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을 던져라 책이 답한다
김은섭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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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치보이의 경제경영서 예찬

 

  내가 처음으로 책을 구입한 때는 초등학교 4학년 때다. 아저씨 몇 명이 하굣길 길가에 트럭을 세워놓고 주소와 연락처만 받고 아이들에게 선물이라고 나눠준 것은 철제 마징가 제트. 그 당시 반에서 부잣집 자식 한 두 명만 갖고 있을 법한 고가의 희귀장난감이었다. 나는 늦을세라 줄을 서 있는 수십 명의 아이들에게 뛰어들었다. 이틀 후 집에 돌아왔을 때 나를 기다린 것은 내 방에 산더미처럼 쌓인 두 질의 소년소녀문학전집과 아버지의 몽둥이 뜸질이었고, 그 후 일 년 동안 책 할부금 4,000 원을 내는 25일이 되면 아버지 앞에서 한 달 동안 읽은 책을 검사받아야 했다. 

  그 때 읽은 50 권짜리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에드거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로 한 권의 책이 TV물인 ‘전설의 고향’보다 훨씬 더 무서울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특히 이미 주검이 된 검은 고양이가 콘크리트 벽 속에서 다시 살아서 울고 있던 마지막 장면은 얼마나 무서웠던지 엄마 다리를 끌어안고 엉엉 울었을 정도였다. 독서를 그저 종이 위에 새겨진 글을 읽는 것으로 알다가 눈앞에 그림과 영상으로 보는 듯 느끼는 것이란 걸 검은 고양이를 통해 배운 셈이다. 비록 돈은 아버지가 내주고 대신 매로 때웠지만 공식적인 나의 책읽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머리라는 항아리에 독서라는 물을 채워라

  하지만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독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혹시 책을 읽는다 해도 무협소설이나 추리소설을 몇 권 빌려다 읽는 수준이었다. 사실 그 시절엔 머리가 썩 좋지도 못하거니와 집안사정으로 두 해 늦은 공부를 했기에 오로지 학업에만 열중했었다. 꼴찌일망정 들어가고 싶은 대학에 들어가겠다고 발버둥을 쳤던 때라 내게 ‘독서’는 사치이자 시간낭비로 여겼던 것 또한 사실이다. 

  어렵사리 대학에 붙어 한가해지자 책이 읽고 싶어졌다. 하지만 막상 책을 읽자니 ‘무슨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라 난감했다. 어느 날 대학국어를 강의하던 교수께 고민을 털어놨더니 “책을 교과서로 보지 말고, 장난감으로 보라”고 하셨다. 쉽게 말해 ‘처음 독서를 할 때는 공부하지 말고 즐기라‘는 뜻이었다. 고단한 마음과 몸을 쉬게 하려고 값 비싼 휴양지를 찾아 바캉스를 간 외국인들 대부분이 시원한 그늘과 풀장에서 하는 것은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을 읽는 것이다. 즐기는 독서란 바로 이와 같다고 교수는 말했다. 

“책을 읽다가 보면 앞의 내용이 생각나질 않아서 자꾸만 다시 읽게 된다. 심지어는 주인공의 이름도 헛갈릴 정도다. 해결책이 없을까?” 말이 나온 김에 교수에게 또 다른 고민을 꺼냈다. 그러자 교수는 ‘칼 구스타프 융’의 잠재의식론을 빌어 독서는 두뇌라는 항아리에 한바가지 물을 채우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교수님의 말씀을 요약하자면 한두 컵(독서량)을 부어서는 항아리(머리)에 물이 얼마나 찼는지(저장된 지식)를 알 수 없다. 항아리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열권이 넘고 스무 권이 넘고 삼십 권이 넘었을 때, 두뇌라는 항아리는 채워짐을 느끼게 된다. 어느 날 항아리에 물이라는 독서량이 차서 찰랑찰랑해졌을 때 마지막 한 컵을 더 부으면 항아리는 물이 넘치게 되는데, 이때가 독서를 통해 쌓였던 지식이 배출되는 순간이다. 

  이때 배출되는 내용들은 마지막 물 한 컵의 독서가 아니라 그동안 쌓아왔던 독서량들이 대류현상을 통해 뒤섞여 밖으로 분출된다. 이 순간부터 독서의 인센티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경험한다면 독서의 참맛을 얻게 되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굳이 독서를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책을 읽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얼마 전 시골의사 박경철은 트위터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로 표현한 바 있다. 즉 선사들이 선방에서도 느끼는 것 같은 깨달음으로 화두를 들고 정신을 극한으로 이끌면 나타나는 일종의 부유감같은 체험을 말한다. 그는 독서를 하다가 머리끝부터 꼬리뼈까지 찌릿찌릿해지는 체험을 하는데, 독서체험의 최고경지가 이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수는 내게 재미있는 통속소설 읽기를 시작하라고 권했다. 손에서 책을 떼지 않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였다. 그 때 주로 읽은 소설들은 <악마의 유혹>,<천사의 분노>,<게임의 여왕> <거울 속의 이방인> 등 미국에서 TV 미니 시리즈물로 유명한 시드니 쉘던의 소설들과 <붉은 10월>, <패트리어트 게임>, <붉은 폭풍> 등 첨단과학이나 전문기술이 작품의 소재가 되는 추리소설이라고 하는 테크노 스릴러의 대가 인 톰 클랜시의 소설들이었다. 그 후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 소설을 읽기 시작했고, 자기계발서를 비롯해 경제경영서로 장르를 확대해 가면서 책을 읽게 되었다. 

  독서를 잘 하는 사람이 따로 없다. 차이가 있다면 책에 좀 더 몰두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독서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시간은 없지만 여지를 만들어서라도 읽겠다는 의지가 생길 만큼의 독서습관이 먼저 생겨야 한다. 이 정도가 되면 독서는 놀이가 된다. 공부를 위한 독서는 그 다음부터 가능해진다. 



 밥 먹여주는 경제경영(실용) 독서

  칩 히스와 댄 히스 형제가 쓴 베스트셀러인 <스틱!made to stick!>의 내용 중에 ’지식의 저주‘라는 말이 있다. 지식의 저주란 자신이 말하려는 주제에 대해 듣는 사람들이 배경 지식이 없는 상황을 상상하지 못하는 상태, 다시 말해 말하는 사람이 ‘설마 이 정도의 지식 정도는 있겠지’라고 생각하고 말하지만, 사실 듣는 사람들은 모르고 있기 때문에 제 아무리 열변을 토해도 고개만 끄덕거릴 뿐 머리에는 ‘쏙쏙’ 들어오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내가 본격적으로 경제경영서를 읽기 시작한 이유는 바로 ‘지식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내 관심사, 내가 맡은 일에 푹 파묻혀 고민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무엇보다 업무에 있어서 비전이나 핵심가치 같은 보다 거대한 생각들을 받아들이는 귀를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내가 ‘경제경영서’를 즐겨 읽는 것을 보고 “독서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무슨 책을 그렇게 읽느냐?“고 묻곤 한다. 그럴 때면 예의 나는 대답 대신 한 때 일본 최고의 부자이자 소프트방크 회장인 손정의(손 마사요시)의 이야기를 해준다.

 손정의는 어떻게 보면 독서를 통해 성공한 사람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20대의 젊은 나이로 한창 사업에 열중하던 손정의는 1983년 간염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 후로 3년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서 좌절감에 빠질 법도 한데 그는 일하는 대신 병상에서 하루 종일 많은 책을 읽으며 책에서 창조적인 영감을 얻고자 노력했다. 3년 동안 읽은 책이 무려 4,000여 권에 달했다고 한다. 

  퇴원을 할 때 30대가 된 그는 바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미국에서 소프트방크를 상장시키고 2천 수백억 엔의 시가총액의 회사로 만들었다. 자금을 확보한 그는 병원에서 읽은 책 4,000여 권이 준 영감과 그가 평소 늘 구상하던 아이디어를 합해 일생일대의 승부를 걸게 된다. 바로 앞으로는 인터넷 시대가 온다는 것이었다. 그는 800억 엔을 주고 세계 최대의 컴퓨터 전시회인 ‘컴덱스’를 사들였다. 또한 컴퓨터업계에서 세계 최대의 출판사인 지프 데이비스를 사들인다. 이때 들인 돈은 2,300억 엔이었다. 총 3,100억 엔. 세상 사람들은 쓸데없는 기업을 거액에 사들이며 빚쟁이가 되었다며 그를 미쳤다고 손가락질 했다.

  하지만 그는 “보물찾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음식도 아니고, 약도 아니고, 대포도 아니고, 바로 지도와 나침반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당시 그에게 지도와 나침반은 컴덱스와 지프데이비스였다.

손정의는 지프 데이비스의 직원들에게 21세기 세상을 이끌 사이트 5개를 찾아내라고 지시했다. 그 속에 발견된 보물이 바로 야후였다. 당시 야후의 미국 직원은 겨우 5-6명. 그는 이제 막 설립된 야후에 100억 엔을 투자하여 최대 주주가 되었다. 그리고 야후 재팬을 만들었다. 30대의 그에게 이러한 승부를 가능하게 해 준 것은 바로 책이었다.

  그는 지금도 인생의 중요한 포인트마다 시바 료타로司馬 遼太郎가 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일대기 <료마가 간다>를 읽는다고 한다. 한편 사업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얻었다는 손자병법은 그가 가장 좋아하고 최고로 꼽는 책이다. 

IMF 시절, 나를 사업으로 이끈 한 권의 책

  나 역시 책 덕분에 사업을 시작했다. 대학 졸업하던 해에 IMF를 맞아 취업과 동시에 퇴사 각서를 쓰고 나와 백수생활을 하던 어느 날 무엇을 하고 먹고 살아야 할까 고민하며 서점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일본 맥도날드 전 회장인 후지타 덴藤田田이 쓴 <비즈니스에는 급소가 있다>책을 만났다.

  후지타 덴은 일본 맥도널드의 전 회장으로서 ‘긴자의 유태인’이라 불릴 만큼 수완이 좋은 사람이다. 그는 맥도널드를 패스트푸드의 대표주자로 생각하고 일본에 패스트푸드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맥도널드를 선택해서 일본에 들여옴에 있어 ‘전 세계에 같은 맛을 낼 수 있는 표준화된 시스템과 신속함’을 맥도널드만의 아이덴티티로 꼽았다. 그러면서 ‘성공하는 프랜차이즈의 핵심은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고유의 아이덴티티’를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대학시절 유망사업으로 떠오르던 CVS(편의점 사업)에 관심이 있던 나는 이 글을 읽고 거짓말처럼 앞으로 내가 할 사업꺼리를 찾아내게 되었다. 바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창적인 아이템을 가지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나는 두 달여 동안 KFC의 컨넬 샌더스, 맥도널드의 레이 크록, 월마트의 샘 월튼 등 글로벌 프렌차이즈 기업과 창업자들의 책을 읽으며 프랜차이즈의 이론과 성공사례들을 공부했다. 국내에 프랜차이즈가 막 태동한 때라 관련서가 많지는 않았지만, 40여 권 정도를 탐독했던 것 같다.

  그동안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찾아간 곳은 내가 졸업한 대학교의 후문에 있는 닭갈비집이었다. 독특한 맛과 저렴한 가격으로 유명한 그곳 사장님을 찾아가 프렌차이즈 사업을 동업할 것을 권유했다. 사장은 이미 분점을 3개나 운영하고 있던 터라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후 1년 동안 서울 경기지역에 체인점을 68개를 내면서 꽤 유명한 닭갈비 체인점으로 성장했다. 

  업무를 보다가 장애물이 나타나거나 문제가 생기면 우선 책을 찾아 그곳에서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신기하게도 시간이 조금 걸릴 뿐 목적의식을 갖고 들여다보면 내가 찾고자 했던 답을 찾곤 했다. 최소한 책에서 배운 내용을 모티브로 스스로 답을 만드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사업을 위한 홍보, 마케팅, 계약, 협상, 설득, 매뉴얼, 고객응대요령 등 거의 모든 것을 책에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학은 세상을 좀 더 아름답게 하고, 인문은 보다 더 사람다운 사람을 만드는데 일조한다면, 경제경영서는 사람과 세상을 정신적, 경제적으로 보다 더 풍요롭게 한다.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면 반토막이 날 수 있지만, 내 자신의 재능에 투자한다면 결코 손해보지 않는다. 경제경영서의 독서는 스노볼Snowball과 같다. 즉 경제경영서를 통해 현재의 울퉁불퉁하고 빈약해 보이는 작은 언덕 위에서 멋진 슬로프를 발견해내고, 잘 뭉쳐지는 좋은 눈을 기다려 작은 눈뭉치를 굴리는 법을 배우게 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100권을 읽고(input), 정리해 새로운 한 권을 만든다(output)고 한다. 습득에 의한 재창조인 셈인데, 나는 이러한 재창조의 순간부터 전문가가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골의사 박경철은 하나의 투자상품을 배우기 위해 교과서격인 책만 30권을 읽는다고 한다. 그가 방송과 강연에서 투자를 논함에 막힘이 없는 이유는 이 때문일 것이다.

  전문가나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다면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관련서 100권을 읽어보자. 책마다 내용이 겹쳐진다면 그만큼 기본적이고 중요한 개념인 만큼 숙지할 필요가 있다. 그 외에 한 권에서 배워야 할 내용들을 1-5 개씩 찾아내자. 100권이면 100-500 개가 된다. 이를 합하면 나만의 비법을 담은 책 한 권 분량이 될 것이다. 모두 익힌다면 나만의 산지식이 되는 셈이다.

  독서는 아는 만큼 보이듯, 읽는 만큼 사람답게 행복하고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러니 달랑 세 권을 읽고 책을 읽고 내 삶에 변화가 없다고 불평하지 말자. 몇 권을 읽었는지 아련할 만큼 독서하기를 습관으로 만든다면 책을 읽지 않았던 그 때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생각을 하는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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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
마쓰오카 세이고 지음, 김경균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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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은 무지無知에서 미지未知의 상태로 만들어주는 판도라 상자다!

 

  내게 리뷰, 즉 ‘읽은 책에 대해 말하기’는 책 읽은 자랑이 아니라 일종의 소의 되새김질과 같다. 스스로에게는 무엇을 읽었던가 재확인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요, 대외적으로는 읽은 책에 대해 5분가량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준다(하지만 한 달 후엔 이 역시 가물가물해진다. 유효기간이 꽤 짧아 걱정이다). 리뷰쓰기를 작정한 처음에는 쓰고 싶은 말은 머릿속에만 맴돌고 글로는 나오질 않아, 책 속의 ‘인상적인 구절’만 죄다 옮겨 적기도 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끄덕이며 공감을 하며 책을 읽었건만 그 소감은 단 한 줄을 쓰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던지...그러던 것이 신기하게도 나중에는 뭔가 긁적이고 싶어 책을 읽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리뷰쓰기가 재미있었다. 바로 독서는 단순히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저자와 대화하는 것’이란 물리物理를 조금씩 알아가는 때였던 것 같다. 

<창조적 책읽기, 다독술이 답이다>(추수밭)의 저자 마쓰오카 세이고松岡正剛는 이를 두고 저자와 독자가 만나 작용하는 일종의 ‘협업’이라 불렀다. 60,000 여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천일 동안 천권의 책을 읽고 리뷰쓰기 프로젝트(센야센사쓰千夜千冊)를 완성한 ‘괴물’같은 사내의 말이 내 생각과 같아 반갑고 기뻤다. 그가 보는 독서의 정의는 다양했다. 



 

  독서는 누군가가 쓴 문장을 읽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이나 의식을

‘제로’에 두고 책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독서란 누구나가 체험하고 있는 것처럼 읽고 있는 도중에도

여러 가지 것들을 느끼거나 생각하게 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초조해하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도 합니다.

  이 말에 담긴 속뜻은, 독서는 저저가 쓴 것을 이해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저자와 독자가 만나 작용하는 일종의 협업이라는 것입니다.

편집 공학 용어로 말하자면

독서는 ‘자기편집’인 동시에 ‘상호편집’입니다. p112  



   마쓰오카 세이고는 다독가 혹은 ‘독서의 신’이라 불리는 다치바나 다카시와는 차이가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가 저작著作 즉 아웃풋out-put을 위해 책을 읽는다(in-put)면, 저자는 말 그대로 책읽기를 즐기는 오리지널 다독가였다.

  사람들은 내가 책을 즐겨 읽는다고 하면 거의 똑같이 묻는 질문은 ‘지금까지 몇 권을 읽었는가? 한 권을 몇 시간에 읽는가? 집에 책을 얼마나 많이 소장하고 있는가?’ 등이다. 다시 말해 좀처럼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독서행위’를 대단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난 생각이 다르다. 독서행위는 대단한 일이 결코 아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궁금한 것이 있는 사람’일 뿐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궁금한 것이 없을 만큼 이미 많이 아는 사람’이거나 ‘많이 아는 체 하는 사람’이란 말도 된다. ‘궁금증을 풀 것인가 말 것인가?’ 책을 읽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다르다면 바로 이 작은 차이 하나 뿐일 것이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은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알고 싶기 때문이고, 궁금한 것이 조금 많아서다. 결론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은 부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부족함은 커진다. 그래서 ‘배울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한 것 같다. 마쓰오카 세이고 역시 독서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단지 책은 무지無知에서 미지未知의 상태로 만들어주는 도구(저자는 이를 두고 미지의 판도라 상자라 말했다)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내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전혀 몰랐던 세상’을 ‘아직은 모르는 세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책이라면, 책을 한 권 읽을 때 마다 ‘새로운 세상’을 하나씩 열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책과 독서를 이처럼 잘 표현한 것이 또 무엇일까? 그는 다독술 또한 옷을 자주 갈아입는 정도일 뿐 특별한 행위가 아니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형식의 구성과 풀어서 대답한 내용은 가독성을 돕는다. 저자는 진정한 독서란 단순히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으로 책을 즐기는 것이라는 점을 전반에 걸쳐 말하고 있다. 저자의 독서법에서 가장 인상적인 점은 ‘차례 독서3분’ 즉, 독서에 앞서 꼭 차례를 읽으라는 것이다.

  “차례독서는 방금 사 온 책을 읽기 시작할 때나 방치해 두었던 책을 읽을 때나 반드시 필요한 ‘전희’입니다. 제가 절대로 권하는 전희입니다. 즉, 이 3분 동안의 ‘차례 독서’가 자신과 책 사이에 부드러운 ‘감촉 구조물’ 같은 것을 쌓아 올립니다. 혹은, 부드러운 ‘지식의 지도’라고 부를 만한 것이, 비록 약간이긴 하지만, 생겨나는 것이지요. 이런 것을 먼저 떠올려 놓고 비로소 읽어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것만으로도 독서가 즐거워집니다.” 본문 102 쪽

  저자의 생각 중에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은 ‘책은 텍스트가 들어 있는 노트’라고 본 점이다. 더불어 마쓰오카 세이고는 독서의 방법론으로 표시 독서법을 역설했다. 쉽게 말해 이해하는 만큼 줄을 긋고, 표시하고, 낙서를 하며 노트를 필기하듯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그럼 왜 표시하면서 읽는 게 좋을까요? 여기에는 대단히 유효한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책 읽는 데에 철저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집중하기 쉽습니다. 또 하나는 다시 읽을 때 그 속도가 엄청나게 빨라진다는 점입니다...왜냐하면 이 방법은 ‘책을 일종의 노트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게다가 이때의 노트나 파워포인트는 새하얀 상태가 아니라 이미 저자가 글을 써 놓은 노트나 화면입니다. 그것을 읽으면서 재편집하거나 리디자인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표시하면서 읽는 법’의 유쾌한 점입니다. 즉, 책을 노트로 보는 겁니다. 책은, 이미 텍스트가 들어 있는 노트입니다.“ 본문 117-119 정리

  책을 깨끗이 읽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수만큼 많을 것이다. 하지만 책을 ‘모시듯’ 읽고 있다면 마쓰오카 세이고의 말에 귀를 기울여봐야 할 것이다. 책은 교과서도 아니고 참고서도 아니다. 나중에 시험을 보기 위해 통째로 외워야 할 대상도 아니며, 책의 맨 뒷장에 값 000원까지 읽어야 할 대상도 아니다. 책은 공부의 대상이 아니라 퀴즈의 답을 알 듯, 스도쿠를 풀 듯, 드라마와 영화를 글로 읽는 듯 즐겨야 할 대상이다. 독서의 신이라 불리는 저자는 책을 예찬하지도 경외시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대하며 읽어야 하고, 이를 어떻게 소화하는가 하고 비중을 책이 아닌 독자讀者에 두고 있었다. 약 1400여 일 동안 매일 한 권의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책벌레’ 아니 ‘책괴물’에게서 내가 배워야 할 점은 다독술도 그만의 편집공학이 아닌 ‘책을 대하는 자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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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4-20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암튼 제목 붙이기의 귀재십니다.ㅋㅋ. 리뷰쓰기의 자세를 짚어주셔서...느끼는 바가 크네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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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글을 쓰고 싶다면 가장 먼저 읽어봐야 할 걸작 ! 

  내 오른쪽 손의 중지는 기형이다. 손톱 옆살이 누구에게 얻어맞아 혹이 난 듯 두툼하게 살이 솟아나 있고, 돋아난 살 가운데는 점이 들어있다. 그리 보기 좋은 손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또 사내의 손가락이 딱히 보기 좋아야 할 이유 역시 없다고 생각하지만, 혹 손가락을 유심히 지켜볼 때가 생기면 사이즈가 20이라서 반지 값이 꽤 들었던 유난히 굵은 약지의 굵기보다 항상 오른쪽 손의 중지에 신경이 쓰인다. 어린 시절엔 왼쪽 중지와 엇비슷하게 평범했었다. 하지만 조금 더 나이가 들면서 중지 손가락은 거의 3 년 동안 항상 벌겋게 달아올라 손만 대도 아팠고, 모양도 차츰 흉한 모습으로 변하게 되었다. 결국 가운데 손가락은 심하게 기형이 되어버렸고, 난 대학을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런 흉한 가운데 손가락은 비단 나만의 소유물이 아닐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손가락을 살펴보라(왼손잡이는 왼손 중지를 보시길). 거의 대부분 반대쪽에 비해 살이 돋아있거나, 약간 비틀어져 있다. 이 모든 것은 대부분 육각의 모서리를 가진 한 자루에 70원 짜리 모나미153 볼펜 덕분이며, ‘죽도록 외워는 자가 이길 수 있도록’만든 제도권 교육 정책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의 학창시절을 되돌아 보면 하루 종일 펜을 쥐고 뭔가를 적는 모습이다. 영어단어든, 수학공식이든, 하다 못해 교과서 모서리에 낙서를 하든 뭔가를 끼적댔다. 그리고 나처럼 머리가 많이 둔해서 쓰는 만큼 외워진다고 생각한 학생은 유난히 많이 그 짓(?)을 했을 것이고, 머리가 아주 좋은 학생이거나, 아예 머리 굴리기를 포기한 학생이라면 비교적 덜 끼적댔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리는 뭔가를 하루 종일 썼다. 하지만 그 글 속에는 내가 없었다. 만약 그 시절 노트에 나의 이야기와 내 생활을 적으라 했다면, 그래서 그것을 누가 봤더라면 담임은 심각한 부모님을 불렀을지 모른다. ‘공부 없는 세상이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이라고 썼을 테니까. 

  열 두 해 동안 손에 펜을 쥐고 항상 뭔가를 긁적거렸으면서도 난 ‘글쓰기’를 못한다. 방학숙제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숙제가 ‘일기’였고, 반성문을 쓰기 싫어서 한 번쯤 할 법한 일탈도 꿈꾸지 않았다. 그랬던 요즘 들어 내가 느즈막히 글쓰기에 관한 책을 구해 읽는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남아나는 빈대가 없다’고 했던가? 뭔가를 끄적이고 끼적거리는 짓에 재미가 들었기 때문이다. 재미야 둘도 없이 친한 친구와 질펀하게 술마시며 밤을 지새우는 재미만 하겠는가? 하지만 글쓰기에는 그도 따를 수 없는 묘한 재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내가 나와 노는 재미’가 있다는거다. 그 재미를 더하고자 또 한 권을 집어들었다. 어제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한문화)를 읽었다.



 

   글쓰기는 이태백의 술잔이다. 그가 사랑한 술 속에 꿈에라도 가고 싶은 달 그림이 담겨 있듯, 내가 쓴 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도 들어있기 때문이다. 글이란 것이 묘해서 쓸 때는 내가 되더니 쓰고 난 뒤에는 남이 되어 나를 보게 한다. 원래 글의 목적이란 ‘남기기’ 위함일진대 쓰다가 보면 그 목적보다는 ‘나를 살피게’ 되더란거다. 그래서 글쓰기는 맹랑한 궁싯거리기가 아니라 ‘나와 내 속의 나의 대화’란 것을 알았다. 기왕에 대화를 나눌 바에는 보다 잘 하고 싶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온라인에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명저’로 소문난 책이다. 1986년에 작가이자 글쓰기 강사인 나탈리 골드버그에 쓰여진 이 책은 출간되고 백만 부가 넘게 팔리고, 세계 각국으로 번역되면서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킨 책이다. 그녀의 글에 주목해야 할 것은 글쓰기와 저자가 체험한 선禪이 접목되었다는 사실이다. ‘덜어내고 덜어내고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을 때 완벽한 글이 나온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말이 있듯이 ‘군더더기 없는 문장’이 최고의 글이 되는 것과 간결하고 고요한, 그리고 심플하고 따뜻함을 추구하는 젠(Zen, 禪)은 묘하게 닮았다. 

그렇다면 다소 음산한 제목이 말하는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는 의미는 뭘까? 이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이 책의 한 부분, 가령 모든 사물에 개별적인 정체성을 주어 접근하라는 글을 읽었다고 치자. 이 말은 추상적이거나 아주 일반적인 문체를 가진 사람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이번에는 자신을 누르지 말고 감정의 파도에 실린 그 상태로 글을 몰고 가야 한다고 써 있다. ‘진실을 글로 나타내려면 쓰는 이가 자신의 내면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야만 한다는 내용이다’.” (본문 17 쪽)

  글쓰기에 있어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검열’이다. 글을 써서 한 문장이 채 완성도 되기 전에 자신이 쓴 글에 대해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의 소름이 돋는다’고 스스로 평한다던지, 도대체 맞춤법이 맞는 것인지 의심스러워 사전을 찾고 싶어진다면 내가 쓴 두 번째 문장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 사람들이 저마다 울음소리가 다른 이유는 그 속에 담긴 사연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실컷 울고 나면 내 마음이 편한 것도 울면서 ‘모두’ 토하듯 말을 했기 때문이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주제가 무엇이든, 소재야 어떻든 우선 머릿속 생각을 비우듯 아무 제약 없이 남김없이 글로써 쏟아내야 한다. 저자는 자신의 글쓰기 경험과 선체험을 더해 이야기해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깊숙한 내면에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글로 나타낼 수 있도록, 그리고 글을 쓸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저자가 제안하는 가장 기본적인 글쓰기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   

● 손을 계속 움직이라.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그렇게 되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게 된다.

● 편집하려 들지 말라. 설사 쓸 의도가 없는 글을 쓰고 있더라도 그대로 밀고 나가라.

● 철자법이나 구두점 등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여백을 남기고 종이에 그려진 줄에 맞출려고 애쓸 필요 없다.

●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마음 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 더 깊은 핏줄로 자꾸 파고들라.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 거기에 바로 에너지가 있다. (본문 26 쪽)

  저자는 목표에 닿기 위해서는 이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목표란 ‘진짜 마음이 보고 느끼는 것을 쓰는 것‘이고, 이럴 때 바로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글쓰기 훈련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글쓰는 연습‘이다. 연습의 결과는 ’습관화‘다. 이는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를 하고 세수를 하지 않으면 하루를 개운하게 시작할 수 없는 것과 같고, 마치 흡연가가 청와대에 가서 대통령과 점심을 먹는 자리를 가서도 식사 후엔 담배가 피우고 싶은 것과 같다. 하루에 단 한 단락이라도 글을 쓰지 못하면 허전해져서 잠도 이루지 못할 정도가 될 때 글쓰기 훈련은 완성된다. 저자는 글쓰기 훈련의 중요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글쓰기 훈련은 세상과 자기 자신에 대해 마음을 지속적으로 열어 나가게 하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스스로에 대해 믿음을 키워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과정이 옳았을 때만 좋은 글을 얻을 수 있다.

또한 글쓰기 훈련은 진정으로 쓰고 싶어하는 어떤 것을 쓰기에 앞서 몸을 데우는 워밍업 단계다. 훈련은 작품을 만들어 내기 전에 거쳐야 하는 가장 기초적이며 본질적인 바탕 그림에 해당한다.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법을 배운 다음 글을 쓰게 되면, 그것이 사업상의 서류이든 장편 소설이든 박사 논문이든 또는 여행기이든, 그 글에는 힘이 실리게 된다.“ (본문 30 쪽)

  세상에 천재는 없고 1만 시간의 열정과 노력을 다한 아웃라이어만 있다는 말콤 글래드웰의 말처럼, 타고난 글쓰기 천재는 없다. 독자가 읽기 쉬운 글은 필자가 각고의 고통을 감수하며 어렵게 쓴 글이다. 기상해서 양치질을 하듯, 흡연가가 식후에 담배 생각이 나듯 내 생활 속에 ‘글쓰기’가 배어 있다면 좋은 글을 쓸 준비는 마친 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저자 만의 글쓰기 훈련법은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한 달에 노트 하나를 채우는 것으로 내 임무를 다 한다(나는 작품을 쓸 때마다 나 자신만을 위한 글쓰기 안내서를 항상 새롭게 만든다). 그저 이 노트를 채우면 그만이다. 그것이 내가 정한 나의 글쓰기 훈련법이다. 이것이 나한테만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해도 좋다. 그리고 이것을 지키지 못할 때도 스스로를 심판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려 한다. 아무튼 자신의 이상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에 몇 안 되지 않는가.” (본문 32쪽) 


   저자가 제시한 문장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조언은 바로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글을 쓰라는 것이다. 글을 쓰는 순간 우선 내가 바라봐야 할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도 아니고, 신경숙도 아니다.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속에 담기 내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글로 옮길 수 있다면, 그것은 나를 비우는 작업이 된다. 기쁨과 슬픔 그리고 고민과 열정을 토해낼 때 나는 ‘후련함’을 경험할 수 있다. 글쓰기는 머릿속을 비우는 작업이요, 다시 채울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 글쓰기는 ‘나를 치유하는 글쓰기’가 된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이 책의 독자는 ‘작가’를 꿈꾸는 이에 국한된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어쩌면 우리는 이미 글을 쓰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냐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댓글을 달며, 이메일을 답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나아가 미니 홈피와 블로그라는 나만의 공간에서 맛집과 영화, 그리고 상품에 대해 평을 하고, 나의 일상에 대해 글을 쓰고 있지 않은가?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자 글쓰기 선배의 선험적인 고백이다. 그래서 자못 딱딱한 이론 수업이 될 법한 글쓰기론이 한 편의 수필이고 자전적 소설처럼 읽힌다. 저자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읽는 이로 하여금 금방이라고 책을 덮고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게 하는 충동을 일으키게도 한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글쓰기의 바이블’이라는 수식어를 얻으며 꾸준한 사랑을 받는 저력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저자는 글쓰기는 ‘매번 지도 없이 떠나는 새로운 여행’이라고 했다. 두 달 전에 괜찮은 글을 썼다고 해서 앞으로도 좋은 글을 쓴다는 보장은 없기에 언제나 새롭게 글을 써야 하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도 없는 여행일지라도 절대로 부러질 리 없는 지팡이와 튼튼하고 편한 신발, 그리고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는 모자가 있다면 다소 막연한 여행이라도 떠나봄직 하지 않을까? 글쓰기의 여행을 떠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는 지팡이가 되고, 신발이 되며, 모자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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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글쓰기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래리 W. 필립스 엮음, 이혜경 옮김 / 스마트비즈니스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어니스트 헤밍웨이, 그는 작가作家가 아니라 구도자求道者였다

  “....때때로 새로운 소설을 시작했는데 잘 나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벽난로 앞에 앉아서 작은 오렌지 껍질을 쥐어 짜 불길 언저리에 떨어뜨리며 푸른 불꽃이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모습을 지켜보곤 한다. 그리고 일어서서 파리의 지붕 너머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걱정하지 마, 항상 글을 써왔으니 지금도 쓰게 될 거야. 그냥 진실한 문장 하나를 써내려가기만 하면 돼.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이면 돼.’    그러면 마침내 진실한 문장을 하나 쓰게 되고 거기서부터 다시 글을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쉬웠다. 내가 알고 있거나 누군에게 들었거나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진실한 문장 하나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장황한 글을 쓰거나, 뭔가를 과시하려는 것처럼 글을 쓰기 시작하면 복잡한 무늬와 장식들을 잘라내고 처음에 썼던 단순하고 진실한 평서문 하나로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본문 24-25 쪽

  이 깨우침의 주인공은 하드보일드hard-boiled의 대표작가로 알려진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다. 하드보일드란 1930년을 전후하여 미국문학에 등장한 새로운 사실주의 수법으로 원래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의 형용사이지만, 뜻이 변해 ‘비정 ·냉혹’이란 의미로 쓰인 문학용어다.

  자연주의적인, 또는 폭력적인 테마나 사건을 무감정의 냉혹한 자세로 또는 도덕적 판단을 전면적으로 거부한 비개인적인 시점에서 묘사하는 하드보일드. 불필요한 수식을 일체 빼버리고, 신속하고 거친 묘사로 사실만을 쌓아 올리는 글솜씨를 말한다. 군더더기 없이 수분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손대면 파삭파삭 부서질 것 같은 문장, 헤밍웨이의 글맛이 그렇다. 그리고 가까이에는 ‘김훈의 글맛’을 생각하게 한다. 

  헤밍웨이는 좀처럼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일생을 바쳐 글다듬기를 하다가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치열한 글싸움을 했던 그였던지라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를 배우고 닮고자 하는 추종자들이 선생을 삼기에는 영 서운한 행실이 아닐 수 없다. 반갑게도 그는 지인들에게 쓴 편지와 다른 글들 그리고 소설 속에 ‘다빈치 코드’를 숨기듯 조금씩 흘린 모양이다. 그것들을 줍고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었다니 래리 W. 필립스란 양반이 참 고맙다. <헤밍웨이의 글쓰기>(스마트 비즈니스)를 읽었다.



 

   글쓰기는 수작酬酌이다. 제가 생각한 바를 남에게 알리고 공감을 유도하는 하나의 수사修辭요, 농짓거리다. 말言로 다중多衆에게 농짓거리를 거는 것이 연설이라면, 글쓰기는 미래에 있을 대중大衆에까지 말을 거는 셈이니 글을 쓰는 작가는 연설을 일삼는 정치꾼들보다 더한 수작쟁이들이다(연설이란 것도 결국 글을 보고 읽는 것이 아니던가?).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려면 먼저 눈에 보여야하기 때문이다. 읽고 있는 불특정다수의 독자로 하여금 상상 속에서 그림과 영상을 보이도록 하려면 글을 쓰는 이가 먼저 보고 적확하게 글로 그려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한 문장마다 한 장의 그림이 보이게 해야 한다.    

  세밀한 묘사와 설명이 더해지면 모든 것이 가능할 일이다. 하지만 독서는 ‘숨’, 즉 호흡과 깊은 관계가 있어 길이가 길면 숨이 가빠져 쉬이 지친다. 문장이 긴 듯 짧고, 짧은 듯 길어져서 울렁이는 파도를 따라 배를 타듯 운율이 있어야 한다. 묘사와 설명이 길면 구차해지고 함부로 상상할 수 없어 지루해진다. ‘글은 짧되, 마음껏 상상하게 만들기‘ 이것이 글을 쓰는 이들이 가장 원하는 바이고, 영원한 숙제다. 평생을 학생으로서 이 숙제에 바친 인물이 헤밍웨이다. 넘기는 한 장, 한 장이 소중했던 이유는 그만이 가진 나름의 원칙과 요령이 책 속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내 글을 모두 짧게 자르고 장식적인 요소들을 모두 없앤 다음, 묘사가 아니라 문장을 만들려고 한 후부터 글쓰기가 아주 멋진 일이 되었다. 하지만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어떻게 소설처럼 긴 글을 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한 문단을 완성하기 위해 내내 작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본문 33 쪽)

  헤밍웨이에게 글쓰기는 투쟁이었다. ‘세 시간 동안 쉼표를 찍을지 말지를 고민하다가 내일 결정하기로 마음먹고 잠이 들었다’는 어느 작가의 고백처럼 헤밍웨이의 글쓰기 역시 단어 하나 쉼표와 마침표 하나에 각고刻苦 고민의 총합이었다. 그 끝에 탄생한 것이 단출하고 팍팍한 문장들이었고, 그 속에는 팍팍한 세상과 더 팍팍한 우리의 인생이 들어 있었다. 난 과연 문장이란 걸 그려내면서 얼마나 고민했던가 돌아보게 한다. 읽은 책을 말하는 나의 얄팍한 글쓰기가 없던 세계를 만들어내는 ‘글의 창조자’의 그것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대상일테지만...

  글맛은 장맛이다. 단숨에 써내려갔다는 천재의 글은 멋지고 대단할지 모르지만, 어딘가 경박하다. 깊고 그윽한 장맛 같은 글맛은 표면에 허옇게 곰팡이가 피듯 펼친 흔적으로 심하게 구겨지고, 노출에 색이 바랜 종이에 들어있어야 한다. 쓰고, 지우고, 고치고, 또 지우고...더 이상을 더하고 뺄 단어가 없을 때 글맛은 생겨난다. 헤밍웨이의 원고가 보고싶어지는 대목이다.

  “그는 세잔이 그림을 그리듯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세잔은 처음 그림을 시작했을 때 온갖 기교를 구사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을 부수고 진실한 것을 만들어냈다. 정말 멋진 일이었다. 그는 최고였다. 언제나 그랬다. 그건 사이비종교같은 절대적 숭배가 아니었다. 닉은 전원에 관한 글을 쓰고 싶었다. 그래서 세잔이 그림 속에서 표현했더 것처럼 글 속에 그 전원을 담고 싶었다...(중략)... 성스러운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정말 심각하고 진지했다. 끝까지 붙들고 늘어지면 할 수 있다. 두 눈을 뜨고 제대로 살아왔다면 말이다.” (본문 40 쪽)

  그가 쓴 <닉 애덤스 이야기> 속의 글을 보면 그에게 글쓰기는 사실寫實이었다. ‘보고 듣고 느끼지 않은 글은 글이 아니다‘고 헤밍웨이는 단호하게 말한다. 짐작컨대 그가 보낸 하루는 관찰일테다. 헤밍웨이의 다리는 삼각대요, 눈은 광학렌즈, 머릿속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필름인 셈이다. 그 인생을 상상해 보니 몇 초 안되어 팍팍해진다. 날 때려죽인다 해도 그 짓(?)은 못하겠다. 하지만 이런 팍팍한 인생이란 게 작가의 인생이 아니던가? 작가들에게 경배를... 

  글쓰는 데 사전이 필요하다면 글을 써서는 안된다는 헤밍웨이. 비유법을 혐오하고, 거짓된 글을 기피했으며, 돈벌이를 위해 현실에 타협하고 정치적 성향을 띤 글을 쓰는 것을 죽을 만큼 싫어했던 그에게 글쓰기는 구도자求道者의 수행이었다. 적어도 책 속에서 만난 그는 지겨운 밥벌이를 운운하며 과시하지 않았고, 자신의 글을 넘치는 재주를 주체할 수 없어 휘갈기는 천재의 농짓거리로 여기지 않았다. 그런 그도 자신을 칭찬하고 자신의 글에 찬사를 보낼 때가 있으니 <노인과 바다>를 만든 때였다.

  “이건 제 평생을 바쳐 쓴 글입니다. 쉽고 편안하게 읽히는 짧은 글처럼 보이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면이 담겨져 있고 동시에 인간의 정신세계도 담고 있지요. 지금으로서는 내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글입니다.” 본문 35 쪽

  작가라는 업業을 알게 하고, 글이 되는 작업作業을 알게 한 책이었다. 그리고 헤밍웨이를 알고 싶게 한 책이었다. 그가 즐기던 칵테일 모히토Mojito마저 사랑하게 될 것 같은 기분, 책을 덮고 난 기분이 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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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세상을 탐하다 - 우리시대 책벌레 29인의 조용하지만 열렬한 책 이야기
장영희.정호승.성석제 외 지음, 전미숙 사진 / 평단(평단문화사)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토종 책벌레들의 29 가지 책예찬론 !

  어른스러워질수록 호불호好不好는 줄어든다. 대신 그에 대한 사랑은 더욱 굳어진다(이 말은 극단적으로 변한다는 말도 되겠다). 지극히 어른스러운 스물 아홉 사람이 한 가지 물건에 대해 자신의 사랑을 예찬했다. 물건은 바로 ‘책’이다. 극단적인 그들의 책 사랑이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으로 표현되어 또 다시 책을 이뤘다. 책벌레들의 책사랑, <책, 세상을 탐하다>를 읽었다. 

“책은 내마음속의 언 바다를 깨는 도끼와 같다.” 

-프란츠 카프카



 

   오랜만에 만나는 전유성의 글(책에 관하여 중구난방 스스로 묻고 답하기)은 반가운 친구를 본 듯 반갑다. 그는 안심심하려고 책을 읽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항상 변화를 추구해서 베스트셀러 중 9번, 10번 째 책만 구입한다. 개그를 하듯 얼렁뚱땅 쉽게 받아넘기는 대꾸이었지만 그에게 책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걸작이다. 

  “중요한 질문이다. 내가 처음 책에서 무엇을 얻은 건 중학교 2학년 때 작은고모가 읽던 일본 소설<빙점>이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는데 초등학교 여자애가 집에 갈 차비를 잃어버렸는데, 주위 친구들이 차비 잃어버린 걸 걱정해주니까 정작 본인은 ”내가 잃어버린 돈을 주운 사람은 얼마나 기쁠까?“라고 말하던 대목!

  그래 세상은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구나! 세상 보는 시각을 여러 가지로 볼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계기가 된 책이다. 소설 제목이 ‘빙점’인지 아닌지도 사실은 잘 모르겠지만 여자아기가 한 말은 확실하게 기억한다.“ 본문 30 쪽

  책을 읽을수록 귀가 얇아진다. 나중엔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귀 얇은 공자님이 된다. 고집을 피우기 전에 역지사지易地思之하게 되고, 내 입장이 중요한 만큼 네 입장도 중요한 줄도 알게 된다. 주관을 객관화시키기, 전유성이 책으로부터 얻는 소중한 소득이다. 한편 재담꾼 ‘성석제’는 소싯적 책도둑이었음을 책에다 고백했다. 그에 대한 변辯은 의뭉스럽기까지하다.

  “재능 있는 책 도둑은 아무 책이나 훔치는게 아니라 훔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훔친다. 다른 것이 아닌 책을 훔침으로써 문명과 역사에 대한 안목을 넓히며 지식과 감성의 이종교배로 유전자를 개량할 수 있다. 훔친 책은 가슴을 뛰게 하는 긴장이 부작용처럼 곁들여지고 잘 읽히고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나보다 수준 높은 책 도둑의 서고에서 동굴 속의 알라바바처럼 넋이 나가 서 있던 적도 두어 번 있다. 그 정선된 보물을 다시 훔침으로써 우리 책 도둑들은 시대정신을 공유했다.” 본문 46 쪽

  무슨 책을 얼마나 훔쳤는지 궁금하다. 그 책들이 덕분에 의뭉스러운 지금의 성석제를 만드는데 도움을 준 셈이다. 하지만 추억꺼리일망정 할 짓은 못된다. 가뜩이나 위축된 출판시장에 낭만을 빙자한 책도둑마저 횡횡한다면 책 짓고 파는 이들 시름은 더욱 깊어지기 때문이다(요즘 책 훔치다 붙잡히면 대체 벌(형량)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이들의 책예찬에 겸손은 보이지 않는다. 허생전의 허생처럼 딱 10 년 동안 책만 읽고 살라한다면 ‘옳다구나’할 사람들이다. 듣도 보도 못한 ‘책벌레’로 불려도 ‘허허’ 웃고 말 사람들이다. 시인 조병준은 아예 ‘책벌레라서 행복해요!’ 하며 어느 여배우를 흉내낼 지경이다.

  “인생의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책벌레로 인생을 살게 된 건 저주다. 끝없는 배고프모다 지독한 저주가 어디 있는가. 그러나 끝없는 저주는 동시에 축복이다. 죽는 날까지 새로운 양식으로, 비록 곧 사라질망정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처럼 놀라운 축복이 또 어디 있는가. 끝없는 포만감과 끝없는 배고픔이 꽉 부둥켜안고 추는 왈츠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본문 149쪽

  이 책은 내게는 위로다. 촌각을 다투며 속도와 변화를 추구하는 이 세상에 묵묵히 한 곳에 자리를 지키고 종이에 새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책 읽는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위로한다. 많은 문인과 출판인, 평론가, 음악가, 심지어 개그맨 전유성까지...이 책을 집어든 나를 격려한다. 몇 장마다 숨겨진 붉은 칠된 글자들은 내가 갖던 책에 대한 애정이었다. ‘그러게, 내말이...’ 눈에 담고 마음에 새기고 싶은 말들 고개가 함께 주억거렸다.

  가장 인상적인 글귀는 시인 이문재의 ‘척추로 읽읍시다’였다. 일주일 날을 잡아 십 수권의 책을 들고 호텔방에 쳐박히는 소설가 김훈, 매주 일요일 아침 마다 정좌를 하고 책을 읽는 황종연 교수, 일 년 중 한달을 ‘안식월’을 두는 빌 게이츠까지 아예 작정하고 자리를 틀고 책을 읽는 이들이 읽는 책은 무엇일까? 제목은 알 수 없지만 자세 만큼은 척추를 곧추세운 정좌의 독서라는 것이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다시 말해 온몸과 마음을 집중해 읽은 책이 한두 권 있다면, 당신은 책 속에서 이미 길을 찾았을 것이고, 또 그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갔을 것입니다. 책을 몇 권 읽었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읽은 책이, 또는 그런 자세로 읽고 싶은 책이 과연 몇 권이 있는지가 책 읽기의 핵심입니다. 척추로 읽는 책이 진짜 책입니다.” 본문 85 쪽

글과 그림, 그리고 사진을 쫓다 보니 마지막 장이다. 아껴서 읽느라 애를 썼지만 헛수고였다. 읽어서 즐겁고 만나서 기쁜 책, 이 책을 두고 하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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