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황하의 물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흘러서 바다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을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높다란 마루에서 거울을 보고 백발을 슬퍼하는 것을
아침에 푸른 실 같던 머리가 저녁에 눈처럼 된 것을
君不見 黄河之水天上来,奔流到海不復回
君不見·高堂明鏡悲白髮 朝如靑絲暮成雪

고등학교 다닐 때, 참고서 한샘국어에도 나왔던 이백의 너무나 유명한 시 「장진주將進酒였다. 하지만 이상하기도 하지, 고등학생 시절에는 이 시를 읽으면서 한 번도 그런 서늘한 느낌을 받은 적은 없었다. 얼마나 서늘했냐 하면 정신이 번쩍 드는것과 동시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상태에 도달할 정도였다. 아니,
다시 말하자면 눈앞이 캄캄하다는 사실을 그제야 바로 보게된 것이다. ‘君不見‘이 세 글자에 나는 그만 눈이 트이고 말았다. - P90

하늘이 나 같은 재질을 냈다면 반드시 쓸 곳이 있으리라
천냥 돈은 다 써버려도 다시 생기는 것을
양을 삶고 소를 잡아서 우선 즐기자
한꺼번에 삼백 잔은 마셔야 된다
天生我材必有用,千金散盡還復來
烹羊宰牛且為樂會須一飮三百盃

‘生我材必有用‘ 제비꽃을 바라보며 한없이 빈둥거리던 그해 봄여름, 나는 이 구절을 입에 달고 지냈다. 기분이 좋아지면, ‘須一飮三百盃‘라고 말하면서 나보다 할 일 많은 친구들에게 술을 따르며 강권했다. 내게 천냥 돈은 없었지만, 내게는 반드시쓸, 하늘이 내린 재주만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황영조 마을 앞 해변에서 하늘에 박힌 별들을 바라보던 그날 저녁, 나는내가 오만으로 똘똘 뭉친, 그러나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있는 젊은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나는 하늘이 낸 사람도 아니고, 한꺼번에 3백 잔을 들이켤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더없이 아픈 일이지만, 나는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먼저 나자신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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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체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내가 꼭 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에도 흥미가없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만이 내 마음을 잡아끈다. 조금만 지루하거나 힘들어도 ‘왜 내가 이 일을 해야만 하는가?는 의문이 솟구치는 일 따위에는 애당초 몰두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완전히 소진되고 나서도 조금 더 소진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내가 누구인지 증명해주는 일,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 견디면서 동시에 누릴 수 있는 일, 그런 일을 하고 싶었다.
청나라 사람 장조張潮는 이런 글을 남겼다.

꽃에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 샘이 없어서는 안된다.
돌에는 이끼가 있어야 제격이고, 물에는 물풀이 없을수 없다. 교목엔 덩굴이 없어서는 안되고, 사람은 벽이없어서는 안된다.
花不可以無蝶,山不可以無泉,石不可以無苔,
水不可以無藻,喬木不可以無藤蘿,人不可以無癖.

‘벽‘이란 병이 될 정도로 어떤 대상에 빠져 사는 것. 그게 사람이 마땅히 할 일이라면 내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역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 나는 가장 잘산다. 힘들고 어렵고 지칠수록 마음은 점점 더 행복해진다. 새로운 소설을 시작할 때마다 ‘이번에는 과연 내가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궁금해진다. 나는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여러모로 문제가많은 인간이다. 힘든 일을 견디지 못하고 싫은 마음을 얼굴에 표시내는 종류의 인간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 나는 한없이 견딜 수 있다. 매번 더이상 할 수 없다고 두 손을 들 때까지 글을쓰고 난 뒤에도 한 번 더 고쳐본다.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 그때 내 존재는 가장 빛이 나기 때문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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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막

1912년 8월의 어느 아침, 제임스 티론의 여름 별장의 거실.

뒤쪽에 커튼이 달린 넓은 문 두 개가 있다. 오른쪽 문은앞응접실로 통하는데, 앞응접실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방이 으레 그렇듯이 형식적으로 꾸며진 모습이다. 다른 문은창도 없는 어두운 뒷응접실로 통하는데, 이 공간은 거실과식당을 오가는 통로로밖에 사용된 적이 없다. 두 문 사이의 벽에는 작은 책장 하나가 놓여 있는데, 위에는 셰익스피어의 초상화가 있고 책장에는 발자크, 졸라, 스탕달의소설들과 쇼펜하우어, 니체, 마르크스, 엥겔스, 크로포트킨, 막스 슈티르너의 철학서와 사회학 서적들, 입센, 버나드 쇼, 스트린드베리의 희곡들, 스윈번, 로제티, 오스카 와일드, 어이스트 다우슨, 키플링 등의 시집들이 꽂혀 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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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하루키가 팔아치운 책의 표지를 모두 모아 쌓아놓으면 그간 내가 간신히 판 책의 높이와 거의 비슷해지겠지만, 그런 점에서, 그러니까 장례식에 입고 갈 검은 양복이 없다는 점에서 하루키와 나는 똑같은 처지다. 그리하여 2003년 초, 소설가 이문구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문득 나는 ‘이제 검은 양복 한벌쯤은 필요한 나이가 됐군‘이란 생각을 했다. 그건 말해놓고 보니 굉장히 끔찍한 느낌이 드는 경우였다. 화가 나서 ‘난 엄마가 없어졌으면 좋겠어!‘라고 외쳤다가는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 울고 싶어지는 느낌과 비슷했다. 그게 반도패션이든 폴 스튜어트든 일단 구입했다면 열심히 입고 다니는 게 본전을 뽑는 일일텐데, 내가 저승사자도 아니고 어찌 그 양복을 최대한 활용할수 있기를 기대한단 말인가. 왜 검은 양복 따위는 친구에게 빌려 입어야만 하는 것인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하루키 얘기를 마저 하자면, 상실의 시대」에는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해 있다‘라는, 이성교제 문제로 아버지에게 심하게 꾸중을 들은 여고생이 자살사이트 익명게시판에 적어놓을 만한 문장이 나온다. 원서에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문학사상사에서 낸 번역본에는 혹시 독자들이이 문장을 놓칠까봐 고딕으로 인쇄한 게 눈에 띈다. 한샘국어식으로 따져서 밑줄을 쫙 그을 만한 중요한 문장인가보다. 그래서 우락부락한 인간들이 모여 앉은 흡연구역에서 담배 한 대 피울정도의 시간만큼 생각해봤더니 그건 맞는 말이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 푸른 하늘에도 별은 떠 있듯 평온한 이 삶의 곳곳에는 죽음이라는 웅덩이가 숨어 있다. - P51

키친 테이블 노블이라는 게 있다면, 세상의 모든 키친 테이블 노블은 애잔하기 그지없다. 어떤 경우에도 그 소설은 전적으로 자신을 위해 씌어지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스탠드를 밝히고 노트를 꺼내 뭔가를 한없이 긁적여 나간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직장에서 돌아와 뭔가를 한없이 긁적이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지만 긁적이는동안, 자기 자신이 치유받는다. 그들의 작품에 열광한 수많은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키친 테이블 노블이 실제로 하는일은 그 글을 쓰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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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사든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서 시간이 원래의 10배는 더 걸리지만, 이상하게도 이것은 불만족을 낳는다. 물건의 종류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사람들은 더욱 다양한 물건을 찾고, 더욱 다양한 물건을 찾을수록 사람들은 더욱 더 다양한 물건을 찾는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더욱더 많이 원하는, 끊임없고 억제할 수 없는 욕구를 지닌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느낌을 받을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소매점을 돌면서 새로운 물건과 옷과 음식을 찾는 게 주된 여가활동이 된 사회에 살고있는 듯하다. - P267

과학이 노화의 비밀을 밝혀내다‘
요전 날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실린 이 문구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노화를 비밀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노화는 때가 되면 저절로일어나는 현상으로, 그 안에는 아무런 비밀도 없다.
나에 관한 한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앉아서도 잠을 잘 수 있고, <사인펠드> 재방송을 이미 본 것인지도 모르고 몇 번씩다시 볼 수 있으며, 세 번째가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은 노화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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