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사라진 정복자

칭기스 칸은 행동하는 사람이었다.-워싱턴 포스트 (1989)

1937년 몽골 중부의 거무스름한 샹크 산맥 아래를 흐르는 ‘달의 강‘ 가 어느 절에서, 칭기스 칸의 영혼이 사라졌다. 충성스런 라마승들이 수백년 동안 보호하고 경배해오던 영혼이었다. 1930년대에 스탈린의 심복들은 여러 차례 몽골의 문화와 종교를 공격하여 파괴했고 그 과정에서약 3만 명의 몽골인을 처형했다. 군대는 사원을 차례차례 짓밟았다. 승려를 사살하고, 여승을 폭행하고, 종교 유물을 부수고, 도서관을 약탈하고, 경전을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누군가 샹크 사원에서 칭기스 칸의 영혼의 상징물을 몰래 빼냈고, 수도 울란바토르의 안전한 장소에 보관했으나, 결국 그곳에서도 사라졌다고한다. - P11

몽골군은 정복에 정복을 거듭하면서 전쟁을 수천 킬로미터를 가로질러 펼쳐진 다수의 전선에서 벌이는 대륙간 사업으로 바꾸어놓았다. 칭기스 칸의 혁신적인 전투 기술로 인해 중세 유럽의 중무장한 기사는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고, 전체에 통합된 단위를 이루어 움직이는 규율 잡힌 기병이 전면에 나섰다. 칭기스칸이 방어용 요새에 의존하는 대신 기습을 기발하게 활용하고 공성전을 완벽하게 다듬어 운용하자, 성벽을 두른 도시의 시대도 끝이 났다. 칭기스 칸은 오랜 기간 원정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민족에게 엄청나게 넓은 공간에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었다. 그 결과 몽골군은 세 세대가 넘게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칭기스칸은 아들, 손자들과 함께13세기에 가장 인구 밀도가 높은 문명들을 정복했다. 그가 굴복시킨 사람들 숫자로 보나, 합병한 나라들의 숫자로 보나, 정복한 땅의 면적으로보나 칭기스칸은 역사상 다른 어떤 정복자보다 두 배 이상을 정복했다.
몽골 전사들의 말발굽은 태평양부터 지중해까지 모든 강과 호수의 물을밟아보았다. 전성기 몽골 제국은 연속되는 면적으로 2800만 내지 3100만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대략 아프리카 대륙만한 넓이며, 미국, 캐나다, 멕시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의 섬들을 합친 면적보다도 훨씬 넓다. 몽골 제국은 눈 덮인 시베리아 툰드라부터 인도의 뜨거운 평원까지, 베트남의 논에서부터 헝가리의 밀밭까지, 고려에서부터 발칸 제국까지 뻗어 있었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다수가 한때 몽골이 점령했던 나라에 살고 있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이런 성취에서 가장 놀라운 측면은 그의 휘하에 있던 몽골 부족 전체가 약 100만 명으로, 현대일부 기업의 직원들보다 적은 수였다는 점이다. 칭기스 칸은 이 100만명에서 군대를 징집했는데, 그 수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현대의 대형경기장도 꽉 채우지 못할 숫자였던 것이다. - P14

칭기스 칸의 기병대가 13세기를 가로질러 돌격하자 세계의 경계가다시 그려졌다. 칭기스 칸은 돌이 아니라 나라로 건축을 했다. 칭기스칸은 다수의 작은 왕국들로는 만족을 못했는지 작은 나라들을 합쳐서큰 나라로 만들었다. 몽골군은 동유럽에서 슬라브족의 공국과 도시 여남은 개를 묶어 하나의 커다란 러시아 국가를 만들었다. 동아시아에서는 3대에 걸쳐 남쪽의 송나라에 만주의 주르첸(여진을 가리킨다), 서쪽의 티베트, 고비 사막 옆의 탕구트, 투르키스탄 동부의 위구르의 땅을 결합하여 커다란 중국을 만들었다. 몽골은 통치 영역을 확대하면서 인도도 통치했다. 인도는 대체로 몽골 정복자들이 세운 경계 안에서 현대까지 생존해왔다.
칭기스 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그가 태어난 1162년, 구세계는 여러 지역문명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각각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 외에는 다른 문명을 거의 알지 못했다. 중국은 유럽을 몰랐고, 유럽은 중국을 알지못했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중국과 유럽 사이를 여행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칭기스 칸이 사망한 1227년에 중국과 유럽은 외교나 상업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그 연결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 P16

칭기스 칸은 귀족적 특권과 출생에 기초한 봉건제를 부수고 개인의장점과 충성심, 성취에 기초한 새롭고 독특한 체제를 건설했다. 그는
‘비단길‘ 주변에 고립되어 있는 굼뜬 교역도시들을 점령하여 비단길을역사상 가장 큰 자유무역지대로 조직해놓았다. 칭기스 칸은 전체적으로세금을 내렸으며, 의사, 교사, 사제, 교육기관에는 완전히 면제해주었다. 정기적으로 통계조사를 했고, 처음으로 국제적인 역전(傳) 제도를확립했다. 몽골은 부와 보물을 축적하는 제국이 아니었다. 대신 칭기스칸은 전투에서 얻은 물자를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 유통망으로 들어가게 했다. 칭기스 칸은 국제법을 만들고 ‘영원한 푸른 하늘‘의 법을만민을 다스리는 궁극적인 최고의 법으로 규정했다. 대부분의 통치자가 스스로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 칭기스 칸은 통치자도 미천한 목자와 똑같이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복당한 모든 신민에게 종교와 관계없이 완전한 충성을 요구했지만, 영토 내에서 종교적자유를 허용했다. 법의 지배를 내세우고 고문을 철폐했지만, 양민을 습격하는 도적떼나 테러리스트 암살자들을 찾아내 죽이기 위한 대규모 원정에는 서슴없이 나섰다. 그는 볼모를 잡아두는 관행을 없애고, 대신 모든 대사와 사절에게 외교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새로운 관행을 수립했다. 전쟁 중인 적대국가의 사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칭기스 칸은 제국을 단단한 기초 위에 세워두고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 제국은 그 뒤에도 150년 동안 더 팽창해나갔다. 제국이 붕괴한뒤에도 수백 년 동안 그의 후손은 러시아, 터키, 인도에서 중국과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작은 제국과 큰 나라를 다스렸다. 이 통치자들은 칸, 황제, 술탄, 왕, 샤, 아미르, 달라이 라마 등 다양한 절충적 칭호를 사용했다.  - P17

그들은 칭기스 칸을 고향 땅에 비밀리에 묻은 뒤 그 주변 수백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폐쇄했다. 특별히 훈련받은 전사들이 침입자를 죽이는임무를 부여받고 그 땅을 지켰으며, 칭기스 칸의 가족 외에는 아무도 그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아시아 심장부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이후 호리그, 즉 대금구(區)‘는 거의 800년 동안 폐쇄되어 있었다. 칭기스 칸제국의 모든 비밀이 그의 신비한 고향에 모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몽골 제국이 무너지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외국 군대가 몽골의 여러 지역을 침입하기도 했지만, 몽골인은 조상의 성지에는 아무도 발을들여놓지 못하게 끝까지 막았다. 몽골인이 불교로 개종하는 과정에서많은 사건이 발생했지만, 칭기스 칸의 후계자들은 성직자가 그의 매장지를 표시할 사당이나 절이나 기념물을 세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20세기에는 소련 통치자들이 칭기스 칸의 탄생지나 매장지가 민족주의자들의 집결지가 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지켰다. 소련 사람들은 이곳이 칭기스 칸과 관련이 있다는 암시를 줄까봐 대금기라는 말이나 다른 역사적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접근 금지구역‘ 이라는 관료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그들은 행정 체제에서도 이곳을 주변 지역과 분리하여 중앙정부의 직접 관할 지구로 돌렸다. 물론 몽골 중앙정부는 모스크바의 통제를 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소련은 접근 금지구역 주변의 100만헥타르를 ‘접근 제한구역‘으로 설정하여 봉쇄했다. 공산주의자들이지배하던 시기에 정부는 이 지역으로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아예 도로나 다리를 건설하지 않았다. 소련은 제한구역과 몽골의 수도울란바토르 사이에 요새화된 미그기용 공군기지를 건설했다. 아마 핵무기를 보관하는 창고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커다란 소련 탱크 기지까지 생겨 일반인이 금지구역으로 들어가기란 실제로 불가능했으며, 러시아 군부는 이 지역을 포병과 탱크 훈련장으로 이용했다. - P19

칭기스 칸의 진실은 이런 수많은 정치적 수사(修辭), 사이비 과학, 학자의 상상 속에 묻혀 후대 사람들은 그것을 영영 알 수 없게 되어버린것 같았다. 20세기 공산주의자들은 그의 고향과 그가 권력의 자리에 올라섰던 지역을 폐쇄해버렸다. 그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그곳을 지켜온전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땅을 물샐 틈 없이 봉쇄했다. 이른바 「몽골 비사元朝秘史. Secret History of the Mongols)』라는 이름의 몽골 문건은 비밀인 것만으로 모자랐는지 아예 사라져버렸다. 칭기스칸의 무덤보다더 신비하게 역사의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춘 것이다.

[「몽골 비사와 함께 부활하다]
20세기 들어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지면서 칭기스 칸의 수수께끼 가운데일부를 해결하고 기록도 정정할 예기치 않은 기회를 맞게 되었다. 우선 칭기스칸의 사라진 역사가 포함된 귀중한 원고를 판독하게 되었다. 몽골인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 동안 학자들 사이에서는 칭기스 칸의 삶을 기록한 전설적인 몽골 텍스트를 본 적이 있다는이야기가 가끔 흘러나왔다. 멸종되었다고 여겨지는 희귀동물이나 귀중한 새의 경우처럼 그 텍스트를 보았다는 소문은 학문적 열의보다는 오히려 회의적 태도를 자극했다. 그러다 마침내 19세기에 베이징에서 한자로 적힌 문서 사본이 한 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한자 자체는 쉽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의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한자들은 13세기의 몽골어 발음을 옮겨놓은 일종의 암호였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각 장에 딸린 간략한 한문 요약문만 읽을 수 있었다. 이 요약문을 통해 텍스트에담긴 이야기의 암시는 얻을 수 있었지만, 문서 전체의 내용은 해독할수 없었기 때문에 감질만 날 뿐이었다. 이 문건을 둘러싼 수수께끼 때문에 학자들은 이것을 『몽골비사』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후 이 문건의 이름이 되었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몽골에서 「몽골비사」의 판독은 목숨을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일반인이나 학자들이 이책을 손에 넣지 못하게 막았다. 이 텍스트의 낡고, 비과학적이고, 비사회주의적인 관점이 부적절한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골비사」를 둘러싸고 지하 학술 운동이 전개되었다.  - P27

 소련은 위성국가가 독립적인 길을 걸을지도 모른다는 나아가 예전에는 동맹자였지만 이제는 소련의 적이 된 몽골의 다른 이웃인 중국 편을 들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끼자 화를 내며 비합리적으로 대응했다. 몽골 공산주의자들은 우표의 발매를 금지하고 학자들을 탄압했다. 당 간부들은 투무르-오치르가 "칭기스 칸의 역할을 이상화하는 경향을 드러내는 반역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그를 공직에서 쫓아내고 외딴 곳으로 추방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끝내는도끼로 찍어 죽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정당(공식 명칭은 인민혁명당이다) 내부 인사들을 숙청한 뒤 몽골 학자들의 작업으로 관심을 돌렸다. 당은 그들에게 "반당분자, 중국의 첩자, 방해공작을 벌인 자들, 해충) 등의 낙인을 찍었다. 그 뒤의 반민족주의 캠페인 과정에서 당국은고고학자 페를레를 감옥에 보냈다. 페를레는 투무르-오치르의 스승이라는 이유, 몰래 몽골 제국의 역사를 연구했다는 이유만으로 엄혹한 조건에서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교사, 역사학자, 화가, 시인, 가수들 역시 칭기스칸 시대의 역사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만 있으면 험한 꼴을 당했다. 실제로 당국은 몇 사람을 비밀리에 처형하기도 했다. 어떤 학자들은일자리를 잃고 가족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 한데서 몽골의 가혹한 날씨와 마주해야 했다. 이들은 아파도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방대한 몽골 땅 여러 곳에 흩어진 추방지까지 걸어가야 했다.
이 숙청 기간에 칭기스 칸의 영기는 완전히 사라졌다. 어쩌면 소련이 몽골인을 응징한다며 파괴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야만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그런 탄압 때문에 수많은 몽골 학자들이 독립적으로 『몽골 비사』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비방과 왜곡에 시달리던 자신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목숨을 건 것이다. - P29

몽골군은 역사상 다른 모든 대군과는 달리 보급품 수송대 없이 가볍게 움직였다. 그들은 사막을 건널 수 있는 가장 추운 달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때는 사람이나 말이나 물 소비도 적었다. 이 철에 맺히는 이슬 때문에 잘 자라는 풀이 있었는데, 이것은 말의 먹이가 되었을 뿐아니라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 필요한 사냥감들도 끌어들였다. 몽골인은빠르게 움직일 수 없는 공성(城) 무기나 무거운 장비를 가지고 다니는대신 기동성이 좋은 공병대를 구성하였으며, 이들은 현장에서 손에 넣을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해 필요한 시설을 만들었다. 광대한 키질쿰 사막을 건넌 몽골군은 나무들이 처음 눈에 띄자 그것을 잘라 사다리, 공성무기를 비롯하여 공격에 사용되는 여러 장비를 만들었다. - P42

 칭기스 칸은 어떤 도시를 상대로 심리전을 준비할 때 주민의 앞일을 보여주는 두 가지 예부터 제시했다. 그는 외진 마을에 관대한 항복 조건을 내걸었으며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몽골군에합세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다. 주베이니의 말에 따르면 "그들에게 항복을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안전하게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있었으며, 수치스러운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절하는 사람은 매우 가혹한 대접을 받았다. 몽골군은 그들을 앞장세워 다음 공격의 방어벽으로 이용했다. -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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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르크는 좀 달랐다. 리스베트를 보자마자 얼굴이 환해지면서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오, 리스베트! 이렇게 보게 되어 정말 반갑네. 그렇잖아도 신세를지고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해 마음이 안 좋았는데. 지난번 겨울에도 그랬고, 이번 일도 그렇고......"
리스베트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전단지 보수를 받고 일했을 뿐인데요."
"아, 그런 말이 아니야! 처음 봤을 때 자네를 잘못 판단했었다고. 그걸 사과하고 싶은 거라네."
디르크는 문신과 피어싱을 잔뜩 한 스물다섯 살짜리 젊은 친구에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 일로 매우 정중하게 사과하고 있었다. 미카엘은 사뭇 놀랐다. 갑자기 그가 훨씬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 P498

다시 페이지를 넘긴 순간, 미카엘은 또 한번 목덜미 털이 쭈뼛 일어섰다.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한줄기 바람이 방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하리에트에 대한 수색 작업이 시작된 그다음날의 사진들이었다. 젊은 형사 구스타프 모렐은 제복을 입은 경찰관 두 명과 수색을 돕기 위해 장화 차림으로 집합한 십여 명의 남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있었다. 헨리크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레인코트에 챙이 넓은 영국식 모자를 썼다.
그리고 사진 왼쪽 끝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약간 통통한 체격에 더부룩한 금발머리였고 어깨 부분에 붉은 색이 들어간 어두운 퀼트재킷을 입고 있었다. 사진은 지극히 선명했으며 미카엘은 그를 즉시 알아보았다. 하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사진을 꺼내 아래층으로 내려가 안나에게 이 사람을 알아보겠느냐고 물었다.
"알다마다요! 마르틴 회장님 아니에요? 이때가 아마 열여덟 살쯤이겠죠" - P504

협곡을 빠져나오니 보다 완만한 구릉지대가 펼쳐졌다. 갑자기 어디선가 총성이 들렸다. 이어 곳곳에 뒹구는 양들의 시체와 커다란 화톳불들과 목장 일꾼으로 보이는 사내 여남은 명이 보였다. 모두 손에엽총을 들고 있었다. 아마도 양들을 도축하는 모양이었다.
미카엘은 자신도 모르게 희생번제를 위해 도살당하는 성경 속 양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 여인을 보았다. 청바지에 흰색과 빨간색이 들어간 체크무늬 셔츠를 걸쳤고 머리는 짧은 금발이었다. 제프는 그녀에게서 몇걸음 떨어진 곳에 지프를 세웠다.
"하이, 보스! 관광객이 한 명 찾아왔어요."
미카엘이 지프에서 내려 그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녀는 의혹에 찬 눈으로 미카엘을 쳐다보았다.
"안녕하세요, 하리에트! 정말 오랜만이군요." 미카엘이 스웨덴어로인사했다. - P569

미카엘은 일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하리에트를 찾으러 갔다. 그런데 순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전날 아를란다 공항에서 헤어지고 난 후 그녀가 머리색을 원래대로 되돌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은 바지에 하얀 블라우스, 우아한 회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미카엘은 몸을 굽혀 그녀의 볼에격려의 키스를 남겼다.
미카엘이 그녀를 들여보내려고 병실 문을 열자 헨리크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리에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안녕, 헨리크 할아버지!" 그녀가 들어가며 인사했다.
노인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그녀를 살폈다. 미카엘이 디르크에게 고갯짓으로 신호를 보내 두 사람만 남겨놓고 나와 문을 닫았다. - P587

"좋아, 그만두자고 그런데 왜 돌아왔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내가 실수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리스베트, 넌 ‘우정‘이란 말을 어떻게 생각해?"
"누군가를 좋아하는 걸 말하겠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뭘 의미할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는 이렇게 정의했어. 우정의 토대를 이루는 건 두 가지, 존경과신뢰라고 생각해. 이 두 요소는 반드시 함께 있어야 해. 누군가를 존경한다 해도 신뢰가 없다면 우정은 갈수록 약해질 뿐이야."
그녀는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내가 생각하기엔 넌 스스로에 대해 나와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없어. 하지만 언젠가는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올 거야. 나를 신뢰해야할지 말지. 나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지만 나 혼자서는 친구가 될수 없는 노릇이야."
"당신과 같이 자는 게 좋을 뿐이에요."
"섹스는 우정과 아무 상관이 없어. 물론 친구 사이에도 잠은 잘 수있지. 하지만 리스베트, 만일 너를 두고 우정과 섹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난 뭘 선택해야 할지 잘 알고 있어." - P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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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물질을 제품에 첨가하는 것은 식품 기업에게 언제나까다로운 일이었다. 1990년 이전까지 기업들은 광고에 선전 문구를 마음대로 써넣을 수 있었다. 이에 미국 의회는 FDA에 이런 기업의 재량을 제한하고 칼슘을 첨가해 골다공증 예방에 도움이 된다든지 포화지방을 줄여 심장병의 위험을 줄일 수 있다든지 같은 실제 과학적근거가 있는 주장만 할 것을 의무화하도록 했다. 오늘날 식품 기업들은 FDA를 압박하여 이 제재를 다시 완화하려 하고 있다. "제품 포장에 쓰인 선전 문구들은 이른바 절단 효과가 있습니다." 한 FDA 연구원이자 사회학자는 최근 있었던 청문회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다시 말해 제품 겉면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어떤 문구가 쓰여 있으면소비자들은 라벨의 영양 성분 정보를 잘 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품 앞면에 노출된 정보에 감탄하여 매력을 느끼면 뒷면 라벨에 적혀 있는 좋지 않은 성분들은 간과한다는 의미다. 이런 효과를 유도하기 위해 사용되는 첨가물은 아주 다양한데, 당근이나 호박에있는 베타카로틴(세포를 손상하는 유리기를 중화한다.), 토마토에 있는리코펜(전립선 건강에 유익하다.), 귀리 겉겨와 호밀에 많은 베타글루칸(특정 암 발병의 위험을 줄인다.)도 그중 일부다." 그러나 이런 성분의 효과에 대한 과학적 증거는 아직 불충분하다.
어떤 첨가물은 심리적으로 너무나 강한 인상을 주어서 다른 특별한 선전 문구 없이도 단독으로 제품 포장의 전면을 장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자동적으로 건강한 식습관을 연상시킨다.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단백질이다. - P316

그러나 네슬레의 유전학자 하게르는 음식과 영양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했다. 그는 다이어트를 약에 비유하면서 일부 사람에게 일정한 기간만 효과가 있다고 설명했다. 나는 왜 1980년대에 과식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는지 그의 생각을 물었다. "간단히말해서 비만은 얼마나 먹고 얼마나 소모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소모하는 것보다 섭취하는 에너지가 더 많으면 살이 찌는 거예요. 결국 비만은 몸을 많이 움직이지 않는 라이프스타일과 싼 음식을 아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환경이 낳은 결과죠."
그는 유전자가 식습관과 그다지 관련이 없다는 주장도 정정하면서 더욱 복잡한 대답을 이어 갔다. 하게르는 유전자가 과식이나 중독에 간접적일지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설명을 위해 다양한 차 부속품들이 조립되지 않은 채 바닥에 널려 있는 그림 한 장을 내게 보여 주었다. 펜더와 타이어가 눈에 들어왔지만 대부분은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걸 DNA 청사진이라고 해 봅시다." 그런 다음 그는 다른 그림을 가져왔다. 첫 번째 그림과 똑같이 자동차의 다양한 부속품이 그려져 있었지만 이번에는 일부분에 덧칠이 되어 그림이 흐릿하고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이것이 후성유전이라는 겁니다." 흐릿해진 부분을 가리키며 그가 말했다. "DNA 청사진의 부분들을 해독하는 능률에 변화를 가져오죠."
다시 말하면 유전자 자체는 짧은 시간 내에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후성유전으로 알려진 현상을 통해 동일한 유전자도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해독되어서 맡은 일을 더 잘하거나 더 못할 수 있다. - P329

후성유전학적 현상은 한세대 내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인간의 유전자에 후성유전학적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은 무수히 많은데, 과거에 부모가 섭취한 음식의 종류나 양도 여기에 포함된다.
하게르는 절약 유전자, 더 정확히는 절약 후성유전자의 사례를 언급했다. 모든 인간에게는 에너지 저장에 관여하는 일련의 유전자가 있다. 진화론에 따르면 이 유전자는 인간이 가뭄과 기근에서 살아남도록 도우면서 인간 DNA에서 입지를 다졌다. 이 유전자 덕분에 인간은 호시절에 섭취한 에너지를 체지방으로 저장할 수 있었고 기근이 들었을 때 이 체지방을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유전자의 능률이 음식 환경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P330

년 전에42명해진 것이다. 전작 「배신의 식탁에서 나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혀 미각 지도가 단맛은 혀끝에서만 감지된다고 한 것은 틀렸고 실제로는 혀 전체에서 감지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나 뇌를 자극하여 음식을 갈망하고 좋아하게 만드는 설탕의 능력은 훨씬 더 강력해보인다. 최근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혀에 있는 세포가 세포벽을 통해설탕을 바로 빨아들여 직접 흡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혀세포가 섭취한 음식에 에너지가 있다는 것을 뇌에 알리는 메커니즘의 일부일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앞서 인간이 설탕의 단맛만큼이나 높은 열량을 탐닉하도록 진화되었다는 사실을 논의한 바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로 볼 때 혀는 열량이 높은 음식에 열광하게 만드는 첫 번째 장치로 보인다.
놀랍게도 혀에 있는 세포는 냄새 분자도 감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혀에서 감지된 음식의 향은 뇌를 거쳐 풍미로 전환되는데, 이 풍미는 우리의 식습관에 큰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이다. 인간이 냄새를 통해 음식에 중독되는 길은 두 개가 아니라 세 개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 P339

초파리 연구팀의 연구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가장 대중적으로사용되는 무칼로리 감미료 수크랄로스를 초파리의 먹이인 설탕과효모 혼합물에 섞었다. 그랬더니 초파리들이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잠을 자지 못했다. 게다가 허기가 진 듯 계속해서 먹어댔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을 들으면 가공식품 중독에 대해 덜 우려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초파리는 계속해서 먹이를 먹었음에도 체중이 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유도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연구자들은 초파리의 체중이 늘지 않은 이유가 그들의 행동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초파리들은 안쓰럽게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다. 며칠을 끊임없이 날고 또 날아다녔다. 작은 날개를 벌새처럼 움직이면서 과식으로 얻은 여분의 에너지를 모두 연소해 버렸다. 이처럼 과잉 행동을 보이던 초파리들은 수크랄로스공급이 중단되자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연구를 통해 합리적으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에는 한계가 있다. 어쨌거나 초파리는 초파리일 뿐 사람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러나 초파리 연구는 식품 기업들의 말처럼 인공감미료가 더 나은 식습관에 도움이 된다 해도 첨가물을 만드는 기업에만 좋은 일일 수 있다는 사실, 심지어 우리 몸은 고장 난 초파리처럼 끝없이 허기진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기서 가장 큰 수혜자는 당연히 가공식품 제조 기업들이다. - P342

 "오늘은 어떤 스콘이 더 맛있어 보이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고 생각하면 뇌의 보상 회로를 완전히 활성화시키면서 동시에 제어 장치를 꺼 버리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가 스콘을 먹기로 결심하는 거예요. 대신에 스콘을 먹으면 동맥경화증과 뇌졸중에 걸릴 위험이 커진다거나 몸매가망가질 거라는 생각을 하면 보상회로가 꺼지면서 제어 장치에 다시불이 들어오죠."
식품 기업들이 제품의 저렴한 가격과 편의성을 중요하게 여기기를 바랄 때 우리는 그 안에 숨은 지불해야 할 대가를 기억해야 한다.
기업들은 소비자들의 식습관을 통제할 수 없게 되자 그 치료법까지 장악하기 위해 애를 써 왔다. 그들이 내놓은 치료법은 다이어트였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다이어트가 무엇인지도 잘 안다. 음식에 대한 강박은 다양한 종류와 수준의 섭식 장애 중 하나일 뿐이다. 그것이 먹는 것을 관리하고 조절하려는 목적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 P346

우리가 스마트폰에 중독되는 이유 중 하나는 스마트폰에 사용되는 현란한 색깔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 스마트폰 제조 기업들이 화면의색을 부드럽게 하는 다크모드 기능을 제공하기 시작했으나, 해리스는 내게 대중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훨씬 효과가 큰 비법을 알려 주었다. 그것은 바로 스마트폰을 흑백모드로 바꾸는 것이다. (설정 메뉴에서 ‘접근성‘, ‘디스플레이‘로 들어가면 색 필터를 켤 수 있는데 여기에서 ‘흑백 출력‘을 선택하면 된다.) 직접 해 보니 행동을 추동하는 뇌에서스마트폰의 매력이 반감되는 것이 느껴진다. 이제 스마트폰이 그다지 흥미로워 보이지 않는다.
가공식품 제조 기업들도 소비자의 눈을 사로잡기 위해 화려한색을 사용한다. 소비자들이 이런 제품에 매력을 덜 느끼는 방법 중하나는 밝은색 포장을 쓰지 않는 것이다. 오레오도 유리병에 넣어놓으면 덜 먹음직스러워 보일 것이다.
우리는 먹고 싶은 것을 먹기보다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즉 새로운 식습관을 형성하면 좋아하는 음식을 우리가 직접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 잘 알다시피 우리가 먹는 것을 바꾸면 식품 기업들도 자신들의 제품을 다시 찾게 하기 위해 제품을 바꾼다. 그럴 때마다 사용해 온 무기가 바로 소금, 설탕, 지방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실제보다 중독성이 덜해 보이도록, 아니면 실제와는 완전히 다른 제품처럼 보이도록 앞으로도계속 그럴 것이다.
21 TT - P347

이 과일은 무화과다. 무화과는 잼처럼 끈적거리고 단맛이 강하다. 하나에 75칼로리로 열량도 높아 뇌를 자극한다. 최근 무화과를펌킨 스파이스에 준하는 가공식품 업계에서 가장 유행하는 첨가물이라고 선언한 향 제조 업체에 따르면, 무화과는 정통성과 고대 문화의 느낌을 주며 소비자들의 "진실하고 독특한 것에 대한 욕망"을자극하고 만족시킨다.
무화과 향은 이제 시리얼, 에너지 음료, 껌은 물론 베이컨과 프로슈토 햄에 싸인 채 냉동 피자에까지 들어간다. 과거 다른 것들이 그랬던 것처럼 무화과 향의 상업적 성공도 소비자들이 단순히 먹고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먹는 데 있다. 이제 우리는우리가 먹는 것을 바꾸고 그에 대한 대응으로 식품 기업들이 제품을바꿀 때 꿰뚫어 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P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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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에 공산당에 기부금을 냈던 것에 대한 질문을 받은 오펜하이머는 "내가 냈던 기부금이 의도하지 않은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된다든지, 그 목적들이 사악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같습니다. 나는 당시에 공산주의자들을 위험하다고 여기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들이 공개적으로 밝힌 목적들은 내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당시 미국 공산당은 인종 차별 폐지, 이주 농장 노동자들의 작업 조건개선, 스페인 내전의 반파시즘 투쟁 등 진보적 대의의 선봉에 섰고, 오펜하이머는 점차 이와 같은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게 되었다. 1938년 초그는 새로 창간된 서부 지역 공산당 기관지 《피플스 월드>를 구독했다. 그는 이 신문을 정기적으로 읽었고, 그가 나중에 설명했듯이 신문이 "이슈를 형성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졌다. 1938년 1월 말 이 신문에는오펜하이머와 슈발리에를 포함한 몇몇 버클리 교수들이 스페인 공화국에 보내기 위한 앰뷸런스를 사기 위해 1,500달러를 모금했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 P202

어느 날 저녁 오펜하이머는 오클랜드 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교원 노조 회합에 주 강연자로 등장했다. 이 행사는 널리 홍보되었고, 교원 노조는 수백 명의 공립학교 교사들이 오펜하이머가 노동조합 운동의 장래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들으러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단지 10여 명에 불과한 사람들이 참석했다. 그래도 오펜하이머는 특유의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참석자들에게 노조가입을 권유했다. 66몇몇 사람들은 오펜하이머의 정치관이 그의 개인사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느꼈다. 진의 친구이자 공산당원인 이디스는 "우리는 그가 자신이타고난 재능에 대해, 그가 물려받은 재산에 대해, 선택받은 사람이라는것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라고 논평했다.  - P203

말할 것도 없이 오펜하이머는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여러 친척, 친구,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좌파 뉴딜주의자로서 그는 공산당이 지원하는 활동에 상당한 액수의 자금을 쾌척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공산당에 정식으로 가입한 적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공산당과의 그의 연계는 스페인 내전 당시를 전후로 "매우 짧고 강렬한" 것이었다.38 하지만 내전이 끝난 이후에도 그는 공산당원들이 주도하는 시사 토론회에계속해서 참석했다. 이런 모임들은 공산당의 은밀한 후원 아래 바로 오펜하이머와 같은 지식인들을 포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식으로 입당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당과의 관계를 딱히 정의하기가 애매했다. 그는 스스로를 비당원 동지(unaffiliated comrade)라고 생각했을가능성이 높다. 그가 훗날 당과의 연계를 끊으려고 노력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간단히 말해 로버트 오펜하이머에게 공산당원이라는딱지를 붙이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이후 몇 년 동안 FBI 역시이 문제로 대단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었다.
사실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를 맺은 것은 당시 그의 위치와 사상의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1930년대 말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교수로서오펜하이머는 정치적으로 격앙된 환경에 놓여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는 정식 공산당원이었던 친구들에게 같은 편이라는 인상을 심어줄 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건, 오펜하이머는 공산당이 추구하는 사회정의를 향한 목표에 공감했고, 그 때문에 몇몇 공산당원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FBI가 오펜하이머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화를 도청했을 때 당연하게도 공산당원이라고 알려진 사람들이 그를 같은 편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다른 한편 또 다른 FBI 도청에는 당원들이 오펜하이머가 냉담하고 신뢰할 수 없다며 불평했던 것도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당의 규율에 복종했다는 증거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는 대부분의 당 활동에 개인적으로 협력했지만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부분에 대해서는 당의 노선을 거부하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는 소련 정권의 전체주의적 성격에 불만을표현하고는 했다. 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공개적으로 칭송했고 뉴딜정책을 지지했다. 그는 공산당이 주도하는 여러 인민 전선 조직들에 참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견실한 시민 자유주의자이자 미국 시민 자유 연맹의 명망 높은 회원이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전형적인 뉴딜 진보주의자이자 유럽의 파시즘에 반대하고 미국의 노동자 권리를옹호하는 공산당의 노선을 지지하는 동조자였다. 그가 이러한 목표들을 위해 공산당원들과 협력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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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사업부 간부들은 이미 식품 사업부에 담배가 암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한 것만큼 식품도 비만에 대한 책임을 추궁당하는 곤경에 빠질 것이며 값싸고 편리하고 매력적인 제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소금, 설탕, 지방에 대한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고 경고한 상태였다. 담배의 중독성을 시인했던 담배 사업부 경영진은 이제 식품 사업부가 제품의 매력도를 높이기 위해 가공식품 생산에 투여하는 모든 것(제조성분, 포장, 마케팅)이 이미 담배를 공격한 바 있는 변호사들의 철저한 조사를 당해 내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런 변호사들은 영리하고 창의적이라는 사실도, 이런 경고를 한 사람은 담배 사업부의 재무 책임자에서 필립모리스의CEO 자리까지 오른 제프리 바이블이었다.  - P221

트랜스지방은 원래 마가린을 만드는 데 쓰였다. 그의 동년배 대부분이 그렇듯이 조셉도 어릴 적에 마가린이 정말 몸에 좋은 줄 알았다. 식물성 기름으로 만든 트랜스지방은 버터에 있는 포화지방이없었고, 당시에는 버터에 든 포화지방이 문제라는 의식이 컸기 때문이다.
조셉이 트랜스지방이 동맥경화를 일으켜 몸에 더 좋지 않고 그럼에도 가공식품 업계가 트랜스지방의 발명에 열광했다는 보도를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트랜스지방은 액체 상태의 식물성 기름에 수소를 첨가하여 고체 상태로 만들 때 생기는 경화유로 무수히많은 제품에 사용되었다. 제품의 질감을 살리고 점착력이 있는 데다식품을 장기 보관할 수 있게 해 주는 등 가공식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점을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쿠키, 크래커, 케이크, 비스킷, 팝콘, 도넛, 샌드위치, 냉동 피자, 기름에 튀긴 패스트푸드에 이르기까지 트랜스지방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었다.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살던 곳 근처에 있는 세이프웨이에가서 트랜스지방이 안 들어간 제품이 있나 찾아봤어요."
#3그러나 조셉이 정말로 분노한 지점은 식품 업계가 제품을 만드는데 트랜스지방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나비스코 사업부를 통해 크래프트에서 생산하는 오레오를 예로 들어 이 사실을 입증했다. 오레오는 과자와 크림에 모두 트랜스지방이 들어 있었는데, 오레오와 비슷한 초콜릿 샌드위치 쿠키인 뉴먼오 Newman-O‘s에는 트랜스지방이 전혀 없었다. 뉴먼오를 몇 개 구입한 조셉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여기서 종이를 씹는 것 같은 맛이 난다면 이 소송은 하지 않겠어." 뉴먼오는 종이를 씹는 것 같은 맛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한 봉지를 다 해치운 뒤 격분한 상태로 법원에 달려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소장을 제출했다. 2003년 5월 1일의 일이었다.
그는 법원에 캘리포니아주 전역에서 오레오 판매를 금지해 달라고요청했다. 소송에 대한 뉴스가 처음 보도된 뒤 두 시간 만에 조셉은인터뷰 서른일곱 건을 요청받았고 크래프트와의 요란한 전쟁을 시작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들의 타깃은 아주 어린아이들입니다." - P222

우리의 취약점을 이용한 기업은 크래프트만이 아니었다. 크래프트 내부 문서 중에는 1998년에 나비스코가 아이들을 타깃으로 삼는일에 대한 컨설턴트의 의견을 논의하여 작성한 메모가 있었다. 결론은 10대 청소년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식품 업계의 새로운 목표 대상은 10~12세 아동이었는데, 이 정도의 어린 나이에 이미 평생 유지될 취향이 결정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는 펩시, 프리토레이, 버거킹, 맥도날드와 논의했다." 메모에는 또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람의 입맛은 어린 나이에 결정되기 때문에 10대보다 훨씬어린아이의 관심을 사는 데 집중할 것을 유념해야 한다. 10대를 대상으로 하는 영화, 음악, 게임, 스포츠를 통한 간접광고가마케팅 전문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영역이 되면서 버거킹과 맥도날드 모두 어린이 영화나 TV 캐릭터에 마케팅을 집중하고있다. 또 펩시는 대화형 웹사이트를 운영하면서 10대를 대상으로 설문을 진행하고 직접적인 피드백을 받는다. 펩시의 제너레이션 넥스트 광고 캠페인은 오직 10~18세 소비자를 대상으로 한다. 프리토레이, 버거킹, 맥도날드는 유명 학교 준비물브랜드와 학교 급식 프로그램, 기증품을 활용하기도 한다. - P260

그에 반해 스펄록은 맥도날드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모두 해결했다. 한 달 만에 건강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감정기복이 심해지고 성기능 장애가 발생했으며 체질량이 13퍼센트나 증가하고 전에는 없었던 지방간이 생겼다. 그 결과물인 영화 「슈퍼사이즈 미 Super Size M」는 2004년에 개봉되었고,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중독적 행위를 주제로 다루면서 역사상 가장 큰 화제를모은 음식 영화가 되었다. 「슈퍼 사이즈 미」의 탄생은 가공식품 제조업체들이 재즐린의 소송이 제기되었을 때 직감했던 심각한 위험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재즐린의 소송으로 이 문제가 예술, 음악, 문학 등 더 다양한 문화 영역에서 논의되는 것이었다.
특히 과학 영역까지 확대되는 것이 가장 위험했는데 그렇게 되면 편의 식품에 대한 소비자들의 인식이 바뀔 수 있었다. 「슈퍼 사이즈미]의 대중적 성공은 훗날 배심원단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원고측변호사들이 찾아낸 증거를 아주 관심 있게 들여다볼 환경을 조성하기도 했다. - P237

이런 가공식품에 관한 모든 우려가 소비자들의 식습관을 바꾸고 있다고 모리슨은 설명했다. 소비자들은 점점 캠벨과 같은 기업의지분이 적은 농산물 코너에서 식품을 더 많이 구입했다. 실제로 소비자들은 슈퍼마켓의 가장자리에 배치된 신선한 야채와 과일, 육류,
생선, 요거트와 같은 제품에 돈을 더 많이 쓰고 초가공식품이 모여있는 마트의 중심 부근에는 잘 가지 않았다. 게다가 마트에 직접 가는 대신 온라인에서 장을 보는 사람도 많아졌는데, 온라인에서 장을볼 때는 대개 본인은 물론 부모, 조부모들이 어렸을 때부터 애용해온 브랜드를 구입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모리슨에 따르면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소비자들이 한때 자신이 사랑하던 브랜드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은 외식에도 적용되었다. 맥도날드는 샐러드를 팔기 위해 애썼지만, 사람들은 샐러드만 파는 새로운 패스트푸드 체인에 몰려들었다. 모리슨은 소비자들이 더 이상 빠르고 편리한 음식을 신뢰하지않는다는 사실의 의미를 오판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빠르고 편리한 음식을 생산하는 식품 업계 자체가 신뢰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우리는 신선 식품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음식이 건강과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소비자들의 관심이 급증했고 소비자들은 제품이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는지, 재료는 무엇인지, 그 재료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한 투명한 정보를 식품기업에 점점 더 요구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여러분도 모두 아시다시피 수백만 명의 소비자들이 아주 오랫동안 의지해 온 거대 가공식품기업과 유명 브랜드, 이른바 빅푸드 Big Food에 대한 사회의 불신도 점점 커져 갑니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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