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전쟁이라는 비상상황 앞에서 기후대응은 언제까지나 뒷전으로 미루어도 좋은 것일까. 현재 기후과학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일은 온난화로 인해서 영구동토층과 심해에 묻혀 있는 메탄이 대기 중으로 풀려나서 지구온난화가 손쓸 수 없이 가속화하는 것이다. 이 위험을 전 세계 440여 기 원전에서 멜트다운이 일어나는 일에 비견하는 전문가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지구온난화의 결과로 많은 지역, 특히 남반구에서 전쟁의 참화와 하등 다를 것 없는 재난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렇게 인류, 특히 북반구 선진국 주민들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무기를 들지 않고도 일상적으로 전쟁에 가담해왔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약탈적 관계 한가운데에 기후변화와 군국주의가 맞물린 위기가 놓여 있는 것이다.


(25)

환경정책은 실종되고 오로지 산업정책만 난무한 이번 정부의 폭주는 고작 1년 만에 국토 곳곳을 난도질하며 짓밟고 있다. 기후위기 극복이라는 지구적 합의에도 빠른 걸음으로 역행하는 정부다. ‘대한민국 1호 세일즈맨을 자처하는 대통령은 환경부에서 산업부처가 되라면서 대한민국의 환경과 우리의 미래를 시나브로 팔아먹고 있다. 다만 무엇을 대가로 받는지는 모르겠다. 여하간 환경부가 아주 기본적인 존재의무도 저버리고 반()환경 정권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는 몇 가지 사례들을 나열해보겠다.


(28-29)

설악산국립공원 오색케이블카 사업은 환경성, 경제성 등 모든 면에서 낙제점으로 이미 지난 정부 때 불허했음에도 막가파식 억지 논리를 받아들여 환경부는 손바닥 뒤집듯 환경영향평가를 협의해주었다. 한국환경연구원, 국립공원공단, 국립생태원, 국립환경과학원, 국립기상과학원 등 5개 전문기관이 부정적인 검토의견을 냈지만 대통령의 공약사항은 무조건 통과다. 해당 지역은 국립공원의 자연보전지구, 백두대간 보호지역 중 핵심구역,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보호지역 카테고리II(보전 중심 관리),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등 국내외 법제도로 겹겹이 보호되고 있는 곳이다. 이제 우리 국토 중 관광용 케이블카가 놓이지 못할 곳은 없다.


(37)

우리가 2050년 탄소중립을 하려면 2021 6 8000t이 넘는 총배출량을 2050년에는 8000t(시나리오 A) 수준으로 줄이고, 8000t을 흡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2030년까지는 총배출량 5 1200t으로 줄여야 한다. 앞으로 7년여 동안 1 6800t을 줄이는데, 그다음 20년은 4 3200t을 줄여야 하니 감축부담을 뒤로 미룬 것이다. 이번에 정부가 수립한 계획의 가장 큰 특징도 2030년 감축목표량을 윤석열 정부 임기 이후로 떠넘겼다는 것이다. 현 정부 임기 동안 2030년까지의 총감축량 25%를 줄이고, 다음 정부는 3년 만에 75%를 줄여야 한다.


(95)

지난해 11월 우크라이나 환경부 등이 전쟁 9개월쯤 군사활동으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을 추계하여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전쟁 7개월 동안 배출된 온실가스는 약 1tCO2eq에 달하고, 이는 네덜란드와 같은 국가가 같은 기간 동안 배출한 온실가스량과 유사한 수준이다. 그러나 전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전투는 우크라이나에서 재생에너지 단지가 밀집한 지역 위에서 벌어지고, 기후위기 대응 프로그램이 운영되던 시설 인근을 배경으로 하기도 한다. 전쟁은 어떤 경제활동보다도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또한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한 국가와 시민들의 노력, 성과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기후위기에 악영향을 미친다.


(147)

재생에너지를 늘려야 하지만 주민들의 목소리가 완전히 묵살당하는 지금과 같은 방식은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2013년 밀양송전탑 반대운동은 원전에서 출발하는 송전선이었고, 반핵운동의 일환이기도 했지만 지금 재생에너지 때문에 다시 똑 같은 일이 벌어질 상황이니 기가 막히지요. 발전원이 원자력에서 재생에너지로 바뀌었다고 해서 결코 친환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어요. 농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발전단지나 송전선 인근 주민들에게는 똑 같은 폭력일 뿐입니다. 얼마 전에 전남 영광에 계신 분과 통화를 했는데, 영광에는 원전이 6기나 있고 방폐장 때문에도 주민들이 고초를 겪는 곳이잖아요, 그런데 신안 앞바다에 8GW 해상풍력단지가 조성되면서 또 송전선을 건설한다는 것인데 이게 영광을 지나가요. 게다가 고형폐기물(SRF) 열병합발전소라고 한빛원전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산업폐기물을 소각하는 발전소도 추진되고 있어요. 도대체 세상이 이래도 되는 거냐고 탄식하시는데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게 우리 현실입니다.


(158)

한번 훼손되고 오염된 땅을 농지로 복원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농지에 불법폐기물 투기하는 일도 종종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것도 빨리 해결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서둘러 계획을 세워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지목이 농지인 것 외에도 간수할 방법도 찾아야 됩니다. 학교에서 농사를 가르치고, 지역사회마다 텃밭을 마련해서 사람들이 농사지을 수 있도록 하고, 아직 남아있는 농지를 최대한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됩니다.


(207)

지금 우리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대 규모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다. 지구 위에서의 삶() 자체의 종언에 맞닥뜨리고 있다. 생물종, 바다, , 호수, 강이 퇴락하고 있다는 기사가 하루도 빠짐없이 나온다.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이 지구의 생물지구화학 체계들을 교란하고 있다. 우리는 마비가 된 것 같다. 아니면 매혹되어 있는 것일까. 지금 인류는 더할 나위 없는 규모로 죽음을 유발하면서, 동시에 죽음을 있는 힘껏 거부하고 있다. 어차피 맞게 될 죽음을 이토록 애써 부정하거나, 언젠가 닥칠 죽음을 예고할 뿐인 얼굴의 주름 같은 것을 물리치기 위해서 이토록 돈을 퍼붓는 문화는 없다. 기술에 의해서 우리의 두려움은 더욱 확대되었고, 죽음과 대면하는 일은 역사의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일이 되었다. 한편 아이러니컬하게도 폭력과 죽음을 묘사하는 영상물은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아이들은 폭력적인 비디오게임에 몰두하고, 약물, 알코올 중독은 만연해 있으며, 사람들은 운전을 거칠게 하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하면서 죽음에 추파를 보낸다.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하면서 또 거기에 끌린다. 이런 현상은 사회적으로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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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윈첼은 리벤트로프를 신사인 척하는 사기꾼이라 불러. 그가 전쟁 전에 뭘 했는지 아니? 샴페인을 팔았어. 술을 파는 장사꾼이었단다. 샌디. 그는 사기꾼이야. 재별 정치인에 도둑에 사기꾼이지. 심지어 그의 이름에 붙은 도 가짜야. 하지만 넌 이런 것들 것들을 전혀 모르고 있어. 넌 폰 리벤트로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괴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괴벨스와 힘러와 헤스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 하지만 난 알고 있다. 폰 리벤트로프 씨가 다른 나치 전범들과 호화 만찬을 즐기는 오스트리아의 성이 어떤 곳인지 들어봤니? 어떻게 그의 것이 됐는지 알아? 빼앗았어. 성주(城主)인 귀족을 힘러가 강제수용소에 집어넣었고, 그래서 술 장사꾼의 소유가 된 거야! 샌디, 단치히가 어디인지, 거기가 어떻게 됐는지 아니? 베르사유 협약이 뭔지 알아? <나의 투쟁>에 대해 들어봤니? 폰 리벤트로프에게 물어봐라. 그가 대답해줄 거다. 그리고 나치의 관점은 아니지만, 나도 대답해줄 수 있어. 나는 오랫동안 지켜봤고, 글을 읽었기 때문에 그 범죄자들이 누구인지 알아. 그래서 너를 그놈들 근처에 못 가게 하려는 거야.


(331)

아버지의 삶이 고되다는 건 아침에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술을 한 잔씩 하는 걸 보고 알 수 있었다. 보통 우리집에서 포어로제스 한 병이 비려면 몇 년이 걸렸다. 절대금주를 유난히 강조하는 어머니는 스트레이트 위스키의 냄새는 물론이고 거품이 이는 맥주잔을 보기만 해도 치를 떨었다. 그리고 아버지 역시 두 분의 기념일이나 저녁식사에 초대한 보스에게 얼음을 넣은 포어로제스를 대접할 때가 아니면 언제 술을 마셨던가? 하지만 이제 아버지는 시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고 샤워하기도 전에 작은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른 후 머리를 뒤로 젖히며 벌컥벌컥 마셨고 그런 뒤에는 즉시 백열전구를 집어삼킨 듯한 얼굴로 변했다. “좋아!” 아버지는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 좋아!” 그런 뒤에야 아버지는 긴장을 풀고 양껏 음식을 먹었고 단 한 번도 소화불량에 걸리지 않았다.


(465-466)

마치 이렇게 해괴한 경우에 다른 사람의 눈에는 옳은 판단과 틀린 판단이 분명히 보이는 것처럼, 그런 곤경에 처했을 때 다른 누구도 어리석음의 손에 이끌리지 않는 것처럼 어머니의 비통함은 후회로, 자신을 향한 무자비한 채찍질로 표출되었다. 어머니는 단지 직감에 따라 행동했으며 그 직감은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도 없었지만, 그녀는 자신이 올바르지 않은 판단을 내렸다며 자책했다. 하지만 정말 가혹하게도 어머니는 설령 본능을 거부하고 행동했다고 해도 어떤 이유를 찾아내 자신의 행동을 개탄했을 정도로 무조건 자신이 파국적인 실수를 저질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어머니가 고통스러운 혼란에 빠져 자책하는 것을 지켜보는(그리고 그 자신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이에게 다가온 것은, 사람이란 옳은 일을 하면서 동시에 잘못된 일을 할 수 있고, 가끔은 그것이 너무 잘못된 일이라 혼란이 지배하고 모든 것이 위태로울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으며(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곧 뭔가를 하는 경우일 때를 제외하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주 큰일을 하는 것이므로) 심지어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흐름에 매일 체계적으로 저항하는 어머니에게도 그렇게까지 불길한 혼란을 감당할 체계적인 방법은 없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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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5)

회의는 새해 시무식 직후 사무동 1층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회장은 임원과 팀장들의 갈채 속에 입회해 회의실 안쪽 가장 큰 책상 뒤에 앉았다. 임원들이 차례로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혁신하겠다는 것인지 내용은 하나도 없었고 핵심 관리 지표라는 것도 모두 타 회사 자료에서 베꼈는지 회사 실정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 중언부언에 말끝마다 혁신, 혁신, 혁신 모두 그뿐이었다. 말밖에 안 되는 말이 중력 없이 떠돌았고 드러낸 것보다 감춘 것이 더 많은 실적 수치들은 속이 텅 빈 전망을 쌓아 올렸다. 하지만 회장은 아무 불만도,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수량 넉넉한 호수처럼 관대하게 웃었고, 횡설수설하는 임원들을 지켜보며 이따금 알아듣겠다는 듯 고래를 끄덕였다. 회의는 원만히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84)

아무리 그렇더라도 귀가 있고 생각이 있으면 임원들의 횡설수설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상관없었다. 회장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틀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회장의 힘이고 지위고 회장을 둘러싼 찬란한 광배였다. 회장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강력하게 군림했다. 임원들이 가짜를 말해도 회장이 진짜라면 진짜가 되고 진짜를 말해도 회장이 가짜라면 가짜였다. 사고 원인을 결정한 사람도 회장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99)

문서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문서란 엉성하고 허술한 현실에서 부스스 떨어져 내린 각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가 문서를 우습게 보는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문서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사람이 현실을, 회사를, 정부나 국가를, 종교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누운 배 한 척이 그렇게 됐듯 사실이라는 것은, 참이나 거짓이라는 것은 힘으로 흔들 수 있었다. 세상은 성기고 흐릿한 실체였다. 그것을 움켜쥔 힘만이 억세고 선명했다. 힘은 우스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리 우스운 것도 우습지 않게 만드는 것이 힘이었다.


(116)

성질 괄괄하고, 억센 부산 사투리를 쓰고, 돌려 말해야 할 것 같으면 차라리 입을 다물고, 현장 안 나간 지 보름이 지나도록 턱 끈 자국이 지워지지 않을 만큼 밖으로 쏘다니며 일하던 남자에게 있는 것은 결국 정이었다. 그 남자가 회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수많은 사건 사고를 겪고 당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려고 애쓰거나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덮어둔 채 버티고 견딜 수 있게 해주던 그 정이,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뜻이었다.


(161)

황 사장이 입을 열었다. “오늘 회의를 기준으로 삼기 바랍니다. 이전에도, 또 다른 회사에서도 똑같이 해왔다는 말 같잖은 소리는 집어치우십시오. 모른다, 확인하겠다, 말만 하지 말고 미리 준비해서 들어들 오세요. 이 회의는 주간 공정 회의입니다. 회의 이름에 걸맞게 지난주 생산 실적을 확인, 정리하고 다가올 한 주의 생산을 제고할 방안을 미리 세운다는 관점에서 준비들 해오세요. 이 회의에 참석한 여러분은 모두 관리자고 책임잡니다. 11초가 귀한 사람들입니다. 설명 같은 변명, 변명 같은 핑계, 핑계 같은 거짓말, 불순하고 무책임한 잡설로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고 남의 시간을 뺏는 일이 없도록 하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황 사장은 수첩을 덮었다.


(166-167)

황 사장은 자신의 책상 양옆으로 앉아 있는 임원들을 봤다. “회사가 어려워지면 회사의 모든 사람이 그 고통을 나눠 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고통을 나누는 게 책임을 나눠 진다는 건 아닙니다. 회사가 어려워진다면 잘못은 내게 있고 또 각자 가지 분야에서 최고참이자 전문가인 임원들, 우리 경영진에 잘못이 있습니다. 책임 역시 내 책임이고 우리 경영진의 책임입니다. 수십 년 일해온 우리가 각자 자신이 맡은 일조차 장담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뒤집어 말해 돌발 상황과 변수를 통제하지 못하고 다른 부서가 일하는 것에 자기 일을 맞춰나가겠다고 하는 이 상황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내 일의 주도권을 남에게, 외부 요인에 내줬다는 게 명백한데도 그걸 되찾을 거라고, 되찾아야 한다고 어떻게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실패와 지연에 적응하고 익숙해질 수 있습니까?” 회의실 안은 적막했다.


(177)

결국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과거입니다. 이미 일어나고 지나간 것을 어떻게 바꾸는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할 테지만 나는 다르게 봅니다. 과거야말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겁니다. 링 위에서 똑바로 못 했다면 이유가 뭐겠습니까? 링에 오르기 전까지, 링 밑에서 똑바로 안 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견디고 헤쳐나가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과거, 되레 우리 발목을 잡고 억압하는 과거, 인습, 껍데기뿐인 규정과 규제, 타성, 그런 것들이야말로 바꿀 수 있고 바꿔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현재를 돌파하는 데 도움 주는 것들, 전통, 통찰, 지혜라고 부르는 것, 아니 더 쉽게 말해서 지금도 쓸모 있는 것,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것, 많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옳고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만 과거에 남겨둬야 합니다.


(241)

그게 말입니까? 잘못은 한 사람이 저지르고 수습은 왜 열 사람이 나눠 합니까? 임원이라서요? 생각들 똑바로 하세요! 임원이기 때문에 한 사람도 수습할 일 없게 일해야 하는 겁니다! 당신들이 똑바로 안 하면 당신들 밑에 있는 수십 명이 바로 당신 하나 때문에 개고생, 헛고생을 해야 한단 말입니다! 이사 행세, 상무 행세, 뭐든 다 아는 척 거들먹거리면서 대접이나 받고 특권이나 누리라고 회사가 그 많은 연봉을 당신들에게 지급한다고 생각합니까? 당신들부터 똑바로 하세요!


(301)

월급이란 젊음을 동대문 시장의 포목처럼 끊어다 팔아 얻는 것이다. 월급을 받을수록 나는 젊음을 잃는다. 늙어간다. 가능성과 원기를 잃는 것이다. 존재가 가난해진다. 젊음이 인생의 금화라던 황 사장의 말 역시 수사가 아니다. 이대로 10, 20년 또 어느 회사에서 삶을 보내든 그 회사가 모두 이렇다면 내 인생의 금화는 결국 몇 푼 월급으로, 지폐로 바뀌어 녹아버릴 테고 나는 그저 노인이 돼 있을 터였다. 그다음은 끔찍하다. 명예퇴직, 권고퇴직, 그런 말 아닌 말로 수십 년 회사 일에만 길들고 늙은 사람인 채 양계장에서 풀어준 노계처럼 세상에 나올 것이다.


(302)

나는 계속 일했다. 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었고 산정으로 밀어 올리면 굴러떨어지고 다시 밀어 올리면 다시 굴러떨어지는, 아무 희망도 보람도 주지 않는 시시포스의 바위처럼 매일 굴러떨어졌다. 젊은 카뮈는 매일 굴러떨어지는 바위의 부조리와 그것을 각성하면서도 그치지 않는 투쟁에 관해 썼다. 투쟁을 통해 부조리를 비웃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유일한 미덕이고 행복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 바위는 결국 모든 것을 깔아뭉갠다. 신이 아닌, 노쇠할 수밖에 없는 인간은 결국 바위를 이기지 못한다. 어리석음도, 각성도, 비웃음도, 경멸도, 희망도, 젊음도 굴러떨어지는 바위의 요란한 소리에 묻힌다. 쾅쾅쾅! 늙은 인간을 깔아뭉갠 바위만이 저 끝, 힘이 다해 더 굴러갈 수 없는 곳에 멈춘다. 모든 것이 침묵한다.


(326)

분명한 것은 일을 일로 하지 않는 회사는, 야합과 담합으로, 협잡과 인습으로, 사람에게 일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에 사람을 끼워 맞춰가며 시키는 회사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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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우리는 자주 예술 작품을 통해 한 시대의 개성과 변화를 발견하게 된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받는 독특한 느낌과 기묘한 불균형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빈의 모습 그 자체다. 19세기 말의 빈은 다가오는 다음 세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중세 시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빈은 미래보다는 과거를 더욱 갈망한 도시였다. 클림트의 그림들은 빈의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을 고스란히 반영한 결과물이었다.


(17-18)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말처럼 클림트가 살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어제의 세계였다. 황제가 거주하던 도시, 19세기 말에 바로크 스타일의 궁전과 고딕 양식의 교회를 지었던 시대착오적인 도시가 클림트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과거지향적인 분위기에서도 변화는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19세기를 떠나 20세기로 전진하는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기가 바뀌는 와중에 클림트는 먼 과거와 먼 나라에서 찾아낸 영감을 통해 혁신적인 걸작들을 창조해냈다. 그 혁신 속에서 발견되는 무수한 모순과 불균형들은 천재이기 이전에 빈 사람이었던 클림트가 뛰어넘을 수 없는 한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클림트의 걸작들은 과거인 19세기도, 미래였던 20세기도 아닌 제3의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으며, 그 독특한 아름다움은 어느 누구와도 닮지 않은 개성으로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 클림트의 걸작들은 변화하는 시대와 복잡하고도 모순된 한 도시가 놀라운 천재성을 만나 이뤄낸 유니크한 혁신이었다.


(66-68)

클림트의 일생에서 가족의 그림자를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다. 클림트는 놀라울 정도로 자신의 가족에서 집착했고 타계하는 순간까지 가족과 함께 살았다. 클림트에게 필생의 연인이었던 에밀리 플뢰게를 만나게 된 것도 그가 늘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가족에 대한 집착이 시작된 것은 1892년이었다. 그해 아버지 에른스트가 뇌출혈로 쓰러져 사망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서 동생이자 동료, 예술적 동지이기도 했던 에른스트가 심근경색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당시 클림트의 나이는 서른, 에른스트의 나이는 스물여덟에 불과했다. 연이은 비극이 클림트 일가를 덮친 셈이다.


(75)

오랜 세월 빈은 모든 역사적 발전에서 동떨어진 장소였다. 그것은 다분히 빈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이기도 했다. 19세기 말, 바다 건너 뉴욕에서 22층짜리 고층빌딩이 지어지고 같은 유럽 대륙 내의 파리에서도 철골 구조로만 이뤄진 높이 304미터의 에펠탑이 세워지며 현재의 도래를 알리고 있을 때, 빈 사람들은 오히려 바로크풍의 웅장한 박물관과 르네상스 스타일의 기둥으로 장식된 부르크 극장을 세웠다. 그리고 그처럼 과거에 영원히 머물고 있는 자신들을 자랑스러워했다. 오스트리아 예술가 조합은 심지어 자국 예술에 해악을 끼친다는 이유로 해외 작가들의 오스트리아 전시를 금지했을 정도다.


(105-108)

빈 대학 천장화를 그리면서 클림트가 본인의 스타일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천장화를 그리기 이전부터 클림트는 황제와 귀족의 청탁을 받아들여 최대한 그들의 의도를 부각시키는 역사와 작업에 진력을 낸 상태였다. 마치는 클림트가 타고난 리더십을 가진 이였다면서, 친구들이 클림트 장군이라는 별명으로 그를 불렀다고 회상했다.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처럼,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서 어떠한 주저함도 보이지 않았다. 클림트가 가장 존경했던 예술가는 클래식 음악의 혁명가 같은 존재,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1902년 제14회 빈 분리파 전시에서 선보인 <베토벤 프리즈>는 베토벤, 아니 예술 자체에 바친 클림트의 신앙고백이나 다름없었다.


(124-126)

금세공업자의 아들인 클림트는 금을 얇게 펴서 바르는 중세의 기법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은 금을 칠한 벽화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흥분했다. <베토벤 프리즈>가 큰 화제를 모은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었다. 클림트의 동료들은 이 새로운, 동시에 지극히 고답적인 재료의 등장에 관심을 기울였다. 금의 사용은 예술가를 마치 신처럼 보이게 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내심 클림트가 바라던 바였다. 클림트의 황금시대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159)

벨베데레 미술관의 <키스>가 전시된 방으로 들어서면 검은 벽에 <키스> 한 점만이 걸려 있고 그 앞으로는 관람객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몰려 있다. 독일어, 영어, 중국어, 한국어 등 각 나라 가이드들의 열띤 해설이 한꺼번에 들려온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과 소란은 이 그림 앞에서 일순간에 정지한다. 남자가 여자의 몸을 안고 볼에 막 입을 맞추려고 하는 순간이다. 하나가 된 두 사람의 주위로 온통 황금빛 비가 내리고 있다. 이것은 곧 소멸하기 전의 우주, 마지막으로 빛나는 불꽃의 광휘와도 같다. 극도로 관능적인 순간이지만 결코 천박하거나 노골적이지 않다. 직사각형 문양의 가운을 입은 남자는 황금빛 구름을 몰고 천상에서 지상으로 막 내려온 듯하고 꽃무늬 옷을 입은 여자는 지상에서 막 피어난 것처럼 보인다. 여자의 발목에는 황금빛 넝쿨이 감겨 있다.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지만, 남녀가 서로를 갈구하는 감정은 너무도 강렬하게 느껴진다.


(161)

<키스>는 화가로서 클림트의 인생이 함축된 작품이기도 하다. 남녀의 뒤로 펼쳐진 어두운 배경이 된 암흑은 그의 여름 휴가지인 아터 호수의 고요히 일렁이는 물결과 엇비슷하고, 기하학적인 황금빛 무늬는 라벤나에서 본 비잔티움 모자이크, 그리고 아버지의 금세공 작업을 연상시킨다. 결국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화가로서 클림트의 인생은 <키스> 한 점에서 모두 표현된 셈이다. 가득한 사람들, 그리고 갖가지 언어로 들리는 해설에도 불구하고 전시실은 고요했다. <키스>는 모든 것을 압도하는 거대한 침묵과도 같았다.


(188)

여자가 없는 클림트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에게 여자란 자기 스스로에게 주는 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클림트의 작업실은 막 피어오르는 꽃들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그녀들 중에는 보통 가정에서 자란 평범한 처녀도 있었고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알 만한 귀족 가문의 레이디도 있었으며 유대인도, 부유한 상인의 딸도 있었다. 클림트는 그들 모두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향기 속에 싸여서 살았다. 아마도 클림트보다 더 현재의 여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언론인 프란츠 세르베스가 1912년 클림트의 여성 편력에 대해 쓴 글의 일부분이다.


(199-200)

하지만 에밀리 플뢰게를 단순히 클림트의 연인으로만 부를 수는 없다. 그녀는 일생 동안 클림트의 삶과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단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클림트의 연인인 동시에 예술적 동료였으며 매니저였고 삶의 조력자이자 후원자였다. 클림트는 에밀리와 평생 동안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거리낌없이 다른 여자들, 특히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기거하던 모델들과 성적 관계를 맺었다. 에밀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체 어떤 여자가 자신의 실질적인 남편을 다른 여자들과 나누어 가질 수 있을까? 그러나 에밀리와 클림트에게는 이 기묘한 관계가 별달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랭크 휘포드는 이 관계에 대해 빈의 부르주아 남성들은 아내를 두고도 거리낌 없이 외도를 즐겼다. 말하자면 클림트와 에밀리 사이의 관계는 조금 느슨해진 중년 이후의 부부와 엇비슷했다.”고 설명했다.


(264-266)

실레는 열입곱 살이던 1907년 클림트를 처음 만났다. 당시 실레는 빈 미술학교 학생이었고 클림트는 이미 빈 분리파와 빈 공방을 통해 오스트리아 전체에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다. 그러나 실레의 드로잉을 본 클림트는 이 소년의 넘치는 재능에 압도되고 말았다. “제가 재능이 있다고 보시나요?”라는 실레의 물음에 클림트가 재능이 많아, 너무 많아라고 대답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그리고 클림트는 덧붙였다. “나도 자네처럼 사람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으면 좋겠네.” 실레가 클림트에게 자신의 드로잉과 클림트의 드로잉을 바꾸자고 제안했을 때 클림트는 이렇게 답했다. “왜 자네 걸 내 것과 바꾸려고 하지? 자네 그림이 훨씬 더 나은데 말이야.” 이 대답의 의미를 실레는 곧 깨닫게 된다.


(281)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한 화가였으나 작품에 대해서는 늘 평가가 교차했다. 보수적인 빈의 분위기 속에서 클림트의 관능적이고 파격적인 그림은 많은 비판과 논란을 불러왔다. 1908년 오스트리아 정부가 <키스>를 구입하면서 위상은 더욱 높아졌지만 대중의 사랑을 받는 예술가는 아니었다. 더욱이 사망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고 빈 역시 쇠락하면서 클림트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졌다. 잊혔던 클림트의 작품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사후 약 5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다. 클림트를 비롯해 이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가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어나면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클림트는 순식간에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288)

예술의 도시 빈에는 여러 예술가들의 흔적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남아 있다. 도시 곳곳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 요한 슈트라우스와 슈베르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거장들 중에서도 클림트처럼 빈에 자신의 발자취를 확실하게 남긴 이는 없다. 클림트는 빈의 공기 속에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존재다. 빈 슈베하트 국제공항으로 입국하는 이들은 누구나 공항 벽에 펼쳐진 <키스>의 이미지를 만나게 된다. 실물보다 훨씬 더 큰 그 이미지들은 클림트의 도시 빈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이 오래된 황제의 도시는 이제 예술의 황제로 클림트를 떠받들고 있다. 제국의 광휘는 오래전 사라졌으나, 클림트의 영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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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하지만 누군가는 겨우 2000년 동안이 아니냐고 반문할 것이다. 더 오래전에는 어땠을까? 한 연구에 따르면 전 세계 73가지의 데이터 출처에서 자료를 종합한 결과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에서 5000년 전 사이의 초기 홀로세(Holocene)에는 산업화 이전 시기에 비해 겨우 0.5℃ 남짓 따뜻했을 뿐이었다. 2015년 이후로 기온이 산업화 이전보다 1℃ 넘게 높아졌다는 점을 고려하면, 오늘날의 지구는 1 8000년 전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이후 어느 시점보다도 따뜻하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역사상 오늘날의 변칙적인 고온 현상을 비슷하게 보였던 시기를 찾으려면, 마지막 빙하기에서 더 내려가 과학자들이 에미안 간빙기라고 부르는 11 6000년 전에서 12 9000년 전 사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36)

2019년 역시 획기적인 해였다. 그린란드 전역의 기온이 예년 7월 말의 평균에 비해 12℃나 치솟았고, 2019 7 30일에서 31일 사이에는 빙상 꼭대기에서 다시 한 번 얼음이 녹았다. 고도가 가장 높은 점에서 이 시기의 기온은 2012년에 세워진 이전 기록을 넘어섰고, 이후 이틀에 걸쳐 영상을 유지했다. 이런 급속한 변화에 대응해, 일부 과학자는 21세기에 해수면이 예전의 예측보다 더 상승할 것으로 조정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79)

산불은 전 세계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하고 파괴력도 더 커지는 것처럼 보인다. 2017년에는 칠레, 지중해 지역, 러시아, 미국, 캐나다에서 광범위하고 심각한 산불이 목격되었다. 과학자들은 전 세계적으로 산불이 발생하는 기간이 지난 15년 동안 거의 5분의 1 길어졌고, 지구 전체적으로 식물로 뒤덮인 면적의 절반에서 화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캘리포니아주 파라다이스의 주민들이 불행히도 2018년의 재난을 통해 발견했듯이, 산불은 전례 없는 강력하고 치명적인 속도로 번질 수 있다. 이 산불은 어느 순간 초마다 축구장 하나를 덮칠 정도로 번졌다.


(109-110)

정확히 언젠가 될지는 모르지만, 기온이 2℃ 상승한 세계가 지속되다 보면 우리는 북극해의 얼음이 완전히 사라져 지난 300만 년 동안 처음으로 얼음이 없는 북극의 풍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생존해 있는 중년이나 그보다 어린 사람들은 대부분 역사적인 이정표가 될 이 사건을 지켜볼 가능성이 높다. 인류 역사상 어떤 인간도 만년설과 마주하지 않은 채 북극을 배로 횡단할 수는 없었다. 그린란드의 빙상이 훨씬 더 작았고 북쪽 지방까지 숲이 확장되었으며 사하라 사막에 호수와 습지가 가득했던, 빙하기 사이의 따뜻한 기간인 이전의 간빙기 동안에는 북극에는 녹지 않는 얼음이 있었다. 이 얼음이 사라지는 날인 북극의 데이 제로는 다른 것들 못지않게 지구온난화의 표지가 될 것이다.


(135)

연구자들은 북반구의 도시들이 평균적으로 남쪽으로 1000킬로미터 떨어진 더 따뜻한 지역의 현재 기후와 비슷해지면서 모든 도시가 아열대 기후로 이동하는 경향이 생긴다라고 지적했다. 연평균 약 20킬로미터의 기후 속도로 이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여러분이 북반구 중위도의 어딘가에 거주하고 있다면 1년에 20킬로미터, 즉 하루에 약 54미터, 또는 시간당 2.25미터의 속도로 남쪽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초속으로 환산하면 1초에 0.5밀리미터가 조금 넘으니 육안으로도 감지할 만한 이동 속도다.


(142)

기후변화를 가장 적게 일으킨 사람이 그 부작용을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부당함 가운데 하나다. 그리고 이런 부당함을 가장 제대로 겪는 지역은 아마 아프리카일 것이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1인당 탄소 배출량은 보통 부유한 선진국의 10분의 1수준이다.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의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0.8톤으로, 미국의 16, 호주의 15, EU 6톤에 비하면 훨씬 적다. 하지만 아프리카인들은 지구온난화에 거의 기여하지 않았는데도 지구온난화의 부작용과 영향을 피해갈 수 없다. 사실 지구상 가장 격렬한 기후변화의 현장 가운데 일부가 아프리카 대륙에 자리한다.


(187)

그렇다면 플라이오세는 어째서 기후가 따뜻했을까? 오늘날 기후학자들은 주요 온실기체인 이산화탄소가 지구 표면의 기온을 높이는 큰 원동력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플라이오세 동안 대기 중 탄소의 정확한 평균 농도는 다수 불확실하지만, 재현과 모델에 따르면 오늘날보다 약간 낮은 약 400 ppm이라는 수치로 수렴된다. 빙하학자들이 그린란드의 빙하기 녹는 현상은 이제 돌이킬 수 없으며, 현재와 비슷한 수준의 이산화탄소 농도로는 빙하가 전혀 형성될 수 없으리라고 주장한 것은 놀랍지 않다. 연구자들은 지금의 탄소 배출량 추세가 2030년까지 이어지면 지구는 다시 플라이오세로 돌아갈 것이라 이야기한다. 이것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우리가 보기 원한다면 그 답은 전 세계의 바위에 쓰여 있다. 해수면의 상승과 사라진 빙하, 그리고 생태계의 급격한 변화가 그것이다.


(210)

내가 보기에 전 세계적인 식량 부족은 기온이 3℃ 상승한 세계에서 대규모 문명 붕괴를 일으킬 가장 유력한 요인이다. 급성장하는 전 세계 인구가 식량 공급의 실패와 지역 분쟁, 그에 따른 실패한 국가라는 동시다발적인 붕괴에 직면하면서 수백만 명이 기아와 내전에서 도망치려 할 것이다. 이들은 가뭄과 폭염의 직접적인 영향에 의해 고향에서 밀려 나온 사람들과 합류할 테고, 이런 흐름은 비슷한 여러 나라의 전반적인 거주 적합성을 위협한다. 그에 따른 난민 발생은 시리아 내전 당시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는 결과를 낳았다. 안전과 피난처를 찾는 수백만 명의 난민들은 목적지였던 유럽 국가들에서 반이민 정서를 촉발시켰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로 추악한 극우 정치가 부활하게 되었다.


(237)

북극 만년설의 손실은 심각해지는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은 결과다. 사실상 북극해 전체를 가로질러 얼음이 사라진 해역이 펼쳐지면서, 여름철 동안 태양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열이 흡수된다. (얼음 없는 탁 트인 바닷물은 해빙의 6배에 달하는 태양열을 흡수한다.) 그러면 이 태양 에너지가 겨우내 온기와 습기의 형태로 방출되어 중위도와 고위도를 가로지르는 폭풍의 경로를 변형시키고, 고기압과 저기압의 중심에 변화를 가져오며, 제트기류를 다른 곳으로 쫓아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흰색의 눈과 얼음이 사라지면서 알베도의 변화가 생겨 결과적으로 지구 전체의 에너지 균형을 바꾼다는 점이다. 반사량이 높은 극지방 얼음에 의해 우주로 반사되는 태양광이 적어지기 때문에, 더 많은 태양열이 어두운 육지와 해양에 흡수되고 지구 시스템 안에서 다시 순환된다.


(286)

지표수는 탄소가 풍부한 대기에서 더 많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바다를 산성화할 것이다. 남극해는 이번 세기가 끝날 때까지 면적의 90퍼센트가 탄산칼슘으로 불포화될 텐데, 이것은 해양 먹이사슬의 근간이 되는 여러 식물성 플랑크톤을 포함한 껍데기를 만드는 유기체들이 살아남기에는 바다가 너무 산성화된다는 의미다. 해양의 산성화는 산호가 고개를 내미는 곳마다 그 구조물을 녹여 버리고 기존의 오래된 산호초를 지속적으로 해칠 것이다. 또 탄소가 풍부해진 바다에서 유독성 조류가 증식해 연안 대륙붕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어류를 죽이고 독성 있는 해조류를 발생시킬 것이다. 그리고 바다는 깊은 곳에 탄소를 격리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바다 표면을 점령하는 탐욕스러운 해조류들이 탄소가 바닷물 속으로 가라앉기 전에 그것을 재활용하기 때문이다. 이번 세기말까지 10년마다 20억 톤의 탄소를 대기 중에 추가로 옮겨놓을 이 과정은 기후변화를 일으키는 또 다른 간과된 양의 되먹임이다.


(375-376)

미래를 내다볼 때, 우리가 높은 배출량을 유지하는 경로를 따르다 보면 이번 세기말에 이산화탄소 농도는 1200ppm까지 상승한다. 오늘날 더 뜨거워진 태양과 함께, 이 층적운 효과는 메탄의 용해라든지 다른 되먹임과 더해져 지구를 문턱값 이상으로 밀어내 궁극적으로는 고삐 풀린 온실 상태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 위험성을 수량화하기는 무척 어렵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화석 연료를 계속 태운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놓여 있든 이 끔찍한 최후의 티핑포인트에 가까이 다가갈 것이다. 탄소 배출량을 줄이지 않겠다고 거부하다가는 인류라는 종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훌륭하게 아름답고, 다양한 생명을 양육하고 키워 냈던, 아마도 우주 역사상 유일한 행성인 지구를 말이다.


(397)

이 모든 이야기가 버겁게 들린다면 한 가지를 기억하라. 아직은 전부 망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당장 내일부터 전 지구적으로 탄소배출을 멈춘다면, 온난화는 1.5℃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약간의 추가 온난화와 빙하 융해가 이미 진행 중이어서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비중이 크지는 않다. 탄소 관련 전 세계 온도 조절 장치는 여전히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앞으로 건설될 공황 활주로, 불이 붙을 석탄 보일러, 시동이 걸릴 가솔린 엔진처럼 아직 완결되지 않은 선택지들이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뜨거워지고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을지 결정하게 될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는 피할 수 없는 종말론에 대한 불길한 예언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선택지에 대해 설명하고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이 책에서 제시한 증거를 인류의 미래를 바꾸기에는 너무 늦었다라고 선언해야 할 이유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면, 의도적으로 내 메시지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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