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즐거움 - 은퇴 후 30년… 그 가슴 뛰는 삶의 시작!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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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보이 김 열규 선생의 푸르른 노년예찬!

  “할머닌 언제 죽어?“ 초등학교 2 학년이었던 내가 무슨 생각 끝에서인지 이런 망발을 했더랬다. 그날 내내 할머니는 당신 방에서 나오지 않으셨고, 사연을 들은 갓 서른 넘은 아버지한테 야무지게 맞았다. 지금까지 그 질문을 기억한 것 아버지의 매 탓이리라. 맞벌이 부모 밑에 태어난 나는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할머니의 젖무덤에 코를 박아야 잠이 들었고, 할머니가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줘야 밥을 입에 넣었다. 어디라도 움직이면 꼬리가 되어 항상 졸졸 쫓아다니는 통에 할머니 고쟁이 왼쪽 쪽 끝은 늘 튿어져 있었고, 툭하면 비녀를 뽑아 장난을 쳐서 할머니 머리는 항상 엉망이었다. 

  혼자서 정육점에 가서 ‘돼지비계 백 원 어치요’하며 김치찌개에 넣을 고기를 주문할 정도가 되었을 때, 난 할머니의 보살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한동안은 토요일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할머니 품이 있는 집으로 뛰어가더니, 이 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 나중엔 방학 때 일주일 정도 할머니를 찾았다. 나이를 먹어가며 조그마한 ‘내 세계’가 생긴 때문이었다. 내가 점점 클수록 그만큼 할머니와는 물리적 거리가 멀어져갔다.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 할머니가 계신 큰 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할머니가 가서 이젠 안계신다는 말씀을 전화로 들었다. 이젠 정말 없을 할머니를 뵈러 내려가던 날 밤 눈이 많이 내렸다. 아주 많이. 손에는 최인호의 ‘천국의 계단’이 쥐어져 있었고, 귀에는 유재하와 박학기의 노래가 카세트로부터 흘러나왔다. 눈에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귓등 너머 흰머리가 하나 삐죽 나왔다. 누가 볼까 두려워 얼른 하날 뽑아냈더니 그 다음 주에는 둘이 보였고, 점차 개체수를 늘려나갔다. 외탁을 한 터라 새치가 많다는 소리를 익히 들었던 터라, 군인이셨던 작은 외할아버지 별명이 ‘백대가리 장군’이었단 소리도 들었지만 어느 새 더 이상 뽑다가는 ‘골이 훤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어 염색을 했다. 그 일을 하면서부터 난 ‘늙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듦, 늙음을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살아온 과거를 돌아보기 때문이다. 뭘 하고 살았나 싶고, 뭘 이뤘나 싶다. 잘 살았나 싶고, 행복했었나 싶다. 추억이란 필름은 세피아 색이다. 아무리 자세히 들여다봐도 컬러는 보이질 않는다. 고개를 바로 하니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다. ‘괜한 생각했다’ 싶어 다시금 마음을 다잡아본다. 그러던 차에 오늘 읽은 김 열규 선생의 [노년의 즐거움] 덕에 나이듦도, 늙음도 괜찮겠다 싶어졌다. 아니 오히려 기대된다 싶어졌다.



 

  지난 해 였던가? 김 열규 선생의 책[독서]는 내게 큰 파란을 일으켰다. 그의 남다른 책 사랑, 독서 사랑에 놀랐고, 우러러 볼 대상이 한 명 늚에 반가웠다. 이 책을 듦에 내 나이에 무슨 ‘노년타령’이냐 싶어 읽기를 관둘까도 생각했지만, 굳이 읽은 이유는 온전히 김 열규 선생의 생각을 엿보고 싶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역시 기대 이상 이었다. 글을 읽어보라. 이 글이 어찌 78세 노인의 글이더냐. 보이는 색은 푸른 색 이요, 맛은 떫은 풋내가 난다. 노숙, 노련, 노장의 삼로三老는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덕목이고, 初老의 50, 耳順의 60에게 기운을 북돋는다. 푸른 노년 공화국! 인생은 백세! 라 하시더라. 읽고 나서 느낀 바는 ‘배워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삶을 배움으로 채웠던 터라 노년에 보이는 세상은 멋들어져 있었다. 탑골공원, 종묘공원에서 삼삼오오 앉은 젊거나 또래인 그들과는 천지 딴판이다. 배움이 있으니 느낌이 있고, 깨달음이 있으니 노년이 즐겁다. 도나텔로의 흉측한 막달라 마리아에서 노성老聖과 성로聖老를 발견하고, 아이들도 내뱉는 웰빙well-being이란 트렌드는 ‘인품을 가꾸고 교양을 닦고 정신적으로도 완숙하기를 기도하면서 건전하게 삶을 가꾸어가는 것’이라며 이 말은 노년의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 글을 읽자니 자꾸만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Walden’이 생각났다. 나는 소로우의 문명의 주류를 떠나 홀로 먹고, 자고, 입을 것을 해결해 가며 살았던 은둔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세상에서 벗어나 혼자되니 자신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게 되는가 보다 싶은 생각이다. 하늘의 푸름과 신록의 녹음을 감사할 줄 알더라. 빗소리의 운율도 느끼고, 자연의 숨 쉼을 만끽하더란 거다. 알고 보니 미국 유학시절, 월든 호숫가를 거닐며, 소로처럼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하더라. 내가 이 삶을 쫓는다면 소로우를 쫓는 게냐, 김 열규 선생을 쫓는 게냐 궁금해진다. 

  본격적인 노령화 사회로 접어든 이 땅에 이들을 이야기하는 책은 진즉 나왔어야 했다. 바다 넘어 일본엔 ‘황혼유성군’이라는 실버세대를 위한 만화가 절찬리에 읽혀지며 34편 째 시리즈로 나오고 있지 않더냐. 늙음은 추함이 아니다. 함구할 것도 아니고, 숨길 것도 아니다. 사회가 두려워해야 할 ‘어두움’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면 ‘고려장’을 하고 있는 셈이고, 청장년은 제가 들려져야 할 지게를 준비해야 한다. 남 탓할 바도 아니다. 노인 스스로 활개를 쳐야할 것이다. 김 열규 선생처럼 ‘늙으니 좋기만 하구만’ 허허 해야 할테다. 하지만, 평생 일하고, 밥 굶지 않음을 미덕으로 살은 터라 ‘즐길 줄 아는 이’ 또한 몇 있을까 싶다. 이 책을 읽어 배우고 격려 삼아 제대로 즐기시라 권하고 싶다. 

  이 책에 크게 건진 것 하나 있다면 선생의 ‘퇴직관退職觀’이다. 그는 퇴직이 아니라 전직轉職이라 고쳐 불렀다. 그리고 퇴직후에야말로 오롯이 ‘나만의 나만을 위한 나의 일’을 하게 되었다 말했다. 태어난 후 처음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누리게 된 것을 크나큰 천행이요 천운이라 여기기까지 했다. 아래는 선생의 말씀을 다소 길지만 그대로 적어야겠다. 하나도 뺄 말이 없고, 고칠 말도 없어서다. 머릿속, 가슴속에 새기고 박아야 할 금언이 아닐 수 없다.   

“내가 그렇게 풍요롭고 넉넉하다는 것을 퇴직 후에야 겨우 깨달았다. 그년 노년이 베풀어준 엄청난 특전이었다. 비로소 내가 된 것 같다. ‘자수성가自手成家’란 말이 비로소 실감났다. 내 손으로 내 영역을 일구어낸 것이라 생각하니 노년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의 업을 성취해내는 것이라는 실감이 났다.  

일흔이 넘고서야 찾은 나만의 나라니! 그 전의 시간과 세월은 오직 이를 위한 준비이고 예비의 시기에 불과했던 것만 같다. 이전의 내 생애는 과도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만의 나만을 위한 나의 일! 이건 노녀의 내가 비로소 향유하게 된 새 삶의 징표였다. 보통일이라고 하면 작업이나 노동 같은 걸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물론 작업이니 노동도 내게 일은 일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책 읽기, 걷기, 군것질하기, 차 끓이기, 차 마시기, 멍하니 바다 보기, 눈 감고 명상하기, 고개 숙이고 상상하기 등등이 모두 나의 일이다. 뿐만 아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다가 원두를 갈아서 내 손으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맛을 보는 것도 일이다. 그러다가 그 모든 것에 진력나면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 것도 요긴한 일이다. 덕분에 노년에 접어든 나의 일상은 ‘만다라’고 만물전이다.“ (213 쪽)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살아서 보는 것이 아니라, 느껴서 보이는 것이다. 느끼니 일상이 만다라고 만물전임을 배운다. 느끼니 세상이 다시 보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느끼자. 많이 느끼자. 그러자니 더 많이 지금의 삶 속에서 배우고, 익히자. 한 권의 책을 통해 시간을 얻었다. 아니, 노년이라는 삶도 훌륭함을 새로 배웠다. 늙음이 두렵지 않으니, 오늘이 덤 같고 내일이 보너스 같다. 선생께 오래 사시라, 삶을 만끽하시라 전하고 싶다. 그리고 느끼시거든 또 글로 남겨 흘려 달라 부탁하고 싶다. 주워서 붙여 읽어도 글맛은 여전할 테니까. 세대를 넘어 읽어보시라. 그럼 당신은 시간을 공짜로 얻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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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 대한민국 사법부를 향해 석궁을 쏘다 우리시대의 논리 12
서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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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계란되어 바위를 친 <석궁사건> 김 교수

 

  “우리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말한다. 또 ’법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다‘고 말한다. 응당 그래야 할 것인데, 실제는 나처럼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다. 사실 여부를 알기는 쉽지 않다. 법으로써 사람 사는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과 일반인 사이에는 소통이 불가능한(최소한 그렇다고 생각하는) 너무나 큰 벽(편견일 수 있지만)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벽은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외치면면서도 막상 앞으로 나서지는 못한다.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행여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까 겁이 나서다. 법원의 존재이유는 당연하고 꼭 필요하지만 직접 만날(원고이든 피고이든)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속내다. 어쩔 수 없는 겁 많은 쥐새끼인 셈이다“

 

  얼마 전 읽은 책 <불멸의 신성가족>에서 난 이렇게 리뷰를 시작한 적이 있다. 2호선 지하철을 타도 교대와 서초에서 내리기가 꺼려진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자마자 넓은 터에 작위적이고 고압적인 사각 꼴의 법원보기가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곳 주위에 머물러 있는 억울한 사람들, 그들을 변호(?)하며 먹고 사는 사무실 등 당장 나 와는 상관없는데도 은근히 속시끄러운 풍경과 공기가 싫어서다. 그렇다, 난 솔직히 싫고 무섭다. 그 모습들을 쳐다보는 것도 싫어 웬만하면 시선을 멀리 두고 지나칠 정도다.

 

  그곳을 지나다 보면 항상 만나는 ‘겂 없는 사람들(내가 판단하기에)’을 만난다. 살벌한 법원에 대고 문구를 담아 억울함과 절박함이 뭍어난 피켓을 들고 홀로 서 있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1인 시위대. 난 그들을 보면서 ‘저러다 미운 털이 박혀 오히려 불리하지 않을까? 혹시 잡혀가는 건 아닐까?’ 우려를 하면서 한편 그들의 강단에 놀랐다. 굳이 알 필요도 없거니와 알고자 한들 이야기해 줄까 싶어 사연이 궁금해도 지나치곤 했는데, 그들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책 <부러진 화살>은 법원 앞 1인 시위자 중 대표적인 인물에 관한 이야기다.

 

  이 책은 뉴스를 잘 지켜봤던 사람은 들어봤음직한 '석궁 사건'의 주인공 김명호 교수의 사건에 대한 책이다. 성균관대학의 대입 시험 문제의 오류를 지적했다가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 교수는 교수지위 확인소송을 하게 되는데, 많은 불합리 속에 패소를 했다. 항소심마저 패소하게 된 김 교수는 석궁을 들고 판사의 아파트를 찾아가 퇴근해 돌아오는 판사를 만나 항의하다가 ‘석궁을 발사’하게 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처음 뉴스를 들었을 때 ‘간肝이 배밖으로 나온 사람’이 저지른 ‘해외토픽에나 나올 법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치부했었다.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범죄이고, 있어서도 안될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어디다 감히..’가 아니던가(말했잖은가? 난 겁쟁이다) ? 그렇게 생각해서 넘겼던 사건이라 책을 폈을 때는 우선 어떻게 판결되었나, 그리고 김 교수란 인물은 어떤 사람이길래 그런 무모한 짓(?)을 했던가 궁금해서였다. 전모를 알고는 ‘차라리 알지 말걸 알았다’는게 솔직한 느낌이다. 혹시나 하는 바람이 역시나 하는 체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게 원래 불완전하기에 시시비비是是非非에 대한 결정을 해줘야 할 곳이 필요했고, 그래서 만든 게 법원이요, 그곳에 일하는 사람들이 법관이다. 아이러니는 중의衆意가 모여 만든 법률에 의존하지만 그곳 역시 불완전한 인간이 마지막 결정을 내린다는 것, 그 아이러니가 결국은 이같은 불행한 사건을 만들고 말았다. 인간을 심판하는 인간 역시 불완전하거늘 ‘완전한 듯 착각’하고 있음이 이 사건을 만들고 말았다. 그리고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심판이라는 일에 대해 나름의 프라이드와 보람은 있을 지언정 스스로 권위자가 되어 ‘그들만의 리그’에 속하지 못한 이들을 ‘아래’로 본 결과가 빚어낸 사건이다.

 

  판사를 일러 영어로는 Judge 혹은 Your Honor라 부른다. 후자의 Your Honor는 서양의 평등정신으로 비롯된 말로 ‘사람으로서 당신과 난 큰 차이는 없지만, 난 당신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법관의 권위는 모든 사람의 약속인 법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즉 내가 만든 법이 세운 권위에 의해 법관이 앉아 있으니 그를 존중하는 것은 지당하다. 하지만 자신들이 하늘이 내려준 듯 군림하고자하는 ‘불완전한 인간적 본성’ 이 나오면 억울한 국민은 더 억울해진다. 법관의 권위와 존중은 스스로 받고자 받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주는 것이다. 오랜 시간과 공력을 들여가며 그들은 왜 법관이 되려 했을까 궁금해진다. 약자를 보호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한 몸 던지기로 했지 않았냐 묻는다면 초등학생 같은 순진한 생각이라 비웃음을 살까?

 

  불의에 타협하지 못하고 일터에 쫓겨나면서까지 대항하다가 결국 법원에 호소하게 된 김 교수의 정의감과 용기는 부러울 만큼 훌륭했다. 하지만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은 상해의 의도가 있건 없건 간에 ‘석궁’을 들고 갔다는 것이다. 그 죄는 두 말할 것 없는 범죄임에 틀림없기에 단죄해야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의 죄를 놓고 벌인 경악할만한 법관들의 태도였다. 과연 김 교수가 그만큼의 형량을 받았어야 했을까? 원고가 동료교수였다면, 일반 시민이었다면 그랬을까? 조직의 내부인이 연류된 사건인 만큼 오히려 더 ‘법적‘으로 중대하게 여기고 심사숙고해서 해결해야 되지 않았을까?

 

  ’석궁 사건‘은 사건에 연류된 판검사들 뿐 아니라 대한민국 사법권의 씻을 수 없는 오명이다. 앞으로의 결과를 떠나 법원과 법관에 대해 무너진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공정한 법 집행자로 남을 것인지, 또 다른 치외법권적 권력자로 남을 것인지 선택의 공은 넘어갔다. 앞으로를 지켜볼 따름이다. 이제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누구를 믿고 찾아가야 할지 갑갑해졌다. 그런 일을 당하면 김 교수처럼 피켓을 들고 법원 앞에 설 수 있을까? 판검사에게 ’법대로 하라‘고 기세등등하게 소리칠 수 있을까? 법원을 지날 때처럼 꺼림직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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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용설명서 - 단 한 번뿐인 삶을 위한 일곱 가지 물음 인생사용설명서 1
김홍신 지음 / 해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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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에게 장총찬의 부활을 요구한다

 

  1989년 대동제를 앞둔 어느 봄날, 모 대학의 교양 국어 수업시간이었다. 강의 도중에 한 남학생이 일어나 국어교수에게 드릴 말씀이 있다고 말했다. “이 강의실에 제가 사랑하는 여학생이 있습니다. 그녀에게 제 사랑을 전하고 싶습니다.” 좌중은 어수선해졌지만, 교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남학생은 준비한 꽃다발 한아름을 들고 여학생에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에만 담았을 뿐 차마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 친구들의 도움으로 오늘 이렇게 당신에게 꽃을 바칩니다. 제 마음을 담을 이 꽃다발을 받아 주십시오.” 처음에 놀란 여학생은 창피해서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 못하고 있다가 꽃다발을 받으면서 “고맙습니다.” 말했다. 순간 여학생 옆에 있던 학생들이 일어나 파티용 폭죽을 터뜨리고 꽃가루를 날리며 환호했다. 남학생의 친구들이었다. 수업을 듣던 학생들도 환호를 하며 축하를 해주었다. 남학생도 창피해져서 제 자리에 앉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내 길지 않은 삶을 살진 않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을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내 인생에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남겨주었고, 또 다른 학생들에게도 사랑을 할 때 필요한 용기가 무엇인지를 알려준 것 같습니다. 난 젊은 여러분이 부러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큰 배움을 얻었는데 이렇게 행복한 마음으로 어떻게 수업을 할 수 있으며, 여러분은 어떻게 수업을 들을 수 있습니까? 오늘은 휴강합시다. 그리고 사랑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두 학생에게 A학점을 줄까 합니다.” 

  한동안 그 교실에 학교가 떠나갈 듯 큰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이 이야기는 오래 전 어느 캠퍼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안타깝게도 난 그 자리에 없었다. 홀아비 쉰 내 푹푹 풍겨나는 3학년 교실에서 ‘대입 모의고사’로 국어 문제나 풀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 해 그 대학의 새내기가 되어 학교 앞 2층에 있는 ‘학사주점’에서 1년 전 그 날 수업을 들었던 선배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이 누구였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다만 한 명 교수가 누구였는지는 또렷이 기억한다. 그 교수의 이름은 김홍신이었다. 그의 말이 장미꽃 한다발보다 아름답게 느껴졌다.

  열 다섯 살이었던가? 내가 김홍신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건 ‘인간시장’이라는 소설을 통해서였다. 부조리로 얼룩진 80년대의 대한민국을 정의라는 이름으로 악으로 깡으로 밀어부친 젊은이 장총찬의 활약을 다룬 소설이 ‘인간시장’이다.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 사이비 교주, 인신매매단, 심지어는 일본으로 건너가 야쿠자를 혼내주는 장총찬의 활약상을 책으로 읽으면서 난 ‘소설’이라는 장르, 특히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 ‘물건’인가를 그 때 알았던 것 같다. 나중에 진유영이라는 장총찬에 딱 어울리는 배우가 주연을 맡아 영화를 찍었고, 그 후에도 몇 번 드라마로 제작된 적이 있는 멋진 소설이다. 선배들이 기억하는 ‘국어시간의 그 사건’이 어느 교수님 시간이었다면 난 아마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인간시장>의 소설가 김홍신이 내가 다니는 대학의 교수였다는 사실을 ‘묘한 인연’으로 느끼며 놀랐기에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닐까. 책 <인생사용설명서>를 만난을 때 그 날을 또 기억한 것처럼.



 

당신은 누구십니까 

왜 사십니까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누구와 함께 하겠습니까

지금 괴로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마음을 다스리겠습니까

    이 책은 소설가 김홍신이 강연, 강의, 대담, 글 등을 통해 나누었던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다. 크게 일곱 가지의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제시함으로써 나의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를 스스로 생각하도록 꾸미고 있다. 

“하물며 가전제품 하나에도 사용설명서가 있는데, 우리 삶에 그 같은 지침을 왜 찾지 않는 걸까요? 단 한 번의 인생을 보다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는 스스로 인생사용설명서를 갖춰야 합니다.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들을 손꼽아봅시다.”

  건강, 웃음, 사랑, 행복 등 인생에서 중요하지만 쉽게 깨닫지 못하는 것들의 소중함을 알게 한다. 진정 추구해야 할 가치들은 당연하다 여기고 늘 존재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당장은 하나뿐인 내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오늘 이 순간을 사는 것도 복됨을 알게 했다. 인생을 다시 관조하게 되는 질문과 답은 마음의 평화를 주기에, 보다 나은 인생을 위해 기운을 차리기에 큰 위안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말이라지만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아직은 이렇게 아름다운 말을 할 때가 아니다 싶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홍신을 인생을 논하는 노교수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모자람이 있기 때문이다. 독자로서 그를 더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글은 한참 뒤에나 봤음직한 글이 아닌게 하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올해로 예순 셋을 맞이한 그가 인생을 논하기가 새삼스럽진 않다. 하지만 항상 젊을 것만 같은 ‘장총찬’같은 그가 인생운운 하는 글을 읽자니 자못 서글퍼졌다. 그의 나이듦이 곧 그렇게 되어버린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던가. 기세등등한 문체를 자랑하던 그가 겸양어를 쓰는 모습도 그리 어울리지 않았다. 반가운 부분은 3장 ‘인생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였다.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을 알리고, 초강국이 되어버린 중국을 상대로 발해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민족적 자존심을 드높여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는 대하역사소설 ‘대발해’의 그때를 보는 듯 했다. 무척이나 반가웠다. 소설가 김홍신은 아직 젊다. 그는 이런 수필보다는 소설로 만나고 싶다. 사상 유래없이 8년 연속 의정평가 1등을 한 국회의원으로서 보고 듣고 배운 세상이 얼마나 많겠는가? 모두 고스란히 토해놓길 바랄 뿐이다. 원래 ‘장총찬’의 이름은 ‘권총찬’이었던 것으로 안다. 군부독재시절에 태어난 소설의 운명은 제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했다. 이제 권총찬이 부활해서 오늘날의 부조리를 파헤쳐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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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Dog 굿독 - '보'와 함께한 아름다운 날들
애너 퀸들런 지음, 이은선 옮김 / 갈대상자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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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의 가족으로 살다 돌아간 반려견의 이야기 

  현관문을 나서기 전 난 아침의 기분에 따라 몇 개의 향수 중에서 하나를 골라 손목에 뿌린다. “칙~치잇” 양 손목을 비비고 귀 뒤 언저리에 톡톡 갖다 대면서 세상을 나설 준비를 마친다. 내 흥에 맞는 향수를 뿌리고 나면 난 검은 먹구름이 잔뜩낀 날 이거나, 후두둑 비가 오거나,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빛이 쏟아지는 맑은 날이거나 하늘만 아는 날씨에 기분이 좌우되지 않는다. 오히려 기분좋았던 그날의 느낌을 온전히 기억하려 스스로 향수를 찾는 경우도 있으니까. 내 기분은 내가 만든다. 밖을 나서기 전 내가 향수를 뿌리는 이유는 내가 만드는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서다. 나름의 아로마 테라피Aromatherapy, 향기치료인 셈이다. 

  독립해서 혼자 지내다 가족들이 사는 집으로 들어오면서 느끼게 된 것은 ‘환대’였다. 현관문을 열고 “다녀왔습니다”를 외쳤을 때, 누군가 나의 귀환을 반갑게 맞아주는 것. 어떤 하루를 보냈던 무사히 돌아온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뻐해주는 이가 있다는 것은 참 따뜻하고 행복한 일이다. 독립의 장점이 자유롭고, 조용함이라면 본가와 결합한 장점은 마음이 따뜻해진다는 것이다. 난 따뜻한 구속과 외로운 자유를 맞바꾼 것이다. 날 반겨주는 이들 중에서 현관문을 열면 탁탁탁 바닥이 아픈 줄도 모르고 꼬리를 치며 앉아있는 여섯 살난 시츄종 찌비는 단연 으뜸이다. 왕방울만한 촉촉한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고 “어유~ 우리 찌비가 오빠를 기다렸어?”하고 얼루려고 하면 배를 네 다리를 하늘을 향해 배를 뒤집는다. 꼬리는 여전히 부채꼴로 흔들면서. 네 발 달린 이녀석은 내 가족이다. 그런 녀석의 모습을 보면 바깥의 시름과 피로는 잠시 날아가 버린다. 이건 필경 애견 심리치료다. 

  난 반려동물의 의미를 수의사인 그녀가 어제 말해주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아니 정반대의 개념으로 알고 있었다는 표현이 어울릴지도 모른다. 반려동물의 ‘반려’를 회사에 사표를 냈는데, 돌려받을 때 쓰는 ‘반려’와 같다고 보고 ‘유기견’의 다른 표현으로 알고 있었다. “바보야, 그건 애완견이라는 단어보다 더 격상해서 부르는 표현이야. 배우자를 동반자, 혹은 반려자라고 부르는 것처럼 반려동물이란 가족에 준하는 평생 나와 함께 할 동물을 말하는 거라고.” 그동안 반려동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측은지심’이 들었던 순간들이 부끄러워졌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여섯 살난 시츄종 ‘찌비’는 내 반려동물이자, 심리치료사다.

사랑스런 반려동물은 이 시대를 사는 도시인들의 외로움을 채워주는 가족이나 다름없다. 최근 선진국을 중심으로 반려동물을 통한 애견 심리치료를 통해 사람과 미처 나누지 못한 교감을 동물과 나누려 하고 있다. 그 중에서 ‘평생 아부를 떨어야 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동물’이라는 개는 외로운 도시민들의 좋은 친구이자 반려자가 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어울려 사귀지 말라.

미운 사람과도 어울려 사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하는 것은 고통,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보는 것 또한 고통이기에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일부러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은 괴로운 일이기에

사랑도 미움도 없는 사람은 그 얽매임이 없다.

 

사랑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고

사랑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사라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기에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법구경 16장- ‘쾌락의 장’ 중에서)



 

  이쯤에서 독자들은 반려동물을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법구경을 운운하는가 의문이 들테다. 그렇다. 난 오늘, 반려동물과의 이별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피로 맺어진 가족을 떠나 보내는 슬픔이야 지극히 자연적이고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지만, 가족과 같이 생각한 반려동물을 떠나 보냄은 처음 입양하면서 ‘식구로 여길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것이어서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 슬픔’을 당하는 것이 싫어 반려동물을 들이지 않는 경우가 꽤 많다. ‘녀석이 없고 나면 그 허전함과 괴로움을 가족 모두 감당할 수 있을까’ 나 역시 생체나이로 치면 나보다 더 늙었고, 앞으로 더 빨리 늙어버릴 녀석을 보면 그 걱정이 앞설 때가 요즘 들어 많아진다. 책 <굿독Good Dog - ‘보’와 함께한 아름다운 날들>을 읽은 이유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명칼럼니스트인 애너 퀸들런Anna Quindlen 의 반려동물이었던 ‘보’를 떠나보내는 이야기다. 원제목은 Good Dog Stay다.



 

   이 책에는 ‘보’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성격이 어떻고, 얼마나 먹으며 어느 만큼 잘 노는지 말하지 않는다.‘아기를 키우는 엄마와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가족은 다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있듯 그런 기술들은 아이가 크고, 반려동물이 자라면서 펼치는 에피소드를 모두 제 3자적 입장에서 나름의 해석이 뭍어난 것이 아니던가? 그런 말로 한 권을 채우기란 무리가 있고 의미도 없다. 또 그것을 듣고 읽기는 고역스러운 일이다. 어차피 화자의 소설일 테니까. 저자는 가족들의 삶 속에 존재했던 ‘보’를 큰 숨으로 읽어야 할 한 편의 에세이형식으로 그려냈다. 그리고 ‘보’일 수 있고, ‘찌비’일 수 있고,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아무개일 수 있는 애견들의 사진을 중간마다 넣었다. 재미있는 대목에서는 그 사진 때문에 더 재미있고, 가슴 아프게 슬픈 대목에서는 그 사진 때문에 더 슬퍼진다. 다양한 표정들, 모습들. 이 책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조연이었다.

 



 

  
   퓰리처상 수상자답게 애너 퀸들런의 문체 역시 뛰어나다. 그녀가 말하는 가족의 이야기 속 한 켠에는 ‘보’가 함께 있었고, 보가 움직이는 행동반경엔 가족들의 사랑이 뭍어났다. 내 부모 내 형제를 떠나보냄이 ‘절망‘이라면, 반려동물을 보내는 마음은 ‘깊고 깊은 슬픔’처럼 느껴진다. 내 생애보다 앞서갈 것을 알면서도 반려동물을 키우는 마음은 어쩌면 그만큼 ‘버틸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녀는 ‘보’를 지켜보며 부모된 자신과 생각했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개의 역할은 어떻게 보면 엄마, 아빠의 역할과 비슷하다. 뭘 해주는 게 아니라 있어주는 것, 어떤 행동을 하는 게 아니라 존재해 주는 것이 부모의 할 일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평소에는 없는 취급을 하다가 힘들 때나 무서울 때, 그리고 가끔은 행복할 때 찾는 주춧돌이자 배경이고 풍경이다.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 개, 집은 마음 내킬 때 언제든지 떠났다가 다시 찾고 또 다시 떠날 수 있는 존재이다.” (30-31 쪽)



   한숨을 내리 쉬던 어느 날,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니 ‘찌비’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한없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사랑스런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그래, 나도 어쩔 수 없는 거짓말쟁이다). 그 눈에 위안을 얻는다. 쓰다듬는 녀석의 털에 따뜻함을 위로 받고, 어깨를 두드리는 대신 팔뚝을 핥아주면서(염분 흡수를 위한 행위라고는 하지만) 날 다독였다. 어떤 날은 단 둘이서 오랜 시간 동안 멍하니 쳐다본 적도 있고, 어느 날 밤은 녀석에게 고민을 털어놓은 적도 있다. 가끔이지만 이럴 때는 ‘키운다’기 보다 ‘보호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녀석도 살아온 시간만큼 지나면 떠날 것이다. 난 대충의 시간을 알지만, 녀석은 제 온몸에 있는 감각을 통해 밥을 먹어야 할 때와 ‘제 가족’이 와야 할 시간을 알고 문앞을 서성이고, 창문 밖을 바라본다. 지금 이 순간 난 녀석이 떠날 어렴풋한 미래의 시간을 걱정하지만, 녀석은 오늘 제 가족이 들어와야 할 시간을 알고 편하게 잠들어 있다. 해가 넘어가 저녁이 되고 밤이 되면 어김없이 현관 앞에서, 창가에서 가족을 기다릴 것이다. 찌비는 오늘을 충실하게 살고 있다. 아무생각 없이 사는 듯한 녀석은 오늘을 잘 살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내게 그것을 알려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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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 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
최규석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국민의 온도는 99℃다 ! 
 

  최규석 작가의 책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를 만나는데 주저함은 필요 없다. 오히려 이번엔 또 무슨 이야기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가? 호기심만 증폭되었다. 만화가 최규석을 알게 된 것은 사실 오래되지 않는다. 지난 해 공룡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http://blog.daum.net/tobfreeman/6657352)를 접했는데, 귀여운 아기공룡둘 리가 성인이 되어 대한민국 사회에서 서민층으로 살아간다는 설정에 심한 문화적 충격과 함께 최규석이라는 놀라운 인물을 확인하면서 한국만화의 진일보를 예감하게 되었고, 대한민국 원주민(http://blog.daum.net/tobfreeman/6971645)을 보면서 그의 따뜻한 시선은 소외받고 억압받는 ‘우리’에 머물고, 날카로운 펜촉은 우리 사회 속 깊숙한 곳에 메스를 들이대서 현실을 확인할 수 있게 펼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번에는 우리 시대의 영원한 화두이자 기본적이고 소중한 가치인 ‘민주주의’를 이야기 했다.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로부터 작품을 제안받아 지난 해 1월 인터넷과 전국의 학교에 보급되었던 것을 시민교육쎈터의 이한 선생이 꾸민 ‘그래서 어쩌라고’[청소년을 위한 민주주의 강의 교안]을 덧붙여 책으로 만들어졌다. 반가운 그림, 진중한 내용 <100℃-뜨거운 기억, 6월민주항쟁>이다.    


   출간을 거듭할수록 최규석은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과감해진 선과 거친 붓터치, 생생한 등장인물들의 표정들은 굳이 대사 없이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무엇보다 함축적인 주인공들의 대사는 소설의 그것을 능가한다. 그림만 그릴 줄 아는 것이 아니라 長考끝의 이야기도 덧붙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실제로 6. 10 항쟁을 겪지 못한 세대라는 것. 작가는 독자들에게 알리기에 앞서 책을 통해 6. 10의 의미를 새로 안 것이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배워야 하는 이유이고, 가르치면서 또 배운다는 것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래서 공부는 평생하나보다. 책을 보면서(읽으면서?) 내내 내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영호의 형 권영진이었다. 그가 내 모습을 닮아서였다. ‘책상을 탁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치사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발표를 보면서 망자亡者를 위해 술 한 잔 올리는 비즈니스맨들에게 어느 대학생이 자본의 단물이나 빨고 있다가 가끔 눈물 흘린다며 위선자 보듯 하자 그는 말했다. 

“학생들 보기에 우리가 위선자나 변절자로 보이겠죠. 그래서, 변절자는 같이 울면 안돼요? 지금 싸우고 있는 사람들만 슬퍼하고 분노할 자격이 있는 건가요? 그렇게 해서 학생들이 얻는 게 도덕적 우월감 말고 뭐가 있어요? 같이 슬퍼하는 사람들까지 밀쳐내면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네요. 주제넘은 소리 미안합니다. 뭐, 그래도 내가 번 돈으로 학교 다니던 동생이 지금 빵살이 하고 있으니...너무 고깝게 듣진 마세요.” (90 쪽)



 



 


 

  새내기 시절 나 또한 영호와 같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지방의 한 고등학교에서 상경을 위해 밤새워 공부하며 꿈꾸던 대학의 낭만은 없었다. 붉은 글씨의 플랜카드와 대자보가 하늘과 벽을 메우고, 곳곳에서 시위를 준비하고 댓거리(학습)를 모집했다. 위악.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캠퍼스의 광경이 두려웠고, 동료들의 투쟁을 위한 가열찬 노력들이 정말 무서웠다. 전경에 학원에 침입하는 것도, 사복경찰이 도서관에서 수배중인 학생을 연행해 가는 것도 모두가 붉은 띠를 두르고 시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미팅도 하고, 짧은 연애도 했지만, 그것은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자고 외치는 동료들의 무리에서 벗어난 일탈이었고, 미팅에 참석한 모두는 뒷통수가 뜨뜻함을 견디며 애써 웃음지은 일탈자들이었다. 내가 데모에 동참했다면 동기들이 나를 끌고 갔기 때문이고, 댓거리에 함께 했다면 강의가 휴강이 되어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2학기가 한창인 가을, 시위중인 동기녀석들의 동부서 연행은 내게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을 다시 보는 전환점이 되었다. 암으로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둔 촌뜨기 영수가, 형사의 아들인 뺀질이 맹구가 구치소에 갇혔다. 이 일로 어머니는 졸도를 하시고 악화되셨고, 아버지는 형사직을 그만 두셨다. 나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 그들은 왜 그 바보같은 짓(?)을 했을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영치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일호프를 준비하고 석방을 위한 집회를 만들고 참여하면서 그들이 그토록 노력하는 이유와 얻어내려는 가치는 만인이 사람답게 살 권리, 영혼이 자유로워질 수 있는 권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들의 참여는 커터칼의 흠집이 될망정 독재라는 거목에 몸으로 부딪혀서 쓰러뜨리려 했던 것이다.

 




  책을 읽고 나서 리뷰쓰기를 한참을 망설였다. 책을 접하기 전까지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 정점에서 대학을 다녔던 사람이면서도 여전히 6. 10 항쟁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난 이 책 주인공 영호의 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는 영호 아버지처럼 빨갱이를 끔찍이 싫어하는 호랑이 아부지였다. 다시 말해 호랭이 보수 아버지의 장남이다. 실망스러운 성적으로 ‘민족’구호를 단 변변찮은 대학을 다니는 아들을 아버지는 영 마득찮아 하셨다. 그래서인지 조금이라도 늦게 귀가하면 ‘데모질 했냐?’고 추궁을 당했고, 그런 짓(?)하다 걸려서 경찰서라도 잡혀가면 법원에 가기에 앞서 아버지한테 ‘즉결심판’을 당할 거라고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어야 했다. 6.10 항쟁을 모르는 호랑이 보수주의 아버지의 장남 아들이었기에, 그래서 애써 그들을 외면하고 살았기에, 이 책의 리뷰쓰기를 고민했다. 가타부타 말할 자격이나 있나 싶어서였다. 21 년 전의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광장을 나가 있어야 할 내가 사무실의 한 자리를 차고 앉아 이렇게 글로써 주저리 함도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 컴퓨터 앞에 앉은 이유는 공교롭게도 6. 10 항쟁 21돌을 맞는 오늘을 기념하고 싶었고, 또한 ‘학원 민주화’란 단어가 생각나서다. 6. 10 항쟁으로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진정한 민주화를 이룬 후 386의 대학생들은 시선을 돌려 학원 민주화에 뛰어들었다 대학교는 또 하나의 작은 사회. 독재 군사 정부로부터 ‘민주화’를 얻어냈다면, 대학으로부터는 ‘학원민주화’를 위해 다시 뭉친 것이다. 학생들의 불합리한 대학등록금 인상에 반대하고, 저급한 학생복지 정책을 개선하는데 앞장섰다. 대학의 주인은 총장이나 이사장이 아닌 ‘학생’이라며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고민하고 힘을 합해 하나 둘씩 개선해 나갔다. 오늘날의 대학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금쪽같은 학비 내고도 수업을 거부하면서 얻어낸 선배들의 투쟁 때문이다. 세계적인 대학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대학의 주인인 학생들의 고민과 참여가 있어 한 발씩 나아가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일어나는 ‘촛불집회’는 ‘학원민주화’를 생각나게 한다. 우리는 지금 독재로부터 투쟁으로 얻어낸 소중한 국민된 자유와 권리를 보다 더 향유할 수 있도록 다듬고자 국민들이 다시 뭉치고 있다. 오늘의 뭉침은 과거‘독재로부터의 민주주의 탈환’이 아니라 ‘국민 민주주의로의 회복’으로 발전된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국민들이 모여서 집회를 하는 이유를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면 너무나 잘 알기에 그것을 두려워 하는지도 모른다. 국민과 함께 해야 할 정부가 진실을 알기에 앞서 국민이 모여 있는 사실을 두려워해 그것을 차단하느라 전전긍긍 하고 있다. 듣고자 하는 열린 귀가 없고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들으려 하지 않고, 제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는데 노력하는데 애쓰느라 국민들의 목소리에는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상황을 두고 ‘소통의 부재’라 하는 것이다. 듣지를 못하니 말하지 못하고, 모여 있는 사실이 두려워 집회를 차단하고, 강제해산하는데 연연해 하고 있다. 이는 현 정부가 그만큼 국민을 알지 못하는 반증이다. 정부는 이제라도 정당성을 무시한 위임 민주주의를 앞세울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 1조의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100℃가 되면 물이 끓는다. 지금 국민의 온도는 99℃다. 흰 색 백지 같은 순수한 가치인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끓을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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