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는 원자 폭탄을 만들기 위한 독일과의 경주를 이끌어 나갈 완벽한 콤비였다. 오펜하이머의 스타일인 카리스마적 권위가 합의를 이끌어 내는 데 적절했다면, 그로브스는 위협함으로써 권위를 행사했다. 하버드 출신의 화학자인 조지 키스티아롭스키(George Kistiakowsky)는 "그로브스가 프로젝트를 운영하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부하들에게 겁을 줘서 맹목적으로 복종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라고 기억했다. ‘서버는 그로브스가 "그의 부하들에게는 가능한 한 심술궂게 대하는 것을 방침으로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오펜하이머의 비서인 프리실라 그린 더필드(Priscilla Green Duffield)는 장군이 항상 그녀의 책상을 지나쳐 가면서 인사도 없이 "얼굴이 더럽군."과 같은 무례한 말들을 던졌다고 기억했다. 그로브스의 이런 교양 없는 행동은 메사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불만이었고, 이는 오펜하이머에게 향할 비판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에게만은 그러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 사이의 관계에서 오펜하이머가 가진 영향력을 보여 주는 척도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그로브스를 만족시키기 위해 필요한 일들을 해냈다. 그는 장군이 원했던 대로 능숙하고 효율적인 행정가로 거듭났다. 버클리에 있을 때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보통 종이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로스앨러모스에서 오펜하이머 가족의 가까운 친구가 된 버클리 출신 내과 의사 루이스 헴펠만은 오펜하이머가 메사에서는 "종이 한장 없는 깨끗한 책상을 유지했다."라고 말했다. 외모도 변했다. 오펜하이머는 그의 긴 곱슬머리를 잘랐다. 헴펠만은 "그가 머리를 너무 짧게잘라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라고 기억했다. - P350

오펜하이머가 공산당원으로 알려진 진과 만났다는 보고서는 워싱턴으로 전달되었고, 곧 그녀가 소련 정보 기관으로 원자 폭탄과 관련된 기밀을 전달하는 통로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샀다. 진의 전화를 감청하는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1943년 8월 27일 작성된 문서에서 FBI는 오펜하이머가 "그녀를 중개자로 이용하거나, 그녀의 전화로 코민테른 조직과중요한 통화를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1943년 9월 1일, FBI의 수장인 에드거 후버는 법무장관에게 보내는편지에서, 그들의 소련 코민테른 첩보 요원들에 대한 수사 결과 "진태트록은 우리 나라의 전쟁 준비 노력에 관한 비밀 정보를 가진 사람의정부(情婦)가 되었음을 확인했다."라고 밝혔다.  후버는 진이 "샌프란시스코 지역 코민테른 조직원들의 연락책이며, 그녀는 관련자로부터 비밀정보를 빼낼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 조직의 첩보 요원들에게 그 정보를 전달해 줄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후버는 "코민테른 조직 첩보 요원들의 신원을 파악하려는 목적으로" 그녀의 전화를감청할 것을 제안했고, 그해 늦은 여름 무렵 육군 정보처나 FBI에 의해도청기가 설치되었다.
오펜하이머가 진과 하룻밤을 보낸 지 2주 후인 1943년 6월 29일, 서해안 방첩 대장인 보리스 패시 중령은 펜타곤에 보낸 메모에서 오펜하이머의 비밀 취급 인가를 취소하고 현재 직위에서 해고할 것을 요구했다. 패시는 오펜하이머가 "여전히 공산당과 연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가 가진 것은 모두 정황 증거에 불과했다. 그는 오펜하이머가 진을 방문한 사실과 "버나데트 도일과 스티브넬슨과 연락을 주고받는 공산당원인" 데이비드 호킨스와의 전화 통화를 증거로 들었다. - P361

기묘한 인터뷰였다. 이 인터뷰는 나중에 오펜하이머를 파멸로 몰아넣게 될 것이었다. 그는 육군 정보 장교에게 첩보 활동이라는 적신호를보냈고, 엘텐튼을 용의자로 지명했으며, "결백한" 익명의 중재자가 역시 결백한 몇 명의 과학자들과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확신하기 때문에 이름을 거명할 필요는 없다고 패시를 안심시켰다.
오펜하이머는 몰랐겠지만, 이 대화는 한마디도 빠짐없이 녹취되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녹취록은 오펜하이머의 보안 파일에 들어갔다.
나중에 그가 접근 방식들(두 번인지 세 번인지는 확실치 않지만)에 대한 보고가 부정확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에(자신도 그 출처를 설명할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 그는 자신이 패시에게 거짓말을 했는지, 아니면 패시에게는 진실을 말하고 나중에 거짓말을 했는지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그가 모르고 시한폭탄을 삼킨 것과 같았다. 그것은 10년 후 폭발할것이었다. - P3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그가 <밀레니엄>에 싣기 위해 집필하년 탐사기사의 주제는 바로 ‘보안과 불법 해킹‘이었다고 미카엘은 주장했다.
리스베트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 주장이 거짓임을 잘 아는 그녀는대체 <밀레니엄>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 건지 궁금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미카엘이 이를 통해 자신에게 어떤 메시지를 보내려 했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일단 네덜란드서버에 접속해 ‘MikBlom/laptop‘ 아이콘을 더블클릭했다. 뒤이어 그의 노트북 화면이 뜨자 한가운데에 놓인 ‘리스베트 살란데르‘ 폴더와 ‘살리에게‘ 파일이 눈에 들어왔다.
미카엘의 편지를 열어본 그녀는 한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화면을응시했다. 그녀의 내부에서 상반된 감정들이 뒤얽혔다. 지금까지는 스웨덴 전체가 자신의 적이었다. 그녀로서도 별반 이상할 것 없는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연합군이 한 명 튀어나왔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결백을 믿는다고 단언하는 잠재적 연합군이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연합군은 그녀가 스웨덴에서 죽어도 보고 싶지 않은 유일한 남자였다. 리스베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미카엘은 여전히 순진하기 짝이 없는 빌어먹을 착한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그녀 자신은 어떤가? 열 살 이후로는 스스로 죄가 없다고 말할 수없는 존재였다.
죄 없는 사람? 그딴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책임지는 정도가 사람마다 다를 뿐. - P4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은 온순한 사람들이 평상시라면 생각하지도 못할 아이디어를 내게 만들었다. 1942년 10월 말에 오펜하이머는 "비밀"이라고 표기된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것은 옛 친구이자 동료인 바이스코프가 보낸 것이었는데, 당시 프린스턴에 와 있던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에게서 들은 놀라운 소식을 알려 주는 것이었다. 파울리에 따르면, 노벨상을 수상했던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얼마 전 베를린의 핵연구 시설인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Kaiser-Wilhelm Institute)의 소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파울리는 하이젠베르크가 스위스에서 강연을 하기로 계획되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어서 바이스코프는 이 소식을 베테와다. 바이스코프는 "나는 스위스에서 하이젠베르크를 납치하는 편이가장 좋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나 베테가 스위스에 나타난다면의논하고 나서 즉시 무언가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고 말했독일인들도 같은 계획을 세울 것입니다."라고 썼다. 바이스코프는 심지어 자신이 직접 그 임무를 맡겠다고 자원하기까지 했다.
오펜하이머는 즉시 바이스코프에게 답장을 보내 "흥미로운" 편지를잘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하이젠베르크가 스위스를 방문할 것이라는소식은 이미 알고 있었고, 이 문제를 워싱턴의 "해당 당국과 이미 의논했다고 밝혔다.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이 진행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정부 당국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싶었습니다." 오펜하이머가 이 문제를 의논했던 "해당 당국"이란 부시와 그로브스였다. 하지만 오펜하이머는 바이스코프의 계획을 지지하지 않았다. 설령 하이젠베르크를 성공적으로 납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연합국이 핵연구를 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는 것을 나치스에게 알리는 결과가 될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는 부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하이젠베르크가 스위스를 방문하는 것은 우리에게 드문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점을 언급하지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 그로브스는 하이젠베르크를 납치하거나 암살하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1944년에 그는 전략 정보국(Office of StrategieServices, OSS) 요원이자 전직 프로야구 선수인 모 버그(Moe Berg)를 스위•스로 보내 하이젠베르크의 뒤를 밟게 했다. 하지만 결국 암살을 시도하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 P3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홀게르는 오랫동안 꼼짝 않고 그녀를 응시했고 심장은 엄청난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는 입을 열어 그녀가 주는 음식을받아먹었다.
그녀는 한입씩 그에게 먹여주었다. 보통 그는 밥 먹을 때 누가 시중드는 걸 극도로 싫어했지만 지금은 리스베트가 무엇을 원하는지이해하고 있었다. 그녀가 시중을 드는 건 무기력한 살덩어리에 불과한 그를 정해서가 아니었다. 그건 바로 자신을 낮추기 위함이었다.
좀처럼 보기 드문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한입에 적당한 양을 준비해놓고 그가 다 씹어 삼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빨대가꽂힌 잔을 가리키자 그녀가 차분한 손길로 음료를 마실 수 있게 해주었다.
밥을 먹는 동안 둘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마지막 한입을삼키고 나자 그녀는 포크를 내려놓았고 더 원하는지 눈빛으로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이젠 됐어.
마침내 홀게르는 휠체어에 몸을 편안히 기대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리스베트가 냅킨으로 입을 닦아주었다. 문득 자신이 미국 영화에나오는 마피아 두목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최고의 존경을 받는카포 디투티 카피•••••  그녀가 손등에 키스해주는 모습을 상상하고는 그 엉뚱한 이미지에 자기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이 안에서도 커피를 마실 수 있어요?"
홀게르가 뭐라고 웅얼댔지만 혀와 입술은 제대로 소리를 내지 못했다.
"저쪽 구석에...... 커피가 있어."
"변호사님도 한잔 하실래요? 전처럼 설탕 없는 밀크커피?"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리스베트는 쟁반을 하나 들고 가 조금 있다
커피 두 잔을 받쳐들고 돌아왔다. 오늘 그녀는 평소와 달리 블랙커피를 마셨다. 홀게르는 그녀가 아까 우유 마실 때 쓰던 빨대를 커피잔에 꽂아놓은 걸 보고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둘은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홀게르는 할말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갑자기 혀가 굳어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대신 둘은 여러 차례 눈빛을 주고받았다. 리스베트는 너무나도 죄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먼저 침묵을 깼다.
"변호사님이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정말이에요. 살아 계시리라곤꿈에도 생각 못했죠. 그런 줄 알았다면 절대로••••• 진작 뵈러 왔을거예요"
홀게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서해주세요."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비록 입술이굳어 삐딱한 미소였지만. - P185

갑자기 그는 격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실 동료인 닐스 비우르만에게 연락해 리스베트가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도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무력감 때문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인지 매번 포기하고 말았다. 왜 아직 자신에게 힘이 있을 때 그녀의 후견 체제를 끝내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 그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와 계속 만나고 싶었던 자신의 이기심 때문이었다. 그는 이 복잡하기 그지없는 괴상한 소녀를 사랑했다. 한 번도 자식을 가져본 적 없는 그에게 딸 같은 존재였기에 그녀와 계속 접촉할 구실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렇게 소중한 그녀를 찾는 일이 그에겐 너무도 어려웠다. 이렇게 요양원에서 헌 가방처럼 축 늘어져 있는 주제에, 화장실에 가서바지 지퍼도 제대로 내리지 못하는 주제에 누굴 찾아나선단 말인가.
오히려 자신이 리스베트를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아이는여전히 살아남았구나. 하긴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능력 있는 아이였지. - P1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맨리는 얼마 전 시카고에서 왔는데, 그곳에서 1942년 12월 2일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와 그의 연구팀은 세계 최초로 통제된 핵분열 연쇄 반응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시카고는 훌륭한 대학과 세계 수준의 도서관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숙련된 테크니션, 유리공, 엔지니어 등 기술 인력이 풍부한 대도시였다. 로스앨러모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맨리는 "우리는 지금 호레이쇼 앨저(Horatio Alger) 소설책밖에 없는 목장 학교 도서관과 승마 용구 등속밖에 없는 뉴멕시코의 허허벌판에 최첨단 연구소를 지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중성자 가속기를 만들기에는 가용 자원이 턱없이 부족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기록했다. 맨리는 오펜하이머가 실험물리학자였다면 "실험 물리학의 90퍼센트 이상은 사실상 배관 작업"이라는 것을 이해했을 것이고, 이런 외딴 곳에 연구소를 지으려고 하지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업의 세부 계획은 대단히 복잡했다. 오펜하이머는 일군의 과학자들과 함께 1943년 3월 중순 무렵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오펜하이머는 베테에게 그 무렵이면 도시 설계 전문가가 과학자들이살기에 적절한 수준의 시설을 준비해 둘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주거시설로는 미혼자들을 위한 숙소와 가족을 위한 방 1개짜리부터 3개짜리까지의 아파트가 지어졌다. 이 시설에는 모든 가구가 갖추어져 있었고, 각 가정에는 전기가 공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전화는 설치하지 않았다. 부엌에는 나무를 때는 난로와 히터가 설치되었고 벽난로와 냉장고도 제공되었다. 힘든 가사 일을 돕기 위해 때때로 가정부를 부를 수도 있었다. 로스앨러모스에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학교도서관, 세탁 시설, 병원, 그리고 쓰레기 처리장이 건설되었다. 육군 영내 매점이 공동체의 식료품점과 통신 판매점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었다. 여가 생활을 담당하는 장교가 정기적으로 영화 상영과 근처 산으로의 하이킹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맥주 및 음료수, 그리고 간단한 점심 식사를 할 수 있는 주점(cantina), 미혼자들을 위한 식당, 그리고 기혼자들이 분위기 있게 식사할 수 있는 멋진 카페를만들 것이라고 약속했다. - P324

세계 최초의 핵무기 연구소에 필요한 시설을 짓고, 과학자들을 충원하며, 모든 장비들을 갖추기 위해서는 섬세하고 인내심이 있는 행정가가 필요했다. 1943년 초에 오펜하이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원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세미나보다 큰 모임을 주재해 본 적이 없었다. 1938년에 그는 열다섯 명의 대학원생을 지도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수백 명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을 지휘해야 했고, 그 수는 곧 수천 명에 달하게 될 것이었다. 그의 동료들 역시 그가 그 일을 하기에 적합한 성정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당시 로런스 밑에서 공부하던 젊은 실험 물리학자 윌슨은 "그는 1940년 전까지만 해도 대단히 괴팍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행정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종류의 사람이었지요." 1942년 12월까지도 코넌트는 그로브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과 바네바 부시는 "우리가 적당한 사람에게 지휘를 맡겼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썼다.  - P325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맡은 책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 보였지만, 곧 빠르게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윌슨은 불과 몇 달 사이에 그가 카리스마넘치고 효율적인 행정가로 변신하는 것을 보며 놀랐다. 한때 괴짜 이론물리학자이자 장발의 좌파 지식인이었던 오펜하이머는 이제 대단히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일류 지도자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윌슨은 "그에게는 품위가 있었습니다. 그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지요. 그는우리가 그의 약점이라고 지적했던 것들을 단 몇 달만에 말끔하게 털어버렸습니다. 게다가 행정적인 절차들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의구심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라고 말했다.  1943년 여름 무렵이면 윌슨은 "그와 함께 있으면 내 능력 이상을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오펜하이머의 사람이 되었고, 그를 매우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생각이 바뀌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 P327

그리고놀랍게도 오펜하이머는 연구소의 모든 과학자들을 육군 장교로 임관시키자는 그로브스 장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1943년 1월 중순에 오펜하이머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육군 기지인 프리시디오(thePresidio)를 방문해 육군 중령 계급장을 받기 위한 준비를 했다. 그는 육군의 신체검사 기준치를 넘지 못했다. 육군 군의관들은 오펜하이머가몸무게가 58킬로그램으로 최저 몸무게보다 5킬로그램 적었고, 같은 키와 연령대의 정상 몸무게에 비해서는 무려 12킬로그램이나 적게 나간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그가 1927년부터 "만성적인 기침"에 시달리고있었고, 엑스선 판독 결과 폐결핵을 앓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또한 허리 디스크에도 문제가 있다고 보고했다. 약 열흘에 한 번씩 왼쪽 다리가 저리는 증상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육군 군의관들은 오펜하이머를 "현역 복무 부적격"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그로브스가 이미 군의관들에게 오펜하이머를 반드시 받아들여야 한다고지시해 두었기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위와 같은 신체적인 문제들에도불구하고 현역 복무를 하겠다는 메모에 서명해야만 했다. 
신체검사가 끝나고 오펜하이머는 장교용 군복을 맞췄다. 여러 가지 동기가 있었다. 어쩌면 고급 장교용 군복을 입는 것이 자신의 유태인 혈통에 대해 의식하고 있던 사람에게는 마침내 사회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상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42년에 군복을 입는 것은 애국적 행위이기도 했다. 전국에서 젊은 남녀들은 국가를 지킨다는 상징적 의미로 군복을 즐겨 입기 시작했다. 오펜하이머의 심리는 단순했다. 윌슨은 "오피는 멍해 보이는 눈을 하고는 이번 전쟁이 이전의 전쟁들과는 다르다고 말하고는 했습니다. 이것은 자유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것이지요•••••. 그는 이 전쟁이 나치스에 맞서고 파시즘을 물리치기위한 위대한 노력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인민의 군대(people‘s army)와 인민의 전쟁(people‘s war)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요•••••.그의 언어는 변한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전에는 급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었고, 이번에는 애국적인 특징을 가졌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았던 것입니다"라고 회고했다. 
••••••
그달 말이 되자 그로브스는 절충안에 동의했다. 23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실험 단계에서는 민간인 신분을 유지해도 좋지만, 일단 무기를 실제로 시험해 볼 수 있게 되면 모두 군복을 입도록 했다. 로스앨러모스주변은 철조망을 둘러친 육군 기지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기술 구역‘안에서 과학자들은 ‘연구소장(Scientific Director)‘인 오펜하이머의 지시에따르게 되었다. 육군은 공동체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을 통제했지만, 과학자들의 정보 교환까지 통제하지는 않았다. 과학자들의 의견 교환은오펜하이머의 책임이었다. 베테는 오펜하이머가 육군과 벌인 협상 결과에 대해 "이제 외교 전문가가 되었군요."라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 P328

오펜하이머는 라비를 로스앨러모스로 불러오지 못했던 것을 크게아쉬워했다. 그는 라비에게 연구소 부소장 자리까지 제안할 정도로 그를 참가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라비는 폭탄을 만든다는 생각 자체에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1931년에 일본군이 상하이 교외에 폭탄을 퍼붓는 사진들을 보고 난 이후부터, 폭격이라는 방식에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26 폭탄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터져 버리지요. 도망갈 수가 없어요. 신중한 사람이건 죄 없는 사람이건 피할 수가 없습니다•••••. 독일과의 전쟁 도중에, 우리(방사선 연구소)는 폭격에 필요한 장비 개발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진정한 적이었고 심각한 문제였지요. 하지만 원자 폭탄을 이용한 폭격은 이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키는 것이었고, 나는 그 생각에 불만이 많았습니다. 나는 그것이 끔찍한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라비는 레이더라는 훨씬 간단한 기술로도 이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것이었다. 라비는 "나는 그 제의에 대해 심사숙고한 끝에 거절했습니다. 나는 ‘나 역시 이 전쟁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있어. 레이더 기술이 부족하면 질 수도 있어‘라고 말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27라비는 이에 덧붙여 자신이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않기로 결정한 보다 깊이 있는 이유를 댔다. 그는 오펜하이머에게 자신은 대량 살상 무기를 만드는 것으로 "물리학 300년의 정점"을 찍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닌 말이었고, 라비는 오펜하이머처럼 철학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비가 이미 원자 폭탄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데 비해 오펜하이머에게는 형이상학적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친구의 이의 제기를 외면했다. 그는 라비에게 "나 역시 이번 프로젝트가 ‘물리학 300년의 정점‘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네와는다른 생각을 하고 있네. 나에게 이것은 전쟁 중에 상당히 중요한 무기를 만드는 일이야. 나치스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을 것이라고생각해."라고 썼다. 오펜하이머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나치스보다 먼저 무기를 만드는 것이었다. - P331

라비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일하던 일군의 물리학자들의 "사기가떨어지고 있다."라고 경고하자, 오펜하이머는 20명의 프린스턴 대학교과학자들을 한꺼번에 로스앨러모스로 데리고 오기로 결정했다. 이것은상당히 중대한 결정이 되었다. 이들 중에는 로버트 윌슨뿐만 아니라,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이라는 명석하고 재기 넘치는 24세의 물리학자도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파인만의 천재성을 즉시 알아보았고, 그를 로스앨러모스로 데리고 오고 싶어 했다. 하지만 파인만의 아내 알린(Arline)은 결핵을 앓고 있었고, 파인만은 그녀를 두고 로스앨러모스로갈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파인만은 이것으로 얘기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1943년 겨울의 어느 날 그는 시카고에서 걸려 온 장거리 전화를 받았다. 오펜하이머였다. 그는 뉴멕시코 앨버커키에서 알린이 머물 만한결핵 요양소를 찾아냈다고 연락한 것이었다. 그는 파인만이 로스앨러모스에서 일하면서 주말마다 알린을 보러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파인만은 감동을 받았고 오펜하이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P3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