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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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죽음을 앞두고 후회되는 한 가지가 뭔 줄 아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다 전해주지 못한 거라네!" 

  봄이 채움이라면 가을은 덜어냄이다. 비우고 또 비워 더 이상 비울 것이 없게 되는 날, 소리 없이 첫눈이 내린다. 마음이 비워지니 추워지는 것 같다. 비워지는 마음만큼 겉옷의 두께가 두꺼워진다. 겨울은 죽음이다. 모든 것이 생장을 멈추고 마지막을 고한다. 혹은 죽은 듯 웅크리고 이듬해를 기약한다. 그래서 눈 내린 신새벽처럼 고요하다. 죽음의 겨울보다 가을이 더 추운 것은 아직 살아있기 때문이다. 덜고, 비우고, 시들어감을 체감하며 목격하기 때문일 것이다. 매일 낮길이가 짧아지는 만큼 추위를 체감한다. 다가올 시듦과 죽음을 예감한다. 가을이 우울한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지난 밤 내리는 빗소리를 듣다가 뜬금없이 책장으로 섰다. 몇 해 전 읽은 책 한 권이 ‘잘 있는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이유가 왜인지는 알 수 없다. 성큼 다가온 가을이 내게 수작을 건 탓 일게다. 반갑게도 아래쪽 한 켠에 잘 있었다. ‘있구나’ 안심하며 책을 꺼냈다. 이 책을 읽던 몇 해 전 가을 꽤 많은 눈물을 훔치던 기억, 눈물을 닦으며 흣하고 웃었던 기억이 났다. 책을 읽던 그 때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엔 없다. 괴로움인지, 외로움인지, 그리움인지 알 수 없지만 드넓은 광야에 혼자 있던 느낌은 아직 남아 있다. 아마도 그 해 가을도 올 가을 처럼 비움을 체감했던가 보다. 알 수 없지만, 내가 비움의 덧없음을 탄식하던 그 때, 이 책은 ‘그 비움은 버림이 아니라 나눔’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책장을 펼쳤다. 제목은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 with Morrie>이다. 가을 빗소리가 책장 넘기는 소리에 젖어들었다. 



 

    꽤 유명한 스포츠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던 사내 미치 앨봄은 어느 날 한 TV 프로그램에서 낯익은 모습의 노인의 인터뷰를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코치(그는 교수를 그렇게 불렀다)인 모리 슈워츠Morrie Schwarts 였다. 모리 코치는 근위축성측삭경화증, 루게릭병으로 잘 알려진 병에 걸려있었다. TV를 통해 본 코치의 얼굴은 마지막으로 본 지 16년 만이었다. 대학시절 많은 남다른 가르침과 사랑을 전해줬던 코치와 16년 동안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낸 것이다. 미치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리 교수님, 저 미치 앨봄입니다. 1970년대에 선생님 제자였습니다. 아마 기억 못하시겠지만요...”

그런데 대뜸 하시는 말씀이,“왜 코치라고 부르지 않아, 인석아?” 

  한 통의  전화로 미치Mitch Albom교수를 다시 만나게 되고, 그 후 매 주 화요일마다 투병중인 모리교수를 찾게 되었다. 모두 열네 번에 걸친 ‘화요일의 만남’은 모리 교수의 ‘마지막 강의’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교수는 화요일마다 늙은 제자에게 사랑, 일, 공동체사회, 가족이 나이든다는 것, 용서나 후회의 감정, 결혼과 같은 인생에 대한 사려 깊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한편 미치는 녹음기에 그의 강의를 담으며 모리교수의 괴로운 투병을 함께 했다. 

 난 세 걸음쯤 물러나 그들이 함께한 이야기를 지켜봤다. 스산한 가을비 창가에 혼자 앉아 있었지만 이 책을 펴면서 세 명이 되었다. 세 명의 온기는 따뜻했다. 잦은 기침과 불편한 듯 답답한 목소리을 듣는 대목에 절로 내가 헛기침을 하는 것을 빼고는 평온한 순간이었다.

  루게릭 병이란게 참으로 고약한 병이다. 아래에서 위로 차츰 굳어져서 석화石化가 되는 병이다. 얄궃은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신체임에도 고통은 계속된다는 점이다. 그 고통을 잠시 생각해 본다. 채무를 갚지 않는다고 신체를 묶은 채로 드럼통에 넣어 잘 개어진 콘크리트를 붇는 어느 깡패영화처럼 온 몸이 돌덩이가 되어간다면, 게다가 덜어낼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된다면 어떨까. 어느 날 하반신이 마비되어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고, 점차 위로 올라와 손가락까지 움직이지 못하더니 목도 움직이지 못한다면...턱을 움직이지 못해 저작詛嚼을 못하고, 혀도 움직일 수 없다고 그랬던가. 마지막엔 눈과 머리만 깨어난 산송장이 된다고 했던가. 얼마 전 본 영화 <내 사랑 내 곁에>에서 젊은 배우의 연기를 생각하니 나이 76세의 모리 교수의 병상은 차마 상상하기 힘들다.

  온 몸이 돌덩이가 될 것을 알고, 결국 죽을 것을 아는 그가 제자 미치를 통해 하고자 했던 말은 ‘사람다운 인생의 의미’이다. 대공황기에 잠깐 경험한 공장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모습을 보고서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깨달음으로 가르침의 길을 택한 그이기도 하지만, “땅 속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걸로 끝이야.”라는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가져갈 것도 없는 죽음 앞에서 무슨 사념邪念이 있겠는가. 경청해야 할 이유는 곧 흙으로 되돌아갈 가장 순수한 순간의 인간의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리 코치는 우리 인생의 덧없는 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의미 없는 생활을 하느라 바삐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기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느라 분주할 때조차도 반은 자고 있는 것 같다구. 그것은 그들이 엉뚱한 것을 쫓고 있기 때문이지. 자기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헌신해야 하네.” 77 쪽

또한 사람이라면 ‘오늘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이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봄직 하지만 그렇지 못한데, 그 이유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했다.   

   “미치, 우리의 문화는 죽음이 임박할 때까지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놔두지 않네. 우리는 이기적인 것들에 휩싸여 살고 있어. 경력이라든가 가족, 주택 융자금을 넣을 돈은 충분한다, 새 차를 살 수 있는가, 고장난 난방 장치를 수리할 돈은 있는가 등등. 우린 그냥 생활을 지속시키기 위해 수만 가지 사소한 일들에 휩싸여 살아. 그래서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우리의 삶을 관조하며, ‘이게 다인가? 이게 내가 원하는 것인가? 뭔가 빠진 건 없나?’ 하고 돌아보는 습관을 갖지 못하지.” 

선생님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누군가 그런 방향으로 이끌어줄 사람이 필요하네. 혼자선 그런 생각을 하며 살기는 힘든 법이거든.” 103 쪽

  바로 우리 모두 평생의 스승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마치 곧 이 세상에 없을 그가 자신이 살아온 세상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다 앞선 삶을 산 이들의 도움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노인老人. 그들은 우리 생의 스승이요, ‘살아있는 도서관’인 셈이다. 그는 죽는 법을 배우면 사는 법도 배우게 된다고 말했다. 다른 이의 죽음을 확인하면서도 자신이 당장 죽을 지도 모른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모두 잠든 채 걸어다니는 것처럼 살기 때문이다. 해야 한다고 생각되는 일을 기계적으로 하고 살다는 것은 반쯤 졸면서 사는 것이다. 모리 코치는 어떻게 죽어야 좋을지 배우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배운다고 했다. 자기가 언제쯤인가 죽게 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매사가 아주 다르게 보인다면서.

 그에게 가족관은 곧 ‘사랑’이다. 병들어 죽음을 체험하는 그에겐 그 무엇보다 특별한 것이었다. 그는 가족의 소중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야기한 어떤 주제보다도 ‘가족’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네. 사실, 가족이 없다면 사람들이 딛고 설 바탕이, 안전한 버팀대가 없겠지. 병이 난 이후 그 점이 더 분명해졌네. 가족의 뒷받침과 사랑과 애정과 염려가 없으면, 많은 걸 가졌다고 할 수 없겠지. 사랑이 가장 중요하네. 위대한 시인 오든이 말했듯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네. (중략) 가족이 지니는 의미는 그냥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지켜봐주는 누군가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려주는 것이라네.

  누군가 ‘애인은 내가 보낸 하루를 증언해주는 사람을 갖는 것이고, 배우자는 내가 마지막 죽는 순간의 증인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누군가 나를 사랑의 눈으로 지켜본다 함은 따뜻함이다. 더 이상 외롭지 않음이다. 가족은 배우자가 목격하지 못한 그 전 시간까지도 증인이 되어주는 사람들인 셈이다. 그리고 내가 없고 난 다음에도 그 시간을 증언해 줄 사람인 것이다. 그들이 날 부르면 난 살아나는 셈이고, 그들이 있는 한 난 죽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또한 자식을 갖는 것 역시 ’다음 생에서도 갖고 싶은 다시 없을 소중한 경험‘이라고 덧붙였다. 

‘나이 먹는 것’, 즉 늙어감에 대한 생각 또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다가온다. 그는 ‘젊음은 차라리 싫다’며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은 젊음을 강조하지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잘 들어보게. 젊다는 것이 얼마나 처참할 수 있는지 난 잘 알아. 그러니 젊다는 게 대단히 멋지다고는 말하지 말게. 젊은이들은 갈등과 고민과 부족한 느낌에 늘 시달리고, 인생이 비참하다며 나를 찾아오곤 한다네. 너무 괴로워서 자살하고 싶다면서...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런 비참함을 겪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둔하기까지 하지. 인생에 대해 이해하지도 못하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데 누가 매일 살아가고 싶겠나? 이 향수를 사면 아름다워진다거나 이 청바지를 사면 섹시해진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조작해대는데 바보같이 그걸 믿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또 어디 있어.” 

“늙어가는 것이 두렵지 않으셨어요?”

“미치, 난 나이 드는 것을 껴안는다네.” (중략)

“선생님이 어떻게 더 젊고 건강한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으시는지 궁금해요.”

그는 눈을 감았다.

  “아니, 부러워한다네.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 헬스클럽에 가거나 수영을 하러 갈 수 있는 게 부럽지. 혹은 춤을 추러 가거나 하는 것이. 그래, 춤추러 갈 수 있는 것이 가장 부러워. 하지만 부러운 마음이 솟아오르면, 난 그것을 그대로 느낀 다음 놔버린다네. 내가 벗어나기에 대해 말했던 걸 기억하지? 놔버리는 거야.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 ‘그건 부러운 마음이야. 이젠 이런 마음에서 벗어나야겠다.’ 그런 다음 거기서 걸어 나오는 거지.”

(중략)

  “살면서 현재 자신의 인생에서 무엇이 좋고 진실하며 아름다운지 발견해야 하네. 뒤돌아보면 경쟁심만 생기지. 한데 나이는 경쟁할 만한 문제가 아니거든. 사실, 내 안에는 모든 나이가 다 있네. 난 3살이기도 하고, 5살이기도 하고, 37살이기도 하고, 50살 이기도 해. 그 세월들을 다 거쳐왔으니까. 그때가 어떤지 알지. 어린애가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어린애인 게 즐거워. 또 현명한 노인이 되는 것이 적절할 때는 현명한 어른인 것이 기쁘네. 어떤 나이든 될 수 잇다는 것을 생각해보라구! 지금 이 나이에 이르기까지 모든 나이가 다 내 안에 있어. 이해가 되나? 이런데 자네가 있는 그 자리가 어떻게 부러울 수 있겠나. 내가 다 거쳐온 시절인데?” 166-171 쪽 요약

  그렇다. 젊은이를 부러워함은 부질없다. 젊은 시절을 거쳐온 지금이 있기 때문이다. 초로의 중년이 탱탱하고 싱그러운 외모를 쫓는다면 세월을 잊고 싶은 것일 뿐, 추할 뿐이다. 부러워해야 할 건 내가 헛되이 보낸 젊은 시절의 시간이다. 하지만 모리 코치의 말대로 그 젊음은 내가 다 거쳐온 시절이 아니던가. 후회가 되거든 지금 하면 되는 일이다. 젊은 시절 공부를 못해 그들이 부럽다면 이제라도 공부를 하면 될 것이다. 여행이 꿈이었다면 그 시절의 마음으로 지금 여행을 떠나고, 뜨거운 사랑이 부럽다면 지금의 동반자와 다시 사랑을 시작하면 된다. 심지어 나이트클럽을 이제 한 번 가본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나의 이런 변화를 두고 주위가 추하다 말하면 그들이 아직 모른 것이고, 젊은이들이 추태라 흉보면 ‘너희들이 아직 나이듦을 모르는 것’이다. 내가 보낸 시절을 마냥 부러워하는 것이야 말로 추한 것이고 추태가 아닐까. 사그러짐을 체감하는 이 가을을 무색하게 하는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마하트마 간디는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죽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잠에서 깨면, 나는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다. 이 아포리즘은 간디는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하루’에 대해서 말한 것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난 모리 교수와 함께 하면서 이 말을 하루를 ‘삶과 죽음의 가까운 거리’로 생각하고 싶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마음껏 사랑하는 법, 그리고 용서하는 법을 알려준다. 무엇보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통을 감수하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기꺼이 나누는 모리를 보면서 인간에게 사람으로 사는 가장 숭고한 마음은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그 사랑은 다름 아닌 ‘내가 줄 수 있는 것을 타인에게 주는 것'이다.  

  이 책은 지난 해 췌장암에 걸린 중년의 교수가 가족과 학생들을 앉혀두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 감동적인 책 <마지막 강의>를 생각나게 한다. ‘다가오는 매일의 ’오늘‘을 미련 없이, 후회 없이 보내야 한다’는 그의 말이 시들어가는 모리 코치의 목소리와 오버랩되었다. 그가 생을 마감하면서 던진 ‘타인에게 나누는 삶’이라는 화두는 이것이다.

'마음을 나눌 사람을 찾았나?'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 하고 있나?'

'마음은 평화로운가?'

'최대한 인간답게 살려고 애쓰고 있나?'

  이유없는 상실감을 느끼게 하는 가을에 모리 코치는 큰 위안이 되었고, 가르침이 되었다. 내년 가을에도 그런 기분이 든다면 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펼 것이다. 이 책은 내게 있어 ‘가을에 만나야 할 스승의 강연집’이다. 내가 느끼는 가을을 경험하고 있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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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hug! 아프리카
김영희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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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쌀집 아저씨, 아프리카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다!

 

  대한민국에서 몸과 맘이 가장 바빴던 사내가 짐을 싸서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가 몸과 맘을 바쁘게 했던 이유는 한가로운 주말 저녁 국민의 웃음과 감동을 책임졌었기 때문이다. 김영희라는 이름보다는 ‘쌀집아저씨’로 더 잘 알려진 이 사내의 사연 깊은 아프리카 여행이야기는 <헉! 아프리카Hug Africa>에 고스란히 담겼다.

  내가 이 책을 든 단 한 가지 이유는 ‘예능에 능한 사내가 예능이 없는 아프리카로 떠났다’는 점이었다. 왜냐고 묻고 싶었다. 그 답을 알 방법은 책을 드는 수 밖에 없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양심냉장고’를 비롯 ‘칭찬합시다’, ‘21세기 위원회’,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느낌표!’ 등 국내에 많은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는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생각을 넓혔던 그에게 어느 날 ‘아이디어’가 고갈됨을 느끼게 된다.

 그에게 봉착한 문제는 다름 아닌 그가 성공으로 이끌었던 프로그램들에 있었다. 단순히 흥미를 던져주는 오락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의 의견을 한데 모으는 사회성’이 권력화勸力化 되면서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혀 몸과 마음이 바닥을 치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

“얘야, 너는 인생이 뭐라고 생각하니?”



 

   이 질문을 화두 삼아 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는 왜 아프리카로 떠났을까? 저자는 ‘알 수 없는 이끌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이 싫어진 때문은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는 프로그램을 통해 목젖이 드러난 웃음 뒤에 페이소스같은 여운을 남겨 사람이 변하고, 사회가 변하는 계기를 삼고자 했다. 하지만 그 반향과 더불어 사람들의 뜻이 변하고, 움직임이 변하는 큰 흐름 뒤에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만나게 되었다. 자유로운 생각으로 사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생각을 저지당하고, 조정당한다면 더 이상 ‘온전히’ 저 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는 사람이 싫어졌을 것이다. 아니 사람이 뭉쳐사는 ‘시스템’이라는 문명에 학을 뗐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정반대되는 자연의 대륙 아프리카로 떠났을 것이다. 갑자기 그가 떠난 이유를 짐작함은 참으로 실없다는 생각도 들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것을 짐작하게 했다. 이 책에서 그는 ‘광활한 자연’과 ‘순수한 사람’에 주목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질리도록 만끽하고 돌아왔음을 알게 된다.

  책 읽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다. 우선 기존의 여행책에는 찾아볼 수 없는 아프리카 대륙을 말한다는 점이 첫 번째 이유이고, 책의 주인공이 생각 많고 재미있는 아이디어맨이라는 점이 두 번째다. 세 번째는 프로페셔널하지 않은 사진이고 마지막 네 번째는 글만큼이나 재미있고 상상력 높은 그림들이다. 책 한 권 전부가 몇 시간짜리 오락 다큐멘터리였다. 

 이야기의 절반은 그가 본 사람들로부터 나온다. 문명인을 웃기는 조금 더 문명인 셈인 쌀집 아저씨가 자연의 품으로 뛰어들어 그 속에 사는 자연인을 만나니 온통 신기한 것 투성이다. 검은 대륙의 검은 사람들도 신기하다. 특유의 냄새와 낯선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들에게 가졌던 편견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에피소드들이 이 종종 눈에 띈다. 기다림에 익숙하고, 교통수단보다는 도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서 ‘시간의 유한함’은 찾아볼 길이 없다. 그런 그들을 본 저자는 처음 ‘몇 푼 안되는 차비가 없는 그들’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들이 생에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몸으로 느끼며(심지어 맨발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사람이 본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라면 동물animal은 움직이는animate 생물creature여야 정상인 것이다. 오히려 시계라는 인조물에 갇혀 24시간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조급해지는 문명인이 실은 사람이 아닌 ‘쳇바퀴 속 다람쥐’였음을 알게 된다. 그는 말한다.   

  “문명은 더 이상 인간을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다. 

그러므로...인간은 걷지 않는 한 더 이상 동물이 아니다.“ 34 쪽 

  재미있는 것은 그는 ‘문명화 덜된 자연인’에게서 느꼈던 연민을 느끼는 반면, ‘너무나 문명인스러운 자연인’에게는 지나친 반감을 갖더라는 것이다. 대자연의 품속에 있는 사람들이 문명인이 됨을 이율배반적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가 아프리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여행책자 <론리 플레닛>이다. 김영희는 처음 책이 말하는 바를 곧이곧대로 믿었다. 가지 말라는 곳은 가지 않았고, 하지 말라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정말 그럴까?’ 아니었다. 검은 피부에 검붉은 눈자위를 가진 무서운 그들이 사실은 웃을 때 드러나는 ‘흰 이’만큼 순수했다. 그는 동부 아프리카 최대의 슬럼, 키베라에 들어가 돈 한 푼 빼앗기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준 풀 카트를 함께 씹어 먹고 악수하고, 포옹하며, 작별 인사를 하고 무사히 돌아왔다. 그의 말을 듣고 따라할 건 아닌 듯. 쌀집 아저씨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경계할 만큼의 외모와 풍채를 지녔기 때문이다. 한 날은 칼을 든 강도를 두 번이나 만나는 데 욕을 해대는 그의 목소리와 표정으로 물리치는 대목을 보면 아무나 따라할 건 아니지 싶다.

  이야기의 나머지 절반은 자연이다. 십여 시간을 버스로 달려도 지평선인 대지, 검붉은 노을, 끝없이 쏟아지는 빅토리아 폭포, 위로 흐르는 나일강, 바다 같은 사막까지... 가는 곳곳 마다 자연은 다른 모습으로 그를 대했다. 김영희는 자연 속에 자신이 있음을 감탄한 것이 아니라 동시간대에 태고의 자연이 존재하고 있었음에 감탄했다. 또한 그 속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 감탄했다. 사람도 자연에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글 꼭지의 마지막엔 그가 느끼는 감상이 요약되었다. 글을 읽다보면 그 대목에 주목하게 된다. 꿈보다 해몽이라 했던가?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그만의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대목은 다분히 시적詩的이었다. 그는 아이디어맨이 확실했다.

  그는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인공이 가미되지 않은 살아있는 대륙의 자연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검은 피부의 사람들을 통해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느끼고 돌아왔다. 그 소감을 마지막 글 ‘나는 왜 아프리카에 왔을까? 에 대한 대답’편에 잘 드러냈다. 

  “아프리카 여행이 끝나가는 날, 쿠마시의 노천 시장에서 나는 그 답을 찾았다. 바글거리는 시커먼 그들에게서 나는 꿈틀거리는 생명을 보았다. 실아있다는 것! 마치 갓 건져 올린 생선이 펄떡이듯 아프리카의 사람들은 펄떡였다. 날것처럼 살아 있었다. 생명의 힘! 내가 살아온 곳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원초적 생명이 거기 있었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꿈틀거림이었다.

 그렇다! 바로 이것을 보기 위해 나는 그토록 먼 길을 달려와 지금 여기에 있다. 나는 내 안의 꿈틀거림을 느끼고 있었다. 나로 하여금 아프리카에 오도록 한 그 무엇이 그토록 나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 그것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이것이 바로 내가 아프리카에 온 이유였다! 살아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희망인거야! 살아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353 쪽

  아마도 그는 잃었던 소신所信을 얻어왔을 것이다. 자연自然이 스스로自 그렇듯然 존재하는 것이 자연인 것처럼 사람은 자신이 믿는 바대로 살아가는 것이 ‘단 하루’를 살아도 사람답게 사는 것임을 배웠을 것이다. 자신을 믿는다면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행동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꿈틀거리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신이 인간에게 준 생명력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를 통해 ‘살아감’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상상하지도 않았던 아프리카 대륙을 그를 쫓아 밟아보고 싶어졌다. 올해 다시 PD로서 브라운관으로 복귀한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이제 그가 연출한 프로그램을 보면 화면 뒤에 숨은 그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뒤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멋들어진 기행문이었다. 

P.S : 그가 ‘꿈틀거리며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는 이 책에서 시작했다. 쌀집 아저씨라는 인간, 멋진 동물animal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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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광고하다 -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박웅현의 창의성과 소통의 기술
박웅현, 강창래 지음 / 알마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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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史 哲, 광고 안에 너 있다! -  

광고짓는 사내 박웅현의 브레인 아나토미

  광고는 돈덩어리다. 광고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부터 한여름 시청앞 분수대에서 물이 솟아오르는 양만큼 100원 짜리 동전이 토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특히 광고를 TV 등 공중파에 태우려면 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야 할까? 9시 뉴스를 전후로 한 시청율이 가장 높은 골든 프라임 타임Golden Prime Time에는 일반적인 액면가를 넘어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줄을 서야 할 형편이라고 하니 감히 실제는 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한가지 소원은 30초 동안의 짧은 광고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제품을 알아볼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심정이겠지만 시청자이자 소비자인 우리의 입장은 기업과는 조금 다르다. 

  우선 기업의 광고가 TV 등 매체에 실리는 것을 발견하면 우선 처음 듣는 기업인 경우에는 ‘이 기업이 광고를 할 만큼 재무상태가 괜찮은가 보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새로운 제품을 만난다면 ‘이 기업이 쉬지 않고 계속 제품을 쏟아내고 있구나.’ 하고 판단한다. 제품의 광고가 채널마다 시간을 불문하고 꾸준히 나온다면 ‘제품을 알리려고 꽤나 많은 돈을 쏟는 것을 보니 이번 시즌은 이 제품에 목숨을 걸었나보다’하고 판단한다. 이 정도면 기업이 원하는 광고의 목적을 달성한 것인가? 하지만 소비자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현대 광고의 아버지라 불리는 데이비드 오길비는 광고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대해 “소비자는 바보가 아니다. 바로 당시의 아내가 소비자이다. 아내를 모욕하지 마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당신(광고집행자)의 가족들이 보지 않았으면 하는 광고는 절대 집행하지 마라.”고도 말했다. 기업이나 광고회사는 소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요즘 TV 광고의 진실이 어떻다 하는 정도는 ‘초등학생’ 소비자도 안다.

 먹는 광고를 찍는 동안 제품을 너무 많이 먹어서 광고를 찍은 모델은 평생 동안 자신이 광고에 출연한 음식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이 즐겨 쓰는 외국산 화장품으로 화장을 한 채 국산 화장품 광고를 찍는다는 것 쯤도 다 안다. 어디 그 뿐인가? 수억 원의 모델료를 지급한 광고의 제품가격에는 모델료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어 소비자가 제품을 구입하는 행동이 십시일반 모델료를 나누어 내준다는 것도 안다. 앙드레 김 패션쇼에 오르기만 하면 배우나 모델의 가치는 2-3 배나 뛰어서 그의 눈에 들기 위해 모델들이 안달을 낸다는 것도, 버라이어티에 나와 맛있게 먹고, 멋있게 입어야 그 배우가 광고제의를 받는다는 것도 안다. 

  한마디로 말해 오늘날의 소비자는 기업의 마케팅 지식이 너무나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어 기업이 바라는 TV나 매체의 마케팅 캠페인에 빠져들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이라도 차별되지 않으면 유치하게 ‘옛날 방식의 선전’을 한다고 바로 핀잔을 준다. 게다가 매일 노출되는 광고의 수가 무려 3,000여 개에 이르다 보니 소비자들은 ‘광고’를 소음 혹은 공해로 여기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TV에 광고하고 일간지에만 광고노출 시키는 게 최고야.”라고 말하던 전통적인 광고 방식으로는 ‘돈 낭비’일 뿐, 더 이상 예전의 효과를 보장할 수 없는 것이 요즘이다. 소비자가 인식하기에 제대로 어필하기 위해서 다른 방식, 소비자 한 명마다 파고들어갈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까다롭고 약아진 소비자들 때문에 그 만큼 기업들이 제품 팔아먹기 힘들어진 세상, 바로 오늘날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지만 몇 해 전부터 광고가 변하기 시작했다. 30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마치 본전이라도 뽑을 요량으로 듣는 이를 무시하고 제품과 기업 선전에 열을 올리는 광고 대신 소비자에게 ‘느낌’을 주는 광고가 나타나고 있다(하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광고는 전통적인 광고 방식 그대로다. 낮시간 동안 연이어 펼쳐지는 보험회사의 광고를 보고 있자면 없던 병도 생길 지경이다. 가입과 갱신에 대한 해설은 어찌나 말이 빠르던지 몇 년 째 반복해서 들어도 아직 다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 이들 광고가 주는 ‘느낌’이란 다양하다.  

 소비자에게 ‘나도 공감한다’고 말하는 광고가 있는가 하면, ‘이것이 당신의 모습이다‘고 말하기도 한다. 최근에 등장하는 ’감동을 주는 광고‘는 공익광고협의회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책 한 권, 영화 한 편에서도 얻지 못하는 ’그윽하고 여운이 오래가는 감동‘을 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광고를 만나면 우선 그런 ’광고를 낸 기업‘에 관심이 쏠린다. 그리고 ’정말 당신(기업)이 우리(소비자)에게 이런 마음을 갖고 있어?’하고 되묻는다. 기업이나 제품에 대한 선전은 하나도 없이 그 많은 돈을 들여 이런 광고를 내 보낸다니... 신통한 기분이 든다. 이 또한 작은 감동이다. 그 다음은 이런 광고를 만든 사람들‘이 궁금해진다. ’도대체 어떤 머리에서 비롯된 생각이길래 이런 광고를 낼 수 있단 말인가?‘ 궁금해진다. 어느 때는 광고를 내보내는 기업보다 광고회사가 궁금해질 때가 있을 정도다. 그들이 누굴까? 그 중 한 사람을 찾아냈다. 



 

    책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는 TBWA KOREA 라고 하는 광고회사의 ECD, 쉽게 말해 광고를 만드는 총책임자인 박웅현의 이야기다. 고백하자면 이 책을 알기 전에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책을 펴고 저자 소개를 살피니 몇 해 전부터 가슴을 훈훈하게 만드는 TV광고는 거의 이 사람의 손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이한 점은 저자가 '상당히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광고쟁이(그 바닥에서 그렇게 부른다)라고 하면 끼 많고 똑똑하고 감각적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장市場으로 알고 있는데, 그 시장에서 거의 Top이라고 불리는 이가 ‘나는 책을 통해 광고한다’고 말하니 흥미로웠다. 특히 '인문학'에 깊은 조예가 있다는 그가 궁금해졌다.  

  책의 전개방식도 특별하다. 주인공은 박웅현인데 이 사람은 인터뷰이(인터뷰 당하는 사람)이고, 인터뷰어는 단행본 편집계의 고수 강창래씨가 맡았다. 최근 공지영과 지승호가 공저한 ‘괜찮다 다 괜찮다’를 필두로 ‘인터뷰 형식의 도서’로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알마의 인터뷰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 중에 처음 읽는 셈인데, 이런 식의 구성이 신선하고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책을 든 이유는 TBWA KOREA 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광고회사는 <가로수 길이 뭔데 난리야?>, <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등 몇 권의 책을 낸 바 있는데, 주제가 신선해 공교롭게 모두 읽었고, ‘좋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내가 읽은 두 권 모두 여느 책과는 다르게 파격적이고 멋들어진 책이었다. 잡지를 닮은 듯 EBS 방송국이 만들어낸 <지식 - e 시리즈>와도 닮았다. 편하게 생각하면 '블로그를 종이에 옮겼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이다. 

 <가로수길이 뭔데 난리야?>는 최근 트렌드의 메카로 자리 잡은 가로수길이 인기를 얻기 시작할 때인 2007년에 출간된 책이다. 조용하고 한적했던 대로변 갓길이 술렁이자 '여기가 뜨는 이유가 뭘까?'하고 광고인의 눈으로 뒤져본 책이다. 그래서 가로수길의 인기를 통해 21세기의 젊은이들이 요구하는 다양한 트렌드 코드를 잡아냈다(그 책이 갖는 트렌드 코드는 2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또 다른 책<청바지, 세상을 점령하다>역시 특별한 책이다. 2008년 TBWA에 입사한 직원 7명을 데리고 오리엔테이션을 떠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청바지를 읽어라. 청바지는 무엇이 크리에이티브한가?"라는 질문에 대한 다양하고 창조적인 답을 구했다. 광고에 전혀 물들지 않은 뛰어난 감각의 청년들이 생각하는 청바지는 다양한 방식으로 조명되었다. 청바지를 통해 오늘날의 경제적ㆍ사회적ㆍ문화적 변화를 읽어냈는데, 하나같이 ‘물건이고, 인물이다’ 싶은 글들이 쏟아졌다. 난 이 책을 읽고 책 속의 내용과 더불어 ‘책을 만들게 된 기획’에 놀랐다. 신입사원들에게는 멋진 직무교육이자 추억이 되었고, 세상에는 훌륭한 트렌드 자료가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이 두 권을 읽은 경험은 TBWA에 대한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 책 역시 박웅현은 모른 채 TBWA KOREA를 지휘하는 인물이라는 소개글 때문이었다. 

  이 책은 광고쟁이 박웅현 한 사람을 조명한 것 뿐만 아니라 광고인이 보는 창의성, 창의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조명했다. 박웅현의 다독을 통한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은 ‘사람을 향하는 마음’이 되어 광고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지금껏 그가 작업해서 호응을 얻었던 광고들의 제작의도와 뒷이야기들을 통해 ‘감동을 주는 광고’ 속에 녹아있는 ‘인문학’의 면면을 살펴볼 수 있었다. 광고의 기법에 대해 운운하는 이전의 광고쟁이들을 위한 책이 아니라 인문학에 대한 지식과 함께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마저 알게 하는 멋들어진 책이다. 대담 형식의 대화체는 그가 이야기하는 세상을 설명하는 좋은 방법이었다. 

  인터넷의 속도로 대표되는 오늘날 세상의 변화의 속도는 인간이 느끼는 외로움과 반비례한다. ‘바쁜 일상’이 덕담이 된 세상은 그만큼 인간이 고독해지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사람을 향하는’ 박웅현의 광고는 ‘어루만짐’을 아는 광고다. 사람은 외로운 만큼 쉽게 감동하고, 그 여운은 오래간다. 그의 광고는 먼저 외로운 인간에게 공감하며 다가가 같은 줄에 서서 그들의 시선을 함께 했다. 그리고 그들의 어깨에 손을 얹어 마음을 덥혔다. 박웅현의 광고에 소비자들이 공감하고 감동하는 이유는 광고속에 文, 史, 哲의 인문人文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그의 광고는 광고의 시선을 광고주인 기업에 두지 않고, 최종 소비자인 ‘사람’을 향한다. 최근 광고중인 한 아파트 회사의 ‘진심이 짓는다’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톱스타가 나옵니다. 

그녀는 거기에 살지 않습니다.멋진 드레스를 입고 다닙니다.우리는 집에서 편안한 옷을 입습니다.유럽의 성 그림이 나옵니다.우리의 주소는 대한민국입니다.이해는 합니다.그래야 시세가 오를 것 같으니까.하지만 생각해봅니다.있게만 보이면 되는 건지.가장 높은 시세를 받아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저희가 찾은 답은 진심입니다.진심이 짓는다.e- 편한세상

 

 

 

 

 

  이 광고에 주목해보자. 목소리는 대부분은 소비자의 마음이었다. 이 말은 한편으로 ‘지금까지 우리가 했던 광고는 사실이 아니잖아?’ 라고 말하는 광고인의 ‘고해성사’이기도 하다. 충분히 공감하고 ‘옳다’고 박수칠 만하다. 하지만 한 번 더 생각하자. 과연 그 광고 속의 아파트가 과연 실제로 다른 아파트와 ‘차별성을 갖는가?‘ 하는 점이다. 광고회사가 이렇게 말할 만큼 진심으로 짓고 있는가 먼저 자문해 보아야 한다(앞으로 기대해 봐야 할 문제지만).

  광고가 변하듯 광고인도 변하고, 광고회사도 변해야 한다. 광고수주가 많은 광고주가 최고가 아니라 정말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회사를 ’최고‘로 삼고 진심을 광고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TV 등 매체에 광고를 토해 놓고 소비자의 반응을 얻고, 잘 만든 광고상 받는 것으로 결론을 지을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가 만든 광고주의 제품이 광고만큼 훌륭한 제품으로 기억되는가를 꾸준히 모니터링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듯 소비자에게 다가선 광고 역시 한낱 ’수작‘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또한 광고주는 바뀔지 모르지만 소비자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Web 2.0으로 대표되는 21세기는 누구에게든 정보의 공유가 평등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제품이 가장 잘 팔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치 있는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만 하다면 굳이 광고를 하지 않아도 제품을 사용한 소비자가 알아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신 홍보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사람(소비자)를 향하는 광고는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자구책인지도 모른다. 시대를 반영하는 30초 예술의 반가운 변화 속에 박웅현이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이제 시작이다. 그를 알게 된 독자로서 소비자로서 앞으로 ‘사람을 향하는 박웅현의 광고’에 주목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변함이 없기를, 그리고 진심을 담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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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꽃도시 - 21세기 차이나 신세대의 방황과 질주
한한 지음, 박명애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9월
평점 :
절판


오쿠다 히데오는 저리 가라! 올해 만난 가장 재미있는 소설.

  20대엔 세상이 우스웠다. 뜻만 두고 손을 뻗으면 그 무엇이든 움켜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새털같이 많은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만 같아서였다. 내 안의 변화를 추구하기엔 뜻이 모호하고, 외부의 변화를 감지하기엔 촉觸이 너무나 둔감했었기에 시간이 더디게 느껴졌다는 것을 안 건 한참 후다. 늘 고만고만한 사람들과 부딪히며 엎어지면 코 닿을 데 만큼 범위에서 뒹굴거렸기에 세상을 온전히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변화없는 뜻뜨미지근함이 세상을 우습게 여긴 무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밖에서 지켜본 입장에서나 알 뿐 벌려진 판 속에서 뛰어다니는 놈이 어찌 알겠는가. 설령 그런 느낌이 들거나 훈수를 두는 바깥사람이 있다 손 치더라도 온전히 제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그 속에서 뛰어다니는 것만도 하루하루가 한 편의 소설이었고 드라마였기 때문이다. <연꽃도시An ideal city>의 세 청년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 소설은 중국의 신세대를 뜻하는 ‘80後 세대‘의 소설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붉은 공산주의자의 부모에게 밥을 얻어먹고 집밖을 나오면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 이후 빠르게 유입되는 자본주의 문화 속에서 서핑을 해야하는 모순의 세대가 80後 세대다. 젊은 모순 세대의 눈에 보이는 제 나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이야기꺼리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들의 혈액 속에는 과장과 풍자라는 아드레날린이 넘치지 않던가. 사상의 혼잡과 과장된 풍자가 한데 어우러진 중국을 파릇한 젊은이가 ’허구의 장르‘인 소설로 엮었으니 그 자체로 흥밋거리다. 

  이 소설은 ‘80後 세대’의 대표주자 한한韓寒이 쓴 소설이다.

수려한 외모와 파란만장한 학창시절, 그리고 중국고전을 방불케하는 필력으로 중국내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그는 지난 2006년 2억 6천만 위한의 인세수입을 올려 <포브스>지가 주목하는 유명인에도 든 바 있다. 나는 그의 전작 <삼중문三重門>을 읽은 바 있다. 중국 문단과 교육문제을 신랄하게 꼬집으며 이를 겪고 있는 중국 젊은이들의 애환을 담은 청춘소설인데, 중국고전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며 특유의 해학적 요소를 가미한 줄거리는 국내소설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함을 느꼈다. 책을 읽은 후 저자가 15세에 발표한 소설이란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깜짝 놀랐었다. 이번에는 <연꽃도시>를 통해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있는 중국 젊은이들의 현실을 잘 표현했다. 

  <연꽃도시>를 읽으면서 ‘주성치의 영화’가 떠올랐다. 기승전결의 전통적인 형식을 걷어내고 우스개 만담 같은 에피소드들이 가득하다. 희한한 것은 싱겁지도 지겹지도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한한이 표현한 짧고 엉뚱한 대화는 등장인물의 성격을 표현하기에 걸맞고 가독성을 더해 책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게 한다.

 두세 줄로 설명되는 근본 없는 태생의 주인공들은 우연한 사건에 휘말려 그것을 피해 낯선 도시로 들어섰다. 이 낯선 땅에서 그들이 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오직 돈이 필요할 뿐이다. 주인공들을 보자면 서울에서 지방으로 대학을 간 새내기의 여름방학을 생각나게 한다. 친구가 있어 외롭지 않고, 둘 셋만 모이면 여유롭진 않아도 굶진 않는다. 풍족한 것은 오직 시간 뿐이다. 그래도 시간의 흐름은 감지하고 산다.

“내 시간은 젠수의 다리와 손이 회복되는 속도만큼이나 매우 천천히 흘렀다.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이 있다 보니 시간이 흐지부지하게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시간은 천천히 와도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는 점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어제 일은 이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이유야 어제 아무 일도 하지 않아서이긴 하지만.” 45쪽 

  소설가는 세상의 풍경과 사람의 말 그리고 행동을 훔치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를 절묘하게 엮어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한한 역시 또래의 젊은이들과 어울리고 그들을 지켜보면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기억했을 것이다. 개연성 없는 사건과 에피소드는 이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그래서일까. 주인공들이 이야기가 억지가 없고, 꾸밈이 없다. 삶에 대한 생각이 없어 대화의 깊이가 얇고, 앎과 경험이 부족해 수준이 낮다. 그래서 웃기고 재미있다. 독자로서 한한의 소설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특별한 감동이 없다는 것이다. 슬프지도 않고 기쁠 것도 없는 날이 태반인 우리의 삶이 그렇듯 그들의 삶은 평범했다.

 이것은 내가 보냈던 젊었던 날의 뜻뜨미지근함을 자연스럽게 생각나게 한다. 그 시절 내 삶은 이끈 것은 친구와 함께 하는 나날이었다. 부족하고 멍청한 사고뭉치 젠수는 내 친구 ‘대구빡’을 닮았고, 있는 집 자식 반항아 왕차오는 선배 ‘조까치’를 빼다 박았다. 행동하기보다 지켜보면서 즐거웠고, 느끼기보다 보여주는 것으로 보람을 느꼈던 그때의 이야기가 가감없이 펼쳐진다. 그리고 사건사고의 끝에 스치는 생각은 고전에서나 만날 수 있는 깊은 성찰들이다. 이것이 중국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다. 

어느 날 주인공들은 대형마트를 찾은 중년의 남자를 인터뷰하는 모습을 TV에서 보게 된다. 

 “물건을 사러 여기까지 나온 이유가 뭡니까?”

중년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 지난달 우리 회사에서 미국으로 견학을 갔습니다. 그때 가서 보니까 미국인들이 이런 식으로 살더군요. 우리도 이곳에 와서 물건을 사면 바로 미국인들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이는게 되잖소.”

 “그러면 여기까지 집에서 차로 얼마나 걸리나요?”

 “한 이십 분 정도요. 미국 사람들은 ‘워즈더마’인가, ‘워마더’인가 하여든 가장 가까운 마트에 가는데 차로 한 시간씩 걸린다고 하더군요. 우린 그래도 가까운 편이죠. 겨우 이십 분 밖에 안 걸리니까요. 만약 차가 막히지 않고 시속 백이십 킬로미터로 달리면 십 분이면 도착합니다!”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는 시청자들에게 한 말씀 하시죠.”

 “어쨌든 나라가 잘 살아야 됩니다! 미국 가서 보고 느낀 게 아주 많습니다. 알고 보니 미국 사람들은 소매점에서 절대 물건을 사지 않더라고요.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주말마다 차를 몰고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 대형 마트로 쇼핑을 갑니다. 지금 우리는 이십분이면 되니까 어떤 면에서 볼 때 드디어 미국을 앞지른 겁니다.”

(중략)

 우리 셋은 그 방송을 보고 나서 삶의 재미를 만끽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함께 그 마트를 찾아갔다. 209-210 쪽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태어난 청춘은 ‘당연히’ 있는 사상적 기반에 대해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중국은 최근 십여 년 동안 사상적 괴리만큼이나 뒤틀어진 자본주의를 경험하고 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보여지는 화려한 외형을 따르고, 그것이 전부인 양 숭상하면서. 주인공인 나는 여자친구가 들고 있는 자수를 놓은 펜디 핸드백이 오만 칠팔천 위안(우리돈 약 처이백만 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건강이 안 좋으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떠올렸다. 그리고 만일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인 뒤, 그 핸드백을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보여주며 가방 값을 알려드린다면 아마 그 분들은 피를 토하고 숨이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 속 주인공 ‘나‘는 저자인 한한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가 보는 중국이라는 정신없는 세상은 오늘날 중국 젊은이들이 바라보는 세상과 일치하기에 그의 표현력에 중국의 젊은이들이 그토록 그에게 열광하는지 모른다. 그는 세상을 비판하고 비웃을망정 그 속에 살고 있다고 괴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피하지도 않는다. 눈도 쫓아갈 수 없을 만큼 빠른 변화를 제 깜량만큼 소화하며 허허실실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세상을 편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이것은 중국소설이 갖는 매력이다. 관념적인 우리 소설과 허무주의로 도배된 일본 소설과 또 다른 느낌이다. 오쿠다 히데오와는 또 다른 해학을 던져줄 새로운 작가, 한한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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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책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8월
평점 :
품절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함께 하는 첫경험같은 여행

 

저는 한 권의 책이며 그것도 살아 있는 책입니다.

제 이름은 <여행의 책>입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저는 가장 가뿐하고 은근하고 간편한 여행으로

당신을 안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뭐랄까요....

어떤 강렬한 것을

함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책이 노골적으로 내게 말을 걸어온다.

꽤 오랜 동안 책을 읽어왔지만 이렇게 내 눈에 시선을 맞추고 내게 말을 거는 책은 처음 봤다.

난 활자를 보고, <여행의 책>은 수많은 활자 속에서 나를 보고 있다.

제 스스로 살아있다고 말하는 책이 내게 말을 건다니...

묘하고 난감한 기분이다.

 

  진짜일까 싶어 책을 쥔 두 손에 힘을 줘 본다.  

내가 의심하고 의식하고 있는 순간 책은 살아난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의 책>이라 이름을 부르는 순간 이 책은 이름을 얻고, 꽃이 된 것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여행의 책>은 이제 숨을 쉬고 있다.

 

 



 

 

독자여,

그대는 나를 보고 있고

나 역시 그대를 보고 있다.

그대의 눈은 촉촉이 젖어 있고 그대의 얼굴은 반드럽다.

내 얼굴은 작은 굴자들이 촘촘히 찍힌 이 책장들이다.

얼굴이 백짓장 같다는 비유가 생길 만큼

내 얼굴은 해쓱하다



 

  더더욱 난감해지는 순간이다.

이젠 <여행의 책>이 나를 보고 있다고 말한다.

그 순간 난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행의 책>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는 셈이다.

 

책을 쥔 두 손은 <여행의 책>의 어느 부분을 잡고 있는 것일까?

귀 일까? 몸통일까? 그것참... 내가 책을 느끼고 있다니 사알짝 미친 기분이다.

 

 

  이 책은 참 묘한 책이다. 지금껏 책 속의 활자를 새겨넣은 저자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다고 여겼던 나에게 혼란함을 주었다. 무생명, 즉 죽은 나무의 또 다른 시체에 불과한 종이 덩어리가 첫장을 넘기는 순간, “독자여!”하고 말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난 의도된 최면에 걸린 셈이다. 맛을 안 아기가 사탕을 처음 입에 물은 모습을 본 적이 있나? 눈을 똥그레지고 입도 같은 모양이 된다. ‘헉, 이게 뭐지?’ 그 무엇이든 처음은 황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그저 뜨악하고 놀랄 뿐이다. 마치 첫경험처럼. 이 책이 내게 그 기분을 던지고 있다. 당돌하고 어의가 없다. 하지만 페이지를 멈출 수가 없다.

 

  이 책에는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없다. 단지 그는 <여행의 책>을 만든 창조주일 뿐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고 인간을 만들고 위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베르나르 베르베르는 이 녀석을 만들고, 독자와 대화하는 것을 감지할 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경험을 했을까. 내가 책과 이야기한다고? 말도 안돼! 작가는 날 농락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을 계속 읽고 있는다면 난 농락을 즐기는 것이다. 바보같다. 그래서 고쳐 생각하기로 했다. 인지된 최면. 그래, 난 의도되고 인지된 최면에 걸리고 있다.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다. 계속 읽기를 청했다.

 

만일 그대가 나와 함께 가기를 원한다면

우리에겐 계약이 하나 필요하다.

나의 의무는 그대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는 것이고,

그대가 할 일은 나날의 근심 걱정을 잠시 잊어버리고

되어 가는 대로 완전히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

만일 그대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당장 갈라서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반대로, 그대가 이 계약에 도장을 찍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합의의 신호로 한 가지 동작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잘것없는 작은 손짓이지만,

그것을 나는 약속의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자, 그럼 갈까? 라는 문장을 읽거든, 책장을 넘기라.

 

  <여행의 책>은 내게 함께 여행할 것을 제시한다. 독자라는 삼인칭대신 이젠 ‘그대여’라고 말한다. 이제 <여행의 책>과 그대, 즉 나 이렇게 단 둘 뿐이다. 그리고 <여행의 책>의 써진 대로 아니 말하는 대로 둘은 움직이기 시작한다. 내가 앉아 있는 자리에서 부웅 뜨더니 벽과 천정을 뚫고 하늘을 오른다(실제로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으윽~). 대기권과 성층권 위를 오르더니 공기의 세계와 흙의 세계, 불의 세계와 물의 세계를 함께 체험한다. 정말로 난 이 책과 여행을 했다. 믿기지 않는다고? 자신은 속이지 말자. 당신은 벌써 이 책을 읽고 싶다고 느꼈지 않은가? 당신도 믿고 있다. 아니 믿고 싶은 걸게다.

 

  이 책을 읽고 싶다면 주의할 것이 있다. 대중교통 안에서, 그리고 전화가 울려대는 사무실에서 읽는 것은 곤란하다. 조용히 자신의 방에서 깊은 밤 잠들기 전 한 두 시간 전에 펴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러면 <여행의 책>과 단 둘이 만날 수 있다. 책을 읽다가 난감한 기분에 두어 번 책을 덮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하련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책을 펴서 읽는 것도 당연하다. 당신은 최면에 걸렸으니까. 그래도 걱정할 건 없다. 나를 그렇게 했듯이 <여행의 책>이 당신을 제 자리로 귀환시켜줄테니까. <여행의 책>은 당신에게 틀림없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대가 바라보고 있는 나는 작은 글자들로 덮인 네모난 종이장이다.

이제 이런 식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은

그만하는 게 좋겠다.

그대의 눈길이 나를 쑥스럽게 한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하고

그대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한 권의 책인 내가 그대로 하여금

경이로운 일을 하게 했다고

그러나 진정 경이로운 것은

그것을 수행한 그대,

오직 그대 뿐이다.

 

안녕

 

  혹자들이 책에 빠졌다고, 책과 함께 시공간을 거슬러 여행을 했다고 했다. 하지만 난 시니컬하게 비웃어 넘겼다. 천 수백 권을 읽어도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한 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렇게 말할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행복하고 즐거웠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내겐 이번이 책과 여행하는 첫경험이니까. 분명한 건 난 책과 여행을 확실히 했다는 것이다. 책이 보여주는 세상을 보았고, 피터팬처럼 책을 쥐고 하늘 위로 올랐으며, 뜨거움과 차가움, 그리고 아픔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나도 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책을 쓰고, 내가 이 책을 쥐는 순간 연결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가 나에게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 눈을 통해 내 뇌에 주문을 걸었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스스로 변화된 것을 느꼈다. 누워있고, 엎어진 책. 그리고 책장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병렬로 서 있는 책들의 무리들도 내게 말을 걸었고, 대화했었다는 것을. 이젠 책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가 난감해졌다. 아니 당장, 살지도 죽지도 않은 <여행의 책>을 어떻게 대우해야 할지 조차 모르겠다. 기가 막힌다. 지금의 내가 기막히고,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주문이 기막히다. 난 지금도 그의 주문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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