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완용 평전 - 한때의 애국자, 만고의 매국노, 개정판
윤덕한 지음 / 길(도서출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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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고의 매국노


매국노는 1858년 6월 7일에 태어났다. 1905년의 을사조약에서 1910년의 한일합방까지, 그야말로 일사천리 매국의 길을 달린 남자의 이름은 이완용이다. 


그런데 평전이라니?


읽는 내내 주변인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오해의 대부분은 평전의 말뜻을 잘못 이해한데서 온 것이리라. 평전이란 비평을 곁들인 전기란 뜻이다. 그러니 그 평가의 대상을 어찌 훌륭한 사람들로만 한정하겠는가? 악인의 길을 되짚어 보는 건 선인의 인생을 곰곰 들여다보는 것 만큼이나 많은 가르침을 준다. 그 중 가장 큰 것은 악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악이 동작하고, 그 치부를 숨기고, 역사와 한 몸이 되 영원히 지속하는 법. 악의 메커니즘을 파악하지 못하는 민족은 동일한 악인에 의한 동일한 역사를 반복한다. 



매국의 자격


우리는 흔히 매국노가 나라를 팔았기 때문에 권력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매국노는 권력이 있기 때문에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완용은 대한제국 황제가(고종) 총애에 총애를 거듭하던 '대신'이었다. 국가가 총애하는 사람, 국가가 임명한 사람, 국민이 선택한 사람일 수록 더 크게 눈을 뜨고 감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완용은 총애의 권력을 업고 나라를 팔았다. 


이완용은 원래 반일, 친미파였지만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를 물리치고 미국 정부가 조선의 내정에 관여하지 않기로 천명하자(당시 극도로 친일적이던 미국 정부는 일본에 조선을 주고 필리핀을 가져갔다) 일본으로 돌아선 인물이었다. 당시 이완용의 논리는 차가웠다. 동북아 정세의 흐름상 '대세는 일본'이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세순응은 냉정한 사실 판단과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는가? 동일한 마음가짐이 난세에는 매국의 자격으로 평시에는 성공의 조건으로 나타나는 섬뜩함. 누구든 죄 없는 자가 돌로 쳐야 할 텐데 우리 중 누가 죄 없는 자인가?


순응하는 자가 대신이 된다는 점에서 얼마전 낙마한 문창극 총리후보자와 이완용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문창극 후보자는 우리가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데에 '신의 뜻'이 있다고 간증했다. 그는 우리가 말씀에 순응해 그 뜻을 헤아리길 바랐다. 이완용도 조선인이 한일합방의 숙명성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잘 살 방법을 찾길 바랐을 것이다. 대신의 마음이란, 이처럼 한결같은 법이다.



매국의 전략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은 친청파, 친러파, 친일파, 친미파가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인 각축장이었다. 고려 범위를 정치인으로 한정한다면 조선에서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독립을 꿈꿨던 인물은 전무했다. 그들은 모두 나라를 팔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완용만이 매국노가 되었나? 그것은 결과적으로 이완용이 지지한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승리는 필연적으로 패배를 낳는 데 아이러니한 건 이 패배가 똑같이 나라를 팔 준비가 되 있던 친청, 친러, 친미 매국노들은 순식간에 애국자로 만든다는 것이다. 일본의 한일합방을 저지하기 위해 - 외세의 힘을 빌려 - 있는 힘을 다한 애국자로.


패배한 매국노의 전략은 매국이 아니라 친일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전략은 유례없이 성공해 국민의 분노가 매국이 아닌 친일로 향한다. 분노의 불길은 언제나 사람의 눈을 멀게한다. 눈먼 자들이 매국노를 감싸안는다.



친일의 전략


일본의 패망 이후 친일파들이 보인 전략은 친일 이외의 매국노들이 보여준 자기 숨기기 전략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친일파들의 전략은 가장 뜯어 먹을 게 많은 고기를 던져주는 것이었다. 이완용이라는 거대한 고기를. 눈먼 개떼들은 던져주는 고기에 정신이 팔려 자기 뒤로 도망치는 도둑놈들을 놓쳐버린다.


매국노 이완용이 묘까지 파헤쳐지며 부관참시를 당할 때 일본으로 부터 자작 작위를 받은 민영휘는 휘문 학교를 세워 훌륭한 교육인으로 거듭났고 을사조약에 찬성한 법무대신 이하영의 장손자는 '해방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육군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을 지냈으며(이종찬) 한일합방의 공로로 자작이 된 궁내부대신 민병석의 아들 민복기는 대한민국의 대법원장을 두 차례나 지냈다. 이 뿐인가? 일본군에 입대하기 위해 조국에(일본)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하겠다는 혈서를 쓴, 만주군관학교출신 소위 다카기 마사오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16년간 독재를 하지 않았는가? 도대체 어떤 차이가 있기에 어느 매국노는 죽은 뒤 묘까지 파헤쳐지며 멸시를 당하는 데 또 다른 매국노들은 대대손손 부귀화 영화를 누리는 걸까? 



평전의 전략


바라건대 이 책을 친일파 이완용의 매국 행위를 정당화하는 책으로 보지 않았으면 한다. <이완용 평전>은 한 명의 매국노를 무소불위한 절대악으로 만들어 역사를 왜곡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우리는 망국의 수치를 벗기 위해 혹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든 죄과를 오직 한 사람에게만 돌려왔다. 그렇게 우리는 죄 없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명심하라. 역사의 왜곡은 타국에서만 벌어지지 않는다. 더 치명적인 역사 왜곡은 언제나 자국민이 이룬다.


1910년의 대한 제국은(한일합방의 해) 나라는 아랑곳 없이 끔찍한 권력투쟁을 벌인 대원군과 민비(민비 시해는 대원군의 주도로 이뤄졌다)개인의 영달을 위해 각종 이권을 팔아 넘겼던 매국노, 오직 자기 목숨을 연명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 무능력한 황제, 그리고 매국의 가면을 파악하지 못한 어리석은 국민, 이 모두가 만들어낸 악몽이다. 이 사실을 직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망국의 수치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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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4-08-07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런 글을 읽다보면 저절로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다가온 팩트가 과연 있는 그대로의 날것으로의 팩트일까? 회의가 듭니다. 조용한 침묵이야 말고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 아닐가 싶습니다.

한깨짱 2014-08-08 13:17   좋아요 0 | URL
무엇이 사실인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깨어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조용한 침묵이, 아직 저에겐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감사여 2016-04-25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재미있게읽었어요

한깨짱 2016-04-26 13: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댓글을 달아주셔서요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열린책들 세계문학 11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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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라 불리운 사람들


흔히 장르 문학의 대가라 불리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그 칭호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첫째, 해당 장르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된 세계관, 혹은 테마의 원형을 창조했다.

둘째, 바깥의 의견은 관심 밖. 오로지 자체의 형식과 체계를 단단히 해 범접할 수 없는 장르의 성벽을 쌓아올렸다.

셋째, 심오한 주제 혹은 독특한 문체를 더해 장르 문학을 순수 문학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첫 번째에 속한 작품을 현대에 와서 읽는 건 상당한 실망을 유발할 수 있다. 당신은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뭐가 대단하다는 거지?'라는 의문을 수 없이 되뇌이다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이야기의 원형을 만든 사람입니다'라는 틀에 박힌 평가를 내놓을 뿐이다


두 번째에 속한 작품은 읽는 건 상당한 고역이 될 수 있다. 성벽은 까마득히 높고 또 낯설어 감히 올라갈 엄두 조차 나지 않는다. 가까스로 올라가 성 안을 보는 경우도 있지만 그곳이 긱과 괴짜들의 소굴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다. 그래서 가장 무난한 게 세 번째에 속한 작품들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는 바로 세 번째 범주에 속하는 소설이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한 마디로 말하면 -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내 자신이 너무 한심하지만 - 로저 젤라즈니는 심오한 베르베르 이자 문학을 전공한 테드 창(<내 인생의 이야기>의 저자, 공학을 전공함)이다. 


젤라즈니의 소설은 SF를 표방하고 있으나 그가 방점을 찍는 곳은 과학 기술이 아니다. 그는 종교와 신성, 인간의 정복욕과 자기 파괴욕, 불사의 아이러니와 인간의 이중성, 판타지와 신비주의 등 철학적, 신화적 관념을 적극 흡수함으로써 쇠 맛이 전혀 나지 않는 SF를 만들어낸다. 이는 'S'에 천착하려는 골수 팬들에겐 모욕으로 느껴질 수 있으나 풍부한 상징과 상상력을 공급한다는 측면에선 가히 장르의 축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논쟁은 특히 소설이 드러내는 강한 판타지적 요소에서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전술했듯 젤라즈니가 관심을 갖는 영역은 종교와 신화, 신비주의 등에 방점이 찍혀 있다. 이러한 소재를 다루기엔 아무래도 전통적 'S'F 보단 판타지가 결합된 새로운 서사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이유야 어떻든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젤라즈니의 작품이 단순한 장르 문학에 그치지 않고 위대한 신문학에 이를 수 있었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 



SF에 바치는 장미


흔히 오타쿠들의 소설, 머저리 괴짜들의 이야기로 알려진 SF는 많은 사람들의 경멸을 받아온 장르였다. 과연 그 사람들 중 몇 명이나 SF를 제대로 이해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독이라면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할 지식인 박경철은 자기 인생을 통털어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 중 하나로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꼽은 적이 있다. 특정인의 권위에 힘 입어 주장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건 바람직하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니지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유명인이 있다는 게 일말의 안도감을 주는 건 사실이니 거기에 힘 얻어 한 마디 하겠다. 로저 젤라즈니의 SF는, 확실히 차원이 다른 장르다.


혹자는 신에 대한 고찰은 니체로 충분하고 신화의 세계는 이미 조 프레이저가(<황금가지>의 저자) 끝낸 바 있으며 과학 기술의 발전 속도는 더 이상 우리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며 SF 무용론을 주장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이야기의 전달력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예컨대 신성이란 '신성'이라는 단어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을 지닌 캐릭터가 특정한 세계 속을 헤집고 다닐 때 드러나는 것이다. 이렇게 드러난 실체는 온갖 학문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표현한 개념을 초월한다. 개념을 초월해 실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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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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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수림으로 빽빽히 둘러 쌓여 산 속은 컴컴했다. 컴컴한 그 산을 사람들은 흑산이라 불렀다. 오늘날 홍어로 유명한 이 섬은 1801년 부터 1816년 까지, 정약전이 16년간 유배를 산 섬이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큰 형이다. 김훈의 <흑산>은 정약전의 이야기다. 



익숙한 나라의 익숙한 백성들


김훈은 늘 역사적 인물을 그리지만 역사적 인물만을 그려본 적은 없다. 어쩌면 그는 민초들의 삶을 그리기 위해 역사적 인물을 빌려오는 걸지도 모른다. 김훈의 소설엔 이처럼 바글거리고 개미처럼 짓밟히는 민초들의 삶이 존재한다. 백성은 그의 소설 속에서 언제나 고통으로 실존을 증명한다.


정약전은 유학의 이념이 지고한 시절 사특한 학문(천주교)에 빠져 사직을 능멸하고 군왕을 욕보인 죄로 흑산에 유배됐다. 사학에 물든 양반은 유배를 당하지만 사학에 물든 백성들은 곤장에 맞아 엉치뼈가 뒤틀리고 척추가 깨져 죽었다(김훈은 원고지에 연필로 한 자, 한 자 눌러 적는다는 데, 그래서인지 민초들의 엉덩이에 내려지는 곤장의 무참함이 읽는 사람의 피부에까지 전달된다). 그러나 나를 괴롭히는 건 매를 맞고 죽어간 백성들이 아니다. 매를 맞고도 살아 목숨을 연명한 백성들이다. 


김훈은 역사를 옮겨 다니며 늘상 같은 고통을 늘어놨다. 따지고보면 신라의 철제 도끼를 머리에 맞고도 살아난 자들의 자식이(<현의 노래>) 충무공의 수군을 따라 피난지를 옮겼던 백성들(<칼의 노래>)일 것이며 울음이 잠시 그친 피난지 안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남한산성(<남한산성>)에 갇혀 신음한 백성들이고 그 신음 속에서 잉태된 생명 바로 곤장에 엉치뼈가 뒤틀리고 척추뼈가 깨진 <흑산>의 백성들일 것이다.


김훈의 소설 속에서 고통은 역사와 무관한, 그 어떤 변수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영속적 실재이거나 혹은 역사의 본질이다. 안타까운 건 둘 중 뭐가 맞든 우리는 영원히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생을 이어가고자 하는 민초의 생명력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언젠가는 고통이 없는 곳에 이를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일까, 아니면 그 숙명을 깨닫지 못해 바둥거리는 어리석은 몸짓일까? 김훈은 '말이나 글로써 정의를 다투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에게 대답을 바라는 건 똑같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기자와 소설


김훈은 기자였다. 김훈은 소설가다. 그러나 김훈의 소설은 기자가 쓰는 소설이다. 아니 소설가가 쓰는 기사일지도 모르겠다. 김훈은 곤장에 맞는 백성과 그 백성의 피와 똥으로 범벅된 형틀과 그 형틀이 놓은 끔찍한 형장을 무심할 정도로 담담한 문체로 훓는다. 그러나 담담함은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 문체는 김훈의 태생적 한계이거나(뼛 속까지 기자) 사실을 온전히 사실로만 전달하고픈 강박의 산물인 것이다. 김훈은 여지껏 한 번도 소설을 쓴 적이 없거나 아니면 한 번도 소설가였던 적이 없다. "김훈은 언제나 '기사'만 쓴다'는 박경철(시골의사)의 평가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역사적 사실에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공평한 것인가 비겁한 것인가? 공평과 비겁과 이쪽과 저쪽, 온갖 말이 말을 물고 말을 쫓는 허황된 말의 세계에선 오로지 지금, 여기에, 산다는 것만이 중요한 일일까? 나는 그가 견뎌온 역사의 무참함을 모르기에 그 침묵의 이유도 알 수 없다. 어쩌면 나는, 너무나 외람된 말을 지껄인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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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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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디자인을 하다보면 프레임이 얼마나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지 목격할 기회가 많다. 예를 들어 사용자들이 실수로 삭제 버튼을 눌러 모든 자료를 지우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시오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치자. 이 때 대다수의 디자이너들은 삭제 버튼을 잘 안 보이게 디자인하거나 버튼을 눌렀을 때 안내 문구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그러나 가장 좋은 방법은 화면 내에서 '삭제' 버튼을 제거하는 것이다. 실제 삭제 버튼 없이도 시스템은 아무런 문제 없이 동작하지만 사람들은 '삭제 버튼의 문제점을 해결하라'는 질문이 형성한 강력한 프레임 덕분에 문제 자체를 '없애려'기 보다는 기어이 그것을 '해결'하려 든다.


앨버트 O.허시먼이 보수주의자들의 수사학에서 발견한 것도 바로 이것이다. 그는 '담론은 어떤 근본적인 성격적 특징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욕망, 성격, 신념과는 거의 무관한 '논쟁의 규범들'에 의해 형성된다(p.17)'고 말했다. 


보수주의자들이 내세우는 프레임을 깨지 않고선 우리는 그들의 규칙 안에서 영원히 진흙탕 싸움을 벌일 수 밖에 없다. 이 책은 보수의 수사학을 꿰뚫어 봄으로써 그들의 올가미를 피하는 법을 가르쳐 준다.



역효과 명제,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지난 지방 선거에서 서울 시장에 출마한 정몽준 후보가 반값 등록금을 두고 했던 말을 기억해 보자. 그는 반값 등록금이 "최고 교육기관으로서 대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떨어뜨리고 대학 졸업생에 대한 사회적 존경심을 훼손시킨다"고 비판했다. 이것이 바로 보수의 첫 번째 프레임, 역효과 명제다. 더 좋은 삶을 위한 당신의 노력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말이다. 정몽준 후보의 발언은 이미 반값 등록금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확고하게 형성된 탓에 그닥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지만 보수주의자들의 전형적 수사학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사실 이런 역효과 명제는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반값 등록금 쟁취를 위해 시위에 나선 학생들이 있다고 하자. 비겁함을 갑옷처럼 두르고 살아온 어른들은 그 학생들에게 집에 들어가 공부나 하라고 할 것이다. 너희들이 더 좋은 삶을 위해 발버둥 칠수록 공부할 때, 취업할 때를 놓친 너희 개인의 삶은 더 깊은 시궁창에 빠질 것이라고 점잖게 타이르면서 말이다.



무용 명제, 무엇을 하든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일명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요약할 수 있는 이 명제는 대다수 현대인이 깊이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효과적이며 파괴적인 보수의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역효과 명제는 설령 그것이 맞는 것으로 판명됐더라도 '이 방법은 틀렸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여지를 남길 수 있다. 그러나 무용 명제는? 그것은 심각한 허무와 극심한 무기력을 낳는다. 게다가 한 번 심어진 무기력과 허무는 타인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에 의해 강화된다는 문제점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기력과 허무는 그것이 외부에서 심어진 가상이라는 사실을 지우고 자기가 실제로 경험한 현실이라는 생각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사회 변혁을 위해 큰 노력을 해본적도 없고 모든 게 무용하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오래 살지도 않았으면서 오늘날의 청년들이 보여주는 극심한 허무는 허무와 무기력의 내재화 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나는 이런 무용 명제의 가장 멋있는 대응으로 영화 '변호인'의 한 대사를 꼽는다. '늬들이 아무리 데모를 해봤자.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을 거'라는 송강호에게 임시완은 '아무리 단단해도 바위는 죽은 것이고, 계란은 살아 있기에 기어이 부화해 그 바위를 넘는다'고 말한다. 


현재만 보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변화란 원래 실감하기 힘든 법이다. 그러나 삶에서 조금만 거리를 두고 역사를 바라보면 보수주의자들의 무용 명제가 얼마나 무용한지 알 수 있다.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당신이나 나나 모두 종으로 살았을 것이다(조선 시대 양반의 비율은 전체 인구의 5%에 불과했다).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쉴새 없이 정부를 비판하는 난 이미 남산의 한 고문실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정말로, 정말로 세상이 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부패한 정치인들이 장충 체육관에 모여 그들만의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을 넋 놓고 바라봐야 했을 것이다(대통령 직선제는 박정희, 전두환 시대에 폐지 됐다 1987년에 이르러 겨우 부활했다. 우리가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있게 된 게 채 30년도 안 된 것이다).



위협 명제, 너희들은 전부 빨갱이


북한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이토록 쉽게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보수주의자들은 앞에선 북한을 없앨듯이 노려보지만 뒤에선 그들이 존립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대한민국에선 표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빨갱이를 조지는 것만큼 확실한 게 없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선 환경 보호에 관심을 갖거나(4대강 사업에 반대하거나) 아동 복지에 찬성하거나(무료 급식에 찬성하거나) 교육 기회의 확산에 동조하면(반 값 등록금을 지지하면) 누구나 쉽게 종북주의자가 될 수 있다. 보수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과 손을 잡아 4대강을 살리고 아동 복지를 확립하고 많은 학생들에게 평등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 준 뒤 내란을 일으켜 대한민국을 적화통일 할 존재다. 정신병도 이만하면 중증에 가깝지만 그 바닥에선 가장 심한 정신병자가 가장 큰 영광을 받기에 정신병자들은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복지 정책은 꼭 색깔론이 아니더라도 국가 전체를 빈민의 소굴로 만들 것이라는 위협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복지는 필연적으로 국가 지출을 늘리며 부족한 세수는 증세를 통해 확보할 것이다. 호환마마 보다도 무서운 세금! 늘어난 세금 때문에 기업의 투자는 위축될 것이며 이는 곧 기술 경쟁력 하락으로 이어져 기업이 도산할 것이다. 여기서 양산된 실업자를 감당하기 위해 국가의 지출은 더더욱 늘어나고 늘어난 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살아 남은 자들에게 더더더욱 과도한 세금이 부여될 것이며 이로 인해 도산 기업이 폭포수 처럼 쏟아지고 바야흐로 실업자의 빅뱅이... 이 악순환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건 국가 경제의 완전한 파탄 뿐이다. 유럽의 복지 국가들이 수 십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지에 대한 이런 터무니 없는 위협이 먹혀든다는 건 참으로 해괴한 일이다. 



수사학의 아이러니


보수란 간단히, 현재 상황에 불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들의 삼대 수사학인 역효과, 무용, 위협 명제의 목적은 어떻게 해서든 우리를 '가만히 있게 만들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여기에 힌트가 있지 않을까?


보수가 온갖 수사학을 동원해 우리의 길을 막으려 한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보수는 자유와 평등의 빛을 가리기 위해 무시무시할 정도로 두꺼운 켜튼을 쳐둔다. 이로써 세상은 캄캄한 암흑 속에 갇히겠지만 암흑은 오히려 우리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 걔 중 가장 캄캄한 곳이 바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걸 말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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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계의 철학 - 측정 그리고 과학의 진보
장하석 지음, 오철우 옮김, 이상욱 감수 / 동아시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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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과학의 골수팬이라면 과학 철학을 변태 잡종 쯤으로 경시할지도 모른다. 과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니라는 거겠지. 그러나 과학과 철학을 모두 좋아하는 사람에게 과학 철학은 강된장을 만난 보리밥이 될 수 있다.


과학 철학은 메타 학문이다. 거창하게 메타라고 써봤지만 사실 나도 메타가 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정도는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과학이 그릇에 담긴 물을 탐구하는 분야라면 메타 과학은 바로 그릇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그릇을 연구해서 뭐할 건데요?


물만 쳐다보는 사람에겐 호수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지 않는 법그릇을 더듬어 더듬어 더듬어 가다보면 물 속에선 결코 볼 수 없는 '물 전체의 모양'을 알 수 있다. 그릇을 연구한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서 메타적 사고는 매우 생경하다. 우리는 초등 6년, 중학 3년, 고교 3년 총 12년 동안 받은 정규 교육에 불필요할 정도의 증오심을 갖고 있는 데, 이는 12년 동안 배운 지식들이 살아가는 데 혹은 직장을 얻는 데 혹은 일 잘하는 회사원이 되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지식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비메타적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물론 한국 교육이 메타 교육을 지향한 것 같지는 않지만 사실 학교에서 수학을 배운다는 건 '수학적 사고'를 기르기 위함이지 수학 공식을 외우자는 게 아니다. 비메타적 사고 안에서 지식과 그 지식이 유용하게 사용되는 상황은 오로지 1:1(일반적으로는 그것보다 더 낮은 비율로)로 대응할 뿐이지만 메타적 사고는 지식을 틀로써 이용하므로 거의 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다.


극도로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선 이도저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당장 써먹을 방도도 없어 보이는 메타적 사고가 지나치게 폄하되는 경향이 있지만, 200년 전만 해도 과학과 철학은 하나였다. 그 위대한 뉴턴조차 자연 철학을 연구한 '철학자'아니었던가. 피타고라스는 어떤가 그는 철학자이자 사운드 엔지니어였다. 아인슈타인은 위대한 물리학자였지만 그의 연구를 가능케 한 건 우주와 삶에 대한 그의 철학적 태도 덕분이었다. 전공을 하지 않으면 그 분야의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의 프로페셔널 멍청이들은 뉴턴과 피타고라스와 아인슈타인이 철학과 과학을 '복수 전공' 했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아니면 그들이 처음부터 모든 걸 갖고 태어난 천재였다고 믿거나. 그러나 인류 지성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위인들에게 쏟아진 찬사는 그들이 특정 분야의 전문 지식을 많이 쌓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생각할 줄 안다'는 이유로 부여된 것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들은 메타적으로 사고할 줄 알았기에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분야를 매끈하게 연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온도계의 철학>은 과학 철학서다. 메타 과학이다. 이 책은 18세기에서 19세기에 걸쳐 온도라는 개념을 확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렇다고 이 책을 말랑말랑한 과학 이야기 쯤으로 생각하는 건 곤란하다. 메타 과학이라도 과학은 과학. 무시무시한 공식이 등장하고 어마어마한 전문 용어가 쏟아진다. 번역도 그닥 온전치 않다.


그러나 온도계는 커녕 온도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에 '온도'를 연구한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걸 기억하자. 그들은 오로지 뜨겁고 차갑다는 감각만을 갖고 연구를 시작했다. 아주 짙은 안개 속에서 시작한 작은 여정이 끝내는 거대한 '앎'에 도달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 터져나오는 뜨거운 경의를, 당신은 이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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