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고고학은 쉽게 설명하면, 유물을 연구해서 과거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 지식, 문화 등을 밝히는 것이다. 인간은 왜 그렇게 과거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많았을까?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그렇지 않다. 그건 바로 과거를 생각하고, 이를 통해 미래를 예측하는 인류의 진화하는 숙명에 기인한다.


(44)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고학 하면 일반인들이 떠올리는 보물찾기의 실상은 사실 죽은 사람을 위해서 넣어놓은 마지막 선물이다. 죽은 자를 위한 선물 그리고 영생을 갈구하는 인간의 영원한 화두를 무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 서사시, 진시황이 얻고자 했던 불사약, 나아가서 다양한 영화들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람들은 영생을 꿈꾸는 인간 욕망의 다른 이름이다. 하지만 모두 영생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대신 영생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무덤을 만들었고, 우리는 그를 통하여 삶에 대해 더 배우게 된다. 영원을 향한 인간의 마지막 바람과 체념이 녹아 있는 기념물이 바로 무덤이다.


(66)

5000년 전 중국에서 새로운 술이 등장했다. 고고학자들이 좋아해 마지않는 술, 맥주다. 스탠포드대학교 고고학자 류리는 2016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최신의 분석방법으로 중국 최초의 맥주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섬서성 웨이허강 유역의 5000년 전 양사오 문화에 속하는, 실크로드가 중국으로 오는 끝자락인 미자야 유적에서 밑이 뾰족하고 주둥이도 좁은, 양조를 하기에 적당한 토기를 발견했고, 그 바닥에 남은 곡물의 찌꺼기를 분석했다. 그 결과 양조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수수, 율무, 식물의 구근 덩어리 그리고 보리가 섞여 있음을 알아냈다. 단순하게 곡물을 담는 항아리였다면 이들 재료들을 같이 넣을 리가 없다. 맥주와 같은 술을 빚지 않고는 이 곡물들이 같이 나올 수 없다. 이렇게 중국에서 가장 최종의 맥주가 발견되었다. 게다가 보리는 중국에서 자생하는 곡물이 아니었다. 이는 바로 5000년 전에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동서의 교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86-87)

즐겁게 살아간다는 건 중요하다. 그것이 정신적인 즐거움이든 육체적인 즐거움이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필요하다.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는 알 수 없다. 각자에서는 각자의 가치관이 있기 대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즐거움을 추구할 때에 균형이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절제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대가 없는 즐거움은 없기 때문이다. 쾌락만을 좇는 대가는 늘 생각보다 위험하고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 우리를 향한다.


(95-96)

과거의 예술에서 음악이 차지하는 비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박물관이다. 원래 박물관을 뜻하는 ‘museum’은 음악의 여신 ‘Muse’를 모시는 신전의 의미에서 유래했다. 뮤즈는 고대 그리스의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이다. 기원전 7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의 시인 헤시오도스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9명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음악뿐 아니라 문예, 미술, 철학 등을 관장했다고 한다. 이 뮤즈를 위한 신전은 음악을 비롯하여 당시의 다양한 예술과 학문이 한데 어우러진 문화의 공간이었다. 즉 뮤즈를 위한 의식에는 음악과 함께 당시에 제작된 최고의 예술품인 회화, 조각 등이 선보여지고, 역사와 철학에 관한 다양한 학문적 성과가 봉헌되었다. 이 뮤즈의 신전은 그리스 문화가 확산되면서 각지로 전파되었다.


(106-107)

가야금 이전에도 또 다른 현악기가 있었다. 서양에서 발달해 실크로드를 통해서 중국과 한국으로 전래된 하프의 일종인 공후이다. 이 공후는 동쪽으로는 알타이까지 이어졌다. 고조선 가요인 <공무도하가>는 공후를 타면서 부르는 노래다. 이 가요를 채록한 사람은 고조선의 하급관리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고조선 당대 또는 고조선 멸망 직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그 지은이에 대해서는 뱃사공, 곽리자고,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 등 다양한 설이 있는데, 아마 많은 노래가 그러하듯 채록되고 확산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이 <공무도하가>는 이후에도 계속 남아서 명실상부 한국을 대표하는 고대가요가 되었다. <공무도하가> 1세기 때 채옹의 <금조>, 4세기 초에 쓰여진 최표의 <고금주>에 이미 등장한다. 그리고 이후 동아시아 일대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다.


(125)

고고학의 원칙 중 하나가 발굴하지 않고 땅속에 두는 것이 가장 큰 보존이라는 점이다. 현재의 최신 기술로 유물을 발굴한다. 하더라도 한계는 있다. 과학과 기술이 시간이 갈수록 발전한다는 점을 생각해볼 때 어떤 유물이든 지금보다 먼 훗날에 발굴하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고고학적 원칙에 맞지 않는 사례가 바로 고분벽화이다.


(193)

고고학만큼 역설적인 학문이 없다. 왜냐하면 과거를 밝히기 위해서는 반드시 과거의 유적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고고학자들이 수많은 도면과 사진을 남기며 신중하게 발굴을 진행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한번 발굴한 유적은 어떠한 경우에도 되돌릴 수 없다. 간혹 유적을 발굴하지 않고 유보하는 경우도 있다. 땅속에 있는 것이 역설적으로 유적을 오래 보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발굴을 하지 않는 것도 답이 아니다. 발굴을 하지 않으면 정작 과거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없기에 오히려 고고학의 발전은 저해된다. 그러니 최소한의 발굴로 최대한의 효과를 얻는 것이 고고학 발굴이 지향하는 바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발굴을 수술 자국이 작을수록 좋은 외과수술에 비유하기도 한다.


(197-198)

생각해보자. 왜 레고랜드를 유적지가 많아서 사적지로 등록된 중도 위에 세우려고 했을까. 그곳은 춘천 시내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경치도 수려하고 접근성도 좋은, 아직까지도 개발이 안 된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땅이 개발이 되지 않은 이유는 1980년대에 이미 이곳에 엄청난 유적이 존재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유적의 규모와 그 의의로 볼 때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조사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대대손손 보존하기 위해 사적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현대의 정치가와 사업가들은 개발을 포기하지 않았다. 유적이 있다면 빨리 발굴해서 그 위에 무엇인가 경제적으로 이득이 되는 것을 세우고자 결의했다. 이렇듯 춘천 중도의 문제는 경제논리를 앞세운 현대 자본주의에 있었다.


(204)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1954년에 세계 각국은 전쟁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는 취지에서 헤이그 문화재보조조약을 체결했다. 전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해도 그 나라의 문화재를 불법으로 없애거나 약탈할 수 없다는 것이 골자였다. 이는 유럽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상대국의 문화재를 폭격하고 약탈했던 것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문화재 약탈의 한쪽 측면만 본 것이다. 서구 열강은 그때까지 전쟁과 침략을 통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에게 약탈한 문화재에 대해 어떠한 보상이나 대책도 내놓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이미 유물을 빼앗긴 나라들은 상대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 유물을 반환 받을 수 없다는 뜻이 된다.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집트가 영국을 침략해서 승리했더라도 영국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피라미드 유물이나 미라에는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이다.


(226)

일본의 이 식민 패러다임을 깨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가 층을 달리해서 존재했음을 밝히면 된다. 하지만 층을 구분해서 발굴하는 방법이 한국에 널리 도입된 것은 1970년대 이후였다. 반면에 북한의 사정은 달랐다. 도유호(1935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한국 최초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1세대 고고학자. 1946년에 월북하여 북한 고고학의 기초를 수립했다.)가 이끄는 북한의 발굴단은 1953~1954년도에 회령 오동의 수혈주거지를 발굴하고, 그 주거지들에 중첩이 있음도 함께 발견했다. 또한 1957년에는 황해도 지탑리 유적에서 빗살무늬토기층과 청종기시대 문화층을 분리시켜서 그 지긋지긋하던 금석병용기설을 폐기하고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주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국사시간 첫머리에 빗살무늬토기=신석기토기’, ‘민무늬토기=청동시시대라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배운다. 그런데 이것을 발굴로 증명한 것이 바로 도유호가 발굴한 지탑리 유적이었다.


(245-247)

요서지역에서 홍산문화로 시작되어서 비파형동검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문명의 흐름은 만주 일대에서도 아주 독특하여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0여 년간 중국과 미국 피츠버그 대학에서 매년 이 유적을 조사하는 것도 이 지역에서 독특한 문명이 발생했던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이제까지 한국과 중국에서는 홍산문화가 어느 나라의 것이냐는 소모적인 귀속 논쟁으로만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홍산문화의 숨겨진 또 다른 가치는 바로 그 소멸과 정에 있다. 홍산문화를 만든 사람들은 작게 쪼개진 마을들로 흩어졌고, 그 결과 홍산문화의 옥을 만드는 기술과 제사의 풍습은 이후 시대로 확산되었다. 그렇게 본다면 사실 버려진 홍산문화의 제사유적은 고대인들의 현명한 삶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254)

후지무라의 조작은 단순히 한 고고학자의 공명심에 비롯된 것이 아니다. 바로 자신들의 역사를 무조건 올리려고 하는 일본의 쇼비니즘적 시각과 야합한 결과이다. 후지무라가 유물을 파묻다 발각된 카미타카모리 유적은 사실 후지무라가 구덩이에 자기가 만든 석기 몇 개를 파묻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후지무라에 의해 이 석기는 70만 년 전의 구석기인들이 제사를 지낼 때 사용했던 유물로 변했다. 이 말이 맞다면 세계 최초의 제사유적이 발견되었다는 뜻이다. 세계 문명의 기원이 일본이며, 일본 고유의 종교인 신도(신토이즘)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뛰어난 종교라는, 극우 세력의 입맛에 딱 들어맞는 얘기였다. 후지무라의 발견에 대한 이야기는 곧 바로 극우 성향의 교과서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니시오 간지 회장이 쓴 교과서 <국민의 역사>의 첫머리에 내세우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연대가 앞선 문명이 일본에 존재했다라는 여러 황당한 망언의 기반으로 활용했다. 극우세력의 준동에 후지무라의 위조가 동원되었지만 일본의 고고학계는 침묵으로 일관함으로써 암묵적인 동조를 했다. 극우 사관이라는 독버섯이 자라기 좋은 환경에서 후지무라의 위조는 더욱 활개를 칠 수밖에 없었다.


(269-271)

그렇게 한국인이 주도한 첫 고분 발굴지에서는 놀랍게도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그릇이 나왔다. 이에 청동그릇이라는 뜻의 호우를 따서 이 이 고분을 호우총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명문에 따르면 이 그릇은 광개토대왕의 사후 2년인 을묘년(415)에 만든 기념 그릇 중 10번째에 해당한다. 당시 신라를 밀려오는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광개토대왕의 고구려 구원을 요청했다. 이 호우의 발견으로 당시 신라의 고구려의 관계가 유물로 증명된 것이다. 사실 신라 고분에서 고구려의 유물이 나온 예는 그때가 유일했으니, 이 호우총은 비록 일본인의 힘을 빌리긴 했지만 엄청난 발견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호우총에서는 호우 말고도 흥미로운 유물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발굴단장 김재원 박사는 한 유물을 보고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나무에 옻칠을 한 물건인데 두 눈을 부라리듯 험상궂은 도깨비의 형상을 한 유물이었다.


(282-283)

(슐리만)가 발굴한 유물은 실제 트로이 왕국에서 사용한 것과는 다른 형식이라는 점이 지적되어 왔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지적을 무시하고 이 황금을 트로이의 마지막 왕으로 전쟁을 벌인 프라이모스의 이름을 따서 프라이모스의 황금이라고 명명해버렸다. 그러나 그가 발굴한 황금은 3200년 전에 살았던 프라이모스 왕보다 1000년이나 더 오래된, 4400년 전의 황금이라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물론 죽을 때까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의 업적을 깎아내리는 빌미가 되었다. 아리러니하게도 슐리만은 이 프라이모스의 황금을 파기 위하여 그 위에 쌓여 있었던 트로이의 문화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트로이 유적을 발견한 인물이자 트로이 유적을 없애버린 인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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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지리산 노고단에서 끝없이 뻗어나간 산줄기들을 굽어보며, 지리산은 장대하고 우람하고 숙연한 산이다. 그리고 지리산은 역사의 무덤이다. 인간의 삶은 갈등을 잉태하고, 그 갈등은 역사를 탄생시키며, 그 역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로 삼아 성장한다. 이 땅의 역사의 고비고비마다 지리산은 저항하는 사람들을 품어 보듬었고, 끝내는 그들의 무덤 노릇까지 해주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도 지리산의 그 역할은 변함이 없었다. 지리산은 아흔아홉 골짜기를 열어 8만이 넘는 빨치산들을 받아들였고, 끝내는 그들을 영원히 품에 잠들게 했다. 세계의 현대사에서 그 유례가 없는 죽음의 의미를 캐려고 나는 열 번이 넘게 그 고산준령을 오르내렸다. 나는 지리산의 적막 속에서 빨치산들의 열혈 투쟁을 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숭고한 정신을 느끼고는 했었다. 인간의 인간다운 세상을 향해 끝없이 몸부림치는 인간의 숭고함. 그 몸부림은 시대를 초월한 인류 역사의 불변의 과제였고, 현실적으로 어리석은 소수 인간들의 희생 위에서 인류의 역사는 발전되어 왔던 것이다. 그 숭고한 정신은 인간 긍정의 모태고, 소설의 영원한 테마다. <태백산맥> 마지막 장면에서 하대치와 그의 동료들이 어둠 저편으로 찾아가는 것도 사회주의를 넘어선 바로 그 인간다운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다.


(98)

담배를 하루 평균 3~4갑을 피우고, 커피를 5~6잔 마시며 열흘에서 보름을 자는 시간 빼놓고는 책상에 앉아 있다 보면 첫째 나타나는 증상이 두 다리가 10 20배로 퉁퉁 부어오른 착각이 든다. 그래서 얼른 만져보면 그렇지 않아 주무르고는 한다. 두 번째가 변비 증상이다. 옛날에 똥줄이 탄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실감하게 된다. 세 번째가 머리에서부터 차츰 차츰 피가 줄어들어 온몸이 하얗게 표백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네 번째가 걷는데 다리가 내 뜻과는 다르게 휘뚱거릴 뿐만 아니라 발 밑이 어질어질 기울어지고 흔들리고 출렁거린다. 그런 증상들이 날이 갈수록 겹쳐져오다가 막바지에는 잠자리에 누우면서 온몸이 녹아 흘러 땅속으로 잠기는 듯한 느낌 속에서 내일 아침에 못 일어나고 말지하는 생각으로 정신을 잃듯 잠이 든다. 그 죽음과 소생의 되풀이 속에서 원고지는 쌓여갔다.


(188)

하바로프스크의 아무르 강변에 동포들이 일군 마을 이름은 ‘3.1’. 조국에서 일어난 3.1운동에서 따온 것이다. 그 독립 의지가 가슴 뭉클하다. 동포들은 짧은 여름에는 농사를 짓고, 긴 겨울에는 아무르강의 두꺼운 얼음을 뚫어 생선 중에서 최고로 치는 철갑상어를 낚었다. 영하 30도의 추위를 견디며, 그것을 판 돈이 독립 자금이 되고 자식들의 학자금이 되었다.


(210)

원고를 쓴 기간만 <태백산맥> 6. <아리랑> 4 8개월이었다. 마흔에 <태백산맥>을 시작했는데 <아리랑>을 끝내고 보니 쉰셋이 되어 있었다. 내 인생 장년의 세월이 정말 눈 깜짝할 아이에 흘러가버린 느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묻는다. 어떻게 그렇게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느냐고, 무엇 때문에 그렇게 쓰느냐고. 삶의 보람이 가장 커서인가? 소설은 사나이의 생애를 바칠 만한 가치가 있어서인가? 그 대답은 꼭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두 원고를 쌓아놓고 그 사이에 서며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려 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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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

이건 진심이다! 좀 생기 있게 살아 봐! 네가 그 조로라는 노상 강도가 갖고 있는 용기와 기백의 반만큼이라도 가졌다면 원이 없겠다! 그 사람은 원칙을 갖고 있어. 그걸 위해 싸우고 있고. 그 사람은 힘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한을 풀어주고 있어. 나는 그 사람을 존경한다! 난 네가 하릴없이 빈둥거리면서 맥없이 몽상에나 젖어 지내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그 사람처럼 죽거나 감옥에 갇힐 위험을 무릅쓰고 용감하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싶다.”


(193)

앉아요. 안 그러면 발포할 거요! 나는 돈 알레한드로의 댁에서 당신들과 싸우러 온 게 아니오. 나는 어르신을 존경하기 때문에 그런 짓은 할 수 없소. 나는 당신들 자신에 관한 진실을 말해주러 온 거요. 당신네 가문들은 지사를 세울 수도 있고 끌어내릴 수도 있는 힘을 가졌어요! 대의를 위해서 하나로 뭉쳐요. 그렇게 해서 인간다운 삶을 살란 말이오. 마음속에 두려움만 없다면 그렇게 하고 싶을 거요. 모험을 좇기를 원하시오? 불의를 싸우는 삶에는 모험이 차고 넘쳐요.”


(201-202)

저는 경험도 없고 마음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지도 않습니다.”

돈 디에고는 그렇게 말하고는 피곤해 뵈는 눈길로 돈 카릴로스를 쳐다보면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를 몹시 연모하는 것처럼 쳐다보는 게 제일 좋을 거요. 우선, 결혼 얘기는 절대 하지 말고 사랑에 대해서만 얘기해 봐요. 쓰잘 데는 없는 얘기는 일절 하지 말고 울림이 풍부한 낮은 목소리로 은근하게 말해 봐요. 처녀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들릴만한 얘기를. 여러 가지 의미가 깃든 얘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은근하면서도 효과적이지.”


(205)

아 좋은 수가 떠올랐어요! 실연한 남자라면 어떻게 행동할까요? 당연히 코가 쭉 빠져서 기운이 하나도 없이 지낼 겁니다. 그리고 세상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으려 들겠죠! 어느 면에서는 아가씨가 저를 구해 준 셈입니다. 아가씨가 저를 사랑해 주지 않는 바람에 저는 번민에 싸여서 지내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제가 바보처럼 말 타고 정신없이 뛰어다니지 않고, 싸움도 하지 않고 양지쪽에 앉아서 멍하니 공상에 잠기거나 명상을 해도 하등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거란 말이에요! 그러면 저는 마음껏 평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실연을 해서 그런다고 생각해 줄 거고.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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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나는 이 잃어버린 고리판타 레이라는 개념에서 찾고자 한다. ‘판타 레이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의 유명한 언명으로 만물유전(萬物流傳)”, 모든 것은 흐른다라는 뜻이다. 모든 사물은 고정되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치 흐르는 유체(流體)와 같이 시간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모든 것들을 유체 현상으로 이해하려고 했다. 대표적인 예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상의 물체들은 물, , 공기, 흙의 조합으로 이루저졌다는 4원소설을 제시했다. 그리고 천상 세계의 물체들, 즉 우주와 행성 같은 천체들은 제5원소라 불리는 유체 에테르(aether)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던 르네상스 시대와 과학 혁명 초기, 학자들은 천체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테르의 움직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기 위해 보텍스(vortex, 소용돌이)’라는 유동 현상에 주목했다. (유체 역학에서는 와류(渦流)’, ‘와동(渦動)’이라고 부르지만, 이 책에서는 훨씬 포괄적인 의미를 가진 보텍스라는 단어를 사용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 보텍스 스케치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시대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판타 레이의 관점으로 보고, 모든 물리 현상을 유체의 보텍스로 이해하고 설명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25-27)

다행히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책의 인쇄본을 보고 난 뒤 눈을 감았다. 이렇게 서구 문명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저작물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가 세상에 드러났다.

이 책은 소수의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었기에 단 400부만 인쇄되었고, 그나마도 다 팔리지도 않았다. 6권으로 이루어진 이 책의 원제에서 레볼루티오니부스(revolutionibus)’, 레볼루션(revolution)’은 천체의 회전을 의미한다. ‘레볼루션혁명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출판되던 1688년 영국의 명예 혁명(Glorious Revolution)부터이다. 이처럼 원래 천문학 용어였던 레볼루션은 코페르니쿠스 이후 혁명적인 변화라는 의미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코페르니쿠스의 레볼루션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ung)”이라고 명명했으며, 토머스 쿤(Thomas Kuhn)은 이를 다시 코페르니쿠스 혁명(Copernican Revolution)”이라고 부르며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는 과정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했다.


(35-36)

전 유럽을 휩쓴 30년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된다. 보헤미아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이 전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여 오스트리아와 동유럽으로 축소되었다.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한 독일은 수많은 제후국으로 분할되어 유럽에서 가장 낙후된 곳으로 전락한다. 하지만 전쟁 중에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공국과 합병한 프로이센은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대규모 영토를 보장받으며 신흥 강국으로 등장한다. 또하, 80년간의 기나긴 독립 전쟁 끝에 네덜란드의 독립이 최종 확정되어, 신대륙 발견 이후 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네덜란드의 지배자 스페인의 몰락이 시작된다. 종교의 도그마에 갇혀 국력을 낭비한 스페인과 신성 로마 제국과 달리 철저히 실리를 챙긴 프랑스와 영국이 30년 전쟁 이후 유럽의 강대국으로 급부상한다.


(49)

뉴턴은 조폐국에서 일하던 수십 년간 상당한 재력가가 되었다. 한편, 1714년 앤 여왕이 후사가 없이 사망하자 영국의 스튜어트 왕조는 단절된다. 의회는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앤 여왕의 먼 친척인 독일 하노버 영주 게오르크 1세를 허수아비 국왕으로 데려와 조지 1세로 세웠다. 현재 영국 왕실은 이 하노버 왕조의 후손들이다. 이러한 정권 교체 시기에 1720년 런던의 커피하우스들의 미확인 소문들과 묻지 마투기로 시작된 남해 버블 사건(South Sea Bubble)’이라는 주식 사기 사건이 일어난다. 조폐국장 뉴턴은 여기에 휘말려 2만 파운드를 날렸다. 하지만 자산 관리에 탁월했던 그는 1727년 사망 시에 어머니의 유산을 제외하고도 3 2000파운드(현재 가치로 약 60억 원)의 유산을 남겼다.


(70)

유럽 학계가 뉴턴파와 라이프니츠파로 나뉘어 대립하던 무렵, 1738년 베르누이 정리가 발표되자 샤틀레는 소멸하지 않는 유체의 보존량으로 도입된 속도의 제곱에 주목한다. 이후 라이프니츠의 다니엘 베르누이, 오일러 등과 적극 교류하던 그녀는 연인 볼테르가 너무 뉴턴파의 입장만 고집하자 볼테르와의 관계가 틀어진다. 그녀는 새로운 연하의 연인을 사귀고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당시는 노산의 사망률이 높아 42세인 그녀는 삶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하고 평소 추진하던 뉴턴의 <프린키피아>의 프랑스 어 번역을 서두른다. 그녀는 하루에 3~4시간만 자며 마침내 1749 9월 번역을 마무리하고 3일 뒤 출산했으나 일주일 뒤 사망하고 만다. 이 번역본은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뉴턴 이 진행된 미적분학의 발전과 논쟁을 정리한 수많은 주석이 달렸고, 이러한 그녀의 방대한 프랑스 어판 주석 덕분에 프랑스는 영국을 제치고 수학과 물리학에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발전하다. 샤틀레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관점이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조제프루이 라그랑주는 뉴턴의 힘을 시간에 대해 적분하면 운동량이고, 거리에 대해 적분하면 운동 에너지라며, 그녀의 아이디어를 깔끔하게 정리한다. 또한, 보존량이 속도의 제곱이라는 개념은 후에 갈릴레오 좌표 변환이 로렌츠 변환으로 일반화되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유명한 공식 E=mc2의 토대가 된다.


(117)

청동은 섭씨 900도에서 녹지만, 주철은 섭씨 1,300도 이상이 되어야 녹는다. 기원전부터 주철을 녹여 제품을 만들었던 중국과 달리 서양은 16세기까지 이 온도에 도달하지 못했다. 중국에서 시작된 주철 기술로 동아시아에서는 오래전부터 무쇠솥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이 차이가 동서양의 식생활을 다르게 만들었다. 즉 동양은 솥으로 밥을 지어 먹었고, 솥이 없던 서양은 화덕에 빵을 구워 먹었다.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철기 시대에 진입했지만, 서양의 철기 문화는 중세까지만 해도 기껏해야 대장간에서 수백 도로 달군 철을 망치로 두들겨 창검이나 농기구를 만드는 수준이었다. 이러한 기술 격차를 만든 것은 바로 풀무였다.


(145)

1453년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양사에서 중세가 종말을 고하고 근대가 시작된 기점이다. 과학 기술의 측면에서는 창과 칼 같은 냉병기에 의존하던 유럽이 대포라는 화기를 앞세운 이슬람에 굴복한 사건이기도 하다. 두 세력 모두 화포를 지니고 있었으나, 오스만 제국은 훨씬 강력한 대포로 1,000년 이상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콘스탄티노플의 3중 성벽을 허물어뜨리며 함락시켰다. 이는 단순한 전쟁의 결과를 넘어서, 인류사에서 전쟁의 패러다임이 활과 창검을 이용한 용맹 무쌍희 기사도에서 화포로 상징되는 과학 기술로 이동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162-163)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는 마렝고 전투 당시의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1796 1차 나폴레옹 원정으로 로마에 공화정이 수립되지만, 프랑스의 지배력 상실로 공화정은 무너지고 로마의 공화파들은 지하로 숨어 투쟁한다. 이 와중에 알프스를 넘은 나폴레옹이 다시 진격해 오자 로마의 혁명적 공화파가 전면에 나서고 이를 막아내려는 왕당파의 탄압 역시 필사적이었다. 오페라는 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공화파 혁명 지도자와 사랑에 빠진 여인 토스카의 비극적 운명을 담고 있다.


(167)

베토벤과 달리 독일의 상당수 지식은 나폴레옹에 열광했다. 1806년 독일 예나 전투에서 승리한 나폴레옹이 말을 타고 예나에 입성하는 것을 보고, “저기 세계 정신이 온다.”라고 외친 예나 대학교 교수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이 대표적이다. 참고로 칸트에 이어 독일 관념론을 완성한 헤겔은 1801년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칸트는 <일반 자연사와 천체 이론>이라는 논문을 썼고, 헤겔은 <행성들의 궤도에 관하여>를 박사 학위 논문으로 썼다.


(203)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붕괴된 부르봉 왕조는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1814년 부활한다. 하지만 돌아온 왕족들은 혁명 전보다 오히려 더 심하게 망가져 있었고, 이로 인해 왕당파와 공화파의 대립은 보수와 진보의 이름으로 더욱 격렬해졌다. 이러한 대립은 정치뿐 아니라 문화 예술 및 과학 기술 분야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자유주의의 확산을 가져온다. 한때 급진주의자로 나폴레옹을 증오하던 베토벤은 1824년 무려 10여 년간 중단했던 작품 활동을 재개하는데 이때 들고 나온 작품이 바로 영국의 로열 필하모닉 소사이어티가 의뢰한 <합창>이다. 베토벤은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교향곡에 반체제 작가였던 프리드리히 실러의 <환희의 송가>를 가사로 붙였다.


(208)

1830 7월 혁명을 그린 외젠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빅토르 위고는 이 그림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1832 6월 학생 무장 봉기를 배경으로 <레 미제라블>을 집필했다. 이 그림 오른쪽에 권총을 들고 등장하는 소년은 <레 미제라블>가브로쉬의 모델이 되었다. 메두사 호 사고에서 보듯이 왕정 복고 이후 프랑스의 사회 부조리는 더욱 심해진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이 총동원되어 이 모든 게 볼테르 때문이고, 이 모든 게 루소 때문이라며 오히려 진보 진영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프레임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러한 한심한 작태에 분노한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 이 표현을 가브로쉬가 반어적으로 부르는 노래로 삽입했다. 대략적은 내용은 내가 못생긴 것도 가난한 것도 이게 다 볼테르 때문이고 루소 때문이라는. 가브로쉬는 바리케이드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진압군을 조롱하며 실탄을 구하다 진압군의 총에 사망한다. 1985년 캐머런 매킨토시가 <레 미제라블>을 뮤지컬로 각색하며 이 노래의 역사적 배경을 전혀 알지 못하는 영어권 관객들을 위해 “Little People”이라고 가사의 내용을 바꾸었다. 루브르에서는 들라크루아 작품 옆에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을 나란히 전시하고 있어, 7월 혁명의 배경이 무엇인지 명확히 보여 준다. 한편, 요즘 제일 인기 있는 록그룹 중 하나인 영국의 콜드플레이(Cold Play)의 대표작 <비바 라 비라(Viva la Vida)> 역시 들라크루아의 바로 이 그림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참고로 제목은 인생 만세라는 뜻의 스페인 어로 20세기 멕시코 혁명 화가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에서 따온 것이다.


(229-230)

따라서 데카르트에게는 행성을 움직이는 힘의 전달 매체로 우주를 가득 채운 유체 에테르가 필요했고, 에테르의 소멸하지 않는 운동인 보텍스가 행성 운동의 원천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 뉴턴은 유체의 점성 저항을 도입하여 유체 유동은 지속하지 못하고 소멸한다고 지적했다. 대신 행성은 에테르의 보텍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중력에 의해 스스로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뉴턴 역시 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중력이 작용하려면 물질의 접촉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에테르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더 나아가 자력이나 전기력에도 마찬가지로 힘의 매개체가 있다고 생각했다.


(249)

1848년 전 유럽을 휩쓴 혁명의 열풍은 음악가들에게도 불어닥친다. 바그너는 폭동을 주동하다 수배령이 내려져 기나긴 도피 생활을 시작했으며, 빈의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프랑스 혁명곡 <라 마르세예즈>를 연주하다가 체포되었다. 그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라데츠키 장군을 위해 <라데츠키 행진곡>을 작곡하고, 체포된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이러한 아버지의 힘 덕에 풀려난다. 보헤미아의 스메타나는 프라하의 카를 다리에 바리케이드를 쌓고 총을 들고 무장 항쟁을 하다 체포되었으며, 리스트는 고국 헝가리에서 일어난 봉기가 합스부르크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는 사실에 격분하여 피아노곡 <장송>과 교향시 <헝가리아>를 작곡했다.


(267-268)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같은 시기 맨체스터에서 활동하던 동년배 사업가 줄의 성과에 대해 언급한다. 이들은 줄의 실험이 열, 운동, 전기, 자기 등 다양한 에너지와 힘이 서로 다른 형태로 바뀌기도 하고 상호 전환되기도 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후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자신들의 경제학에 줄의 성과를 반영하여 노동이 상품이 되고 상품이 화폐가 되고 화폐가 상품으로서의 노동을 구매하는 과정을, 보존량으로서의 가치가 형태를 바꾸어 가며 전환된다는 물리학적 개념으로 분석한다. 이렇게 하여 카를 마르크스의 최초의 경제학 저술인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1859년에 출판된다. 이 책이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매진되자 고무된 마르크스는 이 책을 확장하여 새로운 책을 저술한다. 이것이 바로 1867년의 <자본론>이다.


(299)

논란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늘 조심스러웠던 다윈은 자신의 진화론에 대해 에볼루션(evolution)’이라는 단어를 되도록 쓰지 않으려고 했다. 아마 사전적 의미가 줄 수 있는 혼동 때문으로 보인다. 라틴어로 두루마리를 펴다라는 의미의 ‘evolvo’에서 유래한 영어 에볼루션은 원래 책을 펼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다. 이후 콩트가 혁명적 변화를 의미하는 레볼루션과 대비하기 위해 진보(progress)’의 의미로 에볼루션을 사용했고, 이는 발전(development)’의 의미로 이해되어 라마르크의 진화론에 쓰인다. 다윈은 자연 선택에 기초한 자신의 진화론이 라마르크와 구분되기를 원했고, 콩트의 진보와도 거리를 두기 위해 <종의 기원>에는 세대 간의 걸친 변화정도로 표현한다. 다윈은 이처럼 <종의 기원>에서 에볼루션이라는 단어 사용에 주저했지만, 딱 한 번 책의 마지막 문장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아주 단순한 시작으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운 끊임 없는 형태들이 진화해 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340)

파리 코뮌으로 파리 전체가 내전에 휩싸이며 주요 시설물들이 불타 없어진다. 그림은 파리의 상징 루브르 궁이 불타는 장면이다. 이 화재로 루브르 궁의 서쪽 면이었던 튈르리 궁이 전소되었다. 르네상스 군주 프랑수아 1세가 짓기 시작해 앙리 4세를 거치며 프랑스 최고 권력의 중심이던 이곳이 불타 버리자 프랑스 제3공화국 정부는 루브르 궁의 재건을 검토한다. 하지만 치욕의 역사도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의견에 따라 루브르 궁을 훼손된 채로 그대로 두게 되었다. 현재 루브르 궁은 서쪽 편이 뻥 뚫린 채로 남아 있다. 루브르 궁 맞은 편에 있던 오르세 궁 역시 불타 없어진다. 이 건물에는 프랑스 정부 주요 부서인 재무부와 최고재판소가 있었다. 폐허로 남아 있던 그 자리에 기차역이 세워졌다가, 훗날 미테랑 대통령에 의해 리노베이션이 시작되어 1986년 오르세 미술관으로 개관했다. 한편, 당시 건축 중이었던 오페라 가르니에는 코뮌 군의 시설로 쓰이던 관계로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1875년 완공된 이 화려한 오페라 극장에서 코뮌 군의 시체가 발견되자 이 건물에 유령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다. 이 소문은 추리 소설 작가 가스통 르루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그는 코뮌 직후의 오페라 가르니에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잘표한다. 이것이 1911년 소설 <오페라의 유령>이다. 그는 소설의 서문에서 축음기를 파묻기 위해 인부들이 오페라 하우스의 바닥을 팠을 때 시신 한 구가 발견되었다. 나는 곧바로 이것이 오페라의 유령의 시신임을 증명할 수 있었다. 이 시신이 파리 코뮌의 희생자 중 한 사람의 것이라고 신문이 아무리 떠들어도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가스통 르루의 소설을 뮤지컬로 만든 것이 1986년 런던 여왕 폐하 극장에서 초연된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오페라의 유령>이다.


(345)

마치 기술과 예술의 대결인 듯한 논란이 벌어지자, 에펠은 에펠탑 4면에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는 72명의 프랑스 과학 기술자들의 이름을 보란듯이 새겼다. 72명 중 상당수가 열유체 관련 인물들이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로는 보르다, 쿨롱, 라그랑주, 라부아지에, 몽주, 라플라스, 드장드르, 프로니, 푸리에, 앙페르, 게이뤼삭, 푸아송, 나비에, 코시, 코리올리, 카르노, 클라페롱, 스트럼, 푸코 등이 있다. 여기서 카르노는 카르노 사이클의 사디 카르노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 라자르 카르노이다. 여기서 보듯 당시 사디 카르노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고, 마찬가지 이유로 에펠의 고향 선배 다르시 역시 여기에 등장하지 않는다.


(376-378)

한편, 1904년 볼츠만에게 충격을 준 세인트루이스 만국 박람회에서는 충격파를 이용한 조리 기구가 출품되어 수십만의 구름 관객을 모았다. 앞서 1894년 미국 의사 하비 켈로그는 자신의 요양 병원 환자들의 아침 식사를 위해 차가운 시리얼인 콘플레이크를 발명하는데, 환자 중에 찰스 윌리엄 포스트라는 사람이 있었다. 포스트는 퇴원하자마자 1897년 콘플레이크 회사를 창업하여 큰 성공을 거둔다. 포스트에 선수를 뺏긴 켈로그는 1906년 창업되었고, 두 기업은 오늘날까지 100년이 넘도록 라이벌이다. 콘플레이크로부터 시작된 시리얼 산업에 1901년 또 다른 형태의 시리얼이 나타났다. 미네소타 출신의 농학자 알렉산더 피어스 앤더슨은 우연히 전분이 담긴 시험관을 가열하다 깨뜨렸다. 순간 굉음과 함께 전분이 순간적으로 팽창되며 눈꽃같이 날렸다. 이것이 충격파를 이용한 최초의 현대적인 뻥튀기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기존의 콘플레이크와는 다른 새로운 방식의 시리얼을 널리 알리기 위해  앤더슨은 1904년 세인트루이스 만국 박람회에 이 뻥튀기 기계를 출품했고, 이것이 수십만의 관객을 끌어모으는 히트 상품이 되었다.


(385-386)

1895년 발생한 드레뒤스 사건으로 프랑스 사회가 둘로 분열한다. 당시 최대 스포츠 신문 <르 벨로>는 무죄를 지지하고, 라이벌 신문 <로토>는 유죄를 주장하며 첨예하게 대립한다. 미슐랭이 주요 주주였던 <로토>는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강력하게 펼치기 위한 이벤트를 만든다. 이것이 1903년 시작된 자전거 경주 대회 투르 드 프랑스이다. 로토의 바람과 달리 1906년 드레퓌스는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투르 드 프랑스는 오늘날까지 세계 최대의 자전거 경주 대회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1900년 미슐랭은 자동차 타이어 시장에 진출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자동차 타이어가 많이 팔리지 않자, 타이어를 많이 팔도록 하는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한다. 자동차 여행용 안내 책자를 만들어 미슐랭 타이어 교체 방법과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지점들을 슬쩍 집어넣는 것이다, 여기에는 믿을 만한 호텔과 식당을 표시함으로써 여행자들의 주목을 받도록 했다. 이 책이 <미슐랭 가이드>이다.


(391)

1938년 듀폰이 개발한 테플론은 핵무기 제조 등 군사용으로 쓰여 사용이 제한적이었다. 1945년 프랑스의 한 주부는 남편이 낚싯대에 사용하는 테플론에 음식물이 잘 묻지 않는 것을 보고, 남편에게 프라이팬에 테플론을 코팅해 달라고 조른다. 하는 수 없이 남편이 알루미늄에 테플론을 코핑하여 프라이팬으로 사용했더니 음식물이 묻지 않아 편리했다. 뿐만 아니라, 이전의 주철이나 스테인리스 소재 프라이팬보다 훨씬 가벼워져 주부의 손목에 무리가 가지 않아 조리가 편해졌다. 무엇보다 열전달이 뛰어나 예열이 필요 없게 되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회사가 테팔(TEFAL)이다 테팔은 테플론(Teflon)과 알루미늄(aluminum)의 합성어로, 여기서부터 조리 기구의 혁명이 이루어졌다.


(395)

이처럼 승승장구하던 록펠러에게 전혀 뜻밖의 대항마가 등장한다. 1879년에 등장한 에디슨 전구가 그것이다. 이후 등유에 의해 주도되던 조명 시장이 급속히 개편된다. 전구는 에디슨이 처음 발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에디슨은 당시로서는 가장 실용적인 필라멘트를 개발해 일상 속으로 급속히 파고들었다. 심지어 조선 왕실조차 1884년 에디슨과 계약을 맺고 궁궐에 전등을 설치한다. 이는 일본 왕실보다도 빠른 것이었다. 이후 전등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여러 다른 회사들에서도 전구가 개발되었다. 그중 하나는 카를 마르크스의 이종 사촌이 1891년 네덜란드에 차린 전구 회사로, 이 회사가 필립스이다. 이러한 전구의 발달은 제철 산업에서 출발한 볼츠만의 복사 이론을 막스 플랑크의 흑체 복사 이론으로 발전시켜 마침내 양자 역학을 탄생시킨다. 한편, 전구의 등장으로 크나큰 타격을 받은 P&G는 결국 양초 사업을 포기한다.


(402-403)

하지만 석유 못지않게 유동성이 뛰어난 전기를 이용한 자동차의 개발 역시 만만치 않았다. 오스트리아 황실에 자동차를 공급하던 회사에 취직한 엔지니어 페르디난트 포르셰(Ferdinand Porsche) 1898년 전기 자동차를 개발하여 가솔린과 경쟁한다. 그는 전기 자동차의 가장 큰 문제가 무거운 배터리임을 주목하고, 1901년 세계 최초로 벤츠의 가솔린 기관을 발전기로 채택하여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개발한다. 1902년 포르셰가 군대에 입대하면서 그의 전기 자동차와 하이브리드차 개발은 중단된다. 포르셰는 군대에서 황태자의 운전병으로 일했고, 나중에 이 황태자가 암살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한편, 포르셰가 군대에 있는 동안 세계 자동차 시장의 대변화가 미국에서 일어난다.

1903년 에디슨의 전기 회사에서 일하던 헨리 포드가 독립하여 자동차 회사를 설립한다. 아마도 전 직원 테슬라와의 싸움에서 교훈을 얻은 탓인지, 에디슨은 헨리 포드와는 친하게 지냈다. 재미있는 것은, 1903년 대한제국 황실은 포드 자동차를 구입한다. 이는 포드 자동차 회사가 설립된 직후로, 이로 보아 고종과 순종은 상당한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였음을 알 수 있다. 포드 이후 가솔린 자동차의 수요가 비약적으로 증가하며 주류였던 전기 자동차를 추월한다. 포르셰가 군대 복무를 마치고 1906년 현장에 복귀했을 즈음 대세는 이미 가솔린 자동차로 기울고 있었다. 이때 벤츠가 포르셰를 불러 전기 자동차를 포기하도록 설득하고 가솔린 자동차 개발에 투입한다. 이후 포르셰는 가솔린 자동자의 역사에 불멸의 업적들을 남긴다.


(417)

1929년의 대공황으로 모든 산업이 타격을 받지만, 보잉의 항공 우편 사업은 정부와 결탁하여 엄청난 성장을 기록한다. 또한, 보잉은 우편 항공기의 빈자리에 사람을 태워, 일반인도 비행기를 탈 수 있게 했다. 이렇게 항공 승객 사업까지 장악한 보잉은 1910년 에어쇼의 굴욕을 깔끔하게 만회한다. 하지만 아직 항공기는 사고의 위험이 컸고 항공 승객이 늘면서 공포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에 보잉사는 1930년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25세의 여간호사 엘렌 처치를 객실 승무원으로 깜짝 고용한다. 그녀가 최초의 스튜어디스로, 고객들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큰 인기를 얻자 이후 항공 여객 사업의 표본이 되었다.


(423)

“’명백한 것들은 모두 다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과연 문명이란 무엇인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의 한 문장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배 위에서 일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빛과 어둠이 교차하는 순간, 보이던 것들이 경계가 불분명해지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실재한다고 믿던 것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여러 페이지에 걸쳐 생생히 묘사한다.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라 믿었던 유체도 이렇게 사라졌다. 그러나 분명하던 것들이 사라져야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플로지스톤이 사라지며 화학이 탄생했고, 칼로릭이 사라지면 열역학이 탄생했듯이, 마지막 유체 에테르가 사라지며 새로운 과학이 출발한다.


(450)

헤디 라마르(Hedy Lamarr)와 빈 중앙 묘지에 있는 그녀의 묘.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나치의 집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명인 중 하나였다. 그녀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타고난 끼로 1930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신 노출 영화 <엑스터시>에 출현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재벌과의 결혼과 망명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던 인물이다. 어릴 때부터 과학 기술에 심취했던 그녀는 미국 망명 후 저녁마다 화려한 할리우드의 파티보다는 지식인들과의 토론을 즐겼고, 거기에서 나온 아이디어로 발명하는 것에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가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어뢰의 무선 조종을 획기적으로 할 수 있는 아이디어로 특허를 등록한다. 당시 기술로 분노하여 특허는 상용화가 힘들었지만, 1990년대 이후 무선 통신이 발달하며 휴대 전화의 기본이 되었고, 와이파이, 블루투스 등에도 응용되면서, 그녀의 업적이 다시 부각되고 다시 한번 전세계의 찬사를 받았다. 2000년 미국에서 사망한 그녀는 빈 중앙 묘지 볼츠만의 묘 근처에 묻혔다. 그녀의 묘비에는 영화는 순간이지만, 과학 기술은 영원하다라는, 평소 그녀가 늘 하던 말이 새겨져 있다. 한편, 그녀는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폰 트랍 집으로 등장하는 잘츠부르크 저택을 소유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이 영화가 오스트리라와 나치와의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예를 들어, <사운드 오브 뮤직>에 등장하는 <에델바이스>는 오스트리아 전통곡이 아니라 영화 속 창작곡이다.


(485)

안타깝게도 70여 년 전 대학자의 이러한 우려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011년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발표하며 애플이 테크놀로지(technology)’와 리버럴 아츠(liberal arts)’의 교차점에 있다고 보여 준 슬라이드 한 장으로 우리나라에 느닷없이 인문학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리버럴 아츠는 그리스 로마에서 노예가 아닌 자유인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 교육에서 출발했다. 이후 중세를 거쳐 근대적인 의미의 대학이 탄생하자, 대학 교육에서 기초 과목으로 정착한 리버럴 아츠는 문법, 논리학, 수사학 등의 인문학 분야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 등을 포함했다. 대학이 등장하던 시기에 존재하던 교육 기관들은 주로 의학, 법학, 경영 등의 일봉의 직업 학교였기에, 새로이 탄생한 대학은 이 전문 학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리버럴 아츠를 커리큘럼으로 구성했다. 때문에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은 미국 대학의 경우 현대에 와서도 의학, 법학, 경영은 전문대학원 과정으로만 존재한다. 따라서 리버럴 아츠의 근원을 생각하면 인문한 열풍은 우리나라의 독특한 문과 이과의 구분이 촉발한 해프닝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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