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가 만날 미래 -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
정지훈 지음 / 코리아닷컴(Korea.com)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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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있다면 필독해야 할 미래서!

 

   “(급변하는) 미래를 대처해야 하는 세대는 우리 아이들 세대다. 이들이 가까운 미래 세상의 변화에 대해 파악하고, 그런 시대를 준비하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면 그것이 가장 현실적으로 미래를 바꾸어 나가는 방안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미래 비전 전략가중 손꼽히는 1인이자 미래학자인 저자 정지훈 교수는 가장 미래지향적이 되어야 할 것은 IT나 경제경영이 아닌 교육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우선 18가지 변화의 키워드를 통해 미래 사회, 미래 직업, 미래 가치관과 미래 교육의 변화를 그려내며 우리 아이들이 주역이 될 미래에는 ‘지식 자산’보다 ‘지식 융합’의 가치 즉, 지식을 어떻게 해석하고 연결할 것인가가 중요한 가치임을 설명한다. 한마디로 기존의 교육 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아울러 미래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세 가지 인재상으로 좌뇌와 우뇌를 모두 활용해 넓고 많이 보는 ‘통섭형 인재’, 나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모아 시너지를 발휘하는 ‘협업형 인재’, 가지고 있는 지식을 흘려보내고 사람과 사람, 지식과 지식을 연결하는 ‘네트워크형 인재’를 꼽았다. 그렇다면 미래를 위해 우리 자녀에게 무엇을 준비시켜야 할까? 저자는 미래 교육은 창의력을 키우는 것과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 그리고 타인의 아이디어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선생님이나 학교 제도에 대해 심각하게 의심해야 한다. 대학 제도가 당신의 인생을 책임져주지는 않을 테니까. 시험에서 모든 문제에 정답을 쓰면 A+를 받고, 선생님이 사랑하는 학생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삶은 여전히 잘못된 길을 갈 수도 있다. 그러니 늘 의심해야 한다.”

 

   2008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문을 연 어른들을 위한 학교, ‘인생학교’(The School of Life)의 교장이자 작가 알랭 드 보통이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현대 제도 교육권에 살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던진 충고다. 좋은 성적을 올리라고 자녀를 닦달할 것만 아니라 지금 우리 자녀가 받고 있는 학교 교육이 정말 내 아이의 미래에 어울리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 책은 미래를 보는 거시적 안목과 함께 현재 내 아이에게 절실한 양육과 교육의 문제를 짚어주는 미시적 솔루션을 함께 주고 있다. 지금 학원을 전전하고 있는 내 아이는 다가올 미래를 제대로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 못하다. 학교는 준비할까? 천만에 말씀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부모의 의무는 돈 버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미래를 알고 아이에게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것이 이 책을 읽어야 할 딱 한 가지 이유다.

 

=다음은 SNS에 쓴 이 책의 소개글 입니다.

 

비즈니스의 미래를 이야기한 책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자녀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그를 대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이야기한 책은 없습니다. 미래학자 정지훈 교수가 미래의 기둥이 될 대한민국 자녀들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나아가 오늘날 자녀들을 위해 필요한 내용들을 친절하기 알려줍니다.

자녀들의 교육은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20세기의 교육은 이제 안녕하고,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인재상에 걸맞는 생각을 가져야 할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인 여러분이 먼저 알고 변해야 합니다.

이 당연한 진리를 아직도 모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말 동안 부부가 읽고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여러분의 아이는 행운아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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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으로 리드하라 -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의 인문고전 독서법
이지성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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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으로 리드하라 - 잘 정리된 인문고전 독서 입문서   


  사람들에게 책을 읽는 이유를 물어보면 크게 두 개의 대답으로 나뉜다. 바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혹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다. 둘 모두 훌륭한 대답이다. 책 한 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읽을 수 있으니 무료한 시간을 즐겁고 유익하게 보내는데 책읽기보다 나은 것은 없다.

  또한 깨달음을 얻는 방법 중에도 책읽기만한 것이 없다. 여기서 깨달음이란 성인聖人들이 경험했던 대오각성大悟覺醒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뭔가를 보고, 듣고, 경험해서 ‘느낌’이 있었다면, 그것이 깨달음이 된다. 한마디로 어제와는 다른 나를 만들어주는 ‘느낌의 경험치’가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깨달음은 ‘알게 되었다’는 기쁨을 준다. 그 기쁨은 처음으로 사탕맛을 알게 된 어린 아이의 커진 눈동자처럼 나를 놀라게 하고, 스스로 배움으로 알았다는 뿌듯함은 묘한 재미도 준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 그리고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런 조건이 여의치 못했던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책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활자책이 없던 옛날에는 책이 많지 않아 책 한 권을 읽고 또 읽어서 외울 정도가 되니 깨달음이 컸고, 책이 차고도 넘칠 만큼 많아진 오늘날은 안목만 갖춘다면 깊이가 백 권 정도 되는 책을 쉽게 만날 수도 있다.

  한편 이러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책읽기를 꽤 즐긴다는 사람들 중에서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는 책들이 있으니 바로 고전古典이다. 짧게는 100~200년, 길게는 1,000~2,000년 이상 살아남은 이 책들은 책 중의 책, 인류가 걸어온 역사의 정수이다. 고전古典이 좋은 책인 줄은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어려워서, 혹은 어려울 것이라고 지레짐작해서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혹자들은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에 고전古典이 무슨 소용이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고전古典은 과연 훌륭한 책일까? 만약 훌륭하다면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리딩으로 리드하라>(문학동네)는 이런 질문을 위해 태어난 책이다. 이 책은 고전의 위대함을 알리고, 일반인들이 쉽게 고전 읽기에 접근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베스트셀러 <꿈꾸는 다락방>의 작가이자 다독가多讀家인 이지성이 썼기에 이론을 통한 학문적 접근이 아닌 위대한 인물들의 사례들을 담아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내어 읽기가 좋다.

  이지성은 고전읽기를 하다보면 그 누구라도 천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의 부제 역시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이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분명 이 시대의 천재들이다. 그러나 불멸의 인문고전을 남긴 진정한 천재들과 비교하면 그들은 기껏해야 머리가 조금 좋은 사람들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해 보자. 만일 앞으로 10년 동안 매일 두 시간 이상 위대한 인문고전을 남긴 진짜 천재들에게 개인지도를 받는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인문고전은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쓴 진정한 천재들이 자신의 모든 정수를 담아놓은 책이다. 아인슈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 존 스튜어트 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정수를 완벽하게 소화하면 누구나 다음 세 가지 중 하나를 경험할 수 있다. 

1. 바보 또는 바보에 준하는 두뇌가 서서히 천재의 두뇌로 바뀌기 시작한다.

2. 그동안 억눌려 있던 천재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3. 평범한 생각밖에 할 줄 모르던 두뇌가 천재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한다.“

 

인문고전 독서의 힘

  인류역사를 보면 항상 두 개의 계급이 존재했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전자는 후자에게 많은 것들을 금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문고전 독서였다. 왜냐하면 인문고전 독서는 나라를 이끄는 힘이자 지배층이 되게 하는 권력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독서가 곧 그들의 업業이었고, 노비들이 책을 들으면 양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엄벌에 처했다. 중국의 지배계급도 인문고전 독서를 지나칠 정도로 중시했고, 일본의 쇼군 계급들은 중국 고전을 마치 비밀문서처럼 귀중하게 여겼다. 유럽의 왕가와 명문 귀족은 평민 이하 계급들에게, 미국의 백인 지배 계급은 흑인들에게 독서는 물론 문자 교육 자체를 금지했다. 

  두뇌의 수준은 그가 읽은 책의 수준과 같다고 할 수 있다고 역사는 증명한다. 두뇌가 우수하지 못한 인간은 두뇌가 우수한 인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지배계급은 그 사실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21세기 지구의 지배계금이라고 할 수 있는 선진국들은 여전히 인문고전 독서에 열심이다. 미국에는 ‘그레이트 북스 재단’이라는 인문고전 독서 프로그램 및 독서토론 모임이 있어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인문고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명문 사립 중고교와 대학의 인문고전 독서교육 전통은 전부 영국에서 비롯되었다. 그들의 엘리트 교육 코스는 아래와 같다.  

1. 가정교사에게 기초적인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받는다.

2. 명문 사립학교에 진학해서 체계적인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받는다.

3.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들어가서 그리어서 및 라틴어로 진행되는 인문고전 수업을 듣고,

그리스어 및 라틴어로 에세이를 쓰고 토론한다. 

  한편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국가 주도의 인문고전 독서 열풍이 불기 시작해 20세기까지 계속되었다. 1930년대 일본의 명문 고교와 대학생들은 기본적으로 독서일기를 쓰는 습관을 갖고 있었고, 고교와 대학 시절 동안 4,000권 이상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사례가 평범한 경우에 속할 정도로 치열하게 독서했다고 한다. 덕분에 일본의 정계. 관계, 재계는 이미 학창 시절에 그리스, 로마, 유럽, 중국, 인도, 일본의 인문고전을 읽은 인재들을 무한정 공급받을 수 있었고, 국력을 혁명적으로 신장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인문고전 독서는 나라와 가문과 개인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아니 나라와 가문과 개인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뭔가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느껴지거든 낙담하거나 한탄할 시간에 인문고전을 펴길 권한다. 1,000~2,000년 된 지혜의 산삼을 두뇌에게 실컷 먹이기를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 반드시 당신 자신이 혁명적으로 변하고, 당신 가문에 인문고전 독서의 전통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가문에서 배출된 인재들이 우리나라와 세계와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위대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리더를 만드는 교육법, 인문고전 독서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독일의 한 시골마을에서 목회를 하던 카를 비테는 장차 태어난 아이를 성공적으로 교육하고자 플라톤, 에라스뮈스, 존 로크, 루소, 페스탈로치 같은 위인들이 집필한 교육 서적과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로마의 교유에 관한 문헌들을 연구해, 저능아인 카를 비테 주니어를 가르쳤다.

  카를 비테 주니어의 두뇌는 위대한 천재들이 집필한 인문고전을 지속적으로 접하면서 기적처럼 변했다. 그는 고작 아홉 살에 라이프치히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했고 열세 살엔 기센 대학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열여섯 살에 하이델베르크 대학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곧바로 베를린 대학 법대 교수로 임용됐다. 이후 여든 세 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대를 대표하는 천재로 칭송받았다.

  카를 비테는 지능이 떨어지는 아들을 천재로 키운 비결로 책을 썼고, 하버드 대학 교수 레오 위너 교수와 보리스 사이디스 교수, 태프트 대학교수 벌 등은 카를 비테의 교육법을 따라 해서 자신의 자녀들을 하버드 대학에 입학시켰다. 인문고전을 통한 교육은 서양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치원 황상은 나이 열다섯이 되도록 한문은커녕 한글도 읽고 쓸 줄 모르는 문맹이었다. 하지만 유배지로 내려온 정약용을 스승삼아 인문고전을 배운 몇 년 뒤, 황상은 조선의 천재들을 매혹하는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연암 박지원 역시 열다섯 살이 되도록 문맹이었지만, 처숙 이군문으로부터 인문고전 읽는 법을 배우고 3년 동안 두문불출한 후 천재가 되었다. 

  전교 꼴찌를 하다가 학습 부진아 반에 들어간 적이 있는 아이작 뉴튼은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인문고전 독서를 배워 천재적인 두뇌의 소유자가 되었고, 학교를 다닌 기간 내내 전교 꼴찌였던 윈스턴 처칠도 어머니의 권유로 스물세 살에 인문고전 독서를 처음 시작해 죽을 때까지 하루 평균 네다섯 시간씩 책을 읽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3개월 만에 퇴학을 당했던 발명왕 토머스 에디슨은 역시 교사 출신 어머니의 극진한 인문고전 독서교육 덕분에 이십대에는 도서관을 통째로 읽어버리겠다며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제대로’ 받으면 누구라도 천재가 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제대로’에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의 독서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인문고전을 읽고서 변화하기를 바란다면 에디슨의 어머니가 치른 것 같은 자신과의 전쟁을 치러야 한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철저한 자기투쟁이 따르지 않는 인문고전 독서는 지식의 축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식은 인간을 변호시키지 못한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지혜가 있을 때 생겨난다. 그 ‘지혜’를 갖는 것이 바로 인문고전 독서를 통한 ‘변화’인 것이다.

인문고전을 통한 교육을 펼쳤던 카를 비테의 교육방식이 리더의 교육이라면, 우리나라의 공립학교 교육제도는 독일에서 시작된,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교육이다. 우리나라 공교육이 초중고교를 합쳐 12년이나 교육을 받고도 창의적인 인재가 되기는커녕 제 앞길 하나도 헤쳐나가지 못하는 무능력한 존재로 전락하기 일쑤인 이유다. 새로운 두뇌를 갖고 싶다면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루 또는 일주일에 몇 시간씩 카를 비테식 ‘다른 교육’을 실천하자. 위대한 고전을 집필한 카를 비테식 ‘다른 교육’을 실천하자.  

평범한 이들을 세계최고 부자로 만든 인문고전 독서 

  세계 금융계의 황제라 불리는 조지 소로스는 처음 철학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아리스토텔레스, 에라스뮈스, 마키아벨리, 홉스, 베르그송 같은 천재 철학자들의 철학고전 도서를 통해 사고의 수준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었다. 조지 소로스는 자신의 투자 성공 비결을 ‘철학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지금도 철학 공부를 열심히 하고, 철학 논문을 쓰고, 세계적인 철학자들을 자택에 초대해서 토론을 벌인다고 한다. 

  세계 최초의 금융분석가로 현대적인 의미의 증권분석 및 가치투자 이론의 창시자인 벤저민 그레이엄도 인문고전 독서가로 유명하다. 컬럼비아 대학 재학 시절 졸업하기도 전에 총장으로부터 철학교수로 임명해 줄테니 모교에 남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던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펀드 운용 능력을 인정받아 20세기 최고의 주식투자자, 영혼의 투자자로 불리는 존 템플턴. 그는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자기 자신을 살아 있는 도서관으로 만들라”라고 대답할 정도로 유명한 독서광이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펀드 매니’저라고 불리는 피터 린치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전설로 떠나는 월가의 영웅>에서 월스트리트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름 아닌 인문고전 도서로 쌓은 사고의 힘 때문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과학, 수학, 회계학 같은 일반 경영학 과목은 필수과목을 제외하고는 피해다녔다. 대신 인문 과목을 주로 수강했다. 역사, 심리학, 정치학을 배웠고 형이상학, 인식론, 논리학, 종교학,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공부했다.”
 

  벤저민 그레이엄을 비롯한 진정한 투자의 구루들이 최고의 실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눈앞의 이익이나 위기에 흔들리지 않는 자신만의 투자 철학을 가지려면 무엇보다 뇌 속에 ‘철학하는 세포’가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하는 세포는 오직 철학고전 독서를 통해서 만들어진다. 그들은 말한다. “월 스트리트식의 금융시장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탐욕으로 가득 찬 소위 금융 전문가들과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따르는 구름 같은 군중의 행렬을 과감히 무시하고 오히려 그들이 죽는 길이다, 라고 한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만일 누구라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면 무엇보다 먼저 그들이 애독한 책을 읽어서 그들 같은 사고능력을 가져야 할 것이다. 

  서점에는 워런 버핏, 조지 소로스, 피터 린치, 짐 로저스 등등 자본주의 세계의 최고 승자들의 투자 비법을 담은 책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의 책을 죽어라고 읽고 그들의 비법을 열심히 따라 한 사람 중에 놀라운 이익을 실현한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치열한 인문고전 독서로 두뇌의 수준을 한 차원 높인 뒤에 터득한 투자의 비결을 담은 그들의 글을, 인문고전을 전혀 하지 않은 두뇌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투자에 적용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오토바이 운전면허도 없는 사람이 세계 최고의 오토바이 곡예사가 쓴 책을 읽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이 어떤 결과를 얻겠는가? 최소한 중상, 최악의 경우 사망이다. 자본주의 세계의 최고 승자들이 가르쳐주는 비법을 따라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자본 생성 능력을 낳은 근본적인 요소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채 그들의 기법만 따라 하는 것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을 걷는 행위일 수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0.1퍼센트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

 

1.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

  세종대왕의 인문고전 독서법은 백독백습百讀百習 즉 100번 읽고 100번 필사하는 것이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치열함이 엿보인다. 그는 왜 그토록 힘들게 독서를 했을까? 나는 그가 백성을 애타게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누구보다 자신이 최고가 되지 못하면 신하들을 제대로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먼저 자신을 뜨거운 독서의 장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한편 세종은 사람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 하는 인문고전 독서는 독서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렇다 인문고전 독서법의 핵심은 천재들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2. 맹수처럼 덤벼들어라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는 태도부터 남달랐다. 그들의 독서태도는 열정과 집중으로 요약된다. 서애 류성룡은 ‘맹자’를 읽을 때 물 긷고 밥 짓는 시동 하나만 데리고 빈 암자로 들어가 전투적으로 독서했다. 남명 조식은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의관을 단정히 갖추고 자리에 앉아서 독서했는데 온종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어서 사람들이 조각상 같다고 느낄 정도였다.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지은 중국의 천재 시인 도연명은 책을 읽다가 좋은 구절을 만나면 먹고 자는 일까지 까맣게 잊은 채 책 속에 빠져나올 줄 몰랐다. 유배지에 도착한 다산 정약용은 말 걸어줄 사람 하나 없는 외톨이가 되었지만 ‘ 이제야 독서할 여유를 얻었구나’하며 기뻐했다. 성호 이익은 아예 책을 가족을 대하듯 했으니 다음과 같다. “사랑하는 어머님과 오랫동안 이별했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독서하라. 아픈 자식의 치료법을 묻는 사람처럼 질문하고 토론하라.”  

3.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인식하라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 태도를 보면 그들이 결코 태어날 때부터 천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대왕은 ‘성리대전’을 읽고 책의 의미를 알 수 없다며 집현전 응교 김돈에게 독서과외를 부탁했고, 퇴계 이황은 젊은 시절 인문고전 독서를 하다 그 방법을 알지 못해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병까지 얻어 몇 년 동안 책을 읽지 못했던 적이 있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도 유클리드의 ‘기하학’과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읽다가 어려워 수시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고 하고, 마하트마 간디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를 처음 듣고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천재들은 인문고전을 대할 때마다 자신이 평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즉 인문고전을 독서할수록 천재에 다가간 것이다. 이 같은 천재들의 노력을 담헌 홍대용의 말이 잘 대변해 준다. “처음 인문고전을 접할 때 누구인들 힘들고 괴롭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구차하게 편안한 독서만 하려고 한다면 자신의 능력을 내던지는 결과밖에 얻지 못할 것이다.”  

4. 위편삼절 책이 닳도록 읽고 또 읽어라

  독서백편 의자현讀書百編 義自見이란 말이 있다. 뜻이 어려운 글도 자꾸 되풀이하여 읽으면 그 뜻을 스스로 깨우쳐 알게 된다는 뜻이다. 후한 말기에 동우董遇가 한 말로 그의 학덕을 흠모하여 글공부를 하겠다는 사람들에게 "나에게 배우려 하기보다 집에서 그대 혼자 책을 몇 번이고 자꾸 읽어보게. 그러면 스스로 그 뜻을 알게 될 걸세."라고 말했다. 반복독서는 천재들의 독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이자 천재들이 가장 강조한 독서법이기도 하다. 

  공자는 ‘주역’의 이치를 깨치기 위한 방법으로 반복독서를 택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반복해서 읽었던지 죽간을 묶은 가죽끈이 세 번이나 떨어졌다(위편삼절韋編三絶)고 한다. 또한 주자는 “다른 사람이 한 번 읽어서 알면 나는 백 번을 읽고, 다른 사람이 열 번 읽어서 알면 나는 천 번을 읽는다.”고 말했다. 

  한편 세종은 ‘구소수간’이라는 책을 1,100번 반복해서 읽었다 하고, 영조는 ‘소학’을 백 번 넘게 읽어 눈을 감으면 언제나 암송할 수 있다고 했다. 정조 역시 주자의 “맹자가 내 안에 들어앉게 하려면 수백 수천 번 읽으면 된다. 그러면 저절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을 독서 좌우명으로 삼고서 ‘맹자’를 읽었다 한다. 

5. 연애편지를 쓰듯 필사하라

  천자들의 필사를 살펴보면 그들의 인문고전의 저자와 어떤 정신적 교감 같은 것을 나누지 않았나 생각해보게 된다. 필요나 의무감 또는 욕심 때문이 아닌 벅찬 감격과 떨림 그리고 기쁨과 설렘 속에서 필사를 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천재들은 자신이 읽은 부분 중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필사하는 방식도 선호했다. 키케로, 아이작 뉴턴, 존 스튜어트 밀, 니체, 마리 퀴리, 자와할랄 네루, 윈스턴 처질 등이 이 필사법을 따랐다. 필사법 가운데 초서抄書가 있는데, 초서란 인문고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뽑아서 옮겨 적은 뒤 이를 주제별로 분류, 편집해서 책으로 만드는 것인데, 조선의 천재들이 취한 기본적인 독서법이었다. 정조는 ‘일득록’에서 “내가 어릴 적부터 즐겨한 독서법은 초서였다. 내가 직접 필사해서 책을 이룬 것만 해도 수십 권에 달한다. 그 과정에서 얻은 효과가 매우 크다. 그냥 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정한 필사는 종이 위에 베껴 쓰는 것이 아니라, 영혼 속에 새겨 넣는 것이다. 인문고전과 내가 하나가 되는 상태, 이 상태를 르네상스의 천재 페트라르카는 이렇게 말했다.

  “책을 읽다가 자네의 영혼을 뒤흔들거나 유쾌하게 만드는 경이로운 문장을 마주칠 때마다 자네의 지적 능력만을 믿지 말고 그 것을 외우도록 노력해보게나. 그리고 그것에 대해 깊이 명상하여 친숙한 것으로 만들어보게. 그러면 어쩌다 고통스러운 일이 닥치더라도 자네는 고통을 치유할 문장이 마음속에 새겨진 것처럼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음을 깨닫게 될 걸세.” 

6. 통할 때까지 사색하라

  ‘반복독서’와 ‘필사’까지는 낮은 수준의 인문고전 독서라 할 수 있다. 그 다음 단계는 ‘사색’이다. 독서의 완성이 여기서부터 시작되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사색을 억압하고 소멸하려고 한다. 이에 대해 관중은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그러면 귀신도 통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귀신의 힘이 아니라 정신의 극치다.”라고 말했다. 사색이 빠진 인문고전 독서는 헛것이요, 가짜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배우기만 하고 생가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고 했다. 한편 맹자는 “마음의 기능은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면 얻는 것이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고 말했고, 주자 역시 “책을 읽는 방법은 다를 게 없다. 글을 숙독하면서 정밀하게 생각하라. 그렇게 오래도록 하다보면 깨닫는 게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색이 없는 독서에 대해 성호 이익은 이렇게 말했다.

  “단지 과거를 치르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입술이 썩고 이가 문드러지도록 책을 읊어도 희고 검은 것에 대해 말은 할 줄 알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장님처럼 되고 만다.” 독서했다면 사색하라. 독서는 오로지 사색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7.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라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법의 핵심인 ‘반복독서-필사-사색’은 ‘깨달음’을 향해 있다. 이는 곧 ‘깨달음’이 있는 독서를 해야 천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깨달음이 있는 독서란 책을 쓴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요, 그의 정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문고전의 저자와 동일한 수준의 사고능력을 갖는다는 것이다.

  인문고전 저자의 마음을 아는 경지, 그것은 황홀한 기쁨과 함께 온다. 에라스뮈스, 니체, 헤르만 헤세는 는 경지에 도달한 순간을 “끝없는 기쁨“이라고 표현했다. 괴테에게 있어 그 순간은 ”밝은 방 안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고, 마하트마 간디에게는 ”나를 사로잡고 뒤흔드는 대사건“이었다. 에이브러햄 링컨에게는 ”감각과 감성을 단번에 사로잡는 영원한 아름다움“이었다. 

  이처럼 진정한 천재들의 인문고전 독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즉 환희와 함께 찾아오는 깨달음이 한때 평범하거나 심지어는 둔재이기까지 했던 그들을 천재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일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인문고전 독서교육은 문심혜두文心慧竇를 여는 것, 즉 아이로 하여금 글쓴이의 마음을 깨닫게 해서 두뇌 속에 숨어 있는 지혜의 문을 활짝 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또한 만일 문심혜두를 열지 못한다면, 만 권을 책을 읽게 되더라도 헛된 것이라고 했다. 무조건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인문고전을 읽고, 필사하고, 사색하라. 그러면 보일 것이다. 문장 뒤에 숨은, 천재들의 인류를 향한 숭고한 ‘사랑’이. 그 사랑과 만나는 순간 당신의 심장은 위대한 전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인문고전 독서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입문서’로 손색이 없다. 인문고전 독서의 필요성과 함께 독서법에 대해서도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부록으로 첨부된 <부모와 아이를 위한 인문고전 독서교육 가이드>와 <성인을 위한 인문고전 독서 가이드>, 그리고 <대표적인 인문고전 독서가들>들은 인문고전을 고르는데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이 리뷰는 기업의 요청에 의해 작성한 '써머리 형식의 리뷰' 임을 밝힙니다. -Richb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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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서재 - 그리고 그들은 누군가의 책이 되었다
한정원 지음, 전영건 사진 / 행성B(행성비)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지식인의 서재 - 열정적인 삶과 순수한 영혼이 담긴 곳, 서재

 

  ‘내가 읽는 것이 곧 나.What I read What I am.’란 말이 있다. ‘많지 않은 시간, 가려 읽으라‘는 선독選讀을 권하는 문장일진대 참으로 옳고도 옳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쓰는 책상 위에 ’읽다 만 내‘가 켜켜이 쌓여있다. 왜 읽었든가 살펴보니 정말 ’지금의 내‘가 아닐 수 없다. 얼마나 많은 나를 만날지, 그러면서 내가 얼마나 많이 변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책을 읽으며 변해가는 나, 어제와는 다른 오늘의 나를 느낌이 그지없이 즐겁기에 오늘도 책을 읽는다. 

   사람들은 남의 책에 참 관심이 많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처럼 남이 읽고 있는 책은 더 재밌어 보이나 보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책을 읽다 보면 예의 책을 살피는 시선들을 느끼게 된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닌데 스마트폰 때문에 더욱 보기 힘들어졌지만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을 만나면 주로 그 사람 앞으로 가는 편이다. 그리고 자연스레 어떻게 생긴 이가 무슨 책을 읽는지 살핀다. 독서하는 모습을 살피는 이유는 몰입해 읽는 그의 표정으로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가늠할 수 있어서다.

   만약 심취해서 읽는 모습을 본다면 최대한 앞사람이 눈치 채지 못하는 자세를 만들어 -당연히 눈치를 채겠지만- 제목과 표지 이미지를 살피고 어떤 내용을 담았을지 상상해 본다. 그때 마다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꼭 기억해 뒀다가 나중에 서점에 가면 자세히 살펴보리라. 그래서 나 또한 저 표정을 경험하리라’ 다짐하지만 십 수 분 후 지하철 환승장에서 사람들과 한차례 씨름을 하고 나면 마치 그들에게 생각을 빨려버린 듯 조금 전 무엇을 생각했든가 조차 잊어버린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잊어버린 읽고 싶은 책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남의 집에 처음 가면 꼭 들리고 싶어지는 곳화장실과 서재일 것이다. 낯선 곳이 익숙해지려면 내가 그곳을 ‘읽어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상대를 가늠하고 평가해야 한다. 그 중 많은 것이 화장실과 서재에 노출되어 있다. 화장실에 가는 이유는 그냥 저절로 마려워서다. 낯선 곳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자 하는 동물적 배설본능에서 비롯한 때문이다. 화장실을 보면 그 집주인의 위생관을 알 수 있다.

   서재를 살피는 상대(집주인)의 내면을 훔쳐보고 싶은 관음증적 심리가 발동한 때문이다. 역시 서재를 보면 그 집주인의 지식수준과 인생관을 알 수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우리가 집주인의 서재를 볼 때의 마음가짐이다. 서재를 단순히 살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놀라기 위해’ 좀 더 확실하게 말하면 ‘부러워지고 싶어서’라는 점이다. 

   남의 서재는 항상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내가 읽지 않아서 부럽고, 내가 읽었던 책은 ‘아, 그는 이것도 읽었던가. 나보다 더 깊이 있게 읽었으리라’ 싶어 부러워진다. 어쩌면 그(혹은 그녀)에게 책의 공간, 서재가 있다는 자체가 부러운지도 모른다. 그곳은 집주인이 지금껏 쌓아올린 지식의 장場이며, 생각의 누적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공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의 것과 그들의 ‘그곳‘은 전혀 다른 세계, 그래서 마냥 부럽다. ’시간을 늘릴 수 있다면, 아니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보이는 족족 그들의 책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눈에 담고 가슴에 새기고 싶다’는 욕심은 남의 서재를 볼 때 마다 드는 물욕物慾이다. 추잡하다 해도 할 수 없는 내가 갖는 도둑놈 심뽀다. 

   그런 내가 우리 시대 지식인 15명의 서재를 담은 <지식인의 서재>(행성:B 잎새)를 읽었다. 책을 덮을 때까지 내 맘 속에 품었던 책 욕심을 바늘로 찌르기로 벌한다면 아마도 재봉틀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것도 전기 재봉틀이... 


  책 속에 있는 인물들 중에 이미 알던 사람은 알아서 반갑고, 채 알지 못했던 사람은 알게 되어 반가웠다. 다른 곳도 아닌 자신의 서재 앞에서 책 이야기를 한다니 이보다 더 반가운 장면은 더 없을 것이다. 그 중 유독 관심을 둔 인물은 조국 교수와 최재천 교수, 김용택 시인, 이주헌, 그리고 장진 감독. 평소 흠모하던 사람들, 이들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이 책은 샀을 것이다.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책은 제 정수리에 죽비를 내리치며 자의 한계와 편향을 알려줍니다. 책은 나의 스승이자 동지이고, 친구이자 연인이며, 훌륭한 적이 되기도 하죠.” 따라 읽노라니 조국 교수가 말하는 책에는 맑고 청량한 중저음이 들리는 듯했다. 진화심리학의 늙은 수컷 침팬지 이야기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한다면, 어떤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If everybody is thinking alike, then somebody isn't thinking."는 벽그림만으로 그가 진보를 택한 이유를 스누핑snooping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르게 생각하기, 도전하기, 그리고 멈추지 않기. 이 모든 것이 그가 책을 읽는 이유, 오늘을 사는 이유였다.  

   <통섭, 지식의 대통합>이란 책을 번역하면서 국내에 최초로 통섭의 개념을 알린 최재천 교수는 서재 역시 ‘통섭원’이라 불렀다. 모든 학문이 소통하는 서재, 그는 차라리 인문학자 같았다. “어떤 책은 맛보고, 어떤 책은 삼키고, 어떤 책은 씹어서 소화시켜야 한다.”는 철학자 베이컨의 말은 그가 책을 읽는 방식을 대신하고, 돈 대신 책이 많아 재벌이 아니라 책벌이라는 그의 말은 책사랑을 가늠케 한다.   

선박 없이 해전海戰에서 이길 수 없는 것 이상으로

책 없이 세상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는 없다

- 프랭클린 루즈벨트 

  난 장진 감독이 좋다. 그가 많은 영화보다 그가 더 좋다. 개구쟁이 같은 얄궂은 그의 미소가 좋고, 청량한 목소리가 좋고, 건방진 말투가 좋다. 무엇보다 그의 말 속에 숨어 있는 뼈와 칼이 좋다. 그가 생각하는 독서 역시 마음에 들었다. 
 

   “독서는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내 몸 어딘가에 취향으로 쌓이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말하는 언어들은 언젠가 내가 읽었던 책들의 영향으로부터 빚어진 거라고 생각해요. ‘정확히 누구의 어떤 책이다’라고 꼽는 건 우습죠. ‘어떤 책의 어떤 구절이 지금의 나를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다.’라고 어느 누가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책이란 읽히지 않으면 죽은 나무의 시체일 뿐, 그 물성物性으로는 이루는 것이 없다. 서재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기에 서재의 크기와 책의 수량에 관심두기보다 그것들의 주인장이 갖는 서재와 책, 그리고 독서에 대한 의미에 관심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변한 그들의 생각과 행동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중국 현대미술의 대가로 알려진 동양화가 이가염은 자신의 서재를 식결재識缺齋라 불렀다. 부족함을 아는 서재, 이보다 더한 서재의 이름은 없다 생각했다. 그렇다. 책을 읽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 아닌, 부족함을 아는 사람이다. 부족함을 알기에 그 부족함을 채우고자 책을 읽는 것이다. 그렇다면 서재 역시 부족함의 크기를 아는 공간이 아닐까. 그리고 내가 남의 서재를 보고 부러워해야 하는 것은 서재의 책들을 통해 담았을 지식의 규모가 아니라, 그들이 부족함을 인정한 겸손함의 크기가 아닐까.  

책은 청년에게 음식이 되고 노인에게는 오락이 된다.

부자일 때는 지식이 되고, 고통스러울 때는 위안이 된다.

- 로마시대의 철학자, 키케로

   나루케 마코토는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에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원숭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사람은 책을 통해 쌓은 지식이 없고, 상상력이 빈곤한 데다, 자기만의 철학이나 주장도 있을 리 없으므로 그저 남의 생각을 마치 자기 생각인양 앵무새처럼 반복하거나 남의 행동을 따라 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면 테러리스트가 되어도 좋다‘고 말했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자기 인생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아이가 꼭 정치가나 의사와 같은 화려한 직업을 갖지 않아도 괜찮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테러리스트가 되면 어떠랴. 체 게바라처럼 낭만과 사상을 가진 테러리스트라면 그것도 근사한 일 아닌가.”

   <지식인의 서재>를 통해 각각의 인물에 두 걸음 만큼 가까워졌다. 안 그럴 것이라 다짐했건만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니 ‘읽어야 할 늠’으로 따로 적은 것이 또 태산 같아졌다. 나이, 직업, 성격, 취향 모두 서로 전혀 다른 사람들이 책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서재라는 공간에서 뭉쳤다. 난 한 켠 곁에서 눈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그들을 마음껏 훔쳤다. 그들의 서재는 여전히 부러웠지만, 한편 난 책을 좋아하는 열다섯 명의 새로운 동지를 얻었다. 책읽는 사람들이 점점 귀해지는 세상, 제대로 책을 즐기는 이들을 15명이나 만났으니 이보다 더한 행운이 어디 있을까(행성B여, 복 많이 받으시라)?어디선가 그들의 글을 만난다면 난 ‘동지여, 잘 있었는가’하고 인사할 것만 같다. 이 책이 날 그렇게 뻔뻔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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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
나루케 마코토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남이 읽는 책만 따라 읽는 '원숭이식 독서법'에서 탈출하는 법!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원숭이다. 좀 심한 말이지만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 사람은 책을 통해 쌓은 지식이 없고, 상상력이 빈곤한 데다, 자기만의 철학이나 주장도 있을 리 없으므로 그저 남의 생각을 마치 자기 생각인양 앵무새처럼 반복하거나 남의 행동을 따라 하기 바쁜 것이다.”

  도발적이지만 명쾌한 표현이다. 나루케 마코토의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뜨인돌)에 실린 글인데, 나를 사로잡은 글이자 이 책을 읽게 한 결정적인 구문이다. 책이 ‘꼭 읽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것에서 ‘굳이 읽지 않아도 되는’ 선택의 것으로 변해버린 세상에서 ‘정말 그래도 되는가보다’고 여기며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일침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다른 사람이 터득한 요령이나 성공 비법을 따라 하기나 하는 사람이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그런 사람은 동물원의 원숭이보다 나을 게 없다. 원숭이도 인간을 곧잘 따라 하지 않는가. 남이 알려 주는 기술에 의존하는 한 적극적으로 변화에 대응해 자기만의 아이디어를 내고 획기적인 발상의 전환을 일으키는 힘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고 말하는 저자의 변(辯)을 읽으면서 ‘옳거니~’ 쾌재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제목처럼 ‘한 번에 열권을 동시에 읽는다’는 초병렬 독서법을 이야기하고 있다. 한 번에 열권을 읽는 초병렬 독서법이라...얼핏 보면 ‘뭔가 새롭고, 특별하고, 대단’해 보이지만 좀 더 살펴보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책읽기 방법이다. 왜냐하면 ‘책 한 권을 읽기 시작하면 꼭 마지막 장까지 읽어야 한다‘고 여기는, 일종의 강박감이 느껴지는 독서 습관을 가진 사람만 아니라면, 책을 좀 읽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자가 말하는 ’초병렬 독서법‘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저자처럼 ’이것이 초병렬 독서법이지‘라고 여기면서 읽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생긴 습관 정도로 여긴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한 권을 열심히 읽던 중에 읽고 싶었던 책을 발견했을 때 혹은 분량이 많거나 어려워서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읽을 때, 머리를 식히듯 기분전환 하듯 내용이 조금 가볍고, 읽기 편한 책을 찾게 된다. 쉽게 말해 이런 독서 방법은 굳이 ’초병렬 독서법‘이다 뭐다 제목을 붙이지 않더라도 책을 읽다가 보면 자연스레 접하게 되는 습관이다. 

  나는 조금 전까지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부키)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왜 도덕인가?>(한경BP), 그리고 카이윳 첸 HP연구소장이 쓴 <머니 랩>(타임비즈)를 읽고 있었다. 그러던 중 <책, 열권을 동시에 읽어라>라는 마치 ‘내 현재의 책 읽는 모습’을 말하는 것 같은 제목에 끌려 책을 집어 들고는 마지막장까지 단숨에 읽어버렸다. 그렇다고 제목에 끌렸다 해서 ‘책 열권을 동시에 읽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단지 ‘동시에 열권을? 그게 가능해?’ 같은 의아함이 있었다. 책을 덮으면서 ‘책 동시에 열권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책읽기 방법도 아닐 뿐더러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할 수 없겠다‘고 결론 지었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책 읽기 방법은 절대로 보편화 할 수 없는 방법이다. 나만 보더라도 책 세 권을 읽고 있으면서도 ‘여기저기 너무 기웃대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열 권 이라니...절대로 동시에 읽을 수 없는 분량이다. 게다가 저자는 ‘발췌식 독서’를 권하고 있다. 심지어는 서점에 서서 ‘5분 정도 들여다보는 수준도 한 권을 읽어낸다‘고 보았으니, 정독과 완독을 하는 나로서는 절대로 공감할 수 없는 책읽기 방법이다. ’초병렬 독서법‘이라는 그의 독서법은 ’동시에 열권을 읽는다는 단순한 행위‘에 근거한 것이지 특별한 이론적 근거나 구체적인 방법론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초병렬 독서법‘이라는 이름도 저자가 독서습관을 본 누군가가 지어준 이름이라 하지 않았던가?

  짐작컨대 홋카이도의 평범한 대학을 졸업해 입사한 사원이 35세에 마이크로소프트 일본법인의 사장으로 취임했다면 저자인 나루케 마코토는 그 자체로 화제의 인물 감일 것이다. 그래서 그의 성공을 엿보니 자타가 공인하는 독서가라는 점이 두드러져 그를 성공으로 있게 한 독서습관을 굳이 알리자니 이렇게 해괴한 이름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요컨대 그가 말하는 ‘초병렬 독서법’은 딱히 배우고 익힐만 한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끝까지 읽었던 것은 ‘다독가’가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은 좋은 말들이 꽤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흔드는 한 문장이 들어 있었다면, 그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나이기에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했다.

  우선 마음에 들었던 표현은 ‘독서’를 놀이로 본 것이다. 대학시절 국어교수가 내가 책을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도와준 한마디가 ‘책은 장난감이고, 독서는 놀이다’였는데, 반가운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옮기면 다음과 같다. 

  “독서는 일종의 놀이다. 그것도 가장 편안한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소파에 앉아 따끈따끈한 군고구마를 한 입 베어 물며 책의 세계로 신나는 여행을 떠날 수 있으니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가. 우리는 책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 세상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론 멀리 우주에서 일어나는 일까지도 알 수 있다. 또한 자신이 직접 체험할 수없는 일들을 책을 통해 간접 체험할 수도 있다.

  실제로 그 장소에 가 보지 않으면, 즉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은 그만큼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나는 가끔 상상 속으로 여행을 떠나 재미있게 놀다오곤 하는데, 그럴 때만다 세상에 이보다 더 사치스러운 놀이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만약 독서를 즐기지 못하는 독자가 있다면 그것은 책을 ‘교과서나 참고서’의 친구쯤으로 여기지는 않나 먼저 의심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책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교과서나 참고서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할 것, 공부해야 할 것, 외워야 할 것’으로 여긴다면 독서를 즐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많은 독자가 그렇게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렇게 여겼다면, 쉽게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책을 장난감으로, 독서를 놀이로’ 여기는 순간 책읽기는 만만해진다. 서양 사람들이 휴양지로 휴가를 와서 책을 보는 이유, 심지어는 선탠을 하면서 책만 읽다가 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책의 원서 - 뒷장에 '타인의 노하우를 따라하기만 한다면 '일생 서민으로 남는다'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아이가 책을 좋아한다면 테러리스트가 되어도 좋다‘는 표현도 멋졌다. 다독가가 아니고는 결코 쓸 수 없는 감정 표현이다. 다소 극단적이기까지 했지만 부연을 읽어보고 또 한 번 쾌재를 하며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을 열심히 읽고 자기 인생을 능동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면 그 아이가 꼭 정치가나 의사와 같은 화려한 직업을 갖지 않아도 괜찮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테러리스트가 되면 어떠랴. 체 게바라처럼 낭만과 사상을 가진 테러리스트라면 그것도 근사한 일 아닌가.(모든 혁명은 테러로부터 시작되었다)”

  1974년,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TV 송신탑이 과격파에 의해 파괴되면서 그 지방의 130만 대나 되는 텔레비전이 약 1년 간 먹통이 되는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극도로 혼란했을 법도 한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이 책을 읽게 되면서 서점의 수입이 늘었고, 어린이들은 바깥놀이를 즐기게 되어 더욱 건강해졌다고 한다. 또한 마을 사람들의 커뮤니케이션도 늘어나 더욱 친밀해졌다는 것이다. 

  책 읽을 시간이 생기기를 기다린다면 아마 평생 동안 책 한 권도 못 읽을지 모른다. 책 읽을 시간이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바빠서 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굳이 송신탑을 파괴시키지 않더라도, ‘거실을 서재로’ 같은 캠페인을 벌이지 않더라도, TV를 잠시 끄자. 그렇다고 아예 TV를 보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TV를 켜놓고 멍하니 쳐다보며 시간을 죽이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이 같은 책은 읽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열권을 동시에 읽는’ 헛갈리는 책 읽기 방법도 필요 없다. 당신이 읽고 싶은 책을 가장 편한 자세로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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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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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식의 거인으로부터 고전과 교양의 의미를 듣다

  “저는 대학 때 읽은 책의 80%가 소설이었습니다. 그러다 문예춘추에 입사했고, 그 이후 소설읽기를 그만두었어요. 처음 배속된 곳이 <주간 분슈운(週刊文春)>이었는데 당시 상사가 소설만 읽으면 안 된다고 충고를 해서 그때부터 소설 이외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 거죠. 그러자 제 자신이 얼마나 현실을 몰랐던가를 통감하겠더군요.(웃음) 허구보다 현실이 더 흥미진진했어요. 그 이후 소설에서 멀어졌어요.” 

  나는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가 소설 혐오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의 직업이 논픽션 저널리스트이고 어느 인터뷰에서 “내가 죽을 때까지 읽을 수 있는 책이 몇 권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나는 소설을 읽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읽은 적이 있기에 난 그런 줄로만 알았었다. 왕팬을 자처하면서 큰 오해를 할 뻔 했다 싶어 다행이었고, 그도 학창시절에는 소설을 읽으며 흥미로운 허구의 세계에 빠졌다는 사실은 그의 독서여정에도 변곡점이 있었구나 싶어 내게 가벼운 안도감을 준다. 오랜만에 지식의 거인을 만났다. <지의 정원知の 庭園>(예문)을 읽었다. 



 

  이 책은 일본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독서광 두 명이 펼치는 일종의 대담집이다. 지의 거인으로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立花隆와 지의 괴물로 알려진 사토 마사루佐藤優, 일본의 대표적인 두 명은 책이 인간의 역사에서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그리고 시대와 지성, 교양과 독서의 힘을 이야기한다. 각자가 읽었던 책 중에서 교양을 위해서라면 읽어야 할 필독서 총 400권을 소개하고 비평한다. 원제목은 『ぼくらの頭脳の鍛え方, 우리의 두뇌를 연마하는 방법』이다.



책을 펴는 순간 나는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테이블 뒤에서 방청하는 관객이 된다. 두 사람의 대화 중 거론되는 책의 절반 이상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책들이었다(대화중 소개한 책 상당수가 국내에는 출간조차 되지 않은 책들이다). 하지만 이미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나 <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 등을 읽은 터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책’을 대하기는 낯설지 않다. 나는 관심조차 없던 책, 그래서 나중에라도 읽지 않을 책이기에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훑어 나갔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알고자 하는 것은 ‘책 제목과 짧은 책 소개’가 아니다. 처음 만나는 인물인 사토 마사루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아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아우르며 책과 세계를 향한 지적 긴장을 늦추지 않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독서관을 조금이라도 더 엿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고전은 모든 지식의 기반이 되는 역할을 합니다. 다른 사람과 어떤 주제를 놓고 이야기할 경우 전제나 배경이 되는 지식이 없으면 내실 있는 논의가 불가능한데, 그때 전제나 배경이 되는 것이 바로 고전입니다. 단, 고전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군요. 메이지 시대에는 메이지 시대의 고전이, 현대에는 현대의 고전이 존재합니다.”

  다치바나는 <나는 이런 책을 읽어왔다>에서 “고전을 읽을 필요는 없다. 최신 잡지나 학술서를 읽으면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최소한의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전제하에 한 이야기다. 근원에 접근하기 위해 고전을 대하는 태도는 높이 평가하지만, 고전에 탐닉하는 것을 경계했다. 제대로 익히기 위한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서 고전은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한편 다치바나가 생각하는 교양은 무엇일까? 



  “교양은 다른 말로 하면 인류의 지적 유산입니다. 그래서 교양 교육은 지적 유산의 재산목록을 가르치는 것이 됩니다. 지식의 전체상을 그리도록 하고, 지의 세계의 끝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 지점으로 학생을 데리고 가는 것이 교양 교육이라고 봅니다. …… 현대사회에서 교양이라는 말은 점차 죽은 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만 권의 책을 읽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결국 일생에서 최대의 성과를 얻으려면, 생의 남은 시간을 확인하면서 계획을 세우는 수밖에 없지요. 그때 지식의 계통수를 머릿속에 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역시 종이 매체에 쓰인 것을 읽는, 즉 독서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인류는 그렇게 해서 뇌를 발달시켰기 때문이지요.”

 


  그는 ‘교양’을 어떤 세트로 이루어진 지식이라고 보는 것을 경계했다. 또한 교양을 익히기 위한 속성법이 있는 줄 아는데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라고 말했다. 다치바나는 교양을 ‘개인의 정신적 자기 형성에 도움이 되는 모든 것’, ‘현대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이념의 총체’라고 정의하며 부연의 말을 더했다.

   “독일에서는 실학을 ‘빵을 위한 학문’이라고 하는데, 교양은 빵을 위한 학문이 아닙니다. 교양은 실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지는 않아도 ‘모르면 부끄러운 지식의 총체’, ‘각계에서 교양인이라 간주되는 사람들과 당당하게 지속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지적 능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이 추천하는 책을 꼭 읽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또한 국내에는 발행되지 않은 책들이 많아서 그조차도 불가능하다. 두 독서광이 추천하는 책 400권은 리스트와 함께 추천에 대한 짧은 변(辯)이 첨부되어 있다. ‘세 줄 서평’이라 해도 될 법한 이 글만으로도 이 책을 읽는 가치는 충분했다. 

  "책을 무척 좋아하는 두 형제를 알고 있다. 어느 날 동생네 사무실에 놀러갔더니 책상에 놓여 있는 책 한 권을 가리키며 이 친구 하는 말이 형이 훔쳐가서 또 한 권을 산 것이란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이 친구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 책을 가방 속에 넣고 사무실을 나와 문자를 보냈다. ”한 권 더 사라.““

  정제원의 <죽도록 공부해도 죽지 않는다>를 읽다가 이 글귀에 한바탕 웃었다. 보름 전 나는 이 책을 집어오면서 동생에게 똑같은 말을 했기 때문이다. 장거리 기차여행길에 오르면서 편하게 읽으려고 집어 들었다가 바로 덮고는 집으로 돌아와 필기구가 놓인 책상 앞에 앉아 다시 책을 폈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아 이문재 시인이 쓴 ‘척추로 읽읍시다’라는 제목의 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다시 말해 온몸과 마음을 집중해 읽은 책이 한두 권 있다면, 당신은 책 속에서 이미 길을 찾았을 것이고, 또 그 길 위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 나갔을 것입니다. 책을 몇 권 읽었느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척추를 곧추 세우고 읽은 책이, 또는 그런 자세로 읽고 싶은 책이 과연 몇 권이 있는지가 책 읽기의 핵심입니다. 척추로 읽는 책이 진짜 책이다." 

  이 글을 읽는 미래의 독자 역시 이 책을 어디서 읽든 자세만큼은 척추를 곧추세운 정좌의 독서를 해야 할 것이다. 내게 400 권의 리스트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난 지식의 거인에게서 고전과 교양을 읽어야 하는 이 책을 통해 배웠다. 그걸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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