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의 기도



남진우





1

일찍이 한 철학자는

한 바구니의 책을 앞에 두고 다음과 같이 기도했다

-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굶주림을 주시옵고

일용할 굶주림?

굶주림이라면 그것은 내게 너무도 충분하다

아무리 먹어치워도 질리지 않는 탐욕의 눈빛과

어둡게 입 벌리고 있는 머릿속의 허방

허겁지겁 굶주린 눈으로 먹어치우면

글자들은 텅 빈 머릿속으로 꾸역꾸역 밀려들어

잠시 북새통을 이루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2

책들이 달려든다

화려한 표지를 치켜세우고

현란한 광고 문구와 장엄한 저자 약력을 앞세우고

날 선 종이들이 사방에서 달려와

일제히 내 몸을 베고 찌른다

나를 읽어야 해 나를 읽어달라니까

책들이 아우성치며 내 몸을 타고 오른다

빽빽히 종이로 들어찬 몸이

책상 위에 머리를 처박고

다시 꾸역꾸역 종이를 삼킨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책을 멀리할 수 있는 자만심을 주시옵고



3

매일 한 바구니의 빵 대신

한 가마의 책이 하늘 어디선가 떨어진다

떨어져

오늘

내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저 거대한 책더미

이를 갈며 아무리 먹어치워도 결코 줄어들지 않는

저 글자들의 산

죽은 나무의 무덤

길이 또 다른 길로 이어지듯

책은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지고

그 끝없는 말의 거미줄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면

나는 어느덧 살진 거미 앞에 서 있다



4

지금 막 도착한

바구니를 들여다본다

아,

책 대신 누군가 띄워보낸 갓난애가

빙그레 웃고 있다

반가워 들어올리면

우수수 떨어져내리는 종이 뭉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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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에서 사랑으로


결국은 각자 마음속에
살아 있는 사랑이 모든 치유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사랑을 느끼기 위해서는 고통에 취약해야                                                  
한다. 상처는 고통의 한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자신의 고통을 느끼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연민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깊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방증한다.


- 그렉 브레이든의《잃어버린 기도의
비밀》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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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미사를 가서 제1독서를 듣고 있는데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나고 곧이어 사람들이 한 곳으로 달려들 갔다. 나는 성당 우측의 뒷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왜 그러는지 의아했는데 미사를 집전하시던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신부님께서도 제대에서 내려 오셔서 그 곳으로 가셨고 독서를 하던 청년들도 달려갔다. 알고 봤더니 따님과 함께 미사를 드리시던 할머님께서 의식을 잃으시고 의자에서 쓰러지신 것이다. 사람들이 119로 급히 연락을 하고  따님이 "엄마! 엄마!"하시는 동안 미사에 참석한 사람들의 마음은 온통 그 분에게 향해 있었다. 이윽고 119구급대분들이 오셔서 이동구급침대에 할머님을 실고 성당을 나가시는데..그 분의 하얀 머리칼과 작은 발을 보니..문득..엄마의 장례미사때가 생각나 마음이 무척 심란했다. 구급대가 할머님을 모시고 나가고 다시 미사를 드렸는데 미사 끝무렵, 수녀님이 가져오신 메모를 보시고 신부님께서 "할머님께서 이제 괜찮으시답니다! 나이가 드신 분들은 이런 환절기엔 간혹 이런 일이 있는데 어르신들은 옷 항상 따뜻하게 입으시고 때 걸르시지 마십시요~나도 이젠 가끔 때를 거르면 벌벌 떨려요~~" 하셔서 모두들 웃으며 안심을 했다. 119구급대분께서도 항상 호출을 받으시지만, 아마..이렇게 미사中인 성당으로 구조를 하러 오신 일은 참 드문 일이었을 것 같다. 다행히 할머님이 의식을 찾으시고 안정을 취하셔서 이런 한가한 농담도 할 수 있겠지. 할머님! 이제 더욱 몸 조심하세요~^^ 따님을 비롯하여 아들, 딸 같고 손주들 같은 신자분들과  할아버지신부님도 모두 놀라고 걱정했잖아요~~감사합니다. 다음주에도 건강하고 예쁜 모습으로 뵈어요~^^ 그리고 119구급대분들께도 너무 감사드립니다. 참 덕분에 오늘도 양호했다. 감사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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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지는 저녁  

 

                                                 정호승 

 

                   꽃이 진다고 아예 다 지나 

                   꽃이 진다고 전화도 없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을 적 없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꽃이 진다고 저만 외롭나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 

 

                   꽃 지는 저녁에는 배도 고파라 

 

                                                     - 김지수,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134)-   

 

 한 10년 前쯤, 인사동의 어느 茶器店에서 '꽃이 져도 나는 너를 잊은 적 없다'라는 글이 적혀 있는 흰 茶布를 산 적이 있다.  그 귀절이 마음에 들어 茶布를 여러 장 사서 경북 영주의 어느 사과과수원을 비롯해 친구들과 茶를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선물을 했는데 오늘 -시, 나의 가장 가난한 사치-를 읽다가 그 생각이 났다. 그렇다. 지는 꽃의 마음을 아는 이가 저만 외로울 리가 있겠는가. 내가 잠시 잊었던 사람들.. 나를 잠시 잊었던 그대들에게 이 詩를 띄운다. So, 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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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

 

                               남진우 

 

   물고기는 제 몸속의 자디잔 가시를 다소곳이 숨기고 

   오늘도 물 속을 우아하게 유영한다 

   제 살 속에서 한시도 쉬지않고 저를 찌르는 

   날카로운 가시를 짐짓 무시히고 

   물고기는 오늘도 물 속에서 평안하다 

   이윽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사납게 퍼덕이며 

   곤곤한 불과 바람의 길을 거쳐 식탁위에 버려질 때 

   가시는 비로서 물고기의 온 몸을 산산이 찢어 헤치고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자신을 드러낸다  

 

 

 슈퍼를 갔다가 팩에 들어 있는 꽁치가 선연하게 알까지 내 비치며 빗금친  칼자욱과 신선하게 왕소금까지 뿌려 있어, 생선을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문득 오늘 저녁 찬으로 장바구니에 넣어왔다.  식구들이 저녁을 먹고 온다는 문자에 혼자 꽁치 한 마리를 구워 먹는데 가운데 굵은 등뼈는 송두리째 잘 발라졌지만, 나머지 살 속에 빡빡하게 박혀 있는 잔 가시들을 바르다 보니 문득, 이 詩가 떠올라 마음이 알싸하다. 그렇지 누구나 물고기뿐 아니라 자신의 살 속에 박혀 있는..저를 찌르는 가시를 짐짓 무시하고 오늘도 평안을 꿈꾸며 살 것이다. 곤곤한 불과 바람의 길을 거쳐 죽음이라는 식탁 위에 버려질때 가시는 비로서 온 몸을 산산히 찢어 헤치고 선연히 자신을 드러낼 것이다. 단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눈부신 빛 아래 선연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그리고 집의 큐브수조에서 발랄하게 유영을 하며 나나잎에 앉아서 물 속의 잠을 자는.. 우리가 다가가면 꼬리를 팔랑이며  달려 오는 나의 어여쁜 물고기들에게도 이 詩를 전한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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