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그녀는 좁다란 철제 간이침대에 묶여 있었다. 온몸을 옭아맨 가죽끈들로 옴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마구처럼 생긴 굵직한 벨트가 흉곽을 단단히 조이고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는 그녀의 두 손목은 가느다란 가죽끈으로 침대 양쪽 강철봉에 묶여 있었다.
벗어나보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정신은 깨어 있었지만 눈은 감은 채였다. 눈을 떠봐야 아무 소용 없었다. 보이는 건 시커먼 어둠에 문틈으로 가느다랗게 새어드는 빛줄기가 전부였다. 입에서는 고약한 맛이 느껴졌다. 지금처럼 이를 닦고 싶은 욕구가 맹렬한 적도 없었다.
의식의 일부는 항상 팽팽히 긴장하고 있었다. 발소리를 탐지하기위해서였다. 그 소리는 바로 그가 오고 있음을 의미했으니까. 저녁때라고만 짐작될 뿐 정확히 몇시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방문하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갑자기 침대가 진동하는 걸 느끼고 눈을 떴다. 건물 어디선가 기계 같은 것이 작동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들려오는 이 소리가 현실인지, 아니면 자신의 상상이 빚어낸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엑스 하나를 새겨 또 하루를 지웠다.
갇힌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 P9

순수하게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면 그는 자신이 저지른 행위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에게 법적인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얼마든지 중형을 받을 수 있다는 현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정서적인 관점으로 들어가면 이 모든 이성적인 사고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자신의 행동이 잘못됐다는사실을 인정할 뿐, 행위 자체를 자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 년전, 리스베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첫눈에 그녀가 자신의 장난감이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법이니 규칙이니 윤리니 사회적 의무 같은 건이미 관심 밖이었다.
그녀는 참으로 기묘했다. 성인이었지만 마치 미성년자처럼 보였다. 그녀의 삶을 제어할 권리가 그에게 있었으니 더욱 마음대로 그녀를 가지고 놀 수 있었다. 한마디로 완벽한 조건이었다. - P50

사회적으로 무능해 남의 손아귀에 맡겨진 난잡한 성인 여자......
그렇다.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이상적인 장난감이었다.
닐스 비우르만이 이처럼 고객을 학대한 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과 직업적으로 관계를 맺은 누군가를 성적으로 이용하는 일은감히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특별한 성적 욕구를 배출하고 싶을 때는주로 성매매를 했다. 은밀하고도 신중하게 행동했으며 그 일에서만큼은 돈을 아끼지 않았다. 다만 그녀들이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녀들의 행위는 연극에 불과했다. 그가 돈을 지불하면 여자들은 신음하고 비명을 질러대며 애써 연기를 했지만 그 모든 결과는 거장의 모사화만큼이나 참담할 뿐이었다.
결혼 후에는 아내를 지배하려고 시도해봤지만 실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녀 역시 협조해줬지만 연극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그에게 리스베트는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여인인 셈이었다. 그녀에게는 방어수단이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완벽하게 취약한 존재이자 진정한 희생양이었다. 그리고 결국 기회가 도둑을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그를 짓뭉개버렸다.
그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힘과 결의로 반격해왔다. 도리어 그를 능멸하고 고문했다. 한마디로 그를 부숴버렸다. - P51

이윽고 리스베트는 사라졌다. 그녀가 열쇠를 돌려 현관문을 잠그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는 귀신에라도 홀린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닐스는 그녀를 더욱 강렬하게 증오했다. 시뻘겋게 달궈진 강철처럼 마음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증오, 그녀를 짓이겨버리겠다는 미친듯한 갈증이 그의 삶 자체가 되어버린 증오였다. 그는 그녀의 죽음을 상상했다. ‘그래, 네발로 기면서 자비를 빌게 만들 거야. 하지만 난 무자비하지. 그년 목에 두 손을 대고서 천천히 조를 거야. 얼굴이 새빨개져서 캑캑댈 때까지... 닐스는 그녀의 눈알을 뽑아내고 가슴에서 심장을 끄집어내고 싶었다. 지구상에서 그녀를 깨끗이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순간, 그의 육체가 다시 기능하기 시작했고 기이한 정신적 균형 상태가 되돌아왔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 관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음을. 깨어 있는 매 순간을그녀의 존재에 집중하고 있음을.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다시 합리적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 그녀를 짓이기기 위해서는 스스로 이성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해야 했다. 그의 삶에 새로운 목적이 하나 생겼다.
닐스는 그날 이후로 더이상 리스베트의 죽음을 상상하지 않았다. 대신 그것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 P56

미카엘은 이 자리에서 다그를 처음 만났지만 불현듯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부류의 기자, 즉 이야기의 본질을 아는 기자였다. 미카엘이 생각하기에 기자가 명심해야 할 진실이 하나 있다면 어떤 일에는 항상 책임을 물어야 할 인물, 즉 나쁜 놈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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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엘은 이 자리에서 다그를 처음 만났지만 불현듯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부류의 기자, 즉 이야기의 본질을 아는 기자였다. 미카엘이 생각하기에 기자가 명심해야 할 진실이 하나 있다면 어떤 일에는 항상 책임을 물어야 할 인물, 즉 나쁜 놈이 구체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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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6일 토요일 저녁, 오펜하이머는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을 위한 모금 행사에 참석했다. 그가 나중에 증언한 바에 따르면, 그는 그 다음 날 진주만에 대한 일본의 기습 소식을 듣고 난 후 "스페인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히 할 만큼 했다. 세상에는 다른 더 급박한 위기가 닥치고 있다."라고 마음먹었다. - P285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미국 곳곳의 수많은 물리학자들은 이르면1939년 2월부터 원자 폭탄을 만드는 것이 가능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이 문제에 아직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유럽에서 전쟁이 시작되기 한 달 전 1939년 9월 1일), 레오 질라르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설득해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내는(질라르드가 작성한) 편지에 서명하게 했다. 질라르드는 이 편지에서 대통령에게 "새로운 종류의 대단히 강력한 폭탄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나아가 그는 "이와 같은 폭탄 단 1개를 배로 실어 와 항구에서 폭발시키면 항구 전체는 물론이고 주변 지역까지 파괴할 수 있을것"이라고 지적했다. 불길하게도 그는 독일이 이미 그와 같은 폭탄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한 후 그곳의 광산에서 채굴된 우라늄의 수출을 금지했던 것이다. - P287

시간이 지나자 오펜하이머의 "명사들"은 토론을 유도하고 토론 내용을 정리하는 그의 재능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텔러는 나중에 "오펜하이머는 좌장으로서 세련되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격식에 얽매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가 사람을 다루는 기술을 어떻게 습득했는지 모른다. 그를 알던 사람들은 매우 놀랐다."라고 기록했다. 베테도 텔러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는 즉시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가끔은 첫 번째 문장만 듣고 곧바로 문제 전체에 대해 이해하는 경우도있었지요.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의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있었던 인공 폭발을 살펴보는 작업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들은 1917년에 노바스코샤 핼리팩스(Halifax)에서 탄약을 가득 실은배가 폭발한 것을 사례로 삼았다.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는 약 5,000톤의 TNT로 인해 핼리팩스 시내의 6제곱킬로미터가 파괴되었고 약 4,000명이 사망하였다. 그들은 핵분열 무기가 핼리팩스 폭발의 약 두세 배의 파괴력을 가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펜하이머는 이어서 운반할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핵분열 장치의 기본 설계법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들은 지름 20센티미터 정도의 금속제 구에 우라늄 중핵을 넣으면 연쇄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계산했다. 다른 설계상의 세부적인 내용은 대단히 정밀한 계산을 요구했다. 베테는 "우리는 항상 새로운 기법을 생각해 내고, 계산을 해 봐서,
그 계산 결과에 따라 그때까지 생각했던 대부분의 기법들을 폐기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나는 그제야 우리 그룹의 명실상부한 지도자였던오펜하이머의 엄청난 지적 능력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잊지 못할 지적 경험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 P291

7월 들어 텔러가 자신이 수소 또는 "슈퍼" 폭탄의 가능성에 대한 계산을 마쳤다고 밝혀 논의가 잠시 중단되었다. 텔러는 그해 여름 핵분열폭탄은 확실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버클리에 왔다. 하지만 핵분열 무기에 대한 논의에 지루해진 그는 1년 전쯤 엔리코 페르미가 점심을 같이 먹으며 제안했던 또 다른 문제를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페르미는 핵분열 무기로 상당량의 중수소(deuterium)에 불을 붙이면 훨씬 강력한 핵융합 폭발을 만들어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텔러는 - P292

12킬로그램의 액체 중수소에 핵분열 무기로 불을 붙이면 100만 톤 분량의 TNT가 폭발하는 것과 같은 위력을 낼 수 있으리라는 계산 결과를 발표해 세미나 참가자들을 놀라게 했다. 텔러는 이 정도 크기의 폭발이라면 핵분열 폭탄만으로도 90퍼센트 이상이 수소인 지구의 대기에불이 붙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베테는 나중에 "나는 그것을 절대로 믿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슈퍼 폭탄과 텔러의 종말론적 계산 결과에 대해 콤프턴에게 개인적으로 보고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시건 북부 호수가에 위치한 여름 별장에 있던 콤프턴을 찾아갔다.
콤프턴은 나중에 "나는 그날 아침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나는 오펜하이머를 기차역에서 태우고 평화로운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물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자폭탄이 대기 중의 질소나 바다물의 수소 폭발을 유발할 가능성이 정말있는가? •••••• 인류의 생존을 걸고 도박을 하느니 나치스 치하의 노예로 사는 편이 낫지 않은가."
결국 베테가 대기에 불이 붙을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는 계산 결과로 텔러와 오펜하이머를 설득했다.  - P293

낼수1942년 9월 무렵이면 오펜하이머의 이름은 정부 관계자들 사이에서원자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극비 군사 연구소를 이끌 후보자로 거론되고 있었다. 부시와 코넌트는 확실히 오펜하이머가 적절한 인물이라고생각했다. 오펜하이머가 여름 동안 했던 일은 부시와 코넌트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육군이여전히 오펜하이머에게 비밀 취급 인가를 내주기를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 역시 자신의 수많은 공산주의자 친구들이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콤프턴과의 전화 통화에서 "나는 공산당과의모든 관계를 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6 "그렇지 않으면 정부가 나를이용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을 테니까요. 내가 국가에 봉사하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2년 8월에콤프턴은 전쟁부가 "(오펜하이머)에 반대한다."라는 연락을 받았다.
오펜하이머의 보안 파일에는 그의 "공산주의적" 활동을 비롯한 여러 "수상한" 행적들에 대한 보고서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피는 1942년 초 스스로 보안 설문지를 작성했는데, 이때 그가 가입했다고 밝힌 많은조직들 중에는 FBI가 공산당 위장 단체라고 생각하던 것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 P294

이 무렵 부시와 코넌트는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군부를 개입시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부시는 육군 병참 업무를 총괄하던 브레혼 소머벨(Brehon B. Somervell) 장군을 만났다. S-1 프로젝트에 대해 이미 잘 알고있던 소머벨은 부시에게 자신이 이미 S-1을 감독할 사람을 뽑아 두었다.
고 말했다. 1942년 9월 17일에 소머벨은 의회 청문회장 밖의 복도에서46세의 육군 장교 레슬리 그로브스 중령을 만났다. 그로브스는 미옥군 공병감실(Army Corps of Engineers) 소속으로, 최근 완공된 펜타곤의건설을 지휘했던 인물이었다. 이제 그는 해외 전투 보직을 받고 싶어 했다. 하지만 소머벨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로브스는 워싱턴에서 다른 일을 맡게 될 것이었다.
그로브스는 차분하게 "나는 워싱턴에 머무르고 싶지 않습니다."라고말했다.
소머벨은 "이번 일을 잘 하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기게 될 거야."라고대답했다.
S-1에 대해 알고 있던 그로브스는 "아, 그 일 말입니까."라고 말했다. 20 그는 시큰둥했다. 그는 이미 S-1에 배정된 1억 달러의 예산의 몇배나 되는 자금을 육군의 각종 건설 프로젝트에서 집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머벨은 결심을 굳혔고, 그로브스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없었다. 그는 곧 준장으로 진급했다.
그로브스는 남들이 자신의 명령에 따르는 데 익숙해 있었는데, 이는오펜하이머와 닮은 점이었다. 그 한 가지 유사점을 제외하면 두 남자는정반대였다. 그로브스는 183센티미터에 가까운 장신에 113킬로그램의육중한 몸의 소유자였다. 그는 무뚝뚝했고 직설적이었으며 미묘한 외교적 수완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오펜하이머는 언젠가 "아 그래, 그로브스는 빌어먹을 놈이지만 적어도 솔직하기는 해!"라고 말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뉴딜에 대한 경멸감을 감추지 못하는 보수주의자였다. - P295

그로브스가 보기에 오펜하이머는 다양한 분야에 걸친 문제들에 대한 실제적인 해답들을 신속하게 찾아내지 못하면 원자 폭탄 프로젝트는 실패로 돌아가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 시카고, 버클리 등지에서 고속 중성자 핵분열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여러 그룹들이 똑같은 작업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 과학자들을 한 곳으로 모아 공동 연구를 해야만 했다. 이 역시 엔지니어 출신인 그로브스의 입맛에 맞았고, 오펜하이머가 중앙 연구소의개념을 주장했을 때 고개를 주억거리기까지 했다. 오펜하이머는 새로운연구소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고찰해 보지 않았던 화학, 금속학, 공학등 다양한 문제들에 대처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5그로부터 1주일 후,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를 시카고로 불러서 뉴욕으로 향하는 특급 열차에 함께 올랐다. 26 그들은 기차 위에서 논의를계속했다. 이 무렵 그로브스는 이미 오펜하이머를 제안된 중앙 연구소의 책임자 후보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그는 오펜하이머에게는 세 가지결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 이 물리학자는 노벨상 수상자가 아니었는데, 그로브스는 이것이 그가 노벨상을 받은 수많은 동료들의 연구 활동을 지도하는 데 방해 요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그에게는 행정 경험이 전무했다. 그리고 셋째, "(그의 정치적) 배경에는 우리의입맛에 전혀 맞지 않는 요소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베테는 "오펜하이머가 총책임자가 될 것이라는 것은 명백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큰 집단을 지도해 본 경험이 전혀없었으니까요." 그로브스의 낙점에 다른 사람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로브스는 나중에 "나는 당시 과학계의 지도자들이었던사람들로부터 전혀 지원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반대의 목소리가 드높았다."라고 썼다. 29 그중 한 가지 이유는 오펜하이머는 이론가였고, 원자폭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험가와 엔지니어의 재능이 필요하는 것이다.
로런스는 오펜하이머를 존경했지만, 그로브스가 그를 선택했다는 소식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30 또 다른 친구이자 오펜하이머의 추종자인 이지도어 라비 역시 전혀 있을 법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는매우 비실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다 닳아빠진 신발에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돌아다녔어요. 게다가 그는 실험 장비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한 버클리 과학자는 "그는 햄버거 장사도제대로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 P297

오펜하이머가 프로젝트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넬슨은 이제 조를 통해 소련에게 유용할지도 모르는 정보를 빼내려고 노력했다.
불법 도청으로 만들어진 FBI의 27쪽짜리 녹취록에는 이어서 조가조심스럽게, 하지만 기꺼이 미국의 연합국(소련)에게 도움이 될 만한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이야기했다고 나와 있다. 넬슨은 그와 같은 무기가 언제쯤 완성되겠냐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조는 폭발 실험을 하기에 충분한 물질을 분리하는 데 적어도 1년 이상 걸릴 것이라고예측했다. 조는 "예를 들어 오피는 이것이 1년 반이나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넬슨은 "그러면 정보를 넘겨주는문제에 대해서 말이야. 그(오펜하이머)가 협조적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매일 설득하려고 시도할 거야."라고 말했다. 녹취록을 분석하는 임무를맡은 FBI 또는 육군 방첩대 요원은 이 대목에서 "오펜하이머가 스티브에게 정보가 새 나갈까 봐 과도하게 조심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발언"이라고 쓰고 있다.
이 녹취록은 조가 넬슨에게 정보를 건네주었음을 암시하는 것과 함께, 오펜하이머가 보안 문제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넬슨이•오펜하이머가 비협조적이고 과도하게 신중하다고 결론 내렸다는 것을보여 주는 것이었다. - P303

14장슈발리에 사건

슈발리에를 통해서 오펜하이머에게 이야기했는데,
오펜하이머는 이 일에 전혀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조지 엘텐튼

한 사람의 인생은 조그만 일로도 뒤바뀔 수 있다. 오펜하이머에게는 그러한 일이 1942~1943년 겨울, 그의 이글 힐 집의 부엌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친구와의 짧은 대화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대화의 내용과 그에 대한 오피의 대응 방식은 고전 그리스와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비교하는것이 적절할 정도로 그의 여생을 바꾸어 놓았다. 이것은 ‘슈발리에 사건‘
으로 세간에 알려졌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파악할 수 없게 되어 흡사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1998년)감독의 1951년작 「라쇼몬(羅生門)」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었다.
버클리를 떠나기 얼마 전, 오펜하이머 부부는 슈발리에 부부를 집으로 초대해 저녁 식사를 했다. 그들은 하콘과 바버라를 가장 친한 친구로 여겼으며, 떠나기 전에 특별히 두 사람을 위한 송별회를 하려던 것이었다. 슈발리에 부부가 도착했을 때, 오펜하이머는 마티니를 준비하러 부엌에 들어갔다. 슈발리에는 오펜하이머를 따라 들어와 그들 공통의 지인이자 케임브리지 출신의 영국인이고 당시 셸 개발 회사에서 일하고있던 조지 엘텐튼과 최근에 나눈 대화를 전했다.
둘 다 그 대화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에 정확히 어떤 이야기가오갔는지는 알 수 없다. 슈발리에가 전한 제안은 터무니없는 것이었고, 당시에는 둘 다 중요한 대화라고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엘텐튼은 오펜하이머가 그의 과학적 작업에 대한 정보를 자신이 아는 샌프란시스코 소련 대사관의 외교관에게 넘길 수 있느냐고 슈발리에에게 물었던 것이다.
오펜하이머는 슈발리에에게 "반역죄"를 범하라는 것이냐고 화를 내며 말했고, 당신도 엘텐튼의 계획에 관여하지 말라고 충고했다는 것에대해서는 슈발리에, 오펜하이머, 그리고 엘텐튼의 증언이 일치했다.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동맹인 소련이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는 와중에, 워싱턴의 반동 세력들이 소련이 정당하게 받아야 할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는, 당시 버클리 좌익 서클에서 유행하던 주장에 흔들리지 않았다.
슈발리에는 항상 자신이 단지 엘텐튼의 제안을 오펜하이머에게 알려주었을 뿐이지, 엘텐튼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오펜하이머 역시 친구의 전언에 대해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 사건을 소련의 생존에 대한 슈발리에의 과도한 관심에서 비롯된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가 즉시 관계 당국에 연락을 취했어야 했을까? 그랬다면 그의 인생은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려면 그가 보기에 과도한 이상주의자에 지나지 않는 친구를 고발해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에 마티니가 준비되었고, 대화는 끝났고, 두 친구는 다시거실로 돌아와 부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 P309

엘텐튼이 어느 날 슈발리에에게 전화를 걸어 할 말이 있다고 하자, 슈발리에는 며칠 후 차를 타고 버클리 크래그몬트 가 986번지에 있는엘텐튼의 집으로 찾아갔다. 엘텐튼은 전쟁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말했다. 그는 소련이 나치스 공격의 주력을 막아 내고있으며(독일군의 5분의 4는 동부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전쟁의 결과는 미국이 얼마나 연합국 러시아에 무기와 신기술을 제공해 주는가에 달려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소련과 미국 과학자들 사이에 긴밀한 협조가 중요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엘텐튼은 자신이 샌프란시스코 소련 영사관의 서기인 페테르 이바노프(Peter Ivanov)라는 사람을 만났다고 말했다(사실 이바노프는 소련 정보 요원이었다.). 이바노프는 "소련 정부는 많은 부분에서 충분한 과학 기술적협조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낀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엘텐튼에게 버클리 방사선 연구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1946년에 FBI는 슈발리에 사건에 대해 엘텐튼을 심문했고, 그는 이바노프와의 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나는 그(이바노프)에게개인적으로는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내가 로런스교수, 오펜하이머 박사, 기억이 안 나는 또 다른 한 명을 아느냐고 물었다. (엘텐튼은 나중에 이바노프가 언급한 세 번째 과학자가 루이스 앨버레즈라고 생각했다.) 엘텐튼은 자신이 오펜하이머밖에 모르며, 그 역시도 이 문•제를 의논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이바노프는 계•속해서 오펜하이머에게 접근할 수 있을 만한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보라고 밀어붙였다. "생각해 보니 하콘 슈발리에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바노프는) 내가 (슈발리에와) 이 문제를 의논해 볼 용의가 있느냐고 물었다.
이바노프는 그와 같은 정보를 얻어 낼 수 있는 공식 통로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는 현 상황은 하콘 슈발리에에게 접근해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 정도로 중대한 상황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 후, 슈발리에에게 연락을 해 보기로 했다."
엘텐튼에 따르면, 그와 슈발리에는 "상당히 마지못해" 오펜하이머에게 접근해 보기로 동의했다. 엘텐튼은 만약 오펜하이머가 유용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면 이바노프가 그것을 "안전하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슈발리에를 안심시켰다. 엘텐튼의 설명에 따르면 자신과 슈발리에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확실히 이해했다. "이바노프는 보상 문제를제기했지만 구체적인 액수까지 거론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나는 내가하는 일의 대가로 돈을 받고 싶지 않았다."
엘텐튼은 1946년 FBI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며칠 후 슈발리에는자신이 오펜하이머를 만나 보았는데, "자료를 구할 가능성은 전혀 없으며 오펜하이머 박사는 그와 같은 계획에 찬성하지 않았다."라고 엘텐튼에게 통지했다. 얼마 후 엘텐튼의 집으로 찾아온 이바노프 역시 오펜하이머가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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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그녀는 좁다란 철제 간이침대에 묶여 있었다. 온몸을 옭아맨 가죽끈들로 옴짝달싹할 수 없었는데 마구처럼 생긴 굵직한 벨트가 흉곽을 단단히 조이고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는 그녀의 두 손목은 가느다란 가죽끈으로 침대 양쪽 강철봉에 묶여 있었다.
벗어나보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정신은 깨어 있었지만 눈은 감은 채였다. 눈을 떠봐야 아무 소용 없었다. 보이는 건 시커먼 어둠에 문틈으로 가느다랗게 새어드는 빛줄기가 전부였다. 입에서는 고약한 맛이 느껴졌다. 지금처럼 이를 닦고 싶은 욕구가 맹렬한 적도 없었다.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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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주 후, 오펜하이머와 키티는 슈발리에 부부에게 대단히 어려운 부탁을 했다. 오펜하이머는 키티에게 휴식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가 키티와 함께 페로 칼리엔테로 한 달간 휴가를 가 있는 동안 슈발리에 부부가 태어난 지 두 달된 피터와 그의 독일인 보모를 맡아 줄수 있을까 하는 부탁이었다. 슈발리에는 이 부탁을 오펜하이머가 가장 가까운 친구라는 자신의 감정에 대한 확증으로 받아들였다." 슈발리에 부부는 부탁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피터를 한 달이 아니라 두 달동안 맡아 주었다. 이로써 키티와 오펜하이머는 가을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떠나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어머니와 아기 사이의 관계에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키티는 피터와 제대로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1년이 지난 후에도, 친구들을 아기 방으로 데리고 가서 자랑하는 것은 항상 오펜하이머였다. 한 옛 친구는 "키티는 무관심한 듯했습니다."라고 말했다." - P265

1939년 1월 29일 일요일, 어니스트 로런스와 가깝게 일하던 전도유망한 젊은 물리학자 루이스 월터 앨버레즈(Luis Walter Alvarez, 1911~1988년)는<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을 읽으며 머리를 깎고 있었다. 그는 두 명의독일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Fritz Strassman, 1902~1980년)이 우라늄 원자핵을 2개 이상으로 쪼갤 수 있다는 것을 보이는 실험에 성공했다는 뉴스 통신사 기사를 읽었다. 그들은 가장 무거운 원소 중하나인 우라늄을 중성자로 때림으로써 핵분열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소식에 놀란 앨버레즈는 "이발이 끝나기도 전에 한달음에 방사선 연구소까지 뛰어가 소식을 전했다. 그가 오펜하이머에게 소식을 전했을 때 그의 대답은 "그건 불가능해."였다. 오펜하이머는 칠판으로 가서 핵분열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였다. 누군가 실수를 저지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다음 날 앨버레즈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그 실험을 성공적으로 재현했다. "나는 오펜하이머를 불러서 매우 작은 자연 상태의 알파입자의 파동과 25배나 큰 핵분열 파동이 나타나는 것을 오실로스코프를 통해 보여 주었습니다. 오펜하이머는 곧 이 반응이 가능하다는 것에 동의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추가적으로 발생하는 중성자를 이용해 더 많은 우라늄 원자를 쪼갤 수 있으며, 이를 이용해 전력을 생산하거나 폭탄을 난들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그의 생각이 얼마나 빨리 전개되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었지요." - P267

이기오펜하이머는 1941년 가을에 노조 문제에서 손을 뗐다. 하지만 방사선 연구소의 과학자들을 노조로 결성한다는 계획 자체가 폐기된 것은아니었다. 약 1년이 지난 1943년 초, 로시 로마니츠, 어빙 데이비드 폭스(Irving David Fox), 데이비드 봄, 버나드 피터스, 그리고 막스 프리드먼은노조(FAECT 25호 지부)에 가입했다. 이들은 모두 오펜하이머의 학생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사실상 노조를 결성할 이유가 없었다. 예를 들어 로마니츠는 방사선 연구소에서 150달러의 월급을 받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예전에 받던 봉급의 두 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노동 조건에 대한 불만도 없었다. 모두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 일할 용의가 있었다.
로마니츠는 "그것은 뭔가 극적인 일 같았습니다. 젊은 시절에 해 볼만한 일이라는 것이지요……. 노조를 결성하는 이유로는 터무니없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프리드먼은 로마니츠와 와인버그의 설득에 넘어가 방사선 연구소의 조직책이 되었다. 그는 "이름만 그렇지 나는 아무 일도 한 것이 없었어요."라고 회고했다." 하지만 그는 노조를 결성하는 것이 원칙적으로는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의 마음 한구석에는 원자 폭탄이 무엇에 사용될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과학자들이 자신의 노력이 어떻게 이용될지에 대해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상황에서는 원자 폭탄 프로젝트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 P281

오펜하이머는 10월 21일에 스케넥터디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고, 효과적인 무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우라늄 235의 양에 대한 그의 계산 결과는 워싱턴으로 보내는 최종 보고서의 핵심 부분이 되었다. 그의계산에 따르면 폭발적 연쇄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100킬로그램 정도의 우라늄만 있으면 충분했다. 코넌트, 콤프턴, 로런스 등 몇 명만이참석한 이 회의는 오펜하이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나치스 군대가이미 모스크바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낙담한 오펜하이머는 미국의 전쟁 준비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는 레이더를 연구하던 동료들을 부러워했다. 그는 나중에 "하지만 기초적인 원자력 에너지 연구를 하는것을 직접 보고 나서야 내가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증언했다.  - P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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