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우연한 시선 - 최영미의 서양미술 감상
최영미 지음 / 돌베개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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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으로는 드물게 수십만부의 판매기록을 세운 <서른, 잔치는 끝났다>와 최영미의 유럽일기라는 부제를 가진 <시대의 우울>에 이어 세 번째로 읽어보는 최영미의 책이다. 최영미에게 있어 서른이라는 나이는 역설적이게도 잔치가 끝나 궁뎅이 털고 자리에서 일어나야할 종치는 시점이 아니라, 문명(文名)을 날리기 시작하는 양명(揚名)의 시발점이 아니었던가 생각해본다. [아도니스를 위한 연가], [속초에서] 등 감각적인 몇 편의 시들이 라디오에서도 심심치않게 방송되어 나오던 기억이 난다.

비록 미술을 전공했지만 대학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게 될 지는 몰랐다는 작가자신의 말에서 보듯이, 이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작가의 시집에 힘 입은 바 크다는 생각이다. 이건 여담이지만 소설가, 시인 등 영화에 있어서 비전문가들이 영화평을 많이 하게 되면서 수십년을 영화공부에 시간과 정열을 쏟아부은 진짜 영화쟁이들의 입지가 좁아졌다며 동료들의 밥그릇 걱정을 하던 유지나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경제는 곤두박질치고 실업은 늘어나고 하는데도 일부는 또 살기가 더욱 윤택해졌는지 좋아졌는지 어쨋는지 요즘은 문화와 예술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미술관련 서적들 또한 쏟아져 나오고 있는 것 같다. 그런대로 대부분이 미술전공자들의 감상 편력기라서 다행이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얼굴조각에서 20세기 르네 마그리트,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에 이르기까지 형식적으로는 고대에서 현대까지 서양미술사 전체를 훑고 있으며, 화가의 우연한 시선이 아니라 작가자신의 우연한 시선에 포착된 몇편의 그림들에 대한 작가의 개인적 애호와 감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글이 어렵지 않고 도판이 깨끗해서 읽을 만하다. 카라바조도 좋지만 역시 램브란트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생각도 해봤다.

마지막 장에 나오는 [성조지와 용]은 작가의 전편인 <시대의 우울>에 소개된 브뤼겔의 [이카로스의 추락] 비슷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제목이 성조지와 용이어서 누구나 용감무쌍한 조지가 콧구멍으로 불을 뿜으며 겁나게 달겨드는 사악한 용을 영웅적으로 처단하는 그런 그림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화가의 관심은 성조지도 용도 아니다. 그의 관심은 숲이며, 산이며 자연 그 자체다. 진짜로 두려운 것은 불똥을 싸는 무시무시한 용이 아니라, 바로 자연이며, 성조지의 영웅적인 투쟁도 자연속에서는 그 존재가 미약하다는 이야기다. 담담한 관조의 눈길이다. 이런 그림을 그린 화가들은 내게 마치 시인이나 철학자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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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 당선시집 1990-1999
정혜정 외 지음 / 태학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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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알이 주옥같은 명편들 중에 특히 이 한편이 마음에 들고 또 혼자만 감상하기에 아까운 점이 있는 것 같아 여기 옮겨본다. 작가 임영봉은 신춘문예 당선후 시작활동을 하지 않는 듯하다. 아직까지 작가이름의 시집을 구경하지 못한 까닭이다. 아쉽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百年묵은문어가밤마다사람으로변신하여그고을單하나착한처녀를꼬셨드
란다온갖날多島海해떨어지는저녁마다진주를물어다주고진주를물어다주
고장인장모몰래서방노릇석달열흘진주알이서말하고도한되

처녀는달밤이좋아라달밤을기달리고그러던中무서워라냉수사발을떨어뜨
려깨어진날먹구름이끼고달지는어둠새끼손가락약속은무너지고사랑이보
이지않는칠흑같은어둠속아주까리불심지는뱀처럼흔들거려타는구나

이승에서의信標거울은몸안에돋는가시만보이다갈라지고모든주문들의효
력도별처럼흘러가고돌아오지않는사람을몸달아흘리는신음으로손에땀적
시며문빗장풀어놓고동백기름먹인알몸뚱이꼬며全身으로기다리는구나

돌연門빗살에엄지손톱만한구멍이뚫리고새가슴으로놀라는어머니한숨줄
기눈물줄기앞서거니뒤서거니줄을잇고아이고폭폭해서나는못살겠네보름
달대신배가불러오는理由끝끝내는쫓겨났드란다

그날以後로빛나는눈빛을생각하며바다를바라보며하루이틀사흘헤어보는
손가락접고진주알진주알문고리휘어지는아히를낳았고아히가자라면서바
라보이는바다는부활이다부활이다

깊고넓은바다어둠파도따라하얀치마말기적시며죽음속으로떠난어매의유
언을만나면턱고이는아히는오늘도등대불을밝히기위해섬을올라가는구나
'깊은바다홀로외눈뜨신이여어메데불고길잘돌아오시라'
[갯바위섬 등대] 임영봉 1990년 중앙일보 당선작

아새끼의 애비가 진짜로 백년묵은 문어냐? 하는 문제는 후백제왕 견훤이 정말로 지렁이 새끼냐? 하는 이야기와 별로 다를바 없는 것으로 그 진위를 논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어디 쓸데도 없는 그런 일일것일레라. 이 이바구는 나이가 백살이나 처먹은 문어대가리가 요사한 요술을 부려 사람으로 변신한 즉 다도해 어느 섬에 단 하나 남아있던 아조 착한 처녀를 진주를 주고 꼬셔다가 사고쳐놓고는 나몰라라하고 토껴버린 요즘도 흔히 있는 거시기 한심한 이야기인디

이 불쌍한 처녀는 늙은 애미한테 죽도록 뚜디맞고 종국에는 집구석에서도 쫓겨난 고단한 처지가 되어서 겨우 아새끼 하나 싸질러놓고 진짜로 뒈져버렸으니, 처자 버리고 토낀 이 치사야비한 문어대가리가 그 착한 처녀를 기억이나 할란가 몰라, 낫살도 적잖이 쳐먹어서 말이지, 정말 불쌍코 애닯구나 처녀야!!

그런데, 등대지기가 된 아새끼가 바라다본 바다가 왜 부활이냐? 일단 뒈지지 않고서는 부활이란 용어가 성립할 수 없을뿐 아니라 행여 어쩌다 부활한 것들도 필경에는 그 육신의 죽음을 극복할 수 없음이니, 이는 죽음이 부활보다 먼저 있는 것이고 또 부활보다 나중 있는 것이 되는 까닭이라. 할배에서 애비로, 애비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내 새끼에게로, 그렇게 근근끈끈 찐덕하니 이어져 내려오는 피의 흐름이 있을 뿐이야. 부활이라니!!! 얼토당토않은 어리멍청한 소리지. 내 새끼가 나의 부활이냐?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란 말이지. 암만, 아새끼는 헛꿈 개꿈을 꾸고 있는 것이라.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이야. 음!

그리고, 문어대가리가 처녀에게 준 서말하고도 한되나 되는 진주알은 누가 다 꿀꺽한 것이냐? 결국 아새끼가 자라 어른이 되면 이 잃어버린 진주알을 찾느라 눈알이 벌거니 해가지고 싸돌아댕기게 될 것은 당근한 이치라 이 말인데, 언젠가 지 에미 제삿날에 젯상에 문어대가리를 올리 놓고 큰절하며, 니미, 진주알겉은 눈물을 뿌릴란지도 모릴 일이란 말입지. 진주알, 진주알의 비밀은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닌지......아하~

사족 : 언어의 취사선택사용에 있어서 다소간 결례와 후안무치한 점이 있는 줄 아오나 널리 양해 관용 있으시기를. 하지만 시는 너무 재미있다는 말씀. '언어를 다루는 남다른 감수성이 있다'는 심사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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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타 - 할인행사
뤽 베송 감독, 체키 카리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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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니키타는 도시의 뒷골목에서 마약과 알코올로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었던 날아라 ~ 서글픈 비행소녀였던 것인데, 어느날 갑자기, 그렇지...... 예기치 못한 그 어느날, 정부 요원에 의해 요인 도살 전문킬러로 양성된다. 킬러양성소에서의 훈련은 그야말로 살이 터지고 피가 튀며 뼈를 깍는 고된 것이었으나....어느덧 세월은 흐르고 흘러 참 무심하게도 흘러 니키타는 마지막 시험(니키타 자신은 알지 못하는)만을 남겨놓게 되었으니....짠...

모든 훈련을 마친 니키타, 그녀의 생일날을 맞이하여 몇 년만에 처음으로 외출을 하게 되는데.......근사한 레스토랑,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멋진 이브닝 드레스의 아름다운 니키타, 눈부신 니키타....달콤한 와인, 정중한 웨이터.. 오~ 멋진 원더풀한 밤이군... 니키타는 생각했겠지.... 그 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인가......빠리의 뒷골목에서 뽕에 째려 쓰레기로 뒹구브르며 날릴 때는 상상도 못했던 일.......한참 무드에 젖어 가는데, 교관 '밥'은 작은 상자를 꺼내 놓는다. 아! 이건 생일 선물인가보다.....니키타는 감격..그 무뚝뚝이 뚝뚝 떨어지는 교관넘이 선물까정 준비하고......눈물이 날 것 같으다.....교관 '밥'은 상자를 열어 보라고 한다.

반짝이는 눈빛.....기대에 차서 상자 뚜껑을 여는 니키타.......(열지마라! 판도라의 상자니 재앙이 따를 것이라...허나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으려니..) 운명의 상자 뚜껑이 열리고 (아마 니키타의 머리뚜껑도 열렸겠지)....허거덕!..싸늘하게 푸른 빛을 내뿜고 있는 권총 한자루와 탄창 두개.... 니미랄! 인생이란 항상 이런 것이지...교관 밥은 지시한다. 건너편 왼쪽 테이블의 머리 까진 뚱땡이다. 사살하고 본부로 귀환하라. 탈출구는 주방 옆 남자 화장실 안쪽에 있는 작은 창문이다. 그 창문아래 차를 대기시켜 놓겠다. 이것이 마지막 시험이다. 이상! 나는 간다. 아참참!! 생일 축하해!!

불쌍한 니키타, 눈물을 삼킨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다. 잠시후 침착하게 일어나 그 뚱땡이 앞으로 간다. 뚱땡이 멍청하게 쳐다본다. 니키타, 뚱땡이 대가리에 권총을 수방 연달아 갈겨버린다. 놀래 자빠진 뚱땡이의 똘마니들이 겁나게 총을 갈기며 미친 듯이 달겨든다. 니키타 열나게 도망간다. 아름다운 이브닝 드레스는 잡아째져 빤스가 다보인다.. 흐미......아~~ 화장실... 화장실까지만 가면....화장실의 그 탈출구....작은 창문......천신만고 끝에 헐떡벌떡 드뎌 화장실에 도착한 니키타.... 창문을 연다. 그런데.........허거덕! 이런 니미랄!! 공구리쳐진 벽돌 벽이다. 탈출구는 없다. 아하!! 사면초가!!! 적막강산!!!

맞아. 어쩌면 인생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고생 끝에 낙이 오는 것이 아니라 고생 끝에 더 큰 고생이 오는, 가면 갈수록 밤은 깊어 첩첩산중이고 오르면 오를수록 산은 높아 태산이니 아하!!! 둘러보면 막막한 적막강산이요...사방에서 들려오는 구슬픈 초나라 노랫소리여......두손 가득 움켜쥐어도 손가락사이로 힘없이 빠져나가는 물같은 것, 바람같은 것.......그러나, 니키타가 그러했듯이 더 좋은 날들은 내일에 남아있으리니.....용기를 내어야 할 것이다.... 울지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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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딩 포레스터 - [할인행사]
구스 반 산트 감독, 숀 코너리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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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지난 일요일.....역시 느즈막히 일어나서 아침 겸 점심으로 교촌치킨 닭다리를 한 마리 허겁지겁 뜯어먹고 마누라와 노닥노닥 쑥덕속닥 뒹굴뒹굴 꿍꿍거리며 희희낙낙타가 다시 들눕어 한숨 되게 자빠져 자고는 늦게 일어나서 텔레비전 앞에 착 달라붙어 리모콘을 이리저리 요리조리 돌려가며 온갖 체널을 신중하게 요모조모 꼼꼼하게 감상하고는 별 재미난 것이 없어 다시 또 저녁 한그릇을 얼러뚱땅 라면에 밥 말아 처먹고 똥배가 불룩해져 어리멍청하게 앉아 있자니 아 이 일요일이 너무도 허망하게 지나가 버린 것만 같아 마음 한구석이 쓸쓸한 것이 영 기분이 울적꾸리하더란 말입니다.

그리하여 본인은 '에라이~ 디비디나 한편을 빌려보자' 요렇게 작심을 하고요....동네 비디오방에 갔더니 비디오는 산더미로 쌓여있고 디비디로 적잖이 포개져 있는데 아 어느것을 봐야할지 고르고 고르고 고르다가 도저히 못골라 포기하고 나올려는데 이 디비디가 눈에 들어오더란 말입니다. 파인딩 포레스터 반백의 숀코네리...언젠가 출발비디오 여행에서 본 기억이 나면서 갑자기 이 영화가 무척 재미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더만요..

아시다시피 구스 반 산트는 너무나도 유명한 영화 '아이다호'의 감독인데요....저는 가지가지 경로를 통해 이 영화(아이다호)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영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또 일부 매니어들이 이 영화를 무슨 경전처럼 떠받들고 있다는 것도 여기저기서 주워 들었습니다. 요절하는 바람에 오히려 신화의 문턱에 더 가까이 접근하여 문지방을 넘을려고 기웃기웃거리고 있는 리버피닉스를 흠모하는 무리들도 상당당당 있고 말입니다....중고비디오 쇼핑몰을 통해 거금 이만원을 들여 비디오 테잎을 구입한지가 일년 넘어 되었는데 아직까지 보지 않고 있습니다. 아껴두었다가 나중에 볼려고 말이죠... 사실은 귀찮아서 말이죠....

마약중독자, 동성연애자, 또라이 등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관심이 많았던 감독이 이제는 시선을 돌려....굿월헌팅에 이어 또 다시 '소외된 천재'라~. 어차피 천재들이란 당대에서는 이해되기 어려운 법이고, 그들의 그러한 소외나 고독, 질병 등은 천부적인 재능에 대한 반대급부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입지요. 천재에는 그 댓가가 필요한 법...(그런데...학교 다닐 때를 생각해 보면 공부도 1등, 운동도 1등, 인기도 짱, 놀기도 잘하는 그런 동무들도 있더란 말입죠 하늘을 원망하고 부모를 한탄하기도 했습죠)

필연이다. 이런 이야기입죠. 당연한 이야기를 아니라고 우기니 이 영화가 자연 별 공감과 설득력을 얻어내지 못하는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내 짐작컨대 애송이 천재 깜둥이 자말은 늙은 천재 자폐환자 포레스터가 도와주지 않아도 필경은 문학으로 일가를 이룰 것이고, 포레스터의 유작 황혼은 필시 그의 처녀작보다 는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등장인물들간에 갈등의 뼈대가 허약하고 또 결말이 눈에 보이니 자연 스토리가 밋밋 지리멸렬하여 별 재미없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지사일것입니다....사실, 제가 말은 이렇게 해도 그런대로 재미있게 봤습니다. 숀코네리는 늙을수록 더 멋있어지는 것 같더군요.... 흠 나도 멋있게 늙어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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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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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동안 가끔가끔 이성복의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에 나오는 시편들과 김종해 시인의 데뷔작이자 신춘문예 당선작인 [내란]이 문득문득 머리에 떠올랐다. 둘러보면 적막강산이요 내려보면 아득한 천길 벼랑이니 막막하고 답답하며 외롭고 고달프며 무기력하여 쓸쓸한 이 소설의 분위기가 이성복의 시들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고, '종묘와 사직이 여기 있는데 과인이 어디로 가겠느냐' 하면서도 끝내는 서울을 버리고 도망치듯 몽진길에 오르며 터뜨린 임금의 울음과 부서져 불타버린 종묘를 생각하며 엎드려 흘린 임금의 눈물과 백척간두의 위태로운 사직을 창호지 잘라 쓴 한 장 교지속의 장려곡진한 문장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는 임금의 적막함이 아마도 김종해의 시 [내란]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생각나는 몇 구절을 여기 옮겨본다.

...목단이 시드는 가운데 지하의 잠, 한반도가/ 소심한 물살에 시달리다가 흘러들었다 벌목/ 당한 女子의 반복되는 임종, 病을 돌보던/ 청춘이 그때마다 나를 흔들어 깨워도 가난한/ 몸은 고결하였고 그래서 죽은 체했다.../ 이성복 [정든유곽에서]

...그날 태연한 나무들 위로 날아 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잔디밭 잡초 뽑는 여인들이 자기/ 삶까지 솎아내는 것을, 집 허무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편통의 다정함을.../ 이성복 [그날]

그해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시작되어도/ 봄은 오지 않았다 복숭아나무는/ 채 꽃 피기 전에 아주 작은 열매를 맺고/ 不姙의 살구나무는 시들어 갔다/...그러나 어떤/ 놀라움도 우리를 무기력과 불감증으로부터/ 불러내지 못했고 다만.../ 이성복 [1959년]

낙엽이나린다. 우산을들고/ 제왕은운다헤맨다.../...깊은밤인경은/ 시녀같이누각에서운다누각에서떠난다./ 아한장의풀잎인가미궁속에서/ 내전에세워둔내동상은흔들리고/ 나는거기가서꽂힌비수가되고/ 한밤동안석전을내리는물든가랑잎에/ 붉은용상은젖어/ 우산을들고제왕은운다헤맨다/ 김종해 [내란]

각설하고, 책을 읽다가 '지나간 모든 끼니는 닥쳐올 한 끼니앞에서 무효였다'(p197)는 대목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문득 무릎을 치며 탄식을 흘리고 말았다 아하!!. 과거에 매 끼니를 온갖 진수성찬 산해진미로 이어왔다하더라도 오늘 아침에 일어나 입에 넣을 끼니가 없다면 과연 과거의 먹고 마셨던 그 모든 끼니가 오늘 닥친 이 끼니앞에서, 그 기아의 서글픔과 서러움 앞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렇다. 항상 현재가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원인없는 결과가 없듯이 현재는 과거와 연결되어 있으니 과거에 미리 준비했다면 어찌 오늘 끼니 걱정이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그러나, 다시 한번 그러나, 아무리 대비를 하고 준비를 했다고 한들, 결국은 한 끼니의 식사를 위해 지렁이처럼 꾸불꾸불한 무료급식소의 기다란 대기 행렬 끝으로 후줄근한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던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우리는 기이한 병이나 부당한 권력에 의해 하루아침에 몰락한 행복 단란한 가정들을 TV 등에서 흔히 보아왔다). 이런 것을 일러 아마도 팔자라고 할것이며 또는 운명이라고도 할 것이다. 운명 앞에 진인사(盡人事)는 무력하다. 다만 그런 팔자가 아니길 바랄뿐이다.

작가의 글이 모국어 산문미학의 한 진경을 보여준다는 일부 평가에 나도 일부 동조하지만 <칼의 노래>를 읽으면서 느낀 점을 말해보자면, 상기와 같은 폐부를 깊숙히 찌르는 문장들도 없지 않지만, 대체로 중언부언 또한 적지 않다는 생각이다.되나 마나 마구 지껄이다 보면 좋은 말 한 두마디 나오기 마련이다...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감히 김훈의 글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그냥 그런 생각도 문득 들었다는 이야기다). <칼의 노래>는 간결한 문장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단문들 중 어떤 것들은 의미내용이 애매모호하여 소설의 각 장이 마치 한편의 긴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이다. 이것이 작가에게나 소설에게 있어 공과득실 그 어디에 해당되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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