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가 쉽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이상을 조금이나만 알아갈 수 있는 책.


"세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네."
- P7

"네가 세상에 그 어떠한 것을 알고자 할 때에는 우선 네가 먼저그것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아라. 그런 다음에 너는 그 첫번 해답의 대칭점을 구한다면 그것은 최후의 그것의 정확한 해답일 것이니." - P8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난 사람은 끝끝내 불행한 운명 가운데서 울어야만 한다. 그 가운데에 약간의 변화쯤 있다 하더라도 속지 말라. 그것은 다만 그 불행한 운명‘의 굴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 P9

"신에게 대한 최후의 복수는 내 몸을 사바"로부터 사라뜨리는데 있다." - P33

어디로 가나?
사람은 다 길을 걷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디로인지 가고 있다. 어디로 가나?
광맥을 찾으려는 것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보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은 어둡고 험준하다. 그러므로 그들은 헤맨다. 탐험가나 산보자나 다 같이.
사람은 다 길을 걷는다. 간다. 그러나 가는 데는 없다. 인생은암야의 장단 없는 산보이다.
그들은 오랫동안의 적응으로 하여 올빼미와 같은 눈을 얻었다.
다 똑같다.
그들은 끝없이 목마르다. 그들은 끝없이 구한다. 그리고 그들은끝없이 고른다.
이 고름‘이라는 것이 그들이 가지고 나온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면서도 가장 나쁜 것이다.
이 암야에서도 끝까지 쫓겨난 사람이 있다. 그는 어떠한 것. 어떠한 방법으로도 구제되지 않는다.
선혈이 임리한 복수는 시작된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복수를.
피 밑 없는 학대의 함정 - - P66

사람은 살아야만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이고는 반드시 죽고야 말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라도 살아야만 할 것이다.
죽는 것은 사람의 사는 것을 없이 하는 것이므로 사람에게는 중대한 일이겠다. 죽는 것, 죽는 것, 과연 죽는 것이란 사람이 사는가운데에는 가장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ㅡ죽는 것은 사는 것의 크나큰 한 부분이겠으나 죽는 것은 벌써사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나 사람은 죽는 것에 철저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죽는 것에는 벌써 눈이라도 주어볼 아무값도 없어지는 것이다.
"죽는 것에 대한 미적지근한 미련은 깨끗이 버리자. 그리하여죽는 것에 철저하도록 힘차게 살아볼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실험이 아니다. 실행이다. - P95

"모든 사람의 일들은 불행이다. 그러나 사람은 사람이 그렇게도 불행하므로 행복된 것이다." - P99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 P268

우리 부부는 숙명적으로 발이 맞지 않는 절름발이인 것이다. 내가 아내나 제 거동에 로직을 붙일 필요는 없다. 변해할 필요도 없다.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면서 세상을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 P299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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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매뉴얼 - 라깡, 바디우, 일상의 윤리학
백상현 지음 / 위고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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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 이야기를 미래를 상상하는 소설의 형식 속에서도 말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고 그곳에서 벌어지게될 삶의 모습을 그려보는 인생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주인공이다. 그러나 미래의 이야기가 쓰이는 방식이란 현재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언어와 조건들에 의해 한정될 것이다. 미래를 상상하는 우리 자신의 머리를 지배하는 것은 현재 세계의조건들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래의 이야기를 그려낸다기보다는 현재 주어진 고정관념들을 변주하여 가짜 미래의 그림을 그려낼 뿐이다. ‘미래‘라는 단어가 가진 뜻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의미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미 도래한것들을 통해서만 미래의 소설을 쓴다는 의미에서, 미래의 시간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미래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주체, 즉 작가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를 지배하는 지식의 고정관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렇게 타자에 의해 상상된이야기 속에서 꼭두각시로서의 주인공 역할을 연기하는 것뿐이다. 마음속 가장 내밀한 공간에 존재하는 타자에 의해 연출된 환상-극의 역활을 연기하는 배우. - P29

만일 삶이 이렇게 모순된 추리소설의 형식에 불과하다면, 소외라는 개념은 우리 인간 존재에 보편적인 조건이 된다. 우리는 우리 삶의 주인이 아닐뿐더러 심지어 우리가 찾는 삶의 진리조차타자의 음모 속 미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진정한 삶은 어디에있는가, 진정한 진리는 무엇인가, 등등의 질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제되어야 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의 정체이다. 누가 지금 진리에 관하여 묻고 있는가? 분명그것은 무대 위 주인공인 나 자신의 음성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이 주어진 대사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말하고 있는 목소리의 진짜 주인공은 누구인가? 혹은, 나보코프의 그 유명한 질문, "누가 세바스천 나잇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가?(Who is speaking of Sebastian Knight?)" - P30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탐사해 들어가는 방식은 이렇게 말들의의미가 아니라 위치에 주목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분석이 궁극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환자의 담화가 지배받는 논리가 느슨해지는 순간 출현하는 공백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수한 균열이며 공간적 대상이지 초월적 의미가 아니다. 분석가는 바로 이러한 공백을 발견하고 이곳에서 구성된 환자와 대타자(부모)의 위치-관계를 파악해낸다. 그리고 이러한 파악을 환자 스스로 발견하도록 돕는다. 여기서 환자는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는 논리가 공백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나 어머니 혹은 그에 준하는 어린시절의 타자와 맺었던 욕망과 원한의 관계에 토대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혹은 그러한 욕망의 좌절에 대해서 복수하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의 구조로부터 모든 삶의 구체적 장애들이 출현하고있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이러한 근본적 환상의 구조는 그럴싸한 삶의 논리에 의해 은폐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환상의 주인공인 환자의 삶은 죄책감이나 원한의 무게로 인해 짓이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 P62

아이는 부모의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한다. 아이는 부모의 모든 것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동시에 부모의 욕망은 아이에게 불확실한 위협이기도 하다. 아이는 그것이 되고 싶지만 또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한다. 아이와 부모 사이에 흐르는 욕망의 흐름은 그렇게 언제나 불확정적이며 때로는 위협적이다.
이것을 도식적으로 설명하면, 아이에게 부모의 욕망이란 하나의 거대한 구멍 또는 공백과도 같은 형상으로 묘사될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 아니라, 무언가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음에도 질서가 부여되지 않은 카오스로서의 구멍, 블랙홀과 같은공백 말이다. 바로 이러한 공백에 대한 아이의 반응이 근본환상으로 구성된다. 아이는 부모의 욕망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지않기 위해 하나의 시나리오를 구성해내고 그것을 근본환상으로 간직한다. 그러나 이러한 시나리오는 아직 초자아의 검열을받지 않은 시나리오이다. 이것은 아이가 블랙홀과 관련하여 자신의 충동을 만족시키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며, 세계를 구성하는 도덕적 질서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리하여 출현하는 것이 최초의 시나리오에 대한 왜곡이며, 이것이 아이의 이후의 삶을 지탱하는 논리가 된다. 이와 같은 환상들, 억압을 야기하는 환상과그 억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근본환상 모두는 아이의 충동과 상실의 자리인 공백의 관계로부터 야기되는 산물이다. 따라서 모든 환상은 주체와 공백의 긴장 관계 속에서 출현하는데, 이러한출현에는 어떠한 보편적 범주론도 적용될 수 없다. 모두의 환상은 모두의 개별적 역사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증상과 원인(공백) 사이의 관계로서의 환상은 분석가가 환자 개개인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낼 수 없는 개별성의차원에 속한다. - P66

뒤샹의 레디메이드,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의 자동기술법에 의한 작업들을 보라. 이들의 작업은 허무의 지점인 공백에 다다른신경증 환자의 새로운 출발이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지를 증언한다. 레디메이드는 무심한 방식으로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선택하여 예술작품으로 간주하라고 하는 간단한 원칙을 따른다.
그런 의미에서 레디메이드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원칙 자체만을 예술로 간주한다. 어떠한 예술적 생산물이라 해도 그것은 이미 작가라는 주체의 전유물일 수 없다. 작가라는 존재가 이미 타자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의 부모와의 욕망의 관계의 산물이며, 시대의 지식의 산물이며, 그가 속한 미술사의 결과물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소변기를 작품으로 선택하는 노골적 과정에 속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 모두는 이미 레디메이드의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뒤샹과 고전주의자들의 차이는 오직 그것에 대해 인식하고 있음과 그렇지 않음의 차이뿐이다. 모든 것은 이미 만들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만듦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라 타자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말하는 담화는 타자의 담화이다. - P77

그렇다면 ‘환상의 횡단‘이 진정으로 완결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충동의 지대에서 주체가 행동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고흐가 만일 고전주의에 대한반항과 저항의 몸짓만으로 작품을 그려나갔다면, 그의 작품은고전주의에 대한 단순한 부정 그 이상을 넘어서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고전주의적 환영에 종속되는 가장 은밀한 방식이다. 그러나 고흐는 과거-지식에 대한 단순한 거부가아니라, 자신의 충동을 자극하는 (이미지의) 사건들에 주목하고,그것으로부터, 색과 질감과 형태로부터 새로운 현실의 창조를위해 나아갔다. 바로 이것이 프로이트와 라깡이 말하는 "그것이있던 곳에 내가 있게 하라! (Wo Es war soll Ich werden!)"라고 하는정신분석 실천의 핵심 아닌가? 만일 지금 나의 세계를 타자(그것)가 창조해낸 것이라면, 그것의 자리에 주체를 세우고, 새로운세계의 창조에 참여하라는 것 아닌가? 오직 ‘창조‘의 개념만이주체를 소외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따라서 거식증 여인에 대한 치료가 완료되는 순간이란, 그녀가 자신을 지배하는 근본환상의 충동 너머에 있는 충동, 우리의 사유가 작동하는 한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삶 또는 죽음 충동을 새로운 기표들과 연결시킬때이다.  - P78

자신의 삶에서주인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이미 존재하는 지식과 고정관념의 틀에 의존하는 경향을 따르고, 결국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한계에 갇힌다. 필자가 고정관념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지식의 체계이며 바디우가 백과전서적encylopédique 지식의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의 책에서는 고정관념이라는 단어를 더욱 선호할 텐데,왜냐하면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존재의 초과들을 길들이는 고정관념이라는 표현은 현실 공간에서의 소외를 더 잘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삶을 고정시키는 개념과가치들의 체계이며, 그곳에서 사건은 불가능하다. - P85

한편, 삶의 진정한 변화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고정관념은 우리의 존재가 다양성의 파도 속으로 떠내려가지 않도록 지켜주는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을 ‘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주입된 고정관념 덕분이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존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이러한 편견으로 보호받는다. 편견, 미리 판단된 ‘나‘에대한 지식은 나의 자아가 개방되어 흩어지는 위험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고, 한계 짓는다. 고정관념과 편견은 이렇게 말한다.
"자! 여기까지가 너다. 여기까지의 한계 안에서 살도록 해라." - P85

현실에서의 우리의 삶 또한 같은 난국에 처해 있다. 흔히 곤경에빠진 삶은 미로에 갇힌 느낌을 받게 하는데, 미로의 출구의 존재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미로 역시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자신의 인생에 관하여, 삶의 가치들에 관하여, 탄생에 관하여, 사랑에 관하여, 그리고 죽음에 관하여 던지는 우리의 질문들은 우리를 길 잃게 하고, 방황하게 한다. 그런데, 맑은 시선으로 이 모든 방황의 흔적들을 관찰할 수 있었던 사람이라면, 그궤적 속에서 하나의 패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반복의 패턴이다. 무엇인가가 끝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와 같은 깨달음의 순간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거울 미로의 현기증이다. 우리를 길 잃게 만들고, 출구를 욕망하게 만들었던 미로의 벽면은 모든 장소를 무한 반복하여 반영하는 유리 거울이었다. 현재의 모습은 어제의 나의 모습이었으며, 상상할 수 있는 미래의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오늘의 나는 나의 부모의 욕망의 반영이며 한 시대의 욕망의 반영이었다. - P105

따라서, 삶이 미로인 것은 의미의 제국, 고정관념의 경찰국가의관점에서 볼 때만 그러하다. 삶이 단 하나의 출구를 찾아야 하는수수께끼처럼 보이는 것은 오직 출구의 관점에서 미로의 중심을 조망할 때만 그러하다. 만일 자신을 지배하는 의미에 대한 집착, 고정관념의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면, 미로의 닫힌 벽은 외부로 개방된 숲이 된다. 그곳은 새로운 의미의 돌연변이들이 유령처럼 출몰하는, 낮도 아니고 밤도 아닌 아마존의 습지가 된다.
우리의 이성뿐만 아니라 감정까지도 지배하는 고정관념의 폭력이 미끼로 던지는 미로의 출구에 대한 환상을 포기하는 순간, 삶은 전혀 다른 지평을 향해 열리는 개방성이 된다. 더 이상 미로는 없다. 단지 정글이 있을 뿐이다. 그곳의 삶의 요소들이 이합집산 끝에 자유로운 부분들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무한히 뻗어나가는 멱집합의 초과로 가드 찬 무의미의 정글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정글을, 진정한 진정한 자유인 그것을 견딜 수 있는가? 우리는 진정으로 그것을 욕망하는가? 혹은, 정글의 잔혹함을 위해 미로의 안락함을 포기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가? - P111

삶이 의미를 상실하고 미로 속에 빠졌다고 생각하는 마음의 기원에는 선명한 의미가 그곳에 존재했다는 믿음,
우상일 뿐인 그것이 존재한다. 결국 삶의 지도를 미로로 만드는것은 출구에 대한 환상이었다. 선명한 의미로 충만한 세계로 나가는 출구, 미로의 끝인 그곳, 멘토들이 삶의 지혜를 가득 담은자기계발서와 성공사례들로 우리를 기다리는 그곳. 타자의 지식의 장소인 그곳. 지식으로 존재의 유령을 억압하는 바로 그곳.
출구에 대한 욕망이 결국 우리의 삶을 미로로 만드는 숨은 동력이었다. 우리의 존재가 유령처럼 다른 것이 되는 것을 차단하기위해 마련된 반복의 거울들은 출구에 대한 환상과 함께 주체의가능성을 제한하고 있었다. - P110

마지막으로, 고독의 절차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의미할 것이다. 자신의 주어진 조건들에 대한 사랑이 아닌, 알려지지 않은 가능성에 대한 사랑의 절차. 그것은 어떻게 나르시시스적 자아의 한계가 역설적으로 돌파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는 절차이다. 고독의 절차는 나의 자아라는 괴물을 숨 쉬게 하는 외부로부터의 공기 유입을 차단함으로써 존재를 진공의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며, 이때 질식당한 자아는 텅 빈 자리를 남기며 소멸한다. 고독의 절차는 바로 그 텅 빈 자리를 유지하는 욕망의 기술이다. 텅 빈 자리에 어느덧 사건의 유령이 들어와 떠돌수 있도록 소량의 환상만을 허용하는 기술. 그것은 소멸을 애도하는 기술인 동시에, 그러한 애도를 축제로 뒤집는 기술이다. 매번 새로 시작되어야 하는 세계를 위한 고독하지만 어쨌든 축제인 그것 - P124

우리의 생각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바다 위의 부표는 언어의 기표에 대한 은유였고, 사유는 하나의 기표에서 다른 하나의 기표로 옮겨 타면서 진행된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없는 상실된 사람의 이름에 매달린 채로 다른 기표로 옮겨 가기를 거부한다면 생각은 사유의수면으로부터 가라앉게 된다. 하나의 기표가 수면 위에 떠 있을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단어의 의미에 생각이 고립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한 사유의 고립은 의미화 연쇄, 즉 생각의 흐름 자체를 둔화시키는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는데, 그것이 우울증이다. - P182

자아라는 개념은 분명 우리 자신의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의 존재를 의심하는 지속적인운동 속에서만 가치가 인정되어야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질문을 멈추는 자는 자아의 (타자)도취적 쾌락을 맛볼 자격이없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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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베르크의 늑대인간 사형집행인의 딸 시리즈 5
올리퍼 푀치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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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마지막이라 아쉬우면서도 시원하다.
야콥퀴슬이란 야성미 넘치는 인물에 이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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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 라캉 - 무의식의 초대 지식인마을 34
김석 지음 / 김영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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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부분을 두번 읽어도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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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어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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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같은 전쟁중에도 위로같은 사랑은 필요하다.

사람들이 이 세상에 너무 많은 용기를 갖고 오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을 꺾기 위해 죽여야 하고, 그래서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 이 세상은 모든 사람을 부러뜨리지만 많은 사람은 그 부러진 곳에서 더욱 강해진다. 그러나 세상은부러지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만다. 아주 선량한 사람들이든, 아주 부드러운 사람들이든, 아주 용감한 사람들이든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고 공평하게 죽인다. 당신이 그 어디에 속하지 않는다 해도 이 세상은 당신 역시 틀림없이 죽이고말겠지만 특별히 서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 P385

이제 캐서린은 죽겠지. 내가 바로 그렇게 만든 거야. 인간은 죽는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어. 그것에 대해 배울 시간이 없었던 거야. 경기장에 던져 놓은 뒤 몇 가지 규칙을 알려 주고는 베이스를 벗어나는 순간 공을 던져 잡아 버리거든. 아이모처럼 아무 까닭 없이 죽이거나 또는 리날디처럼 매독에 걸리게 하지. 하지만 결국에는 모두 죽이고 말지. 그것만은 분명해. 결국 살아남는다 해도 종국에는 죽임을 당하는 거야.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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