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수 교수의 지중해 문화기행 - 아름다운 문화 속의 매력적인 삶
이희수 지음 / 일빛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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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교수는 이슬람 전문가다. 우리나라에서는 결코 흔하지 않는 분야다. 기왕에 전문가가 될바에야 남이 잘 선택하지 않는 분야를 공략해 독보적인 위치를 선점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슬람관련 책을 여러권 내었고, 내가 일전에 읽은 적이 있는 예담에서 나온 '인류문명의 박물관 이스탄불 기행'이란 책을 감수한 적이 있어 이름이 눈에 익다. 저자는 정기적으로 혹은 비정기적으로 이슬람여행단을 이끌고.....눈부시게 푸른 바다와 언덕위의 하얀 집, 고대의 유적이 즐비한 지중해 일대를 돌아다니기도 하는 듯 하다. 실로 부러운 일이다.

터기 이스탄불에서 - 이스탄불, 곧 콘스탄티노플은 베니스 다음으로 내가 가보고 싶은 도시다. 해 떨어질 무렵,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한 블루모스크의 전경이 찍힌 한 장의 사진에 나는 완전히 반해버리고 말았다. 그게 언제였는지, 그 사진이 어디에 실려 있었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언제쯤 베니스나 이스탄불에 가 볼 수 있을란지 생각해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어쩌면 꿈만 꾸다가 한 세상 마칠른지도 모른다. 그래도 책으로 읽을 수 있다는 점이 적잖게 위안이 된다. - 출발하여 그리스, 이탈리아, 남프랑스, 스페인을 거쳐 지브롤터해협을 건너 모로코, 튀니지,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 일대까지, 지중해에 면한 여러나라들을 둘러보는 여정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득세하고 있는 유럽중심의 기독교 문명에 밀려 이슬람 문명의 중요성과 의의가 폄하되고, 쇠외되고, 왜곡되고, 등한시되고 있는 실정이다. 기독문명이 중세 암흑기의 그 캄캄한 낭떠러지에서 더 이상 추락하지 않고 르네상스로 말 그대로 부활 비상하게 된 것도 바로 이슬람문명의 힘이었다. 정복과 침략이 아닌 문명간의 협력과 공존을 통해서만이 인류문명의 진정한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여행기를 읽게되면 자연 궁뎅이가 들썩 거린다. 몸은 사무실에 와있어도 마음은 정처없이 떠돈다. 휴유증이 며칠은 갈 것이다. 좋은 여행기일수록 위험한 책이다. 어느날 갑자기 안정된 직장과 가정을 모두 버리고 훌쩍 떠나게 될지도 모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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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시대의 빛과 그늘 박한제 교수의 중국역사기행 1
박한제 지음 / 사계절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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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일치일란(一治一亂)이라는 문구를 사용하여 역사를 말하기도 한다. 맹자에 나온다는 이말은 아마도 한번 크게 다스려지면 한번은 크게 어지러워진다는 뭐 반복 순환의 이야기가 되겠고, 역사란 것도 이합집산과 합종연횡, 회자정리와 거자필반을 거듭 반복하는 인생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뜻이라고 내 멋대로 짐작해본다. 결국 개개의 인생사들이 모여 역사를 이루는 것일진대, 반복무상한 것이 인생사이며 곧 역사가 아니던가?

중국 고대 하은주시대가 일치(一治)라면 주나라 말기 춘주전국시대는 일란(一亂)이 되겠다, 진한(秦漢)과 대당(大唐)은 일치의 시대가 되겠고 삼국 위진남북조와 오대십국은 일란이 되겠다. 어지러운 시대라도 춘추전국시대는 문화와 사상이 만개한 이른바 백화만발 백가쟁명의 시절이니 오늘날에도 동주 열국지라는 책으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삼국지 못지않게 인기를 누리고 있으며 중국 고사성어의 대부분이 여기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지러운 시기라도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일란은 일치를 위한 준비와 충전의 전단계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역사관일 것이다.

조조를 일러 치세의 능신이요 난세의 효웅이라 했듯이, 물론 시대가 영웅을 만들어 내겠지만 새 시대를 여는 것 또한 그 영웅이리라. 저자는 이른바 다섯종족 오랑캐(흉노, 선비, 저, 강, 갈족)가 중원을 섭렵한 이시대가 중국역사에서 폄하되고 소외된데 대하여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역사는 언제나 승리자의 편에서 기술되고 왜곡되기 마련이다. 오호를 비롯한 중국 주변민족들이 - 고구려와 발해를 포함하여 - 모두 그들의 문자를 가지고 있어 기록을 남겼다면 오늘날 중국역사해석은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저자에 말에 십분 공감한다.

조조가 아방궁에 버금가는 궁전을 세웠으며, 화려 찬란하기가 당시 중국에서 으뜸이었다는 업도가 오늘날에는 한낱 옥수수밭으로 변해버려 흙먼지만 풀풀 날리고 있다니...아! 진실로 상전벽해란 말이 옛시인의 허사만은 아니로고! 그 옛날 빛나던 영광과 번영의 도성이 이제는 아무런 흔적도 자취도 없이 먼지가 바람에 날려가듯, 그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는 것은 삼국지 애독자의 한사람인 나로서도 실로 가슴아픈 일이다..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云云하는 두보의 시 '春望'과 '옛 궁궐터에는 보리만이 무성하고 벼와 기장도 기름졌구나...'하는 맥수지탄(麥秀之嘆)의 고사가 떠올라 허허로운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인생도 무상하고 역사도 무상하다. 다만 먼지묻은 서책을 뒤적이며 쓸쓸히 옛 시절을 그리워할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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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 - 함정임 유럽 예술 묘지 기행
함정임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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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도 여러 가지다. 장소로 말하자면 국내에서부터 해외까지, 주제별로 나누자면 미술, 음악, 문학, 영화에서부터 포도주 등 음식물에 이르기까지 여러 수십 종은 될 것이다. 일전에 공지영이 수도원기행을 내었고 이제 함정임은 묘지기행을 출간했다.

'베네치아에서 비발디를 추억하며', '베네치아의 까페 플로리안으로 가자'가 그렇듯이 유럽묘지기행이란 부제가 붙은 <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도 온전히 베네치아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실제 묘지기행은 파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베네치아에서는 토마스만의 소설 <베니스에서 죽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아마도 책을 처음 출간할 때 어떤 제목을 선택할 것인가하는 문제도 그리 간단한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의견과 판매실적을 고려하는 출판사 측의 입장도 있을 것이다. 베네치아에는 무엇인가 특별한 매력이 있기때문에 제목으로 상재되었을 터이다.

폴 발레리, 폴 엘뤼아르, 사뮈엘 베케트, 알베르 카뮈, 프란츠 카프카, 짐모리슨.... 이런 사람들의 묘지를 순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지 모르겠다, 이제는 한 웅큼 흙으로 누워있는 유명인들의 무덤을 둘러본다고 해서 죽음이 극복되는 것도 온전히 이해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든 떠나는 발걸음에 굳이 이유와 목적을 붙일 필요는 없다. 가고 싶으면 가는 것이고 쓰고 싶으면 쓰는 것이다. 떠날 수 있을 때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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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사용 - 소설가 함정임의 프랑스 파리 산책
함정임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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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알라딘으로 함정임의 신간도서 두권을 구입했다. 한권은 <인생의 사용>이고 다른 한권은 <그리고, 나는 베네치아로 갔다>이다. 특정한 책을 구입하는데는 누구나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함정임의 프랑스 파리 산책'이란 부제가 붙은 <인생의 사용>을 구입한 까닭은 아마도 본인이 구경해본 유일한 외국도시가 파리여서일테고, '유럽 예술 묘지 기행'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리고…나는 베네치아로 갔다>를 구입한 이유는 본인이 제일로 가보고 싶은 도시가 베네치아여서일 것이다.

저와 같은 소심한 봉급쟁이 사정으로 말하자면 파리는 아득하고, 베네치아도 아득하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여행경비를 생각하면 또 한번 아득하고, 수년 적금을 넣어 경비를 마련했다손 하더라도 열흘정도라도 휴가를 마련한다는 것도 또한 아득하다. 직장생활 8년에 5일이상 휴가를 해본적이 없다. 어찌 생각해보면 이런 아득함들은 배부른 투정일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란 그 끝간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만인의 공통된 의견이고 주지의 사실이다. 누구나 자기가 처한 현실에서 갈망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인생의 사용>을 읽으면서 몇 년 전 스치듯 지나간 파리를 다시 한번 자세히 보고 싶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아국(我國)이 비록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지만,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집 대문을 나서면 바로 오백년 혹은 칠백년의 전통과 역사를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호흡할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동양의 건물들은 목조라 오래 보전된 것들이 드물고, 유럽의 건물들은 돌로 지어져 전쟁이나 화재 등을 견디어내었다. 파리 지하철이 100년을 넘었다고 하니 그 많은 성당들과 가옥들을 말해 무었하겠는가. 강산이나 들판과 한가지로 건물과 거리들도 함께 의구하니 실로 전통을 말할 만하고 자부심을 가질만하다는 느낌이다. 문화적 사대주의를 지적하거나 혹은 지적 허영에 물든 썩은 낭만주의를 운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불문학을 전공한 작가가 파리에 대하여 쓴 산문이니 여러 가지 읽을 만한 것들이 있고, 일년에 한달이상씩 10여년을 파리에서 소일한 사람의 글이니 또 그 감상과 느낌을 믿을 만하다..

사족 : 친구나 직장동료 등 주위사람들로부터 괜찮은 책을 소개받거나 알라딘과 같은 서적관련 웹페이지를 정처없이 떠돌아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을 때의 반가움이란 책읽기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특별한 기쁨이다. 어서어서 구해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 설레임이나 그리움 비슷한 감정들이 무럭무럭자라난다. 김화영의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을 소개해준 것 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값어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덤으로 무엇인가를 더 얻은 것 같아 흐뭇한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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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영화 - 시대를 초월한 걸작 영화와의 만남
로저 에버트 지음, 최보은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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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 그것도 최소한 2~3번정도 말이다 - 저자의 영화평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문장은 간결하고 명확하지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내용을 파악하기는 용이하지 않다. 대가들은 변죽을 울리지 않고 바로 요점을 때리기 때문일 것이고 또 너무나도 당연하게도 본인의 영화지식과 영화감상편력이 일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분야의 문외한이나 초심자들은 대가들의 이러한 핵심을 찌르는 상징적인 한 두 마디나 한 두 문장을 결단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 자신이 전문가의 반열에 올라서지 못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나름대로 영화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녕코 애석하게도 애버트가 명화라고 호언한 수 편의 영화는 그 제목조차 금시(今時)에, 혹은 나 살아 생전에 초문(初聞)인 것이었다. [비브로사비]라니....허 참....갑자기 샤브샤브와 와사비가 생각났다. 먹고 싶었다.

이른바 명화에 대한 일반적이고 무난한 논평과 여러사람들에 의해 재삼 확인된 목록을 얻고 싶다면 차라리 한계례신문사에서 나온 <영화100년 영화100편>을 권하고 싶다. 영화 저널리즘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처음으로 받았다는 로저 에버트와 같은 영화 전문기자로 말한다면 굳이 멀리 바다건너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또 한번 차라리 우리나라 조선일보의 이동진 기자의 책들을 권하고 싶은 마음이다. 600여쪽이나 되는 이 책을 며칠에 걸려 간신히 읽어냈지만 소득은 별로 인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영화 취향도 바뀌는 것 같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 말이다. 예전에는 [전함 포템킨]이니, [제7의 봉인]이니, [베를린 천사의 시]니 하는 하나같이 지겨운 예술영화도 졸음 견디어내며 그럭저럭 보아내고 했는데, 요즘은 단순하고 웃기는 영화만 찾게 된다. 명화라고 불리워지는 것들을 한 편 보자면 대단한 결심이 필요하게 되었다.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는 법이다. 이것은 안타까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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