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인간은 누구나 전지전능하지 못하므로, 전적으로 권력욕에 좌우되는 삶은 조만간에 극복할 수 없는 장애에 봉착하기 마련이다. 미치지 않고는 이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다. 물론 그 사람이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에게 이러한 사실을 지적하는 사람을 가두거나 박해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이처럼 정치적 의미의 억압과 정신분석적 의미의 억압은 그 궤를 같이 한다. 따라서 정신분석적 억압이 명백한 형태로 발생하는 경우,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다. 적절한 한계를 지키는 권력은 행복에 크게 기여할지 모르나 권력을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삼는다면 비록 외면적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내면적으로는 파멸을 맞게 된다.

 

 

 

39.

사랑은 음악이나 산에서 보는 해돋이, 보름달 밑에서 보는 바다와 같은 최상의 모든 쾌락을 더욱 훌륭한 것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존중된다.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이와 같은 아름다움을 즐겨본 적이 없는 남자는 이러한 일이 줄 수 있는 마력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사람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랑은 생물적 협력의 형식이며, 이 형식에 있어서 각자의 감정이 상대방의 본능적 목적을 실현시키는 데 꼭 필요하기 때문에 자아의 굳은 껍질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이다.

 

40.

참된 사랑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꽃이다.

병들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싸늘해지지도 않으며

자기 자신을 배반하지도 않는다.

 

 

64-65.

어느 정도의 단조로운 생활을 참는 능력은 어린 시절에 길러야 한다. 현대의 부모들은 이 점에서는 크게 비난받아 마땅하다. 현대의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쇼라든가 맛있는 음식 따위의 수동적인 오락을 지나치게 제공하는 반면, 특별한 때를 제외하고는 다른 날과 변함없는 하루를 보내는 일이 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즐거움은 주로 약간의 노력과 창의력에 의해서 어린이 스스로가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찾아내는 것이라야 한다. 예컨대 영화 구경처럼 자극적이지만 육체적 노력이 전혀 필요없는 즐거움은 아주 드물게 주어져야 한다.

 

 

65.

자극은 본질적으로 마약과 같아서 점점 더 많은 양이 필요하게 되며, 흥분하고 있는 동안의 육체적 수동성은 본능에 어긋나는 것이다. 어린이는 어린 식물처럼 같은 토양에 그대로 놓아둘 때에 가장 잘 자란다. 따라서 너무 잦은 여행, 너무 다양한 인상은 아이들에게 좋지 않으며, 그들이 성장했을 때 유익한 단조로움을 참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70.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를 피로하게 만드는 또 한 가지 것은 낯선 사람과 늘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적 본능은 낯선 상대를 만났을 때 우호적인 태도를 취할 것인지 적대적인 태도를 취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경계심을 갖게 된다. 러시아워에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본능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고, 그로 인해 그들은 우연히 접촉하게 되는 모든 낯선 사람에게 일반적이며 폭넓은 적의 느낀다. 게다가 아침 일찍 차를 타려고 서두르다 보면 소화불량이 되기 쉽다. 따라서 사무실에 도착하여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때 월급쟁이들은 신경이 날카로워져 주위 사람들을 불쾌하제 여기게 된다.

 

 

72.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적절히 통제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걱정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 없는 때에도 그들은 걱정거리에 매달려 끊임없이 고민한다. 남자들은 사업상의 고민을 잠자리까지 끌고 들어간다. 내일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원기를 회복해야 할 밤에도 몇 시간씩이나 당장 어떠한 행동을 취할 수도 없는 문제에 대해 곰곰이 되풀이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도 내일의 행동을 위한 건전한 지침을 만들어내는 생산적 방식이 아니라 불면증 환자의 어수선한 상념처럼 반미치광이 같은 방식으로 고민하곤 한다. 밤새 그렇듯 갈피를 잡지 못하고 매달린 걱정은 아침에도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들은 판단을 흐려놓고 기분을 상하게 하여 사사건건 격분하게 만든다.

현명한 사람은 걱정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자신의 문제를 고민한다. 그렇지 않을 때에는 다른 일을 생각하며, 더군다나 밤에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73.

줄곧 과도하게 문제를 생각하고 있는 대신 오히려 적절한 때에 적당하게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정돈된 심리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행복과 능률이 얼마나 증진되는가를 알면 놀라울 정도이다. 곤란하거나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에는 필요한 자료를 이용할 수 있을 때 즉시 그 문제에 정신을 집중해 결정을 내리도록 하라. 일단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지 않는 한 결정을 재고하지 말라. 우유부단보다 더 피곤한 것은 없고 또 그것만큼 무익한 것도 없다.

대부분의 걱정은 그 문제가 대단치 않은 것임을 깨달으면 감소될 수 있다.

 

 

73.

나는 내가 강연을 잘하든 못하든 상관이 없으며, 잘하든 못하든 우주에는 변화가 없다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그리하여 강연의 성공 여부에 개의치 않으면 않을수록 강연이 덜 서툴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덕분에 점차로 신경의 긴장이 감소되어 결국엔 거의 긴장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77.

어떤 불행이 닥쳐왔을 때 진지하고 신중하게 앞으로 일어날지도 모를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일어날지도 모를 불행을 직시한 다음에는, 그 불행이 그렇게 두려운 재난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열거해보라. 그런 이유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나빠보았댔자 내 한 몸에 일어나는 일이 결코 우주적 중요성을 갖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얼마 동안 최악의 가능성을 갖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당신이 얼마 동안 최악의 가능성을 응시한 후, 진정한 확신을 가지고 좋아, 그까짓 것 별 문제 아닐 거야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했을 때 당신은 당신의 걱정이 놀라울 정도로 감소된 것을 알게 되리라. 이러한 과정을 몇 번은 되풀이해야겠지만 아무튼 당신이 최악의 사태를 직시하는 데 있어서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게 되었다면 당신은 당신의 걱정이 말끔히 사라지고, 그 대신 일종의 쾌감이 생긴 것을 알게 될 것이다.

 

 

115.

높고 고상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서서히 모든 권력을 장악한 정치가는 그는 이러한 목적 때문에 안락을 포기하고 공공 생활이라는 무대에 들어선 것이다. – 민중이 그를 반대할 때 민중의 배은망덕에 놀란다. 그는 그가 하는 일에 공공적 동기 이외의 다른 동기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또 일을 추진해나가는 즐거움이 어느 정도 그의 활동을 고무하였을 것이라는 점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120.

다른 사람에게 너무 지나친 기대를 갖지 말라는 것이었다. 병든 부인이 적어도 자기 딸 중 한 명은 자신을 간호하기 위해 결혼을 포기할 정도로 완전히 스스로를 희생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이성에 어긋나는 정도의 이타심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타주의자의 손해가 이기주의자의 소득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 특히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늘 잊기 쉬운 것은,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인생을 생각하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56.

옛날에 돼지고기를 진미의 소시지로 둔갑시키는 희한한 소시지 기계가 두 대 있었다. 이 기계 중의 하나는 돼지고기에 대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고 소시지를 무수히 생산해냈다. 다른 기계는 와 돼지고지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야? 내가 하는 일은 돼지고기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놀라운 일이란 말야라고 말했다. 그는 돼지고기를 거부하고 그의 내부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료인 돼지고기가 들어오지 않게 되자, 그의 내부는 기능을 멈추었고, 그의 내부를 연구하면 할수록 그에게는 내부가 더욱더 공허하고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되었다. 지금까지 진미의 소시지를 만들어내던 교묘한 장치는 모두 정지했고,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당황하게 되었다. 이 두 번째 소시지 기계는 열의를 상실한 사람과 같고, 첫번째 기계는 열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과 같다.

마음은 마음속에 들어오는 여러 재료를 가장 놀라운 방법으로 결합시킬 수 있는 이상한 기계이다. 그러나 외부 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재료가 없으면 이 기계는 무력하다.

 

 

179.

모든 형태의 조심성 가운데서도 사랑에 대한 조심성이 참된 행복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것이리라.

 

 

197.

나는 부모의 사랑을 매우 높이 평가하지만, 흔히 내리는 결론, 즉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일을 해주어야 한다는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이 문제에는 인습적인 관념이 있다. 할머니가 젊은 여자에게 전수하는 비과학적인 잡동사니 이외에는 자녀의 보육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시대에 이 관념은 매우 훌륭한 것이었다.

 

 

200.

일을 행복의 원인으로 볼 것인가, 또는 불행의 원인으로 볼 것인가는 쉽게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문제이다. 확실히 대부분의 일은 지나치게 따분하며, 과도한 노동은 언제나 매우 고통스럽다. 그러나 일이 그 양에 있어서 과도하지만 않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덜 고통스러우리라고 생각한다.

일의 성질과 일하는 사람의 능력에 따라 단지 권태를 덜어주는 것으로부터 가장 시원한 기쁨을 주는 것에 이르기까지 일에는 온갖 단계가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은 대체로 일 그 자체로 흥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일에도 커다란 이점이 있다. 우선 하루 시간의 대부분을 메워주므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시간을 쓸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면 해볼 만하고 보람이 있으며 충분히 즐거운 일을 생각해내느라 쩔뻘맨다. 그리고 그들이 결정을 내렸을 때에는 다른 일이 좀더 유쾌하지 않을까 하는 의혹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다.

 

 

208.

현대 지식인들의 불행의 원인 중 하나는 대부분의 지식인들, 특히 문필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재능을 독자적으로 발휘할 기회를 찾지 못하고 속물이 경영하는 부유한 회사에 고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속물은 그들이 치명적인 넌센스라고 생각하는 것을 산출하라고 강요한다.

……

나는 이러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비난할 수 없다. 굶주림은 그 대가로서는 너무나 심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혀 굶주리지 않고 건설적 충동을 만족시켜주는 일을 할 수 있음에도 일의 가치를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보수가 많은 일을 선택한다면, 그는 그 자신의 행복이라는 관점에서 충고를 받아야 마땅하다. 자존심 없이는 진정한 행복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신이 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대체로 자존심을 갖지 못한다.

 

 

209.

삶을 하나의 전체로 보는 습관은 지혜와 참된 도덕의 본질적인 부분이며 교육을 통해 장려되어야 할 일 중의 하나인 것이다. 시종일관 한 목적만으로 행복한 삶이 이룩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행복한 삶의 거의 빼놓을 수 없는 조건이다. 그리고 시종일관한 목적은 주로 일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다.

 

 

226.

체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절망에 그 근원이 있고 또 하나는 누를 길 없는 희망에 근원이 있다. 전자는 나쁘나 후자는 좋다. 일찍이 진지한 성휘의 희망을 포기할 만큼 쓰라린 실패를 겪은 사람은 그로 인해 절망적 체념을 배울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는 모든 진지한 활동을 포기할 것이다. 그는 종교적인 관용구나 명상이 인간의 참된 목적이라고 하는 이론으로 그의 절망을 위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내면의 좌절을 숨기기 위해 어떠한 위장을 했든 간에 그는 본질적으로 무용하며 근원적으로 불행한 사람이다.

 

230.

능동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조금이라도 체념의 기색을 보이거나 보잘것없는 유머라도 나타내면 그들이 하는 일에 기울이는 정력과 그들이 믿는 바에 따르면 성공을 달성시킬 수 있는 결의가 손상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물론 바람직한 생각이 아니다. 일의 중요성이나 또는 그 일의 쉽고 어려움에 대해 자기를 기만하지 않는 사람만이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기만의 도움을 받아야만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일을 계속하기 전에 우선 진실을 감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다.

 

 

236.

당신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진실을 매일 적어도 한 가지씩은 받아들이도록 하라. 그러면 당신은 그것이 보이스카우트의 매일매일의 친절한 행동만큼이나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당신이 덕이나 지성 면에 있어서 당신의 친구들보다 월등하게 탁월하지 않더라도 물론 탁월한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인생은 살 만한 보람이 있는 것이라고 당신 자신에게 가르쳐주라. 이러한 훈련을 수년 동안 계속한다면 당신은 자신에게 가르쳐주라. 이러한 훈련을 수년 동안 계속한다면 당신은 결국 주저하지 않고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며, 이와 같이 되면 매우 광범한 분야에 걸쳐서 공포의 제국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237.

행복한 생활은 매우 광범한 면에 있어서 올바른 생활과 동일하다. 전문적인 모럴리스트들은 자기 부정을 지나치게 중요시해왔고 그러다가 잘못된 점을 강조하게 되었다. 의식적인 자기 부정은 사람들을 자기 도취에 빠지게 하며 자기가 희생을 했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로 의식적인 자기 부정은 흔히 직접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못하고, 거의 언제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 필요한 것은 자기 부정이 아니라 관심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 자신의 덕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이 의식적인 가지 부정에 의해서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발적이고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된다.

 

238.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야 하며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맞바꾸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239.

행복한 사람은 이와 같은 통일을 이루는 데 실패해서 고통받는 일이 없는 사람이며, 또한 그의 인격이 인격 자체에 대항하여 분열되어 있지도 않고 세상에 대항하여 다투고 있지도 않는 사람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신이 우주의 시민이라고 느끼며 자유롭게 우주가 주는 장관, 우주가 주는 환희를 즐기고, 또한 자기를 뒤이어 오는 사람들과 자신이 실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할 때에도 크게 괴로워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흐름과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때, 우리는 가장 큰 환희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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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위대한 사랑을 못 해본 사람들이 하는 소리다.

위대한 사랑을 하게 되면, 첫 순간부터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아이로

변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의구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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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란 개인적인 모험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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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도란 인간에게 뜨거운 기운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에요.

오히려 그 반대죠.

법도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안정성을 제공하는 거예요.

비록 허울뿐일지라도 영속성을 제공하기도 하죠.

그러니까 법도는 냉기에 뿌리를 박고 있어요.

무엇인가를 보존하려면 찬 기운이 필요한 법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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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고독한 벌레야.

고독한 벌레 중에서도 가장 심하게 굶주린 벌레지.

나도 곧 그놈에게 먹힐 거야.

나는 놈에게 뭘 바치지?

내 벌레는 무엇을 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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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그대에게 무엇을 줄 때는 줄 만하니까 주는 것이다.

그러니 삶에서 모든 것을 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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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삶의 한 영역이다.

이 영역에서는 경험이 많아도 아무 쓸모가 없아.

경험이 도리어 방해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것에서 느끼는 감동, 그 아찔한 기분이 사랑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대를 만날 때마다 세상의 첫날 아침을 맞는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사랑을 하는 게 아닐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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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세월 가고 세월 가면 사랑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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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누가 쓴 책이든, 무엇에 관한 책이든 비판적으로 읽는 게 기본입니다. 정치인만 그런 게 아니라 기업인, 교수, 평론가도 거짓말을 하거나 틀린 주장을 하니까요. 책은 모두 사람이 쓴 겁니다. 가방끈이 얼마나 길든, 하는 일이 뭐든, 사람은 다 비슷한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잘 속이고, 쉽게 속아 넘어가고, 편견과 고정관념에 빠지고,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고 하는 동물, 오리는 모두 그런 불완전한 존재로서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래서 누가 쓴 어떤 책이든 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50)

글 쓰는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 욕망만은 아닙니다. 훌륭한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와 사상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념과 종교의 교조가 도덕적 미학적 직관을 질식시키기도 하거든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은 역사 사례가 있습니다. 중세 교회가 자행한 마녀 사냥과 십자군전쟁, 유럽인들의 북아메리카 원주민 대학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스탈린의 독재와 대숙청, 크메르루즈의 킬링필드, 북한의 우상숭배와 3대 세습, 소위 이슬람국가(IS)의 민간인 참수와 같은 어리석음과 죄악의 배후에는 그것을 정당화한 지식인의 말과 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말과 글로 만든 이념과 종교의 도그마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목 졸라 죽였기 때문에 그런 비극이 벌어진 겁니다.

 

 

(59)

정치적 글쓰기에도 예술성이 중요합니다. 예술성은 문장의 아름다움과 아울러 독창적인 논리의 미학을 요구합니다. 그런 글을 쓰려면 생각과 감정에 자유와 날개를 달아 놓아야 해요. 고정관념과 도그마에 갇히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면서 글을 쓸 수 없거든요. 보수든 진보든 상관없이, 다수 학설로 통하는 이론과 인식 방법을 답습하면 상투적이고 진부한 글을 쓰게 됩니다. 현실은 빨주노초파남보인데 흑백필름으로만 사진을 찍어서 현실이 그와 같다고 주장하는 것과 비슷하지요.

 

(60)

고정관념과 이념의 교조에 생각과 감정이 묶이면 글이 진부해집니다. 빤한 글, 지루한 글, 첫 문장만 보아도 마지막 문장을 짐작할 수 있는 글을 쓰게 됩니다. 독창적인, 기발한, 창의적인, 흥미로운, 반전이 있는 글을 쓰지 못합니다. 진보냐 보수냐? 내 이념을 어떻게 글쓰기에 반영할까? 창의적인 글을 쓰고 싶다면 이런 헛된 질문을 털어 버리고 오로지 아름다운 것과 옳은 것만 생각하면서 글을 쓰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씁니다.

 

(96)

늘 잘되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먼저 이견을 가진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할 수 있는 만큼 공감을 표현한 다음 제 생각을 말합니다. ‘나는 이런 사실이 중요하고, 이런 해석과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누구든 상대방이 자기를 인정하고 존중한다고 느끼면 그 사람의 말을 더 진지하게 경청합니다. 여러분도 그렇지 않으신가요?

 

 

(153)

독서는 타인이 하는 말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책을 쓴 사람에게 감정을 이입해서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 그 사람이 펼치는 논리, 그 사람이 표현한 감정을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는 겁니다. 평가와 비판은 그 다음에 하면 됩니다. 저자에 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글 속으로 들어가 더 많이 배우고 느끼고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읽어야 평가와 비판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감정을 이입해서 책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다음, 자기 자신의 시선과 감정으로 그 간접 경험을 반추해 보는 작업이 비판적 독해라는 말이지요.

 

 

(162)

독자가 이해하기 어렵고 공감할 수 없는 책은 올라갈 길이 없는 산과 같습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다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길이 있다고 해도 너무 크고 높은 산은 오르기 어렵습니다. 히말라야 봉우리를 아무나 오를 수는 없어요. 감정을 이입하는 독서를 하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책을 골라야 합니다. 저는 완전히 재미없고 난해한 책은 읽지 않습니다. 어렵지만 읽을 가치가 있다는 평을 듣는 책이라도 도저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없으면 덮어 둡니다. 제가 아직 그 산에 오를 만한 내공이 더 생기고 나면 그 책에 다시 도전해 봅니다. 그래도 안 되면 나중을 기약하면서 또 덮어 둡니다.

 

 

(167)

벌써 7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고 존경했던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웠고, 죽이고 싶을 정도로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가온 책이 소설가 김형경의 에세이 <좋은 이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느끼는 슬픔을 어떻게 대면해야 하는지 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슬픔과 분노의 실체가 무엇인지 몰라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좋은 이별이란 제목이 눈을 찌르듯 다가왔어요. 그 책을 읽으면서 저는 그 길었던 여름을 견뎠습니다.

 

 

(237)

원페이퍼든 상세보고서든, 슬 때는 독자의 눈으로 살펴봐야 합니다. 보고서는 보통 윗사람이 읽습니다. 쓰는 사람마다 나이가 많고, 경험도 많고, 시력은 나쁘고, 업무 범위는 넓고, 의사 결정권은 크고, 일반적으로 변화에 둔감하고, 결정해야 할 문제는 많습니다. 그런 사람의 시선으로 문제를 살피면서 보고서를 써야 합니다. 읽는 사람이 잘 아는 문제는 간단하게, 중요한데 잘 모를 수 있는 것은 자세하게 써야 합니다. 지적 호기심이 적은 사람이라면 원페이퍼에 가깝게, 지적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상세보고서에 가깝게 쓰는 편이 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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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1971년 6월과 7월, 대법원의 국가배상법 위헌판결과 서울형사지법에서 행한 시국 사건에 대한 연이은 무죄판결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만천하에 고취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독립성은 사실 평지돌출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무장군인 법원난입 사건이나 동백림 사건 당시의 괴벽보 사건은, 그때만 해도 법원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권력이 법원을 몹시 불편해했음을 보여준 사례다. 사법파동의 주역이었던 홍성우 변호사나 최영도 변호사는 1960년대 후반부터 사법 파동 이전까지 법관들은 권력의 눈치를 거의 보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법원으로서는 중정이나 검찰의 눈치를 봐서 그 위세가 무서워할 걸 못한다든가 하는 분위기나 없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사법파동 이전까지는 상당히 자유롭고 배짱대로 재판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누렸다. 그 당시 서울형사지법 단독판사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아서 서울시장보다도 힘이 세다는 말까지 나돌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위로는 대법원부터 아래로는 지방법원까지 박정희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이 연이어 나오자 정가와 법조계에는 정부가 어떤 형태로든 사법부를 손볼 것이라느니 정부가 바라는 대로 판결하지 않은 판사들은 다칠 것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그리고 이 소문은 곧 현직 법관 두 명에 대한 검찰의 영장청구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다. 


(113)

대법원은 저항권은 인정할 수 없고 긴급조치는 위헌이 아니라면서 피고와 변호인의 고문 주장을 배척했고, 절차상의 위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공판조서가 QUSWHEHLJTEK는 주장도 묵살되었다. 확정판결 18시간 만의 사형집행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 어디에도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하면 안 된다는 구절은 없으니 이 또한 철저하게 ‘합법’이었다. 유신체제는 그로부터 4년 6개월 더 지속되었는데 박정희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더는 군법회의로 보내지 않고 일반법원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살인으로 대한민국 법원은 사법부를 지독히 불신했던 박정희로부터 신뢰를 획득했다. 그러나 독재자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국민들의 마음은 사법부로부터 멀어졌다.


(259)

1986년 4월 23일. 김용철 대법원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 사법부에는 조용한 변화가 일었다. 고문으로 조작된 사건이나 시국사건에서는 여전히 정권이 깊이 개입했지만 사법부는 인산구속에 신중해지고 시국사건이나 공안사건에서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그러나 건국대 사건으로 1986년 11월 1,290명이 구속되면서 그 이상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힘들어졌다. 김용철 대법원장은 적극적으로 사법부의 독립을 추구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법과 양심에 따라 판결한 법관들에게 보복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런 그의 모습이 안기부의 눈에는 “여론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등 무능력한 업무 자세로 일관”하는 ‘주사급’ 대법원장으로까지 비쳤다. 결국 김용철은 1988년 제2차 사법파동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대법원장직에서 물러났다.



(353)

이 기막힌 결정에 대해 조영래 변호사는 이렇게 탄식했다. 조금 길지만 꼭 되새겨야 할 말이다. “우리는 오늘 우리 사법부의 몰락을 봅니다. 아무리 뼈아프더라도 이 말을 들어주십시오. 사법부는 그 사명을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한 그릇의 죽을 얻는 대가로 장자 상속권을 팔아 넘긴 것처럼, 사법부는 한갓 구구한 안일을 구하기 위하여 국민으로부터 위탁받은 막중한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저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태에 대하여 사법부에 몸담고 있는 법관 개개인들만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 그러나 적어도 사법부로서는 이 사태의 책임을 다른 누구에게도 전가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해두고자 합니다. 용기가 없는 사법부, 스스로의 사명을 스스로 저버린 사법부는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기대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비통한 심정으로 말하거니와 이 재정신청 기각 결정으로 인하여, 이제 더 이상 사법부의 독립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사법부의 존립 근거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이 사태의 위험성에 대하여, 사법부에 몸담고 잇는 모든 법관들이 깊이 통찰하고 사법권의 존엄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건곤일척의 몸부림을 시작하지 않으면 아니될,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역사적 순간이 도래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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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1 0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6-21 20: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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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억압이나 슬픔이 아니라 평안한 기쁨, 보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그것이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의식할 새도 없이

우리에게서 삶의 자유와 기쁨을 앗아가버립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집어등은 매우 교묘하게 작동합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볼 때 우리에게 자유와 기쁨을 주는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꼼꼼히 살펴보세요.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자유란 '소비의 자유'일 뿐이고

자본주의에서 얻는 기쁨이란 '자기 파괴적인 욕망의 충족'일 뿐입니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욕망의 집어등에 걸려

허우적거리며 깊이 상처받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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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철저히 의존하고 모든 것을 고백하며,

기독교도들에게는 평화와 안식이 찾아온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돈을 수중에 많이 넣을수록 현대인의 마음에도

여유와 안정이 찾아들지요.

독실한 신자는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 찾아올 때 신의 은총을 느낍니다.

또는 로또 복권에 당첨되거나 주식 투자로 주가가 오르면

우리는 돈이라는 신이 강림한 데 대해 엄청난 황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우리 지배력은 돈을 쓰지 않고

돈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물건들을 꿈꾸는 동안에만 작동합니다.

현실적으로 돈을 사용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해버립니다.

이 순간은 마치 신이 떠나버린 듯한 무서운 효과를 낳습니다.

신의 은총을 찾아 다시 교회로 돌아가듯이,

우리는 돈이 떠나려는 순간, 다시 노동의 현장으로 달려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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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는 피상적으로 보면 이전 사회보다 더 자유로워 보입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보장하는 자유란 진정한 의미의 자유가 아닙니다.

자본주의에서 자유는 돈을 가진 자의 자유, 소비의 자유에 불과할 뿐입니다.

소비의 자유란 결국 돈에 대한 복종의 이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소비의 자유를 위해서 돈의 노예가 된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한번 되돌아보세요.

수중에 돈이 없을 때 얼마나 갑갑하고 부자유스럽다고 느끼는지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향유하는 자유가 돈이 있을 때만 가능한 그런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은 돈의 자유이지 우리 삶의 자유일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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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드에게 파리는 악의 꽃, 다시 말해 '악'이며 동시에 '꽃'이었습니다.

경제학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악'은 19세기 파리를 장악하던 산업자본의 힘,

다시 말해 '화페'의 신적 역량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꽃'은 화려하고 매혹적인 '상품'이나 '여성'을 상징합니다.

산업자본이란 '악'이 있기 때문에 상품이라는 '꽃'도 가능했겠지요.

보들레르가 파리에 대해 애정과 증오라는 이중 감정을 보인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1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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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파리의 시인이 중요한 이유는 그가 양 극단 사이에서 끝까지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념적으로 어떤 한 가지 입장을 고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인의 숙명이 아니겠지요.

시인은 양 극단의 괴리 속에서 자신의 삶을 철저히 응시하고

그것을 열정적으로 표출하는 존재일 테니까요.

바로 이 점을 가장 잘 알던 인물이 다름 아닌 벤야민 자신이었습니다.

그가 그토록 보들레르에 집착하며 19세기 자본주의의 근저를 

보들레르와 그의 모순적 삶을 통해 규명하고자 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겠지요.(2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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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살펴본 알제리 농민들의 사유와 너무나도 흡사해서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지금은 현대자본주의 사회의 한 가지 대안으로,

동양의 전통 사유가 각광을 받는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산업자본이 일으킨 환경 파괴의 대안으로 

생태철학이 강조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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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하류 계급의 사람들이나 벼락부자들이 왜 상류사회에 편입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허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인간은 본성이 선하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조차 인간의 허영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선하게 살며,

얼마나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판단하며 살아갈까요?

..

파스칼만큼 인간의 허영과 가식을 깊이 통찰했던 철학자도 없지요.

...

허영은 사람의 마음속에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어서 병사도,

아래 것들도, 요리사도, 인부도 

자기를 사랑하고 찬양해줄 사람들을 원한다.

심지어 철학자도 찬양자를 갖기를 원한다.

이것을 반박해서 글을 사람들도 훌륭히 썼다는 영예를 얻고 싶어한다.

이것을 읽는 사람들은 읽었다는 영광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렇게 쓰는 나도 아마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을 읽을 사람들도 그럴 것이다.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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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그나마 위안으로 삼은 것은 바로 이 두 가지였습니다.

사랑이란 아무런 대가 없이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사랑이란 감정은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우리 인간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소망스러운 감정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자본주의는 늘 인간의 무한한 진보와 번영을 약속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곧바로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인가의 노쇠함과 그에 이어지는 필연적 죽음입니다.

육체적 노쇠함은 인간을 탐욕과 축재로부터 벗어나게 하지요.

물론 노쇠해져 죽음이 가까이 왔는데도 자본주의적 탐욕의 갈등이 꺼지지 않는

그런 부류의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인 유하에게는 이 두 가지 희망이 어렴풋하게나마 그 빛을 발합니다. (3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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