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의 의미

                                                                                        이시영

 

 

 

        1964년 토오꾜오 올림픽을 앞두고 지은 지 삼 년밖에 안 된 집을 부

       득이 헐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고 한다. 지붕을 들어내자

       꼬리에 못이 박혀 꼼짝도 할 수 없는 도마뱀 한 마리가 그때까지 살아

       있었다. 동료 도마뱀이 그 긴 시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먹이를 날

                            라다 주었기 때문이다.*

 

 

                             *박성호 칼럼, 다산 茶山포럼, 2007년 1월 11일.

 

 

                                                                 -이시영, <우리의 죽은 자를 위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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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오늘날은 길의 시대다. 사통팔달로 새 길이 뚫리건만, 아직도 길이 모자란다고 아우성이다. 교통방송이라는 것이 생길 만큼 길은 우리 삶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지만, 아쉽게도 그 방송에서 다루는 소식은 '어디어디가 잘 뚫린다'가 아니라 '어디어디가 많이 막힌다'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낸다. 운수업을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일반 월급쟁이도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도인(道人)이다. 하루중에 많은 시간을 '길위에 서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본래 길이란 우리에게 낯선 것이었다. 인생살이를 길 가는 행인에 자주 비유해왔고 또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노래가사도 있지만, 실은 '길을 가는 사람'은 뭔가 사연이 있는 사람이었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농경민족이던 조상들에게 일반적인 삶의 패턴은 고향 땅에서 나서 그곳에서 살다가 그곳에서 죽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마을을 스쳐 지나가는 방물장사나 보부상들은 깃들일 곳이 없어 피치 못해 움직이는 사람들. 즉 처지가 곤란한 사함들이었다. 이들에 대한 안타까운 눈길이 밴 표현이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것이지, 결코 길 떠나는 삶을 좋게 본 것은 아니었다.

 보기 드물게 길 걷는 사람과 그 길을 아름답게 묘사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도 "이번 걸음만 끝나면 어디에 정착하리라"는 소망이 나타나 있다. 이렇게 우리네 길 떠난 사람은 언제나 고향(정착)에 대한 그리움을 한(恨)처럼 품고 살았다. 더욱이 일제시대와 6.25동란을 겪으면서 고향의 상실은 더더욱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표현되었다. <고향무정> <강촌에 살리라> 등등의 노래제목들이 다 그런 뜻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더욱이 신작로이며 철도와 같이 새로 난 길은 다 남(일본인)의 손에 의해 뚫렸기에, 길이란 바깥의 가치를 안에 강요하는 위협의 통로로 여겨졌다. 그러니 길은 더더욱 불안과 두려움의 촉수일 수밖에 없었고, 길가에는 매양 우리네 눈물자국이 아롱져 있었던 것이다. 정든 곳(사람)과의 이별,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불안한 첫걸음이 동네 어귀의 길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제 길은 더이상 목메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정착하는 농경민족이 아니라 유랑하는 유목민족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한 두해 어느 아파트에 정착해 살다가도 문득 캥거루 모양이 그려진 이삿짐 트럭에 여행가방 싸듯 짐을 꾸려 떠난다. 보내는 이들은 다시 못 만날까 염려하지 않으며, 떠나는 이들도 결코 눈물짓지 않는다. 핸드폰, 이메일과 같은 다양한 만남의 길이 곁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누구도 이곳을 뿌리내릴 땅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둥둥 떠다니는 존재가, 길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방물장사가 된것이다.

 '길위에 서 있는 존재'인 우리는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길이란 자연히 삶의 의미를 헤아리게 만드는 계기이기에. 동양에서는 길(道)을 철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삼아왔던 것이리라. 이를테면 노자의 "길을 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 길이 아니다"([도덕경])라는 말이 그러하고, 공자의 "사람이 길을 넓히는 것이지, 어찌 길이 사람을 넓힐 수 있으랴"([논어])라는 말이 그러하다.

 길이란 이렇게 걸어가는 통로이면서 또 사람의 인생길이라는 뜻도 가진다. 길을 넓히면 광장이 될 것이고, 길을 좁히면 외줄이 될 것이다. 외줄타기야 아무나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광장이라고 해서 마음대로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탁 트인 저 하늘과 바다에도 길이 따로 있어서 비행기나 배가 제 마음대로 다니지 않듯, 광장도 제 마음대로 달리다가는 남과 부딪히기 마련이다. 인생길을 넓은 광장 내달리듯 가는 사람도 있는 듯하지만, 그러나 또 우리는 많이 보아왔던 터다. 그러다가는 머지않아 사고가 나게 마련이라는 것을.

 이처럼 사람의 인생길은 아무 데나 함부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인생길이야말로 그 어는 길보다 좁고 험한 길이다. 그런 점에서 조상들이 삶을 외줄타기에 비유한 것은 아주 건강한 처방으로 여겨진다. 아니 "새하얀 작둣날 위에 설 수는 있어도, 중용의 길에 서기는 어렵다"([중용])고 하였으니, 사람다운 삶의 길의 길을 외줄은 커녕 칼날보다 더 좁은 길로 여겼던 셈이다. 이럴진대 어찌 삶의 길을 술 취한 사람의 걸음처럼 방만하게 휘청거리며 걸어갈 수 있겠는가.

 해발 일 미터 위로 난 평평한 이 길은, 세상에서 제일 깊은 저 마리아나 해구로부터는 일만일천 미터 위의 고지(高地)에 난 길이며, 에베레스트 산으로부터는 팔천팔백 미터 아래의 심연(深淵)에 난 길이다. 터질 듯한 가벼움과 찌부라질 듯한 무거움이 엉킨 해발 일 미터에서 걷는 걸음이여!  억누르는 기압과 떠올리는 부력을 이기며 걷는 이 역설의 걸음걸음이여! 그렇다면 우리는 가끔 함부로 걸어가는 이 '일상'의 길이 결코 '평상'하지 않은, 무섭도록 '비상'한 길임을 깨달아야 할 일이다. 그런 각성에서야 사람의 인생길이란 것이 정녕 새하얀 작둣날보다 더 좁은 길임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리라. (p.92~95)           

                                

 

     -배병삼,<풀숲을 쳐 뱀을 놀라게 하다>- 에서.

 

 

/ 제3부 고전의 주변 

 

  .새 세기, 글쓰기(P.254~263)

 

 .고전 읽기(P.264~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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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니카와 함께 청송을 다녀왔습니다

.

봄을 재촉하는 이슬비가 촉촉하게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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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 안은 바깥보다 아무래도 2-3도 정도는 낮은 것 같습니다. 봄이 오려면 멀었습니다.

인천으로 돌아오는 길인데 어느새 해가 길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3월 3일(토)에는 일찍 국수집으로 나갔습니다. 민들레국수집에 도착하니 일곱 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국수집 앞에 4킬로짜리 콩나물 2상자가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메모가 적혀있습니다. "안심하시고 드셔도 됩니다. 혹 도움이 될까 해서요."

 

고마운 분들이 국수집 문 앞에 맛있는 음식을 놓고 가시는 분도 많습니다.

 

또 민들레국수집 근처에 있는 정육점과 수퍼에 맡겨두고 가시는 분도 많습니다

.

그리고 온갖 좋은 것들을 우리 손님들께 대접하라고 보내주십니다. 참 좋습니다

.

어제는 화수시장 근처에 있는 농협 앞에서 호떡을 굽는 할머니께서 직접 간장게장을 담으셨다면서 간장게장을 조금 가져다 주시기도 했습니다. 점심 때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리고 순의 할머니께서는 고향인 덕적도에 가서 직접 굴을 따셨다면서 한 봉지를 선물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참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명옥 씨는 장애가 있는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폐지를 주워 힘들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집에 쌀이 떨어질 즈음에는 참이슬 한 병을 치마폭에 감춰서 오셔서 수줍게 내밉니다. 딸이 떨어졌다는 표시입니다.

 

토요일인 어제는 손님이 끊임없이 오셨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이 오셨습니다. 근처 경로식당에서는 회원증이 있어야 출입을 할 수 있답니다. 그래서 근처의 중구와 남구 그리고 멀리 서울에서 오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민들레국수집으로 몰려오십니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회원증이 있는 어르신도 드실 곳이 없어서 민들레국수집을 찾아오십니다. 어제는 설거지하느라 자원 봉사자들께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요즘 민들레희망지원센터에서는 하루 평균 샤워를 하시는 분들이 80-100명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빨래를 하시는 분들이 50-60명 정도 됩니다. 그래서 세수비누와 수건 그리고 남자 팬티와 양말이 참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드럼 세탁기용 세제도 많이 들어갑니다. 독후감 발표하시는 분들도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새롭게 참여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며칠 전 '인문학 강의'에는 처음으로 46분이나 참석해서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과 공부방에도 아이들 방학이 끝나면 아기 손님들이 몰려올 것 같습니다. 이제는 동네 고마운 분들이 살짝 쌀을 내려놓고 가시기도 하고 달걀을 내려놓고 가시기도 합니다. 아주 좋습니다.

 

우리 손님들이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두꺼운 옷을 벗어놓고 어쩔 줄을 모르십니다. 덥다고 옷을 벗어버렸다가는 꽃샘추위에 큰 일 나기 때문입니다. 땀을 흘리면서도 두꺼운 옷을 귀하게 여깁니다.

민들레 가게도 이제는 봄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조금만 나눠주십시오

.

필리핀 아이들을 위한 옷을 현재 아홉 상자나 꾸려놓았습니다. 열두 상자쯤 모이면 마닐라에 계신 수녀님께 화물로 보낼 예정입니다. 아이들 여름 옷이면 좋습니다. 그리고 4월 하순에 베로니카와 함께 빠야따스 아이들을 방문하려고 합니다. 아이들 150-200명 정도의 학비를 마련해서 전해줄 예정입니다.

 

2012년 4월 1일(일) 오후에 "민들레국수집 9주년 기념 미사"가 국수집에서 있습니다. 축하해 주십시오.

 

                                       -민들레 국수집,민들레소식. 3/4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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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비가 왔다

 

 

        더럽게 왔다

        혼자만 있을 때 왔다

        살짝 기울어진 하얀 히야신스처럼 왔다

        필통 위에 반짝이는 노란 별처럼 왔다

        고인 물에 입맞춤하는 금붕어처럼 왔다

 

        찌무룩한 루카*씨 혼자서

        창과 밖을 바라보고 있을때 왔다

 

 

        *'찌무룩하다'의 발음기호 [-루카-]에서 따옴.

 

 

 

               

         -성미정 詩集,<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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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고인이 된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 신부는 평생을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며, 살아 있을 때 이미 '살아 있는 성자'로 불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자', 곧 '타인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자' 사이에 있다. 어떤 '신자'들은 '홀로 족한 자'들이며, 어떤 '비신자'들은 '공감하는 자'들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고 샤르트르는 말했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 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그와 반대로 천국은 무한한 공감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곳은 하느님의 빛에 에워싸인 채 나누고 교환하는 데서 오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영생과 심판에 관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영생은 죽음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만족한 채 매일매일을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함으로써 지금 이 순간, 바로 현재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할 일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만든 자기 자신의 모습, 곧 홀로 족한 자인가 아니면 공감하는 자인가를 보게되는 광명의 순간이 바로 심판이 될 것이다. 인간은 이미 자신의 심판관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단순한 기쁨> 에서).

                                       

                                            -  민들레 국수집, 민들레 소식.2/27 가난한 사람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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