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호의 인연 - 최인호 에세이
최인호 지음, 백종하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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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시 일어시라라! 

  최인호가 집필을 중단했다. 최소한 ‘샘터사’에 매월 402회를 연재하며 36년 하고도 반년을 이어온 장수연재소설 <가족>만은 그랬다. 원인은 ‘암’이었다. 2008년 연재를 잠시 중단했다가 지난 해 3월 재개했었지만 10월호를 끝으로 연재를 끝냈다. 소설<가족>은 소설판 <전원일기>요, 한국판 ‘월튼네 사람들’(30여 년 전 매주 방송하던 미국 드라마)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한 질의 대하소설’이라면, 가족의 이야기는 어떻겠는가? 바람잘 날 없는 사건과 에피소드 속에서도 항상 끝은 훈훈하고 정겨운 가족애家族愛를 느끼게 하는 국민소설이다. 이 소설이 공감을 얻는 이유는 ‘우리집에서도 일어났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최인호의 글을 읽으며 지난 날 ‘우리의 그 날’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마치 옆집 최씨 아저씨네 이야기를 담장 너머로 엿들으며 ‘앞으로 있을지도 모를 그 날 이렇게 하고 싶다’고 배우게 한다.  

  하지만 소설<가족>의 백미는 최인호의 입담이다. 그는 타고 난 글쟁이다. 글이라기보다는 ‘말’을 읽는 기분, 그래서 아이에서 노인까지, 무식쟁이에서 긴 가방끈에 이르기까지 정겨이 읽힌다. 정좌할 필요도 펜을 들고 읽을 필요도 없다. ‘말’을 듣는데 그런 것이 대체 왜 필요하단 말인가? 그냥 고개를 들어 책에 박힌 글에 눈을 대면 된다. 그러면 술술 읽힌다. 좀 더 읽다보면 중저음의 개구쟁이 같은 최인호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뿔싸, 그런 그가 글쓰기를 중단했다. 타고난 재담꾼이 입을 다문 것이다. 대신 조용히 책 한 권으로 그 변辨을 대신했다. <인연因緣>을 읽었다.  



 

   인연은 만남이다. 그리고 만남을 인식하고 괘념掛念하면서 인연은 시작된다. 그래서 인연은 앎이고, 기억이고, 추억이다. 그리고 사랑이다. "우리는... 추하고 멍청하고 따분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아름답고 똑똑하고 재치있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는 알랭드 보통의 말처럼 우리가 인연이라 인식하고 기억하며 추억하는 것은 내가 갖지 못한 무엇을 가진, 그래서 똑똑하고 멋진 그를, 그녀를,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인연>은 최인호가 사랑한 사람과 물건, 공간 그리고 일들을 기록해 놓은 수필집이다. 지난 해 펴냈던 <산중일기>가 나, 최인호를 돌아보는 글이었다면, 이번 글은 스스로 ‘나는 아름다운 팔불출’이라고 말했듯 거의 평생 ‘가족’의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이야기 했던 그가 ‘또’ 사랑하는 인연들을 이야기 했다.

  지금의 최인호에게 ‘인연’은 그리움이다. 스치고 지나갔던 순간의 기억이 시간이 흐르고서야 인연인줄 새삼 깨닫고 그리워진다. 몸에 병을 달고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기 시작한 그에게 세상은 모두가 인연이고 담고 싶은 그림이었다. 그가 돌아본 인연들은 모두가 아름답고 소중했다.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는 역시 ‘가족’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연인의 그것보다 더 지극하고 간절했다. 세상 어느 자식 안 그럴쏘냐마는 기억이 정말 날까 싶은 ‘당신(어머니)과의 소중한 순간’들을 묘하게도 기억하고는 서술하는 것만으로도 둔해서, 뚱해서, 혹은 창피해서 채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우리네와는 사뭇 달랐다. 아버지와 형제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마음은 단 몇 줄에도 사랑이 뚝뚝 뭍어난다. 

  “그래도 어머니를 만날 때마다 인사와 동시에 다리를 주무르는 일은 언제나 되풀이되었는데, 그때마다 내가슴이 아팠던 것은 어머니의 다리가 점점 더 말라간다는 사실이었다. 다리를 못쓰시게 되고부터는 말라가는 속도가 더욱 빨라져서 돌아가실 무렵에는 뼈만 남아 있었다. 다리를 주무르다가 나는 몇 번이고 울곤 했다. 어머니의 다리에서 생명이 희박해져가고 있는 걸 나는 손바닥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은 내 곁을 떠났다. 내가 사십여 년 동안 줄곧 안마로 모시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제 내 곁에 없다. 아직도 내 손에 남아 있는 그 촉감, 그 살의 느낌, 살아 숨 쉬던 그 생명력, 어머니의 부드러운 살결, 매듭을 꺾을 때마다 뼈마디가 분질어리는 그 경쾌한 소리, 유난히 따뜻하던 어머니의 체온, 그 모든 감촉들이 내 손안에 분명히 남아 있는데도 두 분은 내 곁을 떠나고 안 계신다.

“인호야, 어디 있니? 다리를 좀 주물러다오.”

  가끔 한밤중 잠에서 깨어 멀건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으면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본문 275 쪽

  내가 초등학교 일학년이나 되었을까... 독감에 학교를 조퇴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끄응’ 소리가 절로 날 만큼 앓는 나에게 내 엄마는 누런 양은 대야에 찬 물을 담아 유난히 희고 흰 타올을 적셔 열로 인해 강바닥같이 터버린 입술을 적시고, 정갈하게 접어 머리에 얹어주셨다. 차가운 각성 뒤에 오는 은근한 서늘함에 위로받아 잠이 들었나보다. 깨고 보니 안방 풍경은 그대로인데 있어야 할 내 엄마가 보이질 않았다. 두 세평 남짓의 방안이 학교 운동장만큼 커 보였고 휑 하는 바람소리마저 들리는 했다.

  난 울었다. 혼자 남은 무서움 때문이 아니라 혼자 남겨진 그 느낌에 울음이 터졌다. 서러움, 난생 처음 든 그 기분은 서러움이었다. ‘우왕’하고 울던 것이 곡을 하듯 늘어지고 잦아들만 하면 끊어질까 또 목청을 높여 울었다. 내 엄마가 얼마나 먼 곳에 있을까 가늠하며 ‘나 여기 있다’고 외치는 울음에 내 귀가 아팠다. 깨어나면 떠먹일 찬거리를 사러 나갔다 온 내 엄마는 “내 새끼, 언제 깬거야. 어휴 그래. 혼자 있어서 운거야?” 하며 잰걸음으로 달려와 나를 안아 등을 두드려줬다. 톡.톡.톡. 그 두드림은 ‘그래 내가 네 마음을 안다’였다.

  더 이상 누릴 수 없음은 그리움이 된다. 단 한 번이라도 더 느끼고 싶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소리와 숨결, 그리고 따뜻한 기운은 최인호에게 사무치는 그리움이 된다. 그의 손바닥이 기억하는 부모의 느낌들은 ‘그래 내가 네 마음을 안다’는 교감의 잔상이리라. 읽다 보면 그 간절함에 나마저도 울컥 울컥 속이 상해진다.

  인연의 시작이 만남이면 끝은 헤어짐이다. 최인호는 이 책으로 소중한 인연들에게 ‘내가 너희를 기억하고 있다’고 말을 걸고 있다. 사람 좋은 배우 안성기, 넉살 좋은 영화쟁이 배창호, 애틋한 사랑 이해인 수녀님, 그리고 삼라만상의 풍경을 만드는 자연까지. 심지어 적막마저도 ‘내가 너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두를 사랑하고 있었다.

 글을 읽다가 문득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생각났다. 파킨슨 병으로 병상에 누워있는 모리선생은 어느 날 지인들을 모두 불렀다. 자신이 떠난 후 듣지 못할 ‘애도의 글’을 미리 듣고 싶어서였다. 지인들의 낭독에 때로는 웃음으로, 한 줄기 울음으로 말없이 답하는 모리선생은 슬프도록 행복해했다.

  이 글은 어쩌면 최인호의 미리 써둔 연서戀書인지 모른다. 사랑은 먼저 주는 것이고 표현해서 드러낼 때 완성되는 것이라면, 그는 자신의 사랑들에게 글로써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글을 지으며 많은 미소와 눈물을 흘렸으리라. 하지만 그 순간 만큼은 행복했으리라. 

  “아아, 나는 돌아가고 싶다.

  갈 수만 있다면 가난이 릴케의 시처럼 위대한 장미꽃이 되는 불쌍한 가난뱅이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 막다른 골목으로 돌아가서 김유정의 팔에 의지하며 광명을 찾고 싶다. 그리고 참말로 다시 일.어.나.고.싶.다.“ 본문 266 쪽

  ‘병중인 그‘라는 사실을 몰랐을 때 나는 지난 해에 이어 ’또‘ 수필집이 나왔다는 소식에 불뚝 화가 났다. <잃어버린 왕국>과 <해신>을 통해 나라를 걱정하고, <별들의 고향>, <도시의 사냥꾼>등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지닌 청춘들을 이야기하던 그가 짧은 숨의 ’수필집‘이냐 싶었다. 한국 현대문학의 한 기둥인 그에게는 우리의 오늘을 대신 고민하고 위로를 해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코맥 매카시나 필립 로스처럼 이순耳順의 최인호만이 뱉어내야 할 글들이 아직 남아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남겨야 할 대단원의 ’완성작‘을 은근히 기대했던 터라 부아가 나서 하마터면 이 책을 읽지 않을 뻔 했다.

  최인호에게 요구한다. 일어나시라. 천막 안에 청중이 그득한데 연사가 등장하지 않는다면 혼이 나야 한다. 단 한 명의 청중이라고 천막 안에 있다면 연사는 아플 자격도 없다. 당신은 아직 토하고 쏟아내야 할 말들이 많다. 툭툭 털고 일어나 당신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로 천막안으로 들어오시라 요구한다. 어서 빨리 돌아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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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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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진정한 자유는 스트라이크 삼진아웃으로부터! 

 

  낄낄깔깔.. 내 웃음소리에 ‘누가 왔수?’ 동생 녀석이 문을 열었다. 내가 모를 손님이 올 리가 없다. 동생은 금방이라도 피가 떨어질 것 같은 얼굴로 한 손으로는 배를 움켜 잡고 다른 손으론 눈물을 훔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포개어진 다리 사이엔 예의 책이 펼쳐 있었고... “만화책도 아닌데...” 심드렁한 녀석에게 ‘이거 한 번 읽어봐라’ 책표지를 보여줬다. “그거, 지금에야 읽는 거에요?” 더 심드렁해져서는 문을 닫았다. 이 소설이 그런 소설이다. 나만 빼고 세상 모든 사람이 읽은 것 같은 소설, 권하지 않는 책은 절대로 스스로 읽지 않는 동생 녀석도 4 년 전 군대에서 두 번이나 읽은 소설,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다. 



 

  차라리 밥은 굶어도 책은 안 굶는다 생각하는 내가 이 소설을 모를 리가 없다. 신문에서 서평도 본 적이 있고, 이외수의 젊은 시절을 방불케하는 히피와 힙합을 섞은 듯한 스타일의 저자 역시 사진으로 여러 번 봤었다. 만년 조연의 이범수가 첫 주연을 맡았던 ‘슈퍼스타 감사용’의 모티브도 이 소설이란 것도 알고, ‘처녀작 같지 않은 수준급 소설, 하지만 파격이다’는 아헤들의 말은 두 번 더 들으면 백 번이다. 그래도 애써 읽지 않은 건 처음 소설이 나왔을 때는 ‘소설을 읽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고 생각할 만큼 어숩잖은 짓들에 심취해 있었고,

  작은 이유는 ‘장명부’ 때문이었다. 소설 속의 ‘나’만큼 나 역시 대한민국 프로창단의 원년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시절 ‘소년구락부少年俱樂部’를 할 정도로 였으니까. 서울토박이라서가 아니라 OB맥주를 신봉하는 아버지의 권유(게다가 물주가 아니던가)에 의해 단 돈 오천 원으로 OB에 몸을 맡겨 회원이란 이름으로 모자와 점퍼를 주워입고 주말이면 학교 운동장, 삼청공원, 장충공원을 전전하며 시합을 뛰었었다, 나도. 

  아, 장명부.

장명부도 싫고 삼미슈퍼스타즈도 싫었다. 삼미슈퍼스타즈는 어숩지 않은 로고그림으로 나의 우상 첫 우상인 ‘슈퍼맨’을 욕먹였고, 투수 장명부는 조금 덜 무섭게 생겼다 뿐이지 봉준호의 ‘괴물’ 못지 않은 타자 잡아먹는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난 장명부가 프로야구의 마운드를 점령한 83년을 끝으로 내 사랑, 야구를 버렸다. 그러니 듣도 보도 못한 박민규가 쓴 젠장 맞을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을 이유는 하등 없었다. 하지만 운명이란게 어떻게든 맞닥뜨리는 거라면, 그 운명은 어떤 책 때문이었다. 출간된 지 정확히 오 개월 늦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읽어 박민규와 그의 글맛을 알았고, 단골독자가 될 요량으로 전작前作을 뒤지던 중 원수같은 ‘삼미‘를 제목으로한 소설을 다시 만났다. 그 옛날의 트라우마로 잠시 망설였지만, 기어이 손에 들고 책장을 넘긴 건 여기에서도 죽은 왕녀.. 속의 ‘요한’이 여기에도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리고, 

  조성훈을 찾아냈다. 요한과 조성훈. 이들은 ‘똑똑한 꼴통’이다. 주인공은 아니면서 소설을 이끌어나가는 핵심적인 꼴통, 머리에 든 것, 말빨, 그리고 시선이 닮았다. 박민규와도 닮았다(외모는 제발 닮지 말기를). 그리고 요한을 만났을 때처럼 단숨에 읽어버렸다.

  박민규는 기발한 기억력과 기막힌 탐구심을 갖췄다(노트북에 글을 칠 때 원고 말고 대 여섯의 창을 켜고 검색을 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래서 그보다 기발하고 기막힌 기억력과 탐구심이 없는 나를 매료시킨다. ‘정말 그 시절 그랬던가?’ 더듬게 되고, ‘그랬구나’ 싶어 탄복을 한다. 운 좋게도 박민규는 비슷한 또래여서 그가 ‘아~’하고 말하면 ‘어~’할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척~ 하면 삼천리요, 툭~ 하면 호박 떨어지는 소리’니 쉬이 읽히지 않을 리 없고, 재미없을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세상의 시각에선 삼미슈퍼스타즈는 시쳇말로 ‘루저’다.

허용치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 그래서 버림받은 사람들. 하지만 조성훈이 보기엔 그건 안反삼미슈퍼스타즈의 판단의 오류일 뿐이다. 진정한 슈퍼맨인 그들은 소위 위너들이 만든 기준에 애써 들지 않으려 한 것 뿐이다. 제대로 입지 못하고, 먹지 못할 뿐 일본에서 홈리스(노숙자)로 지내면서 사회가 부여한 의무로부터의 자유, 책임으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한 그에게 삼미슈퍼스타즈는 진정 ‘사람답게 사는 방식’으로 보였다. 회사형 인간으로 살다 구조조정을 당하고 아내에게까지 버림받은 ‘나’는 그들의 판단대로 스스로를 루저형 삼미슈퍼스타즈로 여겼다가 조성훈의 교화로 다시 깨어난다. 사회로 버림을 받음으로써 그가 얻은 것은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을 나게 하는 자신의 시간을 얻었다.

  “올 여름은 왜 이렇게 긴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다가 나는 비로소, 시간은 원래 넘쳐흐르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말이지 그 무렵의 시간은 말 그대로 철철 흘러넘치는 것이어서, 나는 언제나 새 치약의 퉁퉁한 몸통을 힘주어 누르는 기분으로 나의 시간을 향유했다. 신은 사실 인간이 감당키 어려울 만큼이나 긴 시간을 누구에게나 주고 있었다. 즉 누구에게라도, 새로 사온 치약만큼이나 완벽하고 풍부한 시간이 주어져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은 시간에 쫓긴다는 것은 - 돈을 대가로 누군가에게 자신의 시간을 팔고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지난 5 년간 내가 팔았던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의 시간, 나의 삶이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인생의 모든 날은 휴일이다.“ 본문 264-265 쪽

  글을 읽다 보면 마치 노이즈 심한 흑백 영상으로 영화를 보여주듯 내 삶의 기억을 건들 때마다 고구마 뿌리처럼 줄줄 딸려나와 그에 취해 책을 덮기가 일쑤다. 박민규의 소설은 만화만큼이나 웃기고, 재미있다. 하지만 저 깊숙한 곳엔 페이소스가 진하게 뭍어있다. 그의 맛깔난 글 속엔 뼈가 들어있고, 칼이 숨어 있다. 케케묵은 옛날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을 이야기하고, 야구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면서도 그 시선은 세상과 사람을 향하고 있다.

당장의 해결책은 없는 문제제기일지 모르지만 그 속엔 국회에서는 절대로 발의되지 못하는 삶 속 저 깊숙한 우리의 고민과 고통들이 짙게 배어져 있다. 문학하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제기만으로 이 세상은 조금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면, 그들의 믿음은 용케도 맞아들어 가는 듯 보인다. 이 소설을 통해 장명부의 대기록을 보면서 그를 다시 알게 되고, 슈퍼맨을 욕보인 삼미슈퍼스타즈를 용서(?)하고, 급기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꺼이 나도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기를 바라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신경 쓰지 마.”

조성훈이 그렇게, 다시 말문을 열었다. 신경이 쓰였다.

“뭘?”

“회사 잘린 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시 약간의 분노와 패배감, 불안간은 것들이 재구성된 지구의 표면 위로 떠올라왔다.

“처음 널 봤을 때...내 느낌이 어땠는지 말해줄까?”

“어땠는데?”

“9회 말 투 아웃에서 투 스트라이크 스리 볼 상황을 맞이한 타자 같았어.”

“뭐가?”

“너 4년 내내 그렇게 살았지? 내 느낌이 맞다면 아마도 그랬을 거야. 그리고 조금 전 들어온 공, 그 공이 스트라이크였다고 생각했겠지? 삼진이다, 끝장이다, 라고.”

“.....”

“바보야, 그건 볼이었어.”

“볼?”

“투 스트라이크 포 볼! 그러니 진루해!”

“진루라니?”

“이젠 1루로 나가서 쉬란 말이야....쉬고, 자고, 뒹굴고, 놀란 말이지.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봐. 공을 끝까지 보란 말이야. 물론 심판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했겠지. 어차피 세상은 한통속이니까 말이야. 제발 더 이상은 속지 마. 거기 놀아나지 말란 말이야. 내가 보기에 분명 그 공은 - 이제 부디 삶을 즐기라고 던져준 ‘볼’이었어.” 본문 235 쪽

  이 글은 새해벽두 ‘정리해고’를 앞둔 수 천의 샐러리맨들에게 던지는 박민규의 격려로 들렸다. 컴퍼니라는 기계 속의 톱니바퀴는 다른 것과 맞물렸기에 안정적이었다. 컴퍼니를 위해 ‘나’라는 톱니바퀴를 들어냈다고 해서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더 오래 맞물려 돌았다면 곧 마모되어 정말 쓸모가 없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혼자가 된 바퀴는 더 이상 컴퍼니를 위해 1분 마다 한 바퀴를 도는 것이 아니라, 제 혼자 마음껏 구를 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그리고 1분에 열 바퀴, 백 바퀴도 돌 수 있는 자유도 얻었다. 마지막으로 세상 끝까지 깨춤을 추며 구를 수 있는 자유도 얻었다.

  ‘스트라이크였냐, 볼이었냐?’ 하는 과거를 놓고 심판에게 항변하고, 컴퍼니를 원망할 것이 아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면 메두사의 저주로 돌이 되어버린다. 단 둘만 남을망정 ‘삼미수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며 캐치볼을 하며 오늘을 보내는 두 사람이 행복해 보이는 이유는 오늘 ‘지금’을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말하는 듯 했다.

  지난 해 박민규를 만난 건 개인적인 행운이요, 기쁨이었다. 늦었지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를 읽은 것 역시 장명부의 트라우마로부터 해방되고자 한 노력이 얻은 소득이었다. <아내가 결혼했다>가 축구라면,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야구다. 박현욱이 ‘젠장 맞게도 어쩔수 없는 남자의 사랑’을 이야기했다면, 박민규는 ‘빌어먹는 한이 있어도 얻고 싶은 남자의 자유’를 이야기했다. 축구와 야구가 일상의 기쁨이라면, 두 명의 소설짓는 남자들은 삶의 위안이 된다. 난 이제부터 박민규의 가장 늙은 팬클럽 회원이 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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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페터 빅셀 지음, 전은경 옮김 / 푸른숲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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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듦을 인식하면서 노인의 말에 새삼 귀를 기울이게 된다. 입장과 처지야 다를 테지만 앞서 살아온 시간 만큼의 연륜을 훔치고 싶어서다. 젊을 때는 꿈으로 가득하고, 늙어서는 후회로 가득한 것이 인생이 아니던가? 노인의 후회는 내가 살아갈 미래에 적잖이 방향타 노릇을 할 거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노인의 말에 경청하는 경향은 책에도 적용되었다. 최근에 읽은 책들은 대다수가 젊은이들의 생기발랄한 글들에서 ‘컨템퍼러리 의식’에 동요되어 ‘나도 그들처럼...’을 외치기보다는 앞선 이들의 가르침이 뭍어 있는 책들을 읽었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노인이 되고 싶었다>(푸른숲)도 그런 이유에서 펼친 책이다.

 

  이 책을 펼친 데 한 몫을 한 것은 제목이었다. ‘나는 시간이 아주 많은 노인이 되고 싶었다’는 제법 긴 문장의 제목은 여러 ‘뉘앙스’를 던져 주었다. 노인이 된 저자가 시간이 적어졌다는 푸념인지, 만약 시간이 아주 많다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 궁금하게 만들었다. 원제목은 ‘존슨은 오늘 오지 않는다’. 원제목대로 였다면 난 이 책을 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자가 스위스 현대문학의 대표작가로서 스위스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저자의 소개 역시 이 책에 ‘회가 동하게 만든 이유’였다. 하지만 내가 갖은 기대에는 훨씬 못미쳤다. 아예 내가 작가를 잘 모르고 전혀 다른 관점에서 기대를 가졌던 셈이다.

 

  앞서 말한 대로 이 책에서 노인의 가르침에서 깨달음을 얻으려던 내 생각은 처음부터 많이 어긋났다. 저자 페터 빅셀은 칠십이 넘은 나이에 홀로된 남자에게 보이는 주위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생각에 대해 기록하고 있었다. 그저 바라만 본 일상이라고 말했지만 저자는 깊이 관찰하는 듯 했다. 그의 관찰은 생각과 더해져 작은 주제가 되어 한 꼭지의 작은 글을 이루었다. 제법 재미있을 법한 글이지만 전혀 재미를 느낄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꽤 많다.

  우선 저자를 모르기에 그가 사는 스위스의 작은 동네 이야기에 관심이 없다. 그가 바라본 사물 역시 내 관심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고, 그가 안다는 사람들 역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조연들보다 눈에 띄질 않았다. 소재들이 너무나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어서 아무리 평온한 마음이라 해도 함께 공감하며 읽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아무리 글맛이 있는 작가라지만 번역된 글은 그 맛을 온전히 전달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니, 독자가 온전히 소화하지 못한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자, 내가 사는 이곳과 정반대의 땅덩어리에 사는 푸른 눈의 노인이 자신이 사는 동네의 이모저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공감할 수 있을까?

 

  이 책은 내가 지난 봄에 읽은 로버트 풀검의 <지구에서 웃으면서 살 수 있는 87가지 방법>(랜덤하우스)와 많이 비교된다. 비슷한 연배라는 점과 일상 속에서 관찰되는 사람과 주변 이야기들을 엮었다는 점은 서로 비슷하지만, 서술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전자가 인생 후반부를 살아온 달관자적 입장에서 위트있고 재미있게 일상을 구술했다면, 후자는 지극히 평범하게 자신의 주변을 이야기하고 있다. 글 곳곳에서 기억이 흐릿하다, 나이 탓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는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독자로서는 불편했다.

  어쩌면 내가 제목에 너무 혹한 나머지 제목이 던진 화두만을 쫓았기 때문에 깊이 빠져들지 못한 채 주변만 맴돌다 투덜대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작가와 공감할 만큼 깊이나 연륜이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깊이와 연륜을 갖춘다 해도 이 작가에게는 충분히 공감을 하기 어려울 것 같다. 작가와 독자도 코드가 맞아야 한다는 말...그 말을 실감하게 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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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기이솝우화
이솝 원작, 로버트 짐러 지음, 이종길 옮김 / 토파즈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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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전에 만들어진 이솝우화의 패러디! 



<<거북이와 산토끼>> 

  공격적이고 허풍이 심한 특이한 거북이 한 마리가 산토끼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자고 도전장을 내밀었다. 토끼는 거북이의 터무니없는 자만에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하지만 거북이가 끈질기게 토끼를 조롱하고 자존심까지 건드리자 토끼도 끝내 달리기 시합에 동의하고 말았다.

  공정하기로 소문난 올빼미가 심판으로 선정되고 코스가 결정되자 이 시합을 구경하기 위해 인근의 동물들이 모두 몰려나왔다. 출발신호가 울리자 토끼는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나갔지만 거북이는 힘겹게 한 걸을을 떼어놓는 게 고작이었다. 

  거북이가 까마득하게 뒤처지자 토끼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고 나무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가기로 마음먹었다.그러고는 이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가. 토끼가 눈을 떴을 때에도 거북이는 보이지 않았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은 토끼는 입가심할 요량으로 산딸기를 따다 예쁜 암토끼를 만나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동안에도 거북이는 쉬지 않고 터벅터벅 제 갈 길을 갔다. 늦은 밤, 토끼가 암컷을 향한 구애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사이에 거북이는 결승선을 통과했다. 올빼미는 동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북이가 이 경기의 공식적인 승자임을 선언했다. 

당신은 이 달리기의 승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믿음직학 성실하지만 융통성 없는 거북이보다

게으르지만 날쌔고 연애 잘하는 토끼 스타일이

요즘은 더 대접받아!

어디 그뿐이야?

여자들도 성실한 범생이보다

게으른 천재를 더 좋아한단 사실!

 

  이에 한껏 들뜬 거북이는 동물들에게 토끼 대신 자기를 전령으로 뽑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동물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군. 넌 잘 모르는 모양인데 토끼가 암만 먹으면 언제든 너보다 빨리 달릴 수 있거든?" 

훈 - 할 수 있는 자는 할 필요가 없다. 

   책 제목(엽기이솝우화 Aesop Up-to-Date)에 많이 접어주고 읽어야 할 책이라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상상한 이상으로 파격적이어서 엽기라고 아니할 수 없다. BC 6세기 그리스의 노예 이솝이 틈틈이 만들어 낸 동물의 우화를 로버트 짐러라는 듣.보.잡의 이야기꾼을 통해 환골탈태를 했다. 

  양치기 소년의 세 번째 구라에 마을 사람들은 거짓말 소년의 양들만 구하게 되고, 까마귀에게 노래를 권해 먹이를 얻어먹던 여우는 까마귀를 산속 최고의 가수로 만드는 후원자가 된다. 햇볕 정책의 주요 소스였던 해와 바람의 이야기는 나그네에게 옷을 입히는 게임을 추가해 결국 1:1의 게임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이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가 1964년에 써졌다하니 이 책을 쓴 양반의 두뇌를 들여다 보고 싶어질 정도였다. 이렇듯 원작의 내용을 꽈배기처럼 비틀고, 앞뒤를 뒤집어 오리지널을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만드는 방법이 성공한 미국 헐리우드 애니메이션의 스토리텔링 기법이 아니던가?



 


  이 책은 이른 바 발상의 전환을 배우기에는 딱인 책이다. 헛헛한 일상에서 벗어나 상상하게 만들고 알고 있던 사실에 태클을 거는 실력은 '막시무스 선생'의 책들을 생각나게 한다. 한 세기가 지나 다시 읽는 이솝우화는 역발상이 가미된 새로운 이야기였다. 굵은 붓체로 순식간에 그린 듯한 삽화 역시 글맛을 더하는 비주얼이었다. 유치하다 말할 수 있다. 원작을 훼손했다고 불편해 하는 독자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웃기를 잘하고, 주위를 둘러봐 웃음을 찾아다니는 내게는 비록 헛웃음일지언정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해 주었다. 특히 '발상의 전환이란 이런 것'이라고 알려준 그런 책이었다. 
 

  하지만 원작을 읽고 싶게 만든다. 순수하게 번역은 되지 않은 듯, 글 사이에 넣은 군더더기들이 재미를 감하게 만들었다. 코멘트의 내용 역시 스토리의 내용을 온전히 소화하지 못한 듯, 꿈보다 못한 해몽도 있다는 것을 배우게 한다. 영문의 영작과 함께 영한대역을 내었다면, 영어학습과 스토리를 온전하게 즐길 수 있었지 않았을까? 아쉽다. 원서를 찾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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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결사의 세계사
김희보 지음 / 가람기획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프리 메이슨의 전모는 끝내 밝혀질 수 없는 것인가?

 

"우리 주변엔 음모 과대편집증이 도사리고 있다. 이 편집증에 빠진 사람은 이들 음모가 자신의 숨통을 조여들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황당한 음모는 신문 등의 인쇄매체는 물론 인터넷을 통해서도 유포되며, 음모설(conspiracism)은 일종의 사종교 같은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음모 편집증에 걸린 사람들 중엔 O.J 심슨이 일본의 마피아의 농간에 놀아났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찰스 황태자가 신세계 질서의 꼭두각시라고 믿는 사람도 있다." -1997년 6월 1일자 '뉴스위크'지 

  음모는 진실과 오해의 중간, ‘아직 알 수 없음’의 단계다. 음모론의 당사자가 터무니없는 오해라며 진실을 밝힌다면 확인될 내용들을 굳이 밝히지 않기에 ‘음모론’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물론 세간의 음모들이 ‘대꾸할 여지조차도 없기에’ 밝히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음모가 진실의 전모에 일부 관여되어있거나, 그것이 진실로 밝혀질 경우 향후 치명적인 결과를 낳거나 그럴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어떨까?

  책 한 권이 2007년 7월 중국에서 출간된 이후 24주 연속 베스트셀러에 오르며 1년 만에 100만권 이상이 팔려나간 적이 있다. 제목은 <화폐전쟁>이다. 이 책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화폐의 메커니즘을 통해 화폐를 지배하려는 상업은행의 권모와 술수가 곧 중세 이후의 역사라는 것을 밝히고 그 배후에는 로스차일드가를 비롯한 세계 금융을 쥐락펴락하는 세력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예를 들어 세계 제일의 갑부는 빌 게이츠가 아닌 로스차일드 일가이고, 달러를 만들어내는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사실 민간 중앙은행이라고 밝혔다. 또한 미국 대통령의 피살 비율은 미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일선부대의 사망률보다 높은데 대통령들이 피살된 이유는 달러의 발행권을 되찾으려는 이들의 시도가 세계 금융세력에게 들통나 축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화폐전쟁>의 저자 쑹홍빙이 주장한 이러한 주장은 그것을 수용하는 대상마다 의견을 달리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G2라 불릴 만큼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에서 이 책은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기능은 무력하고 ‘보이지 않는 그림자 정부’에 의해 조종당하는 셈이라며 달러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힘을 보태주는 붐업 역할을 톡톡히 했다. 중국에서는 이미 유로화에 대해 언급한 후속작이 나왔을 정도다(국내에는 내년 즈음에 출간된다고 하는데, 유로화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했을지 궁금하다). 

  한편 국내에서도 순식간에 경제경영부문에서 베스트셀러 부문에 오르며 높은 관심을 받았는데, 관심의 초점은 중국과는 약간 달랐다. 바로 지난 해 하반기에 전세계에 불어닥친 뉴욕발 글로벌 금융위기의 발생을 미리 경고했었다는 점이었다. 시의적절했던 이 내용은 금융위기의 원인과 파장에 대해 촉각을 기울였던 독자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고, 책 속에서 ‘금융위기가 언제 어떤 모습으로 끝날 것인가’하는 이야기를 책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그리고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보이지 않는 그림자 정부’는 중국인 저자로서 꺼낼 법한 이야기지만 음모론적 성격이 짙다고 판단했다. 

  내가 책 <비밀결사의 세계사>를 집어든 이유는 여기에 있다. <화폐전쟁>에서 언급한 로스차일드 가문에서 비롯된 금융세력들의 규모는 어떻게 되고, 이들 단체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일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또한 <다빈치 코드>와 <천사와 악마>를 비롯해 최근에 <로스트 심벌>이라는 책을 펴낸 밀리언셀러 작가 댄 브라운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비밀 결사에 대한 존재여부에 대해서도 이와 맞물리지 않을까 하는 의문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저자는 비밀 결사에 대한 객관적 연구가 필요한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이 책이 출간되어야 하는 변辯을 대신했다. 그 네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인류의 일반적 역사를 잘 이해하자면, 비밀 결사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프리메이슨에 관하 지식은 프랑스 혁명 이데올로기의 원인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준다.

  (2) 종교사 및 사상사는 비밀 결사를 연구하지 않고는 옳게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고대 말기의 그노시스파의 근, 현대의 프리메이슨은 그 시대 사장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3) 사회학도 또한 비밀 결사의 형성과 구조 및 의식에 관한 자세한 연구가 요구된다. 사회학적 연구는 연구자로 하여금 호기심을 가지게 하고,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하게 한다.

  (4) 심리학 분야에서도사람들로 하여금 비밀 결사를 형성하도록 작용하는 감정을 연구하여, 인간의 종교적 감정을 연구하는 데 흥미와 아울러 크나큰 암시와 귀뜸을 줄 수 있다.

    이 책은 우리가 들은 바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비밀 결사들Secret Societies의 기원에서부터 현재까지의 발전과정을 수많은 기록적 증거를 바탕으로 제시한 책이다. 특히 프리메이슨, 유대게이트, 시온수도회 등 거대하고 다양한 비밀 결사들의 역사뿐만 아니라, 그 회원인 유명인사들의 명단과 활약 등을 밝히고 있어 흥미를 더한다. 주목할 점은 이 책에는 아시아와 동양권의 비밀 결사가 제외되었다는 점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책의 제목이 우연히 세르쥐 위탱의 책<비밀 결사의 세계사>와 같다고 언급한 바 있는데, 책의 내용 역시 아시아와 동양권의 비밀 결사가 제외된 점을 비추어보면 결코 우연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이다. 

  좀 더 들어가 보면 제 3장 유대게이트의 회원에는 작고한 명사를 비롯해 생존해 있는 인물들도 거명한 반면(우리가 잘 아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 우디 알렌, 엘리자베스 테일러, 더스틴 호프만,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들도 포함되었다), 프리 메이슨의 회원들의 명부는 작고한 인물들만 기록하고 있다. 짐작하건데, 저자는 더 많은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내용을 발췌한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약 저자가 아시아와 동양권의 프리 메이슨 회원들을 알 수 있다면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 특히 우리나라에는 어떤 인물들이 프리메이슨 회원이고 과연 몇 명일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어떻게 보면 내가 갖는 이런 종류의 의문이 바로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음모론을 일으키는지도 모르겠다.

  비밀 결사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살펴야 할 독자의 몫이다. 만약 쑹홍빙의 <화폐전쟁>나 이리유카바 최의<세계를 조종하는 그림자 정부 - 경제편>을 읽었던 독자라면 그 책들이 언급한 ‘어두운 금융세력’들에 대한 존재가 이 책이 말한 비밀결사들과 교묘하게 잘 맞아들어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P.S. 이것 하나는 세인들이 궁금해 하는 한 가지를 언급을 해야겠다. 우선 소설 <다빈치 코드>와 관련된 사실은 ‘다빈치 코드’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은 허위였다고 저자는 밝혔다. 다시 말해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는 19세기 말, 두메마을의 한 신부가 ‘렌느 르 샤토의 수수께끼’를 해독하여 땅에 묻혀 있던 보물을 발견하였는데, 그 속에 다 빈치가 어떤 신비한 활동에 관여하여 남긴 수수께끼의 그림이 있었고, 그 안에 수도회의 비밀의식을 나타내는 암호가 깔려 있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그러나 ‘다빈치 코드’에 묘사된 시온수도회가 실제로 설립된 것은 1956년 6월 25일, 프랑스의 피에로 프랑탈에 의해서였다. 그는 시온수도회의 후계자라고 주장하였으나, 훗날 ‘비밀 문서’ 등 모든 자료는 그가 꾸며낸 것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인류가 낳은 최고의 예술가 레오나르드 다 빈치에 대한 의혹은 더 이상 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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