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루이스는 도매상에서 직접 물건을 공급받는 것, 즉 중간과정을 없애는 것이 큰 회사와의 가격경쟁에서 이기는 유일한 방법임을 깨달았다. 그는 곧바로 로렌스 앤 컴퍼니(Lawrence & Company)의 빙햄(Bingham)을 찾아갔다. 그는 키가 크고 비쩍 말랐으며 하얀 턱수염을 기른 푸른 눈빛의 양키였다. 오만한 눈빛의 양키에게 더듬거리는 수준의 영어로 말하는 폴란드 출신 이민자의 얘기가 쉽게 먹혀들 리 만무했다. 루이스는 캐시미어 40상자를 구매하고 싶다고 말했다. 빙햄은 그 전까지 단 한 번도 셰리프 거리에서의 전통적인 방식을 어겨가며 개인회사에 직접 물건을 판매해본 적이 없었다. 빙햄은 우레 같은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요구를 하는 겁니까!"
하지만 빙햄은 하루 열여덟 시간씩 일하며 현대 경제를 배우고 시장조사, 대량생산, 그리고 오만한 양키와 협상하는 법을 배운 루이스를이길 재간이 없었다. 심지어 루이스는 새로운 패션 경향을 이해하기위해 스스로를 대중문화 속에 던져 넣는 법까지 익혔다. 결국 빙햄의 대답은 ‘예스‘가 되었다.
같은 시기에 뉴욕에 도착한 아일랜드와 이탈리아계 이민자에게는이러한 장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도시 경제에 적합한 기술이 없었던것이다. 결국 그들은 건설 인부, 가정부, 일당벌이 등의 일을 하러 갔다. 하지만 그 일을 30년간 할지라도 시장조사나 대량생산, 대중문화의 맥락을 짚어내는 법, 세상을 움직이는 양키들과 협상하는 법을 배울 수는 없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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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양원에서 그 연락을 받은 건 내가 하던 일을 막 때려치우고돌아나와 집 앞 편의점에서 투 플러스 원 맥주를 계산대에 올려놓았을 때였다.
기세 좋게 던지고 나왔다는 건 내 기준이고, 실은 스프리트검내지 아크릴 파우더와 리퀴드 라텍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재료가담긴 통들이 내게로 날아온 게 먼저였다. 나 맞으라고 던지는 게아니며 방향만 내 쪽일 뿐 벽이나 바닥을 겨냥하는 줄은 알겠고 평소에도 종종 날아오던 건데 왜 그날따라 머리꼭지라도 따인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장이 던진 알루미늄포일 통이 결정타인지 도화선인지 아무튼 뭔가가 되어버렸다.  - P9

극 초반에 어느 허방에 빠지거나 벼랑에서 떨어지거나 여러 방식 가운데 한 가지로 퇴장당하고 말, 조연 이하의 존재. 웬만하면 메스를 잡아서는 안 되지 싶은 늙은 의사가 홀로 진료하던 지역 유일의 산부인과에서 꼭 지금내 나이 때 나를 낳지 않고 혼자서 자유롭게 날아올랐다가 사라졌어야 마땅할, 나의 엄마. 이 생명을 부여했다는…… 이런 세상에 토해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큼은 그리 고맙지 않은, 나의 엄마.
그런 엄마가 쉽지도 않은 발음을 여러 번 해가면서 찾는 존재가 있다고 한다. 만약 장소나 사물 아닌 사람 이름이라고 한다면, 은인을 찾는 건지 원수를 갚겠다는 건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이 경우 보통은 은인 쪽에 베팅하는 본능 또한 젊은 자식의 선입견에서 비롯한 것일까. 사람이 아무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세상을 붙든 손아귀의 악력도 빠져나가고 웬만한 건 초탈하게 되겠지. 마디마다 바람구멍이 나서 몸의 형태를 간신히 유지하는 뼈와 축 늘어진 근육 그 어디에, 원한이라는 강렬하고도 에너지 소모가 심한 감정이 들어설 자리가 남아 있겠나 싶은 단견 말이다. 나만해도 실장에게 글루건 말고 딱히 던진 게 없을 만큼, 증오보다는 연민과 허무에 가깝지 않나 싶은 마음으로 돌아나왔는데. - P17

수없이 흥행에 실패한 SF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들, 그 어느 장르보다 고난도의 특수 분장이 필요하지만 이제는 무수히 복제 가능한 대체재가 넘쳐나는 영화들 사이사이에 니니코라치우푼타의 파편이 있었다. 그것은 엄마가 유년에 실제로 만난 외부의 방문객 혹은 젊은 날 쌓아올린 수많은 지성과 교양의 성채에 금이 가서허물어진 뒤, 베수비오 화산의 유적지와도 같은 인지 공간에 남아 있는 스키마를 동원하여 말년에 조악한 상상으로밖에 빚어낼수 없었던, 세상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전 신화의 끝자락에서 왔을지도모르는 이름. 낱낱의 발음을 입속으로 찬찬히 굴리는 동안 그것은일자一子-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 - P60

민주는 딸의 상태를 보고, 무엇을 보았는지 혹은 겪었는지 모르지만 충격을 받아서 그럴 뿐 얼마쯤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었다. 무의식의 바다에 쓰레기를 투척한 자를 잡는 건 나중 일. 그 바다 안에서는 무의미와 유의미의 원생생물이 흘러가고 그중 극히 일부의 사고만이 육지로 올라와 사람의 말로 진화한다. 마, 마아, 무, 엄, 암, 엄마. 보통의 존재가 태어나 처음 배우는 말. 그 말이 다정의 입 밖으로 태어나기 위해 형태를 막 갖추려는 순간, 아직 누구도 이름을 지어주지 못한 심해어의 송곳니가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말하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기라도 한 듯 신음만 조금 나오다 말아버린다. 제 목을 스스로 졸라도•보고, 답답한지 가슴도 쳐보는데 기침과 외마디 음절 이상은 끝내 들을 수 없다.  - P66

차라리 태블릿에 입력을 시도했을 때가 그나마 음소라도 나열되어 언어와 비슷했을까. 이번에는 더욱 알아볼 수 없는 선과 점, 도형도 글자도 되지 못한 파편들이 종이 위에 그어진다. 손에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뇌에서 떠오른 말들이 손까지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가 회로를 차단한 것 같다. 말을 떠올리고 사용해야 할 뇌의 공간을 공포와 경악이라는 즉물적 감각에 통째로 양보한 것처럽. 양보가 아니다. 약취, 침탈, 점령당한 사고의 맥분이 말의 빵으로 빚어지지 못한다. 말이 혀뿌리에 걸려 부서지고, 말을 형상으로 방출할 글자가 뇌리에서 증발하는 증상을 부르는 이름이 있을까? 이것을 실서증의 일종이라고 보아도 될까?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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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의 일생, 그의 경력, 그의 명성, 심지어 자존심까지 갑자기 통제 불가능한 상태에 빠지게된 것은 1953년 크리스마스 나흘 전의 일이었다. 그는 워싱턴 D.C.의 조지타운 지역에 위치한 자신의 변호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차창 밖을 내다보면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믿을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에 그는 운명적인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정부 자문 위원회로부터 사직해야만 할까? 아니면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의장 루이스 스트라우스(Lewis Strauss)가 그날 오후 느닷없이 전해 준 편지에 담긴 혐의들을 강력하게 부인하는 편이 좋을까? 스트라우스의편지는 오펜하이머의 배경과 그동안의 정책 제안들을 검토해 본 결과,
그가 보안 위험 인물로 지정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 편지는 또한 34건의 협의 사항들을 나열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말도 안 되는 소문에 근거한 것으로부터("당신이 1940년에 중국 인민 우호회(Friends of the ChinesePeople)의 후원자 명단에 올라 있다는 보고가 있었다.") 정치적인 공격에 이르기까지 ("1949년 가을부터 당신은 수소 폭탄의 개발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다양한 혐의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 P11

깜짝 놀란 상원 의원이 "도시 어딘가에 숨겨진 원자 폭탄을 탐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기구를 사용하지요?"라고 묻자, 오펜하이머는 "드라이버."(모든 상자와 서류 가방을 열어 보기 위한 도구)라고 짧게 대답했다. 핵 테러리즘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어책은 핵무기 자체를 없애는 것이었다.
오펜하이머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궁극적으로 그는 침묵할 수밖에없었다. 반항적인 그리스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류에게 주었듯이, 오펜하이머는 우리에게 핵이라는 불을 선사해주었다. 하지만 그가 그것을 통제하려고 했을 때, 그가 그것의 끔찍한 위험성에 대해 경고하려고 했을 때, 권력자들은 제우스처럼 분노에 차서 그에게 벌을 내렸다.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의 청문회 위원회에서 반대 의견을 피력했던 워드 에번스(Ward Evans)가 썼듯이, 오펜하이머에게서 비밀 취급 인가를 빼앗은 것은 "이 나라의 오명"이 아닐 수 없었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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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며 

먼 옛날 아일랜드에도 살기 좋은 때가 있었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지만 누군가는 좋았던 시절이.......
- 아일랜드 민담에 흔히 쓰이던 첫머리

1845년 아일랜드에 재앙이 덮쳤다. 까닭 모를 전염병이 돌아 감자농사를 망쳤다. 감자는 아일랜드 농촌 주민에게 사실상 유일한 식량이었다. 그때부터 5년 동안 감자 역병은 연거푸 발생했다. 이때를 가리켜 오늘날에는 ‘아일랜드 대기근‘이라고 부른다. 이 대기근 때 굶주림과 질병으로 100만 명이 죽었다. 대대로 살아온 고국을 등지고 미국, 캐나다, 영국으로 이주한 사람도 200만 명이 넘었다. 대기근피해자는 대부분 아일랜드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한 가톨릭교도였다. 그들은 대부분 몹시 가난하게 살았다. 대부분 아일랜드어를 썼는데, 말만 할 줄 알았지 읽고 쓸 줄은 몰랐다. - P7

영국 정부가 굳게 믿은 자유방임주의란 상품을 팔든 무역을 하든. 정부가 자유 시장에 개입해서도 안 되고 경제적 통제력을 행사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민이 하는 사업에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끼어드는 것은 정부가 할 일이 아니라는 주의였다. 영국이부강한 나라가 된 것도, 영국 국민이 저마다 부를 쌓은 것도 바로 그냥 내버려 두는‘ 경제 정책 덕분이라는 게 영국 정부의 입장이었다.
영국 정부가 자유방임주의 원칙에서 예외를 허용한 것은 딱 하나, 곡물법Corn Laws으로 통하는 일련의 법률들이었다. 미국에서는콘corn이 옥수수를 가리키지만,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귀리, 밀, 보리, 호밀 등과 같은 곡물을 뜻한다. 영국 정부는 국내산곡물 가격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외국에서 들여오는 곡물에 높은 관세를 매겼다. 이를테면 수입 곡물에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정책으로 농민층과 상인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던 것이다.
로버트 필 총리도 초보 정치인 시절에는 곡물법에 찬성했으나세월이 흐르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곡물법이 영국 경제에 보탬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수입 곡물에 높은 세금을 매기는 곡물법을 폐기하면, 노동자를 비롯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식량 구하기가 한결 쉬워질 줄로 믿은 것이다. 농촌 인구의상당수를 차지하는 가난한 노동자가 곡물을 구입하기 쉬워질수록,
영국 경제가 더욱 탄탄하게 성장하리라고 보았다. 경제가 성장하면그만큼 구빈원과 같은 정부 구호 사업에 기대는 빈민이 훨씬 줄어들터였다. - P62

그러나 아일랜드 들판에는 곡식이 가득했다. 밀, 귀리, 보리, 호밀 등 가루를 내어 빵이며 죽이며 케이크로 만들어 먹을 곡식들이 자라고 있었다. 여기에서 대기근의 아주 커다란 모순 한 가지를 깨닫게된다. 아일랜드 백성이 주식으로 삼는 감자 농사를 망쳐 굶주림에 시달리는 동안, 다른 한편에서 노동자들은 입에 댈 수도 없는 곡식들이영글고 있었다. 그것은 지주와 농민 것이었다. 굶주린 노동자들은 그저 곡식을 베고 털고 빻아 수레에 싣고 시장으로 내가는 것만 지켜보았다. 그 곡식은 영국과 다른 나라에 팔 것들이었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대기근이 두 해째로 접어든 그해 아일랜드에서 생산된 곡식, 가축, 모직, 아마가 아일랜드인을 먹이고 입힐 만큼 넉넉했다고. 다른 사학자들은 이런 주장에 반박한다. 굶주린 사람이 워낙 많아서 수출하지 않았더라도 그 식량으로는 다 먹여 살리지 못했을 것이라고. 게다가 대기근 시기에 수출한것보다 수입한 곡물이 네 배나 많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수치까지제시한다.
역사학자들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든 상관없이, 이 진실은 변함없이 남는다. 아일랜드 백성은 굶주리고 있는데, 그땅에서 난 곡식과 가축을 한가득 실은 배가 영국과 다른 나라의 시장으로 떠났다는 사실이다. 윌리엄 파월의 말을 빌리면, 그 사실이 뜻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네, 아일랜드 대기근은 인재였습니다. 우리네 지배자가 이 땅에서 난 식량을 영국으로 싣고 가도록 주선했고, 이 땅 백성은 굶주리도록 내팽개친 겁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나라에서 식량을 수출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장 가혹한 현실 한 가지는 기근은 식량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기근 문제는 식량이용권을 누가 갖느냐에 달려 있다. 영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아일랜드인을 굶주리게 한 것은 아니었다. 지주, 농민, 도매상, 소매상의 생업에 간섭할 법률을 제정할 뜻이 없었을 따름이다. 그런 법률을 만든다는 것은 자유방임주의 원칙을 어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 지주와 농민도 곡물을 영국과 외국 시장에 수출했다. 자신들이 영리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P79

영양가 높은 감자를 먹지 못한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양실조에걸렸다. 따라서 바이러스와 세균에 대한 저항력도 떨어졌다. 아일랜드 대기근 시기에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굶주려서 죽은 사람보다 어림잡아 열 배나 더 많다. 정확한 수치는 영영 알 길이 없다. 일가족전체가 가뭇없이 사라졌는가 하면 이름 없는 무덤에 수천 명씩 무더기로 묻히기도 한 탓이다. 코크 주 서부에 사는 한 농민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묻힌 곳을 들으면, 감히 밤에 문밖을 나설 엄두도 못낼 겁니다."
비위생적인 음식과 오염된 물을 먹고 생활환경마저 불결한 탓에질병은 널리 퍼졌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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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 것밖에 안 쓰는데 이 미국 콘돔은 뭐야? 누구랑 쓰던 거야?"
그 순간에 웃으면 안 되었는데, 수경은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아서..... 끝내는 잘 달랬지만 남자친구가 너무 시무룩해지는 바람에 진땀을 빼야 했다. 미안하진 않았다.
수경은 사과할 필요 없는 일에 사과하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그런 종류의 판단을 스스로깨쳤다. 하여간 대한민국 성교육 실태는 참담한 수준임이분명했다. 수치심을 가져야 할 순간에 갖지 않도록, 가지지 않아야 할 순간에 갖도록 잘못 가르치고 있다. 폴리우레탄의 축복을 받지 못한 나라 같으니라고.  - P382

"아부 듣기 좋군요. 나는 충고 같은 거 하기 정말 싫어하지만 소 선생이 원하는 것 같으니까 말해주는 거예요. 충고가 제일 싫어. 나는 자격도 없고 그냥•••••• 우리가 하는일이 돌을 멀리 던지는 거라고 생각합시다. 어떻게든 한껏멀리. 개개인은 착각을 하지요.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사람의 능력이란 고만고만하기 때문에 돌이 멀리 나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사실은 같은 위치에서 던지고 있는 게아닙니다. 시대란 게, 세대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소 선생은 시작선에서 던지고 있는 게 아니에요. 내 세대와 우리의 중간 세대가 던지고 던져서 그 돌이 떨어진 지점에서다시 주워 던지고 있는 겁니다. 내 말 이해합니까?"
"릴레이 같은 거란 말씀이죠?"
"그겁니다. 여전히 훌륭한 학생이군요. 물론 자꾸 잊을겁니다. 가끔 끔찍한 자가 나타나 그 돌을 반대 방향으로던지기도 하겠죠. 그럼 화가 날 거야. 하지만 조금만 멀리 떨어져서 조금만 긴 시간을 가지고 볼 기회가 운 좋게 소선생에게 주어진다면, 이를테면 40년쯤 후에 내 나이가 되어 돌아본다면 돌은 멀리 갔을 겁니다. 그리고 그 돌이 떨어진 풀숲을 소선생 다음 사람이 뒤져 또 던질 겁니다. 소선생이 던질 수 없던 거리까지." - P469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빈 땅을 보고도 그날밤을 기억했다. 평범한 붉은 흙으로 메워지고 다져진 부지에 이제 존재하지 않는 건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가끔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가장자리를 밟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 근처였다. 버스를 타러 갈 때마다 비어 있는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8층짜리 기억에 호흡이 흐트러졌다.
그곳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데는 몇년이 채 걸리지않았다. 약국과 체인 음식점, 학원과 렌털 회사들, 헬스 클럽과 요가 강습소, 치과와 보험 회사가 입주했다. 지하에는 그전 계획처럼 슈퍼마켓이 들어왔다. 중소도시에 흔하디흔한 정글 같은 대형 상가였다. 1층 엘리베이터 옆의 층별 안내도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 앞에 서서 이 건물에 극장이 있었던가, 헷갈려 하는이들이 종종 있었다. 극장은 그들의 착각 속에서 몇초간 존재했다가 다시 사라졌다. - P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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