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홍성광 옮김 / 을유문화사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요즘같은 나의 마음에 현실적인 도움이 되는 책.

얼핏 살펴보아도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는 고통과 무료함임을 알 수 있다.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사실상 진폭의 차이는 있더라도 이 두 가지 적수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양자가 이중의 적대 관계, 즉 외적 혹은 객관적 적대 관계와 내적혹은 주관적 적대 관계에 있는 데서 기인한다. 다시 말해 외적으로는 궁핍과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따라서 하층 계급 사람들은 궁핍. 즉 고통과 끊임없이 싸우는 반면 부유하고 고상한 세계의 사람들은 무료함을 상대로 끊임없이 때로는 정말이지 절망적인 싸움을 벌인다 - P29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니코마코스 윤리학(제7권 12장)에서 곁들여 말한 "분별 있는 자는 쾌락이 아닌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라는명제를 모든 삶의 지혜의 최고 원칙으로 간주한다. - P132

어떤 건물을 짓는 일을 돕는 건설 노동자가 전체 계획을 알지 못하거나 항시 그것을 의식하는 것은 아니듯, 하루하루의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도 자신의 인생행로와 그 성격의 전모에 대해 그와 같은 관계를갖는다. 이 인생행로가 가치 있고 의미 있으며 계획성 있고 개인적일수록 그것의 축소판인 평면도, 즉 설계도를 가끔 눈앞에 떠올려 보는 것이더욱 필요하고 유익하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말로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자신이 원래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즉 자신의 행복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난 뒤 두 번째,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 자신의 직업, 역할, 세상에 대한 자신의 관계가 어떠한지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중요하고 대단한 종류의 것이라면 인생의 설계도를축소판으로 바라보는 것이 다른 것 이상으로 힘을 북돋워 주고 격려해주고 분발하게 하며, 행동하도록 고무해 주고, 옆길로 빠지지 못하게 막아줄 것이다.
- P145

5) 삶의 지혜의 중요한 점은 우리가 일부는 현재에 일부는 미래에 쏟고 있는 주의의 비율을 올바로 조정해 한 쪽이 다른 쪽을 망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너무 지나치게 현재 속에서 살고 있다.
경솔한 사람들이 그러하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 미래 속에서 살고 있다.
불안과 걱정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다. 그 비율을 정확히 조절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노력과 희망에 의지해 미래 속에서 살고 항상 앞만 바라보며, 무엇보다 미래의 일만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해 조바심 내며 그쪽으로 급히 다가가는 반면, 현재는 거들떠보지도 즐기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 P146

다시 말해 지적으로 뛰어난 사람은 고독으로 이중의 이점을 얻는다.
첫째는 자기 자신과 함께한다는 이점이고, 둘째는 타인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이점이다. 모든 교제에는 많은 강제와 고충,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감안할 때 두 번째 이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혼자 있을 수 없다는 데서 생긴다"(성격』)라고 라브뤼예르‘가 말했다. 사교성은 우리로 하여금 대다수가 도덕적으로 떨어지고 지적으로 우둔하거나 불합리한 사람과 접촉하게 하므로 위험하면서도 해로운 경향을 가진 것 중 하나다. 비사교적인 사람이란 그런 사교성을 지닐 필요가 없는 사람이다. 사교가 필요하지 않을만큼 많은 것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큰 행복이다.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고뇌는 사교노 인해 생기기 때문이다. - P161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를 또한 불에 비유할 수 있겠다. 현명한 사람은 적절한 거리를 두고 불을 쬐면서 어리석은 자처럼 불에 손을 집어넣지 않지만, 어리석은 자는 그렇게 해 화상을 입고 고독이라는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서는 불이 타고 있다고 탄식하는 것이다. - P170

우리는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보면 곧잘 ‘이게 내 것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 대신에 가끔 "이게 내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말은 우리가 지니고있는 것을 잃고 나면 어떤 기분이 들까 하는 측면에서 바라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잃어버리는 것은 재산, 건강, 친구, 애인, 아내, 아이, 말,개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대체로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러한 것의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반면에 여기서 권유한 식으로 사물을 바라보면 우리는 그러한 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실에 즉시 예전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온갖 대책을 강구할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을 것이고, 친구를 화나게 하지 않을 것이고, 아내의 정조를 시험하지 않을 것이며, 자식들의 건강에 유의할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억지로 유리한 방향으로 생각해 우울한 현재를 밝게 하려고 하거나 신기루와 같은 수많은 희망을 생각해 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희망은 환멸을 품고 있어서 냉혹한 현실에 산산이 부서지면 환멸을 피할 수 없다. - P180

15) 우리와 관계되는 일이나 사건은 완전히 따로따로, 아무 질서나상호 관계도 없이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즉 그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이 복잡하게 뒤섞여서 나타난다. 그러니 그러한 사정에 보조를 맞추려면 우리도 그런 문제를 두서없이 생각하고 염려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한 가지 문제를 처리할 때는 다른모든 문제에 구애받지 말고 그 일에서 벗어나 모든 문제를 그때그때 처리하고 즐기며 감내해야 한다. 즉 다른 문제에는 전혀 개의치 말아야 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고의 서랍 중에서 한 개를 열 때는 다른 모든것을 닫아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무겁게 짓누르는 하나의 걱정거리 때문에 현재의 사소한 즐거움을 위축시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밀어내지도 않으며, 하나의 중요한 일을 걱정하느라 많은 사소한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특히 문제를 차원 높고 고상하게 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개인적인 일이나 사소한 걱정거리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거나 사로잡혀 그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통로가 막혀서는 안 된다. - P181

인간은 뭐든지 다 잊을 수 있지만 자기 자신만은, 자신의 본질만은망각할 수 없는 법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어떤 내적인 원칙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성격이란 절대로 교정할 수 없다. 그런 원칙에 의해 인간은같은 상황이 되면 언제나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은 소위‘의지의 자유에 관한 나의 현상 논문‘을 읽고 미망에서 깨어나길 바란다.
그 때문에 절교한 친구와 다시 화해하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 친구는기회가 생길 때마다 절교의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행동을 더욱 팬팬스럽게 자신이 상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임을 몰래 의식하면서 다시되풀이할 것이다. 해고했던 하인을 다시 고용할 때도 마찬가지 상황이발생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상황이 변했는데도 예전과 같은 행동을 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바뀌면 신속하게 신조와 태도를 바꾼다. 인간의 의도적 행위는단기 어음을 끊으므로 우리 자신도 단기적 시각을 가져야 어음 인수를거절하지 않게 될 것이다. - P204

47) 인간의 삶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더라도 언제나 같은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 때문에 오두막이든 궁정이든, 수도원이든 군대든 어디서나 본질적으로는 같은 삶이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험이든, 행운이나 불행이든, 아무리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해도 과자와 같은 것이다. 과자의 형태나 색깔이 아무리 다양하다 해도 모든 것은 하나의 반죽으로 만들어져 있다. A에게 일어난 일은 B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과 비슷한데, 그것은 A가 이야기하는 말을 듣고 B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비슷하다. 또한 우리의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은 만화경 속의 그림과 같다. 돌릴 때마다 다른 그림이 보이는 것 같지만 눈앞에 있는 그림은 사실 언제나 같다. - P223

청년기 입장에서 보면 인생이란 무한히 긴 미래이고, 노년기 입장에서 보면 매우 짧은 과거다. 그래서 인생이란 처음에는 사물이 오페라글
‘라스의 대물렌즈를 눈앞에 댄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접안렌즈를눈앞에 댄 것처럼 보인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면 늙어 봐야 다시말해 오래 살아 봐야 한다. 시간 자체도 청년기에는 훨씬 더디게 흘러간다. 그 때문에 우리 인생의 첫 4분의 1은 가장 행복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가장 긴 시기이기도 하므로, 어느 시기보다 많은 추억을 남긴다. 그래서 추억 이야기를 할 때는 누구나 그다음 두 시기를 합친 것보다 이4분의 1 시기에 대해 할 얘기가 더 많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년 중 봄이 그렇듯이 인생의 봄도 하루하루가 결국 성가실 정도로 길 것이다. 일년 중 가을과 인생의 가을이 되면 하루가 짧아지지만, 보다 명랑하고 한결같을 것이다.
그런데 노년기가 되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면 왜 그렇게짧아 보일까? 인생의 추억이 짧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생도 짧게 간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요하지 않은 모든 일과 불쾌한 많은 일이 추억에서 모두 떨어져 나가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우리의 지성이 일반적으로 매우 불완전한 것처럼 기억력도 마찬가지다. 습득한 것은 연습하고 지나간 일은 반추해야만 두 가지 일이 점차 망각의 늪에 빠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일과 불쾌한 일은 곱씹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한 일을 기억에 담아 두려면 반추가 필요하다. - P246

모든 불행과 모든 고뇌를 겪을 때 가장 효과적인 위안은 우리보다더 불행한 자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면 인간 전체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 P299

우리가 어릴 적에 닥쳐올 인생행로를 앞두고 있는 모습은 무대의 막이 오르기 전에 즐겁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다리는 모습과 같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는 행복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실제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을 아는 자가 볼 때 아이들은 때때로 아무 죄가 없는 피고 같을 것이다. 그 피고는 사실 사형 선고가 아닌삶의 선고를 받았지만, 판결 내용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럼에도 누구나장수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것은 다음과 같은 상태에 불과하다. "오늘은 고약한 날이다. 그런데 날마다 더 고약해지다가 결국 최악의 상황이올 것이다." - P308

인생이란 어떻게든 끝마쳐야 하는 힘든 과제와 같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인생을 견뎌 냈다"는 말은 멋진 표현이다. - P3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혹적인 것에 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결국 무의미의 존재로만 남게 되는 좀 어려운 이야기.

그것은 단지 맥스 워크라는 가상의 인물을 통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였다. 따라서 그가 창조해 낸 탐정은 현실적이어야 했다. 그가 쓴 책들의 특성상 그럴 필요가 있었다. 설령 퀸이 자신을 사라지게 했거나 이상하고 비밀스러운 삶 속으로빠져들게 했을지라도, 워크는 타인들의 세상에 계속 살아 있었다. 그리고 퀸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면 보일수록 그 세상에서 워크의 존재는 더욱더 확고해졌다. 퀸은 자기가 벌거벗은 채로 잘못된 곳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 반면, 워크는호전적이고 입심 좋고 어느 곳에서건 거리낌이 없었다. 퀸에게는 문제를 일으키는 종류의 일도 워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가득 찬 모험을 대수롭지 않게 헤쳐 나가서 그의 창조자에게 감명을 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퀸은 워크가 되고 싶었던 것도 아니 하다못해 워크처럼 보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책을 쓰는 동안에는 워크가 된 것처럼 가장을 함으로써, 자기가 그러려고만 한다면 마음속으로나마 워크처럼 될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앞으로써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날 밤 마침내 잠 속으로 빠져들면서 퀸은 워크라면 전화를 건 낯모르는 상대방에게 뭐라고 했을지 생각해 보았다.나중에는 잊어버렸지만 그날 밤 꿈에서 그는 혼자서 어느 방의 텅 빈 하얀 벽에다 대고 총을 쏘고 있었다. - P18

그 다음에, 가장 중요한 일로서, 내가 누구인지를 상기할 것. 내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명심할 것. 나는이 일이 게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반면, 명확한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를 들자면, 너는 누구인가? 그리고만일 네가 누구인지 알고 있다면 어째서 계속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할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자 내 이름은 폴 오스터다. 그것은 내 진짜 이름이 아니다. - P68

머릿속으로 간단한 트릭을 써서 이름을 요령 있게 살짝 바꿈으로써 그는 더없이 가볍고 자유로운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그것이 모두 일종의 망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히 어떤 위안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정말로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그런 척하고 있을 뿐이어서 언제든 원하기만 하면 다시 퀸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이제 폴 오스터가 되는 데 목적 - 그에게는 점점 더 중요해지는 목적이 있다는 사실 덕분에 퀸은 그런 제스처게임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었고 자신의 거짓말을 변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을 오스터라고상상하는 일이 곧 이 세상에 뭔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과 같은 뜻이었으니까. - P83

84번가의 어느 상점 앞에서 그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상점 전면에 거울이 하나 붙어 있었고, 퀸은 감시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자기의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에 그가 자신의모습을 보기 두려워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럴 생각이떠오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너무 골몰해서 자신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마치 그의겉모습이라는 문제는 아예 없어지고 만 것처럼. 그런데 이제, 상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놀라거나실망하지도 않았다. 그 모습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느낌도받지 못했다. 사실 그로서는 거울에 비친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알 수 없었으니까. 그는 거울 속에서 웬 낯선 사람을 보았다는 생각으로 그게 누구인지 알아 볼 셈에서 고개를 홱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 P185

누가 뭐래도 삶이란 우발적인 사실들의 총계, 즉우연한 마주침이나 요행, 또는 목적이 없다는 것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는 무작위적인 사건들의 연대기에지나지 않는 거니까.
- P333

나는 지금 욕망이 아니라 지식에 대해서, 두 사람이 욕망을통해 그들 각자가 혼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보다 더 강한것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알아낸 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지식이 나를 변화시켜서 실제로 내가 더 인간적인 기분을 느끼도록 해준 듯싶다. 소피와관계를 맺음으로써 마치 다른 모든 사람들과도 관계를 맺은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진실로 있어야 할 곳은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어느 곳이었으며, 설령 그곳이 내 안에 있다 하더라도 거기가 어디인지는알 수 없었다. 그곳은 자아와 비자아 사이에 있는 작은 틈이었고, 난생 처음으로 나는 그 어디인지 모르는 곳이 바로 이세상의 정확한 중심임을 알게 되었다. - P3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묵화

김종삼

물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 P36

별을 보며

이성선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은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걸어가던 거리
엉망으로 술에 취해 쓰러지던 골목에서
바라보면 너 눈물 같은 빛남
가슴 어지러움 황홀히 헹구어 비치는
이 찬란함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가난하랴 - P52

절정

박흥식

눈부신 슬픔의 구름이 사라지고
평원에 쓰러진 검은 소는 뜯겨나가는 제 몸과 사자 무리를 한눈으보고 있었다.
가는 비명마저 천천히 먹히우고
거기엔
재봉질하던 어머니와
일찍 집을 나가 오래 잊혀졌던 누이가 먼지도 없이 내렸다그것은 들판과 구름을 불태우면서 - P78

비가 오신다

이대흠

서울이나 광주에서는
비가 온다는 말의 뜻을
알 수가 없다
비가 온다는 말은
장흥이나 강진 그도 아니면
구강포쯤 가야 이해가 된다
내리는 비야 내리는 비이지만 비가
걸어서 오거나 달려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어떨 때 비는 싸우러 오는 병사처럼
씩씩거리며 다가오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그 병사의 아내가
지아비를 전쟁터에 보내고 돌아서서
골목길을 걸어오는
그 터벅거림으로 온다
그리고 또 어떨 때는
새색시 기다리는 신랑처럼
풀 나무 입술이 보타 있을 때
산모롱이에 얼비치는 진달래 치마로
멀미나는 꽃내를
몰고 오시기도 하는 것이다 - P92

업어준다는 것

박서영

저수지에 빠졌던 검은 염소를 업고
노파가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등이 흠뻑 젖어들고 있다.
가끔 고개를 돌려 염소와 눈을 맞추며
자장가까지 흥얼거렸다.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희고 눈부신 그의 숨결을 듣는다는 것
그의 감춰진 울음이 몸에 스며든다는 것
서로를 찌르지 않고 받아준다는 것
쿵쿵거리는 그의 심장에
등줄기가 청진기처럼 닿는다는 것


누군가를 업어준다는 것은
약국의 흐릿한 창문을 닦듯
서로의 눈동자 속에 낀 슬픔을 닦아주는 일
흩어진 영혼을 자루에 담아주는 일

사람이 짐승을 업고 긴 방죽을 걸어가고 있다
한없이 가벼워진 몸이
젖어 더욱 무거워진 몸을 업어주고 있다.
울음이 불룩한 무덤에 스며드는 것 같다 - P107

참 좋은 저녁이야

김남호

유서를 쓰기 딱 좋은 저녁이야
밤새워 쓴 유서를 조잘조잘 읽다가
꼬깃꼬깃 구겨서
탱자나무 울타리에 픽픽 던져버리고
또 하루를 그을리는 굴뚝새처럼
제가 쓴 유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왜가리처럼
길고도 지루한 유서를
담장 위로 높이 걸어놓고 갸웃거리는 기린처럼
평생 유서만 쓰다 죽는 자벌레처럼
백일장에서 아이들이 쓴 유서를 심사하고
참잘 썼어요, 당장 죽어도 좋겠어요
상을 주고 돌아오는 저녁이야 - P1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면서 갑자기 골목길을 돌아보니 막다른 길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 막막함이란.

그저 피고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들이기때문입니다. 그들이 매력적인 게 죄 때문은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적어도 나는 변호사로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는데, 모든 피고인이 죄가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장래에 받게 될 처벌이 그들을 미리 매력적으로 보이게 한다고도 할 수 없지요. 왜냐하면 모든 피고인이 다 처벌을 받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그들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소송, 즉 그들에게 제기되어 계속 따라다니는 그래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소송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이떤 피고인은 다른 피고인보다 더 매력적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피고인은 모두 매력적입니다. 저 한심한 인간 블로그조차도 그렇습니다."
- P229

" K가 말했다. "뭔가 잘못된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없이 모두 인간입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신부가 말했다. "하지만 죄 있는 사람들이 늘 그런 식으로 말하지요." "신부님도 저에 대해편견을 갖고 계신가요?" K가 물었다. "난 당신에 대해 편견을 갖고있지 않습니다." 신부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K가 말했다. "그러나소송에 관여하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소송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도 그런 편견을 주입합니다. 제입장이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실을 잘못 이해하고 있군요." 신부가 말했다. "판결은 어느 시점에 단번에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소송이 서서히 판결로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렇군요." K가말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 P264

나는 늘 스무 개의 손을 가지고 세상에 뛰어들고자 했으며,더구나 그다지 합당하지 않은 목적을 이루고자 그렇게 했지. 그건 잘못된 것이었어. 이제 일 년에 걸친 소송조차도 내게 아무런 가르침을주지 못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나? 정말 우둔한 인간이라는 이미지만 남기고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하는 것인가? 소송이 시작될 때 그것을 끝내려고 했으며, 소송이 끝나가는 지금 그걸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세상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라도 좋단 말인가? 나는 세상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걸 원치 않는다. 나의 이 길에 이런 반벙어리에다 아무것도 모르는 한심한 작자들을 동행으로 붙여준 거, 그리고 내가 꼭 해야 할 말을 스스로에게 할 수 있도록 해준 건 고마운 일이야. - P284

따라서 카프카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실존적인 상황의 서술, 광기의 전체주의로 흘러가는 현대 관료체제에대한 예견, 인간 존재에 대한 은유 또는 종교적 비유담 등으로 읽히며여러 해석을 낳았다. 이 소설은 비인간화된 현대 세계에서 인간이 느끼는 소외와 불안을 묘사한 ‘카프카적‘ (kafkaesk. 몽환적이고 위협적인 분위기, 악몽과 부조리를 연상케 하는 텍스트의 전형을 보여주면서 하나의 확정적인 해석을 거부하는데, "모든 문장이 ‘나를 해석해보라고 하면서 어떤 문장도 그것을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는 테오도르아도르노의 진단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카프카의 작품이 데리다.라캉, 들뢰즈 같은 후기구조주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들의 주어린 선택목을 받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 P3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세로 가는 길
정여울 지음, 이승원 사진 / arte(아르테) / 201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융은 성인에게도 마음의 학교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자신의 저서 곳곳에서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자신에대한 인식 없이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함에도, 그 깊은 자기 인식을 향한 고난의 발걸음을 먼저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자기 인식이 과학기술로 해결되는 문제였다면 인간은 어떻게든 길을 발견했겠지만, 진정한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 즉 인간의 심혼과 관계이기 때문에 선생이나 학교도 없고 교재나 강의도 없다고 자기 인식의 커리큘럼 따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두가 자기만의 방법으로 자기 인식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스승은 중요하지만 최종 단계의 자기 인식에서는 스승조차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 P250

융은 말했다. 인간은 빛의 형상을 상상함으로써 계몽되는것이 아니라 어둠을 의식함으로써 계몽된다고. 우리는 늘 탁월하고 훌륭한 것들에 이끌리도록 교육받지만, 추악한 것들, 암흑속에 있는 것들에도 마음을 돌려야 한다. 인간에게 추악한 본성이 있다는 것, 인간에게 사악한 욕망, 절망적인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의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영혼의 성장은 시작된다. - P28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