 미래, 진정한 민주사회주의의 앞날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오웰이 아니면 다른 누구도 그 일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 또한 진실이었다. 스페인 상황을 선별적으로 보도하던 좌파미디어는 결과적으로 소련의 입장을 그대로 따른 셈이었다. 오웰은 런던의 지식들이 결코 일어나본 적이 없는 사건들 위에 정서적 상부구조를 구축한다고 탄식했다. 그가 POUM을 강하게 지지한 것도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 언론이 귀기울여주지 않고, 좌파언론은 오로지 중상만 해댔기 때문이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오웰이 스페인에 오기 전부터 POUM파시즘의 직접적 도구로 간주한 것이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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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독립노동당(ILP) 에서 일년 반 정도 활동하다가 그만두었고, 건강이 안 좋아져서 한동안 요양을 했단다. 아직 새파랗게 젊은 35살 즈음이었지.(1938) 1941 8월부터 1943 11월까지는 BBC 방송국에서 일했는데 BBC에서 일하다 보니 문학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어 그만두었다고 하는구나. 1943 11월부타는 좌파잡지 <트리뷴>에서 문예편집장으로 일했어. <트리뷴>이 좌파 진영이었지만,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을 날카롭게 이어졌단다.

조지 오웰에 대해 읽다 보니 그의 사상은 뚜렷했던 것 같았단다. 그는 일단 자신의 조국 영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단다. 하지만 그는 영국의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했단다. 그러면서도 세계2차 대전에서는 독일보다는 영국을 지지하였단다. 당연하겠지. 독일의 나치즘은 인류 역사를 통해 가장 사악한 세력 중에 하나였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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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1)

오웰은 제2차 세계대전을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는 전쟁으로 간주했다. 영국이 독일보다 도덕적으로 반드시 우월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제국주의는 나치즘보다 더 사악하다 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말하고 출판할 자유가 독일보다는 영국에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오웰이 보기에 영제국의 가장 어두운 부분인 인도에도, 전체주의 국가에서보다 훨씬 많은 표현의 자유가 존재했다. 그러나 전체주의의 정신이 독일과 소련을 넘어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이런 절박한 인식이야말로 작가로서 오웰이 전체주의에 결연히 맞서야 했던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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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그는 좌파이고 사회주의자였지만,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러시아 사회주의도 강하게 비판했단다. 러시아는 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아니고, 전체주의라는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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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러시아 사회주의는 내적으로 전체주의화했고, 외적으로 제국주의화함으로써 사회주의의 본래 의미를 철저히 왜곡시켰다는 것이 오웰의 기본 시각이었다. “1930년 이래 나는 소련이 진정한 사회주의로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증거를 거의 보지 못했다. (…) 반대로 나는 그것의 지배자들이 여타 지배계급과 다름 없이 권력을 탈취하고 유지하려고 혈안이 된 위계적 사회로 전화되는 뚜렷한 증거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소련신화를 몰락시키는 일이야말로 사회주의 운동의 부활을 위해 핵심적 과제가 돼야 한다고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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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러시아 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 쓴 책이 바로 그 유명한 <동물농장>이라는 책이란다. <동물농장>의 주인공들은 모두 동물들이지만, 소설 속 동물들은 현시대 정치인들과 매칭을 쉽게 할 수 있었단다. 그런 비판적인 소설이라서 많은 출판사에서 <동물농장>의 출간을 거절을 했다고 하는구나.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45 8월이 되어서야 <동물농장>이 출간되어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어. 그래서 처음으로 가난에서 벗어나게 되었지.

하지만 좋은 일이 있으면 나쁜 일도 있는 법. <동물농장>이 출간되기 얼마 전에 아내 아일린이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단다. 이제 가난에서 막 벗어나려던 시기였는데 말이야. 조지 오웰도 썩 운이 좋지는 않았어. 이제 가난의 딱지를 떼려고 하는데 건강이 다시 급격도로 안 좋아졌단다. 타자기를 쓸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아 다음 작품인 <1984>는 손으로 썼다고 하는구나. 그 책도 전체주의에 대한 경고와 비판을 한 소설로 어두운 미래를 그린 디스토피아 소설이란다.

이 소설이 조지 오웰의 마지막 소설이 된단다. 1950년 폐렴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단다. 죽기 얼마 전 조지 오웰은 재혼을 하게 되는데 약간 의아했단다. 아일린이 죽고 <동물농장>이 출간된 이후 악화된 건강으로 계속 요양하고 치료에만 전념했거든그리고 두 번째 아내가 되는 소니야는 죽기 얼마 전에 알게 되었고, 곧바로 결혼을 하였단다.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서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고, 결혼을 한 지 3달 만인 1951 1 21일 그는 눈을 감고 말았단다. 이 책에서 조지 오웰과 소니야의 사랑에 대해서는 자세히 나오지는 않는단다. 둘 사이의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었을 수 있기 때문에 아빠는 말조심을 하겠지만, 당시 사람들은 소니야가 조지 오웰의 돈을 보고 결혼했다는 비난도 있었다고 하더구나. 더욱이 소니야는 자유분방한 자유연애를 했던 사람이었고, 조지 오웰이 죽고 나서 모든 인세 수혜자가 되었으니 사람들이 그런 시선으로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

영국을 사랑하지만 영국을 비판하고 좌파였지만 좌파를 비판했던 조지 오웰. 그가 바랬던 사회주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민주 사회주의. 그것이 바로 그가 생각하는 진정 사회주의였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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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9-360)

오웰은 도저한 사회주의자였지만, 보통사람에 의해 보통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구현되는 정치에 희망을 걸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입장은 왕왕 인기가 없었고 종종 시대에 뒤처지기도 했지만, 그는 그것을 견지하고 추구하는 데 추호의 망설임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윤리와 함께 가는 것이었다. 오웰은 손수건 산업의 도덕성을 먼저 따진 후에야 코를 푸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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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5)

오웰에게 희망은 (민주적) 사회주의에 있다. 그에게 사회주의는 일종의 도덕적 자유주의이기도 하다. 거기에서 국가는 경제적 삶에 대한 궁극적 책임을 떠안음으로써 국민을 빈곤 실헙 등의 공포에서 해방시키지만, 국민 개인의 지적 삶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때 예술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시대에서처럼, 혹은 그보다 더욱, 번성할 터인데, 예술가는 더 이상 경제적 압박하에서 작업하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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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꿈꾸는 사회주의가 민주 사회주의였지만, 세상은 그의 꿈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단다. 그가 미래를 예견했던 것처럼 러시아의 사회주의는 점점 전체주의가 되어가서 100년도 안되어 스스로 무너져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단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전체주의가 무너졌다고 하지 않고, 공산주의가 무너졌다, 사회주의가 무너졌다고 했단다. 그러니까 사회주의는 잘못되었다는 편견을 갖게 된 거지. 오늘은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정치인들은 반대진영 정치인을 사회주의자라고 비판하기도 하는데, 이는 여전히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자는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기 때문이란다. 물론 민주주의를 표방한 여러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일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고작인 듯 싶구나. 민주주의 장점과 사회주의 장점이 잘 어우러진 정치체계는 정말 어려운 것인가 싶구나.

이번 독서 편지를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것처럼 조지 오웰에 대한 책을 읽기 했지만 그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생각지는 않는단다. 아빠도 이해력이 좋지 않아 이 두꺼운 책, 가제에 보고서라고 단어가 포함된 이 두꺼운 책을 제대로 이해했을 리도 없고 말이야. 하지만, 조금이라도 조지 오웰이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그런 작품들을 쓰게 되었는지 알게 된 것 같구나. 그리고 늘 저항하고 비판하는 조지 오웰의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이 좋았단다.

짧게 이야기한다고 했는데 글이 길어졌구나. 마지막으로 그가 권력에 붙어 먹는 지식인에 대한 비판 한 소절을 소개하고 마칠게. 조지 오웰의 권력욕에 빠진 지식인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것처럼 보였단다. 소위 지식인이라고 하는 이들이 권력 욕심에 기웃기웃하는 것을 요즘에도 쉽게 볼 수 있으니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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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

오웰이 보기에 지식인은 권력을 지니거나 권력을 추구했으며, 늘 권력 주변에 서성댔다. 그가 지식인과 지배계급을 동일시했던 이유이다. 그는 지배층의 오만과 위선을 경멸하듯 지식층과 오만과 위선을 경멸했다. 그에게 지식인의 위선과 권력욕은 모두 가장 가동할 권력의 형식이면서 자본주의 외적 내적 발전형태인 제국주의와 전체주의를 떠받치는 중요한 기둥이었다. 따라서 오웰의 지식인 됨 혹은 지식인으로서의 삶은 그 자체가 가해자의 근원적 죄의식에 닿아 있었다. 그것은 그가 떠남내려감그리고 엄혹한 글쓰기 과정을 모두 개인적 속죄의 근거로 삼는 한에서만 비로소 스스로에게 정당화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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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책의 첫 문장: 이 책은 오웰이 쓴 지금까지 알려진 거의 모든 일차 자료에 대한 반복된 독서를 기반으로 씌어졌다.

책의 끝 문장: 그래서 그는 열정이 소진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쓰는 일을 지속한다.


조지 오웰에게 세인트 시프리언스 예비학교와 버마는 그의 삶 전체, 즉 가난과 전쟁의 체험뿐 아니라 글쓰기에 이르기까지 깊고도 넓게 영향을 미쳤다. 이 점은 무엇보다 오웰의 삶과 작품들이 웅변으로 보여주지만, 여러 계기에 걸친 그의 직접진술과 말년에 이를수록 빈번해지는 회상과 환기, 주변인물과 전기작가들의 증언이 확인해준다. 오웰에게 학창시절과 버마 시절은 삶과 글쓰기의 원체험이었다. - P109

세계가 전체주의로 흐르리라는 오웰의 예감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수록 짙어졌다. 그는 조만간 모든 민족주의 운동은 초인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치고, 히틀러가 떠난 자리에 스탈린, 영미의 백만장자 그리고 드골 유의 온갖 ‘작은 독재자’들이 들어설 것으로 보았다. 세계적 흐름인 중앙집권적 체계는 경제적으로는 기능적일지 모르나 정치적으로는 비민주적 카스트 체제와 같이 가기 마련이다. 거의 신적인 카스트가 꼭대기에 있고 밑에는 적나라한 노예들이 있는 위계적 구조에서 유례없는 자유의 박멸이 진행될 것이다. 그때 언론의 자유는 첫 번째 치명적 죄악이며 후에는 "무의미한 추상"이 될 것이다. 그것은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가 오브라이언의 주장에 따라 4개 손가락을 5개로 보듯, 지도자의 뜻대로 2+2=5가 되는 세상이다. 그때 자율적 개인은 존재가 말살되고 작가는 창조성을 잃을 수밖에 없다. - P166

노동계급 가정이야말로 유대와 평등이라는 동일한 가치가 배양되는 통합공동체의 기초였다. <위건 피어로 가는 길>에서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노동계급 가정에서는 따뜻하고, 품위 있고, 깊은 인간적 분위기를 맛볼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쉽지 않다. 육체노동자는 (…) ‘교육받은’ 사람보다 행복할 가능성이 더 많다. 그의 가정생활은 자연스럽게 더 정상적이고 보기에도 좋게 꾸려진다. 나는 종종 노동계급 가정의 실내가 독특하고도 손쉽게 완전성, 말하자면 완전한 대칭으로 꾸며져 있다는 점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 P254

유럽대륙에 전운이 감돌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오웰의 성찰은 깊어졌고 과격해졌다. "우리는 영국이 민주국가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인도통치에서 보듯이, 겉으로는 덜 자극적일지 모르나 독일 파시즘 못지않게 악하다. 자신의 조국에서부터 자본주의를 전복시키지 않고 어떻게 파시즘에 대항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오웰이 보기에 "파시즘이라는 경쟁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자본주의-제국주의 정부와 협력한다면 이는 파시즘을 뒷문으로 불러들이는 것과 같았다. 적어도 경제체제에 대한 한 영국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는 파시즘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때는 아직 전쟁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 P299

오웰은 도저한 사회주의자였지만, 보통사람에 의해 보통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구현되는 정치에 희망을 걸었던 민주적 사회주의자였다. 그의 입장은 왕왕 인기가 없었고 종종 시대에 뒤처지기도 했지만, 그는 그것을 견지하고 추구하는 데 추호의 망설임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민주적 사회주의는 윤리와 함께 가는 것이었다. 오웰은 손수건 산업의 도덕성을 먼저 따진 후에야 코를 푸는 사람이었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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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편안한 죽음 을유세계문학전집 111
시몬 드 보부아르 지음, 강초롱 옮김 / 을유문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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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인터넷 서점 알라딘의 블로그 알라딘 서재에서 알게 된 책,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이란 책을 읽었단다.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은 양장본으로 디자인이 너무 마음에 드는 시리즈인데, 이 책도 그 시리즈로 나와서 아빠가 선택하는데도 한몫을 했단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이 제목에 들어가 있는데, 역설적이게도 편안한 죽음이라니누가 죽음을 경험해봤다고 편안한 죽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 세상 사람은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해주거나 글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없단다. 그저 다른 이의 죽음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과연 편안한 죽음이 있을까.

이 책의 지은이는 시몬 드 보부아르라는 분인데 보부아르는 이름이 낯설지 않은 이름이구나. 20세기 프랑스를 대표하는 행동하는 지성이라는 소개를 보니, 꽤나 유명한 사람인 것 같은데 아빠는 그저 낯설지 않은 이름이라고밖에 할 수 없구나. 얼마 전 알라딘 서재에서 많이 소개되는 책 <2의 성>이라는 책도 이 분의 작품이더구나. 지은이 소개를 좀더 읽어보니 프랑스 콩쿠르 상도 수상하고 페미니즘 운동도 하시고, 사회문제에 있어서 시위도 직접 참여하는 등 많은 활동을 하셨더구나. 그리고 유명한 철학자 사르트르와 계약 연애를 했다는 내용도 지은이 소개란에 있더구나. 평생을 열정적인 삶을 사신 분 같구나. 이번에 읽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은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경험, 자신의 어머니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적은 글이었단다.

다들 어머니라고 하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일 텐데 그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모든 사람이 힘들 거야. 그리고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경험일 테고 말이야.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주인공이자 지은이에게 감정이입이 되어 같이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읽게 되었단다.


1.

엄마가 욕실에서 넘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간 보부아르. (일인칭 시점으로 소설은 진행되는데, 그 일인칭이 지은이일 테니 너희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그냥 보부아르라고 할게) 병원에서는 대퇴부 경부 골절이 발생해서 입원 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어. 의사들도 낙관적인 소견을 보이면 세달 뒤면 뼈 붙고 정상적인 생활을 할 것이라고 했어. 엄마의 나이 일흔여덟. 기력이 없으셔서 욕실에서 넘어질 수도 있는 나이. 보부아르는 병원에 있으면서 지나온 엄마의 고단한 삶을 떠오르기도 했단다. 쉰네 살에 아버지가 죽고 혼자된 어머니의 삶. 아버지가 그리 착하신 분이 아니고 속만 썩이다가 가셔서 그런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히려 더 열정적인 삶을 사셨던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 한 평생 삶은 억압의 삶이라고 할 수 있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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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자기 생각을 스스로 반박해 보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주 많은 걸 얻게 된다. 하지만 어머니는 전혀 다른 경험을 했다. 자신의 뜻을 거스르며 살았던 것이다. 다양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그것을 참아 내기 위해 엄마는 온 힘을 쏟아야 했고, 그 과정에서 분노를 느껴야만 했다. 엄마는 유년 시절 내내 규범과 금기라는 갑옷을 두른 채 몸과 마음, 정신을 억압당했다. 그리고 스스로를 끈으로 옭아매도록 교육받았다. 그런 엄마의 내면에는 끓어오르는 피와 불 같은 정열을 지닌 한 여인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뒤틀리고 훼손된 끝에 자기 자신에게조차 낯선 존재가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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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신 분이 병원에 입원을 했으니 이것저것 검사를 받아보게 되었는데, 뜻밖의 발견. .

그 동안 소화가 계속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게 악성종양이 소장을 막고 있었기 때문이라고소장을 막고 있을 정도의 종양이라면 진행이 이미 한창 되었다는 의사의 말.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사실도 인정하기 싫지만, 부모님이 암에 걸렸다는 소리를 들어도 인정하기 싫어할 거야. 그만큼 두려운 병이 암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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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 그런 것 같았다. 심지어 암인 게 분명해 보이기까지 했다. 눈언저리에 든 멍이며 살이 빠지는 것 하며. 그런데 의사는 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가 잘 알고 있듯이, 아들이 미쳤다는 사실을 가장 나중에 인정하는 이는 부모고,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가장 나중에 인정하는 이는 자식이기 십상이다. 엄마는 평생 동안 암에 걸리지 않을까 두려워해 온 만큼 나와 내 동생은 엄마가 암에 걸릴 수 있다는 걸 믿지 않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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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엄마에게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단다. 말기암이라는 것을 환자에게 비밀로 해야 하는가, 솔직히 말해야 하는가는 오래 전부터 어려운 문제였던 것 같구나. 최근에는 환자에서 솔직히 이야기하고 치료를 해서 고치자고 희망을 주는 것이 대부분인데, 이 책이 쓰여진 시점에는 환자에게 숨기는 경우도 많았던 것 같구나. 보부아르도 어머니에게 숨겼어. 어머니에게는 그저 복막염이 발견되어 치료가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그렇다고 병세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는 병의 위중함이 커졌다 작아졌다는 반복하면서 몇 번의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오셨단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또 하나의 선택. 말기암이라서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수술을 한다면 생명 연장을 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 이 경우 수술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환자와 환자의 가족들은 의사의 소유물로 전락해 버린다고 지은이는 이야기하고 있단다. 수술을 거부할 경우 쏟아지는 비난을 어찌 감수할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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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사실이었다. 전문가들이 내린 진단과 예측, 그리고 결정을 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악순환에 갇힌 셈이었다. 환자는 의사들의 소유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니 그들의 손아귀에서 환자를 빼내 와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수요일에는 수술과 안락사 중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로서는 굳어 가던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게 되면 엄마가 장폐색증을 견디면서 지옥을 맛봐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게 뻔했다. 의상들이 안락사를 거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요일 아침6시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용기를 내서 N박사에게 그대로 돌아가시도록 어머니를 내버려두세요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내가 어머니를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N박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자 특유의 거만한 태도를 보이며 나를 냉대했다. 의사들은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어머니에게서 몇 년 더 사실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은 셈입니다라고. 내가 엄마를 죽게 내버려 두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은 그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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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고통스러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의사의 수술에 대한 낙관적인 이야기를 듣고 결국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단다. 엄마는 여전히 복막염 때문에 수술하는 줄 아시고


2.

보부아르의 가족은 동생 푸페트가 있는데, 푸페트도 병원에 와서 둘이 함께 어머니 병상을 지킬 때도 있고, 번갈아 가면서 병상을 지킬 때도 있었단다. 병원 밖에 있을 때 임종이 다가왔다고 연락이 오고 병원에 가보면 다시 위기를 넘겨 안정을 취하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 이런 것을 몇 번 경험하는 것은 가족들도 심한 스트레스일 거야. 죽음에 두려움과 이런 순간들의 괴로움이 교차하는 모순. 보부아르와 동생 푸페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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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푸페트는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로 지냈다. 나 역시 혈압이 높아 얼굴이 붉어진 상태다. 우리는 엄마가 임종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또한 그걸 지켜보면서 모순적 감정을 느끼는 우리의 처지로 인해 특히나 힘들었다. 고통과 죽음 사이에 경주가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죽음이 이기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죽은 듯 잠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시계를 매달아 둔 검은색 리본이 미미하게나마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게 위해 엄마가 입고 있는 하얀색 실내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심스레 관찰하곤 했다. 이게 마지막 경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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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을 통해 조금 더 늦춰진 엄마의 죽음. 지은이는 그 늦춰진 죽음에게 자신도 얻은 것이 있다고 이야기를 했단다. 수술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괴로움을 없었다고자칫 수술을 하지 않았다면 죄책감에 괴로워 했을 거라고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은 이처럼 힘든 경험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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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137)

그러나 엄마의 죽음이 늦춰진 결과, 어떤 면에서 우리는 얻은 게 있었다. 그 덕분에 거의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수많은 후회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그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죽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부재로 인해 완전히 소멸하는 동시에 반대로 자신의 현존 덕분에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 이 세계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가 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는, 우리 삶에서 더 크고 많은 자리를 차지했어야 했던 존재, 극단적인 경우에는 우리 삶 전부에 해당하는 존재로까지 여겨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가 다른 이들 중 한 사람에 불과한 존재라는 사실을, 정신을 잃을 전도로 아찔함을 자아내는 이 사실을 외면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한계-물론 한계의 범위를 정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내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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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술을 통해 조금 늦춰진 엄마의 죽음은 얼마 못 가 현실이 되었단다. 보부아르는 병원 밖에 있어서 임종을 지키지 못했단다. 병원에 뒤늦게 도착한 보부아르는 엄마의 얼굴에 드리워진 죽음의 신만 보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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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152)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사랑, 우정, 동료애가 죽음이 야기한 고독을 능가할 때가 있다. 하지만 겉에서 보는 것과 달리, 내가 엄마의 손을 잡고 있을 때조차 나는 엄마와 함께 있지 않았다. 엄마를 속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항상 속고만 살아온 엄마를 거짓말로 끝내 다시 한 번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했다. 엄마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는 운명과 공모한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거부하고 죽음에 맞서 싸우던 엄마와 세포 구석구석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엄마의 패배로 나 역시 쓰러지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임종하는 자리에는 세 번씩이나 참석했던 나는 정작 엄마의 임종은 지키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엄마의 머리맡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조소를 머금은 채 음산하게 춤을 추던 죽음의 신을 보았다. 한 손에 낫을 든 채로 문을 두드린다는, 밤새워 듣던 이야기에 나오는 그 죽음의 신을, 낯설고도 끔찍한 모습을 하고서 머나먼 다른 곳에서 찾아온다는 죽음의 신을 나는 보았다. 죽음의 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입을 활짝 벌리고 턱뼈를 드러내며 웃던 엄마의 바로 그 얼굴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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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아주 편안한 죽음이라고 했지만, 지은이도 이야기한단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고 말이야. 그래 맞아.. 편안한 죽음은 없어. 자신에게도…. 남겨진 이게도 말이야. 지은이가 이야기한 것처럼 죽음은 폭력일 뿐이야. 그것도 부당한 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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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이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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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죽음에 관해 이런저런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었단다. 죽음은 두렵고 피하고 싶지만, 그 누구도 피할 것 없는 것. 그래서 누군가는 그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빠는 솔직히 말해 자신 없구나. 고통은 둘째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어찌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PS:

책의 첫 문장: 1963 10 24일 목요일 오후 4시에 나는 로마에 있는 미네르바 호텔 방에 있었다.

책의 끝 문장: 하지만 각자에게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 해당한다.


나는 엄마를 말리는 데 애를 먹었다. 엄마는 베개에 몸을 기댄 채 내 눈을 바라보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보다시피 매가리가 풀린 게야. 너무 피곤하고 진이 다 빠져버렸어. 내가 늙었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단다. 하지만 내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며칠이 지나면 일흔여덟이야. 완전히 늙어 버린 셈이지. 그러니 준비를 해야겠구나. 인생의 책장을 한 장 넘기려고 해."
- P22

엄마가 다른 이들에게 내 영혼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는 대신에 나를 조금 더 믿고 내게 마음을 더 써 줬더라면 우리 관계가 좀 더 좋을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엄마가 그러지 못했던 이유를 이제는 알겠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에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복수심이 너무나 컸고, 치료해야 할 상처가 너무나 깊었던 까닭이다. 무언가를 할 때면 엄마는 늘 스스로를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하물며 자신의 마음을 헤아리길 거부해 온 엄마가 어찌 나를 이해해 보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 사이가 나빠지지 않도록 태도를 꾸며 내는 데 있어서도 엄마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과 맞닥뜨린 때면 엄마는 무척 당황하곤 했는데, 이는 이미 주어진 틀 안에서만 생각하고 행동하고 느끼도록 교육받은 탓이었다. - 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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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2-25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스럽고 편안한 죽음은 없겠죠? 마지막 문장이 너무 공감이 가네요~ 저도 죽음은 의연하게 받아들이긴 힘들거 같아요 ㅜㅜ

bookholic 2022-02-25 23:29   좋아요 0 | URL
네, 먼 일이라고 생각하고...
주말을 즐겁게 보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