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의 혜택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9
크누트 함순 지음, 안미란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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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야를지나 숲으로 통하는 기나긴 길. 그 길을 낸 것은 누구였을까?
이곳에 처음으로 왔던 남자. 그 사람이었으리라. 그가 오기 전에는 길이 없었다. 그가 다녀간 후로 이런저런 동물들이 습지와 황야에 찍힌그의 희미한 발자국을 따라가며 그 길을 한결 또렷하게 만들었으리라.
그다음에 다시 어떤 라플란드인이 그 길을 발견하고는 이 벌판에서 저벌판으로 순록떼를 돌보러 다닐 때 이용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누구의소유도 아닌 주인 없는 넓은 공유지에 길이 생겨났다. - P9

셀란로 사람들을 보게. 자네들은 날이면 날마다 푸른 산을 바라보지. 인간이 만들어낸 물건이 아니고, 오래된 산, 우리가 알 수 없는 먼 옛날부터 서 있는 산이야. 그 산이 자네들의 벗이라네. 자네들은 그렇게 하늘과 땅과 함께 살아가고, 하늘과 땅, 넖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그 안에서 살지. 손에 칼도 필요 없고, 머리에도 무장을 하지 않고 삶을 살아가잖나. 모든 게 자네들에게 호의적이지. 보게. 자연은 자네와자네 가족의 것이야. 인간과 자연은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옳다고 인정해주며, 서로 경쟁하거나 어떤 이득을 얻기 위해 경주하는 대신 손을 잡고 가지. 자네들 셀란로 사람들은 그 한가운데에 있으면서 번창하고 있어. 산과 숲, 늪지와 목초지, 하늘과 별. 아. 이 모든 것은 아끼면서 찔끔찔끔 주어지는 게 아니라 차고 넘친다네. 시베르트, 내 말을들어보게. 자네의 몫에 만족하게나. 자네들은 사는 데 필요한 것, 바라는 것은 뭐든지 갖고 있지. 여기 태어나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내는 자네들은 이 땅에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네.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야.
하지만 자네들은 이 땅에 꼭 필요해. 자네들이 생명을 유지하지. 한 세대가 다른 세대를 잇고, 한 세대가 죽으면 다른 세대가 그 자리를 채워, 영원한 생명이란 바로 그런 거야. 그래서 자네들이 얻는 게 뭔가?
올바르고 정의로운 생활, 어디로 보아도 진실하고 솔직한 삶이지. 그래서 자네들이 얻는 게 뭔가? 셀란로의 자네들은 누구에게도 억눌리거나 지배받지 않으며, 간섭받지 않고 힘과 권력을 누리지. 모든 게자녀들에게 호의적이라니까. 자네들이 얻는 건 그거야. 따뜻한 가슴에안겨 어머니의 손을 가지고 장난을 치며 배부르게 젖을 마시지.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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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중 - 타인의 증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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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의 지독한 외로움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네가 걸으려고 하지 않으면 넌 언제까지나 걷지 못해. 영원히, 알겠어? - P52

-"젊은 날에 신을 섬기도록 해라, 불행한 날이 닥치기 전에, 그리고 네 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라는 말이 나오기전에."
- P97

루카스, 모든 인간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이 세상에태어났다는 걸, 그 외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독창적인 책이건, 보잘것없는 책이건, 그야 무슨 상관이 있나.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잊혀질 걸세. 그런 사람은 이세상을 흔적도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네. - 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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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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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신(神)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나는 오늘 이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텍스트 그 자체를 거부하였다. 나는 텍스트 다음에 있었고 모든 인간은 텍스트 이전에 있었다.
이건 오만이 아니다. 나는 이제까지 한 번도 내가 이 땅의 사람들과 같은 조건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조건이라는 말에서 다소의 불순함이 풍긴다면 기꺼이 태도라는 말로 바꿀용의가 있다.
나는 나를 건설한다. 이것이 운명론자들의 비굴한 굴복과 내태도가 다른 점이다.
나는 운명을 거부한다. 절망의 텍스트는 그러므로 나의 것이아니라 당신들의 것이다.
강민주의 노트에서 - P9

아무도 하지 않은 말, 아무나 할 수 없는 말, 나는 그런 미지의언어를 원한다.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이 세상에 새로움이란 없다‘는 식의 단언이다.
나는 낡은 생각, 낡은 언어, 낡은 사랑을 혐오한다. 나의 출발점은 그 낡음을 뒤집은 자리에 있다. 장애물이 나와도 나는 그것을 뒤집어 버린다.
세상은 나의 운동장이다. 절대 그늘에 앉아 시간이나 갉아먹으며 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
강민주의 노트에서 - P155

희극에 관해 수식할 때 사람들은 보통 ‘재미있는‘이란 형용사를 쓴다. 마찬가지로 비극에 대하여 말할 때 사람들은 슬프다거나 가슴이 미어진다는 표현을 한다.
희극은 재미있어야만 하고 비극은 눈물이 쏟아지도록 슬퍼야한다는 전제에 이미 합의하고 있는 이런 식의 관용적 어구들은상상력을 제한하는 데 단단히 한몫하고 있다. 그것은 너무나 단순해서 폭소나 눈물 이외의 어떤 다른 감정도 용납하지 않을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슬픈 희극도 있는 법이고 우스운 비극도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특히나 삶이란 이름의 연극무대에는 어떠한 전제도 의미를 갖지 않고, 때에 따라서는 어떠한 반(反)도 수용한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삶만큼이나 다양한 가치와 다양한 경험을 생산하는 것은 다시없다. 사람을 이야기하는 모든 예 - P209

술의 그 무한정한 넓이와 길이의 원동력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황홀한 비극이 있다. 역시 삶이란 이름의 무대에올려진 것이다. 희극에는 결코 황홀함이 없다. 희극이 허용하는감정 이동은 페이소스 정도가 고작일 것이다.
그러나 비극에는 오르가즘이 있다. 비극만이 절정에 이를 수있는 것이다. 절정이 없는 비극은 눈물의 배설에 도움을 줄 뿐 황홀함의 경지로 우리를 데려다주지 않는다. 천박한 비극이라면 우리는 이미 신물 나게 보아왔고 겪어왔다. 그것들은 때로 희극적이기조차 해서 누구의 눈물도 얻지 못하는 수가 많다.
비극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주인공인 비극 말이다.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에 맞춰, 비극을 상연하는 무대의 커튼은 스르르 위로 말려 올라간다. 죽음만이 그 커튼을 다시 내릴 수 있는 지겨운 공연. 앙코르도 받을 수 없는 단 한 번의공연.
할 수 있는 일은 이 비극이 황홀해지도록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 사람마다 가치가 다르듯이 황홀함에 대한 척도도 물론 다르다. 모두 자기 방식대로 내용을 완성하고 자기주장대로 형식을이끌어간다. 평가는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평가는 신이 내린다 해도 절정을 느끼는 것은 삶의 주인공인 바로 우리다. 황홀함은, 다른 모든 것은 다 절대자가 관장한다 하더라도, 그 감정만은 우리가 소유한다. 인간이 움켜쥘 수 있는 유일한 것. 그래서 모든 비극은 황홀감을 지향한다 - P211

모든 금지된 것은 유혹이고 아름다움이다. 죽음조차도.
_강민주의 노트에서 - P323

무대에서 다른 삶을 살아보는 일도 나쁘지 않다. 나를 떠나 전혀 다른 타인으로 변신하는 일이 이처럼 신선할 줄이야. 이건 연습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다. 연습은 언제라도 중단할 수 있지만,
공연은 마지막 대사를 발음할 때까지 중단할 수 없다. 마치 삶처럼.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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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상 - 비밀 노트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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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읽는 책.
전쟁중에는 감정보다는 생존을 우선시하게 되는 냉혹함이 앞서게 된다.
모든일을 생존과 직결시키는 두 쌍둥이가 무서울만큼 냉혹하다.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은 매우 모호하다. 그러므로 그런 단어의 사용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고, 사물, 인간, 자기 자신에 대한 묘사, 즉 사실에 충실한 묘사로 만족해야 한다. - 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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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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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 그 먼길을 떠나야 했을까.
그 모든 이유들이 꼭 헤프닝 같다.
그리고 윌리엄 포크너의 글들은 지금 읽어도 굉장히 세련된듯 하다.

듀이 델은 침대 옆에 서서 애디에게 부채를 부쳐주고 있다. 우리가 방에 들어서자 애디는 고개를 돌려 우리를 바라본다. 그녀는 이렇게 열흘 동안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죽음이 일종의 변화라면 그 변화를 막는 일조차 오랫동안앤스의 몫이었다. 난 어릴 적, 죽음을 단순히 몸의 변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 난 죽음을 마음의 변화로 이해한다. 즉 사별을 견디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 말이다. 허무주의자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하고,
근본주의자들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상죽음이란, 가족 또는 세들었던 사람이 집이나 마을을 떠나는 것이나 다름없다.
- P53

듀이 델은 천천히 일어선다. 그러곤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본다. 베개 위에 놓인 얼굴은 빛바랜 청동 주상 같고,
오로지 손만이 생명을 간직한 것 같다. 무기력하나 뭔가삐뚤어지고 꼬부라진 느낌. 모든 게 소진되었으나 아직도경계하는 그 무엇 때문에 피로, 기진맥진, 고통이 미처 떠나지 않은 듯하다. 어머니의 손은 마치 죽음 이후 영면의현실성을 의심이라도 하듯이, 결코 지속되지 않을 정지의순간, 즉 죽음을 경계하려는 듯하다. - P61

죽은 바람은, 마찬가지로 죽은 듯한 어둠 속에서 죽은 땅을 훑고 지나간다. 눈이 미치는 곳보다 휠씬 멀리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땅은죽은 채 누워 있다. 온기가 나를 감싸며 내 옷을 뚫고 속살에 닿는다. 내가 말했다. 당신은 걱정이 무엇인지도 몰라.나도 모른다. 난 내가 걱정하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걱정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울 줄도 모른다. 내가울려고 애쓰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뜨거운 흙 속에 아무렇게나 떨어진 젖은 씨앗이 된 것 같다. - P77

그래서 난 앤스를 받아들였다. 캐시를 임신했음을 알게되었을 때 나는 사는 일이 힘들다는 것을 실감했고, 임신이 바로 그 증거임을 알게 되었다. 말이란 전혀 쓸모없다는 사실도 그때 깨닫게 되었다. 말하려고 하는 내용과 내뱉어진 말이 전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캐시가 태어났을때, 모성이란 말은, 그 단어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 의해인위적으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아이를 가진 엄마는 그런 단어가 있든 없든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공포라는 말도 공포를 단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자존심이란 말도 마찬가지로 자존심이 없는사람이 만들어낸 것이고. 내가 매질한 것은 아이들이 더럽게 코를 흘리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입에서 나온 줄로 대들보에 매달려 흔들리고 스스로 꼬이면서도 서로 닿는 법이 없는 거미들처럼, 말을 통해 서로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오로지 회초리를 휘두름으로써 내 피와 그들의 피가 하나 되어 흐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의 고독이 매일 되풀이해서 깨지는 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캐시가 오기까지 나의 고독이 한번도 깨진 적이 없다는 사실을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앤스와 나눈 밤 역시 나의 고독을깨지는 못했다. - P198

그리고 그는 죽었다. 그는 자신이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아름다움, 하느님의죄에 대해 캄캄한 땅이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앤스 곁에누워 있곤 했다. 캄캄한 침묵의 소리였다. 그 안에서 말은행위가 되고, 또 다른 말이 되기도 했다. 말과 행위가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 사이에는 틈이 생긴다. 늘 그렇듯이 무서운 밤, 거친 어둠으로부터 들리는 거위의 울음소리처럼 언어는 떨어져내린다. 누군가 군중 속의 두 얼굴가리키며, 너의 엄마다 혹은 아빠다 말할 때, 정신없이 그얼굴을 찾아 헤매는 고아처럼, 말은 그것이 가리키는 행위를 찾아 헤맨다. - P201

너의 삶이 시간 속으로 풀려 간다면 그건 멋진 일이지.
그저 시간 속으로 환원된다면, 멋진 일이고말고. - P240

가끔씩 난 확신할 수가 없다. 누가 미치고 누가 정상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미치거나, 완전히 정상일 수는 없을 거다. 마음의 균형이 제대로 잡히는것이 쉽진 않으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 P268

그러나 누가 미치고 누가 정상인지 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지, 난 확신할 수 없다. 정상적이거나 비정상적인 갖가지 일을 저지른 후, 다시금 똑같은 공포와 놀라움으로 자신의 광기 어린 행위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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