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1971년 6월과 7월,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판결과 서울형사지법에서 행한 시국 사건에 대한 연이은 무죄판결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성은 사실 평지돌출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이나 동백림 사건 당시의 괴벽보 사건은, 그때만 해도 법원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권력이 법원을 몹시 불편해했음을 보여준 사례다.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홍성우 변호사나 최영도 변호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사법 파동 이전까지 법관들은 권력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법원으로서는 중정이나 검찰의 눈치를 봐서 그 위세가 무서워할 걸 못한다든가 하는 분위기나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법파동 이전까지는 상당히 자유롭고 배짱대로 재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서울시장보다도 힘이 세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로는 대법원부터 아래로는 지방법원까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정가와 법조계에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사법부를 손볼 것이라느니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은 다칠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현직 법관 두 명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113)

대법원은 저항권은 인정할 수 없고 긴급조치는 위헌이 아니라면서 피고와 변호인의 고문 주장을 배척했고, 절차상의 위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공판조서가 QUSWHEHLJTEK는 주장도 묵살되었다. 확정판결 18시간 만의 사형집행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 어디에도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하면 안 된다는 구절은 없으니 이 또한 철저하게 ‘합법’이었다. 유신체제는 그로부터 4년 6개월 더 지속되었는데 박정희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더는 군법회의로 보내지 않고 일반법원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살인으로 대한민국 법원은 사법부를 지독히 불신했던 박정희로부터 신뢰를 획득했다. 그러나 독재자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국민들의 마음은 사법부로부터 멀어졌다.


(259)

1986년 4월 23일. 김용철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 사법부에는 조용한 변화가 일었다.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나 시국사건에서는 여전히 정권이 깊이 개입했지만 사법부는 인산구속에 신중해지고 시국사건이나 공안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국대 사건으로 1986년 11월 1,290명이 구속되면서 그 이상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어졌다. 김용철 대법원장은 적극적으로 사법부의 독립을 추구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 법관들에게 보복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런 그의 모습이 안기부의 눈에는 “여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등 무능력한 업무 자세로 일관”하는 ‘주사급’ 대법원장으로까지 비쳤다. 결국 김용철은 1988년 제2차 사법파동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났다.



(353)

이 기막힌 결정에 대해 조영래 변호사는 이렇게 탄식했다. 조금 길지만 꼭 되새겨야 할 말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아무리 뼈아프더라도 이 말을 들어주십시오.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한 그릇의 죽을 얻는 대가로 장자 상속권을 팔아 넘긴 것처럼, 사법부는 한갓 구구한 안일을 구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막중한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에 대하여 사법부에 몸담고 있는 법관 개개인들만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그러나 적어도 사법부로서는 이 사태의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도 전가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두고자 합니다. 용기가 없는 사법부, 스스로의 사명을 스스로 저버린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말하거니와 이 재정신청 기각 결정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사법부의 독립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법부의 존립 근거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 사태의 위험성에 대하여, 사법부에 몸담고 잇는 모든 법관들이 깊이 통찰하고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건곤일척의 몸부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될,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역사적 순간이 도래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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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0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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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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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억압이나 슬픔이 아니라 평안한 기쁨, 보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의식할 새도 없이

우리에게서 삶의 자유와 기쁨을 앗아가버립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매우 교묘하게 작동합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꼼꼼히 살펴보세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란 '소비의 자유'일 뿐이고

자본주의에서 얻는 기쁨이란 '자기 파괴적인 욕망의 충족'일 뿐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욕망의 집어등에 걸려

허우적거리며 깊이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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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모든 것을 고백하며,

기독교도들에게는 평화와 안식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수중에 많이 넣을수록 현대인의 마음에도

여유와 안정이 찾아들지요.

독실한 신자는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 찾아올 때 신의 은총을 느낍니다.

또는 로또 복권에 당첨되거나 주식 투자로 주가가 오르면

우리는 돈이라는 신이 강림한 데 대해 엄청난 황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우리 지배력은 돈을 쓰지 않고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을 꿈꾸는 동안에만 작동합니다.

현실적으로 돈을 사용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버립니다.

이 순간은 마치 신이 떠나버린 듯한 무서운 효과를 낳습니다.

신의 은총을 찾아 다시 교회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돈이 떠나려는 순간,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

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 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해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세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얼마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가 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은 돈의 자유이지 우리 삶의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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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드에게 파리는 악의 꽃, 다시 말해 '악'이며 동시에 '꽃'이었습니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악'은 19세기 파리를 장악하던 산업자본의 힘,

다시 말해 '화페'의 신적 역량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꽃'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상품'이나 '여성'을 상징합니다.

산업자본이란 '악'이 있기 때문에 상품이라는 '꽃'도 가능했겠지요.

보들레르가 파리에 대해 애정과 증오라는 이중 감정을 보인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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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리의 시인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양 극단 사이에서 끝까지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념적으로 어떤 한 가지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인의 숙명이 아니겠지요.

시인은 양 극단의 괴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철저히 응시하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표출하는 존재일 테니까요.

바로 이 점을 가장 잘 알던 인물이 다름 아닌 벤야민 자신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보들레르에 집착하며 19세기 자본주의의 근저를 

보들레르와 그의 모순적 삶을 통해 규명하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겠지요.(200쪽)

==================================================

앞서 살펴본 알제리 농민들의 사유와 너무나도 흡사해서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지금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한 가지 대안으로,

동양의 전통 사유가 각광을 받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산업자본이 일으킨 환경 파괴의 대안으로 

생태철학이 강조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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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류 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선하게 살며,

얼마나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까요?

..

파스칼만큼 인간의 허영과 가식을 깊이 통찰했던 철학자도 없지요.

...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사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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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그나마 위안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였습니다.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사랑이란 감정은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소망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본주의는 늘 인간의 무한한 진보와 번영을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곧바로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가의 노쇠함과 그에 이어지는 필연적 죽음입니다.

육체적 노쇠함은 인간을 탐욕과 축재로부터 벗어나게 하지요.

물론 노쇠해져 죽음이 가까이 왔는데도 자본주의적 탐욕의 갈등이 꺼지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인 유하에게는 이 두 가지 희망이 어렴풋하게나마 그 빛을 발합니다.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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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그래서 이들(10대)은 자신들의 출구 전략으로 '문화'를 선택한다.문화를 통해서 자신들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선생과 부모들에 대해 복수할 것을 결심한다.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아이들이 부모한테 반항하는 패턴은 똑같다.부모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그렇다면 백인 중산층 부모들이 제일 싫어하는 행동은 무엇이었을까.아이들은 그것을 잘 알았다.'화이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라는 부모 세대들을 대표하는 특성을 부정하면서 모든 종교적 교리를 넘어서는 비백인적 행동, 다시 말해서 음탕한 흑인의 밑바닥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 이름이 바로 리듬앤블루스였다.


(77)

리듬앤블루스라는 말의 '리듬'과 '블루스'는 모두 음암과 관련된 말이었다. 하지만 로큰롤이라는 말은 사실 굉장히 위험한 말이다. 단순히 바위가 구른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서 록(rock)은 동사로 '부딪히다, 흔들다'의 뜻이고, 롤(roll)은 '구르다, 휘감다'라는 뜻이다. 리듬앤블루스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음탕한 네 개의 동사인 rock, roll, shake, rattle 중 두 개인 록과 롤로 만든 것이 로큰롤이다. 로큰롤은 흑인 은어로 남녀 간의 성교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서 성교를 뜻하는 은어로 전 지역에서 통용되는 말이 '빠구리"다. 아, 제주도에서는 '빠구리'는 '땡땡이친다'는 뜻이므로 제주도는 여기서 제외한다. 그런데 KBS의 음악 프로그램인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진행자자인 유희열이 새로 음반을 낸 YB를 소개하면서 "우리 YB의 새로운 빠구리 음악을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라고 방송 진행을 했다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그가 바로 영구 방송 출현 금지에 처해질 것이다. 로큰롤이라는 말 자체가 미국 기성세대의 주류 백인들에게 분노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개념이었다.



(119)

서태지와 아이들이 강렬한 기타 연주에 전통 악기를 조합한 <하여가>를 발표할 때 머리를 꼬아서 레게파마를 하고 나온 것은 레게음악을 한다는 상징이었다. 레게파마는 한국식 영어였고, 정확한 단어는 '드레드록'(dreadlock)이다. 드레드록은 "나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을 신종하는 자입니다."라는 뜻이다. 라스타파라아니즘은 흑인왕국주의라는 뜻으로, 흑인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드레드록은 전사의 표식이다. "더 이상 백인의 지배를 거부한다. 나는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전사, 라스타다"라는 표식이었다. 이렇게 모든 패션에는 다 이유가 있다.


(179)

"베토벤의 <교향곡 제7번 A장조 Op.92>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댄스뮤직이다. - 리하르트 바그너


(197)

여기까지가 바흐가 죽고 난 후 베토벤이 죽고 난 뒤까지 약 79년 동안 일어난 일들이다. 이 시기 동안 우리가 알 만한 사람들이 모두 태어났고 죽었다. 그리고 정치, 경제적으로 중요한 두 사건인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이때 모두 일어났다. 하루하루 역사가 매일 새롭게 쓰여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격동의 시기에, 모차르트의 짧은 35년간의 삶과 베토벤의 정말 파란만장했던 57년의 삶이 얹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기반 없이 이 사람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 위대한 예술가들이 시대를 만든 것도 있지만, 결국 이 위대한 예술가를 만든 것은 바로 이 시대였다.


(208)

바흐가 남긴 어록 중에서 정말 바흐를 잘 설명하는 한마디 말이 있다.


"누구나 나처럼 열심히 노력하면, 나만큼 쓸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 같지만, 바흐는 진심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바흐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는 아니었다.



(226)

요제프 2세는 그 오페라의 초연을 보고는 이렇게 딱 한 줄로 표현했다.


"친애하는 모차르트여, 그대의 작품에는 음이 너무 많은 것 같소."




(235)

하이든은 정말 끔찍이도 모차르트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결코 함부로 언성을 높이는 사람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를 비난하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다. 한 번으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곡의 화음이 이상하다는 어떤 동료 궁정 음악가의 지적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모차르트가 그렇게 썼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지."



(252)

상황이 이렇게 달랐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창작의 동기도 달랐다. 모차르트의 꿈은 자기 작품을 자신이 쓰고 싶은 대로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작품은 630개가 넘는 그의 작품 중 몇 개 되지 않는다. 먹고살아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귀족들에게 위촉받은 것이나 후원자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어야 했다. 반면에, 베토벤은 서양음악사 최초로 누구의 주문이 아닌 자신의 뜻대로 작품을 쓴 작곡아였다. 물론 베토벤도 누군가에게 자신의 작품을 헌정했다. 하지만 모차르트와는 달랐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헌정하기 위해서 쓴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곡을 써놓고 난 뒤에 누군가에게 떠맡기듯이 헌정을 했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자기 마음대로 헌정을 해놓고는 돈을 달라고 한 적도 있다. 마치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것처럼 작품을 헌정하고, 돈을 요구해서 받아낸 것이다.




(266)

"친구들이여, 박수를 쳐라! 연극은 끝났다."


베토벤의 유언이라고 알려진 말이다. 폼 나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죽기 하루 전에 한 것이다. 실제로 베토벤은 이런 말을 끝으로 눈을 감는다.


"아깝다, 아까워. 너무 아까워!"


베토벤은 대체 뭘 아까워했던 걸까. 베토벤은 병석에서 와인을 주문했다. 그런데 그 배달이 조금 늦었다. 그는 마지막 와인을 먹지 못하고, 아니 따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는 와인 도착이 너무 늦었다고 한탄하면서 죽었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을 규정하는 말 중에 나는 롤랑 마뉘엘의 이 문장을 가장 좋아한다. 


"베토벤은 음악을 기술에서 의식으로 만든 사람이다."



(270)

모차르트는 죽기 3개월 전 자신의 친구이자 최고의 동료였던 대본 작가 로렌초 다 폰테에게 보낸 편지의 마지막에 이런 말을 썼다.


"쉬는 것보다 작곡하는 것이 덜 힘들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일을 한다."


굉장히 짠한 마음이 드는 말이다.



(272) 

그(모차르트)가 지상을 떠난 바로 이듬해, 스물두 살의 더벅머리 청년이 이 저주의 도시 빈에 등장했다. 그는 스승 하이든의 인도를 거부했으며, 한 번 밖에, 그것도 잠깐 보았을 뿐인, 모차르트의 오만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승계했다. 이 청년 베토벤은 모든 제단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신만이 앉을 수 있는 권좌를 만들었다. 불손하기 그지없었던 베트벤은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을 남겼다.


"더욱 아름다운 것을 위하여 세상에 파괴시키지 못할 규범이란 없다."


나는 이 짤막한 한 줄이야말로 베토벤이 서양음악사에서 영원한 챔피온으로 남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미학적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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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자본주의의 사란 이 공공재를 특권적인 소수의 강자들이 배타적으로 점유, 사유화해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농민이나 하층민들이 삶더와 생계수단을 빼앗기고 도시의 빈민으로 전락하거나 임금노예의 삶을 강요당해온 것은 잘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른바 자본의 원시적 축적 단계에서 벌어진 이러한 폭력적 사태는, 실은 역사적으로 어떤 시기에 국한된 게 아니라 지금까지 그 본질은 조금도 변함없이 다양한 형태로 계속되어왔다. 즉 '강탈에 의한 자본축적'(데이비드 하비,<신자유주의 약사>, 2005)은 자본주의의 일관된 작동 기제라 할 수 있다.


(22쪽)

1999년 총선을 통해 노동당이 제1당이 되었지만, 단독 집권은 불가능해졌다. 노동당은 소수 정당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밖애 없었고, 소수 정당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뉴질랜드의 정책 방향에는 변화가 일어났다. 최저임금이 인상되었고, 소득세 최고세율을 33%에서 39%로 올리는 고소득층에 대한 증세가 단행되었다. 공공주택 임대사업이 개선되었고, 민영화되었던 산재보험이 국유화되었다. 노조의 설립을 장려하고 노조의 지위를 강화하는 고용관계법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올라갔고, 고용 안정성도 증대되었다. 2004년에는 가족수당 제도가 도입되어, 어린 자녀가 있는 저임금 노동자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86쪽)

대학은 운영하는 대학본부는 대학의 운영 목표를 학문 탐구와 지적 성숙을 이끄는 교육에 두지 않는다. 그들의 관심은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기 위해 대학을 관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대학의 관리체제는 기업의 관리체제와 같다. 기업의 경영 결과가 재무제표라는 숫자로 나타나듯이 대학의 운영 결과는 대학의 순위로 나타난다. 가령 순위평가에서 7위인 대학은 6위인 대학에 비해 좋지 않은 대학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대학의 모든 노력은 순위를 올리기 위한 것이 되고, 순위평가에서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 부문은 대학 운영진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정부 역시 대학을 숫자로 관리하며, 그 숫자에 의해 재정지원 여부와 그 규모를 결정한다. 대학정보공시라는 제도는 겉으로는 각 대학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취지이지만, 이 정보 공시에 나와 있는 정보는 그 학교에서 무슨 연구를 하며 어떤 교육을 받는지를 말하지 않는다. 대학에 대한 정보든 숫자이다. 학생의 수, 교수의 수, 논문 편수, 예산 규모, 유학생 수 등이 공시의 내용이며, 이러한 숫자를 나열하면 대학의 면모를 알리는 것으로 간주된다. 숫자가 지배하는 대학, 돈이 지배하는 대학에 대학의 본령인 학문과 교육은 없다. 대학은 이미 몰락하였다.



(88쪽)

자본주의시대의 종말기에 처한 현재, 대학은 이에 대한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삶과 역사, 사회와 개인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인문학과 사회과학은 쓸모없는 학문으로 천대를 받으면서 점점 대학에서 없어지고 있다. 인류사회의 가치와 전망에는 관심이 없는 공학이나 경영학과 같은 실용 학문은 더욱 확대되고 있다. 심지어는 직업훈련 과정에 불과한 인문 소프트웨어, 로봇공학, 영상콘텐츠 개발과 같은 분야가 대학의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142쪽)

이 급진적 변화란 무엇인가? 사실상 세계의 모든 나라에서 초,중등교육은 물론 대학에서도 인문학과 예술 교육이 축소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을 유지하가 위해서 쓸모없는 것들은 모조리 없애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붙들린 정책결정자들의 눈에는 인문학이나 예술은 쓸모없는 장식에 불과학 것으로 비쳐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하고 그것들은 학교의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부모와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빠른 속도로 설 자리를 잃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과학과 사회과학이 갖고 있는 인문학적 측면-상상력과 창조성에 관계된 요소 및 엄격한 비판적 사고-도 단기적인 이익추구에 혈안이 된 국가정책 때문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148쪽)

세계시민이 되자면 정말 인문학이 필요한가? 세계시민이 되자면 우선 많은 사실적 지식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지식은 인문적 교육 없이도 획득할 수 있다. 그러나 책임 있는 시민이 되자면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즉 역사적 증거를 평가하고, 경제적 논리들을 사용하고, 그것들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사회적 공정성 여부를 평가하고, 외국어를 말하며, 세계의 주요 분쟁지역들의 복잡한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사실적 부분들에 관한 지식만을 얻는 데는 인문학과연관된 지적 기술이 없이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연관관계들의 어떻게 되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실적 지식만을 갖는 것은 거의 무지만큼 나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학생들은 정치가들이나 문화적 선도자들이 제공하는 상투적인 것과 진실한 것 사이를, 진짜와 가짜 사이를 구분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역사나 경제에 관한 이해가 지적으로 총명한 세계시민의 육성에 쓸모 있는 것이 되려면 인문적, 비판적 능력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하고, 따라서 종교나 정의에 관한 철학적 이론에 대한 학습과 나란히 이루어져야 한다 



(149쪽)

혁신에는 유연하고 개방적이며 창조적인 정신이 요구된다. 문학과 예술은 그러한 능력을 배양시켜준다. 이런 능력이 결핍될 때 비즈니즈문화는 급격히 쇠퇴한다. 실제로 기업들이 갈수록 편협한 직업교육만 받은 학생들보다 교양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을 선호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역동적인 비즈니스 환경에서 유연성과 창조성을 발휘하여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의 관심사가 오직 국가적 경제성장에만 있다고 할지라고, 인문적 교양과 예술 교육을 더욱 보호할 필요가 있다. 



(154쪽)

<일본의 '영어화' 정책, 망국으로 가는길>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두 지식인의 토론 중에서...

일본어가 학문연구라는 고도의 의론의 장에서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 일본어도 최첨단의 용어를 갖지 못하고 뒤떨어진 언러로 전락합니다. 일본어가 그렇게 열화된다면 그것이 또 일본 국민의 우민화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한편으로, 표면상으로 영어를 매끄럽게 말하는 엘리트들도 모어(母語)에 입각한 깊은 사고력이라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우수한 성과를 올릴 수는 없습니다. 결국, 일본 전체가 우민화를 면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179쪽)

우리가 자기 삶을 돌아보고 사회를 들여다보는 글쓰기의 저자로 거듭난다면 현실정치가 지금과 같은 파행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현실정치가 유권자를 이토록 무시하지는 못할 것이다. 자율적 인간, 그리고 자율적 인간이 형성하는 공동체가 가져야 할 기본 능력이 자기를 표현하는 능력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해, 미디어를 통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분노와 절망을 글로 써내고, 꿈과 희망을 공유해야 한다. 위에 인용한 글의 저자가 말했듯이 소망하는 자만이 이룰 수 있다. 그라민은행을 설립하고 '소셜픽션'을 창안한 무하마드 유누스가 말했다. "꿈은 함께 꿀 때 더 빨리, 더 크게 이뤄진다." 사회적 글쓰기는 함께 꾸는 꿈이다. 집단지성이고 소셜픽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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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라는 건 무엇일까? 경찰은 과연 정의의 편일까?

아니야, 경찰은 단지 법을 어긴 사람을 잡고 있을 뿐이야.

경찰이 지키려고 하는 건 시민이 아니라 법이란 말이지.

경찰은 법이 상처 입는 것을 막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뛰어다니고 있어.

그런데 그 법이란 게 절대적으로 옳을까?

절대적으로 옮다면 왜 끊임없이 개정되고 있을가?

법은 결토 완벽하지 않네.

그 완벽하지 않은 법을 지키기 위해 왜 경찰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걸까?

그 법을 지키기 위해 선량한 사람들의 마음을 마구 짓밟아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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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법은 범죄자를 구해준다.

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갱생할 기회를 주고,

증오하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범죄자를 숨겨준다.

그것을 형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그 기간은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짧다.

한 사람의 인생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는 인생을 빼앗기지 않는다.

더구나 미성년인 경우, 어쩌면 교도소에도 가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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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러했다. 자기의 생활만 보장되면 

다른 사람의 일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소년범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있느냐?

문제 해결을 위해서 무슨 노력을 했느냐?

그렇게 물으면 그도 대답을 할 수 없다.

그제야 그는 깨달았다. 자기 역시 세상을 이렇게 만든 공범자라는 사실을.

공범자에게는 죗값을 치러야 할 책임이 똑같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번에 선택된 사람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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